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진노!② (겔 13:13-14)
이번 이웃나라 일본의 대 재앙 앞에 자연재해나 자연의 위력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직접 보았고 체험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나 하나님의 힘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은 자연의 위력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자연의 위력을 통해서 하나님은 포효하시고 심판하시고 꾸짖으시고 때로는 분노를 표현하시고 매를 드시기도 합니다. 옛 사람들은 천둥과 벼락을 가장 무서워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하늘의 진노로 보았고 세상을 향한 경고로 받아들였습니다. /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에스겔은 당시 하나님으로부터 임명받은 예언자입니다. 그 시대는 유다왕국의 멸망이 임박했던 때입니다. 에스겔은 멸망이 임박했으니 회개하라고 외쳤는데 거짓 예언자들은 권세자들로부터 녹을 받고 평안만 외쳤습니다. 본문은 그들을 가리켜서 '회칠한 담'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이 그들의 말을 듣고 회개하지 않고 세상은 변화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만 커져 갔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보다 못해 말씀하신 내용이 오늘 읽은 본문입니다. 이 말씀은 경고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분노하여 폭풍을 퍼붓고 내가 진노하여 폭우를 내리고 분노하여 큰 우박덩어리로 무너트리라' 하나님이 화가 나셨습니다. 그래서 경고하셨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경고입니까?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진노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때로 폭우 속에서, 태풍 속에서, 지진과 해일을 통해서 진노하시고 경고하시고 세상에 당신의 뜻을 전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재앙을 만날 때 단순히 자연재해로만 생각해서는 안되고, 그 속에 엄중한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가 들어 있음을 읽고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바른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아멘!/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①떨리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자연의 위력 앞에 인간의 힘이나 지혜는 아주 보잘 것이 없습니다. 일본을 보세요! 앞서가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번 대 재앙 앞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느 정도여야 자연재해를 사람이 막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떨리는 심정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할/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런 하나님의 위력 앞에 살아가면서도 재주를 피며 살아갑니다. 좀 안전하고 평안하면 교만 떨고 좀 두려움이 오면 재빨리 흥정을 하고 그럽니다. 인간이 그만큼 얄팍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인간의 모습을 다 기억하고 계십니다.
산모가 애를 낳으려 들어갈 때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아이를 낳다가 죽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아니고 아이가 혹시 기형아가 아닐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현재 기형아 출산율은 2%라고 합니다. 그래서 산모를 분만실에 들여보내고 밖에서 부모들과 남편이 아이가 나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리면서 '우리 아이는 2% 안에 안 들어가겠지'하면서도 불안해합니다. 그때는 2% 확률이 얼마나 크게 느껴지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밖에서 모두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 아이를 하나님을 위해 살고 하나님 사람으로 살게 하겠습니다' 지금 하나님과 흥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흥정하다가 아이가 무사히 나오면 가장 먼저 묻는 말이 '아이가 정상이냐'입니다. 그리고 아이가 정상으로 태어났다 하면 지금까지 흥정하던 것은 순간 무효가 됩니다. 언제 흥정했냐는 듯이 모두 잊어버립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다급할 때는 모두 이렇게 떨고 두려워서 흥정을 합니다. 그런데 그 다급한 시간이 지나면 모두 순간적으로 잊어버립니다. 거기 어디에 떨림이 있고 경외가 있고 진실이 있습니까?
본문을 보십시오, 백성들이 경고를 해도 듣지 않으니까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분노하여 폭풍을 퍼붓고 내가 진노하여 폭우를 내리고 분노하여 큰 우박덩어리로 무너트리라' 우리는 이 폭우 속에, 폭풍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진노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떨리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할/
②두려운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한편 떨리는 심정으로 살고 또 한편으로는 두려운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참 두려운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늘 사랑, 소망, 용서, 은혜를 말씀하시지만 한번 화가 나시면 참 무서운 하나님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살아야 합니다. /아멘!/
누가 하나님의 심판을 당해낼 수 있습니까? 노아 홍수 때도,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실 때도, 바벨탑을 허물어트리실 때 누가 막을 수 있었습니까? 로마제국을 무너트리실 때 누가 당해냈습니까? 하나님은 때로 심판의 하나님이십니다. 심판하실 때는 폭풍과 폭우와 같이 심판하십니다. 그 모습이 역사 속에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땅이 갈라져서 심판을 했습니다. 불이 내려와서 심판을 했습니다. 성이 무너져서 한꺼번에 파묻어 버리는 심판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런 심판을 하지 않으십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오늘은 하나님께서 완전히 다 무너트리는 심판은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깨달아 알만큼만 진노하시고 경고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적당하게 사인만 주시고 인간들을 향하여 깨닫고 두려움으로 살아가도록 사인은 보내는 것입니다.
여러분, 두려움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할/
③감격스런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원래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얼마나 염려하시고 사랑하십니까? 사람들이 그것을 몰라서 하나님을 자꾸만 무서운 하나님으로 만듭니다. 하나님이 인생을 얼마나 사랑하시고 자상하게 지혜주시고 움직이시고 사용하십니까? 그런데 인간은 그것을 깨닫지를 못합니다.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살아가면 매사가 감사입니다. ▶왜 우리가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까?
⑴선택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엡1:4절에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또 시139:13절에서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그리고 갈1:15절에서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할/
성경 전편에 유유히 흐르는 사상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택사상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고, 우리 각 사람을 개별적으로 선택하셨습니다. 왜 선택이 감사의 조건이 됩니까? 예를 들면 언제나 국회의원 선거가 끝난 뒤 거리 벽에 '당선사례, 감사합니다. 뽑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일하겠습니다.'라는 글로 동네를 도배한 것이 기억나지 않습니까? 뽑아 주셔서 그러니까 선택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입니다.
더욱 감사한 것은 우리가 선택될만한 아무런 이유도 조건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선택되었다는 것입니다. '칼뱅'은 이것을 '무조건적인 선택'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만일 신체조건을 보고 환경을 보고 경제를 보고 인격과 지식조건 등을 낱낱이 따져서 선택의 우선순위를 정한다면 저 같은 사람은 그 측에 끼지도 못합니다. /할/
⑵구원을 얻게 해 주신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행2:21절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또 행4:12절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구원은 오직 예수입니다.
여기서 구원은 죽어서 천당 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덧입는 존재가 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 인정받는 존재입니다. 이런 존재는 그 어떤 곳에서도 건짐을 받습니다. 실패에서도, 낙심과 좌절에서도, 질병에서도, 파멸에서도 건짐을 받고 회복의 축복을 누리기 됩니다. /아멘!/
⑶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기에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요3: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롬5:8절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할/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아멘!/ 롬8:28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몇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아낌없이 주신 사랑입니다.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시고,
㈁변함 없는 사랑입니다. 영원에서 영원까지 변치 않습니다.
㈂늘 풍성한 사랑입니다. 마지못해 주는 감질내는 사랑이 아닙니다.
㈃자상한 사랑입니다. 하나에서 열까지 큰 것에서, 작은 것까지, 앉고 일어서는 것까지 돌보고 사랑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들의 머리칼까지 세시는 분이십니다. 얼마나 세심한 사랑입니까? /할/
어느 권사님이 가난해서 매일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동네 건달들이 보고 비웃으면서 이 권사님을 놀려주려고 보자기에 떡을 싸서 그 집안에 던졌습니다. 기도하다가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나서 보니까 마당에 무슨 보따리가 떨어져 있어 열어 보니까 속에 떡이 가득 들어있습니다.
이 권사님이 오늘도 먹을 것을 달라고 기도했는데 떡보자기를 받았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이렇게 주시니 감사합니다'하고 기도했습니다. 밖에서 숨어 그 모습을 지켜보던 건달들이 권사님 앞에 나타나서 '그 떡은 하나님이 준 것이 아니고 우리들이 던진 것이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 권사님이 '당신들은 하나님은 때로 악마들을 통해서 자녀들에게 도움을 주신다는 것을 아직까지 알지 못했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자상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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