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하나님은 네 구원자임이니라! (사 43:1-3)

by 【고동엽】 2022. 3. 17.

하나님은 네 구원자임이니라! (사 43:1-3)

 

  이스라엘은 그들 자신들에게 주어진 값을 몰랐고 자신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도 몰랐습니다. 모르니까 그들이 애굽을 동경했고, 나일강을 부러워했고 심지어 애굽의 우상까지 동경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시고 하나님이 통탄하시면서 그들에게 가치(값)을 알라고 가르치고 설명하고 깨우쳐 주시고 계십니다. 1절에서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고 했습니다.    

  또 3절에서는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고 했습니다. 요3:16절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여기 구속이라는 말은 ‘이 세상에서 너 만한 존재가 없어, 고로 내가 너를 비싼 값을 주고 샀다.’는 그런 말입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누구 모습입니까? 그 모습이 곧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도구로 삼아서 우리 자신으로 보고 깨닫고 객관적으로 살펴보도록 교육하고 있습니다. /할/

 

  ①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너를 대신하여 주었다(3)고 했습니다.

  애굽은 당대의 가장 강한 최강국으로 문명이나 문물 그리고 문화가 가장 앞서가던 나라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애굽을 과감히 포기하고 대신 너를 건지고 구속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값을 알아야 합니다. 모르니까 하나님이 버린 그 애굽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동경을 합니다. 애굽의 문물을, 유행을, 문화를, 나일강을, 심지어는 애굽의 우상까지 부러워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차(값)을 알아야 합니다. 모르면 한심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똑같은 사람들이 됩니다. 사람들이 이 값을 모르기 때문에 자신을 그렇게 쉽게 포기하고 자살하는 경우들을 봅니다. 그런데 나를 비싼 값을 주고 사고 구속하신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이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대신하여 주었노라’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할/

 

  ②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3)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애굽도 포기하시고 구스와 스바도 포기하시고 바벨론도, 앗수르도, 메데와 바사도 로마까지 다 포기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 말은 ‘이스라엘아, 너를 구원하기 위해서 다 포기했다, 이제는 너의 값을 알고 너의 자존심을 지켜라’는 그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입니다.

  나는 이런 존재입니다. 나는 이렇게 해서 구속받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오늘 사람들이 이 값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값이 있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아멘!/

 

  ③예수를 죽여서까지 구속했다(요3:16)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해서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를 보냈다’고 했습니다. 왜 예수를 세상에 보내셨습니까? 구속을 위해서 제물로 바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애굽도 포기하시고 구스와 스바도 포기하시고 심지어는 예수까지 포기하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관통해서 흐르는 사상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 구속사상입니다. 이 사상은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끊임없이 흐르는 성경의 가징 무게가 있는 중심사상입니다. 이것이 구속사상이다. /할/

  하나님은 이런 나의 값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이라는 백성들을 내세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이스라엘이라는 백성이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한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다고 했습니다. 모르면 우습게 취급할 수밖에 없습니다. 업신여기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귀한 세월을 방탕하고 허비하고 무의미하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④그렇다면 그렇게 구속받은 존재인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나님은 왜 우리를 그렇게 고가의 값을 치루고 구속하였습니까?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을 표현하고 증거하는 주인공으로 살라고 우리를 구속해 주셨습니다. /아멘!/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요리문답서를 보면 ‘인간의 제일가는 의무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

  여러분, 주인공을 보십시오. 주인공은 언제나 몫이 큽니다. 그리고 죽어도 안 됩니다. 영화나 드라마 속에 주인공은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나타나서 끝까지 죽지 않습니다. 연속극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인공은 큰 병에 걸려도 죽지 않습니다. 끝에 가보면 반드시 낫고 일어섭니다. 처음에 실패했다가도 나중에는 반드시 다시 일어납니다. 그것이 주인공입니다.

  그리고 주인공들을 보면 마지막에는 한결같이 모든 난관을 이기고 극복한 후에 웃습니다. 그 모습을 우리들에게 암시를 주고 격려를 주는 목입니다. 그래서 연속극을 보면서 주인공이 울면 나도 울고 웃으면 나도 웃는 것입니다. 그 주인공이 바로 나의 자화상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아니고 '저것은 감독이 시켜서 우는 거야'하고 연속극을 본다면 아무 재미도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내세운 이 세상의 주인공입니다. 그렇게 주인공을 만드시려고 나를 불러내서 구속하여 이렇게 세워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공은 언제나 기죽어 살면 안 됩니다. 언제나 실패했어도 회복하고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멋진 삶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관객들로부터 박수를 받습니다.

  주인공도 아주 괜찮은 주인공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려면 공들여 살아야 합니다. 신앙을 위해서 공들여야 하고 삶을 위해서도 공들여야 합니다. 공들여 사는 사람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무슨 일을 할 때도 공을 들여야 향기가 나고 감동을 주고 결과가 좋습니다. 음식하나 만들어도 공들인 음식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세상을 살라고 부르셨습니다. 부르셔서 구속하셨습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그 삶에서 하나님이 묻어나고 표현되고 보이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대충 살고 살다가 어렵거든 죽어버리라 그렇게 부르신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적어도 우리를 세상에서 주인공처럼 살라고 불러내시고 구속하여 세워놓으셨습니다.

  속담에 ‘새도 가지를 가려 앉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장자의 책에 ‘원추’(鵷鶵)라는 새는 남해에서 출발해서 북해로 날아가는데 가는 도중에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를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를 않고 감로천이 아니면 마시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새도 하룻밤을 앉아 쉬어 가도 나뭇가지를 가려서 앉고 먹을 것을 가려서 먹는다는데 내 영혼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은총을 입고 선택을 받고 구속받아 이 세상의 주인공으로 세움을 받은 사람들인데 어떻게 아무렇게나 살 수가 있습니까? 구별되고 선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