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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의 계절입니다! (눅 2:10-11)

by 【고동엽】 2022. 2. 12.

성탄의 계절입니다! (눅 2:10-11)

 

지금으로부터 약 2천년 전, 유대 나라 베들레헴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들판에서는, 목자들이 밤을 새워 가며 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주의 영광스러운 빛이 그들을 두루 비추더니,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목자들이 겁에 질려 떠는 것을 보고, 천사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면서 목자들을 위로했습니다.
이어서 천사가 말하기를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가장 기쁜 소식을 전하러 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소식은 모든 사람들에게 큰 기쁨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기쁜 소식에 목말라 하고 있습니다. 어쩌다가 까치라도 짖어 대면, 괜히 마음이 설렙니다. 왜 그렇습니까? 혹시라도 반가운 손님이 오리라는 기대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기쁜 소식을 기다립니다. 오뉴월 가뭄에 비를 기다리듯이, 우리는 늘 반가운 소식이 있기를 은근히 기다리면서 살고 있습니다.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도, 어떤 꿈과 기대감을 갖고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천사들이 나타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더군다나 천사들이 전해 준 소식은, 너무나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천사들은 말하기를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가장 기쁜 소식이고, 모든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놀라운 소식이란, '아기 예수가 탄생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을, 죄에서 사망에서 건져내어 생명의 나라로 인도하실 구주 예수가 나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 아기 예수의 탄생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땅에서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가 되는 기쁜 소식'입니다. /할/ ◀제목 소개!▶

①성탄으로 오신 예수님은 나에게 누구이신가?
여러분은 예수를 누구로 믿습니까? 예수님이 하루는 가이샤라 빌립보라는 곳으로 제자들을 데리고 가시다가 길거리에서 제자들에게 엉뚱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기치 않는 질문이었으나 제자들은 나름대로의 그 당시 시중 여론을 전달했습니다. '어떤 이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라고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예레미야'라고도 합니다. 그때 주님이 다시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아무도 주님의 질문에 답을 못합니다. 그때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대답을 들으시고 예수님이 너무 기뻐하시면서 베드로에게 놀라운 축복을 주십니다. 마16:17-18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할/
이 천국열쇠는 바로 신앙의 고백 위에 세워진 성도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주십니다. 이 열쇠는 우리의 건강을 지킵니다. 사업도 가정도 지킵니다. 내일의 찬란한 소망의 보고를 이 열쇠로 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천국열쇠를 베드로에게만 준 것이 아닙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주었습니다. 다만 우리가 바른 신앙의 고백대로 사느냐에 따라 그 열쇠는 작동합니다. /할/
▶신앙은 고백도 중요하지만, 그 분을 어떤 분으로 믿느냐가 중요합니다.

②성탄으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는 임마누엘'이십니다(사7:14/마1:23).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예수님의 동정녀의 탄생에 대해서 이사야는 6,7백년 전에 벌써 예언해 주신 말씀입니다.
마태는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할/
예수님의 탄생의 의미를 '임마누엘'이라는 명칭으로 표현했습니다. '임마누엘'의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이 말에는 이런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⑴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이었습니다. 빌2:6절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본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태초 이전부터 하나님으로 계셨던 분입니다. 미가5:2절에는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다'고 했습니다. 요1:2-3절에서는 '그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가 세상 만물을 지었다'고 했습니다. 히1:2절에서도 '그가 모든 세계를 지었다'고 했습니다. 골1:16-17절에서는 '그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있던 분으로서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모든 세계를 창조했다'고 했습니다.
창1:26, 3:22절에는 하나님이 창조 사역에서 '우리'라는 복수를 사용한 것을 보면 성자 예수님이 창조사역에 참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가르쳐 자신보다 2,000년 전에 태어났던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던 자라고 했습니다(요8:58). 곧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난 것은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신 사건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임마누엘의 종교입니다. 성육신의 종교입니다. 도식적으로 표현하면 하향식 종교입니다. 우리가 찾아 헤매서 만난 케이스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종교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인간의 해후가 성사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사람이 되신 사건이 성육신이고, 성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셔야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찾아 오셨습니다. /할/
구약에 나오는 야곱의 사다리를 다 아시지요? 야곱의 사다리는 어떤 사다리입니까? 야곱이 외롭고 무서워 지상에 사다리를 세우고 하나님을 찾아 하늘로 올라간 사건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지상으로 사다리를 내리시고 무서워하고 고독해하는 야곱을 찾아오신 게 바로 야곱의 사다리 사건입니다.
사다리는 밑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만 있는 게 아닙니다. 야곱의 사다리는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왔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이고, 성탄이며, 성육신이고, 임마누엘입니다.
⑵왜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 오셨을까요? 그렇지 않고서는 하나님과 사람의 만남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인간이 소통하려면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하늘이라는 세계에 계시고 우리는 지극히 제한적이고 유한한 세계에 갇혀 있는 한 양자의 만남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만나지 않고서는 대화할 수 없습니다. 교감을 이룰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시기 위해서 성육신 하셨습니다. 우리와 대화하기 위해 성육신 하셨습니다.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인간의 위치로 스스로 비하하신 겁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와 눈높이를 맞추신 겁니다. 이것이 성육신 사건이며, 성탄의 사건입니다. /할/
⑶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이 한 가지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는 성탄의 과정에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는데 남자의 아들로 오시지 않고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사람들은 다 남자의 후손입니다. 우리는 다 아담의 후손입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주님만은 아담의 후손이 아니라 여자의 후손입니다. 마1장에 나오는 주님의 족보를 보십시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고 시작해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또 낳고로 이어집니다. 모두 아비가 자식을 낳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유다와 그 형제를 낳습니다. 그런데 16절을 보니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그 다음에 이어지려면 요셉이 예수 그리스도를 낳았다가 되어야 하는데, 마리아가 예수를 낳았다고 합니다.
주님은 마리아의 아들입니다. 남자의 후손이 아닙니다. 이 사실은 이미 구약이 여러 차례 예언했습니다. 창3:15절에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대목은 하나님이 뱀을 저주하시는 대목입니다. 여자의 후손이 너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여기에서부터 주님은 여자의 후손으로 온다는 사실을 예언한 것입니다. 마태복음도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다'고 했는데, 이 말씀은 주님이 이 땅에 오시기 700년 전에 이사야가 예언한 말씀입니다. 바로 여자의 후손으로 주님이 오신다는 겁니다.
⑷왜 주님은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습니까?
모든 인류가 다 아담의 후손인데 주님만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으로부터 유전되는 원죄의 유전인자를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남자의 후손으로 오셨다면 주님도 어쩔 수 없이 원죄를 쓰고 태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유전질서를 피하기 위해서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만 원죄가 없습니다. 우리는 다 아담의 후예들이기에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죄인이고, 그래서 죄를 숙명적으로 지으며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아담의 후예는 원죄와 자범 죄를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아닙니다. 주님은 원조의 유전질서와 상관없이 오셨습니다. /할/
⑸왜 주님이 이렇게 오셨을까요? 죄인이 죄인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에 빠진 자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할 수 없습니다. 구약의 제사 법을 아시지요? 제물은 흠과 티가 없어야 합니다.
제사장이 하는 일 가운데 백성이 가져온 제물을 꼼꼼히 살피는 일입니다. 죄가 없어야 대속의 제물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흠과 티가 없이 오셨습니다. 원죄와 자범죄가 없이 오셨습니다. 그래서 속죄의 제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아멘!/
⑹임마누엘 하나님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마28:20절에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또 살전4:17절에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아멘!/

③예수님은 이미 예언된 장소인 베들레헴으로 오셨습니다(미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미5:2절은 메시야의 탄생 장소에 대한 가장 중요한 예언입니다. 마2장에서 동방의 박사들이 별을 보고 찾아와 예루살렘에 이르러 헤롯왕에게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헤롯왕이 모든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불러모아 유대인의 왕이 어디서 나겠느냐고 물으니 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이구동성으로 '유대 땅 베들레헴'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메시야가 되려면 반드시 베들레헴에서 나야 합니다. 다른 곳에서 태어나는 것은 메시야가 아닙니다. /할/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베들레헴에서 탄생하기 이전에 영원 전부터 선재하신 분이심임을 밝힌 말씀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영존하시는 아버지'(사9:6)라고 했습니다.


㉠메시야가 탄생하신 베들레헴은 몇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⑴베들레헴은 슬픔의 마을입니다.
창35:19-20절에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를 세웠더니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라 일컫더라'
야곱이 삼촌 라반의 집에서 이십 년을 지내다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 베들레헴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때 라헬이 해산할 때가 되었는데 그 고통이 심해 라헬은 베냐민을 낳고 죽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그 슬픔으로 라헬의 묘비를 세웠습니다. 그곳이 베들레헴입니다.
야곱은 베들레헴을 지날 때마다 라헬이 생각나 베들레헴은 나에게 슬픔을 준 곳이라고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베들레헴은 성경에 슬픔의 마을로 처음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이는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실 메시야가 우리 대신 슬픔과 고난을 당할 것이라는 예언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53:3). 즉 베들레헴에 탄생하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슬픔과 질고를 지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우리의 구세주임을 예언한 것입니다. /아멘!/
⑵베들레헴은 구원의 마을입니다. 베들레헴은 '생명의 떡'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요6:35절에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할/
예수님은 생명의 떡, 영생의 떡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죽어도 다시 살고, 살아도 영원히 사는 선물을 받게 된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영생이 없습니다. 영생의 반대는 영 벌입니다. 지옥에서 영원히 벌받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습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이 진리는 하나님께서 우주를 다스리시는 법칙입니다.
⑶베들레헴은 생수의 마을입니다. 삼하23:14-16절을 보면, 다윗은 블레셋과 전쟁터에서 갑자기 고향 베들레헴 우물의 생수를 마시고 싶어 했습니다. 그 때 그의 충복인 세 용사가 목숨을 걸고 적진속에 들어가 그 우물물을 떠 왔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생명을 걸고 떠온 물을 마실 수가 없어 여호와께 부어드렸다고 성경에 기록되었습니다.
이처럼 베들레헴은 생수가 있는 동네입니다. 요4:14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할/ 주님께서 주시는 물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됩니다. 생수의 근원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⑷베들레헴은 구세주가 태어난 마을입니다.
요셉은 나사렛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을 낳게 된 것은 그때 로마 황제인 가이사 아구스도가 제국 안에 있는 모든 백성들에게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을 하라고 해서 요셉도 호적을 하러 자신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잠잘 곳이 없어 마구간에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예수님을 낳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왕이시고 구주인 예수님께서 말구유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그때 베들레헴 근처에 있던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 /할/

 

㉡베들레헴에 오신 예수님을 맞이하는 그 당시 사람들은 세 가지 반응이 나왔습니다.
⑴헤롯 대왕은 메시야를 거부하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마2:8절에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고 했지만 실상은 자신이 왕인데 왕이 또 있을 수 없다고 하여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예수님을 찾아 죽이려 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들레헴 근처에 살던 두 살 이하 아이들을 찾아 모두 죽였습니다.
⑵서기관들은 성경의 전문가면서도 메시야가 이곳에 오실 줄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성탄을 환영하지도 않고,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⑶베들레헴의 목자들과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메시야를 환영하고, 경배하며 예물을 드렸습니다. 성탄은 아기 예수님을 환영하고 경배드리고 예물을 드리는 절기입니다. /아멘!/

 

④성탄은 예언자들의 예언이 성취됨을 보여준 사건입니다(사9:6-7).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메시야가 이 땅에 오시되 장성한 몸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고, 아기의 몸으로 오실 예수의 탄생을 우리에게 예언해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참 사람입니다. 사람이라야 죽지, 하나님은 죽으실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의 인성을 말씀해 주는 구절입니다.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 아기는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자기 아들을 세상에 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보여주는 구절입니다(요3:16).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정사라는 말은 곧 정부, 정권이라는 뜻이며, 통치지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어깨에 정권을 담당하신 분이십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통치자요. 만 왕의 왕으로 이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만 왕의 왕이십니다. 이 세 가지가 이 땅에 오신 메시야의 모습입니다. 그는 참 사람이십니다. 참 하나님이십니다. 만 왕의 왕이십니다. /할/
㉣메시야의 이름을 다섯 가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⑴메시야의 첫째 이름은 '기묘자'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은 인성을 초월하신 기이하신 분임을 말해 줍니다. 여기 기묘란 '신비하다'는 뜻이고 '놀랄 만하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너무나 위대하고 신비하시어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고 다 설명할 수도 없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우리 적은 지혜와 지식으로는 다 이해할 수 없는 분입니다. 그 분은 '기이하고 묘하신 분'입니다. 영어 성경은 이것을 'Wonderful'이라는 단어로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메시야가 이 땅에서 하는 일이 모두 '신기하고 놀랍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동정녀의 탄생부터 시작해서 그 분의 모든 삶이 다 놀랍습니다. 기사와 이적을 베푸시면서 사역하시는 일도 놀랍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일, 사망의 권세를 깨치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일, 그 어느 하나 놀랍지 않은 일이 없습니다.
그러면 왜 메시야가 이 땅에 오셔서 그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까? 그 목적은 무엇입니까?
⑵두 번째 이름이 설명해 줍니다. '모사'입니다.
여러분, '모사'라는 뜻이 무엇입니까? 영어에서는 'Counsellor'라고 번역했습니다. 상담자라는 뜻입니다. 보혜사라는 뜻도 됩니다.
우리가 어떠한 문제라도 예수님 앞에 가지고 나가기만 하면 예수님은 그 모든 문제를 깨끗하게 해결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고통을 바꾸어서 즐거움이 되게 하십니다. 아무리 흑암 가운데 행했다 할지라도 큰 빛을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당하던 멸시를 바꾸어서 우리를 영화롭게 해 주시는 분이 바로 메시야입니다. /믿/
⑶'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여기 '全能하다'는 말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전능이라는 용어는 아무에게나 쓸 수 없는 단어입니다. 오직 하나님에게만 쓸 수 있는 단어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 그 어느 누구에게도 사람에게는 절대로 쓸 수 없는 단어입니다.
그 분의 능력은 무한하십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실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실 수도 있습니다. 그 분만이 바람과 풍랑을 잠잠케 하실 수도 있습니다. 또 중풍병자도 고치시고, 눈먼 자, 귀가 먼 자도 고치십니다. 어떠한 문제라도 해결할 수 있는 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할/
막16:17-18절에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성탄이 바로 이런 능력이 임하는 사건입니다. 기적을 행하는 능력도 임합니다. 꿈도 꾸고 환상도 보고 예언하는 능력도 임합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흑암에서 광명으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바뀌게 되는 능력자가 됩니다. /아멘!/
여러분, 힘이 없습니까? 의지가 없습니까? 하나님의 선물인 예수님이 함께 하시면 능력이 옵니다. 그러므로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의 능력으로 아버지 뜻 안에서 우리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막9:23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아멘!/
⑷'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영원히 살아 계시는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자녀들의 보호자요, 사랑으로 양육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사랑으로 언제나 우리를 감싸주십니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실족합니다. 믿노라 하면서도 그 분의 마음을 아프게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우리를 버리는 법이 없습니다.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그 분을 멀리 떠났더라도 탕자가 두 손들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올 때처럼 우리도 뉘우치는 심정으로 그 분께 돌아오면, 그 분은 무한하신 아버지의 사랑으로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주십니다.
⑸'평강의 왕'입니다.
평강이 무엇입니까? 마음의 평안과 육신의 강건입니다. 아기 예수 탄생하실 때 하늘의 천군과 천사들의 찬양이 그것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할/
그래서 요14:27절에서 예수님은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 불안합니까? 예수님을 제대로 모시지 못해서입니다.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다가 풍랑을 만나 죽게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잔잔하라'고 하실 때 바람과 파도가 잔잔하여졌듯 우리가 예수님만 제대로 모시면 마음의 불안도 잔잔해집니다. 가정과 나라의 풍지 풍파도 잔잔하게 하십니다. /믿/
▶아르헨티나와 칠레는 기나긴 '안데스'산맥을 경계로 두 나라가 그 아름다운 남파타고니아 빙원을 차지하려고 국경분쟁을 하다가 마침내 전쟁해야 할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그러나 전쟁을 하면 양국이 함께 망하게 될 것을 안 양국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함께 모여 기도회를 하고 힘을 합하여 양국의 국민과 정치 지도자들을 설득시켰습니다.
'우리가 싸우면 양국이 다 망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서로 화해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그들은 탱크를 녹이고 대포를 녹여서 국경에다 예수님의 거대한 동상을 만들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양국 국민들이 감동하여 전쟁을 그쳤고 지금까지 평화를 지키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짐을 대신 져주시고, 우리의 마음속에 평강을 허락하십니다. 이 세상의 그 어느 것도, 그 어느 누구도 줄 수 없는 참된 평강, 곧 'Shalom'을 우리 마음에 심어주십니다. /할/
여러분! 한 아이가 우리에게 났습니다. 그 아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십니다. 그 분은 만 왕의 왕으로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기묘자로 오셨습니다. 우리의 모사로 오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오셨습니다. 영존하시는 아버지로 오셨습니다. 평강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지금도 그 분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할/
우리의 모든 짐을 메시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 다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이번 성탄주일을 맞이해서 저와 여러분을 괴롭히는 고통과 흑암의 권세와 멸시 천대 저주 질병 실패 그 모든 것을 깨끗하게 벗어버리고 마음의 천국을 이루시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사9:7절은 그 분의 나라에 대해서 우리에게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메시야 왕국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⑴'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그 정사는, 그 분의 다스림은(통치), 그 분의 나라는 영원무궁합니다. 아울러 평강의 더함도 무궁하다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분은 평강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우리를 다스리시되 무력으로 다스리지 않으시고, 평강으로 다스리십니다. 그 분의 나라에는 언제나 평화가 넘쳐흐릅니다.
⑵'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우리 예수님께서 누구의 자손으로 오셨습니까?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습니다. 약속대로 다윗의 자손으로 오셔서 다윗의 보좌에 앉으셨습니다.
⑶'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세상 나라는 쇠약했지만, 그 분의 나라는 영원무궁합니다.
⑷'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여기서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고 하신 부분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각 나라마다 통치 이념이 있기 마련입니다. 건국 이념이 있습니다. 메시야의 나라는 공평과 정의로 통치하신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불공평한 일이 많습니다. 이 세상에는 불의한 일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에는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보존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의 노력으로 가능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7절 말씀 끝 부분을 보십시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그 열심,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그 거룩하신 집념이 모든 것을 반드시 이루시고야 마신다는 것입니다. 과연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은 이것을 이루셨습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이 말씀을 기록한지 약 700년 후에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나셨습니다. 유대 땅 베들레헴 말구유에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기의 몸으로 탄생하신 것입니다.
그 분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능력으로 사탄의 왕국을 무너뜨리셨습니다. 죄의 권세에 얽매여 고통 당하던 우리들에게 구원의 기쁨과 즐거움을 주셨습니다.
사탄에 매여서 종노릇하면서 멸시 당하던 우리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영화롭게 만드셨습니다. 천국의 백성으로 영화롭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할/

 

⑤오늘 본문을 보세요! 예수님이 누구를 위하여 오셨습니까?(눅2:11)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⑴'너희를 위하여' 즉 우리를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위해서만 오신 것이 아닙니다. 미국 사람을 위해서 오신 것도 아닙니다. '너희를 위하여' 오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모두를 위하여 오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로 '나를 위하여' 오셨습니다. /할/
나를 위하여 오신 것이 믿어지면 오늘 예수님은 오늘 나의 구주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구세주이십니다. /아멘!/
⑵'구주가 나셨으니' 예수님은 구주 즉 구세주이십니다. 구원자라는 말입니다.
▶미국 선교사 '리처드슨'이 인도네시아 자바 섬에 가서 선교하실 때 이야기입니다. 식인종이 아직 존재할 때였습니다. 그 곳 관습이 있었습니다. 싸우던 이들이 화해할 때에는 갓난 아이 하나를 선물로 내놓는 습관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갓난아이를 잡아먹으면서 화해하는 관습이었습니다. 이 아이를 그들은 '평화의 아기'라고 불렀답니다.
리처드슨 선교사님이 그 곳에서 선교하던 어느 해에 두 부족 사이에서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두 부족이 날카롭게 대결하고 있을 때, 선교사는 자기의 사랑하는 갓난아이를 안고 가운데 섰습니다. 그리고 '평화의 아기'로 내놓았습니다.
말없이 이 모습을 바라보던 양 부족이 함성을 질렀습니다. 서로 싸우지 말자고 외치는 평화의 소리였습니다. 싸움이 그쳐졌습니다. 평화가 찾아 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구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본질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구세주이십니다. 구원자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믿/아멘!/ 그렇다면 진정한 구원은 무엇인가?
㈀가난한 자에게 구원은 무엇입니까? 부요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고후8:9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할/
예수님은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러 오셨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강대국을 보면 다 예수님을 잘 믿는 나라들입니다.
▶덴마크는 해적의 나라였습니다. 바다에 배를 띄우고 무역선을 침범하여 물건을 노략질하는 해적의 나라, 바이킹의 나라입니다. 놀이터에 가면 바이킹 배가 있습니다. 덴마크의 배입니다. 그런 나라가 '고드'족으로부터 복음을 받아 예수를 믿으면서 그렇게 축복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영국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한 때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습니다. 온 세계를 영국이 지배하여 영국 땅에는 해가 지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카나다 일부, 뉴질란드, 호주 미국 이런 나라들은 모두 영국을 뿌리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만든 사람이 바로 '빅토리아' 여왕입니다. 그는 64년 동안 영국을 통치했습니다. 대단한 여왕입니다. 전 왕 윌리암 4세가 죽자 그 날로 왕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왕이 된 첫 날 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그 앞에 성경을 펼쳐 놓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오늘 영국 왕이 되었습니다. 내일부터 성경대로 하나님 말씀대로 이 나라를 통치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 후 빅토리아 여왕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웨스트 민스트 교회에 가서 엎드려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지혜를 구했습니다.
후에 인도에서 정치가들이 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영국을 그렇게 큰 나라 경제 대국으로 만든 비결이 무엇입니까?' 빅토리아 여왕은 성경을 펼쳐 들고 말했습니다. '그 비결은 바로 이 책입니다.' /할/ 미국 프랑스 독일 이태리 등 모든 강대국 선진국이 다 기독교 국가입니다. 예수님은 가난에서 부요로 우리를 구원시키러 오신 구세주입니다. /아멘!/할/
㈁병든 자에게 구원은 건강입니다. 예수님은 못 고칠 병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의사가 포기한 병이지만 믿음으로 고침 받은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12년을 불치병으로 고생하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여자가 예수님 앞에 와서 고쳐 달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 지어다'(막5:34)
아픈 사람에게 구원은 물질이 아닙니다. 건강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오래 사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건강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출15:26절에서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고 하셨고, 렘30:17절에서도 '내가 너를 치료하여 네 상처를 낫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말4:2절에서는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아멘!/
㈂환란을 당한 자에게 구원은 평안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입니다. 가난으로부터 구세주, 병으로부터 구세주, 그리고 환란으로부터의 구세주입니다.
시18:6절에 '내가 환난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 시20:1-3절에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성소에서 너를 도와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으시기를 원하노라(셀라)'
시25:22절에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그 모든 환난에서 구속하소서' 또 시34:6절에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할/
▶'빅톨 유고'는 문학계의 거성입니다. 그는 '레미제라블, 노틀담의 곱추' 등 유명한 작품을 많이 남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술과 여자로 방탕하여 얼룩진 삶을 살았습니다. 자연히 따라오는 것은 가난이었습니다. 가정은 엉망이었습니다. 가정에서 환란이 잦을 날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가정에 비극이 찾아 왔습니다. 그가 사랑하는 딸이 세느 강에 빠져 자살했습니다. 그 딸이 죽으면서 유서를 남겼는데 그 내용은 꼭 하나였습니다. '아버지 회개하고 예수님에게로 돌아오세요.'
이 유서를 보고 유고는 새 생활을 시작합니다. 주님께 돌아 왔습니다.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정부에서 가난한 사람을 돕는 후생 사회국에 취직을 했습니다. 월급 받기 위하여 일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가난과 환란 속에 있는 사람들을 돌보기 위하여 그 곳에 취직한 것입니다.
후에 그의 진심이 인정되었습니다. 훌륭한 인격도 인정되었습니다. 프랑스 교육부 장관이 되었습니다. 후에 '빅톨 유고'가 고백하기를 '내 딸은 천사였으며 딸을 통하여 예수님이 나를 지옥에서 불러내셨습니다.' /할/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이십니다. /아멘!/
㈃죄로부터의 구원은 자유 함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구원은 죄로부터 구원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살면서 잠깐 사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생을 노래하기를 '안개와 같다'고 했고, '손바닥 넓이만큼 산다'고 했습니다. 인생은 일장춘몽이라고도 합니다. 들에 풀 같다고도 합니다.
짧은 인생을 살면서 물질적으로 축복을 못 받아도 됩니다. 건강 적으로 축복을 못 받아도 됩니다. 건강 관리 잘 하고 100살 살고 지옥 가는 것보다 건강관리 좀 잘못 하더라도 예수 믿고 99살 살고 천국에 가는 것이 낫습니다. /믿/할/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은 죄입니다. 우리의 죄를 구원하시고자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성탄으로 오신 예수님을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할/
그렇습니다. 성탄의 계절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예수라'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오셨습니다. 가난으로부터 구원하시려고 오셨습니다. 병으로부터 구원하시려고 오셨습니다. 환란으로부터 구원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죄로부터 구원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이 일을 이루시려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롬5: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아들을 보내셨고 십자가에 달리게 하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랑을 하되 '때문에'의 사랑을 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너를 사랑한다. 너는 내 사랑을 받을 자격과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또 세상 사람들은 '만약에'의 사랑을 합니다. '때문에'의 사랑을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사랑하려고 할 때 '만약에'의 사랑을 합니다. '비록 지금은 그래도 만일 네가 앞으로 내게 잘한다면 내가 너를 사랑할 것이다. 만일 네가 앞으로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면 내가 너를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제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왔기 때문에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때문에'의 사랑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앞으로 잘 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만약에'의 사랑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죄인으로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들입니다. 앞으로도 잘 하겠다고 다짐은커녕 여전히 하나님이 없다고 하며 살던 우리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할/
㈅아들을 주신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좋은 것으로 은사를 주시기를 소원하십니다.
롬8:32절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모든 것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성탄은 바로 이런 예수님을 만나는 축복의 시간입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이 나신 이 성탄의 계절에 사랑의 의미를 다시 깨닫고 잃어버렸던 사랑을 되찾게 되면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을 돌아봐야 합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이 오늘 우리들에게 향하신 마음입니다.
▶미국에서 아직 노예제도가 살아있을 때 이야기입니다. 새로운 노예를 사기 위해서 농장 주인이 신실한 한 노예 '조우'를 데리고 노예 시장을 찾았습니다. 주인은 아무리 둘러봐도 쓸모 있는 노예를 찾기가 힘이 들어서 조우에게 사야할 노예를 골라보라고 시켰습니다.
그런데 조우가 건강하고 젊은 노예를 사려고 하지 않고 굳이 병들과 늙은 노예를 고집하더랍니다. 워낙 신뢰하는 노예였기 때문에 주인은 이해가 되지 않아도 하자는 대로 그 노예를 사서 데려왔습니다. 집에 와서 주인이 물었답니다. '도대체 왜 저 노예를 샀느냐?' 그 때 조우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인님! 죄송합니다. 저 노예는 저를 유괴해서 노예 상인에게 판 장본인입니다. 그런데 뜻밖에 노예 시장에서 병든 채로 노예로 끌려온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때 제 마음 속에 강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저는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저 사람이 하나님께 갈 때까지 돌봐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사자고 한 것입니다.' /할/
여러분! 이 성탄의 계절에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깊이 깨닫고, 그 능력을 깊이 체험하며 그 사랑을 실천하면서 축복된 삶을 살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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