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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강) 바울의 회심의 간증! (행 22:1-16)

by 【고동엽】 2022. 3. 11.

(제62강) 바울의 회심의 간증! (행 22:1-16)

 

사도바울이 3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니 예루살렘교회의 중직들을 그를 환영하며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다 그를 환영하고 영접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에게 적대감을 품고 있는 유대인들의 독기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도바울이 율법을 파괴하고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혔다는 이유입니다. 사실 사도바울은 이방인인 '드로비모'를 데리고 '이방인의 뜰'까지 들어갔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유대인의 뜰' 까지는 접근하지 않았는데도 그들은 바울이 이방인을 데리고 들어와 성전을 더럽혔다고 터무니없는 모략으로 바울을 죽이기를 작정했습니다.
성전이 무엇입니까? 성전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장소요, 빈부귀천과 인종의 차별 없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거룩한 건물 숭배자'들이었지 '거룩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붙잡아 '다윗의 뿔'이 있는 성전 문을 닫아버림으로 바울 자신을 변호하고 보호받을 수 있는 길은 차단해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사정없이 바울을 내리칩니다. 주동자들은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입니다.
바로 그때 예루살렘에 소동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들은 로마 군인들이 달려왔습니다. 천부장을 위시한 로마 군인들이 와서 구타당하고 있는 바울을 빼냅니다. 그리고 그를 체포하여 쇠사슬로 결박했습니다.
천부장이 군중들을 향하여 바울의 죄목을 물었지만 성난 군중들은 저마다 여러 말로 대답했지만 소동만 더 심할 뿐 그 진상을 알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천부장이 바울을 데리고 부대 안으로 데리고 갑니다.
성전에서 영문 안까지 가려면 계단을 따라 올라갑니다. 한참 올라가던 바울이 그러니까 공포에 떨어야 할 바울이 천부장에게 '잠깐만!'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리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나에게 말할 기회를 주십시오!' 천부장의 허락을 받아 자기를 변론하는 바울의 모습이 오늘 본문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회심의 간증을 한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바울의 회심사건은 세 번이나 나옵니다.
첫 번째는 9장에서 직접 부활의 주님을 만났던 기록이고, 두 번째는 22장 본문에서 바울이 소동을 일으킨 군중들 앞에서 한 간증이고 세 번째는 26장 재판자리에서 한 간증입니다. ◀제목소개!▶

 

지금 바울은 로마의 군인들에게 결박되어 끌려 계단을 따라 영문으로 들어가는 중입니다. 이때 바울은 층계를 오르던 걸음을 멈추고 그를 죽이라고 아우성치는 폭도들을 향하여 손을 흔들었습니다.
바울의 이 모습을 지켜본 군중들은 일시에 조용해졌습니다. 정말 멋있는 제스처의 한 장면입니다. 군중의 시선을 집중시킨 바울은 드디어 히브리말로 설교를 시작합니다. 어떻게 보면 바울은 같은 민족인 유대인들 앞에서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소망을 고백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세 가지로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살았던 과거의 삶을 고백하고, 그 다음 예수님을 알고 믿게 된 과정을 설명하고 있으며, 그 다음 예수를 믿고 난 후에 바뀐 삶의 내용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1절 "부형들아 내가 지금 너희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하더라"
'부형들아' 자기를 죽이려고 아우성치는 폭도들을 향하여 다정하게 '부형들아'라고 불렀습니다. 형제들과 선배여러분들이라는 말로 같은 동족임을 부각시킨 애정이 어린 말입니다.
이 말은 유대인들 청중에 대한 진실 된 존경의 표시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변명을 들으라'고 말했습니다. 변명은 '자신을 변호하다'는 동사에서 온 말로 '말로서 방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2절 "저희가 그 히브리 방언으로 말함을 듣고 더욱 종용한지라 이어 가로되"
지금 바울은 히브리어로 설교하고 있습니다. 당시 히브리어는 '아람어'이었습니다. 군중들은 바울이 배교자이자 민족을 버린 자로 여겨 분노하고 있는데 뜻밖에도 그의 입에서 아람어가 나오는 것을 보고 민족적 동질성이 확인된 것 같습니다.
당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히브리어나 아람어 보다는 헬라어에 익숙해 있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아람어를 사용한 그 자체만으로도 유대인들의 호기심을 유발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바울은 군중들을 조용히 진정시킨 뒤에 익숙한 히브리어 방언으로 그가 체험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시작했습니다.

 

▶3절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바울이 자신을 소개하는 부분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①순수한 유대인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빌3:5절을 보면 바울은 정통 유대 왕조의 지파인 베냐민 지파에 속해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순수한 유대인이라고 하면 존경합니다.
②자신의 출생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다소는 당시 소아시아에서 세 번째로 큰 항구도시로써 문명 문화가 크게 발달되었으며 교육도시로써 명성을 날렸습니다.
다소는 길리기아 지역의 중심도시입니다. 로마가 이 지역을 정복하여 BC 64년 길리기아 주를 조직할 때 다소에 총독부를 두었던 것입니다. 이 도시가 가이사 황제께 충성했으므로 자치제도의 자유를 주면서 세금도 면제해 주었습니다.
특히 아덴이나 알렉산드리아에 맞먹는 대학들이 있어서 교육도시로 소문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소 출신하면 많은 사람들이 알아줍니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바울은 11살 때 유대에 유학을 가서 율법교육을 배웠으므로 그 부모님의 교육 열의가 대단함을 보여 준 것입니다.
바울이 굳이 자신이 다소 출신이라고 말하는 것은 큰 도시에서 각종 문화적 혜택을 입으며 자란 문화인임을 은근히 자랑하는 것 같이 보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시골 출신의 사람들은 대도시 출신의 사람들 앞에서 기가 죽고, 대도시 사람들은 그 반대로 시골 사람들을 촌놈이라고 얕잡아 보기 일쑤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촌놈이 아니고 문명의 혜택을 입고 자랐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③자기의 학문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을 배웠다고 합니다. 당시 가말리엘은 유대인들 가운데 존경받는 인물로서 '우리들의 랍비'라고 부르는 최고의 칭호를 수여 받은 일곱 랍비 중의 한 사람으로, 가말리엘은 당시 최고의 법학자로 인정받던 '힐렐'의 수제자로서 유대 최고의 랍비로 통했다고 합니다. 이런 학자라면 아무나 제자로 키우지 않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자랄 때는 다소에서 자랐지만 공부는 예루살렘으로 와서 그때의 최고의 석학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로 말하자면 서울대 대학원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바울 자신이 가말리엘의 문하생임을 대단한 긍지로 여기고 있었음을 알게 한다.
④자기도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열심 있는 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자신도 처음에는 율법주의자였다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은 열심 있는 율법주의자였습니다. 그래서 당시 신생종교인 그리스도교를 핍박하고 잔해하는 것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기독교를 최고로 박해했던 자가 바로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율법을 위하여 충성했던 과거의 사건 중에 대표적인 한 사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대제사장의 지휘를 받아 다메섹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서 예루살렘으로 끌어와서 형벌을 받게 하려고 갔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4절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이 도'란 문학적으로는 '길'이라는 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또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이 도를 핍박하는 자'이었었다고 여러 곳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행26:10/고전15:9/갈1:13,23/빌3:6/딤전1:13).
바울은 무리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라고 스스로 여기는 것보다 훨씬 더 열심이었음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였고, 남녀를 결박하여 감옥에 쳐 넣는 사실이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사실 스데반을 죽인 자가 바울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많은 자들을 잡아넣으려고 대제사장의 공문을 가지고 다메섹까지 갔습니다. 후에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훼방 자, 핍박 자, 표행 자, 또는 죄인 중에 괴수(딤전1:13-15)'라고 했습니다.

 

▶5절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저희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
바울은 지금 자기가 하고 있는 이야기에 최고의 신빙성을 두기 위해 당시 유대인들로부터 인정받았던 대제사장과 장로들을 증인으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이것은 실제적으로 있었던 일로 바울은 산헤드린의 회장인 대제사장이 임명한 임명장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간 것입니다.
다메섹에 무엇을 하려고 갔습니까? 스데반 순교 이후 각지로 흩어진 예루살렘 성도들 가운데 그곳으로 피난 간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잡아오려고 먼 데까지 출장을 간 것입니다.
지금 바울이 이렇게 간증한 것은 '나도 너희들보다 율법적으로 하나님을 섬겼고, 열심 있는 사람이었고, 유대교에서 크게 쓰임 받은 사람'이었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런 유대교에 열심 있는 자가 하루아침에 기독교로 간 것은 어떤 인간의 설득으로 변화를 받아 간 것이 아니라 하늘의 음성을 듣고 기독교로 개종하였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자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더 쉽게 본문의 배경을 설명 드리자면 '당신들이 지금 나를 핍박하고, 죽이려고 흥분하고 있지만 나는 그 정도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인 일도 있었고, 그러한 사실을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다 알고 있었다고 말하고 그 대제사장이 자기를 얼마나 신임했으면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오라는 사명까지 주었겠느냐는 것입니다.
여기까지의 바울의 간증을 들으면서 우리는 그가 가진 특색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일에는 목숨을 거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변화시킨 뒤에도 그의 행동하는 성격은 그대로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였습니다.
이제 6절부터는 바울이 주님을 만났던 장면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6-8절 "가는데 다메섹에 가까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서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취매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가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다메섹은 어떤 도시인가? 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의 하나입니다. 아브라함 때부터 다메섹의 지명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그돌라오멜에게 사로잡힌 롯을 구할 때 바로 이 데메섹 좌편 호바에서 구출해 내었습니다(창14:15).
다메섹은 헬라가 세계를 제패하기 전에는 수리아(아람)의 수도였습니다. 바로 이곳에 성도들이 피하여 숨어 있었습니다. 사울은 여기에 숨은 성도들을 잡아 예루살렘으로 끌고 가려고 가는 중에 홀연한 순간에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가 다메섹으로 가다가 갑자기 빛을 만났습니다. 빛을 만나는 순간에 그는 거꾸러졌습니다. 그리고 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음성은 놀랍게도 지금 자기가 핍박하러 가는 사람들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이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그 순간 바울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빛을 본 것도 놀라운 일이고, 그분의 음성을 들은 것은 더더욱 놀라운 일입니다. 게다가 바울은 그 음성을 듣고 있는데 주변 사람들은 그 음성을 못 듣고 있으니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6절을 보면 '오정쯤 되어 큰 빛이' 비취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행9:3절에서 나오는 장면인데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첫 장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정쯤'이라고 하는 말은 계시론 적인 면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오정이라는 시간적인 개념은 사람의 정신이 가장 말똥말똥 할 때를 말합니다. 허깨비가 보지 않을 시간이 바로 오정입니다. 열두시 정각 '누가 헷갈리겠는가?' 그런 얘깁니다. 그런 시간에 큰 빛이 임한 것입니다.
이 빛은 '정오'의 태양 빛보다 더 강렬한 빛이기에 바울은 3일 동안 눈이 먼 상태로 지내야 했습니다. 행9:3절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하나님은 사울을 바울로 변화시킬 때, 화염방사선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 빛은 홀연히 나타난 빛(2:6)이요, 햇빛보다 더 밝은 빛(16:13)이었습니다. 이 빛은 이사야, 에스겔, 다니엘에게 나타났던 빛이요, 변화산 위에서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에게 나타난 천국의 황홀함을 보여준 하늘나라의 빛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빛은 과연 어떠한 빛인가?
⑴창조주 하나님의 권능의 빛입니다. 해와 달과 별이 생기기 이전에 있었던 빛 되신 하나님 자신입니다.
⑵영광의 빛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영광의 하나님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하나님을 보고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날 수 있었으며, 후일에 이삭을 모리아산상에서 바칠 수 있었습니다.
⑶환상의 빛입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본 떨기나무 가운데서 임한 불꽃입니다. 그는 이 환상을 통해서 출애굽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이 빛을 받아야 사람이 변합니다.
이 빛은 진노의 빛인 동시에 죄를 태워 사울을 사도바울로 부르시는 용서의 빛이기도 합니다. 이 빛은 은혜의 빛이요, 생명의 빛이요, 영광의 빛으로 오신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빛입니다. 이 빛 앞에 사울은 엎드러지고 말았습니다. 사울의 교만과 악독은 보통 무기로는 부수기 어렵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화염방사선을 쓰신 것입니다. /믿/
사울은 이 빛을 받아 길에서 쓰려졌으니 더 이상 나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메섹의 성도를 보호하기 위해 사울을 이 빛으로 쓰러뜨리고, 또 사울은 이 빛 때문에 회개하고 큰 사도가 된 것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주께서 '사울아!' 부르신 것은 주님께서 사울을 아신다는 말씀입니다. 사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알고 그의 사정과 인생 전부를 알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사울의 정체는 숨겨질 수가 없습니다. 사울의 인생을 아시는 주님은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인생도 아십니다. 또한 사울을 아신다는 것은 주님께서 사울을 사랑하신다는 뜻도 됩니다. 사울은 주님을 박해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울을 사랑하시고 사울을 향한 간절한 기대가 있음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사울의 현재 모습을 보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장차 주님을 위해 헌신하는 바울을 보고 부르신 것입니다. 베드로도 그렇습니다. 우리들도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들의 모습을 보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미래에 더 큰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보시고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8절을 보면 바울은 너무 놀라서 생각할 틈도 없이 묻습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우리 모두도 이 질문을 해야 합니다.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예수님이 2천 년 전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분이라면, 무덤에 갇히신 분이라면 문제는 간단합니다. 그러나 그분이 지금 살아 계셔서 역사하는 분이라면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예수님!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왜 질문해야 합니까? 그분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살아 계신 주님을 믿습니다.
그런데 많은 신앙 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으로, 율법적으로, 형식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예수님께서는 아무 힘도, 능력도 되어주지 않습니다. 그냥 예수님을 알뿐입니다. '주님은 누구십니까? 정말 주님은 저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분이십니까? 주님 정말 주님은 살아 계신 분이십니까?' 이런 물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고 그에 대한 확실한 답이 있어야 우리는 더 깊은 신앙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바울의 물음에 주님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니라'고 분명히 대답해 주셨습니다. 만약 저와 여러분들의 질문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나는 네가 무시하는 예수다, 나는 네가 무관심한 예수다' 이렇게 대답하실 까 두렵습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한 번 생각해 봐야합니다. 네가 예수님 때문에 정신 없이 한 두 시간 동안 찬송하고 기도해본 일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우리의 기쁨이 되고 축복이 되는 분입니다. 사도바울이 지금 그런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여기 '나사렛 예수'라고 하신 것은 당시에는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는데 다른 사람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고 부활하신 바로 그 나사렛 예수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바울은 예수님을 잘못 알아 그를 핍박하는 것이 하나님께 최고의 열심인줄 알았는데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는 음성을 듣고 '아 예수 당신이 나를 구원하신 분임을 몰랐나이다.'라며 깨닫고 그 자리에서 예수님께 굴복한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길도 예수님께 굴복 당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주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만나 주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다메섹에서 바울을 만나 주셨던 그 주님이 우리의 상한 심령 속에 오시며 병들고 어려운 조건과 상황 속에 오셔서 우리를 만나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

 

▶9절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더러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바울과 함께 있던 사람들이 빛을 보았는데도 바울이 들은 음성을 듣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났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일 대 일로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갈렙산에서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은 지금은 우리를 하나하나 개인적으로 부르시고 계십니다.
개인적으로 부르심은 주님과 당사자만의 비밀입니다. 다른 사람은 모릅니다. 나만 아는 비밀입니다. 이런 비밀이 있는 사람은 담대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싱글벙글합니다. 누가 뭐래도 상관이 없습니다.
왜?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할/ 하나님과의 비밀, 하나님과의 약속을 가진 사람은 어떤 고난도 어떤 역경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10절 "내가 가로되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정한바 너의 모든 행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바울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나서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이 말은 굉장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는 논리적으로 만난 것이 아니라 이론이나 지식이나 이성으로 만난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만나주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뉘시옵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이런 주님의 말씀 속에서 부름을 받은 바울이 '주여 무엇을 하오리까?'라며 분명히 자기의 사명이 있음을 직시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부를 때는 분명히 무엇인가를 묻거나 시키기 위해서 즉 목적이 있어서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다는 것은 분명한 목적이 있어서 부르신 것입니다.
①당신을 예배하고 찬양하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②이 생명의 복음을 증거 하는 증인이 되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바울의 물음에 예수님의 대답이 재미있습니다. '너는 이방인을 위해 택한 나의 그릇이다' 처음부터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고 그냥 '다메섹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지금 바울이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다메섹입니다. 무언가 다른 명령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주님은 그냥 '다메섹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장소는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직업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것을 열심히 하면 됩니다. 그러나 변한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그것은 의미입니다. 목적입니다. 즉 다메섹으로 가는 의미와 목적이 변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가는 목적이었지만 이제 다메섹으로 가는 길은 복음의 사역을 감당하러 가는 길입니다. 요4장에 나오는 수가성의 여인도 예수님을 만나고 그의 의미와 목적이 달라져 물동이를 던져버리고 동네에 내려가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말했습니다.
본문의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라는 음성 속에는 또 다른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⑴죄를 자복하는 소리입니다. ⑵당신의 말씀에 절대 복종하며 살겠다는 소리입니다. ⑶주님께 상의하는 소리요 ⑷주의 뜻을 묻는 소리입니다.
'너의 모든 행할 것을 누가 이르리라!' 주님은 다메섹에다 바울을 위해 예비해 놓은 아나니아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시키실 때 분명히 예비된 자, 준비된 자를 만나게 해 주십니다. /할/

 

▶11절 "나는 그 빛의 광채를 인하여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사도바울은 빛을 본 후에 그 빛의 광채 때문에 순식간에 시력을 잃었습니다.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려고 많은 부하들을 데리고 가는 중에 갑자기 시력을 잃게 되었으므로 자기 부하들의 손에 이끌려 다녀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왜? 하나님이 이렇게 눈을 멀게 하셨을까요? 여기에 굉장한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순식간에 바울의 시력을 잃게 하심으로써 세상에 대하여 눈을 감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 눈을 너무나 크게 그리고 열심히 뜨고 지냅니다. 여기에 세상에 눈을 감았다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에 대하여 눈을 떴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일어나는 순간 이전의 율법적으로 밝은 세속의 눈이 완전 실명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 눈으로는 하나님을 볼 수 없고, 주의 일을 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소경을 만드신 것입니다.
바울은 세상에 눈 먼 대신 하나님에 대하여 눈을 뜨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부도 맞고 몸이 병들고 무엇인가 안 된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세상에 욕심을 눈멀게 하는 계기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무능하고 연약합니다. 우리가 걸어갈 수 없고 누군가의 손에 의지해서 걸어 다닐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그때부터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자리 잡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바울은 사람들의 손에 끌려갔습니다.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사람들을 이끌고 아나니아를 잡아끌고 오려고 가던 사람이 사람들의 손에 끌려가서 아나니아 앞에 죄수와 같이 서게 되었습니다. 이제 주객이 완전히 전도되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한 것은 그가 아나니아와 같은 경건한 종을 만난 것이 다행한 일입니다. 그가 아나니아의 안수로 눈이 열림으로 새로운 안목이 열리고 복음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위하여 특별히 세운 그릇이었습니다. 12절 이하의 사건입니다.

 

▶12-14절 "율법에 의하면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 그가 또 가로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저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이 사건은 행9:9절 이하에 사건입니다. 이즈음 아나니아도 환상 중에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행9:9-12절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바울이 앞을 못 보게 되는 순간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에 대하여 시력이 잃어버린 순간에 그는 하나님에 대하여 열심히 눈을 뜨기 시작한 것입니다.
14절의 '알게 하시고, 보게 하시고, 듣게 하셨으니'라는 말은, 바울을 부르신 3가지 목적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①바울에게 '당신은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안다는 것은 새로운 차원의 신앙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열심히 율법을 섬기면서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것이 하나님을 잘 믿는 것으로 알았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 뜻의 내용'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깊은 뜻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자기 백성들에게 꼭 전해 주시고 싶은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이 이것이 하나님의 자기 뜻입니다. 구원의 오묘한 비밀입니다.
그 내용을 한마디로 말하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신칭의'라는 것입니다. '이신'은 믿음으로써 '칭의' 의롭다 칭함을 받는 교리를 가리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알게 하시고자 했던 하나님의 뜻입니다. 바울이 이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발견이란 말이 중요합니다. 그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그가 인간 중에 가장 정학하게 이해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이신칭의의 교리가 구약에도 있었는데 희미했고 바울처럼 명료하게 깨달은 자는 없었습니다.
그러면 이 하나님의 자기 뜻을 알려면 먼저는 유대교 율법에 정통해야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가 깨달은 그 깊은 진리를 그 시대의 학문과 철학을 통하여 변증할 수 있는 체계화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바울이었습니다. 그가 볼 때에 이것을 체계화시키면서 율법은 행하므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보여 지지만 율법을 넘어서 율법 속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의 원리가 그곳에 녹아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제사제도입니다. 그리고 그는 창15:6절에서 이 근거를 찾아냅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하나님을 믿은 것을 의고 여겼다. 여러분 제사 자체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드는 것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양 죽이는 것이 뭐가 어찌 내 죄를 사할 수 있는가? 사 할 수 있을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 제도를 주셨고 양에게 내 죄를 전가하여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 용서하겠다고 하는 약속을 주셨고, 그 약속을 믿고 그 믿음의 결과로 제사 지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 속에도 믿음으로 의롭다 하매 교리가 들어 있는 겁니다. 이것을 바울이 깨달아 안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절대로 인간이 깨달을 수 있는 진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비밀 중에 비밀이었다. 이것을 바울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기 뜻입니다.
②'저 의인을 보게 하시고' 저 의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 가셨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죄인 중의 죄가 가장 많은 사람들이 달려 죽는 형틀입니다.
그렇다면 보통 사람이 볼 때에는 제일 흉악한 죄인 이 누구냐 하면 십자가에 죽은 예수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이 그 의인을 가장 큰 죄인으로 십자가에 매단 그 사건 속에 진리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죄인이 어떻게 의롭게 되겠습니까? 반대사건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의인이 죄인 된 사건이 있기 때문에. 저 의인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위해서 죽음을, 다시 말하면 죄인으로 죽는 그 사건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보았다는 말입니다. /할/
그렇습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보게 된 것입니다. 후에 바울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된 것을 간증한 것입니다.
③부활의 주님을 본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분의 말씀을 듣게 된 것입니다. 이 세 가지 현상은 바울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입니다.

 

▶15-16절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너의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하나님께서 바울을 택하여 당신의 뜻을 알게 하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보고 그의 말씀을 직접 듣게 하신 궁극적인 목적은 당신의 증인으로 삼고자 하신 것입니다. 증인은 법정용어로 '알고, 보고, 들은 것'을 사실대로 증거하는 자입니다.
이제 16절에서 바울은 결단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신앙 고백을 하며 죄 사함을 받으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공식적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롬10:10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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