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의 인생고백이 우리의 고백입니다! (창 47:7-10)
지방도시에서 대형교회를 목회 하시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 분의 글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그 목사님에게 부시 대통령이 전화를 하셨습니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에서 목사님의 설교방송이 나가는데 그 설교를 듣고 큰 은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부시대통령이 방한할 때 목사님과 3일을 함께 보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첫날은 목사님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둘째 날은 목사님과 휴전선을 방문하는데 목사님과 함께 했으면 좋겠고, 셋째 날은 목사님과 하께 골프를 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 전화를 받고 목사님께서 염려가 되는 것이 있었답니다. 10년 전부터 골프를 치기는 쳤답니다. 장로님들이 목사님의 건강을 위하여 골프채를 사주고 '목사님이 건강해야 교회가 건강합니다'라고 하면서 골프 회원권도 주어서 치기는 쳤는데 정식 레슨을 받지 않아서 스윙을 하면 골프공이 똑바로 가지를 않는답니다. 그래서 걱정을 하다가 깨어보니 꿈이더랍니다. 그런데 꿈속에서 부시 대통령과 전화 통화만 했는데도 그렇게 기분이 좋더랍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이 뭡니까? 부시대통령보다 높으신 만 왕의 왕 되시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기도는 부시대통령과 전화 통화하는 것보다 더 오래 더 깊이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뭡니까?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는 보통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들입니다. 올 한해도 크든 적든 우리 모두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더더욱 감사하며 행복하게 신앙생활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벌써 한해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오늘이 올 마지막 달의 둘째 주일입니다. 이제 불과 두 주간만 지나면 2012년도 영원히 지나가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렇게 의미심장한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할/
여러분, 지난 일년 동안 어떻게 살아 오셨습니까? 오늘 이 시점에서 생각해 볼 때 만족하십니까?' 아니면 아쉬움이 많습니까? 누구든지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보면 만족한 마음보다는 아쉬운 마음이 더 많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이 시간이 그런 시간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연말이 되면 망년회라는 것을 합니다.
망년회(忘年會)라는 말은 한해의 모든 아쉽고 괴로운 마음들을 잊어버리자는 뜻에서 잔치를 하는 모임을 망년회라고 합니다. 그래서 망년회 때에는 으레 술이 따르게 마련이고, 마셨다 하면 또 과음을 하게 되고, 이어서 한탄의 소리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아쉬움이 많기 때문입니다. /할/
▶2012년도를 보내면서 몇 가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⑴올 한해를 살면서 서운했던 모든 일들은 모두 떨쳐 버리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한해를 살다보면 서운한 일들이 많이 쌓이게 마련입니다. 이것들이 하나 둘씩 쌓이면 마음이 어둡고 우울해 집니다.
여러분은 한해를 살아오는 동안에 가족들 간에 서운한 일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또 이웃 간에도 서운한 일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 간에도 서운했던 일들이 있을 수 있고, 교회에서도 서운했던 일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또 목회자인 나를 통해서도 본의 아니게 서운한 일들이 있었다면 모두 이 시간에 잊어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가벼운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해서 기분 좋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아멘!/
⑵무엇보다도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금년 한해를 지내면서 큰 사건 사고 없이 무사히 오늘까지 오게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할/
올 한해도 많은 사고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숫한 사고들이 우리 곁에서 일어났었지만 그래도 우리들은 용케도 살아서 오늘 이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게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저는 너무 감사한 일들이 많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의 자녀들이 다 잘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할/
⑶기도의 응답이 없다고, 되는 일이 없다고 원망, 불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인간사 '세웅지마'이기 때문입니다. /할/
옛날 어떤 고을에 지혜로운 영감 한 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집에서 아끼며 기르던 말 한 마리가 도망을 갔습니다. 그때 동네 사람들이 와서 위로를 했습니다. 이 영감이 위로하는 말을 듣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것이 오히려 복이 될지 모릅니다'. 그것은 분명히 복일지, 화일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 일어난 일을 가지고 너무 간단하게 속단해 버리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 영감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몇 일 후에 도망갔던 말이 다른 말 한 마리를 달고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그때 동네 사람들이 와서 축하를 했습니다. 그러자 이 영감이 또 지혜 있는 말을 했습니다.
'그게 오히려 화가 될지도 모릅니다', 아닌게 아니라 외아들이 새 말을 타다가 그만 떨어져서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그때 동네 사람들이 와서 크게 상심하면서 위로를 했습니다. 그러자 이 영감이 또 말을 합니다.
'이것이 전화위복이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 나라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동네 청년들이 모두 징집이 되어 전쟁터에 나가 싸우다가 다 죽었는데 이 아들은 다리가 부러져서 군대에 나가지 않아 죽음을 모면했습니다. /할/ 그래서 그때부터 '인간사 새옹지마'(人間事塞翁之馬)라는 말이 생겼다고 합니다.
이 말의 뜻은 일이 좀 잘 풀렸다고 우쭐댈 것 없고, 일이 좀 풀리지 못했다고 해서 너무 서러워하지도 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해를 보내면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멘!/
⑷좀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지난 한해 동안 우리는 '얼마나 최선을 다해서 살았는가?'를 되새겨봐야 합니다.
여러분, 지난 한해를 얼마나 최선을 다해서 살았습니까? 여러분은 지난 한해 동안 얼마나, 열심히, 신앙생활을 잘 했습니까?
얼마나 기도했고, 성경 몇 장이나 읽으셨습니까? 바빠서 읽지 못했습니까? 그렇게 바쁘게 살아서 얼마나 많이 쌓아 놓았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기도가 능력이고 축복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이 복입니다. 계1:3절에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아멘!/
①본문의 배경을 먼저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야곱이 죽은 줄로만 알았던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살아서 저 넓은 대국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어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설레는 마음으로 70인의 권속을 거느리고 애굽 땅으로 달려갔습니다.
아들 요셉은 백발이 된 자기 아버지 야곱을 보면서 목을 껴안고 흐느껴 울었습니다. 아버지 야곱도 아들 요셉을 만나는 감격 속에서 함께 울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아버지 야곱을 바로 왕 앞으로 모셨습니다. 그리고 '여기 계신 어른이 저의 부친이옵니다' 하고 인사를 시켰습니다. 야곱을 맞이한 바로 왕이 대뜸 '당신의 연세가 얼마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야곱은 대답하기를 '내 나그네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 년입니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라고 답변을 했습니다.
오늘 2012년도의 마지막 12월 둘째 주일을 맞이하여, 야곱의 답변 속에 숨어있는 우리 인생의 참 모습이 무엇인가를 찾아 남은 우리 인생의 여정을 아름답게 준비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②바로의 '네 연세가 얼마냐?' 이 질문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가?(8)
첫 대면한 자리에서 바로는 야곱에게 나이를 묻습니다. 왜 하필 나이를 물었을까요?
예를 들어 친구가 오랜만에 아들을 데리고 찾아왔는데, 몇 년 전에는 조그만 꼬마였던 아이가 장대같이 키가 커 가지고 왔다면 맨 먼저 무슨 질문이 튀어나올 것 같습니까? '너 키가 얼마니?' 이렇게 묻겠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너 나이 몇 살 먹었느냐?' 이러지 않겠어요? 바로가 야곱에게 나이를 물은 것 역시 그런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할/
우리는 가끔 나이를 잊고 살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가도 한해가 저물어 가는 이때쯤이면 새삼스레 나이에 대하여 관심이 많아집니다. 전에는 동지 팥죽을 먹으면 한살 더 먹는다고 하여 동지 팥죽 먹을 때 벌써 한 살을 더 셈하기도 했습니다.
그 때 나이 어릴 때는 나이 드는 것이 그리 자랑스럽고 좋았는데 어느새 나이 드는 것이 싫고 아쉽고 나이가 작아 보인다는 말이 듣기 좋은 때가 온 것을 느낍니다. 그러나 시간은 흘러서 금년이 마감되어 가니 우리의 나이 셈을 한번 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나이를 셈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라고 했습니다.
시90:12절에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잘 살아온 것은 더더욱 노력하고 잘 못 살아온 것은 철저하게 회개하고 내려놓은 지혜가 우리 안에 있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네 나이가 얼마냐?' 이 질문과 대답 속에는 야곱의 인생을 총망라하는 함축적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어떤 인생을 살아왔고, 지금은 어떻습니까? 그리고 당신은 앞으로 어떤 삶의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까?'라는 총체적인 질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할/
▶이 세상에는 세 종류의 시간 관이 있습니다.
⑴윤회 적인 시간 관입니다. 이것은 불교나 힌두교에서 볼 수 있는 시간 관입니다. 시간이 돌고 돈다는 것입니다. 윤회 적인 시간 관은 돌고 돌기 때문에 시작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⑵변증법적 시간 관입니다. 이것은 정이 있으면 반이 있고 정과 반이 만나는 합이 있습니다. 인류 역사는 정, 반, 합의 삼각형의 관계로 이루어져 간다는 유물론적 사관의 시간 관입니다.
⑶직선적 시간 관 혹은 종말론적 시간 관입니다. 기독교의 시간 관은 직선적입니다. 시작이 있고 종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는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해 아래는 새 것이 없습니다. 태양은 매일 떠오르지만 오늘의 태양은 어제의 태양이 아닙니다. 봄은 왔지만 그 봄은 내년에 다시 오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전무후무한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이라는 시간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고 사용하느냐가 지혜입니다. /할/
오늘 야곱의 인생고백에서 찾아보는 인생의 참된 모습은 무엇입니까? 바로 왕의 '당신의 연세가 얼마냐?'는 이 질문은 '당신이 지금까지의 삶을 어떻게 살아왔느냐'는 물음입니다.
지금도 우리 하나님은 성령의 감동을 통하여 저와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2012년도를 어떻게 살아왔는가?' 이 물음 앞에 무엇이라고 답변을 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 있게 대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몇 가지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할/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느냐?' 즉 과거의 인생 이력을 묻는 질문입니다.
야곱의 과거의 인생 이력서는 참으로 파란만장합니다. 성경의 인물가운데 야곱처럼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인물을 찾기 어렵습니다. 그 이름의 의미처럼 야곱은 지금까지 속고 속이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형을 속여서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권리를 샀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와 결탁하여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축복 권까지 가로챘습니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형 에서의 미움과 살인적인 공포였습니다.
할 수 없이 야곱은 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치는 처량한 신세가 됩니다. 그는 노숙을 하면서 밧단아람에 있는 삼촌의 집에 갑니다. 그곳에서 아내 라헬을 얻기 위해 7년을 일했지만 삼촌의 계략에 속고 맙니다. 삼촌이 딸을 바꿔서 잠자리에 들여보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다시 7년을 일합니다. 사랑하는 여인 라헬을 얻기 위해 무려 14년이나 일합니다. 그리고 삼촌은 열 번씩이나 품삯 주는 것을 바꾸면서 거짓말을 합니다. 속이기에 능한 야곱이었지만 삼촌 라반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습니다.
20여 년이 흘러 야곱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문제는 형 에서가 아직도 살기 등등하여 야곱을 죽이려고 합니다.
야곱은 형의 마음을 돌이키려고 예물을 보내고, 환심을 사려고 애를 씁니다. 얍복나루에서 야곱은 생사를 건 천사와의 씨름을 통해 사기꾼에서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라는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뀌는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천사가 환도 뼈를 쳐서 다리를 절어야 하는 장애인이 됩니다. 또한 야곱은 숙곳이란 곳에서 사랑하는 외동딸 디나가 세겜 추장 하몰의 아들에게 강간을 당하는 수모를 겪습니다.
그것을 본 아들들이 세겜의 남자들을 죽이는 살인극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이방 땅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짐승에게 찢겨 죽었다는 사실이 야곱의 가슴을 가장 아프게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흉년을 만나게 되고,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이 살아있다는 기쁜 소식을 듣습니다.
그래서 지금 야곱은 꿈인지 생시인지 구별이 안 되는 상황 속에서 애굽으로 가족과 함께 이민을 온 상황입니다. 그의 인생 이력을 들여다보면 너무나 파란만장합니다.
결국 그 인생의 굴곡이 많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있었음을 반증합니다. 비록 속이는 인생을 살았던 야곱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에벤에셀의 은총으로 여기까지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의 삶은 하나님과 멀어져 있었지만 하나님은 야곱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그를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야곱의 인생이요 우리의 지나온 과거의 인생 이력서입니다.
우리의 삶을 돌이켜 보면 하나님의 품을 떠나서 탕자처럼 살았던 모습뿐입니다. 때로는 우리들이 속일 때도 있었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속임을 당하고, 배신을 당하고, 시린 가슴을 품고 잠 못 이룰 때도 있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부끄러운 것 뿐이요 죄로 얼룩진 흔적뿐입니다. 한없는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살았지만 효도 한번 제대로 못하고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주변의 사람으로부터 많은 사랑의 빚을 졌지만 그 은혜를 기억치도 못할 때도 있고, 외면할 때오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외면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우리 곁에서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습니다. /할/아멘!/
㉡'너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지금 어떤 삶의 가치와 목적을 가지고 사느냐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결코 시간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시간의 주인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믿/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한 시간만큼 우리는 이 땅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만 큼인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이라는 시간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리의 본분입니다. 어제는 이미 지나간 시간이요, 내일은 나에게 주어질 시간이 아니기에 오늘이라는 현재의 삶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삶의 태도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세월을 아끼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아낀다'는 말은 '건져 올리다, 시간을 산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오늘이라는 시간 속에서 무엇을 사고 있고, 무엇을 건져 올리고 있습니까? 낚시를 해 보면 고기는 안 잡히고, 엉뚱한 해초나 나뭇가지 등이 걸릴 때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생 낚시터에서 고기를 잡아 올려야지 헛된 것을 잡으면 그 인생은 허비하는 삶이 되고 맙니다.
그렇습니다. 의미 있는 삶, 생산적인 삶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삶의 우선순위를 바르게 정해야 합니다. 급한 일 보다는 중요한 일을 먼저 해야 합니다. 급한 일 중심으로 하다보면 진짜 중요한 일을 하지 못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에서 가장 본질적으로 중요한 일은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이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할/
우리는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름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목적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고, 창조의 걸작품으로 빚으시고, 여기까지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신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마귀는 언제나 오늘 일을 내일 하라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결코 속지 마십시오. 더 늦기 전에 오늘 나에게 주어진 책임과 사명을 다하는 최선의 삶,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 여정 길을 아름답게 채워 가는 지혜입니다. /믿/아멘!/
㉢'네 나이가 얼마냐?' 이 물음 속에 '내 인생의 한계를 알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네 나이가 얼마냐?' 이 질문은 당신의 나이가 영원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나이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살아 계신 분이기 때문에 나이가 없습니다.
천국에서는 성도들의 나이를 묻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 아시죠? 주님과 영원히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우리들이 나이를 묻는 이유는 언젠가 우리의 생명이 끝나는 날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가 지금 한 가지 예언을 합니다. 저와 김복진집사님은 앞으로 40년 뒤에는 이 자리에서 얼굴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예언입니다. 모세의 고백과도 같이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와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날아가나이다.'(시90:10) 날아가는 인생 길에 우리들이 서 있습니다. /할/
▶우리 조상들은 늙음의 무상함을 깨닫고 이런 시를 노래했습니다.
'한 손에 가시 쥐고 또 한 손에 막대잡고/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막으렸더니/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여러분, 이 땅에서는 아무 것도 영원할 수 없습니다. 영원히 지속되지 않습니다. 지금 건강하다고 하나 그 건강도 지속되지 않습니다. 지금 청춘이라고 하나 청춘도 지속되지 않습니다. 많은 것을 가졌다고 하나 소유도 영원하지 못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생명은 반드시 끝나는 날이 있습니다. /믿/ 겸손하게 살 줄 알아야 합니다. 내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할/
▶탈무드에 우리 인생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살은 임금으로 모든 사람들이 떠받든다.
2살은 돼지로 게걸스럽게 먹기만 한다.
10살은 염소로 웃거나 장난을 치거나 뛰어 다닌다.
18살은 말로 자기의 아름다움과 힘을 마음껏 뽐낸다.
결혼을 하면 당나귀로 가정이란 무거운 짐을 지고 터벅터벅 걷는다.
중년은 개로 부양 가족을 위하여 구걸을 하면 살아간다.
노년은 원숭이로 어린아이처럼 되나 아무도 관심을 가져 주지 않는다. 여러분, 우리 인생의 한계를 알고 사는 것이 지혜입니다. /할/
▶미국 '아담스' 대통령이 늙어 지팡이를 짚고 언덕길을 오르다가 숨이 차서 지팡이를 허리에 대고 잠깐 쉬고 있었습니다. 한 청년이 '각하, 안녕하십니까?'하고 인사를 했습니다.
'자네가 보다시피 나는 안녕치 못하네. 내 장막 집이 무너지려고 해서 이사 갈 준비를 하고 있네' 그러자 '각하, 어디로 이사 가시려고 합니까?' '내 집이 너무 낡아 지붕도 헐고, 기둥도 흔들리고 있고, 들보도 굽었다네' 그러자 청년이 '각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라고 묻자 '내 지붕은 머리인데 다 벗겨져서 듬성듬성 몇 가닥의 머리카락만 남아 있고, 창은 눈인데 흐려서 보이지 않고, 기둥은 두 다리인데 힘이 없어서 좌우로 비틀거리고, 들보는 허리인데 쇠하여 구부러졌기에 지팡이로 지금 내가 의지하고 있지 않은가 이것도 곧 무너지게 되어 나는 지금 이사 갈 준비를 하고 있다네'
우리는 세월이 흘러 갈수록 인생의 끝나는 날이 가까이 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됩니다.
이스라엘의 풍운아 모세의 고백을 들어보세요! 시90:9절에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여러분! 생명의 날들을 헤아려 볼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건강을 잃고 건강의 소중함을 발견하는 것도 귀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간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임을 알고, 범사에 감사하며 그 분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인생은 참으로 복되고 소중한 삶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두 번 주어지지 않습니다. 인생은 연습이 없습니다. 생방송입니다. 한번 주어진 인생, 한번 걸어가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인생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야곱 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속고 속이는 인생, 덧없이 무너져버릴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지 모릅니다. 여기까지 지내온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사라져버릴 세상 것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생명을 살리는 일에 여러분의 시간과 재물과 열정을 아낌없이 투자할 수 있는 참 행복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너는 네 나이에 걸 맞는 인격의 사람인가?'를 묻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갓난 아이 때는 엄마의 자장가에 잠이 듭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밥먹는 것 보다 군것질이 더 좋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공부보다 부모님께 용돈 울거 내어 그것 쓰는 재미가 더 좋습니다. 그러나 그러다가도 성인이 되면 이런 것 저런 것 다 버리고, 다 싫어야 어른다운 사람이 되어 옳은 사람으로 대접을 받습니다.
성인이 되어도 엄마의 자장가나 좋아하고 군것질이나 좋아하고 용돈 울거 내는 것이나 좋아한다면 그 부모님은 얼마나 한심하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들 자신이 바로 그런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세례를 받은 지 몇 년이 지나도 식사기도 한번 제대로 못하고 식사하고, 집사 된지 몇 년이 되어도 항상 자기만 위하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앙의 나이가 몇 년인데도 제 앞 가리도 제대로 못하는 성도도 있습니다. 앉았다 일어나면 냄새가 나게 하고 다른 사람들의 속이나 뒤집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자기의 지난날을 경험하여 간증하기를 '어린아이 때는 어린아이 짓을 했다'고 했고, 어른이 된 다음에는 말하는 것 생각하는 것 모두가 다 어른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고전13:11절에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할/
그러므로 나이에 걸맞게 취할 것 취해야하고, 버릴 것 버려야 합니다. 어른이기에 못하는 것도 있어야 하고 참아야 하는 것도 있어야 하고 손해 보는 것도 있어야 합니다. 목사이기에, 집사이기에, 권사이기에 못하는 것이 있어야 하고, 안 하는 것이 있어야 하고 손해 보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교인이기에 못하는 것이 있어야 하고, 해야 할 것이 있어야 하고 손해 보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아멘!/
㉤'나이에 걸 맞는 계획을 세우라'는 당부이기도 합니다.
애는 애 같아야 합니다. 애가 너무 어른스러워도 안 좋습니다. 청년이 너무 어른스러워도 안 좋습니다. 마찬가지로 나이에 걸 맞는 계획과 삶이 아름답습니다. 나이에 걸맞지 않으면 애가 어른스러운 모습과 꼭 같습니다.
눅12:16-21절에 보면 한 부자의 삶이 격에 안 맞는 삶이라서 하나님은 그 사람을 보고 어리석다고 하셨습니다. 굉장한 계획을 세웠으나 그 날 밤에 그 영혼을 하나님이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에게 적합한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백년을 넘기지 못할 사람이 만년을 꿈꾼다면 다 웃을 일입니다. 그것은 꿈이 아니고, 비전이 아니고 망상이고 공상입니다.
야곱의 꿈도 아니요, 요셉의 꿈도 아닙니다. 그러나 항상 '내 연세가 얼마냐?'고 물으면서 거기에 적합한 계획을 세우는 사람을 하나님은 어리석다고 하지 안을 것입니다.
마치 죽음이란 나와 상관이 없고 남의 이야기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는 마치 독수리에게 어느 날 갑자기 채여 가는 병아리와 같은 입장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는 항상 '나의 연세가 얼마냐?'를 물으며 살아야 합니다. /할/
㉥'우리도 인생의 종착역에서 내릴 준비를 하라'는 음성이기도 합니다.
부산이나 광주에서 서울 가는 열차를 탄 사람처럼 안양 지나 종착역 서울이 가까워 오면 내릴 채비를 해야 합니다. 금새 영등포가 나오고 강을 건너면 용산이고, 서빙고를 지나 바로 서울역 종착역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한국 발 천국 행 열차를 탄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종착역이 가까웠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롬13:11절에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할/
회갑을 지낸 분들은 이미 안양 역을 통과 한 분들입니다. 내 연세가 얼마인지를 스스로 물어보고 내릴 준비를 잘 해야 합니다. 종착역에 왔는데도 내릴 준비를 하지 않는 사람은 차에서 내리면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반겨 맞아 줄 사람이 없는 사람입니다. 또 갈 곳이 있다 해도 가기 싫은 곳(지옥)에 가야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 아버지 집인 천국에 가는 역인 줄 믿습니다. /아멘!/ 거기 가면 앞서간 성도들이 반겨 맞아 주실 줄 믿습니다. 더 큰 은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양팔을 벌리고 우리를 맞이하실 것입니다. /믿/아멘!/
바로 가 야곱에게 묻습니다. '네 연세가 얼마냐?' 이 말은 오늘 우리들에게 내릴 준비를 잘하고 마감 준비를 잘하라는 말씀입니다. /아멘!/
③야곱의 대답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9)
㉠나는 나그네 인생 길을 살았습니다.
야곱이 '내 나그네길의 세월이 일백삼십 년이니이다'라고 말을 합니다. 나그네길의 세월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 길이 나그네길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아브라함의 고백을 들어보세요! 사랑하는 아내 사라가 죽어 장사지낼 때 고백한 말입니다.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니 청컨대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지를 주어 소유를 삼아 나로 내 죽은 자를 내어 장사하게 하시오'
여기에 '우거'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한 곳에 정착한 삶이 아니고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 떠돌아다니는 일종의 방랑자의 삶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나그네의 삶이란 순례자란 말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기업으로 약속하신 땅에서 살면서도 그 땅을 소유하지 못하고 이국 땅에 있는 나그네처럼 정처 없이 방황해야만 하는 순례자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나그네는 반드시 돌아갈 고향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도 돌아갈 육신의 고향이 있었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약속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나그네 생활을 하게 된 것은 '더 나은 본향을 소망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멘!/
히11장에서 믿음으로 살다가 믿음으로 죽은 세상이 감당치 못할 신앙 인에 대하여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할/
그렇습니다. 나그네 철학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고 이 세상 적인 것에 애착을 두지 않고 저 영원한 본향인 하늘나라에 관심을 가지고 그 나라의 소망을 가지고 그 나라의 시민다운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요일 2:15-17절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사도 바울은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가치 있음을 알고 그 지식을 얻기 위하여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분토와 같이 버렸습니다. /할/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 '세월'이라는 말은 '흘러가는 시간(光陰)'을 뜻합니다. 야곱이 자기가 살아온 일백삼십 년의 시간들을 '험악한 세월'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의 순탄하지 않은 생애를 뜻입니다.
야곱처럼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힘들고 어려운 세상을 살아왔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⑴세상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범죄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의 원형을 파괴해 버렸습니다. 그때의 세상을 낙원이라 불렀는데 거기에는 모든 아름다운 것으로 진선미(眞善美)의 극치를 이루었습니다(창 2:8-9). 그러나 마귀가 개입하면서부터 땅이 저주를 받아 가시덩굴과 엉겅퀴를 내었고 자연계에까지 약육강식의 살벌한 싸움터로 변했습니다(창3:18-19).
이후부터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은 하나님의 진노와 징벌을 불러오게 되었습니다. 노아 시대에는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셨고, 소돔 고모라의 죄악은 하늘에서 내린 유황불로 멸망시켰습니다.
역사 이래로 지구상에서 빚어진 천재지변과 대재앙은 그침이 없었고 그 빈도가 잦아지고 있습니다. 이는 모두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어지럽히며 인류에게는 최후의 심판을 예고하는 그런 예포가 됩니다. /할/
⑵사람들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면 인간성을 상실하게 됩니다(롬1:28). 창조 당시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으나 마귀의 손아귀에 들어가면서 죄의 종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이후부터 그 심성은 한없이 거칠고 악하게 되었습니다. 아담의 아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자기 손으로 쳐서 죽였습니다.
그의 후손들은 대량 살상무기를 만들기도 하고 사람을 죽이는 일에 매진하였고(창4:22), 온갖 음란과 쾌락의 문명을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야곱의 일생 중에는 사람들과 얽힌 일들로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형 에서의 미움을 받아 집을 나갔고, 밧단 아람에서 외가집 식구들과의 갈등을 빚었으며, 자기 아들들에게까지 배신을 당하는 등 그 악순환은 끝이 없었습니다.
⑶자신의 이기주의 때문입니다.
야곱의 생애가 험악한 세월로 얼룩진 것은 악한 세상에서 거친 사람들과 얽혔던 문제도 있지만 그보다는 자기 자신이 안고 있는 문제들 때문이었습니다.
'붙잡는 자'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그는 무엇이나 자기가 원하는 일은 반드시 이루어내고야 말았습니다. 한번 마음먹고 욕심을 내었던 것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쟁취하는 집념의 사람입니다. 그는 팥죽 한 그릇으로 형의 장자 권을 빼앗았고, 아버지를 속이고 형의 축복을 가로챘으며, 외삼촌과 그 집의 형제들도 따돌렸습니다.
신앙적으로도 그는 건전하지 못했습니다. 자기가 어려움에 빠졌을 때 하나님께 매달리며 서원도 하였지만 그 고비를 넘기고 나면 서약을 저버리기도 한 사람입니다. 이처럼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의 생활이 야곱을 험악한 세월로 몰아갔습니다.
⑷돌이켜 보면 정말 야곱은 한평생 고통스런 삶을 살아 왔습니다.
형에게서 장자 권을 속여 빼앗은 날로부터 인생의 온갖 쓰디쓴 일들이 그에게 밀어닥치게 되었습니다. 앞에서 말씀을 드렸지만 다시 또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아버지의 집을 떠나야 하는 도망자 신세가 되었고, ▶사랑하는 아내를 얻기 위해 14년 동안이나 긴긴 머슴살이를 해야 했고, ▶간교한 장인으로 인해 품삯을 열 번이나 속임 당하게 되었고, ▶외동딸이 이방인 청년에게 욕을 당하는 슬픔도 겪었으며, 그 일을 복수하기 위해 무자비하고 잔인하게 앙갚음을 한 아들들 때문에, 또 다시 생명의 위험을 당하게 되었고, ▶14년 간의 고달픈 머슴살이를 수일같이 여길 만큼 사랑했던 아내 라헬이 해산을 하다가 죽는 것도 보았으며, ▶그 라헬이 낳은 요셉이 죽은 줄 알고 22년 간이나 슬픈 세월을 보내기도 했으며, ▶장자 르우벤이 자기의 첩 빌하와 간통하는 패륜도 보았으며, ▶그 동안 기근 속에서 온갖 두려움과 불안을 맛보기도 했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을 생각하면 참으로 고통스럽고, 쓰리고, 아픈, 불행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자기가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바로 앞에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어찌 야곱뿐이겠는가? 우리네 인생 길에도 끊임없이 이런 고통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바로가 야곱에게 '네 연세가 얼마냐?'고 물은 것은 금년을 보내면서 우리가 새겨들어야 할 말입니다. 그것은 '네 나이에 걸 맞는 인격의 사람인가?'를 묻는 질문으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종착역이 가까워 옴을 확인하며 내릴 준비를 잘 하라는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바로 다윗이 기도한 것처럼 '주여! 나의 날 수 계수 함을 알게 하사 지혜로운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런 지혜 자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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