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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익 목사 준비중

예수 밖 삶의 아픔

by 【고동엽】 2022. 2. 27.

예수 밖 삶의 아픔

 

 

 

             

 

 

 

                                      15:13-20

 

 

 

 

 

 

 

 

                      그 후 며칠이 안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

 

 

 

                      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다 없앤 후 그 나

 

 

 

                      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

 

 

 

                      지라.  

 

 

 

 

 

 

 

 

목회를 하다보니 여러 층의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많습니다. 그리고 여러 경우를 경험하는 일도 있습니다. 때로 보람 있는 일도 있고 또 때로 웃을 일도 있습니다. 목회하는 동안 저로 하여금 가장 웃게 한 일이 한가지 있습니다. 어떤 장로님이 주일날마다 꼬박 교회 나가 주일생활을 하다보니까 억울한 생각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어느 권사 부부를 꼬여서 함께 주일날 설악산으로 놀러갔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억울하기도 할 것입니다. 남들은 주일날 놀기도 하고 가족들과 함께 놀이를 가고 피곤한데 잠도 실컷 자기도 하는데 장로는 그런 것 감히 꿈도 꿀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굳이 장로가 되려고 안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도 왜 장로가 되려고 애를 쓰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장로가 되려고 하면 그런 유혹 깨끗이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장로님이 운전대를 잡고 운전을 하는데 마음이 참 불안하더라고  합니다. 그리고 가는 동안 별 생각이 다 들더라고 합니다. “이러다 사고나지, 타이어 펑크나서 낭떠러지로 떨어지지” 무슨 생각은 안 들었겠습니까. 그래서 온몸이 긴장되었습니다. 그렇게 여행을 하고 돌아오니까 어깨가 완전히 굳었습니다. 그리고 독한 몸살을 앓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다시는 할 일이 아니더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예수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면 시원하고 자유롭고 평안하고 재미있고 즐거운 줄 압니다 그래서 떠나보지 못해서 안달입니다. 여러분, 정말 그런가 한번 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 후에 느낌이 어떤 것인가를 알아보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그렇게 한다고 차바퀴 펑크내시고 사고나게 하시고 그러는 분은 아니십니다.

 

 

 

탕자가 집을 떠나면 무한히 자유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졸라서 유산을 받아 가지고 집을 떠났습니다. 잠시 얼마 동안은 자유했습니다. 즐거움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곧 불안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죽도록 고난을 겪게 됩니다. 탕자는 하는 수 없이 아버지께로 다시 돌아갑니다. 그는 아버지께 돌아가는 즉시 잃어버렸던 평안을 되찾았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는 예수밖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 밖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우리들이 모르는 큰 아픔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그 아픔은 예수 안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잘 모르는 아픔입니다. 그 고통이 몇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실존의 불안” 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때로 혼란스러울 때가 옵니다. 그 혼란이 내가 감당하기에 벅찬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은 그때 붙잡고 의지할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붙잡을 대상이 없으면 외로워지는 것입니다. 고아를 보십시오. 고아는 배가 고파도 울지 않습니다. 울어보았자 알아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불신자들은 살아가다가 지쳐서 피곤하고 외로워 견딜 수가 없는데도 기도를 안 합니다. 왜냐하면 기도할 대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불행한 사람들입니까. 그때 오죽 고독하겠습니까. 오죽 고독하면 자살해서 죽기까지 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살아가다가 지치면 언제든지 하나님을 찾아가 기도를 합니다. 그것도 아주 당당하게 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입니까. 여러분들은 이 점을 알고 있습니까. 자녀들을 보십시오. 아빠에게 와서 “아빠 용돈주세요”하고 거침없이 요구합니다. 용돈 달라는 모습이 아주 당당합니다. 마치 맡겼던 돈 찾아가듯 당당하게 달라고 합니다. 그것이 자식이고 부모입니다. 부모가 있는 자녀들은 돈이 떨어지면 달랄 사람이 있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탕자가 아버지를 졸라 유산을 받아서 타지로 가서 마음껏 즐겼습니다. 그러다 돈이 다 떨어졌습니다. 먹을 것이 없습니다. 몸에 병까지 들었습니다. 완전히 실패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돼지와 함께 우리에서 기거합니다. 그때 온갖 고독함이 그에게 엄습해 옵니다. 오늘의 불안, 내일의 막연함, 외로움과 고독함 그런데도 호소할 대상이 없습니다. 아버지 집을 떠나고 보니까 한꺼번에 찾아오고 밀려오는 이 실존의 외로움과 고독함 이것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하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 안에 들어와 살아가는 것이 이렇게 기쁜 것인 줄 알기나 합니까. 오늘 세상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유하고 마음껏 홀가분하게 살아가는 것 같아도 그들의 가슴속에는 이 같은 아픔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불신앙자들은 참 불행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또 “성공시 기쁨을 나눌 대상” 이 없습니다.

 

 

 

 

 

 

 

사람은 살아가다가 어려울 때는 붙잡을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은 위로를 받고 격려를 받아야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가 하면 사람은 또 성공하고 기쁜 일이 있으면 함께 그 기쁨을 나눌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삶입니다. 사람이 노력하고 성공했습니다. 뭔가 이루었습니다. 그러면 그 기쁨을 함께 나눌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들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여러분, 이 모습이 얼마나 행복한 모습인지 아십니까. 여러분은 이것이 얼마나 고상하고 행복하고 즐거운 생활인지 잘 모르실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생활입니다.

 

 

 

오늘 사람들이 돈을 벌고 성공했는데도 자축할 줄을 모릅니다. 그렇게 번 돈을 쓸 줄을 모릅니다. 돈은 있는데 적당히 쓸 이유를 모릅니다. 그것은 감사할 대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기껏 돈을 쓰는 것을 보면 호화 묘지를 장만하고 집을 궁궐같이 짓는 일입니다. 그리고 회갑잔치 칠순잔치를 요란하게 벌려서 친지나 주위의 인척들에게 과시를 합니다. 기껏 생각하는 것이 먹고 마시고 누리고 즐기고 과시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 이상 기쁨을 나눌 대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탕자가 집을 나가서 한일이 먹고 마시고 놀고 즐기고 과시하는 일이었습니다. 불신앙자들과 대화해 보십시오. 그들의 최대관심사는 바로 이런 일들입니다. 왜냐하면 그 이상 누릴 대상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행복한 사람들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어려울 때는 언제든지 찾아가 호소할 의지자가 있고 기쁠 때는 그 기쁨을 나눌 대상이 있다는 것이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그런 사람들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는 “목적이 없다” 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정신 없이 돈을 벌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리고 성공하기 위해서 아주 몰두합니다, 그래서 마침내 정상에 오릅니다. 성공을 합니다, 돈을 많이 법니다. 성공한 후에 정상에 올라가서 비로소 한시름 놓고 생각을 해 봅니다. 정상에 올라가 가만히 앉아 생각을 해 보니 비로소 눈이 뜨입니다. 눈이 뜨인 후에 느낀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이것 때문에 그토록 몰두해서 살았는가”하는 회한입니다. 정상에 올라와 보니 아무 것도 아닙니다. 마음이 허무합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헛되고 헛되다고 말했습니다. 솔로몬도 무엇을 이루어 보겠다고 힘쓰고 애쓰고 노력해서 마침내 정상에 앉아 누려보고 소유해보고 가져도 보았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누려본 그는 마지막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헛되고 헛되고 헛되도다”. 가져보고 누려보니까 그것도 별 것 아니더라는 말씀입니다. 크로닌이라는 의사가 성채라는 소설을 썼습니다. 그 책을 보면 주인공으로 젊은 의사가 등장합니다. 이 젊은 의사가 처음에는 아주 참신했습니다. 그런데 후에 그는 마침내 돈맛을 알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돈과 명예를 찾느라 집착하고 질주합니다. 그때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습니다. 가족도, 의사의 자존심도, 지난날의 꿈도 다 잃어버렸습니다. 오직 돈과 명예를 위해서만 뛰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비로소 그는 눈을 뜨게 됩니다. 그 열린 눈으로 공중을 보니 새들이 날아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하늘의 뭉게구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때 그는 꿈에서 깨어난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 사람이 눈을 뜨고 보니까 허무밖에 느껴지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것 때문에 그렇게 살아왔는가”하는 자조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 애굽에 파이러스(Pyrrhus)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이 왕이 부하들에게 로마를 공격하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그때 키네아스(Cineas)라는 충신이 로마공격을 극구 말립니다. “로마를 공격한 후에는 무엇하시려고 또 싸우려고 하십니까”하고 극구 말립니다. 그때 왕이 말합니다. “로마를 공격한 후에는 시실리까지 점령해야지” “그 다음은요” “아프리카를 건너 카르타고를 점령해야지” “그 다음은요” “그리스와 마케도니아까지 판도를 넓혀야지” “그 다음은요” “그때는 큰 잔치를 베풀고 실컷 마셔야지” 그때 이 충신이 말합니다. “폐하 그것이 꿈이고 소원이라면 그 잔치를 오늘 베풀고 기뻐하소서 생각해 보십시오 그 먼 훗날 그 날 하루 기뻐하자고 오늘 그 수많은 세월을 소비하고 인명피해를 입히고 전쟁으로 민생을 도탄에 빠트려서야 되겠습니까“.

 

 

 

사람들이 정신 없이 돈을 벌고 출세하고 성공하려고 집착을 합니다. 그 일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합니다. 그래서 마침내 돈도 벌고 성공도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자신도 모르게 인생이 황혼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뭔가 남기고 싶었습니다. 자서전을 쓰고 싶었습니다. 자서전을 쓰려고 살아온 내용을 더듬어보니 한일이 없습니다. 내용이 없습니다. 자서전 쓰는 것을 포기하고 큰 묘지를 사 놓고 비석이라도 크게 세우자 하고 작가에게 비문을 요청했습니다. 작가가 인생을 살아온 삶을 이야기 해 보라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내용을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더니 작가가 심각하게 생각하더니 짤막한 비문을 써 주었습니다. 食卽死” “먹다 죽다”라는 말입니다. 이 사람은 삶과 인생에 도무지 목적이 없습니다. 지금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말하자면 이런 사람들이 탕자입니다.

 

 

 

 

탕자가 왜 집을 나갔습니까. 집을 나가서 무엇을 했습니까. 그 유산을 받아서 무엇을 위해서 썼으며 무엇을 위해서 밤을 새웠습니까. 보면 전혀 목적이 없습니다. 오늘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탕자는 꼭 방탕해야 탕자입니까. 세상을 목적 없이 살면 모두 탕자입니다.

 

 

 

 

 

 

 

 

네 번째는 “종말의 두려움” 입니다.

 

 

 

 

 

 

 

 

이것이 불신앙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부분입니다. 동시에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참 안식과 즐거움을 주는 은혜입니다. 사람들이 젊었을 때는 골똘히 일에 집착을 합니다. 아주 몰두합니다. 그래서 성공을 합니다. 그렇게 살아다가 어느덧 인생이 황혼에 접어듭니다. 그리고 병들고 비로소 종말의 문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 갑자기 심각해집니다. 그 동안은 일에 몰두하느라 이 부분에는 미처 정신을 쓰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뭔가 이루었다 싶어 인생을 회고해보니 갑자기 종말이 생각납니다. 그때부터 밀려오는 종말에 대한 압박감과 허무감으로 불안해 옵니다. 밤잠이 안 옵니다. 그러다 마침내 인생의 종착시간이 다가오면 갈 시간은 되었는데 준비는 안되었고 그 당황됨, 그러니까 사람들이 임종할 때 죽는 모습이 차마 눈뜨고 보기에 힘들만큼 어렵게 숨을 거둡니다.

 

 

 

그 모습을 보고 가족들은 “정 떼느라고 그런다”고 해석을 합니다. 정을 떼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고 갈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승사자가 와서 끌고가려고 하는데 편한 모습으로 숨을 거둘 사람이 세상 천지에 어디 있습니까. 평소에는 천국을 말하면 우습게 들리고 유치하고 고지식한 것 같이 들리지만 천국 없는 사람의 죽음은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솔직해져야 합니다. 사람은 임종이 가까우면 모두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나라가 준비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죽음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다“. 그래서 믿으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떤 분은 믿지 않고 살다 마침내 임종 때가 되었습니다. 아주 힘들게 임종을 했습니다. 임종 후에 착잡한 심정으로 조용히 그리고 엄숙하게 임종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가 끝나자 딸이 간곡하게 부탁을 합니다. “우리 아버지 영혼 천국에 가게 해 달라고 다시 기도해주세요 우리 아버지 평소 믿지 않고 돌아가셨으니 지옥에 갈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았으나 착하게는 살았으니 혹시 기도하면 천국에 갈 것 아닙니까 그러니 우리 아버지 천국가게 해 달라고 기도해 주세요”. 목사에게 그런 권한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것이 내 아버지요 내 어머니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이 내 자식이고 내 형제고 내 가장 아끼던 친구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이 예사로운 일이고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넘겨버릴 일입니까. 그래서 전도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인생은 젊어서는 실패해도 좋고 초라해도 좋고 가난해도 좋고 불행해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인생은 마지막은 좋아야 합니다. 성경은 그 점을 늘 말씀하고 있습니다. 젊어서는 놀 기도하고 때로 방탕을 해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마지막은 구원의 세계, 영생의 세계, 하나님의 나라를 쟁취하는 복을 누려야 합니다. 그것이 궁극입니다. 끝이 좋아야 합니다. 그래서 전도하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한때 좀 잘살면 무엇합니까. 인생은 그것으로 전부일 수는 없습니다. 한때 좀 잘살고 후에 멸망의 길을 가면 그 성공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그 말입니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 마지막이 거의가 다 해피 엔드로 끝나지 않습니까. 아니고 불행으로 끝을 맺으면 그 영화를 본 사람들의 기분도 찜찜합니다.

 

 

 

지금 예수 밖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성공하고 출세하고 부하게 사는 것으로 행복이라고 말할지 몰라도 그것만으로는 행복일 수 없습니다. 그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만족해하며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는 것을 자유하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오늘도 뛰어가는 여러분이 진정 행복 인이고 자유한 사람이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탕자가 다 허비하고 실패하고 병들어서 돼지우리 안에 앉아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그는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있습니다. 무한한 자유를 누려보려고 아버지 품을 떠났지만 결과는 종말의 공포 속에서 떨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없어서 고독한 것도 참을 수 있습니다. 실패하고 배고픈 것도 참을 수 있습니다. 집에 돌아갈 면목이 없어서 노천생활 하는 것도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참을 수 없는 것은 내가 지금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가 두렵습니다. 나 홀로 돼지우리에서 죽어 가는 지금 이 순간이 두렵고 떨립니다. 지금 이 세상에는 이렇게 떨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두려움과 고독함이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느끼게 되는 두려움이고 고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고 믿으라는 것이고 내 형제와 부모와 이웃을 전도하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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