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원하시는 삶! (잠 11:1-6)
잠언은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소중한 정신적인 양식이 되는 교훈들만을 묶어 놓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본문만 봐도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몇 가지 삶의 지혜로운 방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네 가지 삶의 원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①정직한 삶입니다(1).
하나님은 '나는 속이는 저울을 싫어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세상의 사람들에게 정직을 요구하십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무너지면 그 세상은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대는 거짓이 너무나 많습니다. 가는 곳마다 보면 거짓 투성이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하나님의 진리와 언제나 대립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옳고 그름을 보다 분명히 하는 그런 삶을 요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고르시고 선택하실 때는 이 기준을 적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으로 사울을 선택하셨는데 그때 그를 선택하신 기준이 바로 이것입니다.
아버지가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아오라고 사울에게 임무를 주니까 사울은 사흘 동안 나귀를 찾느라고 땀을 흘리며 각지를 돌아다니며 헤매었습니다. 한 시간쯤 돌아다니다가 없다고 하면 그만 일텐데 사울은 사흘 동안 나귀를 찾느라고 밥을 굶어 가면서 돌아다녔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나귀를 찾아 돌아다니는 그의 그 진실된 모습을 눈여겨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생각하시기를 '저 사울에게 내 백성을 맡겨도 되겠구나, 이 사람이라면 내 백성을 맡길 수 있겠구나'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초대 임금으로 사울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저울을 속여서 부당 이득을 취하는 정신을 가진 사람에게 무슨 일을 안심하고 맡기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이 잠깐동안 돈을 벌어들일는지 모르지만 큰돈을 벌어들이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 돈을 어디서 벌어들일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일생 저울추나 속여먹고 살아가는 그 범주를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일시적으로는 돈을 조금 벌어들이겠지만 결국 좀 멀리 보면 상실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일시적인 것에 눈이 어두워지는 사이에 영원한 것을 상실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는 속이는 저울을 싫어한다.' 는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무서운 경고가 들어 있습니다. /믿/
②겸손한 삶입니다(2).
사람들은 인사 잘하고, 예의 바르고, 공손하면 겸손하다고 말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겸손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겸손은 '자기를 아는 지혜'를 말합니다. 헬라 사람들은 이 명제에 대해서 아주 깊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 같은 사람은 특별히 아테네의 델포이 신전 벽에 큰 글씨로 '너 자신을 알라'고 썼다고 합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모르면 교만해집니다.
롬12:3절에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자신이 피조물이라는 것을 알고 살라'는 말입니다. 이를테면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겸손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죄 중에서 가장 큰 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불신하는 죄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가장 큰 죄라 했고 또 성경은 그것을 교만이라고 했습니다. 거드름이나 피우고 고개를 똑바로 쳐들고 다니는 그것이 교만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교만은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 그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모두 엎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는 피조물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피조물이 어떻게 창조주 앞에서 고개를 똑바로 쳐들고 있을 수 있습니까? 예배라는 말이 '그 앞에 엎드린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이를테면 겸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피조물임을 모르고 그 앞에 엎드릴 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입니다.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 여러분들은 지금 신앙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주 겸손한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할/
③의리의 삶입니다(4).
사람의 값은 의리(신의)에 있습니다. 신용이 있는 사람, 그 사람이 값이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신용을 잃은 사람들을 보십시오. 참 값이 없습니다. 존귀함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과는 사람들이 상대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그쯤 되면 비참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의가 없어져서 그렇습니다.
오늘 서구 사회에서는 이 신의를 가장 큰 재산으로 인정합니다. 그 사회에서는 신용을 잃고 신의를 상실하면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미국에 이민을 가서 사는 성도님 한 분은 교통 사고로 어린 딸을 잃고 나서 경황 중에 카드 결제 일을 넘기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불성실 자로 판명되어서 그 뒤로 신용을 회복하느라고 굉장히 고생을 했습니다. 사정을 해도 통하지가 않습니다. 설명을 해도 인정되지가 않습니다. 오늘 서구 사회는 이 신용에 대해서 얼마나 엄격한 사회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단테는 배신을 가장 큰 죄라고 했습니다. 단테는 신곡에서 배신자들을 모조리 지옥 중에서도 가장 최하층에 가두어 놓고 가장 중죄인 배신자들은 모조리 지하 9층에 가두어 놓았습니다. 그곳에 보면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 하며 시저를 배신한 브루투스, 카시우스를 거기다 가두어 놓았습니다.
신앙도 일종의 신의 있는 생활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나의 창조주로, 예수님을 나의 주로 믿는다'고 고백을 했으면 신의 있게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쁘거나, 한가하거나 신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그것이 신의 있는 신앙입니다. 오늘 본문은 '의리는 환란 때에 죽음을 면케 한다'는 말씀에 깊은 성찰이 있어야 합니다. /아멘!/
④불성실의 결국을 말씀하고 있습니다(6).
'정직한 자는 그 의로 인하여 구원을 얻으려니와 사특한 자는 자기의 악에 잡히리라'
이것은 사필귀정입니다. 불의는 멀리 보면 반드시 무너집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불의한 자가 일시적으로는 번영을 누리고 호화로운 삶을 살아갈는지 모르지만 세월이 가면 반드시 무너집니다. 또 그래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심판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악이 잠시 형통하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악도 잠시는 승리할 수 있고, 이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의인도 고난을 받고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우리가 시험을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시73편은 아삽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2절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왜냐하면 '불의한 사람이 형통하는 것을 보고, 불의한 사람이 죽을 때도 편안히 죽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아주 불의한 사람도 세상에서 번영도 하고, 성공도 하고, 출세도 하고, 죽을 때도 편히 죽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그것을 반드시 번영이라고 하고, 출세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을 보면 '악은 결국 무너진다'고 했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지옥 음부의 심판을 말하고 있습니다.
결론은 우리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바로 살기만 하면 우리들의 삶과 미래와 운명과 영혼까지도, 하나님이 책임을 지시고, 인도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신앙의 삶입니다. /믿/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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