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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가정! (창 9:18-27)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오늘은 어버이 주일로 예배를 드립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일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한 일입니다. 그 신비한 삶의 현장은 가정입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자랐고 그 속에서 온 가족들이 아옹다옹하며 살던 모습을 추억해보면 감사한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부모님이 아니었으면 내가 이 세상에 어떻게 태어났을까?
미국의 유명한 작가 '펄벅'은 <가정은 나의 대지이다. 거기서 나는 정신적인 영향을 섭취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정의 소중함을 아무리 강조해도 넘침이 없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은 이 세상에서 태어날 때 가정에서 태어나고, 가정에서 자라며 가정을 이루어 살고, 마지막 죽을 때에도 가정에서 인생을 마치게 됩니다. 그래서 가정은 우리 삶의 안식처요, 인생의 요람이며, 모든 삶의 보람을 얻는 지상천국입니다. 가정은 사업보다 중요한 것이요, 성공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며, 이 땅에서 업적을 이루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땅에서 성공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가정을 행복하게 만들어 살았다면 그 사람은 최상의 성공을 이룬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들의 가정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정의 실패가 무엇인가? 돈이 없는 것이 실패인가? 권력을 잡지 못한 것이 실패인가? 명예를 얻지 못한 것이 실패인가? 아닙니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지 못한 것이 실패입니다. 현대인의 최고의 비극은 가정이 파괴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 살겠다고 서약을 했는데 이제는 '성격 차이가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또는 '식어진 사랑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로 변경해야 할 상황이 되었습니다.
지금 매일 400여 가정이 무너지고 있다고 합니다. 오늘 이 사회의 모든 분야 중에서 가장 위협적이고 파괴적인 위기는 가정의 위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정은 우리 삶의 근거요, 터전입니다. 그래서 가정이 무너지면 사회가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면 국가가 무너지고 전 세계가 무너집니다.
▶부부의 소중함을 알기 위해 아담의 가정을 심방해 봐야 합니다. 여러분! 아담이 하와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내 갈비뼈로 만든 여자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여자를 이끌어 오셔서 "이 여자는 네 갈비뼈로 만든 여자다"라고 말할 때 아담은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가정생활은 신앙생활입니다.
교회에 와서 예배하는 것은 교회생활이요, 세상에 가서 사는 것은 사회생활이요, 가정에서 남녀가 사는 것은 부부생활입니다. 그러나 일생동안 부부생활로 끝나면 안 됩니다.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신랑과 신부로 만날 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아담이 깊이 잠들 때 하와도 그 안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담의 갈비뼈에서 하와를 빼내어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킬 때 아담도 살고 하와도 살았습니다. 같이 죽고 같이 살았습니다. 아내를 보면서 '내 갈비뼈로 만들었지'라는 믿음이 들어가야 됩니다. 이 믿음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남편은 자기 갈비뼈에서 나온 소중한 아내를 향해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옛날 아내에게 함부로 하던 권위주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옛날에는 남편들이 아내에게 함부로 해도 꾹 참고 살았지만 지금은 이혼 당합니다. 지금은 이혼신청을 여자가 더 많이 한다고 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20대는 포개어 자고, 30대는 마주보고 자고, 40대는 나란히 누워서 자고, 50대는 등 돌리고 자고, 60대는 어디에서 자는지 모르고 자고, 70대는 각각 죽으러 간다." 부부는 가능한대로 함께 자야 합니다. "목사님, 우리 남편 코고는 소리 때문에 천지가 진동하는데 어떻게 함께 잡니까?" 함께 골면 됩니다. 이것까지도 닮아야 됩니다.
부부는 두 몸이 한 몸을 이루는 비밀입니다. 그러니까 한 몸은 같은 감정을 느껴야 합니다. 아내가 아플 때 남편도 그 아픔을 몸소 체현해야 됩니다. 아내는 아픈데 남편이 나 몰라라 하고 있으면 안 됩니다.
엡5:33절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자기 갈비뼈에서 나왔기 때문에 제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또 남편을 경외하라는 말은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존경하라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정은 신앙생활을 성취하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믿/ 부부생활은 하나님께서 만든 신랑과 하나님께서 만든 신부가 만나서 사는 것입니다. 신랑과 신부는 하나님께서 재창조한 사람입니다.
성경은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하십니다. 남편을 보면서 주님을 본 듯 살다가 영원하신 주님을 만나러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하라"고 하십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아내는 주님의 신부입니다. 아내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렇다면 부부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절대로 갈라서면 안 되고 헤어져서도 안 됩니다. 끝까지 행복하게 살다가 주님께로 같이 가야 합니다.
마19:5-6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할/
▶그 다음에 우리의 가정의 위기가 무엇인가? 가정의 기본인 효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옛 철인은 '효는 모든 윤리와 도덕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윤리와 도덕의 근본인 효가 뿌리 채 흔들리고 있습니다. 자식들로부터 버림받은 노인들이 많다고 합니다. 집에 있어도 며느리가 점심을 주지 않아 점심을 굶는 노인들이 많고 자식들에게 매를 맞고 학대를 당하는 노인들도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학교에서는 학생이 교사를 폭행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왜 사회가 이처럼 어지러워진 것입니까? 그 이유 중에 하나가 가정에서 부모를 섬기는 효가 무너지면서 비롯된 현상입니다. 가정에서 자기 부모에게 불효한 사람이 학교에서 스승을 존경할 리 만무합니다. 그래서 가정은 엄청나게 중요한 곳입니다. 18세기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기븐'은 '로마 제국의 패망의 근본적인 원인의 하나가 가정의 파괴였다'고 말했습니다. 로마 제국의 찬란했던 역사가 무너져 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로마의 한 철학자는 '애국자여! 가정을 지키시오!'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성경 엡6:1-3절을 보자!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순종하라! 공경하라!'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순종하면 좋겠다.'는 권유형이 아닙니다. '마음에 있으면 순종할래?' 의문형도 아닙니다. '순종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선포형도 아닙니다. '순종하라, 공경하라' 명령형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하나님을 공경하라'는 말과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은 같은 원어로 하나님처럼 부모를 여기라는 명령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옛날에 한 임금이 시골로 행차할 때 모든 사람들이 임금을 보려고 몰려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마을에 살고 있는 늙은 어머니가 아들에게 <아들아! 나도 임금님 얼굴을 보고 싶다.>고 하자 아들은 어머니를 업고 70리를 걸어 길가로 갔는데 사람들이 많아서 어머니가 임금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아들이 엎드렸습니다. 어머니가 그 위에 올라가서 임금님을 보고 있었습니다.
임금님이 지나가다가 이 모자의 모습을 보고 임금이 아들에게 <너는 어떻게 그렇게 엎드려 있느냐?> <어머니가 임금님을 뵙고 싶다 하셔서 제가 모셔왔습니다. 그리고 안 보이신다고 하셔서 엎드렸습니다.> 임금이 <참으로 효자로고.> 말하고 그 자리에서 효자 아들에게 상을 후하게 주었습니다.
이 소문이 퍼졌습니다. 다른 마을에 아주 불효자가 아들이 있었는데 이 아들이 이 소문을 듣고 어머니를 강제로 업었습니다. 그리고 빨리 달려가서 그렇게 했습니다. 임금은 그 모습을 또 보았습니다. 임금은 흐뭇해하면서 행차를 멈추어 선 후 그 아들을 보고 <이 근방에는 효자도 많구나. 기특한 일이 로고.> 그 불효자도 효자의 말을 그대로 흉내내어 말하기를 <어머니가 임금님을 뵙고 싶다 하셔서 제가 모셔왔습니다. 그리고 안 보이신다고 하셔서 엎드렸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동네 사람들이 <아닙니다. 임금님. 저 놈은 흉내를 내는 것입니다. 불효자로 소문이 나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임금님을 껄껄 웃으면서 <효도는 흉내내는 것도 좋으니라.> 그리고 불효자에게도 상을 후하게 주었다고 합니다.
여기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옳으니라'고 할 때 이 말은 '당연하다'는 말입니다. 봄이 오면 눈이 녹고 꽃이 피는 것은 당연합니다. 5월이 되었는데 싹이 나지 않는 나무는 죽은 나무가 틀림이 없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첫 계명이란 말이 무슨 뜻입니까? 모세가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받을 때 두 돌 판을 받았습니다. 한 돌 판에는 1-4계명까지 하나님을 위한 계명을 받았고, 다른 돌 판에는 5-10계명까지 사람을 위한 계명을 받았습니다. 인간을 위한 첫 계명이 바로 <부모를 공경하라>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다른 계명들은 9가지가 다 '하지 말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이웃의 집을 탐하지 말라!> 그런데 5계명만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른 계명은 '말라'고 하고 그렇게 안 하면 저주가 선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를 공경하라는 5계명에는 <이는 네가 잘 되고 장수하리라>는 약속이 붙어 있습니다. 그래서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라는 말은 아주 중요한 계명이라는 뜻입니다. 부모 공경은 약속을 주신 중요한 계명입니다. 효는 첫 계명이요 축복의 약속을 주신 계명입니다. 어떤 약속인가? ▶형통의 복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면 <네가 잘 되고>라는 말씀대로 형통의 복을 받게 됩니다. ▶장수의 복입니다. 땅에서 오래 살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 왕을 내쫓고 자기가 왕이 되려고 했습니다. 심지어는 아버지의 후궁들을 범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압살롬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노새를 타고 도망하는 데 상수리나무에 머리가 걸리고 노새는 빠져나갔습니다. 요압이 가서 상수리나무에 매달려 있는 압살롬의 심장을 창으로 찔러 죽이고 말았습니다. 부모에게 거역한 자의 말로가 비참했습니다.
그러나 이삭을 보세요! 아브라함에게 어느 날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자 아브라함이 이삭을 묵자 이삭은 순순히 잡혔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아버지에게 순종하고 아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순종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하나님은 이삭을 성경 삼대 거부 중에 하나로 삼아 주셨습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면 모든 일이 형통하게 됩니다. 압살롬은 일찍 죽었지만 이삭은 장수의 복을 받았습니다. 압살롬은 청년일 때에 죽었지만 이삭은 180세까지 살았습니다(창35;28).
▶요즘 아버지들의 수난이 크다고 합니다. 이 시대의 아버지들은 점점 더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가족 안에서는 권위를 잃어버렸습니다. 일터에서는 자리가 언제 밀려나갈지 위태롭습니다. 사회에서는 존경받지 못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자존심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아내와 자녀들로부터 버림받는 아버지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지금은 아버지의 위기 시대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아버지들이 초라한 모습이라고 해서 아버지들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그래도 가정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젊음을 불사른 분들이십니다. 그러므로 아버지들을 존경해야 합니다. 여러 젊은이들! 언젠가 그대들도 부모가 됩니다. 지금은 어머니, 아버지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고 있지만, 언젠가 내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 때가옵니다. 안타깝게도 이 시대는 카네이션은 넘쳐나는데, 효는 사라져가고 있다는 것이 슬픈 일입니다.
▶효도도 때가 있습니다. 지나가면 못합니다. 저는 태진아의 사모곡의 가사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앞산 노을 질 때까지 호미자루 벗을 삼아/파전 밭 일구시고 흙에 살던 어머니/땀에 짖은 삼베적삼 끼워 입고 삶으시다/소쩍새 울음 따라 하늘가신 어머니/그 모습 그리워서 이한 밤을 지세움니다.//무명치마 졸라 메고 새벽이슬 맞으시며/한 평생 모진가난 차마 내신 어머니/자나깨나 자식 위해 신령님전 빌고 빌며/학처럼 선녀처럼 살다 가신 어머니/이제는 눈물말고 그 무엇을 받칩니까?/자나깨나 자식 위해 신령님전 빌고 밀며/학처럼 선녀처럼 살다 가신 어머니/이제는 눈물말고 그 무엇을 받치리까?》
▶중앙청 뒤쪽에 효자동이 있는데 그런 이름을 붙이게 된 이유가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집에 아들 며느리가 밭에 일 나간 사이에 그 아버지의 실수로 손자 아기가 이불 밑에 깔려 죽었는데, 마침 며느리가 점심 때 들어왔다가 그 사실을 발견하고, 시아버지가 그 사실을 알면 속상할까봐 얼른 죽은 아이를 들쳐업고 남편한테로 달려갔더니, 남편도 죽은 아들을 보자 할아버지의 마음을 상하게 한 '불효자식'이라고 야단치며 뺨을 냅다 한 대 쳤더니, 그 뺨을 맞고 죽었던 아이가 다시 살아났다고 합니다. 이 소문이 퍼져서 그 동네를 효자동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날, 부모를 양로원에 갖다 버리고, 관광 가서 버리고 오는 일이 일년에도 800여건이나 된다고 하니 얼마나 끔찍스런 일입니까?
▶부모에게 효도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①부모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잠23:22절 "너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효도의 기본은 부모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 해드려도 부모님의 말을 듣지 않으면 효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날, 사오정이 역사 시간에 자꾸 조니까 선생님이 야단쳤습니다. "사오정! 왜 그렇게 졸아!" "저 안 졸았어요." "그럼 안중근 의사는 누가 죽였냐?" 그러자 사오정이 "제가 안 죽였어요." 하더랍니다. 속이 터졌지만 요새 함부로 때릴 수도 없어서 아버지 모시고 오라고 해서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요새 사오정 군이 수업시간에 너무 조는데 집에 무슨 일 있나요? 안 중근의사를 누가 죽였냐고 하니까 자기가 안 죽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사오정 아버지가 깜짝 놀라며 "예! 걔가 요새 몸이 아파서 가끔 병원은 가지만, 절대 의사를 죽일 아이는 아닙니다." 잘 듣는 것이 축복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이고, 두 번째로 큰 축복은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입니다. 효도는 '잘 듣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②부모님을 즐겁고 기쁘게 해 드려야 합니다. 잠23:24절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부모님을 즐겁게 하고 기쁘게 하는 것은 큰 효도입니다.
⑴여행을 시켜 드려라! 옛날에는 부모님을 업어드리는 것을 가장 큰 효도로 생각했습니다. 한자의 '효'자에는 늙을 '노'자 밑에 '아들 자'자가 있습니다. 아들이 연로하신 어머님을 등에 업고 외출시켜 드리는 모습이 바로 효도라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여행 시켜드리는 것도 필요하고, 놀러갈 때 같이 모시고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⑵용돈을 많이 드려라! 부모님들이 가장 좋아하는 선물 1순위로 꼽힌 것이 10만 원짜리 수표였다고 합니다.
⑶밝은 웃음을 드려라! 웃음은 부모님에게 기쁨을 주고, 나 자신에게는 성공과 행복과 건강을 주는 귀한 축복의 도구입니다.
⑷자주 찾아뵙고 전화를 드려라! 왜 부모들이 치매에 걸립니까? 자식들이 너무 찾아와 주지 않고 자식들과의 대화가 너무 없으니까 스트레스 병, 화병, 외로움 병으로 치매에 걸린다고 합니다.
⑸형제들끼리 사이좋게 지내라! 형제간에 우애가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⑹부모님이 원하는 것을 해 드려라! ⑺자녀가 건강해야 합니다. 자녀가 건강을 잃으면 부모에게 큰 불효가 되고, 부모보다 먼저 죽으면 가장 불효라고 했습니다. 자녀가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잘 관리하는 것도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노아의 가정▶에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노아가 술을 많이 마시고 취해 있을 때 일어난 사건입니다. 때는 노아 홍수가 끝이 나고 방주에서 나와 열심히 삽니다. 20절에 보면 노아가 포도나무를 심었다고 했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노아의 방주가 머물렀던 곳 아라랏산이 인접해 있는 아르메니아지역 서북 편에는 넓은 야산지대가 있는데 이곳은 고대의 유명한 포도 생산지였다고 합니다. 농부인 노아는 홍수로 황폐해진 그 비탈 편편한 곳에서 홍수 후에 다시 포도농사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포도를 생산한 그가 많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 넘어져 있습니다.
포도주를 마신 배경에도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포도주를 담가 아름다운 색깔의 음료를 마시면서 "하나님, 물은 못 마시겠습니다. 이 물에 수많은 이웃이 빠져죽었는데 이것을 생각하면 어떻게 마실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생각이 나서 못 마시겠습니다. 그것보다는 부드러운 색깔의 포도음료를 마시겠습니다." 이런 내용의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1. 술 취한 노아의 모습을 보자!(21)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성경은 솔직합니다. 성경의 인물을 나열한 것은 인간 영웅전이 아닙니다. 노아의 충성과 순종을 보이면서 그러나 노아의 실수도 우리들에게 보이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누구라도 인생 스스로 의로운 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고, 누구라도 하나님께 버림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노아가 순종한 때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때요, 노아가 실수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한 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물꼬가 터지듯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마침내 돌이킬 수 없는 침윤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술 한 잔에 지옥 간다는 말이 아니라, 바로 그 한 잔의 술 때문에, 자신의 신앙과 양심이 허물어져 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①노아가 누구인가? 대 홍수에서 구원받은 노아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⑴노아는 여호와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창6:9절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⑵노아는 의인이었습니다. 창6;8절 "노아는 의인이요" 참으로 그 당시 죄악으로 관영된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의롭게 살았다는 말입니다. 세상이 온통 부패하여 졌는데 혼자서 의롭게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이 다 속화되었는데 혼자서 거룩함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러나 까마귀 때 속에 한 마리 백로처럼 의롭게 살았습니다.
⑶노아는 완전한 사람이었습니다. 창6:9절 "당세에 완전한 자라" 이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실수가 전혀 없는 사람이란 말입니까? 아니면 흠이 없는 사람이란 뜻인가? 원어의 뜻은 '곧게 서다. 견고하다, 마음이 변치 아니하다'는 뜻입니다. 또 '진실하다. 성실하다, 숨기지 않는다. 외식하지 아니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완전하다는 것은 상대적 완전을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보다는 완전하다는 말입니다. 노아는 당시의 사람들보다 곧게 생활했습니다. 마음이 이랬다저랬다 하지는 않았습니다. 거짓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진실하게 살려고 애를 썼습니다. 맡겨진 일에 성실했습니다. 눈가림만 하는 세상에서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외식하는 세상에서 꾸미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이런 점이 다른 사람보다 앞섰다는 말입니다.
⑷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입니다. 창6:9절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노아도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동행한다는 것은 요15:4절에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이것이 동행입니다.
⑸노아는 하나님의 명령 앞에 그대로 순종하는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창7:5절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⑹노아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입니다. 히11:7절 "믿음으로 노아는… 경고하심을 받아" 노아는 미래에 있을 홍수 심판에 관한 하나님의 경고를 믿음으로 받았습니다. (창6:5-7절/13-21절 참조)
⑺노아는 믿음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본 사람입니다. 히11:7절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았다"는 말은 아직 미래에 있을 홍수 심판을 보지 못했지만 믿음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120년 후의 장기 일기예보를 본 것입니다. 믿음은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합니다. /믿/
⑻노아는 믿음으로 할 수 없는 것을 한 사람입니다. 히11:7절 "믿음으로 노아는...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믿음으로 노아는 방주를 건조했습니다. 120년이 지나면 전 우주적인 홍수 심판이 있을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방주 안에 있는 자신과 가족이 구원받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노아가 방주를 건조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방주를 지을 수 없는 너무나 당연한 이유는 많이 있었습니다. 노아는 지금까지 한 번도 배를 지어본 경험이 없었습니다. 혹시 경험이 있었다고 하면 더욱 지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명령한 방주의 제도는 배의 구조로서는 도저히 맞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물 위에 뜰 수는 있으나 항해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장소 적으로 바다나 강가가 아니라 산 속이었습니다. 120년이란 너무나 오랜 기간이 노아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너무 큰 공사였습니다. 더욱이 힘든 것은 주위 사람들의 비웃음과 조롱이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노아는 할 수 없는 일을 했습니다. 창6:22절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 했더라"
⑼노아는 믿음으로 의에 후사가 된 사람입니다. "믿음으로 노아는…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의의 후사 곧 위대한 구속사 운동의 계승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위대한 신앙의 인물인 노아가 지금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이게 무슨 수치입니까? 여기 '벌거벗었다'는 말은 수치를 의미합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술이 문제가 됩니다. ▶나라마다 술에 대한 격언이 많이 있습니다.
▶독일: 물에 빠져 죽는 사람보다 술에 빠져 죽는 수가 더 많다. ▶미국: 인간의 두뇌에 알코올을 붓는 것은, 기계에 모래를 붓는 것과 같다. ▶이태리: 앞문으로 술이 들어오면, 뒷문으로 지혜는 달아나느니라. ▶희랍: 술집 주인은 술꾼을 좋아한다. 그러나 술꾼을 사위로 삼지는 않는다. ▶서반아: 술은 악마의 피니라. ▶프랑스: 술이 길면 목숨은 짧아지느니라. ▶한국: 술먹은 개.
②술이 주는 경고는 무엇인가?
⑴술은 의인조차도 실수하게 만듭니다. 노아가 살았던 시대는 '폭탄주'도 없었을 것이고, '뿅 주'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의인 노아가 얼마나 마셨는지 뿅 갔습니다. 노아가 쓰러져있는 그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참 추하기 짝이 없습니다. 술이 우리 인간을 이렇게 추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터키 속담에 <사람은 한 잔의 술에 귀여운 양이 되고, 두 잔의 술에 얼룩말이 되고, 세 잔의 술에는 사자가 되고, 네 잔의 술에는 어리석은 당나귀가 된다>는 말도 있습니다.
잠23:31절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그 포도주의 영향력이 32절에 "이것이 마침내 뱀같이 물 것이요 독사같이 너를 쏠 것이다". 33절에, "내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이요 네 마음은 망령된 것을 발할 것이다". 여기에서 "너희 눈에는 괴이한 것을 보일 것이며", 어떤 번역에는 "너희 눈에는 음녀, 음탕한 여인, 창녀가 보일 것이다" 이렇게 번역을 해 놓기도 했습니다.
그 다음 34절에 "너는 바다 가운데 누운 자 같을 것이요 돛대 위에 누운 자 같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바다 가운데 누워 있으면 어떻습니까? 돛대 위에 누워 있으면 울렁울렁, 비틀비틀, 흔들흔들 하는 것처럼 술 취한 모습을 여기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35절에는 "네가 스스로 말하기를 사람이 나를 때려도 아프지 아니하고, 나를 상하게 하여도 내게 감각이 없도다. 내가 언제나 깰까 다시 술을 찾겠다 하리라" 술에 한번 인박히고 술에 한번 빠지고 나면 술에 의해서 지배를 당하고 무감각해지는 상태를 잠언서 기자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역사적으로 보면 술로 인해 망한 사람들이 수없이 많이 있었습니다. 한국에 패가망신한 사람들은 다 주색잡귀에 능했습니다.
⑵술은 재앙을 불러들이는 원흉입니다. 술 취한 사람은 까닭 없이 다른 사람과 시비를 걸어 분쟁을 일으키기도 하고, 또 전혀 자신과 상관없는 분쟁에 말려들기도 합니다. 술로 인하여 이성이 마비되기 때문에 분별력을 잃고 횡설수설하며, 감정을 제어할 능력이 없어 난폭해집니다. 이유 없는 살인, 파괴 등의 광란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처럼 술은 인간을 범죄자로 만들며, 의지박약 자로 만들며, 인격 파산자로 만듭니다. ▶수많은 교통사고가 음주 운전자들에 의하여 일어납니다. 술은 이렇게 재앙의 아비입니다.
⑶술은 인간을 파렴치하게 만들고 인격을 파탄 자로 만듭니다.
술 취한 사람은 소뇌와 대뇌 모두가 마비되므로, 감각 기능의 혼란을 가져오고, 사고 기능과 언어 기능의 착란을 일으키게 된다고 합니다. 소뇌와 대뇌가 마비되어 정상 기능이 불가능해지면, 인간은 동물적 본능에 사로잡혀 극도의 이기주의자가 되고, 성적 욕정의 노예가 되어 버린다고 합니다. 그로 인하여 인격은 파탄하고 무례하고 파렴치한 인간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래서 고래고래 큰 소리를 지르고, 길거리에서 함부로 방뇨도 합니다. 결국 윤리 의식이 붕괴되어 술먹은 개라는 속담처럼, 그는 처신에 있어서 수치심도 자존심도 없는 자가 되고 맙니다.
⑷하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 갈5:21절 "술 취함과 방탕함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얼마나 무서운 저주인가?
여러분! 세상부귀영화 다 준다해도 하늘나라를 유업 받지 못한다면 이것은 비극 중에 비극입니다.
2. 아버지의 허물을 들춰냈던 함은 운명은?(23)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아들 함이 무슨 소리가 나서 이상하다 하고 열어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모두 벗고 코를 골며 장막에서 잠을 자고 있습니다. 못 볼 것을 보았습니다.
'보고'의 '히'로 '라아'인데, 이 말은 '지나가다가 우연히 슬쩍 본 것이 아니라, 흥미 있게 계속해서 주목했다'는 뜻입니다. 관심을 가지고 집중해서 보았다는 것입니다. 함이 우연히 아버지가 술에 취해 벌거벗고 누워 있는 장면을 보고 놀라서 후닥닥 뛰어나온 것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의 부끄러운 광경을 계속 지켜보면서 그 장면을 즐겼습니다.
이러한 함의 태도는 이웃의 실수를 즐기는 자세입니다. 의도적으로 아버지의 수치를 보고 밖으로 나가 두 형제에게 '염려된다'는 이름으로 고발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와주는 척 하면서 욕합니다. 걱정해주는 척 하면서 불을 지르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웃에 잘못되는 모습을 보면서 고소하게 생각하고, 기분 좋아하는 놀부 심보였습니다.
이웃이 당한 어려움, 부끄러움을 내 일처럼 여기며 도와줄 생각은 하지 않고, 그의 실수를 즐기는 것은 그 마음에 죄악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진정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고하매'라는 동사에는 이웃에 대한 염려가 전혀 들어 있지 않습니다. 이웃의 아픔은 안중에도 없고, 그저 재미있는 화재거리가 생긴 것에 대해 기뻐하는 모습입니다. "형님! 아버지 꼴 좀 봐! 가관이네! 내가 한심해서 못 살아! 노인네가 주책이지!" 그런 말입니다. 왜 함은 이렇게 아버지의 모습에 반발을 했는가? 이스라엘 전설에 나오는 말인데 함 자신이 술버릇이 나빴답니다. 그래서 매번 아버지에게 꾸중을 들었답니다. 너는 왜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시느냐? 늘 꾸중을 들었는데 오늘 보니 아버지 꼴은 더 한심하게 본 것입니다.
삼상1장에 다윗은 자신을 그렇게도 못 살게 굴던 원수 사울 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기쁜 소식이라며 동네방네 알렸을 것을 다윗은 좋아하기는커녕 통곡하며 애가를 지어 불렀습니다. 함의 태도와 아주 대조되는 다윗의 모습입니다.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이웃이 실수하고 안 좋은 일을 당했을 때, 그 일이 즐겁습니까? 고소합니까? 아니면, 애타하며 기도합니까?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함의 잘못이 무엇인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생명을 주신 아버지의 단 한번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저주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노아가 누구인가? 온 세상이 타락했을 때 홀로 고고히 서 있었던 의인입니다. 120년 동안 헌신하여 하나님께 충성하고 몸과 마음과 재물을 다 바친 하나님을 경외한 아버지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죽는 가운데서도 유일하게 살아 가족을 구원했고 그러한 위인 중의 위인이며 생명의 은인이며 더 나아가서 지금까지 가정의 모든 짐을 지고 나왔던 위대한 아버지이십니다. 오늘도 또한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자식들은 다 짝짝이 행복하게 살지만 노아가 그 후로 자녀를 낳은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 아내를 잃었던 것 같습니다. 외로운 분이요. 몸도 마음도 외롭고 지쳤습니다.
그래서 한잔 마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쓰러졌고 코를 골며 잤습니다. 그것도 자기 장막에서 잔 것입니다. 그런데 함은 그 아버지의 위대함을 다 잊어버린 체 자기 눈에 거슬리는 한 가지를 극대화해서 아버지를 험담하고 공격했습니다. 그 위대하고 거룩했던 아버지 모습을 능멸한 것입니다.
벌거벗고 자다가 아들에게 무시 받는 노아의 모습이 안쓰럽지 않습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당대의 의인이요, 거룩한 모습으로 우뚝 서 있던 태산 같은 아버지였는데, 오늘 초라한 모습으로 누워 자고 있습니다. 이 모습이 우리네 늙은 부모들의 모습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옛날에는 멋지고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늙고 보니까 초라해 졌습니다. 이것이 늙어 가는 부모의 현실적인 모습입니다.
▶함은 단 한번의 아버지의 실수를 덮어주지 못하고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24-25절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한마디로 저주받은 인생이 되어 대대로 종(노예)로 산다는 것입니다. 이 저주 때문에 함은 흑인의 조상이 되어 아프리카에서 뿌리를 내렸습니다.
지금도 함의 후손들은 저주를 받아 굶어죽고 노예로 살고 에이즈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여기 함을 '가나안의 아비'로 소개하고 있는데 이것은 의도적으로 가나안이 저주를 받아야 그의 후손은 그때부터 계속적으로 셈의 자손 이스라엘의 지배를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함족인 가나안은 가나안 땅의 칠족중의 하나입니다.)
후에 출애굽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들이 들어가는 가나안은 어떤 땅이냐를 설명함에 있어 <가나안이란 함의 아들 가나안이 조상 된 곳, 그의 큰 잘못이 영적인 타락과 우상 숭배의 기질이었는데, 그것이 가나안 민족의 특성이다 그러므로 조심하라고 하는 경계의 의미로 쓰여진 것>입니다. 한마디로 함은 불효하다가 저주를 받아 흑인의 조상이 되어 영원한 종으로 살게 된 것입니다.
3. 아버지를 공경했던 두 아들의 모습을 보자!(23)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뒷걸음질쳐서 조용히 아버님의 위에 옷을 놓아드리는 그 자세!, 이것이 공경이며 이러한 마음이 없는 효도는 가짜입니다.
실수했어도 내 아버지요 건전한 정신으로 계실 때도 내 아버지입니다. 특히 어려웠을 때 허물을 가리어 드리고 다시금 권위를 회복케 해드려서 그분의 지도를 받겠다는 기본적인 예의와 권위인정의 태도가 큰 축복을 누리게 했습니다. 오늘날 권위에 대한 태도의 상실 때문에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회윤리의 근본이 무너지는 일이요, 권위를 부인하는 자 곧 효도하지 못하는 자식들에게도 심히 불행한 일입니다.
여기에서 '어깨에 메고'와 '덮었으며'라는 동사를 주목해야 합니다. '어깨에 메고'는 히브리 사람들의 문화를 나타내는 말로 언제나 봉사하는 종의 태도를 표현한 말입니다. 무슨 말인가? 아버지가 실수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아들은 그 실수를 통해서도 아버지를 주인으로 섬기겠다는 표현입니다.
'덮었으며'에서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잘못을 덮어줍니다. 아버지가 실수는 했지만 아버지는 아버지인 것입니다. 여기서 아버지의 인격을 보호하려는 아들들의 조심스러운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런 귀한 태도는 아버지를 존경하는데서 나옵니다. ▶여러분은 이웃의 실수를 어떻게 바라봅니까? 함과 같이 상처를 들어내어 더 아프게 만듭니까? 셈과 야벳처럼 실수를 덮어주고 사랑으로 감싸주십니까?
셈과 야벳처럼 상대의 실수를 사랑으로 감싸주시기 바랍니다. 이는 그 결과가 저주와 축복으로 나뉘기 때문입니다. 또한 야벳과 셈은 함을 야단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충고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남을 지도하려 합니다.
이들은 문제를 덮으므로 문제가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를 고발하게 되면 문제가 문제됩니다. 우리는 상대방의 허물을 덮어주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이 많은 부모의 허물을, 약한 아내의 허물을, 철없는 남편의 허물을, 아무것도 모르는 자식의 허물을 덮어주고 모르는 척 하면 때가 되면 압니다. /믿/
▶부모를 공경한 두 아들들이 어떤 축복을 받았는가?
①셈이 받은 복입니다. 26절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이는 셈족 곧 이스라엘이 참 종교의 전파자가 되리라는 의미입니다. 셈은 동양인의 선조가 되어 종교적인 복을 받았습니다.
②야벳이 받은 복입니다. 27절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서양인의 선조가 되었고, 이는 야벳의 후손 곧 백인들이 셈의 후손인 유대인들이 전한 그리스도를 믿고 축복 받을 것을 뜻합니다. 그 예가 미국이요 영국입니다.
4. 우리의 가정을 어떻게 가꾸어야 하는가? (골2:6-7)
가정의 근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이 가정을 만드셨습니다. 그 가정을 깬 아담으로 인해 세상은 절망으로 변했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가정은 불완전하여 깨어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으로 가정을 세워야 합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⑴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주로 받는 가정을 건설하자!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주로 받았다'는 말이요, 예수를 구주로 영접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나의 구원자인 것으로 알고 주로 믿었다는 뜻이요,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절대 주권자로 인정하여, 그 분의 말씀 앞에서 절대 순종하며 충성하겠다는 종 된 의지를 표명하는 뜻이 들어 있고, 또 예수님과 함께 살겠다는 뜻이고, 주님을 내 심령 속에 모셨다는 고백이며, 주님이 나의 주인이 되셨다는 말입니다.
전에는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 멋대로 내 고집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님이 나의 주인이 되시기 때문에, 내 뜻대로 살 수 없고 주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믿/
⑵예수 안에서 행하는 가정을 건설하자! '그 안에서 행하라'는 말은 예수 안에서만 생각하고, 예수 안에서만 행동하고, 예수 안에서만 말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그런 삶'을 의미합니다. /할/
⑶주안에 뿌리를 박는 가정을 건설하자! 왜 뿌리를 박아야 합니까? 그렇지 않으면 그 나무는 열매를 맺지 못하고 죽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뿌리가 있는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영양분을 공급받기 위해서이고, 또 하나는 뿌리가 있어야 나무가 든든히 서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뿌리가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뿌리는 말씀과 기도와 봉사입니다.
⑷주안에서 세움을 입는 가정을 건설하자! 신앙생활은 신령한 건축 생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에다 신앙의 집을 지으므로 믿음이 수시로 바뀌어져 버립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감정에다 신앙의 집을 짓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기분에다 신앙의 집을 짓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지식에다 신앙의 집을 짓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의 견고한 기초는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어떤 철학적인 이론이나 신학적인 논리, 또는 하루에도 수 십번 변하는 자신의 감정이나 체험에 신앙의 기초를 두게 되면, 어느 날 반드시 무너지게 될 것이지만, 세상이 변하고 세월이 지나도 견고하여 변함이 없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초 위에 우리의 신앙을 세울 때, 그것은 영원히 견고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⑸감사함을 넘치는 가정을 건설하자! 감사는 또 감사를 낳은 씨앗입니다. 진정한 감사는 기적을 불러일으킵니다. 문제의 문이 열립니다. 꿈꾸는 것같이 이루어집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축복을 받되 계속적인 축복을 받습니다. 감사라는 것은 현재 받은 축복을 깨닫는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축복은 감사의 문으로 들어오고 불평의 문으로 나간다'고 했습니다. /할/ (2006년 5원 14일 어버이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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