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강) 안디옥 교회! (행 11:17-30)
바울은 고전2:14절 이하에서 고린도 교회에 세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자연인으로서 아담의 피를 받은 죄 아래 있는 인생입니다. 예수밖에 있는 영적으로 소망이 없는 허물과 죄로 죽은 불신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두 번째는 '육신에 속한 사람'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지만 육신의 정욕에 얽매여 사는 영적으로 어린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세 번째로는 '신령한 사람'입니다. 이들은 자신을 스스로 통제해 가며 사는 성숙한 성도입니다. 깨어 기도로 준비하는 사람이요, '신전의식' 속에 사는 성도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어떤 사람인가?' '신령한 사람'이 다 되어야 합니다. /아멘!/할/
오늘 본문 17-18절은 사도행전 11:1절에서 이어지는 배경입니다. 베드로가 이방인인 고넬료의 집에 가서 식사를 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성령께서 충만해졌고, 방언이 터졌는데 이 사건 때문에 예루살렘에 와서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하나님의 환상을 소개하면서 자초지경을 설명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행1:5절의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는 말씀과 마3:11절의 '나는 너희로 회개키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라는 말씀이 생각나서 전했다고 하면서, 17절에서는 '내가 누구관데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볼 때, 하나님이 성령으로 계시하시고 섭리하시고 친히 간섭하신 것입니다. 고넬료의 사건은 하나님이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막으면 하나님을 막는 것이 될 것'이라고 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17절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데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서 이방인사람인 고넬료의 일가친척들이 '방언을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직접 보고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방언의 은사를 주신 것과 유대인 사이에 아무런 차별을 두지 않으심을 깨달은 베드로는 '자신도 그러한 차별을 둘 수는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배척을 당해도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결코 막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같은 선물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선물 중 최고의 선물은 '구원과 성령세례'입니다. 구원도 선물(엡2:8)이고, 성령의 역사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행2:38). /아멘!/
베드로는 지금 유대인인 우리들이 믿을 때에 받았던 하나님의 선물과 동일한 선물을 이방인들도 받았으니 그들과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은 한 하나님이시오, 그들의 믿음과 우리들의 믿음이 또한 동일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분명한 뜻을 거역하거나 실패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민31장을 보면 발람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축복만 하라고 하였는데 발락에서 저주의 부탁을 받고 가지 말아야 할 곳에 가게 됩니다.
그런데 따라가서 그들이 시킨 대로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했으나 저주는 나오지 않고 계속 축복만 나오니까 발락 왕을 불러 유대인들을 넘어지게 하는 방법은 딱 한 가지 죄를 짓도록 하는 길 밖에 없다고 가르쳐 주었으므로 그들이 이스라엘을 간음죄를 짓도록 유도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사 하루에 유대인들이 2만 4천명이나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발람이 하나님의 뜻을 반역했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왔고, 발람은 나중에 칼에 맞게 죽게 됩니다. 또 구약의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막다가 고래 뱃속에 들어가 3일 만에 나오게 됩니다.
베드로는 구약성경에 사건을 교훈 삼아 이번 사건도 '하나님의 뜻을 막을 자가 하나도 없음을 깨달은 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말씀을 깨닫는 것이 축복의 통로입니다. /할/
▶18절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성령 충만한 베드로가 담대하고 침착하게 하나님의 계시의 역사를 설명하자 그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난 것을 소문으로 듣고 베드로를 반대하고 비난했던 사람들이 잠잠해졌습니다.
도리어 그들도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멋있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일을 방해하다가도 그 일이 하나님의 뜻인 것을 깨닫자 즉시 중단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간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래야 합니다. /아멘!/
여기서 '생명 얻는 회개'라고 했는데 생명 얻는 회개란 '지금까지 우상을 섬기고 자기를 섬기던 것을 버리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기독교의 축복은 '생명 얻는 회개'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회개는 단회적인 회개가 있고, 계속되는 회개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상을 따라 산 것을 회개하고 예수 앞에 나와 주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얻게 됩니다. 이런 회개는 단 한번에 해결되지만, 우리가 예수 안에서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 우리의 연약함으로 지은 죄는 매일매일 회개하며 살아야 합니다. /믿/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영원히 사는 생명, 즉 영생'을 의미합니다. 인생이란 엄밀한 의미에서 죽음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일의 문호 '괴테'는 '사람의 사람됨은 죽음을 자각하는 데서부터 온다'고 말했습니다.
쉬운 말로 바꿔보면 '아직 죽음에 대하여 고민해 보지 않은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서 사람이 아니다'라는 그런 얘기입니다. '나는 죽을 것이다, 분명히 죽는다, 그런데 이렇게 살다가 죽어도 되는가?' 이렇게 심각한 고민을 하면서부터 사람다워지고 철학적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복음을 이해하고 예수를 영접하면 인사말이 바뀌게 됩니다. 어떻게? '마라나타'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로 바뀌게 됩니다. '마라나타'란 말은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라는 의미인데 '우리 주님이 오시는 것을 잊어버리지 말고 삽시다. 우리 예수님을 기다리며 삽시다. 그리고 그 날을 준비하며 삽시다'라는 깊은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 안에 영원한 생명을 약속 받아 저 천국을 사모하며 사는 자들은 매일 매일 기쁨으로 최선을 다하며 삽니다. 향락에 대하여 집착하지 아니하고, 불의한 일에 빠져들지 아니하고, 어두운 미래의식에서부터 깨끗하게 벗어나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소망 중에 오늘을 의미 있게 사는 자로 변화됩니다.
이 엄청난 생의 변화가 어디에서부터 왔느냐 하면 예수 믿고 부활신앙을 갖게 되면서부터입니다. /할/ 여기까지 와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아멘!/
▶이제 19절부터 그 유명한 안디옥 교회가 나옵니다. 그래서 오늘 제목이 ◀안디옥 교회!▶입니다.
지금 세계는 '교회가 교회되게 하라'는 운동이 한참입니다. 이는 교회가 교회답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세계교회는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는 어떤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까? 보통 예루살렘교회로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사실 예루살렘교회는 훌륭한 교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①인류역사상 가장 양적으로 급성장한 교회입니다. 120명으로 시작된 교회가 하루사이에 3천, 5천씩 불어나게 되었습니다(행2:41).
②인류역사상 가장 훌륭한 목회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생생하게 들었던 제자들, 주의 기적을 직접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을 한 눈에 보았던 제자들이 목회 하는 교회가 바로 예루살렘교회입니다.
③인류역사상 100% 유무상통이 진심으로 이루어진 교회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는 망해버리고 말았습니다.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주님의 마지막 명령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마지막 명령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전도명령입니다. 마28:19-20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오직 전도에만 관심이 있으십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모든 프로그램에 전도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습니다. /믿/ 그런데 예루살렘교회가 이 명령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자신들끼리만 떡을 떼었습니다. 자신들끼리만 모여서 기도했습니다. 전하러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만히 있다고 하나님도 가만히 계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가지 않으면 보내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안가면 밀려 내려가도 가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루살렘교회에 환란과 핍박을 주면서 흩어지게 하셨습니다. 그때부터 흩어진 유대인들이 복음을 전해서 세워진 교회들이 많았는데 오늘 본문의 안디옥 교회가 그렇게 탄생한 교회입니다.
▶19절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여기 '스데반의 일'은 유대교를 통한 초대교회의 환란과 핍박을 의미합니다. 스데반은 복음의 불씨입니다. 예루살렘에 불어닥친 환란은 복음을 이방으로 전하는 불씨가 되었습니다. 스데반의 일로 인하여 빌립은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행8:5).
초대교회는 환란을 통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다 환란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감옥이라는 자루 속에 집어넣어서 후일에 애굽에 총리가 되게 했습니다. 다윗도 양치는 목동으로 훈련시켜 이스라엘에 양을 치는 큰 목자로 세우셨습니다.
환란은 변장된 축복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임한 고통에도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환란의 바람이 부는 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태풍이 거저 부는 것 같으나 하나님은 광풍으로 인하여 하늘의 대기를 이동시키고, 대지를 깨끗이 소제하고, 바다를 뒤흔들어서 바닷물이 썩지 않게 합니다.
초대교회는 스데반의 환란을 통하여 이방의 수리아까지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스데반이 일으킨 파장은 세계로 확산되었습니다. 잔디에 붙은 불과 같이, 개울에 흐르는 물과 같이 계속해서 복음이 세계로 번져 나아가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안디옥이 두 곳이 나오는데 본문의 안디옥은 수리아 안디옥이고, 다른 곳에 나오는 안디옥은 비시디아 지방에 있는 안디옥입니다.
바울 사도가 전도여행을 할 때, 이 두 곳을 다 갔기 때문에 그 이름이 다 나오는데 수리아 안디옥은 큰 도시이고, 비시디아 안디옥은 좀 적은 도시입니다.
본문의 수리아의 안디옥은 당시 유대나라 위쪽에 있는 도시로서 당시 인구 50만으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가는 사치와 향락으로 부도덕한 국제도시로 당시 로마제국에 동방의 수도라고 할 만큼 크고 찬란한 도시였습니다. 이 도시에 세워진 안디옥 교회에서 세계 선교의 장을 열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사도행전의 역사는 안디옥교회에서부터 분기점을 이루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은 많은 교회들이 이 안디옥 교회가 귀하고 훌륭하다 하여 교회의 이름을 안디옥 교회라고 붙여서 방방곳곳에 세우고 있습니다. 서울에도 수 십 개요, 부산, 대구, 광주, 전주 등지에 많이 있습니다. 특히 전주 안디옥교회는 우리나라에서 세계선교를 제일 많이 하는 교회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본문 19절은 안디옥교회의 설립자들이 다 스데반 일로 환난과 핍박을 당한 자들이 세웠습니다. 그러니까 환난 중에도 믿음을 잃지 않는 교인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안디옥교회 성도들은 예루살렘에서 피난 온 성도들입니다.
일곱 집사 중 한사람인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할 때, 초대교회에 큰 환난이 닥쳤을 때, 그때 많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고향을 버리고, 재산을 버리고, 멀리 안디옥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안디옥으로만 온 것이 아니라 여러 나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아시아, 유럽, 베니게, 구브로, 로마까지 건너갔습니다.
안디옥에 온 성도들은 그곳에서 계속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때문에 잃어버린 것으로 인하여 시험에 들지 않고, 오히려 새 생명의 구원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람을 탄 돛단배가 더 힘차게 나아가는 것처럼 기독교인들은 어려움을 당하면 당할수록 더욱 믿음이 살아나고 능력 있게 됩니다. 조그마한 시험을 만나도 낙심하고, 좌절하고, 그것을 크게 확대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반대로 비록 큰 고통과 환난을 당해도 더욱 푯대를 향하여 신앙으로 계속 전진해서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믿음은 강합니다. 믿음만이 힘이 됩니다. 어떤 어려움이 와도 하나님을 확실히 믿는 믿음만 있다면 그 사람은 꼭 승리하게 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넉넉히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할/
▶알렉산더 대왕에게 이웃나라 왕이 사냥개 한 마리를 선물했습니다. 알렉산더는 그 사냥개를 데리고 사냥을 나갔는데 마침 토끼가 지나는 것을 보고 '가서 잡아라.'고 명령을 했으나 사냥개는 움직이지도 않습니다.
그 뒤 며칠이 지나 다시 그 사냥개를 데리고 산에 갔는데 이번에는 사슴이 뛰어갑니다. 그래서 '가서 잡아라.'고 지시했습니다. 이번에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얼마나 화가 났겠습니까?
왕은 '이 개는 아무 쓸모도 없는 개로구나' 생각하고 단 칼에 목을 베었다고 합니다. 얼마 후 그 사냥개를 선물한 이웃 왕을 만났습니다.
'폐하! 사냥개가 사냥을 잘 하지요?' '아닙니다. 토끼도 못 잡고, 사슴도 못 잡았습니다. 그래서 죽여 버렸습니다.'
깜짝 놀란 이웃 왕이 '아니 폐하! 내가 보낸 사냥개는 토끼나 사슴을 잡는 사냥개가 아니라 곰을 잡고, 사자를 잡고, 호랑이를 잡는 사냥개입니다.' 그러니까 그 개는 큰 맹수들을 잡도록 훈련시킨 개이기 때문에 토끼나 사슴을 잡으라고 하니 그냥 처다 보기만 한 것뿐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내가 어떻게 토끼 따위를 잡습니까? 저건 똥개도 잡을 수 있는데 내가 왜 시시한 사슴을 쫓아갑니까?' 하면서 안 잡은 것입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토끼를 보고 벌벌 떠는 그런 성도가 아니라 적어도 삼킬 자를 찾아다니는 사자를 넘어뜨리는 믿음의 성도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성도가 어떠한 환난과 핍박도 다 이기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할/아멘!/
▶20-21절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여기서 보면 안디옥 교회가 크게 부흥 성정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직 유대인과 이방인 간의 장벽이 무너지지 않았을 때,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그 장벽을 넘어 헬라인에게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실 이방인에게 본격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교회는 바로 안디옥교회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유대인들로만 등록된 교회였지만 이제 안디옥 교회는 세계를 향하여 복음의 포문을 연 것입니다.
여기 '구브로'는 지중해 동쪽의 적은 섬으로 구약에는 깃딤(민24:24)이라고 부르는 곳이요, 바나바가 이 성 출신이며, 그곳에는 이미 유대인의 회당이 지어져 있었습니다. 후에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그곳에서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13:4-12).
'구레네'는 북 아프리카에 있는 리비아의 중심도시로써 헬라문화권에 속한 도시였습니다. 눅23장을 보면 이곳은 주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시몬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언급한 구브로나 구레네 몇 사람은 헬라파 유대인으로서 기독교로 개종하여 선교활동을 한 자들이기도 합니다. 이들이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며 수다한 사람이 주께 돌아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수다한'사람이란 말이 구체적으로 얼마나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상당한 숫자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안디옥 교회의 두 가지 특색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①오직 주님만 전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오직 주가 그리스도인 것을 전하는 곳입니다. 진짜 복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믿/
하나님은 이 땅에 교회를 허락하신 것은 오직 주님만 전하라고 세운 것이고, 목사를 세운 것도 오직 주님만 전하라고 세운 것입니다. 저도 우리 성림의 제단에서 오직 주님만, 오직 주를 위하여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저와 똑같은 동역자들이요, 사명자들입니다. /믿/
②주의 손이 함께 한 교회였습니다. 교회부흥은 인간적으로 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행정을 잘 한다고 교회가 부흥되는 것은 아닙니다. 목사가 설교를 잘 한다고 교회가 부흥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행정도, 설교도 잘해야 합니다. 그러나 더 큰 것은 주의 손이 함께 하실 때만이 교회가 부흥되는 줄 믿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주의 손이 함께 하시므로 '수다한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우리 성림교회도 이런 역사가 일어나게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할/
▶여러분, 만사가 주님의 장 중에 있습니다. '주님의 손은 어떠한 손'인가?
⑴권능의 손입니다. 신6:21절 "...여호와께서 권능의 손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나니"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건져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명하여 불렀습니다. 사43:1절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⑵긍휼의 손입니다. 눅15장에 탕자가 돌아올 때 입을 맞추고 얼싸 안아 주신 손입니다. 요8장에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에게 '나도 이제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이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했습니다.
⑶치료의 손입니다. 마8:3절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주님은 문둥병 같은 추하고 더럽고 버림받은 자에게 가까이 가서 어루만지면서 고쳐 주셨습니다.
⑷복 주시는 손입니다. 요6:11절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는 손입니다. /할/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믿고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시127:1절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믿음으로 나가면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과 늘 함께 했습니다. 다니엘과 그 친구들이, 바울과 그와 함께 했던 동역자들이 가는 곳마다 주님의 손이 그들과 함께 했습니다. /믿/
▶22-23절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안디옥 교회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니 수다한 무리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예루살렘교회에서 교역자 한 사람을 파송했는데 그 사람이 바로 바나바입니다.
바나바는 헬라파 유대인으로써 헬라 말을 아주 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안디옥교회에서 많은 사람이 주께 돌아온 것과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고 있는 것을 보고 크게 기뻐했습니다. 은혜가 충만해야 좋은 교회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만나거나 어느 제단에 들어가면 영적으로 오는 감이 있습니다.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에 와서 보니 하나님의 임재하신 교회로서 은혜가 충만한 것을 피부로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고기가 물 속에서 살고, 새들이 공중에서 나는 것처럼, 성도는 은혜를 먹고삽니다. 바나바는 은혜를 식별할 줄 아는 사람이요, 교회가 잘 되는 것을 보고 말할 수 없이 기뻐한 사람입니다.
바나바는 그들에게 한 가지 권면을 했습니다.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여기 '굳은'이란 말은 '흔들림이 없는' 이란 말로 사실 초 신자들은 조그만 일에도 시험을 받아 낙심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굳센 믿음으로 주께 꼭 붙어서 떨어지지 말고 믿음이 견고해지기를 원했습니다.
목회자의 마음은 다 똑같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굳센 믿음에 서서 주님과 절대로 떨어지지 말기를 주의 종들은 기도하고 있는 줄 믿습니다. /아멘!/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본 사람이요, 안디옥 성도들을 믿음으로 권면한 사람입니다. 원래 바나바의 이름의 뜻이 '권위자'입니다. 권위자란 말은 '위로의 아들'이란 말입니다(행4:36). 이렇게 신앙의 선배들을 권면하고 위로해 주는 잡니다.
▶24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①'바나바'는 착한 사람입니다. 눅23:50절에 예수님을 장례한 아리마대 요셉도 선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바나바는 권위자, 위로자입니다. 누구라도 접근하기 쉬운 사람입니다. 그는 부드럽고, 온유하고, 착한 사람입니다. 성품도 아주 좋습니다.
여기서 착한 사람이란 말은 본바탕이 착한 사람이며, 도덕적인 풍성이 선함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태어난 때부터 선천적으로 착하고 어진 마음을 갖고 태어나는 것은 참으로 귀한 덕목입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게 된 것은 범사를 선으로 행했기 때문입니다. 악을 악으로 대항하지 않고, 선으로 이기고 믿음으로 이기면 자신도 살고, 상대방도 살리게 됩니다.
②'바나바'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였습니다. 이 말은 오늘날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사모해야 할 말입니다. 믿음 충만, 성령 충만하면 모든 것이 충만합니다.
③'바나바'는 성도들을 잘 관리하는 목회자였습니다.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기본적으로 전도가 되고 있는 교회입니다 만은 인도하는 바나바가 성도들을 잘 관리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바나바는 목회자로서 상당히 능력 있는 종이었습니다. 나중에 선교사로 힘씁니다만 선교사가 되기 전에 목회에 이미 성공한 분입니다. 국내에서 성공적으로 일할 수 있는 사람이 외국에 가서도 일을 잘하는 것입니다.
▶25절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바나바는 앞을 멀리 볼 줄 아는 목회자였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커지니까 동역자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 개종한 사울을 찾아 다소로 간 것입니다.
다소는 사울의 고향이었습니다. 행9:26이하를 보면 사울이 회개 한 후 예루살렘 교회에 가서 사도들과 교제하고자 했으나 사도들이 받아들이지 않자 이 바나바가 가서 사울을 이해시켰습니다. 이제 핍박자 사울이 아니라 회개한 사울임을 소개함으로 사도들의 오해가 풀렸고, 그 뒤 사울이 다소 고향으로 내려갔던 것입니다.
바나바는 사울과 같이 동역하면 하나님의 교회가 더 든든해지겠다고 생각하고 사울을 데리고 갔습니다. 그러니까 바나바가 사울을 발굴해 낸 사람입니다. 만약 바나바가 없었더라면 사울이야 말로 초야에 그대로 묻힐 뻔했던 그런 인생입니다.
바나바는 그릇이 큰 인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큰 교회를 아무 욕심 없이 후배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지금 현대에 목회자들에게 이런 모습을 절대 찾아볼 수 없는 그런 대목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키우는 지도자였습니다. 세상이나 교회나 지도자들을 많이 양성해야 합니다. 그래야 미래가 든든합니다.
▶26절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컫음을 받게 되었더라"
바나바와 사울은 아주 콤비가 척척 맞았습니다. 그들이 안디옥 교회에서 일년 간 성경공부를 가르쳤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잘 권면해서 데리고 와서 동역한 것입니다.
권면을 잘 들어서 훌륭한 사람이 된 인생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장로교의 대부 '칼빈'같은 분은 '파렐'이란 목사님의 권면을 잘 받아드려서 큰 인생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파리 대학 총장의 취임식을 하는데 '파렐'목사님이 총장이 되고 그 총장 취임사를 '칼빈'이 썼습니다.
파렐 목사가 당시 해박한 지식을 가진 칼빈에게 취임사를 부탁한 것입니다. 그런데 칼빈이 써준 취임사에는 완전복음만을 써 주었습니다. 당시 천주교회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는 '성경이 말하는 복음이란 이런 것이다. 파리 대학은 앞으로 복음적인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고 써 주었고, 그대로 선포했으므로 천주교의 아성인 그곳이 발칵 뒤집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썼는지 알아보라고 해서 칼빈을 체포하라는 명이 떨어지자 제네바로 가서 숨어있는데 파렐목사님이 찾아와서 같이 일하자고 부탁한 것입니다.
칼빈은 아직 어리고 학문도 더 해야 하고, 성경공부도 더 해야 한다고 사양하자, 파렐목사가 '당신이 학문을 그렇게 귀하게 여긴다면 학문과 함께 망할 것'이라고 충고함으로 항복하고 그와 함께 일하면서 종교개혁의 기초로 세웠다는 것입니다.
안디옥교회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란 증거를 얻었습니다. 안디옥은 세속적으로 큰 국제도시입니다. 그곳은 사치와 항략과 음행과 우상숭배로 타락한 죄악의 도시입니다.
이러한 곳에 세워진 안디옥교회는 그들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들과 구별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무리들이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으로 구별함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해서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니, 너희는 세상에 빛이라'(마5:13-14)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세상에 반사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많은 사람들에게 비판을 들었던 부끄러운 교인들이 안디옥에서부터 '저기 천사 같은 교인들이 간다. 저기 크리스천이 모여 있다'는 말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나 크리스천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것', '그리스도에게 소속되어 있는 무리' '메시아이신 주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⑴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마16:24절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⑵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입니다. 소속이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입니다.
⑶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거듭난 자입니다. 자연인은 인간의 본능이나 이성에 따라 살지만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사는 자입니다. 고전12:3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고 할 수 없느니라" ⑷회개하는 자입니다. 죄 중에 가장 큰 죄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불 신앙입니다. 요16:9절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요한일서 1:9절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⑸그리스도안에 사는 자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산다는 말이요, 철저히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고 산다는 것입니다. /아멘!/
▶27-28절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안디옥 교회가 소문나자 예루살렘교회에서 선지자들이 찾아갔습니다. 감독하러 간 것이 아니라 얼마나 교회를 잘 섬기는지 보러간 것입니다.
여기서 '선지자'란 구약의 선지자를 하나님이 대표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주는 큰 권위를 가진 존귀한 직분입니다 만은, 그러나 초대교회의 선지자 직분은 서열이 있어서 사도 다음에 직책(고전12:28)입니다.
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그 중에 '아가보'라는 사람이 성령으로 말하여 '흉년이 들것을 예언'했습니다. 이 예언은 실제로 로마 제 4대 황제인 '줄리 우리안' 때에 이루어졌습니다.
창41장을 보면 하나님은 요셉을 통하여 흉년을 예언했습니다. 왜 이런 예언을 주십니까? ⑴자연과 만물은 하나님이 주장하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⑵회개를 추구하기 위하여, ⑶미리 알고 그것을 이길 준비하라고, ⑷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회개하라는 말씀입니다.
▶29-30절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안디옥교회는 구제하는 교회였습니다. 자신들이 떠났던 예루살렘 교회가 흉년으로 말미암아 가난해지고 어려워졌습니다.
AD44-48년 로마 제 4대 황제 때, 역사가들이 기록할 정도로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이때에 안디옥교회에서는 모 교회에 돈을 보내어 물질적으로 정성을 다해 구제한 것입니다.
구제를 할 때 바나바와 사울이 직접 챙겨서 신앙이 좋은 장로님에게 보낸 것입니다. 당시 안디옥도 어려웠습니다. 모두가 어려웠습니다. 쓰고 남은 것 도와주는 것은 도와주는 것이 아닙니다. 나 쓸 것 못쓰고 도와주는 것이 참으로 도와주는 것입니다. /아멘!/
이제 안디옥교회에서부터 사도행전의 역사는 선교하는 역사로 바꾸어지게 됩니다. 우리 교회도 이런 안디옥교회처럼 열심을 내어 선교할 수 있는 좋은 교회가 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소원인줄 믿습니다. /아멘!/할/
'◑ 자료 18,185편 ◑ > 자료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36강) 박해자 헤롯의 죽음! (행 12:13-25) (0) | 2022.03.10 |
---|---|
(제35강) 헤롯왕의 핍박! (행 12:1-12) (0) | 2022.03.10 |
(제33강) 책망 받은 베드로! (행 11:1-16) (0) | 2022.03.10 |
(제32강) 베드로의 설교! (행 10:36-48) (0) | 2022.03.10 |
(제31강) 베드로! '가이사랴'에 가다! (행 10:23-35) (0) | 2022.03.1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