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화평을 누리라! (롬 5:1-2)
'슈페너'라는 성경학자는 '성경을 하나의 반지라고 한다면, 로마서는 그 반지의 보석에 해당한다.'고 말합니다. 로마서 안에는 그 말씀의 중요성이 정말 반지의 보석처럼 빛나는 말씀들이 곳곳에서 나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바로 보석처럼 빛나는 말씀입니다. 1-2절에 보면, 네 가지의 기막힌 은혜가 있습니다. ⑴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⑵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됩니다. ⑶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⑷이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축복을 받습니다. /아멘!/
1절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아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어 그것을 전제로 하여 이제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 본시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릴 수 있는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완전히 단절되어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죄 때문입니다.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릴 수 있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고,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과거에는 죄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에 놓여 있었습니다. "아이고, 목사님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제가 과거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믿지 못한 것이지, 하나님과 원수질 일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롬8:7절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지 못하고 내 중심으로 사는 것, 하나님의 영광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내 명예를 위해서 사는 것, 내 육신을 위해서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과거에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릴 수 있는 신분으로 바뀌었습니다.
단순히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고 말씀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화목 제물이 되지 아니하였더라면 우리는 감히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릴 수 있는 존재가 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한 손으로는 하나님의 손을 잡으시고, 또 한 손으로는 우리의 손을 잡아서 하나님과 단절된 우리 사이를 이어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비로소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1절 마지막에 ‘누리자’라는 말입니다. 무엇을 누리라고 합니까?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어야 하고,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화평, 즉 '살 롬'은 아주 중요합니다. 아침, 저녁 인사가 '살 롬'이고, 복을 달라고 할 때에도, 또 복을 비는 내용도 "이 화평이 당신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합니다. 그들은 화평을 '하나님과의 화평, 이웃과의 화평, 자기 자신과의 화평' 세 가지 차원을 생각합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라는 말은 '화평을 즐기라'는 말입니다. 화평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즐겨야 합니다. 물질도 내가 가졌다고 다 내 것입니까? 가진 물건을 내가 즐겨야 내 것이 됩니다. 만약 내 집이라고 마련해 놓고 평생 남에게 빌려 주었다가 그대로 죽어버리면 내 집이 무슨 소용입니까? 그 집에서 살면서 소유해야 자기 집입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즐기시지 바랍니다. 이것이 의롭다 함을 받은 신앙인의 생활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기쁘게 살아야 하고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는 말은 '하나님과 깊은 믿음의 교제, 기도의 교제, 찬양의 교제'를 가지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리라는 의미입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교제(대화, 의논, 상의)가 없이는 삭막한 분위기가 됩니다. 부부관계는 늘 교제가 이루어져야 사랑이 샘솟고 행복이 넘쳐 나게 됩니다.
①1절을 주석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⑴"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의롭게 하신 주체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롬5:9절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예수의 피가 귀합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이스라엘 백성의 생명을 구원한 것 같이 하나님은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보고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⑵"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인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는 비결은 역시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10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②'화평을 '누리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폴라우시스'라는 말입니다. 이 말 속에는 몇 가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⑴‘즐긴다. 즉 향락한다.’는 뜻입니다. 화평은 그냥 품고 있거나 간직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즐기는 것이고 향락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화평이 가치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물질이라는 것은 그냥 가지고 있으면 값이 없습니다. 그 물질이 값이 있으려면 즐겨야 합니다. 100억, 200억씩 소유만 하고 있는 것은 소용없는 일입니다. 고리 대금업자가 수십억씩을 움켜쥐고 사는데 그것은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그런 분은 대부분 음식다운 음식 한번 먹어 보지도 못하고, 옷다운 옷 한 벌을 제대로 못 입고 삽니다. 그것을 그냥 움켜쥐고 있다가 어느 날 초라하게 죽고 맙니다. 그렇다면 그 물질을 즐기기는커녕 물질은 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가끔 신문을 보면 50억씩, 100억씩 대학에 희사를 하고, 어느 연구 단체에 기금으로 기증을 했다는 기사가 나곤 하는데 이것이 즐기는 것입니다. 물질을 대학 발전을 위해서 기증함으로써 마음으로 즐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향락하는 것입니다. 두고두고 기뻐하고 보람을 느끼며 즐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그것만으로는 완전한 행복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내가 그 하나님으로 더불어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 하나님을 높은 선반 위에 올려놓고는 쳐다만 보고 있으면 그것은 신앙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내 집에 와 계시고, 내 일터에 와 계시고, 내 인생에 와 계시고, 내 중심에 오셔서 역사하실 때 비로소 나는 그 하나님으로 더불어 향락하게 되고, 즐기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즐기는 생활이어야 합니다.
⑵‘아는 것’입니다. 화평을 누리려면 알아야 합니다. ‘누리라’는 원어 속에는 ‘알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즐기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느냐 하면 뭔가를 알게 될 때 주어집니다. 그래서 아는 것이 힘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고 즐기려면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왜 죽으셨습니까? 우리와 하나님의 사이에 막힌 담을 헐어 버리기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주님이 죽으심으로써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알고 보니까 이보다 더 귀한 일도 없고, 이보다 더 큰 복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같은 신비스러운 도리를 알고 난 후에 고백하기를 ‘나는 이제부터 예수만을 알기로 작정하였다.’고 했습니다. 이 같은 도리를 몰랐을 때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기 위해서 열심이었는데 알고 보니까 그럴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를 바로 알고 난 이후에는 자신이 박해하던 그 예수를 자신이 박해를 당하면서 전하고 다니다가 그 자신이 그 예수 때문에 마지막에는 순교를 하게 됩니다. 이게 어찌 사도 바울만의 일이겠습니까?
예수 때문에 순교한 사람이 어디 한두 사람입니까? 이 도리를 알고 나니 죽을 용기까지도 생겨난 것입니다. 이것이 깨달음이 주는 축복입니다. 그래서 즐거움의 힘은 ‘깨닫고, 알고, 이해할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깨달아 값을 알고 존재를 알게 될 때 거기서 비로소 기쁨이 생기는 것입니다. 4절에서 ‘앎이로다.’란 체험했다는 말입니다. 알기 때문에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 사이에는 굉장한 차이가 있습니다.
⑶‘보는 것’입니다. 여기 ‘누리자’ 말 속에는 ‘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화평을 누리고 즐기려면 볼 줄 알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2절에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고 했습니다.
화평은 현재적인 것만이 아니고 극히 미래적입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웃으며 죽어갔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 ‘아폴라우시스’ ‘본’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미래적이고 내세적인 화평을 보았기 때문에 지금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그 화평을 즐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이 화평의 눈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 세상이 모두 소망 적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화평의 마음과 눈을 가지고 세상을 보고, 나를 보고, 이웃을 보는 것, 그것이 즐기는 생활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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