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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강) 졸다 떨어진 유두고 청년! (행 20:1-12)

by 【고동엽】 2022. 3. 11.

(제56강) 졸다 떨어진 유두고 청년! (행 20:1-12)

 

본문은 사도바울이 제 3차 전도 사역인 에베소 사역을 마치고 예루살렘을 거쳐서 로마로 가기 전에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을 순방하며 그가 세운 교회들을 다시 한 번 돌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간적으로는 약 10개월 가량 걸린 여정입니다만 본문에서는 이후 짧게 그의 행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6절은 마게도냐의 아가야 지방을 방문한 기록이고, 7-12절은 바울이 드로아에서 집회 하던 중 유두고라는 청년이 2층 난간에 걸쳐 있다가 졸다가 떨어져 죽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살면서 혹시 나무나 높은 데서 떨어져 본 경험이 있습니까? 자칫하면 크게 다쳐서 불구가 되거나 죽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떨어진 것이 아니고 다 늙은 노인이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3층에서 떨어진 사람은 유두고라는 청년입니다. 유두고는 떨어져 죽었는데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려냈습니다.
떨어졌다는 것은 좋은 소식이 아닙니다. '원위치에서 이탈했다거나, 미끄러졌다거나, 낙방했다는 의미'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의미로 떨어졌다는 말은 '입학시험에도 떨어졌다, 믿음이 떨어졌다, 은혜가 떨어졌다, 양식이나 기름이 떨어졌다, 지위가 떨어졌다,'는 등 여러 가지 의미로도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다'(눅7:23)고 하셨습니다. 사단은 우리를 밀 까부르듯이 흔들어대지만 주님은 우리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눅22:31-32). 그래서 주님은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눅22:40)고 당부하셨고,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고 하셨습니다. 떨어지지 맙시다! 넘어지지 맙시다! /할/
오늘 설교 제목은 ◀졸다 떨어진 유두고 청년!▶이라는 제목입니다.

 

강론에 앞서 오늘 본문에 보면 '간다'는 말씀이 자주 나옵니다. 사도는 다시 갑니다. 2차 선교여행 때 갔던 길로 다시 갑니다. 그 지경으로 다녀갑니다. 함께 갑니다.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면 돌아갑니다. 선발대 몇 사람은 먼저 갑니다. 최선을 다하여 사역을 마치면 떠나갑니다. 올라갑니다. 믿음의 형제들을 만나면 며칠이고 머물렀다 다시 갑니다.
우리는 '가고 또 가는' 사도를 비롯한 믿음의 사람들을 통하여 2008년도 새해를 믿음으로 전진하는 귀한 길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가는 길에 대하여 잠깐 짚어보고 가겠습니다.
⑴유1:11절에 세 가지 사람의 길이 옳지 않은 길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좇아 멸망을 받았도다"
발람의 어그러진 길은 물질이 하나님보다 앞서는 길입니다. 어그러진 길이었습니다. 욕심을 따라가는 길이요 불의의 삯을 사랑하는 길이었습니다. 이 길에는 천사가 칼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오직 부끄러운 길이었으면 말 못하는 나귀에게 책망을 받도록 하였겠습니까? 옳은 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가 바로 발람의 시대라고 말씀하십니다. 물질만능주의 시대입니다. 말 못하는 나귀 대신 기계에게 책망을 받고 사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교통 신호등이 사람을 나무라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벧후2:15-16절 "저희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을 인하여 책망을 받되 말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것을 금지하였느니라"
성경이 지적하고 있는 또 하나의 잘못된 길에 가인의 길이 있습니다. 자아가 하나님보다 앞서는 길입니다. 자기 의에 충만하여 하나님을 바로 예배하지 않는 길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형제를 외면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의 가인을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 길로 가서는 아니 됩니다. /아멘!/
또 고라와 같이 주의 종을 대적하고 모함하다가 멸망 받은 무리들도 있습니다. 주의 종들과는 대적관계가 아니라 상호 존경의 관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히13:17절"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⑵본문에서 사도 바울의 가는 길은 어떤 길인가?
사람을 살리는 길로 간 것입니다. 바울이 기근에 처한 예루살렘 성도들을 구제하려고 각 교회에서 구제헌금을 모아 동족을 구하러 갑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바울의 여행의 주목적은 그곳 교회들을 계속 격려할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의 곤궁한 성도들을 돕기 위하여 연보를 거두는 데 있었다(Tyndale)고 합니다. 바울은 이 연보를 위해 갈라디아와 아시아와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의 교회들에게 준비시켰던 것입니다(롬15:25-32;고전16:1-4).
⑶사람을 살리는 또 하나의 길은 제자들을 권함으로 교회를 세우는 영적 사역입니다. 교회를 살리는 길입니다. 바울은 영혼을 구하기 위해 유럽 대륙에 다시 상륙을 합니다. 이 중요한 사역은 2차 선교여행 때, 세운 교회와 지도자들을 직접 방문하여 재교육하는 일입니다. 여러 곳을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합니다. 바울은 처음 전도의 옛 중심지인 빌립보(16:12), 데살로니가(17:1), 베뢰아(17:10)의 공동체를 다시 방문했습니다. /할/ 새해 벌써 2월이 다 지나가고 있습니다. 복된 길로 갑시다. 바른 길로 갑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로 갑시다! /아멘!/

 

▶1절 "소요가 그치매 바울이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소요가 그치매' 여기서 소요란 앞장의 데메드리오 사건으로 에베소 극장에서 일어난 소동을 말합니다. 이 소요는 바울의 에베소 사역 가운데 가장 어려운 사건입니다. 이 소동은 그 지방 서기장의 지혜로운 판단으로 잘 수습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 소동이 진정되자 자신의 안정과 에베소 성도들의 신앙을 위해서 그곳을 떠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사실 바울이 자신의 신변과 안전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에베소 성도들의 신변을 더 생각하고 떠난 것입니다. 떠나기 전에 바울은 그곳 제자들을 불러서 권면한 후에 떠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아마도 그곳 제자들에게 환란에 대한 권면 같습니다. 이미 바울은 행14:22절에서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환란을 겪은 에베소 제자들에게 권면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믿음으로 살아간다고 해서 우리 주변에 환란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환란도 오고 역경도 옵니다.
다만 우리가 그 환란과 역경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신앙의 성장을 체험해야 될 줄 믿습니다. 주님은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기신 이 세상을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믿음으로 살아가면 이기고 승리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느냐? 기도입니다. 주님이 '기도이외는 이런 유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바울은 마게도냐를 떠납니다.

 

▶2절 "그 지경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에 이르러"
'그 지경으로 다녀가서' 여기서 그 지경은 특정한 지리적인 위치를 나타내는 말로써 에베소에서 고린도에 이르는 긴 육로 여정 길을 다 망라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1, 2, 3차 여행 중에 세워진 교회들을 다시 순회한 것입니다.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일루리곤까지 간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여행의 목적은 '성도들의 신앙교육'입니다.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했다고 했습니다. 신앙은 교육이 중요합니다.
아기를 낳는 일 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아이를 키우는 일입니다. 아기를 낳는 것으로 부모의 임무가 끝나는 게 아닙니다. 아기를 낳고 키우지 않으면 그 아기는 고아가 됩니다.
자기 스스로 성장할 때까지 부모는 그를 입히고 먹이고 교육시키고 수고를 해야 합니다. 전도도 중요합니다만 양육은 더 중요합니다. 바울이 복음을 심어준 그 사람, 그 교회, 그 지역에 다시 가서 그들이 잘 양육될 수 있도록 권면하고 위로하고 축복하고 가르치는 일을 계속한 것입니다. 그가 헬라까지 왔습니다. 헬라는 아가야의 수도였던 고린도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이제 바울의 활동은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기보단 이미 설립한 교회와 성도들을 돌아보며 권면하는 목회 활동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가는 곳마다 성도들을 돌아보며 권면하고 그들의 신앙을 굳게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박윤선 박사는 '인간의 권면이 하나님의 감동하시는 은혜와 동반하는 한, 그것은 하나님의 권면과 동일시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입을 통하여서 할 말을 하시기 때문이다'고 했습니다.
히3:12-13절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심방예배가 귀하고 권면이 귀합니다. 중요한 것은 '듣는 귀와 받는 마음'입니다. /아멘!/

 

▶3절 "거기 석 달을 있다가 배 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할 그 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 마게도냐로 다녀 돌아가기를 작정하니"
바울이 고린도에서 석 달을 머물렀습니다. 성경에는 안 나왔지만 그곳에서 바울이 그 유명한 로마서를 집필했다고 합니다.
이제 바울이 그곳에서 다시 배를 타고 선교의 본거지인 수리아로 가고자 하였으나 또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려고 공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다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육로인 마게도냐로 돌아가기로 작정했습니다.
바울의 선교사역을 돌아보면 그는 언제나 선교지에서 적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의 주변에는 반대하는 세력이 끊임없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복음을 반대하는 무리들은 꼭 있기 마련입니다. 바울은 반대자들을 피하여 다시 마게도냐로 갔습니다.
여기서 보면 하나님께서 참으로 마게도냐를 사랑하신 것 같습니다. 행16:6절에서 바울이 아시아를 열심히 전도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성령이 아시아 전도를 막았습니다. 그때 바울은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막으셨습니까? 그런데 그 밤에 환상을 보았습니다. 마게도냐의 사람이 나타난 것입니다. '와서 우리를 도우십시오!' 이런 환상이었습니다.
바울은 거기서 자기의 생각과 계획을 꺾고 즉시 순종하여 마게도냐로 갔습니다. '와서 우리를 도우십시오!' 마게도냐는 바로 이런 곳입니다.
'그 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 이렇듯 지긋지긋한 유대인들의 박해는 멈출 줄을 몰랐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위해 이곳 저곳으로 다니며 구제 헌금 모으기에 여념이 없는데, 바울의 이 같은 애국 애족심은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유대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바울을 해치려고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무서운 박해 중에서도 바울과 생사를 같이 하는 신앙 동지들이 여러 사람 소개되고 있습니다. 바로 다음 4-5절에서입니다.

 

▶4-5절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그들은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우리를 기다리더라"
4절에서 바울을 도왔던 동역 자들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일곱 사람입니다. 당시 사도들이 여행할 때 제자들이 동행하는 것은 하나의 관습입니다.
이들은 먼저 배를 타고 수로를 따라 먼저 가서 바울을 기다렸습니다. 즉 반대하는 사람들의 표적은 이 사람들이 아니고 바울이기 때문에 이들은 배편으로 쉽게 그곳에 갔지만 바울은 이리 돌고, 저리 돌아서 그들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바울의 선교의 열정을 보게 됩니다. 어떠한 역경이 와도 그의 선교 행진은 계속됩니다. 태산이 막으면 돌아갑니다. 죽음이 부딪치면 피해서 갑니다. 거기서 가기 어려우면 무릎으로 갑니다.

▶여기서 잠깐 바울과 동행했던 7명의 이름을 보겠습니다.
⑴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입니다. 롬16:21절에 나오는 바울의 친척인 소시바더와 동일인으로 생각됩니다.
⑵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입니다. 행19:29절과 골4:10절에 나오는 인물로서 누가와 함께 예루살렘에서도 동행하였고 후에 로마까지 동행한 사람입니다.
⑶'세군도'입니다. 데살로니가 출신으로 아리스다고의 친구입니다.
⑷더베사람 '가이오'입니다. 행19:29절에 보면 에베소에서 소요가 일어났을 때 아리스다고와 함께 붙잡혔던 사람입니다.
⑸'디모데'입니다. 행16:2절에 루스드라 사람으로 바울의 제자요 동역자로서 디모데 전후서를 바울에게서 받은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⑹'두기고'입니다. 아시아 출신으로 바울이 가장 신임했던 조력자로서 로마 옥중에도 바울과 함께 있었으며 에베소에서와 골로새서를 전달한 사람으로 후에 순교했다고 알려집니다(엡6:21-22절 참조).
⑺'드로비모'입니다. 에베소 출신으로 아리스다고와 함께 예루살렘까지 동행했습니다. 바울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갔다가 유대인들로부터 성전 모독 죄의 누명을 쓰기도 했습니다.
딤후4:20절을 보면 바울이 디모데 후서를 썼을 때 병이 들어 밀레도에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이 다 바울의 동역 자들이었습니다.

 

▶6절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바울은 무교절이 끝났을 때까지 빌립보에 머물렀습니다. 여기서 다시 '우리'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서 다시 행전의 저자인 누가와 함께 동행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빌립보를 떠난 지 닷새만에 드로아에 도착했습니다. 행16:11절을 보면 전에 드로아에서 빌립보에서 배를 타고 이틀 밖에 안 걸렸는데 여기서 닷새가 소요된 것을 보면 그의 향해가 풍랑으로 말미암아 순조롭지 못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제 7절부터는 초대교회가 안식일 예배에서 주일예배로 바꿔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7절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안식일 첫날에' 안식일은 토요일이요, 여기 첫날은 일요일 즉 주일을 말합니다.
이 구절은 초대교인들이 유대인들과 같이 처음에는 안식일에 모였지만(15:21, 18:4) 이제는 독립되어 주일날 예배를 드리려고 모였다는 사실에 대한 중요한 증거이며 동시에 성경에서 최초로 주일 날 예배를 드리려고 모였다는 사실에 대한 중요한 증거이며 동시에 성경에서 최초로 주일날을 언급한 곳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롬10:4)이 되시기 때문에 창조 기념일인 안식일 제도가 폐지되고 구속사역의 기념일인 부활 주일을 지키게 된 것입니다.
당시 일요일은 로마 시대에 태양신을 섬기던 날이었기 때문에 안식 교인들은 반대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은 그 날이 태양신을 섬기던 날이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사역을 성취하시고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요일이라 부르지 않고 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주일은 ⑴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이며, ⑵성령께서 강림하신 날이고, 따라서 신약 교회의 창설일 이라고 할 수 있으며, ⑶모세가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던 날이며, ⑷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묵시를 받던 날입니다.
초대 교회는 처음에 유대인과 같이 안식일에 모였으나, 차츰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주간의 첫날에 모였습니다. 그러다가 기독교와 유대교의 차이가 명백해지고 교회가 회당에서 독립하여 모이게 되자, 주일은 안식일을 대치한 기독교의 성일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 강림이 안식 후 첫날에 일어났으므로, 교회가 이 날을 예배일로 지킨 것은 자연스러운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죄의 세력과 사망의 권세가 무너지고, 참된 안식과 영원한 소망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새 생명을 주사 영원한 안식의 소명을 갖게 하신 주님을 주일날에 모여서 경배함은 마땅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초대교회의 예배의 형태를 알 수가 있습니다.
①주일마다 떡을 떼었다는 사실입니다. 보통 여기서 떡을 떼었다는 말은 성찬식을 의미합니다. 초대교회는 매 주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념하는 성찬식을 거행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②하루 종일 예배가 진행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도바울이 밤중까지 설교를 했습니다. 학자들의 견해를 보면 당시 주일이 제도화되었거나 교회가 제도화 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예배시간이 정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 초대교회는 처음에 가정예배로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다락방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생활양식을 보면 지붕 위가 슬래브집으로 지어 다락방을 만들어 그곳에서 자기도 하고 곳간으로도 사용하고 또 경배와 기도의 장소로도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락방은 굉장히 큰방인 것 같습니다. 그 날 예배는 아마도 사도바울의 송별 예배인 것 같습니다. 본문은 '이튿날 떠나고자 했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제 떠나면 언제 다시 이곳에 올 것인가는 기약이 없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시간 가는 줄도 피곤한 줄도 모르고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 것인가를 진지하게 바울을 통해서 듣고 있었습니다.
설교가 길어지는 것은 한 말씀이라도 더 전하고 싶은 교역자의 심정 때문에서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도 사도 바울의 불타는 사명감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의 설교는 영력이 충만해서 청중들이 시간가는 줄 모르고 더 듣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이렇듯 성경대로라면 설교가 길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설교가 짧으면 '목회자에게 왜 오늘 설교를 그렇게 짧게 합니까?' 라고 불평을 해야 하는데 신기하게도 설교 짧은 것에는 불평하는 성도들이 없고 대신 설교가 조금만 길어지면 불평을 합니다.
사람들이 T. V의 연속극을 보는 시간에는 그렇게 관대합니다. 또 극장에 한번 들어가면 거의 두 세시간을 아무런 불평 없이 잘 버티는 것을 봅니다. 물론 돈주고 들어가서 말입니다. 그런데 예배 시간에 설교가 30분을 지나면 엉덩이에 가시가 돋기 시작을 합니다. 그리고 전신에 좀이 쑤시는 것을 느낍니다. 마음에 은근 슬적 불평 아닌 불만이 고개를 쏙 내미는 것을 봅니다.
우리들이 설교를 포함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시간은 길어 보아야 한 시간 이쪽 저쪽입니다. 이 한시간의 예배와 내 사사로운 생활의 시간들과 비교를 해 보면서, 우리는 좀 부끄러운 생각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밤중까지 설교를 계속하던 중 돌발적인 사고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사고가 생겼는데 유두고라고 하는 젊은이가 창에 걸터앉아 깊이 졸다가 그만 3층 누각에서 떨어져 죽은 것 같습니다.
이로 인해 집회는 중단되고 큰 소란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으로 바울을 통하여 이 청년이 다시 살아났음으로 그 집회는 성공적으로 끝나게 된 것입니다. 본문을 보겠습니다.

 

▶8-9절 "우리의 모인 윗 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앉았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 누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
한마디로 경건치 못한 예배 태도입니다. 유두고가 바울이 설교하는 동안 창에 걸터앉은 것이라든지, 또는 열정에 찬 바울의 설교를 졸면서 들은 것이라든지, 유두고의 예배 태도는 예배에 임하는 그의 자세부터 경건치 못함을 알 수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을 하면 유두고의 앉은 위치는 처음부터 많이 잘못되었습니다.
본문의 유두고를 보면 오늘날 우리 사회의 청소년 상을 보는 것 같습니다.
첫째, 창에 걸터앉은 것이 문제입니다. 그곳은 앉을 자리가 아닙니다. 남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인 회색분자입니다.
둘째, 말씀 앞에 졸았던 것이 문제입니다. 바울은 목숨을 걸고 사력을 다해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그는 말씀에 아무런 관심이 없이 졸고 있었습니다.
셋째, 창 밖으로 떨어진 게 문제입니다. 안으로 떨어졌으면 불행중이나마 다행할 것인데 밖으로 떨어짐으로 그 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 경건한 예배시간에 얼마나 방해가 되었을까?

▶그러니까 유두고의 죽음은 어떤 죽음이었습니까?
①그의 죽음은 졸다가 일어난 사건입니다. 참 부끄러운 죽음입니다. 세상에 졸다가 죽은 사람이 여기에 있습니다. 유두고는 자기가 죽는 것도 모르고 졸고 있었습니다. 그때가 어느 때입니까? 사도 바울의 능력 있는 설교와 가르침은 많은 사람을 감동시켰고, 그곳에 모인 사람들로 하여금 눈물이 범벅이 되게 했습니다.
날이 밝아오면 바울은 떠나갑니다. 이를테면 고별 설교입니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이별의 순간이 옵니다. 그러기에 사도는 밤이 깊도록 말씀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사실 사도바울은 사명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할 시간이 다가 오고 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죽음을 맞이하게 될는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절박할 때에 유두고 청년이 졸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걱정과 슬픔에 잠겨 있는 그 순간에 유두고 청년은 졸고 있습니다. 왜 졸았을까요? 졸게 된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신령한 귀가 막혔고, 신령한 세계에 눈이 감겼고, 무엇보다 마음의 문이 열리지 않은 채 몸만 앉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유두고의 영적 상태는 '깊은 밤'이었습니다. 물론 그 예배가 밤중까지 같습니다. 사람은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피곤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깨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지금은 자다가도 깰 때라고 말합니다. 왜? 영적으로 밤이 깊었고, 죄악의 밤이 깊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밤만 되면 서울 장안은 온통 죄악의 소굴이 되어 집니다. 마치 유황불 세례를 받기 전의 소돔 성처럼 악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 실정을 보십시오! 어제까지 신앙생활을 잘 하던 사람들도 넘어지고 죄악의 밤에 휩싸여 가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밤이 깊어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졸며 잠들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깨어나야 합니다. 졸다가 죽습니다. 깨어 기도할 때입니다. /아멘!/
▶어떤 시골 교회의 장로 이야기입니다. 어느 주일 낮 예배 시간에 이 장로가 꾸벅꾸벅 졸다가 갑자가 '물꼬! 저 물꼬!' 소리를 외치면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 해에는 아주 가뭄이 심했는데, 평소 물 걱정을 많이 하던 장로가 예배 시간에도 농사 걱정만 하다가 졸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꿈속에서 소낙비가 내리는 꿈을 꾸게 되었고, 아까운 물이 그만 다 흘러 내려가는 것을 보고 물꼬를 막아야 하겠다는 생각에서, 예배 시간에 벌떡 일어서서 '물고! 물고!' 소리를 외친 것입니다.
이렇게 그의 마음과 정신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보단, 농사에 있었고 논에 가 있었기 때문에 졸다가 '물고, 물고' 소리를 외친 것입니다. 그래서 두고두고 그 교회 성도들의 놀림감이 되었다고 합니다.
②창에 걸터앉아 있다가 죽었습니다. 이런 자세는 한마디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은 모습입니다. 불 경건한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모하는 마음이 적은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갈급해 하는 자는 듣는 자세가 다릅니다.
우리가 지금 앉아 있지만 이 자리는 하나님이 계신 자리입니다. 하나님 앞에 바르게 앉아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드려야 합니다. 마음을 드릴 때 자세도 바르게 해야 합니다. /믿/
③그 자리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가 앉은자리가 3층 누각입니다. 이런 자리는 집중력이 부족 됩니다. 마음도 흔들리고, 생각도 흔들립니다. 그리고 그곳은 떨어지기 쉬운 높은 자리입니다. 그 자리는 언젠가는 내려와야 할 자리입니다.
유두고 청년은 위험한 자리인 줄 알고 있었지만 자신만만한 것 같습니다. 자만은 신앙의 가장 위험한 요소입니다. 성경은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했어요, 교만에 빠지면 넘어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은 떨어질 곳이 없습니다.
유두고가 앉아 있는 자리는 좋지 않은 자리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자기 자리를 잘 지켜야 합니다. 내 위치도 잘 지켜야 합니다. 위험한 장소는 지켜야 하고 위험한 장소는 가지 말아야 합니다. 잘못 갔다가는 유혹에 넘어지고 폐가 망신당합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는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잘못된 장소에 있다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유두고를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그러나 학자들은 그를 부정적으로만 보지 말라고도 했습니다.
창에 걸터앉은 것은 그가 건방지기 때문에 창에 걸터앉았다고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견해도 있지만 그 보다는 방이 사람들로 꽉 차서 유두고는 청년이기에 노인들과 여자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창문 틈에 앉아 있었다는 것과 등불로 인해 혼탁해질 공기 때문에 공기를 마시기 위해 걸터앉았다는 견해도 만만치 않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유두고는 주일날 교회에 나와 앉아 있었고, 예배를 드리고 있었고, 말씀을 듣고 있었는데 떨어져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건의 교훈은 주일에 교회 나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태도와 마음가짐으로 예배를 드리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의 날 주님의 전에 나오지 않는 것은 말할 가치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전에 나와 앉아 있다고 하더라도, 참 예배자의 정신과 자세를 가다듬고 앉아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주의 전에 나와 바른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어째든 유두고의 사건으로 인하여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예배시간에 말씀을 들을 때 조는 사람들에게 좋은 경고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유두고는 죽었습니다. 떨어져 죽었습니다. 그러나 능력의 사도인 바울을 통해서 살아납니다. 바울은 '떠들지 말라! 그에게 생명이 있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것은 죽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라 살 소망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떠들고 안달할 것이 아니라 기도해야 합니다.

 

▶10절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 하고"
바울이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내려가서' 뛰어 내려가 혹은 '달려들어' 당시 상황이 얼마나 긴박했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앉고' 여기서 '안고'는 '완전히 껴안다 또는 함께 둥그렇게 붙잡다'라는 뜻으로 엘리야와 엘리사의 경우를 상기시킵니다.
왕상 17장을 보면 사르밧 과부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과부의 아들이 이름 없이 앓다가 죽어버렸습니다. 여인이 울며불며 엘리야에게 매달리자 엘리야가 그 죽은 아이를 안고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그 아이를 살린 사건입니다.
그때 사르밧 과부가 그 아들을 살린 엘리야에게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왕상17:24)고 했습니다. 또한 왕하4:34절 이하에 보면 수넴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종은 잘 받들었던 수넴 여인에게 아이가 없음을 안 엘리사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그에게 아들을 주었습니다.
왕하4:17절 "여인이 과연 잉태하여 돐이 돌아오매 엘리사의 말한대로 아들을 낳았더라" 그런데 그 아이가 죽었습니다. 그러자 수넴여인은 갈멜산으로 하나님의 종 엘리사를 찾아가 전후 사정 이야기를 했더니 엘리사가 그의 집으로 와서 기도했는데 어떻게 기도했는지 아십니까? '아이의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 입에 자기 눈을, 그 눈에 자기 손을, 그 손에 대고 그 몸에 엎드리니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하더라'(왕하4:34)고 했습니다.
기도했더니 그 아이가 일곱 번 재채기를 하고 살아났습니다. 오늘 바울이 그런 모습으로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바울의 이런 행동은 구약 예언자들을 흉내냈다가 보다는 죽은 유두고에 대한 깊은 연민과 사랑의 마음의 표현으로 전심을 다해 하나님께 간구하는 자세로 기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사람들은 유두고가 살아나자 다시 떡을 떼며 날이 새기까지 철야를 하면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11-12절 "올라가 떡을 떼어먹고 오래 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사람들이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
갑자기 당한 불의의 사고로 인하여 모두를 크게 놀랐으나 하나님의 크신 능력에 의해 다시 살아난 기적을 본 회중들은 두려움과 흥분 놀라움 속에서 이 잊을 수 없는 밤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바울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살아난 유두고를 보고 그곳 성도들은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유두고를 보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유두고라는 이름의 뜻은 '다행하다'는 뜻입니다. 그는 이름 그대로 다행히 살아나긴 했습니다. 하지만 얼마나 큰일 날 뻔했습니까? 사실 그가 떨어져 죽은 것은 전적으로 그의 책임입니다.
그런 반면에 그가 살아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 자신이 구원 얻은 모습과도 흡사합니다. 엡2:1절에 보자!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할/

우리가 스스로 저지를 죄로 죽은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죄 값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전적인 은혜로 우리를 살려주셨습니다. 엡2:8절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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