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창 4:8-13)
본문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라는 이 질문에 가인의 대답은 '내가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까?'라며 거칠게 반항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이 두 번째 질문을 계속하십니다. '네 남편이 어디 있느냐? 네 아내가 어디 있느냐? 네 자식이 어디 있느냐? 네 친구가 어디 있느냐? 주안에 있느냐? 세상 속에 있느냐?'를 묻고 또 묻는 물음입니다.
여러분, 믿지 않는 내 남편의 문제는 누구의 책임입니까? 물론 믿는 아내의 책임입니다. 믿지 않는 내 아내, 물론 믿는 남편의 책임입니다. 믿지 않는 부모, 형제, 다 믿는 우리의 책임입니다. 하루 속에 그들을 전도해서 '주안으로, 그리스도 안으로, 하나님 안으로' 인도해야 할 사명이 저와 여러분 속에 있음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입니까?/
10절에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고 하나님은 물으십니다. 마25장에 보면 달란트를 맡은 종들이 나옵니다. 우리 모두를 하나님께 몇 가지의 달란트를 물려받았습니다. 그 받은 달란트로 얼마를 남겼는가를 묻고 계십니다. 중요한 것은 분명히 그 달란트를 심판하실 날이 오십니다. 이것을 행위의 심판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향하여 묻고 계십니다.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자기의 위치를 물으시고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물으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는 신앙의 자리에 있느냐? 묻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봉사하고, 충성하고, 전도하는 자리에 있느냐고 묻습니다. 지금 기도 중에 있느냐고 묻습니다.
여러분! 신앙은 행위로 봅니다. 그래서 야고보 장로님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이삭을 아끼지 않고 모리아 산에 하나님의 제물을 바치고 믿음의 행위를 보시고 아브라함을 가리켜 '네가 이제야 네 믿음을 알았다. 네 독자 이삭보다는 나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을 보았다'고 칭찬해 주시며 수풀 속에 양 한 마리를 예비해 놓으셨다가 이삭 대신 양을 번제로 드리게 하셨습니다. /할/
창16:8절에 보면 하나님은 사래의 여종 하갈에게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셨습니다. 하갈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몸종입니다. 이 하갈이 서자 이스마엘을 낳자 기세가 등등해서 자기의 상전인 사라를 업신여겼다가 그의 집에서 쫓겨나 사막 벌판에 서 있을 때 하나님의 물으신 질문입니다.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느냐?' 우리가 어디서 왔으며 또 어디로 가는가를 확실히 알고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들에게도 이 물음을 던지십니다. '네가 무엇을 위하여 노력하느냐? 무엇을 위해 돈을 버느냐? 무엇을 위해 높아지려고 하느냐?' 한 마디로 '어디를 향하여 네 인생살이를 달리고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성경도 '너희가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입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라'고 하셨습니다. /할/
①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8)
하나님께서 창4장을 통하여 인류시조가 범죄 하여 죽음이 왔지만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오히려 죄 가운데 있고, 하나님의 저주와 멸망 가운데 있는 인생이 죽음으로 끝이면 다행일 것입니다. 가인 같은 자는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하는 사람들이 지혜로운 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은 죽음으로 끝이 아닙니다.
우리는 '죽음은 끝'이라는 공식으로 모든 것을 봅니다. '어떤 고생을 해도 죽으면 끝이다, 어떤 죄를 지어도 죽으면 끝이다, 또 어떤 의를 행했다해도 죽으면 끝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었습니다. 그러나 아벨은 죽지 않았습니다.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아벨은 죽었으나 살았습니다. 아벨의 죽음으로 아벨이 끝난 것이라면 아벨은 한 마디로 개죽음한 것입니다. 아벨은 너무 억울하게 죽은 것입니다. 아벨을 누가 복되다 하겠습니까? 인류 최초의 살해당한 자인데, 그것도 형에게 죽은 것입니다.
여러분! 아벨은 죽었으나 그의 믿음은 살아 있습니다. 히11장에는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할/ 히12:24절에서는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고 하면서 거룩하신 예수의 보혈과 비교할만한 순교의 피로 아벨의 피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아벨이 죽었습니까? 아벨이 끝이 났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죽었으나 살았습니다. 그 믿음은 살아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는 영생하는 자입니다. /아멘!/
②하나님의 질문과 가인의 대답! (9)
하나님께서 다시 가인에게 나타나셔서 '아우가 어디 있는가?'를 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을 몰라서 이렇게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이 물음은 가인으로 하여금 아벨을 죽인 것을 죄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또 그 죄를 회개하도록 하려고 하는 회개를 촉구하는 물음입니다.
그런데도 가인은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거나 회개하는 태도는커녕 '내가 알게 뭐요!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오히려 하나님을 속이고 하나님께 반항하는 대답을 하였습니다. 여기 '알지 못하나이다'라는 말은 '나는 처음부터 알지 못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인이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말한 것은 자기가 뻔히 아벨을 죽여 놓고도 전지전능하신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모르는 일종의 반항적인 태도입니다.
여기 '지키는 자'는 '돌보는 자, 시중을 드는 자, 파수꾼' 등을 의미합니다. 가인은 형으로써 마땅히 동생인 아벨을 돌보며 지켜 주어야 할 인간적인 책임이 있는 자였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형제의 형편과 처지를 염려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겠습니다. 하루는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묻습니다. '성경 중에 무엇이 제일 중요합니까?' 이때 예수님이 마22:38-39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는 말은 한마디로 성경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라'하는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주님은 눅10장에서 선한 이웃의 비유를 하셨습니다.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이웃을 구해주는 장면을 생생하게 우리들에게 들려주고 계십니다.
눅10:33절 이하에 보면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영적인 의미로는 '기름'은 '성령'을 상징한 것이고, '포도주'는 예수님의 보혈, 그리고 '주막'은 오늘 날 교회입니다. 그리고 '사마리아인'은 오늘 날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비유한 것입니다. 또 '강도 만난 이웃'은 '세상사람'을 상징한 것이고, '두 데나리온'은 성부와 성령을 상징한 것이며, '다시 오겠다'는 약속은 재림을 의미한 것입니다. /할/
진실 된 이웃은 고통 당하는 자에게 위로를 주며 도와주는 사람이며, 그보다 더 큰 이웃은 바로 생명을 주께 인도하는 자입니다.
여러분! 진심으로 형제를 사랑한다면 그 형제가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웃의 영혼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가인은 '네가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즉 '아우를 돌볼 책임이 있느냐?'고 하자, 10절에서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③네 아우의 핏 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0)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 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네가 죽여 놓고 무슨 소리냐?'라는 책망입니다. 여기 핏 소리는 생명입니다.
'호소하느니라'의 원어 적인 의미는 '날카로운 소리를 지른다'입니다. 즉 '사람 살려!' 애타게 울부짖는 비명소리를 표현한 것입니다. 때로는 '억압받는 약자가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보호받기 위해 법에 간절히 호소하는 것'을 가리키기도 합니다(왕하 8:3).
또한 '핏 소리가 하나님께 호소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무죄한 자의 피 흘림을 친히 아시고 그것을 절대로 그냥 간과하지 아니하신다는 뜻입니다. /아멘!/
여러분!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그분만이 홀로 생명을 주관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살인죄를 저지른 것은 하나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중요한 도전행위인 것입니다. 살인은 어떠한 명목으로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할/
④가인의 죄의 결과는? (11-13)
⑴땅에서 저주를 받았습니다.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그 땅으로부터 너는 저주를 받게 될 것이다.'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땅이 저주를 받았는데 이제 가인은 아우의 피를 흘린 땅으로부터 저주를 받게 된 것이다. 죄는 인간에게 파멸만 가져다 줄 뿐이므로 무섭습니다.
⑵경작을 해도 소득이 없습니다.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아담이 죄로 인하여 땅이 저주를 받아 땀 흘리고 수고함으로서 그 소산을 먹을 수 있었으나, 이제 가인은 이 저주의 땅으로부터 저주를 받았으므로 땀 흘리며 열심히 경작하여도 그 효력을 얻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땀 흘리며 수고하여도 아무리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도 헛수고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모든 행사가 주의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우리가 발걸음을 옮겨도 그 옮기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제비를 뽑아도 그 결정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관계를 꼭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네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를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인간의 의식주 문제에 대하여 말씀하신 후 결론적으로 마6:33절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할/
⑶유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땅 위에 방랑자가 될 것이다' 여러분! 얼마나 불쌍합니까? 땅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불쌍한 인생을 일정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방랑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죄는 인간에게 평안과 안식을 빼앗아 가며 오히려 불안과 불행만을 안겨다 줍니다.
⑷죄는 중압감으로 인하여 더욱 더 괴롭게 합니다. 13절에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어떤 신학자는 이 구절을 가인의 회개로 본 학자도 있습니다.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좀 뻔뻔스러운 것 같지 않습니까?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이라면 '주여! 저는 이 채찍을 맞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요나를 한 번 보겠습니다. 요나가 타고 간 배가 풍랑이 너무 심해서 뒤집어 질 것 같아서 누구의 연고로 이렇게 되었는지 제비를 뽑아 보니 요나가 걸렸습니다.
요나에게 묻습니다.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묻자 '나를 바다에 던지라'고 했습니다. 전적으로 이 풍랑의 원인은 자기에게 있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니까 요나는 자기가 죽을 죄인임을 알았습니다.
가인은 역시 뻔뻔스러운 회개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죄벌이 너무 중합니다. 농사짓고, 살아야 되는데 농사조차 안 된다니 세상에 이럴 수가 있습니까?'라는 말입니다. 회개는 진정 성이 있어야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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