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의 구원과 성화 요일4:1 출처
오덕교 교수
우리가 신앙의 기초를 어디에 놓느냐에 따라서 신앙의 형태가 달라집니다.
신앙의 기초를 감정과 체험에 두게되면 신비주의자가 될 수 있고,
지성과 상식에 둘 때 바싹마른 합리주의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않는 균형잡힌 신앙이 교회생활의 중심이 될 때
교회가 건실하게 부흥할 수 있지만
한쪽으로 치우칠 때, 무질서와 혼란 가운데서 교회는 모래위에 세운 집과 같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균형은 바른교회 운동의 기초가 됩니다.
▲신앙의 균형 유지를 역설하면서 바른교회 운동을 이끌었던 교회 지도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을 든다면, 조나단 에드워즈를 들 수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18세기에 미국에서 대각성 운동을 이끌었던 사람입니다.
대각성 운동과 함께 신앙 체험을 히스테리 현상으로 간주하는 합리주의자들과
모든 종교 현상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으로 간주하려는 광신주의자들에 의해서
참된 신앙이 도전을 받자
에드워즈는 신앙 체험을
인위적인 상상과 성령의 사역을 구별 함으로써
구원에 이르는 신앙과, 구원 그 이후 성도들이 살아야 할 방법에 대해서 규명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에드워즈의 신앙관, 그리고 구원 이후의 삶에 대해서 논하면서
에드워즈의 생애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던 대각성운동 과
대각성운동의 일어난 여파로 나타난 현상에 대해서 논하면서
에드워즈와 그의 성화론을 우리가 엿볼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대각성 운동에 대해서 살펴보고
그다음에 대각성운동에 대한 반응들,
그리고 성화에 대한 입장과
또 에드워즈의 성화에 대한 사상이 오늘날 한국 교회 교훈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에드워즈는 1730년대 중반에 노스햄튼 부흥 운동을 경험했고
1740년대 초반에는 대각성 운동을 주도했습니다.
1734년 가을 에드워즈는 알미니우스 주의가, 그가 목회하던 노스햄튼 지역에 번지기 시작하자
Justification by faith 라는 일련의 설교를 통해서 그 위험성을 지적했습니다.
이신칭의에 대한 에드워즈의 설교가 끝난 다음
12월부터 비상한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대여섯 사람이 갑작스럽게 회심하면서 부흥운동 시작되었습니다.
에드워즈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들의 각성 소식은 온 마을에 걸쳐 젊은이들과 기타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전광석화처럼 퍼졌다. 진지함과 거리가 먼 사람들, 그리고 그것을 악용할 것이라고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사람들이 크게 각성하였다.
이 일이 있은 직후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마을전체 주민들이
기독교의 위대한 일들과 영원한 세계에 대한 크고도 엄숙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마른뼈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모임과 만남에서 모든 대화 내용은 오직 신앙적인 일에 관한 것이었다.
사람들의 마음을 세상으로부터 신기하리만큼 멀어졌다 (중략)
그리고 신앙적 목적을 위해서 개개인의 집에서 자주 함께 모이곤 하였다.
그런 모임이 예고 되면 늘 그 집은 만원을 이루었다."
에드워즈는 이 부흥운동이 현상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 부흥운동이 시작되면서 구원을 체험한 성도의 수가 늘어나면서
주민들의 태도도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대화의 내용도 바뀌어졌습니다.
예배의 개혁도 이루어졌습니다. 에드워즈의 증언입니다.
"1735년 봄과 여름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타운에 가득해 보였다.
마을이 그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 영적 고뇌로 가득찬 적은 없었다.
거의 대부분의 가정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의 놀라운 표시가 있었다.
곧 가족에게 임한 구원으로 인한 기쁨으로, 부모들은 거듭난 자녀들로 인해서,
부부들은 상대방으로 인해서 기뻐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임재가 타운에 가득해 보였다.”
"이들은 상대방으로 인해서 기뻐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역사는 예배 가운데서도 일어났다.
주의 날은 기쁜 날이었고, 그의 장막은 사랑스러웠다.
공중예배는 아름다웠으며 예배 때 사람들은 생기로 넘쳤다.
모든 사람들은 공중예배에 열심히 참석하고
청중들은 목사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한 마디도 빼놓지 않고 들으려고 귀를 귀울였고
말씀이 선포되는 동안 수시로 눈물을 흘렸다.
어떤 이는 죄에 대한 슬픔과 고뇌로 울었고
다른 이는 기쁨과 사랑으로 눈물을 흘렸다.
이떤 이는 이웃의 영혼에 대한 염려와 동정으로 울었다.
우리의 공중 찬양도 훨씬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렇게 그는 예배 부흥이 있었음을 설명합니다.
▲이러한 부흥과 함께 1735년 3월과 4월에, 에드워즈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거의 하루에 네 사람, 일주일에 30명이 회심하는 일이 일어났다.
보통 때 같으면 사람들이 가능한 모든 노력을 다 동원하고
일상적인 수고를 다 사용해서 일년 동안 얻을 수 있는 성과를
불과 며칠 만에 완수한 셈이다!
그 결과, 6개월 만에 3백 여명 이상이 회심을 체험했고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의 수도 620명으로 늘어났는데
이는 사실상 노스햄턴 Northampton에 살던 모든 성인들을 총망라한 숫자였다"
노스햄턴에 살던 사람들이 다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교회에 들어왔다는 보고입니다.
이러한 부흥의 소식이 확산되면서 주변의 도시들에서 이곳 Northampton을 와서 방문하고
그러면서 부흥운동은 확산됩니다.
싸우스해들리, 써필드, 디어필드, 해필드, 웨스트 스프링필드 이런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나중에는 (당시로서는) 멀리 있는 예일 대학이 있는 뉴헤이븐 까지 부흥운동이 확산됩니다.
이것이 노스햄턴에서 일어났던 부흥운동이었습니다.
▲그로후터 5년 후에는 The Great Awakening 대각성운동이 일어납니다.
이 운동은 조나단 에드워즈와 조지 휫필드에 의해 주도되었습니다.
휫필드가 가는 곳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발디딜 틈이 없이 군중이 운집하게 됩니다.
휫필드는 1739년 10월 중순, 노스햄턴에서 나흘간 설교했습니다.
휫필드는 설교할 때, 성도들의 영적인 퇴보를 질책하면서
다시 한 번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역설하자 교인들은 전례없이 녹아내렸으며
거의 전 교인이 설교 시간 내내 울었습니다.
그 후 주민들은 신앙을 대화의 주제로 삼고, 자주 신앙적인 모임을 가지며
모든 죄를 의식하며 설교 말씀을 듣는 일에 더욱 적극성을 보였습니다.
그게 12월 중순 경에 청년들 사이에 다시 한번 죄에 대한 각성과 회개운동이 일어났고
1740년 5월이 되면서 노스햄턴 부흥은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에드워즈는 이렇게 얘기 합니다.
"신앙을 고백하는 많은 젊은이들과 어린이들이 하나님의 위대함과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느끼면서 하나님을 찬미하고 사랑하며 기뻐하면서 높이가 받들었다.
스스로 자유인(불신자)으로 간주하던 사람들에 대한 깊은 동정심을 드러냈으며
동시에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비참한 처지나 상태에 대한 근심으로 압도당했다.
(자기 죄성에 대해서 괴로워 했다는 얘깁니다)
이와 함께 예배 중에 부르짖음과 기절하는 현상이 나타났고
(이제 부흥운동이 조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여기서부터 보게 됩니다)
큰소리로 울면서 거리를 지나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1741년 여름, 예배당에 모여서 부르짖는 소리가 처음으로 들리기 시작했고
많은 교인들이 공중 예배가 끝난 후 예배당 머무르면서
신앙적 각성과 감동이 사라진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자 했다.
그들의 영향으로 기도와 찬송과 금식이 시작되었고
이런 체험을 통해서 그들 중 일부는 구원에 이르는 은혜를 받았다고 믿었다."
▲이때부터 광신적 신앙운동이 움트고 있음을 에드워즈가 지역을 하고 있습니다.
대각성운동으로 인한 죄의 각성과 회심이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대각성운동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과거 어느 때보다 자기 본성과 생활의 죄들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이런 각성은 생활의 겸비로 나타났습니다.
'더 겸손해지고 자신을 비우게 되었으며
더 상한 마음이 되었고 더 순수하고 높은 기쁨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체험하면서 겸손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부흥운동을 통해서 뉴잉글랜드의 당시 30만 인구 가운데
25만 명이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경건한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선교운동과 함께 신대륙을 이끌어갈 젊은이들을 양성하기 위한 대학들이
속속 들어서게 됩니다.
또한 애국심이 고취되면서 미국 독립을 위한 새로운 준비들이 시작되었습니다.
자 이러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있으면서
신앙운동을 어떤 감정적으로 보려는 광신주의 운동이 (일부 부작용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반면에 대각성운동은 부정적인 면도 만만치 않았다.
뉴잉글랜드에 부흥운동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과격한 부흥운동가들은, 목사를, 회심한 목사와 그렇지 못한 자로 구분하였으며
말씀보다는 성령의 은사 와 영적인 체험을 강조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극단적인 광신주의 운동은
제임스 대븐포트 대븐포트 라는 사람에 의해서 주도되었습니다.
그는 신앙생활에서 신앙심에서 감정의 중요성을 주장하면서
방언, 예언, 신유 등 신비로운 은사 체험을 강조하였고
성경 이외의 책은 모두 불사르는 등 광신적으로 행동했습니다.
광신주의자들들은 인간의 상상력을 동원해서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영적으로 해석하고
모든 종교적 현상들을 하나님에게서 온 것처럼 간주했습니다.
이런 광신주의 운동은 대각성운동 전개 과정에서 고개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대각성운동을 통해서 죄를 깨닫고 구원을 체험한 사람들이
기쁨과 놀람으로 인해서 팔짝 팔짝 뛰게 됩니다.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는 동시에 눈물이 홍수처럼 흘러내리면서 큰 소리로 울기도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갈망 속에서 하나님의 알고 그를 사랑하며
그분 앞에서 겸비해지고 그리스도와 교제하고 싶어했습니다.
이러한 신앙적 감정적 표현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과격하게 나타났고
인위적인 상상과 확신을 추구하면서, 신비체험을 신앙의 본질로 이해하기 시작하게 됩니다.
어떤 이들은 회심에 대한 확신을 다지기 위해서
회심 날짜를 확인하고자 했고
기도하고 금식하면서 종교적 감정과 체험을 극대화하기 시작하겠습니다.
1741년 이후 광신주의자들이 조금씩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했을 때 에드워즈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사람들이 일종의 황홀경에 빠져서 24시간 계속 꼼짝도 않고 누워 있었다.
그들의 감각은 마비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동안 그들은 강력한 상상 속에서 마치 천국에 올라가
영광스럽고 희열을 주는 물체를 본 것 같았다.
그러나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 사탄이 그 틈을 이용했다.
대부분의 경우에 사탄이 즉시 그 기회를 타서 역사하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들 다수가 이성을 잃고 날뛰지 않도록 하기 위해 주의를 기울이고 수고를 쏟는 것이 필요했다."
은혜 체험을 하면서 어떤 감정을 강조하면서
(일부가) 극단으로 나아감이 있었고, 여기에 대해서 에드워즈는 경고를 해야 되겠다는
하는 얘기를 책에서 하고 있습니다.
이 광신주의자들은 영적 황홀경을 통해서 오는 직접적인 계시를 구했고
이 직접적인 계시를 통해서 모든 광신적 인상,
즉 기도 중에, 또는 꿈속에서 어떤 것을 받은 인상들을 절대화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그 광신적인 인상들을 마치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광신주의자들의 그 외의 잘못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사역을 분리시키며, 성령의 역사를 마술로 바꾸어 갔습니다.
한 걸음 더 나가서 감정에 사로잡혀서 이웃과 목사들이 거듭나지 못했다고 정죄하였고
다른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죄를 지적하고 멋대로 분별하였고
그들을 거룩하지 못하다고 평가했습니다.
▲광신주의가 퍼지자 에드워즈는 광신주의로부터 노스햄튼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1741년 3월에 교회에 서약을 맺습니다.
광신주의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경고를 하는 겁니다.
그러나 광신주의 운동은 이미 부흥운동이 일어나면서
거기에 (에드워즈의 표현에 의하면) 사탄의 역사가 시작되었는데
광신주의가 점차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흐름이 노스햄턴 교회에도 만연하게 됩니다.
"광신주의자들과 노스햄턴 교회를 비교해 볼 때
노스햄턴 교인들은 자기들이 스스로의 눈에 아무것도 아닌 것같이 보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순복하고 그들의 행동을 따르고자 했다.
그들이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옳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이상한 영향을 주었으며
결국 그들 다수는 깊은 상처와 불행한 결과를 안게 되었다."
노스햄튼 교인들까지도, 하나님 말씀보다는 어떤 광신적인 계시를 받았다던가
어떤 황홀경을 체험 했다든가..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더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합리주의, 이성주의의 도전
이런 광신주의 신앙운동이 너무 감정 또는 체험 중심으로 나가게 되자
여기에 대한 도전이 있게 됩니다.
바로 합리주의의 도전인데요
광신주의가 확산되자 사회적 혼란을 일어나면서
일부의 지성인들은 부흥운동이 수반하는 광신주의와,
그로 인한 혼란과 무질서를 지적하면서 부흥운동을 비판하기 시작합니다.
하버드 대학 교수들이 그랬고요, 예일대학 교수들이 또 그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부흥운동가들을 열광주의자fanatics요,
아주 사람들을 기만하는 자들이다' 이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찰스 촌시이었습니다.
찰스 촌시는 1742년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지성인 인데요.
1742년에 <열광주의를 스스로 경계함> 이라는 책을 써서
부흥운동의 광신주의를 비판하였고,
1743년에 부흥운동에 대한 공격에 박차를 가하면서
<뉴잉글랜드 종교 상태에 대한 시의적절한 사색>이란 책을 통해서
부흥운동이 광신주의의 산물 임을 역설했습니다.
그는 1742년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조지 휫필드는 어린아이나 여성들의 감정만 건드리고, 그들의 도덕성의 변화를 가져온 일이 없다'
또 제임스 데븐포트는 '부흥운동은 광신주의요, 가장 열광주의자다'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촌시는, 목사들이 순회 설교를 위해서 자신들의 양떼를 버리는 것,
그는 당시 부흥운동가들의 극단적인 현상을 여기서 지적하고 있는데요,
'목사들이 순회 사역을 위해서, 순회설교 사역을 위해서 자신의 교회를 버리는 것,
교인들의 비명소리와 몸부림,
또한 시민들이 종교적인 광신에 몰두해서 자기 일상적인 직업을 무시하는
광신주의자들이 폐해를 시작하면서
대각성운동을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광신주의다’ 라고 비난했습니다.
“대각성운동으로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울고, 쓰러지고 잠시 기절하는 것, 소리 지르는 것,
천국과 지옥을 오르락내리락하는 황홀경, 밤중에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소리 지르면 기도하는 것,
불학무식한 아녀자들이 회심을 체험했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상담하는 행위 등은
교회를 혼란에 빠뜨리는 사단의 궤계다" 이렇게 촌시는 통박했습니다.
▲찰스 촌시가 부흥운동을 정죄하고 비난한 것은
이성과 감정의 관계에 대한 그의 인식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한때 부흥운동을 지지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신앙생활에서 감정보다 이성의 역할을 중시한 것이 에드워즈와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촌시는 고조된 감성은 이성의 권위에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곧 믿음의 감정적인 측면은 이성의 지배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분명한 진리는 고조된 감정이 아니라
계몽된 지성이 항상 인간을 지배하는 안내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 영역뿐만 아니라 다른 일에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서 그들의 마음에 역사하실 때도 역시 그러하다'
진정한 신앙인은 감정이 아니라 이성의 지배를 받는 자로서 (*극단적 이성주의자 임)
거듭난 사람은 그 신앙적 열정을 이성의 통제아래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드워즈는 이성과 감정의 균형)
그는 계속 이렇게 얘기합니다 '새롭게 된 인간에게 가장 필수적인 것들 중 하나는
열정을 적절한 지배, 즉 성화된 이해력의 지배 아래 복종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하기 전에는 새로운 피조물이라 부를 수는 있어도 새롭게 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비록 그 대상이 하나님 또는 다른 세계에 속한 것이라 할지라도
열정이나 감정에 의해서 이성적인 존재가 이끌림을 받아서는 안 된다.
이런 경우에도 그들은 잘 교육된 판단력의 지배 아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성에 의해서 조절, 지배되어 지지 않는 열심,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부흥운동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 사단의 역사다!'
‘성령의 영향력은 이성의 계몽에 관한 것이므로
신앙적인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한다면
동물적인 열정을 이성의 통제 아래 두어야 한다'
▲그러니까 대각성운동이 일어나면서 지금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종교적 체험, 감정적인 어떤 체험을 극대화하는 열광주의이고,
-여기된 반대로 일어난 부류는, 이런 열광적 감정들은 이성에 의해서 통제를 받아야 된다는
합리주의 사상이 나타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에드워즈는 또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겁니다
열광주의자와 합리주의자들이 나타났을 때
신앙을, 어떤 감정의 체험을 본질로 보는 사람들과,
하나의 이성을 본질로 보는 사람들이 나타났을 때
에드워즈는 이 두 그룹을 비판하면서
신앙은 감정 중심도, 이성 중심도 아니라
감정과 이성을 중시하면서도 둘을 통합하는 전인적 것이다.. 라고 주장을 합니다.
에드워즈는 광신주의와 이성주의의 극단적인 신앙관을 각기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신앙에서 이성적인 기능만을 강조하고
감성적인 것을 지나치게 무시하다 보면
신앙의 개인적인 체험을 배제하는 정반대의 또 다른 극단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합리주의자들을 비판하면서 또한 광신주의자들을 비판했습니다.
에드워즈는 먼저 지성, 이성을 우선시하고 중시하는 합리주의자들을 비판함으로써
구원에 이르는 신앙을 옹호하려고 합니다.
합리주의자들은 신앙에서 감정의 역할을 부인하지만
성경은 감정의 중요성 역시 강조합니다.
에드워즈는 <종교적 감정에 대해서> 라는 책을 통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신앙은 냉담하거나 침체적인 것이 아니라
열심을 품는 감성적 신앙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감성(감정) 기능을 주셔서 행동의 원리가 되게 하셨다.
사랑과 미움, 담대함과 두려움, 등의 감정이 없는 세상은 죽은 세상과 같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에 옮기지 않는 것은, 감성이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감성이 없는 실천은 있을 수 없다.
성경에는 경외, 소망, 사랑, 믿음, 거룩한 열정, 슬픔, 애통, 감사, 연민, 열심 등의
감성적 표현들이 나타나고 있다."
에드워즈는 우리 신앙에 감성(=감정)적 요소가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고 얘기한 것이다.
오히려 우리 신앙에서 감성적 요인이 있어야 한다고 두둔한 셈이 된다.
그래서 그는 1741년에 예일대학에서 한 설교에서
이란 책이 있는데, 여기서 이런 얘기를 합니다.
"성령의 사역들이 예외적이라고 해서 그것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
초대교회 성령의 사역이 유별났던 것처럼 마지막 때도 그럴 수 있다."
또한 "사람들이 흐느껴 울거나, 두려움 가운데 떨거나, 절망으로 신음하거나, 큰 소리로 울부짖는 것,
이랬을 경우 이것이 성령의 역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닐 수도 있다."
또한 "영적인 황홀경과 같이 사람들에게 상상이나 이상이 나타난다고 해서
그것이 전부 다 사탄의 역사라고는 볼 수 없다."
"부흥을 체험한 사람들이 지혜가 부족하고 비정상적인 행동을 했다고 해서
부흥 자체를 거부해서는 안 된다. 고린도교회가 혼란 가운데 있었지만
그들이 받은 성령의 은혜는 참된 것이었다"
"일부 부흥운동에 오류가 있고, 사탄의 역사가 혼합되었다고 해서
전체 부흥운동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
에드워즈는 합리주의자들을 이렇게 비판하고 있는 거죠.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 가운데 니골라가 이단자가 되었다고 해서
일곱 집사가 다 잘못된 것은 아니다"
"부흥운동을 했던 사람이 이단에 빠져버렸다 해도
그것이 부흥운동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얘기할 수는 없다"
에드워즈는 이와 같이 교회에서 일어난 일이 비상하다거나
육체적인 현상으로 나타난다고 해서 거부하지 말고
그것이 먼저 성경적인지를 점검하라고 얘기했습니다.
곧 합리주의자들은 부흥의 결과가 말씀과 일치하는지 성경을 살펴보려고 하지 않고
단지 부흥운동에 수반되는 감정적 현상만을 비판하였고
성경이 아닌 철학이나 역사적 지식, 자신의 경험으로 부흥운동을 판단하려고 했으며
일부 부흥사들의 허물을 보고 부흥운동 전체를 비난하려고 했다고 지적했습니다.
따라서 에드워즈는, 신앙을 단순히 이성적 기준에 따라 해석하지 말고
성경이 말하는 것에 의해서 신앙이 무엇인지를 해석하라고 말했습니다.
▲에드워즈는 동시에 종교적 체험을 절대화하는 광신주의자들을 비판했습니다.
에드워즈는 휫필드가 너무나도 충동적이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또 대각성운동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조명을
환상들과 혼동하는 광신주의자들을 비판했습니다.
에드워즈는, 불신자도 신자들만큼 거룩한 것에 대한 상상력을 가질 수 있고
마귀도 그러한 조명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에
내가 꿈이나 환상으로 받은 어떤 것을 절대화 시켜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에드워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환상이나 인상들을 지나치게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본 환상이 곧 선지자들이 본 환상과 동일한 것이요,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요, 장차 나타날 어떤 일에 대한 하늘의 특별한 계시로 간주한다.
정말 그렇다면, 내가 이제까지 경험한 바를 근거로 말하건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에드워즈는 이러한 환상이나 감정적 체험에 기초한 어떤 신앙을 비판하고 있는데
이런 것을 광신주의의 폐해로 보았습니다.
또한 광신주의에는 사탄의 역사가 섞여있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사탄은 거짓의 아비로서 모든 오류를 동원해서 교회를 혼돈으로 이끌고
부흥운동을 반대한다. 곧 성도들을 영적으로 잠재워서 부흥이 일어나지 않게 하고
일단 부흥이 일어나면, 지나치게 극단으로 몰고 가서, 광신이나 미신으로 이끌어가고
반대자들에 대한 비판적인 자세를 갖게 함으로써 교회를 나누려고 한다"
에드워즈는 사탄의 광명한 사자로 가장한다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광신주의로 나타난다.. 사탄이 교회를 공략하기 위해서
체험과 환상을 중시하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환상과 꿈 등을 통해서 사람들을 유혹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계시라고 여기도록 만든 후에
참된 감성에 거짓을 혼합시켜서 신앙적 혼란을 유도한다는 것이죠.
사도시대 이후에 나타난 에세네 파, 곧 영지주의자들이나 몬타누스 주의자들,
그리고 많은 이단들의 체험이 바로 그러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단들은 하나님, 그리스도, 하늘의 천사들과 대화를 자신이 나누고 있다고 미혹에 빠진 자들이었습니다.
열광주의자, 광신주의자들은 자기가 받았던 체험을
어떤 상상력을 동원해서 그것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절대화 하면서
어떤 사탄의 꼬임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늘 어떤 상상력이나 공상을 통해서 성도들을 기만함으로써
거짓된 신앙 가운데 빠지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에드워즈는 종교적인 체험들을 다 하나님께로서 온 것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종교적 감정에 대해서>라는 책에서, 그것은 하나님께로서 올 수도 있지만
마귀에게서도 올 수 있다고 얘기합니다.
성경은 '모든 영을 다 믿지 말고 시험해 보라'고 했으니까요!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요일4:1
설령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하더라도
사탄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험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라는 것입니다.
▲마치는 말 / 에드워즈는 이런 감정적 현상의 불확실성을 지적한 후에
'모든 감정을 다 믿지 말고, 성경에 비추어서 평가하라'고 주장합니다.
에드워즈가 이렇게 극단적 감정 체험의 강조를 동의하지 않은 것은
바른 신앙이 감정의 고조 정도에 기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에드워즈는, 그의 책에서, 우리의 신앙은
지성이나 감정 한 쪽에 치우치지 말고, 즉 좌우로 치우치지 말고
지성과 감성과 의지가 조화되어야 함을 주장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지), 느끼고(정), 생활로써 나타나는 것이(의)
바른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지식으로 아는 것만이 신앙이 아니고
느끼는 것만이, 감정적인 것만이 신앙이 아니고
알고 느낀 것을 생활로 (의지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즉 참된 신앙의 정서는, 성화의 열매로 나타난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에드워즈는,
참된 믿음은 지, 정, 의가 조화된 전인적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참된 믿음은, 지성이나/ 감성이라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결국 "성화"에 이르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한국교회 신앙은 극단으로 치우쳐 있다고 봅니다.
신앙적인 체험을 절대화 하는 열광주의에 치우친 분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머리로 깨닫고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것만을 절대화하는 합리주의에 치우친 분들이 있습니다.
바른 신앙은, 깨닫고(이성) 느낀 것을(감정)
삶을 통해서 실천해 나가는(의지) 자리에까지 나아가는 신앙입니다.
이것이 바로 에드워즈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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