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牧師)가 병(病)들었을 때의 고통
사람은 누구나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과정을 거치기로 되어 있는 것은 만고불변(萬古不變)의 진리인데 목회자가 몹쓸 병에 걸려 누웠으면 그렇게 가슴 아플 수 없는데 처음에는 교인들이 들여다 보지만 조금 시일이 흐르면 찾아와 주지도 아니하고 그 때부터 교역자에게 정신적인 부담을 주고 교회를 떠나달라는 것인데 목사는 이중삼중으로 고통스러운 것은 병들어 육체적으로 고통스럽고 교인들이 싫어하는 눈치니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우며 가족들에게 미안하니 심적으로 고통이 심하여 병은 더욱 악화되고 삶의 의욕을 완전히 상실하여 죽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다고 표현하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목사가 병들면 누구보다도 고통을 당하는 이는 바로 사모님이라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는데 필자가 아는 목사님은 약 30년 이상 몸이 불편하여 심방도 제대로 못하고 늘 자신의 몸 하나만 돌보기도 힘에 벅찬 상태에서 목회를 계속하는데 그래도 교회가 사랑이 있어 피를 토하고 입원할 때마다 교회에서 치료비 및 입원비를 계속 부담하고 그러면서도 목사님께서 세상 떠날까 보아 전전긍긍(戰戰兢兢)하며 통성으로 기도하고 목사님을 위하여 온갖 배려를 아끼지 아니하는 생활을 30년 이상을 하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아 필자도 그 목사님께서 강단을 지킬 수 없을 때는 몇 개월간 두 교회를 함께 섬기는 일도 있었다.
그리하여 금연에는 그 교회에서 시무 하시던 목사님께서 정년이 되려면은 6-7년 남았지만 이제는 건강한 목회자를 모시고 자신은 뒤로 물러서겠다고 당회에 말하니 당회는 만류했으나 본인이 강하게 사양하여 당회는 목사님의 뜻을 받아들이되 돌아가시는 날까지 생활비를 드리기로 하고 아파트도 한 채 마련하여 드리고 관리비도 대드리며 사시는데 불편함 없이 해드리겠다는 약속을 공동의회에서 만장일치로 가결하였는데 더욱 고마운 것은 그 목사님께서 병약하여 신학을 늦게 함으로 목사 안수 받은 지는 몇 년이 안되어 원로목사의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고 법적으로는 원로목사로 대우하기가 어렵지만 그래도 그 법을 떠나서 그 목사가 그 교회에서 시무한지는 30년이 넘기에 원로목사의 대우를 해드리기로 한 것이다.
병약해서 목회도 제대로 못한 것도 미안한데 교회에서는 상관하지 아니하고 최선을 다하여 끝까지 모시고 목회자로 대접을 해드렸지만 목사 자신이 너무나도 미안해서 스스로 물러나기로 결심하여 건강한 목회자를 모실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필자는 어디 가서라도 그 교회를 자랑하고 싶고 그리고 목사님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런데 사모님은 건강하셔서 목사님 병간호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지만 교회가 좋아서 그렇지 만약에 문제를 제기하는 교회 같으면 벌써 거리로 나앉는 한이 있어도 쫓겨났을 것이고 어쩌면 쫓겨나기 전에 목사가 마음이 상해서 벌써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교회가 주의 사랑으로 참고 견디며 기도한 결과로 목사가 아름다운 결과를 낳게 되었고 교회도 타 교회에 본이 될 만한 아름다운 역사를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그 동안 사모님은 남편의 병을 고치려고 수 십 년간 온갖 정성을 다하였는데 남편에게 약이 된다고 하면 뱀도 삶아 드리고 개고기도 사다가 해드리며 좋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해드리는 정성을 쏟았는데도 어떤 때는 목사님이 때는 심한 각혈을 하고 병원에 실려 가면 그 때부터 교회 대한 미안한 마음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고 또 남편이 이번에는 회복하지 못하고 정말 돌아 가시지나 아니할까 속으로 걱정하며 만약에 돌아가시면 80세가 넘으신 모친은 어떻게 하며 자신의 장래에 대해서도 막막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은 딸들만 있지 아들은 하나도 없는 처지고 보니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나 주변에서 지켜보는 자들로서는 충분히 이해가 되는 것이다.
그런 일들이 종종 있었으니 그 때마다 마음의 고통은 이루 말로 할 수 없고 교회에 대한 미안한 마음은 더욱 말할 수 없이 많았다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약 30년 넘게 남편의 병간호한다는 것은 얼마나 고달프며 괴롭겠는가 어지간한 여인들 같으면 아마 도망을 갔어도 몇 번이고 갔을 것이지만 그래도 그 남편 살려보려고 온갖 정성을 다하여 끝까지 희생한 결과로 남편이 명예롭게 은퇴할 수 있게 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고 보아 칭찬과 상이라도 주고 싶은 심정이다.
그리고 어느 교회는 목회자가 중한 병이 들어 병원에 입원을 했는데 아무리 정성을 다하여 치료를 해도 차도가 없어 입원한지 몇 개월만에 교회사면서를 냈는데 교회에서는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교회에서 하는 말이 전도사님께 말씀을 전하지 못하셔도 우리들은 교회 나와서 우리들끼리 찬송 부르고 기도 드리며 성경을 읽고 헌금 드리고 가겠으니 걱정하시지 마십시오 만약에 전도사님께서 세상을 떠나시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로 병 고침을 받고 다시 저희 교회로 돌아오셔서 저희들과 함께 예전과 같이 함께 신앙생활하고 예배드리는 그날이 속히 오도록 최선을 다하여 기도할 테니까 조금도 교회는 염려하지 마시고 치료에만 신경을 쓰십시오 하고 돌아갔는데 목회자는 한 달 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교회는 새로운 목회자를 모셨다는 말을 들었다.
많은 사람들은 말하기를 교회들이 사랑이 없고 문제가 많다고 하지만 그래도 아직도 사랑이 넘치는 성도들이 많고 주님께 바로 살려고 하는 분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오늘의 한국교회가 복을 받아 계속 성장한다고 본다.
엘리야가 생각할 때는 많은 사람들이 바알에게 무릎을 꿇고 자기 혼자만 남아 고난을 당하는 줄로 생각하였지만 그와 같은 생각은 지나친 편견이라는 것이다 물론 환경에 지배를 받는 인간이기에 더러는 타락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모두 다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고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의로운 분들은 있기 마련이다.
노아 홍수 때도 구원받은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소돔성이 완전히 망할 때도 구원받은 사람들이 있듯이 아무리 세상이 타락하였다고 해도 그 중에는 주님의 뜻대로 사는 분들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개중에는 주께서 원치 아니하는 일들을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개중에는 성도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래도 처음에는 상당한 신앙과 사랑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접근하였다가 피차에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문제라 처음 계획대로 되지 아니하면 이 때부터는 신앙인의 인격을 벗어 던지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처럼 감정으로 대립되면 사람을 미워하는데 구실은 교회를 위한다고 하면서 문제에 접근하여 교회를 소란하게 만드는 것이다.
즉 베드로가 주를 위한다는 구실로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하시고"하였고(마16:21-23)"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하였다(마26:51-54)하였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목적은 모두 주를 위하는 것 같았으나 내용은 인간적인 생각에서 주님의 뜻과는 전혀 반대되는 인간적인 생각에서 시작이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와 같은 방법으로 교회를 위한다는 구실로 성도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들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어느 교회에서 목회자가 병들어 몇 개월 동안 강론을 못하고 있어 교회에서는 목회자에게 하는 말이 목사님 교회를 사면하시고 떠나서 요양이나 하심이 어떻겠느냐는 부탁과 함께 그렇게 해주시면 은퇴금으로 얼마를 드리겠다고 제의를 했으나 목회자 측에서는 금액이 너무 작다는 이유로 협상이 결여되어 교회와 목회자간에 감정이 상하여 교회측에서는 교회를 위하여 목회자가 있지 목회자를 위하여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원론적인 논리를 전개하며 대립이 되는데 목회자 가족 측에서는 그래도 어느 정도 액수가 되어야 전세 하나라도 얻을 수 있지 아니하겠느냐고 피차에 딱한 사정을 놓고 줄다리기를 하는데 교회측에서는 감정이 많이 상해서 어디 저런 목회자가 있어 하고 목회자 삐뚤어진 사고를 고치겠다는 뜻에서 매월 드리는 생활비 지금을 중지하였다.
그러나 목회자 측에서는 생활비를 받지 못하면서까지 떠나지 아니하고 교회에서 눌러 있으니 그 마음의 고통인들 얼마나 크겠는가 결국에는 교회가 노회에 문제를 호소하여 노회 서는 수습위원을 파송 하여 수습을 하는 가운데 목사님은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지경에 이르니 목사 사모는 마음의 고통이 얼마나 하며 교회인들 얼마나 괴롭겠는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차라리 목사님 측에서 교회에서 제시하는 액수를 수용하고 떠났더라면 좋지 않았겠나 하는 아쉬운 마음도 있고 교회측에서도 조금 더 사랑을 베풀어서 유종(有終)의 미(美)를 거두는 방향으로 처리를 했으면 얼마나 좋았겠나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든다.
목회자가 병들면 본인은 물론이지만 교회도 가슴 아프고 사모는 양 사이에서 더 많은 고통을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살다보면 원치 아니하는 병이 들어 자신의 삶의 목적과는 전혀 반대되는 일들이 사람이면 누구에게라도 당할 수 있는 여지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부러 병들어 가정을 근심하게 하고 교회나 직장을 해롭게 하는 사람들은 어느 천지에도 없다는 것을 알고 건강한 사람들이 병든 사람을 위로하고 치료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사람의 도리지 병든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성도 이전에 사람의 도리도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하간 누구나 남편이 병들면 병간호하는 부인들이 고통스럽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만고불변(萬古不變)의 진리임에는 틀림이 없으니 병든 사람은 투병생활에 고달프고 간호하는 아내는 간호하느라고 고통스러운 처지에 있는 그들을 어떤 이유에서도 괴롭힐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도리요 주님의 사랑인줄로 믿는다.
성경에 보면 예루살렘을 떠나서 여리고로 가던 사람이 길에서 강도를 만나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은 빼앗기고 몸에는 많은 상처를 입고 생명이 위태로운 처지에 놓여 있는데 제사장이라는 분도 그를 보고 그냥 지나가고 레위사람들도 보고 그냥 지나가는데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보고 그냥 지나가지 못하고 맞은 상처를 치료하고 그를 주막으로 엎고 가서 주막 주인에게 그의 치료를 부탁하면서 하는 말이 이 사람을 치료하여 생명을 잃지 않게 하시오 그리하면 내가 볼일 마치고 돌아와서 당신에게 치료비를 더 주겠다는 말을 남겨놓고 떠났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당시의 종교인들도 사랑은 없고 믿는다는 말만 하며 믿어도 누구보다도 잘 믿는 다는 사람들의 행동이 그 정도니 실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이라 결국 죽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책망하고 오늘의 우리들에게 교훈 하시는 것은 그와 같은 신앙생활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오늘의 교회가 정말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가 원인이야 어찌되었든 간에 자신들의 이익에 보탬이 되지 아니하면 부모까지도 버리고 처자도 버리는 일들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하지 아니한가 하물며 교회는 교회를 위한다는 구실로 주의 참사랑을 저버리는 불행한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께서 에베소서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이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하였고(계2:4-5).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하였으며(요1서4:20-21)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하였다(요15:13고전13:1-1-8).
예수 잘 믿는다고 하고 교회를 위한다는 구실로 사람을 미워하고 가슴아프게 하는 불신자보다 악한 짓을 당장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딤전5:8마12:46-50).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하였다(마25:34-40)하였는데 이는 불쌍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도운 결과가 결국에는 주님을 도운 것으로 간주가 되어 복을 받았으며 반대로 사람을 돌아 보아주지 아니하고 주님만 섬겼다고 하는 자들은 저주를 받았다(마25:41-46).
그렇다면 무엇이 교회를 위하는 것인가 교역자나 교회 피차가 깊이 생각하고 자기 희생 없이는 누구도 교회를 위한다고 하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목회자도 주를 위하고 교회를 위한다고 하면서 교회 사정도 보지 아니하고 자기의 욕심만 채우려는 것은 진정 교회를 위하는 것은 아니고 교회도 교회를 위하고 주를 위한다고 한다면 주님의 사랑의 범위를 벗어난 행동은 앞뒤가 맞지 아니하는 불신자보다 악하고 무서운 죄를 범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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