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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은 좁은 문으로 가는 길입니다! (마 7:13-14)

by 【고동엽】 2022. 3. 19.

신앙생활은 좁은 문으로 가는 길입니다! (마 7:13-14)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과 모습을 보여주고 나서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마지막 결단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즉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니라, 너희는 산 위에 드러낸 동네니라, 너희는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라, 너희는 외식하지 말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사람을 두라,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비판하지 말라,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거든 먼저 남을 대접하라'
  그리스도인의 삶은 한결같이 행하기도 어렵고, 지키기도 어렵고, 수고와 희생과 땀이 요구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좁은 문, 좁은 길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배경을 보면, 유대인들은 성벽을 쌓고 성안에 모여서 살았습니다. 성벽에는 많은 문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 가운데 있는 문은 제일 컸습니다. 물론 그 길도 넓었습니다. 전쟁에서 아군이 승리하고 돌아올 때는 그 문은 개선문처럼 사용하였습니다. 그 때 사람들이 모두 그곳으로 나와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아군들을 환영했습니다. 이것이 넓은 문입니다.
  그런가하면 성벽의 후미진 곳에는 바늘귀처럼 작은 문이 하나 있었답니다. 다른 문이 다 닫히고 난 뒤에라도 꼭 필요한 경우에는 그 좁은 문을 통해서 들어오고 나가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비상구처럼 사용되는 문입니다. 길도 당연히 좁고 협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작은 문입니다.

 

  ①우리 인간의 속성 때문에 그 길로 가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⑴좁은 길보다 넓은 길을 가려는 속성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생리입니다. 사람은 좀 더 편안하고 쉽고 화려하게 살려고 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⑵어려운 일보다는 쉬운 일을 하려는 속성도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3D직종이라 해서 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요즘 신세대들은 힘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서비스업이나 술집에 들어가서 쉽게 일하며 편하게 살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곳에서 일을 하게 되면 살아가기는 쉽고 편안하겠지만 평생 가도 장래성은 없습니다.
  사람이 쉬운 일을 좋아하면 장래성이 없습니다. 상급도 없습니다. 올림픽 경기를 보면 쉬운 경기는 하나도 없습니다. 어렵기에 그만큼 상급이 크고 영광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쉬운 경기는 인기도 없고 상급도 없습니다. 아주 단순하고 쉬운 기술을 누가 인정해 줍니까? 사람이 이렇게 쉽게 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노자는 '대방무우(大方無隅),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큰 인물이나 큰그릇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랜 세월 동안 끊임없이 수련하고 노력의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할/
  ⑶돌아가는 길보다 지름길로 가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쉽게 얻으려고 합니다. 지름길은 편법입니다. 그 길을 가면 일시적으로는 쉽고 편리하지만 후에 가서는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래서 지름길이나 편법은 권장할 만한 길이 아닙니다. /할/ 그래서 성경은 좁은 길, 좁은 문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②그렇다면 좁은 문, 좁은 길은 어떤 길이고, 문입니까? 여기 문과 길은 같은 표현입니다.
  ⑴주님이 열어 놓으신 문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신 말씀 속에는 그 문이 열려 있음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인류가 다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말하는 것입니다. 범죄 이후에 인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찾거나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갈 문이 닫혀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벧전2:25절에서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길을 열어 놓으신 길입니다. 요19:30절에 십자가 위에서 '내가 다 이루었다'고 속죄성취를 선언할 때, 예루살렘에 있는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막혔던 지성소의 문이 열렸습니다(마27:51).
  예수님은 이 성소의 휘장을 자신의 육체라고 하셨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죽음이 우리의 사죄를 성립시킴으로써 우리가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새롭고 산길이라고 하였습니다(히10:20). 그래서 주님은 그의 교회를 향하여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다'(계3:8)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아멘!/
  ⑵열린 좁은 문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좁은 문을 다르게 표현하기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구원의 문을 의미합니다. 요10:9절에서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만이 유일한 구원의 문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믿/
  ⑶그렇다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의미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말씀은 '좁은 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은유적인 표현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를 믿으라'는 의미로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요1:12절에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여기에서 '영접'과 '믿음'은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뱀에게 물린 자들이 모세가 만든 장대 위의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민21:9)고 한 사실을, 예수님을 '믿으라'는 개념과 동일시하셨습니다(요3:14-15). 또한 요5:24-25절에는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고 하셨는데, 이런 경우 '믿는다.'는 말과 '듣는다.'는 말은 동의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요6장에서는 예수를 믿는 것을 '먹고 마시는'것으로 묘사하셨습니다. 예수의 살을 먹고 예수의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요15장에는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 있으면 과실을 맺는다고 비유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거하면 과실을 맺는 것이라고 다시 풀이하셨습니다. '믿음'을 그리스도와의 생명적 연합으로 표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은 '예수를 믿으라'는 뜻입니다. 즉 행동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 주 안'이라고 하는 말을 즐겨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이 길을 가야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길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③그런데 이 길을 가려면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⑴'갈등의 문제'입니다. 신앙생활을 엄밀히 말하자면 평안의 생활이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는 싸우기도 하면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언제나 자기와의 싸움이 있어야 합니다.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욕망과도 싸워야하고 육신과도 싸워야 합니다.
  인간의 본성에는 언제나 자꾸만 정도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질서를 깨보려는 욕망이 들어 있고, 타락해 보고 싶은 속성도 들어 있고, 거역해 보고 싶은 마음도 어떤 기본적인 틀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욕망이 인간 본성 속에 들어 있습니다.
  이 같은 욕망과 싸워서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 본래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바로 좁은 길을 가는 생활입니다. 그러자니까 그 길을 가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적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넓은 길은 사람들이 가기가 아주 쉽습니다. 거기에는 재미도 있고, 굳이 갈등을 느끼며 싸울 필요도 없는 그런 길입니다. 그래서 그 길을 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경고합니다. 그 길은 넓어서 가기가 재미있고, 쉽지만 그 길은 결국 멸망의 길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세상의 그리스도인을 향하여 권고하기를 '너희는 좁은 문, 좁은 길로 가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문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그래서 이 길을 가려면 갈등을 각오해야 합니다. /믿/
  ⑵'고독과의 싸움'입니다. 사람이 잘 살아가다가도 '나는 혼자다.'라는 생각이 들 때, 고독이 느껴집니다. 신앙의 길은 혼자 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그 길은 언제나 외롭고 고독한 길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길은 좁은 길이요, 그 길은 고독한 길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말씀대로 살아보십시오, 신앙의 원칙대로 살아보려고 힘써 보십시오, 얼마나 고독한지 모릅니다. 따돌림을 당하고 손가락질과 비웃음을 당하고 때로는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감수할 각오가 없으면 이 길을 걸어갈 수가 없습니다.
  프랑스의 작가 앙드레지드는 '좁은 문'이란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 책 속에 여주인공은 이렇게 독백합니다. '주여! 주께서 내게 보이신 그 길은 너무나 좁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나란히 걸어갈 수가 없습니다.'라는 독백이 나온답니다. 그래요, 신앙의 길은 나 혼자 가는 길입니다. 홀로 가기 때문에 고독하고 외롭습니다. 그러나 그 길에는 우리 주님이 동행해 주십니다. /믿/할/
  노아는 120년 동안 혼자 방주를 지었습니다. 외로운 길이요, 고독한 작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만이 구원의 길이요, 생명의 길인 줄 믿습니다.

 

  ④좁은 문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⑴좁은 문이란 예수께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신앙의 문이요, 구원의 문이요, 축복의 문이요, 기적의 문입니다. 또한 주님의 몸 된 교회의 한 지체가 되는 문입니다(요10:9).
  예수 그리스도의 문은 좁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문을 통과한 사람만이 구원이 있고, 영생이 있고, 천국이 있습니다. 그 문을 통과한 자만이 능력을 받고 축복을 받아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할/
  ⑵또 좁은 길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문을 통과한 사람들이 살아가야 할 인생행로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믿음으로 사는 길이 좁은 길입니다. 이 길을 가려면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또한 온전한 믿음으로 인도하시는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가 푯대가 되어 쫓아가야 하는 길입니다.
  ⑶좁은 길은 뚜렷한 목표가 있는 사람만이 갈 수 있는 길입니다. 왜 고생을 사서하며 불편하고 어려운 일을 스스로 택하였습니까? 거기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14절 이하를 보면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좁은 길을 선택한 사람은 분명히 거기에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믿기에 어렵고, 고통스러운 길이지만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는 곳에는 약동이 있고 성장이 있고, 창조의 능력이 있고, 썩지 아니함이 있습니다. 죽은 고기는 물과 함께 떠내려갑니다. 죽은 신앙은 세속화되어 떠내려갑니다. 그러나 산물고기는 어떠한 역류라도 힘차게 가르고 나갑니다.
  산 신앙을 세파의 큰 물줄기를 가르고 전진하는 자입니다. 생명은 귀합니다. 주님은 '너희가 온 천하를 얻고도 생명을 잃어버리면 무엇이 유익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한 영혼을 천하보다 더 귀하게 보십니다. 주님은 요14:6절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 앞에 나가는 길이 바로 좁은 길입니다. 이 길을 바로 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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