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2009년 4월 30일 여기 합동신학교에 와서 “꼭 남기고 싶은 말들” 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그 때 한 일곱 가지 말들은 다음과 같은 말들이었습니다.
첫째, 무엇보다 삶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둘째, 인생 칠도”의 삶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셋째, “복음 삼도”의 삶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넷째, 십자가만을 알기로 작정하는 삶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다섯째, 아버지 집을 바라보고 사모하는 종말론적인 삶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여섯째, 위에서 기술한 신앙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믿음의 선배들을 바라보고 사모하며 배우려는 삶의 자세가
필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일곱째, 근심 적정 염려 다 벗어 버리고 모험심과 담력을 지니고
낙천적으로 긍정적으로 소박하고 여유롭고 자유롭고 기쁘게 살아가는
가벼운 삶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오늘 2009년 12월 4일에는 “목회후보생들에게 남기고 싶은 권면”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총장님이 목회후보생들과 졸업생들에게 꼭 필요한 권면의 말씀을 해 달라는 부탁을
했기 때문입니다. 네 가지 “남기고 싶은 권면의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첫째, ‘참회’와 ‘눈물’의 목회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목회자는 선지자 이전에 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은 진리를 가르치기 이전에 은혜를 전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양 무리들을 책망하기 이전에 자기를 위해서
그리고 양 무리들을 위해서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하고 통회하는 ‘참회’와 ‘눈물’의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51:17).
그래서 다윗은 자기를 위해서
그리고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 맨날 울면서 참회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내가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6:6).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시56:8).
다윗의 눈물의 근본적인 원인은 자기의 범죄였습니다.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시51:3).
다윗의 눈물의 두 번째 원인은 백성들이 당하는 불행과 고통이었습니다.
다윗은 자기 백성들이 당하는 불행과 고통을 바라보면서
울 기력이 없도록 슬프게 울었다고 했습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성에 이르러 본즉 성이 불탔고 자기들의 아내와 자녀들이 사로잡혔는지라
다윗과 그와 함께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더라”(삼상30:3,4).
결국 하나님께서 다윗을 이스라엘의 목자로 삼으셨고
다윗을 통해서 인류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고 다윗의 자손 중에서 메시아가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제사장 중의 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우리 인류의 죄와 죄 위에 임할 심판을 바라보시면서 슬피 우셨다고 했습니다.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히5:7).
나사로 죽었을 때에도 눈물을 흘리시며 우셨고
심판 받을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면서도 눈물을 흘리시며 우셨습니다.
“예수께서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눈물을 흘리시더라”(요11:33,35).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눅19:41).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우셨고 십자가 상에서도 우셨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캄캄한 하늘로 얼굴을 가리우시고 우셨고
성자 예수님은 “엘리 앨리 라마사박다니”라고 부르짖으면서 우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맨날 울었습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 라고 부르짖으면서 맨날 울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7:23) 라고
부르짖으면서 맨날 울었습니다.
그리고 이곳 저곳에 흩어져 있는 양 무리들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20:31).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빌3:18).
결국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이방의 사도로 삼으셨고 사도 바울을 통해서
소아시아와 마게도냐와 로마를 구원하시는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조선교회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길선주 목사님도, 이기풍 목사님도
평생 울면서 기도했고 평생 울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길선주 목사님은 집회 때마다 “성령이여 강림하사 나를 감화하시고
애통하며 회개할 맘 충만하게 합소서” 찬송을 부르면서 울었다고 합니다.
이기풍 목사님은 제주도 사역을 시작할 때부터 전라도에서 순교하실 때까지
새벽마다 강대상을 붙잡고 “나는 죄인 중의 괴수외다 나는 죄인 중의 괴수외다”
라고 부르짖으면서 울었다고 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길선주 목사님과, 이기풍 목사님을 통해서
조선과 조선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유창한 기도도 아니고, 유창한 설교도 아니고, 심오한 신학강의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죄와 양 무리들의 죄를 바라보면서 울고, 또 우는 참회의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한국교회를 위해서 대신 회개하며 울 수 있는
참회와 눈물의 목회자를 보고 싶어하고 그리워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하나님께서도 그런 목회자를 보고 싶어하시고 그리워하실 것입니다.
눈물이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아야 하고
그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참회의 제사를 드린 눈물의 선배들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 ‘온유’와 ‘겸손’의 목회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목자 중의 목자이셨던 예수님께서 마음이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분이셨고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라고 분부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11:29).
그리고 예수님께서 “온유한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목자 중의 목자였던 모세가 온유와 겸손의 목자였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민12:3).
사도 바울의 목회가 온유와 겸손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행20:18,19).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온유와 겸손을 지니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엡1:1, 2).
자신만만해서 자주 넘어지던 사도 베드로도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권면했습니다.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벧전5:5, 6).
▲한국교회가 가장 존경하는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 있어서는 일사각오의 철저함과 강인함을 지녔었지만
사람들을 향한 마음과 자세에 있어서는
지극히 부드럽고 따뜻한 온유와 겸손을 지니고 사셨습니다.
한국교회가 존경하는 한경직 목사님도, 박윤선 목사님도, 정진경 목사님도
온유와 겸손을 몸에 지니고 사셨습니다.
너무 강한 목회자 너무 무서운 목회자들이 되지 말고,
좀 약한 목회자 그래서 무섭지 않은 목회자
즉 온유와 겸손의 목회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보고 싶어하고 하나님께서 보고 싶어하시는 목회자는
온유와 겸손을 몸에 지닌 목회자일 것입니다.
온유와 겸손이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아야 하고 그리고 온유와 겸손을 지니고 살았던
온유와 겸손의 선배들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셋째,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목회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목자 중의 목자이셨던 예수님께서는 모든 종류의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용서하셨고 모든 종류의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시며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간음 현장에서 잡힌 여인도, 일곱 귀신들렸던 막달라 마리아도, 배신자 베드로도,
핍박자 사울도 예수님께서는 모두 불쌍히 여기시며 용서하시고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을 향해서 우리들도 서로 불쌍히 여기며 용서하고
서로 불쌍히 여기며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6:14,1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는 긍휼을 원한다"고 말씀하셨고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는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용서하셨고
우리 죄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용서와 사랑을 베풀며 살았고
결국 용서와 사랑의 예찬자가 되었습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 마르거든 마시우라”(롬12:20).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4:32).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3:13,14).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고전13:1,2).
▲손양원 목사님은 용서를 넘어선 사랑을 몸으로 삶으로 생생하게 나타내 보인
주님 닮은 목회자였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에게는 ‘원수’는 존재할 수가 없었습니다.
두 아들을 잃고 통곡하면서도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을 생각하면서
"저 영혼이 불쌍해서 어쩌나, 저 영혼이 불쌍해서 어쩌나" 라고 중얼거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딸 손동희를 계엄 사령부에 보내어 용서와 사랑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성 프랜시스가 그랬듯이 손양원 목사님에게는 모든 사람들이,
마귀새끼 같았던 안재선까지도,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대상이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도 평생 가슴에 긍휼을 지니고 사셨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목회자를 보고 싶어하고 그리워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하나님께서도 그런 목회자를 보고 싶어하시고 그리워하실 것입니다.
긍휼과 용서와 사랑이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아야 하고
그리고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지니고 살았던 용서와 사랑의 선배들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넷째, ‘수고’와 ‘고난’의 목회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아침 설교의 요점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수고’와 ‘고난’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용서와 사랑의 극치이신 예수님의 삶이 ‘수고’와 ‘고난’으로 나타났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른 사도 바울의 삶도 ‘수고’와 ‘고난’으로 나타났습니다.
엄마는 자식을 너무너무 사랑합니다.
그래서 자식을 위해서 아무리 수고를 해도,
아무리 고난을 당해도 싫어하지도 않고, 불평하지도 않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다가 수고를 많이 하다가 죽어도 불평하지 않습니다.
사실 수고가 없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수고가 없는 목회도 진정한 목회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인들을 위해서 당하신 수고를 바라보시면서 만족하셨다고 했습니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사53:11).
사도 바울은 자기가 사랑하는 교회를 위해서
엄마가 자식을 위해서 수고하는 것처럼 수고를 많이 한다고 지적을 했습니다.
저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 주어도 기뻐한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밤 낮으로 수고하며 노동을 해도 기뻐한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살전2:7-9).
▲사도 바울은 수고를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했습니다.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사도 바울은 어느 사도들보다도 수고를 더 많이 했고, 수고를 넘치도록 했다고 고백하면서
그것이 자기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는 부귀영화도 성공도 평안도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는 십자가의 복음 때문에
그리고 성도들 때문에 수고를 많이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더 많이 수고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더 많이 임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사도 바울은 자기가 넘치도록 당한 수고의 리스트를 길게 나열했는데
그것이 모두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3-27).
사도 바울이 당한 수고는, 설교하러 여기 저기 다니느라 몸이 좀 피곤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잠 자리가 좀 불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접을 잘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당한 수고는 옥에 갇히고 매를 맞고
여러 가지 위험을 당하고 죽을 뻔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이 귀찮고 괴로운 일들이 아니었고, 불행한 일들이 아니었고
감사한 일들이었고 행복한 일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들이었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자기가 혼자서 외롭게 당한 일들이 아니었고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사도 바울은 수고와 고난을 ‘예찬’하며 ‘찬송’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1:3 이하에서 수고와 고난의 리스트를 길게 나열하면서
“괴롭다”는 말로 시작하지 않고 “찬송하리로다” 라는 말로 시작을 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오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고후1:3-6).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수고와 고난은 귀찮은 것이 아니라
보배로운 것이 되었고, ‘찬송’의 주제였습니다.
▲결국 사도 바울은 수고와 고난을 ‘기뻐하며’ 수고와 고난을 ‘향해서 달려갔습니다.’
사도 바울은 수고와 고난을 피하려고 하는 대신 수고와 고난을 ‘기뻐하며’
고난을 ‘향해서 달려갔습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1:29).
결국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당하는 모든 종류의 수고와 고난을
‘기뻐한다’고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10).
성도들을 위해서 수고와 고난을 당하다가 죽어도 기뻐하고 또 기뻐한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찌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빌2:17).
사도 바울은 마지막에 로마 옥에 갇힌 죄수가 되었지만 로마 옥중에서
“수고의 기쁨”과 ‘고난의 기쁨’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주안에서 크게 기뻐하노라 너희들도 주안에서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1,10,4).
사도 바울은 “수고와 고난의 기쁨”을 누린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유명한 목회자들보다는 수고와 고난을 기뻐하는 목회자를
보고 싶어하고 그리워한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복음을 위해서 ‘수고’와 ‘고난’의 길로 달려가신
우리 신앙의 선배들 중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평생 예수에 미쳐서 ‘예수 천당’을 외치면서 살았던 최봉석 목사님
또는 최권능 목사님의 수고와 고난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 분은 한국교회가 신사에 무릎을 꿇을 때, 마지막까지 일본 형사들 앞에서도
‘예수 천당’을 외치며 회개하라고 호통을 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은 길선주 이기풍 목사님들과 함께 한국교회의 아버지와 같은 분이었습니다.
최권능 목사님은 길선주 목사님과 같은 해인 1869년에 태어나셨는데
기도와 전도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너무나 많은 수고와 고난을 당했습니다.
최봉석 목사님은 1913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8월 목사로 안수 받은 후 벽동교회에서 1년 동안 목회하다가
1914년부터 노회의 파송을 받아 만주 전도에 전념했습니다.
넓은 만주 벌판을 10리 20리씩 걸어 다니며 조선 동족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수많은 고난을 무릅쓰고 12년 동안 복음을 전한 결과 28개의 교회를 세웠습니다.
때로는 굶기도 하고 때로는 몽둥이와 돌멩이로 맞아서 쓰러지기도 했습니다.
정신을 잃고 쓸어져 있다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다시 일어나서
“예수님은 누구신가” 찬송을 부르면서 걸어가곤 했습니다.
너무 배가 고파서 때로는 올챙이를 잡아 먹기도 했고,
어떤 때는 소 똥에 들어 있는 콩알을 꺼내어 먹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예수님, 소 똥에서 익은 콩이 나왔습니다.
이제는 힘이 났으니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곳에 데려다 주시옵소서.”
그리고 다시 걸어갔습니다.
최봉석 목사님은 12년 동안의 만주 전도를 마치고
1926년에 평양으로 돌아와서 평양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평양 거리는 이제 최봉석 목사님의 ‘예수 천당’ 소리로 날이 밝게 되었습니다.
새벽 4시 마다 들려오는 '예수 천당'의 외침은, 생명 길을 알리는 새벽 첫 닭의 울음소리였고
나라 잃은 평양 시민들의 멍든 가슴을 후련하게 하는 청량제였습니다.
최봉석 목사님은 일본의 신사 참배를 앞장 서서 반대하다가
1939년 평양 경찰서에 끌려가서 극심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기절하면 물을 끼 얹고 기절하면 또 물을 끼 얹으며 고문을 했습니다.
그는 6년 동안 감옥에서 갖은 고문을 다 당했습니다.
고문을 심하게 하면 할수록 “예수 사랑 하심은”을 큰 소리로 불러서
감옥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 찬송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하루는 형사가 몽둥이로 최 목사님을 때리니까, 최 목사님은 매를 맞을 때마다
“예수 천당, 예수 천당” 이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형사가 매를 멈추고 왜 이렇게 시끄러우냐고 물으니까
“내 몸에는 예수가 꽉 차 있어서 나를 때리면 내 몸에서 예수가 나옵니다”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는 예수로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최봉석 목사님은 때때로 감방에서 금식 기도를 했는데
1944년 3월 1일부터 40일간 금식 기도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최봉석 목사님은 40일 금식기도를 마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서 몸을 가눌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4월 11일 병 보석으로 평양 기홀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산정현교회, 장대현교회, 서문밖교회 성도들이
기홀병원으로 몰려들어 "목사님!" 하고 부르며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최봉석 목사님은 오히려 성도들의 손을 붙잡고 그들을 위로했습니다.
"박 집사, 오집사, 왜 이러는가? 그동안 나 위해서 기도 많이 했지.
또 주기철 목사 위해서, 박관준 장로 위해서, 이기선 목사 위해서,
한상동 목사 위해서, 손양원 목사 위해서 기도 많이 했지. 모두 고마워."
그의 주치의인 장기려 박사가 안정해야 한다고 하며 면회를 사절시키려고 했지만
"장 박사, 그러지 마시요. 나를 위해 오는 형제들을 내가 기쁘게 맞이해야 하지 않겠소"
라고 말하며 성도들을 일일이 맞았습니다.
이렇게 병원에서 15일 동안 의사와 간호원과 가족들의 따뜻한 간호를 받으며
찾아오는 교우들을 다 만나보다가
1944년 4월 25일 오후 1시에 부인과 아들과 딸과 며느리와 손자와
산정현교회 성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에서 전보가 왔구나, 나를 오라고 하신다" 하면서
찬송가 "고생과 수고 다 지나간 후"를 부른 다음 세상을 떠나
하나님의 품으로 옮겨 갔습니다. 그의 나이 75세였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순교하신지 4일 후였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4월 21일 최권능 목사님은 4월 25일 순교하셨습니다.
평양의 어두운 밤 하늘을 밝게 비치던 두 개의 큰 별이
4일 간격으로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최봉석 목사님은 수고와 고난의 길을
십자가의 길을 기쁨으로 걸어가셨습니다.
▲고난과 고생의 귀중함을 항상 강조하시면서 가르치셨던 박윤선 목사님께서
1986년 4월 22일 합동신학생들에게 부르짖으시면서 설교하신 설교의 일부를 그대로 인용합니다.
박 목사님의 육성을 그대로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성경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있습니다.
여러분이 기도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있습니다.
여러분이 고난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있습니다.
여러분이 고생을 죽도록 하기 위해서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고생은 저주다. 고생은 싫다. 고생은 꿈에도 원치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고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고생을 가지고 유지하는 사람입니다. 고생을 가지고 개척하는 사람입니다.
고생을 가지고 개조되고, 저기 자신이 새로워지며,
고생을 가지고 눈의 밝음을 얻으며, 고생을 통하여 귀가 밝아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람의 고생관이라는 것은 세상 사람의 고난관과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거리가 멀어요. 다릅니다. 죽도록 고생하는 거에요.”
▲이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우리들의 신앙의 선배들은 주님과 사도 바울의 발자취를 따라서
‘수고’와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 그리고 순교의 길을 기쁨으로 걸어갔습니다.
지금 우리들은 세상의 안일과 평안과 돈과 명예를 너무 좋아하는데
우리들의 선배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수고와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 그리고 순교의 길을 기쁨으로 걸어갔습니다.
너무 부끄럽고 너무 고마울 뿐입니다.
사랑하는 목회후보생 여러분!
여러분들도 주님께서 보여주신 그리고 사도 바울이 걸어가신 목회자의 길을 걸어가도록
평생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그 길은 ‘참회’와 ‘눈물’의 길입니다.
‘온유’와 ‘겸손’의 길입니다.
‘용서’와 ‘사랑’의 길입니다.
그리고 ‘수고’와 ‘고난’의 길입니다.
주님 가신 길로 걸어 갈수 있도록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붙들어주시고
여러분들을 인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복음찬송 "십자가의 길 순교자의 삶"을 함께 부르고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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