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란 무엇인가 ?
예수전도단 예배학교
강사 / 김 진호 목사
# 예배의 의미 #
먼저 단어를 정의해 보자
1. 예배란 ? 웹스터 사전의 일반적인 정의는 초월자에게 경배,
고백, 기도, 감사를 통해 초월자를 향한 존경, 숭배와 경의를 표하는것.
2. 우리에게 예배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난 사람들이
그리스도 인격에 나타난 신성과 완전 구속의 역사를 인식하여 찬양,
경배 드리는 것이다. 즉, 예배는 영이 거듭난 사람만이 드릴 수 있다.
왜냐하면 예배는 관계(Relationship)이기 때문이다. 또한 완전한 구속의
역사를 인식하는 능력있는 삶은 예수님께서 표출해 주셨다. 그 핵심적인
것이 '십자가 사건'이다. 따라서 예배 가운데 우뚝서야 할것이 십자가와
보혈이다.
찬양과 경배는 하나님의 성품을 기억하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입술의 고백이 아닌 성령께서 감동, 감화하시는 찬양이 되어야한다.
3. 영어를 보면 "worth" + "ship" = Worship
즉 가치를 어떠한 대상에게 돌린다는것이다. 예를 들어 "존경하는
사장님"할때 "his worship, 사장님"이라 표현한다.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예배란 최상의 가치 "Supereme worth" 인 것이다.
# 신 구약의 예배의 본질적인 의미 #
구약 / 봉사와 섬김의 "Service"라는 의미의 예배라는 단어가 있다.
1. 히브리어 "아베다" --- 종, 노예라는 [에베다]의 어원을 갖고 있다.
예배를 섬기기 위해서는 '종' 이라는 자기의식이 있어야 한다. 낮추어진
자기의식이 있어야 섬기는 위치에 갈 수 있다. 계급 사회에서의 개념이
아니다.종과 친절한 주인과의 관계를 함축한 것이다. 종과 주인의 연합한
관계는 특권과 영광의 관계를 말한다. 다윗 역시 하나님의 종이라 했다.
비하시킨 것이 아니다. 주인에게 순복, 밀착되어 얼굴만 봐도 알 수 있는
정도로 밀착된 관계를 원하는 마음이 있다. 따라서 주님의 성품과 뜻을
알고 올바로 섬기기 위새 종이라 표현했다.
신약 /
2. "라테리아" (Service) "히스타워" --- 엎드려 부복하다라는 뜻으로
겸손한 자세를 나타낸다. 하나님께 봉사하는 예배의 자리에 서기 위해
우리의 생각, 의지 모두 주님앞에 내려놓고 순복해야 한다. "We must
subject to God ! "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아서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일하시도록...
3. 헬라어 "프로스크메어" -----을 향한 + 입을 맞추다
즉, 누구누구를 향해 입맞추다라는 뜻이다. 경손, 사랑의 내적인 마음
자세를 말해준다. 예수님께서 프로스크메어를 10번정도 사용하셨다.
(요 4장) 즉, 친밀한 사랑의 관계가 성립될 수 있다. 종교적 삶을
살았으나 기독교 실존속에 하나님은 인격과 인격으로 만나지 못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를 말씀하시면서
단어를 "프로스크메어"라고 사용하셨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던 여인에게
영적인 차원에서 하나님과 깊이 아는(성경적인 만남으로 깊이 아는 의미의
단어) 관계를 말씀하신것이다. 육정적인(Kiss의 삶)관계에서 하나님과의
아는 관계로 나아가기 위해, 그의 인격이 나의 인격이 되도록 전 삶을
드려야 한다. 하나님과 아는 관계 즉, 교통하는 관계가 성립되야 한다.
# 하나님의 선물인 예배 #
예배란 하나님께서 만드신 선물이다. 하나님 자신이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살도록 만들어 주신 선물이다. 예배의 주권이 주님의 손 안에 있다.
구약사를 보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존재인 인간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기능을 두셨다. 사탄이 하나님 나라에서 떨어짐으로 부터
아담과 하와를 향해 나온다. "You will be God" 라고 얘기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시킨다. 죄란 하나님과의 단절됨이다. 죄의식, 수치심이 있다.우리 속에 있는 양심으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 경우는 주님과의 회복으로,외부적인 조건, 여건을 통해 만나게 될 경우는 주님안에서 구원함으로 그외에는 화인맞는 양심처럼 죄를 지어도 죄인줄 모른다.
주께선 예수 이전에 그 예표로 수치를 가릴 수 있는 가죽옷을 주셨다.
그럼, 예배를 어떻게 드렸는가 ?
단 중심의 예배 / 어디서나 드릴 수 있었다. 직접적인 제사이며, 생
활 현장 속에서 예배드릴 수 있었다.
성막 예배 / 성막에만 계신 하나님, 성막에서만 예배 드렸다. 광야
생활에서의 부도덕한 삶이 드러났다. 간접적인 제사 (제사장을 통한
예배)
회당 예배 /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
오순절 이후 / 성령께서 우리안에 거하심. "하나님 나라가 여기있다,
저기있다가 아니라 너희 마음속에 있느니라"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이
하나님의 다스림,
하나님의 통치가 있다.
우리가 환영할 때, 날마다 주의 보혈로 죄를 씻어 버릴 때,
시간과 장소의 구애를 받지 않고 어디서나 올려드릴 때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가장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것이다. 인간은 잃어버린 예배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설계한 아름다운 삶을 회복해야 한다.
예배는 종교적 단어가 아니다. 우리를 자유케 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우리를 얽어 맬 수 없다. 우리를 율법속에서, 성령의 법으로
해방시켜 주는 그 첩경이 바로 예배속에 있다.
# 이 땅에서의 예배적인 삶 #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예수 믿고 영에 속한 사람들이
되었다.이들은 현실 속에서 살고 있다. 구름위에 떠 있는것이 아니다.
주님의 소원을 감당할 수 있는 빛, 소금의 본래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저것이참다운 인간의 삶이라고 도전줄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영적인 삶이다. 내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속에서 "도시의 영성, 세속의 영성"을 기르면서 하나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며 주의 승리를
고통속에 동참하며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
# 성서적인 인간미 #
인간미란 무엇인가 ?
역사를 향한 책임이 있는가 ?
역사는 역사이고 내 신앙은 내 신앙이다 ?
사탄의 궁극적인 공격은 무엇인가 ?
하나님의 백성을 속이고 영적인 상속권을 갖고자 성과 속의
이원론 적 사고로 현실을 방관케 하는 것이다.
성서적인 인간미는 인간이란 구조를 통해 흘러나오는 하나님의 성품이다.
참 된 인간의 멋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성품이 내게 내제 되었을 때,
이 땅에서 예배적인 삶을 하나님을 드러내며 사는것. 하나님의 긍휼이
흘러 넘치도록 삶을 가꾸어 나갈 때 나는 책임있는 삶을 살 수 있다.
종교적, 신앙적 삶이라고 해서 하나님께 쓰임 받는다고 해서 삶 자체까지
평가해서는 않된다. 영적 경험이 있을지라도 나 자신의 성숙이 오지 않을
수 있다. 나 자신이 하나님 성품으로 바뀌며, 나와 주님과의 관계를
바로 하는 삶을 살 때 성숙이 온다.
예배 자체가 하나님의 다스림 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제시해 준다.
하나님의 선물을 통해 다스림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초월자 되시는 하나님을 받아들일 때 새로운 가능성의 삶이 시작된다.
즉, 진정한 예배 속에 들어가면 하나님 현존 앞에 서게 됨으로 나의
부족함,연약함이 바로 점검받고, 고침 받아 새로운 삶으로 전진하게
된다.왕의 위엄이 위로부터 엄습해온다. 최대의 존엄성을 인식하게
된다. 그 분은 그 분 자리에 있고, 내 자리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
것이 예배이다. 우리 자신이 갖추어야 할 올바른 자세는 죄를 인식하고
하나님의 위대함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보좌앞에
나아가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나아가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열정이 " 그 분을 만난다"는 것에 있어야 한다.
내 죄의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는것이 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 그러한 신뢰가 있으므로 담대하게 하나님앞에
나아갈 수 있다.
# 굽어진 선로는 없는가 ? 성숙 & 성장 #
예배는 하나님을 위해 존재한다. 예배는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그
무엇이다. 예배는 하나님 말씀과 역사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우리를 통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L가는 것이다. 우리는 간이역의
선로라고 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역사에 반응하는 존재인것이다.
예를 들어 예배의 열차가 있다고 하면 예배 열차가 잘 지나가도록
(도착해서 다시 떠나는 것) 즉, 감격, 감사함으로 올바로 받고 다시
실어서 올바로 올려 드려야 한다.
반응해야 할 인간이 만약 굽은 선로라면 열차는 탈선한다.
1) 크게는 자신의 '인격'이라 볼 수 있다. -- 지.정.의 (전 실존적)
2) 작게는 우리의 '생각'이다. (그 안에 내포되어 있는 mind - 생각,
heart - 속 인격)
성경에는 두 마음 품은 L신자에 대한 얘기가 있다. mind (마음의 생각)
에 공격이 올 수 있다. 우리의 mind 또는 인격이 굽어 있을때 우린
올바르게 반응할 수 없다. 생각이 하나님 앞에 올바르지 못할때 두 생각이
있게 되고 마음에 이상이 오게 된다. 본질적으로 하나님앞에(예배열차에)
반응하려면 우리자신을 하나님 빛 안에서 날마다 점검해야 한다. 그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기준점,
정도, 곧 바른길이다. 바른 길에 들어가기 위해선 정직(honesty)해야
한다.굽은 선로를 자꾸 곧게 펴가야 한다.
몸은 성장하지만 인격은 성숙하지 않을 수 있다. 교육할 때도 지식은
성장하지만 인격은 성숙하지 않을 수 있다. 굽어진 선로속에서 예배에
참석, 예배를 경험하면 성장은 아나 착각에 빠질 위험이 많다.
주님앞에 나아가서 깨뜨려야 한다. 내 속에 있는 것을 다 뒤집어 내서
봐야한다. 하나님 말씀으로 보아서 정직하게, 바르고 곧게 세워야 한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굉장한 심령의 고통속에 있을 때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라고 기도 했는데 그래야 회복된다. 자꾸 내 자신을 속이고
내 이웃을 속이면 내 실존과 삶의 이중성 속에서 나의
'자아의 위기'가 온다.
바른 관계속에서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가 가장 아름다운
삶이 된다. 우린 날마다 문제없이 정돈해 갈 수 있다. 하나님의 성품을
부여잡고 나를 볼 수 있다.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에 정복되어져 굽어진
부분이 청소될 수 있다. 그러나 '굽어진 지체'는 우리 스스로 바로 잡고
고백하고 "주님, 이 부분이 잘못되었습니다"라고 의지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망치가 옴을 환영해야 한다.
그 분의 역사에 내가 통역자로 서지 않으면 않된다. 그러L나 어떤 부분이
계속해서 넘어지게 된다. 그것이 수라장이 되게 한다. "주님, 청소해 주시
옵소서" 기도하여 또 정결케 해주시고 자꾸 정결케 됐다, 또 더렵게 됐다..
이는 정돈하는 신앙이 된다. 단지 종교적 신앙은 있으나 성숙은 없다.
몸은 저처럼 크지만 일곱살의 정신을 갖은것 처럼...
날마다 우리 마음의 변화를 받아야 한다. (롬 12:2)
오직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heart --> 인격 --> 전 실존이 새롭게 된다.
정직한 선로를 갖게 되면 하나님 열차가 위로 부터 발원되어서 하나님
축복을 간이역에 내려놓고L 우린 주님 앞에 경배와 사랑을 듬뿍 올려드리면
주님께서 "허허" 웃으시게 된다.
예배(찬양) 인도자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점검해야 할 부분이다. 내 생활
가운데 계속 정돈 밖에 못하게 하는 그 연약한 부분은 무엇인가. 그것을
주님 앞에서 보고 계속해서 잡아가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의 성품이
흘러나가는 것이다. 그럴 때 인도자를 통해 그대로 하나님의 능력, 사랑,
위로가 전달되어져서 공동체가 모두 하나님께 사랑합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된다.
# 인생의 목적 #
웨스터인스터 소요건 문답 제 1번은 L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에 대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 분을 영원토록 즐기는 것이다 라고 되어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반쪽 레일로는 불가능하다.
A
하나님 <---------------------> 간이역
B
A ---> B 로 와야 영광이지 A 만으로는 안된다.
그럴 때 enjoy 하게 된다
" To enjoy Him forever "
우린 enjoy 해야 한다. 종교적으로 묶여있는 것에서 부터 자유롭고
해방되어야 한다. 영혼이 해방받아 기뻐 뛰노는 축제의 현L揚潔杵 한다.
기독교가 사실 즐기는 종교이다. 누구를 ? 하나님을, 세상을, 세상에
속해있는것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즐기는 것이다. 피상적으로
즐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가 되도록 간이역 예배가
온전한 예배가 되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을
즐거워 하는것이다. 예배는 하나님 중심이어야 한다. 인간 중심의
예배는 더 이상 예배가 될 수 없다. 무속 신앙이거나 자기 완전을
기구하는 하나의 종교적 모임으로 전락해 버린다. 인간중심이 아닌
예배의 발원이 하나님 이L 시기에 하나님이 시작이요 하나님이 즐긴
예배가 되어야 한다.
# 잘못된 예배 #
1. 자기 물질 축복을 간구하기 위한 예배는 잘못된 예배이다. 예배는
무조건적으로 하나님의 위상을 생각한다. 나의 나 된것은 하나님의 은혜
이다. 무조건적인 경배, 사랑, 찬양을 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뭔가
가지겠다는 것은 주님을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잘못됐다.
부모님께 어린시절에는 달라고 했지만 커서는 마음깊이 감사를 표시하고
무언가 해 드리고자 하듯이 이제 주님 앞에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2. 자기 정서적, 정신적 불안을 해결하기 위한 예배는 잘못됐다.
부차적인것이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따라오는것이다.
3. 영적인 만족, 욕구충족인 예배는 자기 중심적이다. 물론 영적
만족이 필요하다. 그러나 영적 충만과 자기 충족은 다르다. 예를 들어
기도는 열심히 하지만 자기 중심적인 간구를 할 수 있다. 선한것은 구하나
그 선한 것이 하나님 앞에 예배적으로 드러나지 못하는 관계 속에서 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4. 자신의 문화적 생활의 한 방편으로 여기는 예배
5. 다른 사람의 강요에 의한 L예배
6. 병 고침을 위한 예배
7. 음악, 분위기 때문에 드리는 예배
8. 다른 사람과 사교하기 위한 예배
A.Tozer 는 누구든지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을 수단으로 찾는 자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을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수단이 아니라 우리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예배자는 "네 마음, 목숨,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만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드리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 예배 자체가 또한 하나님의 독L점물임을 인식할 수
있을것이다. 위의 귀절은 예배의 핵심 말씀이다.
서기관 중 한 사람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첫째 계명을 물었을때
대답하신 것이다. "네 마음을 다하고"는 99 % 가 아닌 100 % 를 원하신다.
모두 예배 가운데로 들어가야 한다. mind, soul, heart, strength 모두
이를 경험한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신다. 우리의 삶
속에 일어나야 할 일을 일으키시면, 없애야 할 일을 없애시는 전 인격적인
통치가 있게된다.
# Worship is dynamic power ! #
예배는 역동적인 힘인 것을 L믿읍시다 !
하나님은 모든 힘의 근원이시다. 그러므로 간이역을 통해 흘러 나갈 때
위로부터 힘이 나에게 전해진다. 이 일을 위해 우리를 자신의 동역자로
세우셨다. 얼마나 큰 특권인가. 그러나 아담, 하와의 죄로 단절되어
통치권까지 상실하게 되었었다.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 관계 회복의 길을
어 주심으로 잃어버린 통치권을 행사하도록 해 주셨다. 그러므로 예수를
영접한 자는 닫혀진 세상에서 열려진 세상으로 들어가서 새로운 인격체가
된다. 갇혀진 세상에서 해방받고 예수로 충만함을 알고 그 세계관 속에서
예수를 통해 열려진 세계로 들어 가는것이다. 이전에는 사탄의 권세에 눌려
있었지만 이제 그 땅이 우리 땅임을 알고 그 땅을 회복하러 소금,
빛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 통치권을 행사 할 수 있어야 한다. 그 힘을
예수를 믿는자는 바로 예배적인 관계속에서 하나님께 역동적인 힘을 얻어
행사할 수 있게 된다. 그 힘은 예배적인 관계속에서 힘의 이동으로
하나님의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게 하며, 이 땅의 어두운 세력을 몰아내고
확장할 수 있는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게한다.
# 'Bridge builder'인 왕 같은 제사장 #
동역자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왕같은 제사장이다.
이원론적 가치관으로 "제사장"이 실제적 삶과 거리가 먼 다른 세계의
신비적인 사람으로 생각케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선입견과는
달리 "Bridge builder"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인식하라.
이전에는 "시간, 공간 제외적인 활동하는 사람"으로 여겼는데 전적으로
틀리다.예수로 말미암아 왕같은 제사장이 될 때 우리를 종교적인 모습으로
꾸며가는 삶으로 전락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모습에서 해방시
키며, 세상 안에서 다리가 될 수 L있도록 역꾼으로 쓰임 받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왕같은 제사장은 섬기는 삶이다. 어둠의 언덕에서 생명의 언덕으로
옮기는, 다리가 없고 수직적인 부분만 있으면 어떻게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생명으로 올 수 있겠는가 ?
기둥없는 다리는 인본적인 다리 즉, 바벨탑과 같다. 왕같은 제사장
에게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성령 충만케 하시며 하나님의 역동적인
힘을 주신다.
온전한 예배 없이는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갈 수 없다. 그러므로
예배를 바로 인식해야 한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하L햴 자신의 역동적인 힘을 받고 옆으로
분출시키는 수평적인 힘으로 이동되어야 한다.
즉, 예배는 힘의 이동이요, 그에 의한 변화이다.
다드림 찬양과 경배학교
박 정관 목사
요 4: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
느니라" 이 말씀을 직역해보면 "참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안에서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오는데, 바로 지금이다.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예배하는 이런 자 들을 찾으신다"는 것이다.
인격체 위에 기름부으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찾으신다!' 예배적인사건, 프로그램, 행사, 시설, 장치를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예배자를 찾으신다. 예배에 도움이 되는 악기,
장소, 시설이 아닌 훌륭한 프로그램, 분위기가 아닌 예배하는 인격,
예배하는 자, 그의 중심을 찾으신다. 하나님은 기계위에 기름 붓지
않으시며, 프로그램위에 기름부음을 하시는것이 아니다. 물론 기계,
시설을 '도구'로 사용하신다. 주님은 예배하는자, 주님을 바라는 백성
즉 그의 인격체에 기름부으신다.
요즘 T.V. 영화들 가운데 New Age 성격의 작품들이 많다. 기계가 인간처럼
사고하고 추리, 행동하는것이 많은데, 예를 들어 "터미네이터"를 보면,
연약한 육신의 인간보다 고도의 전자회로로 지능이 높은 기계가 등장한다.
그러나 이 세상 모든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것은 인간 뿐이다. 인간만이
다스릴 수 있는 존재로 지음 받았다. 절대로 기계가 다스릴 수 있는 시대는
오지 않는다. 분명히 인격체가 다스리는 것이다.(아니면 어떤 영적존재가)
하나님은 인격체위에 기름부음을 허락하셨다. 기계는 사용하실 뿐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쓰임받는 존재도 인격적인 존재이지 기계는 아니다.비젼을
갖고 사업을 하며, 주의 나라를 증거하기 위해 일하고자 하는자는 좋은
입지 여건과 돈을 구하기전에 사람을 먼저 찾아야 한다.사람 즉 그 인격을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동일한 비젼, 마인드, 영, 생명을 가진 동역자를 위해 기도하라.
예배자 일꾼
하나님은 왜 예배자를 찾으시는가 ?
예배자는 바로 주의 마음을 품고, 주의 생각을 받고, 주와 동행하며,
주에게 순종하며 살아갈 사람이기 때문이다.
마 9:36-38 많은 사람들이 목자없는 양같이 유리함을 보고 민망히 여기신
예수님께서 "추수때에 추수할 일꾼이 없다"고 하셨다.
마지막때에 일꾼을 놓고 기도해야 한다. '그냥 일꾼'이 아니라
'예배자 일꾼'을 위해 주님과의 교제가 있고, 주님 앞에서의 엎드림이 있고
주님과의 사귐이 연장되어있는 일꾼.그는 많은 일을 하는것이 아니라 합당한 일을 해야 한다. '그냥 일꾼'은 품 삯에 관심이 있는자이다.댓가대로만
살아가며 늑대가 오면 양을 버리고 달아날 삯군이다. 그러나 바로 주님을
찾으시는 일꾼은 부르심이 있는자이다.
일꾼의 특징을 살펴보자
1. 보수(품삯, 댓가)
주님과의 관계에서 본다면 땀흘려 얻은 댓가로 여겨서는않된다.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땀흘려 일할 자리가 있다는것은 주님께서 주신 축복이다.
기업주를 섬기는 것도 아니고, 소비자를 섬긴것도 아니고, 바로 주님을
섬기는 것이다. 그리고 윗사람, 아랫사람을 섬기는 것이다. 월급은
주님께서 주신 은사, 선물이다.
"나는 무익한 종이라, 해야 될 일을 했을뿐이다." 라고 여겨야지"일해서
당연히 받는것이다"라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 직장을 다른사람과 비교하면서
생각하게 될 것이다. 직장은 초봉과 상여금으로 선택한다면자꾸 옮기게 될
것이다. 주의 부르심 안에서 생각해야 한다. 교회안에서 돈을 받는 사람도
사례비를 받으면 일하고 안주면 일 안하는 것이 아니다. 돈 안받고 봉사하는 분들도 마찬가지로 위험하다.
2. 인정
내가 돈도 안 받고, 내 호주머니 털어가면서 주를 위해 일했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관심도 없는 교회, 사랑도 없는 교회라고 한다. 누구의
부르심을 받고 누구를 섬기고 있는가 ? 사람의 인정은 받아도 되고 안
받아도 되는것이다.알아주고 안 알아주는 것에 속아서는 안된다. 알아주고
인기 있는것은 신기루이다. 인기 없는 것보다 인기 있는 것이 나은가 ?
알아주면 여러분에게 무슨일이 생기는가 ? 남이 나를 알아주면 무슨 이익이
있는가 ? 우쭐거리게 되므로 교만해진다. 내게 해로운것이다. 유명해지면 겸손을 간구해야한다.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도록...
"유명해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아멘
"아무리 알아주지 못해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알아주는것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것을 의미있게 만드는 다른것이 있다. 세상에
드러나는 것이 주님의 계획이라면 드러나게 하실 것이다.
3. 자기 발전
내가 뭐하러 이 곳에 있는가 ? 남들은 저기서 저렇게 됐는데... 나는
여기서 뭔가 ? 요즘은 경쟁사회이다. 주님안에서 물론 신실하게 자라나는
'성장'이 있다. 주님의 계획이 자라게 하시는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우리의 부르심을 평가할 수 없다. 발전이 있으면 하고, 발전이
없으면 안 한다면 결국 나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일꾼은 위의 조건에서 하나라도 떨어지면 불안하게 되어있다. 세 가지가
모두 없으면 안절 부절하다가 그 곳을 떠나게 된다. 하나님 아버지의
부르심을 받고, 있어야 할 곳에 있는자는 확고하며, 요동치 않으며,
흔들림이 없는 안정되어 있는자이다.
예배자는 흔들림이 없다. 시편 62편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
오직 하나님은 나의 반석, 나의 구원, 나의 산성이라는 것은 확정된
상태에서의 고백이다. 반석이신 주님앞에 주의 신실하심을 드러내는
예배자가 되어야 한다.
아버지께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자
1. 요 4:23의 배경은 예루살렘에서도 아니고 이 산에서도 아니고
영에서 진리에서이다.
2. 아버지께 예배하는 자
사마리아인에게 주님은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한다" 고 하셨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개인 예배, 경건의 시간을 보자. 정말 아는것을
예배하는가 ?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것을 예배하고 있다.
1) 아버지께
우리가 예배하는 대상은 아버지이다.그러나 우린 음악을 예배할때가 있다.
왜냐하면 예배는 관심이기 때문이다. 만약 주일에 낚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면 우린 낚시를 예배한 것이다. 주일이 지난 오늘도, 아직도 낚시
생각을 한다면 역시 낚시를 예배하고 있는것이다. 로미오와 쥴리엣은
서로를 예배한다. 한 자매가 "나는 음악을 너무 사랑한다"고 했다. 그는
음악을 예배하고 있는것이다. 어떤 사람이 난 하나님보다 어머니 생각을
할 때가 많다고 했을때 그것은 차원이 다른것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실제로 관심과 삶의 우선권을 어디에
두고 사는가 ? 그 부르심의 충돌이 일어날 때 무엇을 선택하며 사는가 ?
인생의 궁극적인 관심과 목적을 누구에게 두고 살아가느냐 ?
우리는 얼마든지 다른것을 예배할 수 있다.
참으로 아버지를 예배학 있는가 ? 그는 나의 '아버지'이다. 여러분은
예배를 준비하는가 ? 준비한다면 무엇이 최상의 준비겠는가 ? 예를 들어
내가 한 자매을 초청했다면 자매는 그 날 아침 머리 손질을 하고, 옷을
단정하게 입고, 선물 또는 꽃을 준비할 것이다. 그 자매가 집으로 다시
돌아갈 때 특별한 준비를 또 하겠는가 ? 그 자매의 아버지가 나보다 덜
소중한가 ? 그렇지 않다. 아버지가 소중하다. 그러나 특별한 준비를
하지 않는다. 그냥 집에 간다. 그냥가도 아버지가 붸아내지 않는다.
우린 이미 준비된 사람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생명을 받은
사람이라면, 자녀된 권세를 받은 이라면 이미 주님앞에 나아갈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이다. 주님께서 거부하지 않으신다. 쟤는 왜 늘 플랫이
되지 ? 저 공포의 바이브레이션... 안 부르면 남의 목소리난 안 갉아먹지!!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는 준비는 다른데에 있다. '자녀'로서 나아가는
준비를 원하신다. 자녀된 준비를 하지 않고는 다른 어떠한 것도 아무리
치장하고 장식해도 주님 보시기에는 가증스럽다. 왜냐하면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마리아에서는 우상 숭배를 했다. 거기엔 장엄한 의식이 있었을 것이다.
예루살렘에서는 신앙의 정통성을 강조하여 '아버지께' 보다는 '예루살렘'을
드러냈다. 부차적인 것에 관심을 두기가 쉬운것이다.
지난 번 Bob Fitts의 찬양인도에 참석했다가 그의 예배인도가 너무나
은혜로와서 "어떻게 예배 준비를 하십니까 ?" 질문했을때 그는 "저는 항상
예배합니다"라고 대답했다.
부모님과 사이가 좋은가 ?
무엇이 않좋게 만드는가 ?
내게 있는 문제는 무엇인가 ?
사랑하는 관계, 애인관계... 그 관계를 소원케 하는 요인은 무엇인가 ?
무엇이 서먹서먹하게 하는가 ?
자녀된 우리와 아버지의 관계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잘못하십니까 ?"
"아니오" 문제는 우리에게 있다.
아버지가 이미 아들을 용납하셨음을 오해하기 때문에 생겨난 문제일
것이다. 댓가를 치룬 용서가 아니다. 말로 용서 받았다. 그러나 우린 자꾸
자기 공로의식이 있어서 말로 용서 받은것 갖고는 안 될것 같아 한다.
또는 내가 떳떳할 때까지 기다리자 ! 라고 여긴다.
은혜의 보좌앞에 담대히 나아가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근거하여...
자녀로써 아버지 앞에, 믿음으로 해야하는 고백이 있어야 한다.
입술의 차원이 아니라 내적인 전 인격의 변화와 결단이 있어야 한다.
주님께선 항상 우리를 받을 준비가 되어있다. 우리의 자녀됨이 항상
아버지께 나아갈 준비가 되어있는것이다. 단지 죄의 담만 보혈의 공로를
힘입어 해결하면 된다. 남들이 찬양, 경배드릴때 고통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 난 또 오늘 마당만 밟고 갈 것인가 ? 왜 아직도 지성소에 들어가지
못하는건가 ? 왜 아직도 문 가에, 문 밖에 있는가 ? 난 왜 ?그런 고민들을
할 수 있는것이다. 예배는 즉,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은 그 자체가
영적인 전쟁이다. 잡 생각들이 많고, 대적해야 할 것이 많다. 그러기에
손, 발을 씻고 예수의 피에 의지해서 나아가야 한다. 저절로 되지는 않는다.
2) 영으로 진리로
찬양과 경배의 자리는 육도 아니요, 혼도 아니요, 영에서이다.
영적인 예배 ! 성령의 역사에 내 영이 반응하므로 내 혼과 내 몸이
일치하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영적으로 예배한다는것을 신비주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아니다. 환상 만이 아니다. 지상에 속하지 않은 초자연적인
것은 인정한다. 예를 들어보자
'영적인 식사'란 무엇인가 ? 한 번 먹고 기도하고, 한 번 먹고 찬양
하는것인가 ? 아니다. 하나님의 식사에 대한 계획이있다. 폭식은 원치
않으신다. 나는 건강을 위해 짜고 매운것을 절제하게 되었다.
속에 들어가면 좋지 않은 것을 알도록 지혜를 주신다.
이처럼 성령의 인도하심을 믿으며 맡기는 삶이 영적인 삶인것이다.
진리의 말씀안에서 구체적으로 수행해 나갈 때 영적인 식사, 영적인
직장생활, 영적인 공부가 된다.
영으로 예배 드린다는 것은 진리로 예배드리는 것과 같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예배는 진리의 말씀에 근거해야
한다.
손을 드는것을 모르는 사람이 손을 드는것이 예배 드리는데 방해된다고
느끼면 안들어도 된다. 그러나 자기 기분, 생각만으로는 않된다.
하나님의 계획을 알아야 한다. 매 번 찬양 드릴때마다 손을 드는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믿음의 손을 들어야 하고, 믿음의 손을 들지 않아도
될 때가 있음을 알게된다. 눈을 감고 기도해도 되고, 눈을 뜨고 기도해도
된다. 주님이 주신 분량을 따라 하면 된다. 문제는 내가 누구에게 기도
하느냐 ? 내게 방해가 되는가 않되는가 ? 이다.
주의 말씀에 합당하면 내게 맞이 않아도 극복해야 하며 주의 말씀에
부당하면 내게 맞아도 포기, 버려야 한다.
출 39.40장을 보면 "여호와께서 명하신대로 되니라" 라는 말씀이
약 38번 나온다. 즉, 그대로 안들었을 때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임하는지라" 기록되어 있다. 주님의 계획을 따라 나아갈 때 주의
영광이 드러난다.
아무리 우리 보기에 좋더라도 주께서 보시기에 사망의 길일 수 있다.
그러므로 진리 안에서 예배 드려야 한다. 주의 말씀에 근거해서 주께서
원하시는 대로,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예배하는 자리에서 망하게 될 수 있다.
우리의 편견을 다 내려놓는 것이 필요하다. 전통도 내려 놓아야 한다.
인간적인 사고 방식도 내려놔야 한다. 어떻게 ? 주님 앞에 "오직 말씀으로"
다시금 외쳐야 한다.
우리의 자유를 따라 예배하선 않된다.
우리의 관습을 따라 예배해도 않된다.
주님을 계획을 따라 예배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여긴 너무 소란스럽다. 시끄럽다. 요즘 찬양모임이 경건치
않다고 거부한다면, 주일 예배가 딱딱해서 부자연스럽다고 거부한다면
주님의 계획을 바로 알고 있는것이 아니다.
자유냐 메임이냐로 판단해서는 않된다. 주님의 계획으로 봐야한다.
주님의 자유가 문제가 되어야한다. 우리의 계획이 주님의 계획을 따라
나아갈 때 그것이 진리안에서 예배 드리는 것이다.
우리영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었기에 우린 영적인 분별력이 있다.
때론 어린아이 처럼 젖을 먹고, 장성하여 단단한 식물을 먹지만 그리스도인은
영으로 난 자요, 위로부터 난 자요, 거듭난 자요, 성령으로 난 자이다.
그 안에 영이 있으므로 영이 반응하게 되어있다. 그 영이 움직이는것을
따라 주님 앞에 나아가는 영에 속한 사람들(고전 2,3장) 되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영이 자란다.
찬양모임이 식상해져간다. 프로그램이 동이 난것이 아니다. 인도자나 그
팀이나 회중이 똑같이 예배자로 자라있지 않기 때문이다. 프로그램이 이
전보다 다른것, 뭔가 우리에게 맞는 것을 찾으며 해 왔지만, 이제 바닥이
난 것이다. 탈출구가 있어야 한다. 길을 열어 주셔야 한다. 새로운 프로그
램인가? 대규모 집회인가 ? 나쁜것은 아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예배자로
자라지 않으면 않된다. 중요한 시점에 와있다. 오늘날 찬양과 경배모임에
감사드린다.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예배자로 자라도록 훈련되어야
한다. '예배자로 세워주소서' 이를 위해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한 번 더
자라는 예배자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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