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사랑하라!⑴ (요 13:34-35)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오늘을 사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하늘나라의 삶을 땅 위에서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할 때 하늘나라의 삶을 누리게 될 뿐만 아니라 이로써 주위 모든 사람들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임을 알게 됩니다.
주님께서 구체적으로 어떤 사랑을 하라고 하십니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할/ 여기서 우리는 심각한 고민이 생기게 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이 말씀 없이 그냥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다면 우리들의 기준에 따라서 대충 사랑하고 우리의 할 도리를 다했다 생각하겠는데 주님은 못을 박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이 말씀을 보면 첫 번째로 우리는 이것은 '불가능하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우리 인간이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렇게 사랑할 수 있겠는가? 주님의 사랑의 최고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사랑이셨는데, 이 사랑은 절대적인 사랑인데, 한마디로 우리로서는 불가능한 사랑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우리가 도저히 흉내내지 못할 사랑의 영역이 있고, 우리가 본받아야 할 사랑의 영역, 이 두 가지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는 말씀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이행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이 말씀은 무엇인가?
①함께 '더불어 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사람의 삶에는 행복이 있어야 합니다. 기쁨도, 즐거움도, 재미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적어도 주님의 제자로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혼자 살수 없고 근본적으로 함께 살고 더불어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유년기에는 부모와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성장하면 이웃과, 친구와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인생전체를 살아갈 때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관계의 삶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가장 기쁨이 주어지고 행복할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이 관계의 삶이 가장 정상적일 때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서로 함께 살아가도록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멘!/
▶사람이 세상에서 근본적으로 세 가지 부분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하나는 자연과의 좋은 관계입니다. 여러분, 자연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오늘 사람들이 비로소 자연의 소중함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와서야 자연보호를 외치고 있습니다. 그동안 자연의 소중함을 모르고 마구 파헤쳐 놓고 오염시키고 관계를 악화시켰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이렇게 삭막해졌습니다. 불행입니다. 자연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사람은 자연과 좋은 관계를 이루어야 합니다.
또 하나는 이웃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웃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들입니까? 그래서 주님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고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고 서로 나누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이웃과 형제와 자녀와 함께 옹기종기 모여 살게 되어 있습니다. 이웃은 이렇게 중요한 존재입니다. 이웃과 좋은 관계를 이루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이것은 근본적인 관계입니다. 그래서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늘과 자연과 이웃과의 좋은 관계를 이루는 삶, 이것이 행복의 원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어 놓으시고 그렇게 살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말씀하는 '서로 사랑하라'는 의미입니다. /할/
②사람은 '서로 사랑하며 살도록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사람은 사랑을 주고받을 때 기쁨과 감동을 얻게 되고, 보람과 용기를 가지고 살게 됩니다. 그런 삶이 아름답고 행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최초의 사람 아담을 지으시고 혼자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생각하셔서 여자 하나를 만들어서 서로 돕고 서로 사랑하며 살도록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주님은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이 말씀을 사랑의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4:11)라고 하셨습니다.
③그런데 사람들이 이 모든 좋은 관계를 모두 파괴해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자연과의 관계를 파괴했습니다. 그래서 자연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물도, 공기도, 산도, 땅도, 모두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연은 인간과 갈등을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홍수가 나고, 산이 무너져 사태를 일으키고, 물이 오염되고, 공기가 탁해지고, 그 결과 온갖 질병을 일으켰습니다. 모두 자연과 관계가 악화되면서 일어난 증상들입니다.
또 이웃과 함께 살라고 했는데 이 관계도 파괴시켰습니다. 그래서 관계가 악화되고 부조화가 일어나고 서로 원수가 되고 다툼이 일어나서 결국 증오하고 미워하다가 살인이 일어나고 그럽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파괴와 불화와 갈등과 다툼과 전쟁으로 가득 찼습니다.
또 하나님과의 관계도 악화되고 있습니다. 탕자가 아버지 집을 떠나듯이 사람들은 저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찾아오는 것이 모두 불평, 불행만 찾아오고 고독만 찾아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나누이고 흩어지는가 하면 정신과 생각과 마음이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의 정신이 이기주의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함께 살고 관계를 유지하고 서로 돕고 나누고 협동하며 모여 살며 이웃과 공동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기주의로 말미암아 이 세상은 각자 흩어지고 갈라져버렸습니다.
④그러면 이를 회복하는 길은 무엇인가? 새 계명대로 살아야 합니다.
오늘 주님이 주시는 말씀이 해답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서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일리라' /아멘!/
이 계명을 새 계명이라고 했습니다. 왜 새 계명일까요? 여기 '새'라는 말은 헬라어로 '카이넨'이라는 말로, 이 말을 이해하려면 헬라어의 또 다른 단어와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헬라어로 새롭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말이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네아'라는 말입니다. 이 말에서 영어의 new가 왔습니다. 이 '네아'라는 말은 시간적으로 '최근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과거의 것을 버리고 새롭게 대체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에 비해서 카이넨은 과거의 것이 시간이 지났다고 버리게 된 것이 아니라 그 형식이나 질적인 면에서 새로워진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옛 날에도 있었지만 그 성격과 내용에 질적인 변화가 생긴 것을 말합니다.
요일 2:7-8절을 보면 주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레19:18절에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이것이 바로 옛 계명입니다. 그러면 이 계명을 어떻게 새롭게 해석했습니까? 우선 이웃에 대한 새로운 해석입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유대인들은 사랑할 대상으로서 이웃을 자기들과 같은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들로 축소해서 해석했습니다. 자기들과 같은 수준에 와 있지 않은 사람은 이웃이 아니라고 보았고, 이웃이 아니라고 판단된 사람은 결코 사랑할 대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눅10장에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하여 깨닫게 하셨습니다. 율법사가 예수님께 물기를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을 때 누가 내 이웃입니까?' 그 때 주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다 빼앗기고 심하게 맞아서 거반 죽게 된 채로 길가에 버려져있었습니다. 그 때 제사장이 지나갔습니다. 레위인도 지나갔습니다. 이들이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이들이 지나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강도 만난 사람이 자기들과 같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제사장이 강도 만났다면 그냥 지나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레위인이 강도 만났다면 그냥 지나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옛 계명을 지키던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은 자기들과 같은 사람들만을 이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이웃의 폭을 모든 사람으로 넓혀 주었습니다. 자기들과 다른 사람들도 이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심지어 그 폭을 원수까지로 확대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통상 끼리끼리 사랑하고, 자기들과 비슷한 사람들끼리만 사랑하고자 합니다.
눅10:33-35절에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눅10:37절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할/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⑴나 자신의 이기주의부터 고쳐야 합니다. 그래야 이 정신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자신에게 상당한 인내의 삶이 요구됩니다. 그런 용기가 없으면 이런 정신은 발휘될 수가 없습니다.
⑵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지혜를 발휘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섬김의 생활입니다. /아멘!/
⑶그리스도인들이 사회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다해야 합니다. 이웃과 좋은 관계를 위해서 노력하고 사회질서를 지키기 위해서 힘쓰고 도덕규범을 지키려 애쓰고 국가의 의무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할/
⑷이런 삶이 바로 제자된 자의 삶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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