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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의 헌신을 배우자! (마 26:6-13)

by 【고동엽】 2022.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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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의 헌신을 배우자! (마 26:6-13)

 

  ▶오래 전에 고재봉이라는 사람은 육군 중령 일가족 4명을 도끼로 쳐죽인 사람으로 무서운 살인자인데 고재봉이가 감방에 있을 때 그 옆에 아무도 접근하지 못합니다. 간수도 목사도 접근을 못합니다. 누구든지 '나 고재봉이야'하면 모든 죄수가 '형님'합니다. 사람 셋 죽인 사람도 '나 고재봉이야' '아이쿠 형님' 하고 고개를 숙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소포 하나가 그에게 왔는데 열어보니 성경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재수 없다'고 성경을 던졌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화장실 휴지로 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것을 뜯어 가지고 화장실에 가서 무슨 내용이 쓰여 있나 보다가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어느 날 한 감방 안에 있던 예수를 믿는 이인수 대령이 보니까 눈에 살기가 빠졌는데 하루는 "대령님, 나 같은 사람도 하나님이 받아줄까요?" 이 말을 들은 이인수 대령이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무슨 트집이 잡힐까봐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보니까 차츰차츰 태도가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무소에서 목회 하시는 목사님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목사님, 저 사람 신상에 변화가 온 것 같으니 와서 확인 좀 해주시죠." 목사님이 확인해보니까 달라졌습니다.
  "목사님, 나 같은 사람도 예수 믿으면 용서받을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받고말고요." 그래서 그가 예수 믿고 영접해서 그때부터 전도를 하는데 2천명의 죄수 가운데 1,800명이나 전도했습니다. 그가 전도하는 내용은 "앞길이 구만리 같은 놈들아 너희가 이렇게 살다가 갈 거냐? 이 감방에서 다시 나 같은 사람을 안 만나려면 너희들도 예수를 믿어야 한다."
  그의 전도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겠다고 손들고 나와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가 죽으면서 "내가 좀 더 일찍이 하나님을 알았다면 이렇게 악한 자가 되지 않았을 것을, 나에게 일찍 복음을 전해준 사람이 있었다면 이렇게 죽지는 않았을 텐데" 그는 찬송하면서 하나님께 갔습니다.
  고재봉과 같은 살인마에게 복음이 들어가니 그 인간이 변화되었습니다. 감옥을 변화시켰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어떤 사람이던지 들어가기만 하면 능력이 나타납니다.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놀라운 복음의 능력으로 로마를 변화시키던 바울의 위대한 사건이 우리를 통해서 일어나야 될 줄 믿습니다. 우리도 전합시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할/

  ▶성 어거스틴이 완숙한 신앙의 경지에 들어가지 전에 꿈을 꾸었답니다. 그가 꿈속에서 하늘나라에 갔는데 천국 문에서 천사가 심문을 합니다. "너는 누구냐?" "나는 어거스틴입니다. 그리고 나는 예수 믿는 크리스천입니다." 심문하던 천사는 자세히 어거스틴을 들여다보더니 "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네 머리 속에는 키케로의 철학 관념으로 가득 차 있고, 세상 것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고 하면서 나가라고 호통을 칩니다. 깜짝 놀라 눈을 떠보니 꿈이었습니다. 그 후 그는 철저한 회개를 통하여 그의 머리 속에 이론들을 다 버리고 그의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로 꽉 채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들의 마음속에 머리 속에 무엇으로 채워져 있습니까? 여러분들의 이론입니까? 생각입니까? 그런데 여러분! 인간의 이론과 생각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비판하고 불 신앙과 불순종으로 이끄는 통로가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은 예수로 충만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할/  ◀제목소개!▶

 

  이스라엘 나라에서는 자기 집에 손님이 오면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환영합니다. ▶평안을 기원하며 입을 맞춥니다. ▶발을 씻겨 주거나 발 씻을 물을 줍니다. ▶향을 피우거나, 향을 머리에 부어 발라 줍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베다니라는 마을에 가셨을 때 일어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다니에는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가 사는 동네입니다.
  바로 이 베다니 동네에 전에 문둥병, 나병으로 앓다가 예수님께 고침을 받은 시몬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 시몬이 자기 집에 예수님이 초청하여 식사대접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몬은 예수님이 오실 때 위에서 말씀드린 세 가지 중에 그 어떤 한가지도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이 때 한 여인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300 데나리온이나 되는 값비싼 향유가 담긴 옥합을 깨뜨리어 그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사건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은 주님께서 십자가를 눈앞에 두고 일어난 사건입니다. ▶2절을 보면 예수님은 자신이 언제 죽을지 그 때를 알았습니다.
  때를 아는 것처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말할 때가 있고, 침묵할 때가 있고, 나설 때가 있고, 나서지 말아야 될 때가 있습니다. 성경은 때를 귀하게 여깁니다.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로다" 지금은 자다가 깰 때입니다.
  사람에게도 때가 있습니다. 일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당당히 맞이해야 합니다. 초대교회 순교 사를 보면 형장으로 끌려가는 모습이 마치 신랑을 맞으러 가는 신부처럼 소풍가는 어린 학생이 도시락을 싸들고 기쁘게 떠나가는 것처럼 사형장을 향해 걸어갔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죽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본향으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
  예수님은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 되고 유월절이 지나면 죽음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3-5절을 보면 예수님의 예언처럼 죽음은 긴박하게 예수님 주위로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국민의 대표기관인 장로들이 모여서 예수를 어떻게 잡아 처형할 것인가를 의논하고 있습니다. 이런 숨 가쁘게 돌아가는 상황 속에서도 우리 예수님은 그 날에 일정에 들어가셨습니다.
  즉 베다니 시몬의 집에 심방을 가신 것입니다. 그때 그 시몬의 집에서 한 여인의 헌신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가리켜 13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라”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듯이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이름을 이 세상에 남기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이것을 공명심이라고 말하고 또 명예욕이라고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나무껍질에, 또는 억센 바위 위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놓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공명심은 인간이 사는 세계라면 어느 곳이나 있기 마련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명예욕이 뜻대로 안될 경우에는 힘으로, 돈으로라도 자신의 이름을 얻고 권력을 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매관매직이란 말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문에서 좀 색다른 주인공을 찾아보게 되는데 이 사람은 우리 주님께서 친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복음이 전파되는 곳곳마다 이 여인의 행한 일도 함께 전파되어 이 여인의 일을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여인은 어떤 여인입니까? 나폴레옹 같은 영웅입니까? 시저와 같은 정치가입니까? 잔다르크, 유관순 같은 애국열사입니까? 아니면 그 당시 빌라도 총독이나 헤롯왕의 영부인입니까? 아닙니다. 평범한 한 여인입니다.
  본문 기사는 4복음서가 공동으로 다루고 있는데 요12장에 보면 베다니 마을에서 마르다와 나사로와 함께 살고 있는 의로운 3남매 중에 하나인 마리아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평범한 한 여인의 이름이 왜 이토록 하늘에 별처럼 높이 빛날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내가 주를 높이면 주께서 나를 높여 주신다는 평범한 진리 때문'입니다. /할/
  이 여인은 가난했지만 주님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자신의 귀한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조건이 없습니다. 사랑은 사실 맹목적인 것입니다. 돈과 시간과 정열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조건 없이 맹목적으로 쏟아 부습니다.
  그런 행위는 어떻게 보면 다른 사람에게는 별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쏟는 사람에게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사랑하고 존경하는 그 대상에 대한 계산할 수 없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본문의 마리아는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옥합 뿐 아니라 순교해서라도 자신을 드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오 헨리'의 단편집에 <박사의 선물>이라는 작품이 있는데 그 작품 속에는 지극히 사랑하는 가난한 두 연인이 나옵니다. 그들은 사랑했기 때문에 돌아온 성탄절 날 무슨 선물을 할까 생각했습니다. 남자는 조상 때부터 물려받은 금시계를 팔아 여인의 머리핀을 샀고, 여인은 20년 간 길러온 자신의 머리를 잘라 시계 줄을 샀습니다. 즐거운 성탄절 날 남자는 사랑하는 여인의 머리에 핀을 꽂아 주려고 보니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습니다. 여인은 자신이 사온 시계 줄을 남자에게 채워주려고 하니 이미 시계가 없습니다. 자초지경을 안 두 여인은 더더욱 사랑의 맹세를 굳게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랑은 이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기쁨으로 희생하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마리아는 주님을 위해 옥합을 깨뜨려서 값비싼 향유를 주님께 쏟아 바쳤습니다.

 

1. 본문의 상황을 먼저 접근해 보자!

 

  요12:1절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제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이 6일밖에 남지 않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유월절 엿새 전이라는 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한사도의 이 의도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으로 인류의 속죄양으로 오신 분'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기념일, 즉 해방 절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구원을 받는 날을 의미합니다. 마귀가 지배하는 삶의 현장에서 해방 받아 예수 품에서 자유를 누리게 된 날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을 앞두고 베다니를 마지막으로 방문을 하셨습니다. ▶베다니는 아주 특별한 곳입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약 3km 떨어진 감람산 동편 기슭에 자리 잡은 작은 마을입니다.
  베다니는 '괴로움의 집, 슬픔의 집'이라는 뜻이 있는데 주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인생의 괴로움과 슬픔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곳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베다니는 이세상의 모습을 보여주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은 슬픔과 절망, 탄식과 죽음이 가득 찬 곳입니다. 이러기에 이 땅은 정말 생명의 주님이, 부활의 주님이 필요한 곳입니다. /믿/
  그런데 본문 6절에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라고 했고, 요12:1절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베다니에 사는 문둥이 시몬은 예수님께 치유 받은 자로 그 은혜를 보답하는 마음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고 있는 그 장소에서 일어난 사건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본문은 한 여인의 헌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헌신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정성을 다하여 믿음의 행위를 드러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허비나 소비는 누구나 다 할 수 있지만 헌신은 믿음이 있는 사람만이 가능하고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자만이 가능합니다. /믿/

 

2. 향유를 부은 헌신의 여인 마리아는 어떤 여인인가?

 

  이 여인의 이름은 요12:3절에만 나와 있습니다. 그녀의 이름이 누구냐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옥합을 깬 그 여인의 행동입니다. '순전한 나드'라는 말은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향유를 말합니다. 한 근이라고 했는데 다른 성경에는 한 옥합이라고 했습니다. 아마 부피로 따지면 한 옥합이고, 무게로 보면 한 근이었을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①마리아는 공개리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6절에 '시몬'의 집에는 예수님과 그 집주인 시몬 외에도 12제자가 있었으며 그 동네 유지들이 초청되었습니다. 마리아는 그 사람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서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일이 떳떳한 일이며 자랑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부끄러운 일은 드러내 놓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자랑스럽고 착한 일이라면 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을 위한 일이라면, 교회를 위한 일이라면 사회와 이웃을 위해 떳떳한 일이라면 여러분 우물쭈물 마시고 남의 눈치 볼 것 없이 서둘러 하시기 바랍니다.

  ②값비싼 향유를 부었습니다.
  본문 7절에서는 '매우 귀한 한 옥합'이라고 했지만, 막14:3절에서는 '값진 향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15:5절에서는 가룟 유다는 이 향유의 값을 300데나리온으로 쳤습니다.
  당시 화폐 가치로 치면 장정이 일년 동안 쉬지 않고 일해서 받는 월급에 해당하는 돈이라고 합니다. 당시 장정의 하루 일당이 한 데나리온 이었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의 결혼 풍속 가운데 혼수 준비중에 가장 귀한 것이 옥과 향유였습니다.
  아마 마리아의 어머니가 세상 떠날 때 딸에게 혼숫감으로 이 귀한 향유를 물려주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마리아가 부은 이 향유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 중 가장 귀한 것을 주님께 바친 것으로 사랑의 극치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란 나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셨던 하나님께 내가 드릴 수 있는 최선의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한 여자가 한 남자에게 그렇게 했다면 세상에서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하나님께 그런 행위를 했다면 그것은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위기는 예배의 위기입니다. 진정한 예배가 없다고 뜻 있는 사람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극장에 오듯이 성가대가 찬양을 얼마나 잘하나? 목사가 설교를 얼마나 잘하나? 내가 아는 사람이 왔나 안 왔나를 살핍니다.
  예배를 드리러 오는 사람보다 보러 오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여러분, 여기에 무슨 사건이 이루어지고 어떤 영적인 변화가 일어나겠습니까? 백날 천 날 예배드려도 하나님은 끄덕도 안 하십니다. ▶이 여인이 드리고 있는 것이 예배입니다. 최상의 존재에게 나의 최상의 것을 아낌없이 쏟아 바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의 기쁨과 감사와 감격을 이 여인만이 아는 것입니다.
  헌신한 사람만이 예배의 기쁨을 압니다. 사랑을 쏟아 부은 자만이 사랑의 감격을 맛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기를 원하십니까? 오늘 마리아처럼 최상의 것을 드린 사람은 하나님을 최상의 하나님으로 믿는 자입니다. 그러나 드리는 헌신도 없이 앉아있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을 시시한 하나님으로 믿는 사람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믿느냐에 따라 하나님은 우리와의 관계를 설정하십니다. 내가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도 적극적으로 오십니다. 내가 최선의 것을 드리면 하나님도 최고의 것을 주십니다. 그러나 내가 무관심으로 드리면 하나님도 그 사람에게 무관심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습니다. 잠8:17절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할/
  독일의 신학자 '본 회퍼'목사는 <하나님의 은혜를 값싼 것으로 취급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불치의 병으로 사경을 헤매던 서울대 박모 교수는 미국의 큰 병원에서 치료받고 6개월만에 완치했다고 합니다. 박교수는 병원 입원비, 수술비, 약값 등 엄청난 비용을 이마 살 한번 찡그리지 않고 병원 수납계에 지불했습니다. 그리고 퇴원하는 날 너무 기쁘고 감사해서 자신을 수술해준 의사에게 사례를 했고, 간호사들과 간병인 에게도 정성껏 사례를 했습니다.
  그는 병상일기에서 병을 치료해준 의사와 간호사들에게 아무리 큰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았으며 만나는 사람마다 다 새롭고 가진 것을 주고 싶은 흥분과 감격으로 귀가했다고 병상일기에 그가 기록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지옥 갈 내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뿐입니까?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오늘날까지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런 은혜 속에 살면서도 우리는 하나님께 싸구려 향유를 부어서 갚는다고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③오늘 마리아가 드린 향유는 순전한 '나드 향'입니다.
  나드 향은 인도에서만 나오는 최고급 향유입니다. 그런데 이 나드 향에 다른 것을 배합하면 본래의 향이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막14:3절에서는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헬라어의 '순전한'이란 말은 '믿을 수 있는'이라는 단어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그러니까 순전이라는 말은 믿음이란 말과 동일합니다. 제 아무리 큰일을 하고 큰 봉사를 해도 그 동기가 순수해야 하고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요즈음은 포장지에 붙여진 상표와 내용물이 다른 것이 너무 많습니다. '순 진짜 참 참기름집'에서도 순수한 참기름을 살 수 없는 것이 오늘의 우리의 현실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 향유는 불순물이 조금도 들어가지 않은 순전한 것입니다. 그것으로 마리아는 주님에 발에 붓고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의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었습니다. 이 행위는 메시아 되신 주님 앞에 자신이 죄인 됨을 고백하는 신앙의 위대한 고백입니다.

  ④옥합을 깨뜨렸습니다.
  막14:3절 '하'반절에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향유는 옥합에 담겨있습니다. 옥합을 깨야 향유가 흘러 넘칩니다. 옥합이 깨지지 않는 한 향유는 흘러 넘칠 수 없습니다.
  참된 예배는 깨지는 것입니다. 육신과 옛사람이 깨져야 하고 우리의 사고방식도 깨져야 합니다. 사람마다 옥합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옥합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옥합을 깨야합니다. 옥합이 깨지면 속 사람이 살아나고 생명이 흐르며 성령이 역사 하십니다. 치유가 일어나고 모든 어두운 세력들이 물러갑니다.
  예배는 향유가 흘러 넘치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예수님의 생명이 사람들의 심령 속에 흘러 넘치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옥합을 미련 없이 깨뜨렸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깨뜨려 드리는 헌신의 상징입니다.
  어떤 사람은 입으로만 오만가지 것을 깨뜨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옥합은 깨뜨리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훗날 깨뜨린다고 장담하고 약속만 합니다. 그러나 행함이 없습니다.
  본문의 마리아는 미련 없이 바쳤더니 동서양을 막론하고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인의 행한 일도 전파되어 이 여인의 일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할/

  ④마라아의 헌신은 어떤 헌신인가? 우리가 바로 배워야 합니다.
  ⑴능동적인 헌신입니다. 그 누구도 마리아에게 헌신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들은 마리아의 헌신을 비방했습니다. 마리아는 능동적으로 자원하여 헌신했습니다. 이 헌신이 우리 주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⑵최선을 다하는 헌신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께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를 <임산부가 애를 낳을 때 쓰는 힘>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⑶비방을 이긴 헌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보면 헐뜯고 비방하고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시험 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평가를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⑷이미 받은바 은혜에 감사하는 헌신입니다. 오라비가 죽은 지 4일이나 되었는데 예수님께서 살려주셨습니다. 마리아는 미래에 어떤 축복이나 은혜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 지난날에 받은 은혜에 보답하고 감사하여 헌신했습니다. 이 헌신은 어떤 조건을 내건 헌신이 아니라 받은바 은혜에 감사하여하는 순수한 헌신입니다.
  ▶창8:20절에 노아는 자기의 8식구를 홍수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크므로 방주에서 나오자마자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정결한 제물로 번제를 드렸습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은 잡니다. 하늘의 시민권 자요 생명 록에 우리의 이름이 기록된 자들입니다. 이 은혜가 보통 은혜입니까? 값진 헌신은 이미 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하는 헌신입니다. /할/

 

3. 가룟 유다를 조명해 봅시다!

 

  그는 예수님의 12제자 중의 한사람입니다. 3년 반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였지만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제자였습니다. 형식상 예수님의 제자였으나 본질적인 예수님의 제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과 관계된 것처럼 자신을 위장한 사람이었고, 예수님을 이용해 부를 축적하는 돈의 노예였습니다. 그저 돈이나 훔치는 재미로 예수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성경은 가룟 유다에 대해서 노골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유다는 마귀라고 기록하였고(요6:70), 예수님을 잡아줄 자요, 도적이었습니다(요11:4,6절).
  유다는 예수님의 사랑도, 대속의 죽음도 이해하지 못한 자였고, 은혜가 뭔지도 모르는 자였습니다. 은혜를 모르는 자는 주님께 드리는 것이 낭비요, 쓸데없는 일로 간주합니다. 은혜가 없는 자는 매사에 비판적입니다.
  이러한 유다는 마리아의 눈물겨운 사랑과 헌신의 대하여 비판적인 시각으로 마리아를 꾸짖고  자기 나름대로 논리를 세워 마리아를 공격했습니다. 가난한 자를 생각하는 척하면서 마리아의 선한 봉사를 격하시키는데 힘을 다했습니다. 그 비싼 향유를 팔면 삼백 데나리온이나 된다고 벌써 계산을 해놓고 있습니다. 아주 돈에 민감한 사람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마귀의 작전입니다. ▶그의 태도를 봅시다!
  ⑴분을 내었습니다. 화를 내었습니다. "어찌하여 향유를 이렇게 허비하는가?"하고 분을 내었습니다.
  ⑵책망했습니다. 비난했습니다. 나무랐습니다. "이 향유를 삼백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고 하면서 책망했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 대하여 깊이 알지도 못하면서 때로는 비난하고 책망하고 분을 내며 나무라기를 잘합니다. 자기들은 제대로 하지도 못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에 대하여 이렇쿵 저렇쿵 비난하기를 좋아합니다.
  이 여인은 자기의 가진 것으로 최선을 다하여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을 존경하며,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 여인이 옥합을 깨어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 행위를 보고 분노하고, 책망했습니다.
  유다의 논지는 그럴듯하고 합리적이고 설득력도 있는 양 보입니다. "300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일이지 왜 낭비하느냐?"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유다의 잘못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찾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 죄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그럼 유다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①다른 사람의 의로운 일을 시비하고 나섰습니다. 남의 일을 간섭하고 시비하는 사람은 자기의 할 일을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남의 하는 좋은 일을 질투하는 사람은 그 질투심 때문에 늘 마음이 편하지 못합니다.
  ②영적 가치를 돈으로 계산하는 사람입니다. 생명은 귀중하고 소중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영혼을 천하보다 더 귀하게 보십니다. 교회에서 하는 일은 영혼을 살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옥 갈 영혼들은 구원해 내는데 필요한 돈이라면 우리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물질입니다. 지금 세계는 천문학적인 돈을 들려 사들이는 마약 때문에 썩고 병들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수많은 영혼들이 지옥으로 굴러 떨어지고 있습니다.    ③유다는 동기가 불순했습니다. 요12:6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일러라."
  마리아는 순전한 마음으로 옥합을 깨뜨린 것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불순한 마음으로 옥합을 현금화하여 구제하자고 불평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토록 구제 열이 불타고 이론이 정연했던 가룟 유다가 무슨 짓을 했습니까? 결국 은 30냥에 눈이 어두워 자기의 스승인 예수를 팔아 넘기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는 양심에 가책을 받아 스스로 목을 매달아 자결하고 말았습니다. 비참한 운명으로 막을 내린 것입니다.
  여러분! 유다의 논리로 본다면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리는 것은 낭비였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마리아의 그 낭비 때문에 그의 신앙을 본받는 무리가 많고, 또 세상에는 그런 낭비 때문에 어두움이 걷히고 있습니다. /믿/
  어리석은 낭비 자는 동양에서도 있었고, 서양에서도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인도의 무저항주의를 부르짖은 '간디'입니다. 간디는 영국에서 최고의 학부를 나왔고, 자기만 원한다면 많은 재산을 모을 수가 있었고, 법률가로서의 일등 국민의 특권과 자유와 행복을 마음껏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안일과 행복한 생활을 집어 던지고 냄새나고 문명의 혜택도 받을 수 없는 조국 인도에 돌아가 평생 무명옷을 입고 굶으며 옥중에서 온갖 고초와 학대를 받으면서 인생을 허비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동족의 흉탄에 맞아 자기 인생을 무참히 허비하고 낭비했습니다.
  이런 어리석은 바보가 독일에도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다른 사람이 아닌 히틀러의 나치정권과 항거하여 싸우다 순교한 '본 회퍼'목사님이십니다.
  그는 40이 넘도록 결혼도 못하고 노총각으로 약혼만 해 놓고 옥중에서 이리 끌리고 저리 끌리다가 마침내 1945년 나치에 의해 사형 대에 올랐습니다. 그는 사형 대에 끌러가던 날 마치 신랑을 맞으러 가는 신부처럼, 소풍가는 어린 학생이 도시락을 싸들고 기쁘게 떠나는 것처럼 사형장을 향해 걸어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을 찬미하며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를 순교자의 길을 허락하심을 감사합니다." ▶만일 본 회퍼가 다른 지성인이나 성직자들처럼 진실이나 정의를 말하지 않고 나치에 아부하고 협력만 했더라면 그렇게 고생하고 처참하게 처형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역사는 인생을 이렇게 어리석게 낭비하는 이런 사람들 손에서 움직여지고 있고, 세워지고 있고, 빛나고 있습니다. /믿/

 

4. 예수님의 평가는 무엇인가?

 

  ①마리아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를 보십시요!
  10절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그 여자가 한 일을 '아주 좋은 일'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그 좋은 일이란 무엇입니까? 12절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진리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참된 예배는 십자가를 향하여! 예배의 중심은 십자가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리아는 어쩌면 예수님의 장례식을 잘 몰랐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이 십자가에 죽을 자신을 장사하는 사건이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서는 머리에 향유를 붓는 경우가 몇 가지 있는데, 첫 번째는 집을 방문한 손님을 최대로 환영하는 표시로 한 두 방울 떨어뜨립니다. 또 왕이 즉위를 할 때도 머리에 기름을 붓습니다. 그리고 제사장, 선지자로 세움을 입을 때에도 기름 부음을 받습니다.
  또 창28장에 보면 야곱이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돌베개를 제단 삼아 기름을 붓습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하는 것입니다. 또 장례식 때 시신 위에도 기름을 붓습니다. 이렇게 하여 얼마 동안의 부패를 방지하며 냄새를 제거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후 아리마대 요셉은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무덤에 안장할 때 예수님을 밤중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에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왔습니다.
  아리마대 요셉과 디고데모는 예수님의 시신에 향료를 바르고 고운 베로 감쌌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죽으면 그 시체에 향유를 바르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여인이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것을 마치 예수님의 장례를 위하여 향유를 부어 준비하여 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은 이 여인이 예수님께서 죽으실 줄 알고 그 죽음을 위하여 준비한 것은 아닙니다. 단순히 주님께 대한 극진한 사랑의 표현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인의 행동을 그 이상으로 평가하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것이 비록 작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께 드리면 주님께서는 우리가 드린 가치 보다 훨씬 더 귀하고 값있는 것으로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할/
  예수님께서는 한 과부가 성전에서 두 렙돈을 헌금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들 보다 더 많은 것으로 하나님께 드렸다고 말씀했습니다. 이 과부는 자기의 전 재산을 드렸기 때문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한 어린이의 도시락인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은 5000명을 먹이고 열 두 광주리를 남게 하는 이적의 불씨로 쓰셨습니다. 우리가 비록 적은 것이라 하더라도 주님께 정성껏 드리게 되면 우리 주님은 그것을 아주 귀한 것으로 받으십니다. /믿/
  ▶예수님은 마리아의 헌신의 행위를 자신의 죽음을 미리 예비한 것으로 칭찬하셨습니다. 우리도 미리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예배를 미리 준비하고, 헌금을 미리 준비하고,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신앙인 들이 되어야 합니다.
  준비한다는 것은 정성이요, 최고의 가치를 돌리려는 마음입니다. 마리아는 자기의 최고의 것을 예수께 드렸더니 그것이 바로 십자가로 연결되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예배의 중심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흘러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 예배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십자가를 향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흐르고 있습니까? 우리를 위하여 자기를 아낌없이 다 내어주신 주님의 그 사랑이 오늘 우리들의 마음속에 응답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란 십자가에 대한 보답이요, 십자가에 내 모든 것을 쏟아 놓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가 행한 일을 복음이 전파되는 곳곳마다 함께 전하고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13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믿고 의지하는 이런 헌신 자들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미국의 이야기입니다. 남북전쟁이 북군의 승리로 끝나고 아브라함 링컨과 스토우 부인이 만났습니다. 링컨은 흑인노예를 해방시키기 위하여 직접 전쟁을 일으킨 사람이고, 스토우 부인은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라는 책을 써서 전 미국사람들에게 흑인과 백인은 차별이 없다는 방향을 일으킨 사람입니다.
  링컨이 먼저 스토우 부인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너무나도 뜻밖입니다. 강인한 여성인 줄 알았는데" 그랬더니 스토어 부인이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이 소설은 제가 쓴 것이 아닙니다. 흑인들에 대하여 흑인들을 차별하는 백인들에 대하여 노여워하신 하나님께서 직접 쓰신 것입니다."라는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스토우 부인은 링컨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강한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는데 너무나도 부드러운 얼굴이시군요." 그렇게 이야기했더니 아브라함 링컨이 대답하기를 "부인 제가 싸운 것이 아니라 저는 하나님의 작은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이나 스토우 부인이나 모두 주님의 발아래 엎드린 겸손한 그릇들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발 앞에 엎드린 겸손한 그릇들을 통하여서 흑인 노예를 해방시키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일으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할/

  ②가룟 유다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일고의 가치도 없는 궤변으로 일축해 버리셨습니다. 길을 가는데 사람이 여보세요 하고 부르면 우리는 걸음을 멈추고 말상대를 해 주어야 하지만, 개가 짖는다면 그냥 가던 길을 가야 합니다. 개가 짓는데 돌아서서 "개님! 왜 짓습니까? 소원이 무엇입니까?" 개소리를 듣고 너스레를 떨고 있다면 그 사람은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가룟 유다는 자기가 무슨 자선 사업가인양 가난한자 운운하지만, 예수님은 세상에 가난한 자들과 비교될 수 없는 분이십니다. 11절을 보세요!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가난한자들을 돌보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은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들을 볼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 마리아가 한 행동은 그런 관전에서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여자는 예수님의 장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가장 현명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죽음을 준비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한 이 행동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행동보다 우선한다는 뜻입니다. 즉 사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룟 유다에 대한 평가가 24절입니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다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우리도 옥합을 깨야 합니다. 우리의 육신이 옥합입니다. 이 육신이 깨져야 우리 속에 있는 성령의 역사가 비로소 나타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병과 같은 우리의 육신을 너무나도 아끼고 사랑하고 치장하는 것을 너무나 좋아합니다. 쉬지 못하면 안 된다고 하고, 입지 못하여 무시당하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에 점점 멀어져 가게 됩니다.
  깨뜨려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깨뜨리는 훈련입니다. 자신을 깨뜨리지 않고는 절대로 주의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모세가 반석을 내려 칠 때 그 반석이 쪼개져 생수가 터졌습니다. 쪼개진 반석이 되어야  성령의 생수가 터집니다. /할/
  옥합을 깹시다. 그 옥합을 주님께 드리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  (2006년 2월 26일 대예배 설교)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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