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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복음서 녹취 12

by 【고동엽】 2022. 3. 27.

복음서를 보시면 예수님은 무리와 제자들이 함께 있을 때는 비유로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무리가 빠지고 제자들만 남게 되었을 때 그 비유를 해석해 주십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청중들로 하여금 알아듣기 쉽게 하기 위해서 비유로 말씀하셨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가끔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비유라는 말은 알아듣기 쉬운 말이 절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비유로 말씀하시고 나서 항상 마지막에 뭐라 말씀하십니까?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라고 하십니다. 비유라고 하는 것은 들을 귀 있는 자만 들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어에서 듣는다는 말은 순종한다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누가 비유를 이해할 수 있는 거냐면 순종하고자 하는 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이 무리와 제자들이 함께 있을 때는 비유로만 말씀하셨을까요?. 예수님 주위에는 항상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가 무리이고 또 하나가 제자들입니다. 무리라고 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예수 주위에 항상 있습니다. 왜 예수 주위에 있냐면 예수를 통해서 내가 기대하는 어떤 이익을 얻고 싶은 겁니다. 병의 치유를 얻기도 원하고 먹을거리를 제공받고도 싶습니다. 그런데 이 무리들은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반대로 제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를 통해서 나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의 말씀을 경청함을 통하여서 예수를 따르고자 하고 예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고자 하는 자들이 제자들입니다. 예수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사실 대다수는 무리들이었습니다.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무리들에게는 예수님은 비유로만 말씀하시고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제자들에게는 그 비유를 해석해 주십니다.

 

복음서에서 특별히 중요한 현장이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곳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 사람들의 여론을 물으십니다. 제자들이 이런저런 대답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의 여론 말고 너희와 함께 먹고 자고 사역을 했던 나에 대해서 너희는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예수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봤던 제자들이 예수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제자들의 의견을 물으십니다. 그때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해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이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영어로 이야기 하자면 “You are THE christ”입니다. “당신은 그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이 그리스도라는 말 앞에 정관사가 쓰였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관사라는 것은 언제 사용하죠?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누구나 알고 있는 그것을 지칭할 때 정관사를 쓰는 겁니다. 베드로는 제자들을 대표해서 뭐라고 말하고 있는 거냐면 당신은 말하는 나나, 내 말을 듣고 있는 당신이나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그 누구나 알고 있는 바로 그 메시아라는 말입니다. 히브리어 메시아가 헬라어 그리스도입니다. 기름부음 받은 자 라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기름부음 받습니까? 왕이나 제사장이나 예언자 같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지상 대리자들이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따라서 베드로으 말은 당신은 우리 유대인들이 수백년 동안 기다리고 소망했던 바로 그 메시아라는 겁니다. 이때만 하더라도 제자들이 일반 유대인들의 메시아상을 뛰어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반 유대인들과 똑같은 메시아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당시 일반적인 유대인들은 어떤 메시아상을 갖고 있었죠?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이스라엘 역사를 보시면 이스라엘은 700년 동안 5대 제국에 의해서 식민 지배를 받았습니다. 수탈이 깊어질수록 이스라엘 백성의 간절한 열망은 해방과 독립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꿈 꾼 메시아는 어떤 존재냐면 이스라엘을 정치 군사적으로 해방시켜 줄 수 있는 존재, 해방만 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세계 만방 위에 우뚝 세워줄 수 있는 존재, 그래서 이스라엘이 이제는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세계 만민을 다스리는 그런 메시아의 나라가 펼쳐질 것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꿈꾸고 소망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해서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당신은 우리 유대인들이 수백년 동안 기다리고 소망했던 바로 그 정치 군사적인 메시아라는 겁니다. 이것은 베드로만의 생각이 아니라 복음서를 보시면 야고보와 요한이라는 제자가 제자들 몰래 예수님께 다가와서 뭐라고 얘기합니까?. 당신이 나중에 세상을 호령하는 황제가 될 때 우리 한 사람은 우의정에 한 사람은 좌의정에 앉혀 달라고 자리 청탁을 합니다. 심지어 마태복음을 보시면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직접 와서 치맛바람을 날리면서 자리 청탁을 합니다. 그것을 듣고 나머지 제자들은 분노합니다. 왜요? 야고보와 요한이 선제적인 행동을 취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자라고 했을 때 제자들이 예수님 뒤를 따라가면서 자기들끼리 했던 중요한 토론의 주제가 뭐였죠? ‘누가 크냐’ 이것으로 토론하잖아요. 누가 크냐라는 것은 쉽게 얘기하자면 제자들 사이에 서열을 정하자는 겁니다. 왜 서열을 정하는 것이 중요합니까?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예루살렘에 입성함을 통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로마 주둔군을 무찌르고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고 나서 그 메시아가 천하 만국을 다스리는 황제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메시아가 황제가 되어 천하 만국을 다스리게 될 때, 제자들의 서열에 따라서 가장 강력한 제자가 메소포타미아를 다스리고 그다음 제자가 이집트 다스리고 그다음 제자가 시리아 다스리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자들 사이에 서열을 정하는 것이 너무 중요한 겁니다. 복음서를 보시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전까지 제자들이 갖고 있는 메시아 상은 일반적인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메시아상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이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이 처음으로 자기가 어떤 메시아인가라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메시아라는 것은 맞추었지만 어떤 메시아 인가에 대해서는 완전히 틀린 겁니다. 예수가 메시아인 것은 맞췄습니다. 이것만 해도 대단한 겁니다. 왜냐하면 당시 바리새인들이 주장했던 메시아상에 근거할 때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는 것 만으로도 대단한 통찰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메시아가 이 땅에 오시면 율법을 철저하게 준수할 것이다 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안식일 법이나 정결법의 본질을 강조했지 형식을 준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일반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그런 메시아상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경건한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잔치를 즐기는 메시아였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가 메시아라고 하는 것을 알아본 것 만으로도 대단한 겁니다. 그런데 어떤 메시아인가는 완전히 틀렸습니다. 이스라엘을 정치 군사적으로 해방시키는 그런 메시아가 아니라 세계 만민의 죄를 해결해주는, 세계 만민을 하나님의 백성 삼아주시는 그런 메시아로 예수는 이 땅에 오셨습니다. 베드로의 답변을 듣고 나서 예수님은 자기가 어떤 메시아인지 처음으로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자기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에 대해서도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알려주십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베드로는 흥분합니다. 이 베드로의 흥분은 12제자의 흥분을 대표하는 겁니다. 한 마디로 그렇게 죽으실 수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죽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때 예수님이 마가복음 8장에서 뭐라고 얘기하십니까? 너희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만 붙잡고 있다, 한 마디로 얘기하자면 자기들이 원하는 자기들의 욕망을 성취시켜 줄 수 있는 그런 메시아로만 예수를 오해하고 있다는 겁니다. 복음서에 보시면 예수님이 예루살렘 올라갈 때 제자들은 열심히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예수님은 앞서 걸어가시고 제자들은 예수를 따라갑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제자들이 예수를 잘 따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제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따름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만약 따름의 궁극적인 목적과 목표였다면 예수가 어디에 있건 제자들은 예수를 따라가야겠죠.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이 나중에 십자가에 달리실 때 제자들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예수와 함께 그 수난의 현장에 있었던 제자들이 누가 있었습니까? 거의 없습니다. 다 예수를 부인하고 배반하고 떠났습니다. 왜 그랬냐면 십자가의 죽음 전까지만 하더라도 제자들이 예수를 따른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예수를 따르게 되면 정치적인 권력을 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가 천하 만국을 호령하는 황제가 되는 순간 경제적인 풍요를 누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것들을 얻도록 해주는 중요한 도구와 수단으로 예수를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예수를 아무리 열심히 따른다고 하더라도 자기들이 기대하는 정치적인 권력, 경제적 풍요로움, 사회적 명망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한 순간 제자들은 단호하게 예수를 떠나고 부인하고 버립니다. 제자들의 이런 모습, 특히 마가복음은 제자들의 실패를 끊임없이 말해주고 있는데 이런 제자들의 실패를 말해줌을 통하여서 오늘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마가복음은 어떤 질문을 던지는 거죠? 우리가 예수를 믿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는데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 정말 예수가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과 목표로서 예수를 믿고 있는 것인가, 우리 인생의 목적과 목표로서 예수를 따르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예수 믿으면 구원 준다고 하니까, 예수 믿으면 병고침 받을 수 있다고 하니까, 예수 믿으면 복 받을 수 있다고 하니까 예수를 붙잡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실패했던 중요한 이유는 예수를 목적과 목표가 아닌 도구와 수단으로 이용하고자 함에 있습니다. 그 결과, 아무리 예수를 붙잡는다 하더라도 자기들이 기대했던 것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한 순간 제자들은 단호하게 예수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과연 예수님을 목적으로서, 요한복음 14장이 말하는 것처럼 예수가 길과 진리와 생명이기 때문에 예수를 붙잡고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를 믿게 되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들 때문에 예수를 혹시 붙잡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런 진지한 질문들을 우리에게 촉구하고 있는 것이 바로 마가복음에서 보여주고 있는 제자들의 실패의 모습입니다. 4복음서 가운데 마가복음은 제자들의 실패에 대해 가장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반면 교사를 삼아야 합니다. 혹여 우리에게도 그런 하나님을 진짜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하려고 하는, 결국 나를 위해서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는 진지한 성찰을 마가복음을 통해서 돌아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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