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우리는 천국을 향하여 달려가는 신앙의 경주 자들입니다! (히 12:1-2)

by 【고동엽】 2022. 2. 12.

우리는 천국을 향하여 달려가는 신앙의 경주 자들입니다! (히 12:1-2)

 

어느 부자 집의 주인이 칠순을 맞이하여 잔치를 며칠 앞두고서 집안에 있는 모든 동물들이 모여 회의를 했답니다. 주인의 잔칫상에 올라갈 동물을 뽑기 위해서입니다. 과연 ‘누가 순교할 것인가?’ 그것이 그 날의 의제였습니다.
의장 동물이 먼저 개에게 물었습니다. ‘얘, 멍멍아! 요즈음 들어서 주인의 기력이 몹시도 쇠하여진 것 같은데, 네가 주인의 보신을 위해서라도 탕으로 올라가 주면 어떻겠느냐?’ 그 소리를 듣고 개가 가만히 생각하더니 ‘내가 주인을 위해서 희생을 하는 것은 좋은데, 내가 없으면 누가 이 집의 재산을 지켜 주겠니? 주인을 도둑으로부터 보호해 줄자가 누구겠어? 그러니 내가 없으면 안 될 것 같아’
의장 동물은 개의 말을 듣고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이번에는 닭에게 ‘얘, 닭아! 네가 삼계탕으로 주인을 좀 대접해 드리면 어떻겠느냐?’ 그러자 닭이 ‘무슨 소리야? 내가 없으면 누가 매일 알을 낳아서 주인의 영양을 보충해 줄 수 있겠어? 그리고 내가 없으면 누가 주인에게 일어날 시간을 가르쳐 줄 수가 있겠어? 나는 안 돼!’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어쩔 수 없이 의장 동물이 이번에는 소에게 ‘얘, 소야! 아무래도 네가 갈비로 주인을 대접해 드려야 하겠다. 그래도 잔칫상에는 소고기가 제일이지 않느냐?’ 그러자 소도 역시 ‘내가 없어봐. 이 집의 이 많은 농사를 누가 짓겠어? 나도 안 돼!’
다른 동물들 역시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희생을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동물은 돼지밖에 없었습니다. 의장 동물은 마지막으로 돼지에게 가서 ‘얘, 돼지야! 네가 삼겹살로 주인을 대접해 드리면 어떻겠느냐?’
그러자 돼지가 가만히 생각하더니 비장한 각오로 ‘꿀꿀, 알겠다. 죽을 놈은 나밖에 없네. 알았으니까 가마솥에 물이나 끓여라.’
여러분! 우리의 모습을 어떠합니까? 우리도 이런 저런 변명을 늘어놓으며 섬김의 자리를 피하려고 들지는 않습니까? /할/ ◀제목소개!▶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우리들의 신앙생활을 경주 장에서 달음질하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은 한가하게 몸을 산책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장에서 최선을 다하여 달음질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올림픽 경기의 마지막에 펼쳐지는 마라톤과 같습니다. 마라톤은 인생의 축소판입니다. 마라톤은 종점까지 달려야만 인정받는 경기입니다. 중간에 제아무리 잘 달렸어도 끝까지 달리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인생도 그렇습니다. 죽을 때까지 열심히 달려야 됩니다. 한두 번 성공이 다가 아닙니다. 한 두 번의 실패로 망하는 것도 아닙니다. 주어진 거리를 다 달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도 각자에게 주어진 인생의 코스를 완주하고 주님 앞에 설 때에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칭찬 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멘!/
고전9:24절에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또 빌3:14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할/
인생은 마라톤입니다. 끝까지 다 달려야 합니다. 도중에 기권하면 안 됩니다. 끝까지 달리되 상을 받도록 좋은 기록을 위해 달려야 합니다. 경주하는 자에게는 달려가는 골인 지점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의 경주 자들에게도 분명한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아멘!/

1. 우리는 천국을 향하여 달려가는 신앙의 경주 자들입니다(1).

 

①우리는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 앞'에서 경주하는 것입니다.
무슨 장면입니까? 원형 경기장에서 운동선수들이 결승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고, 관중석에선 많은 사람들이 열렬히 응원하고 있는 그런 장면입니다. 그런데 그 응원하는 사람들, 관중석에 들어선 '구름 떼와 같이 수많은 증인들'은 바로 바로 11장에서 언급된 믿음의 선조들, 아벨, 노아, 아브라함, 이삭, 요셉, 야곱, 모세, 라합,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 예언자들입니다.
이들은 삶의 갖가지 풍파와 우여곡절 속에서도 믿음을 지켜낸 믿음의 용사들입니다. 이들은 이미 경주의 모든 코스를 다 마치고, 결승점을 통과한 선배들입니다. 그들은 아직 결승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로마의 크리스천들을 향해서 그리고 오늘 믿음의 경주로 달려가는 우리들을 향하여 격려의 함성과 박수갈채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로열박스에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분은 가장 힘든 코스인 십자가의 난코스를 마치시고, 지금은 영광의 자리에 앉아서 고난의 경주를 시작한 크리스천들을 지켜보고 계신 것입니다.
본문의 더 깊은 의미는 '우리 크리스천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주목하는 사람들이 마치 운동장에 운집한 관중들처럼 많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운동선수끼리만 하는 경기는 재미가 없습니다. 기록도 저조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흥이 안 나서 그렇습니다. 연극도 마찬가지로 관중들이 많아야 배우들이 신바람이 나는 것입니다.
구경꾼들이 많이 모이면 먼저 구경꾼들에게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수들이 신통치 않으면 관중들이 야유를 보냅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실망했다는 표시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들의 일거일동을 지켜보는 증인들이 있음을 기억하면서 신앙의 경주를 달려야 합니다. 우리의 앞서간 믿음의 선진들이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그 뿐만 아니라 네 이웃이 우리의 신앙을 봅니다. 네 남편이 보고 네 자녀들이 보고 있습니다. /믿/

 

②경주자는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려야' 합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선수들의 복장을 보셨지요? 가벼운 복장입니다. 경기장에 나서는 선수는 음식 먹는 것을 조절합니다. 체중이 너무 무거우면 안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무거운 짐이 있다면 신앙의 경주를 할 수 없습니다.
산에 오르는 사람, 먼 길을 가야하는 사람의 행장이 가벼워야 하는 것처럼 은혜의 높은 봉에 오르고, 천성을 향해 가는 사람은 버려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바울은 옷을 입고 벗는 것을 가지고 신앙을 설명한 바 있습니다(엡4:22-24).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했고,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달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버려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⑴우상을 버려야 합니다.

출20:4-6절은 십계명의 제 2계명입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한 마디로 우리의 마음속에 우상을 두지 말고, 또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언뜻 이 말씀은 어폐가 있어 보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만 바라보고 우상의 땅 애굽을 떠나 시내광야에까지 왔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늘에서 매일 만나가 내려오는 것을 먹고 있습니다. 반석에서 물이 나오는 것을 마셨습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자기들 위를 뒤덮고 있습니다. 어디를 봐도 저들의 마음속에 우상이 나타날 상황이 아닙니다. 저들이 우상을 섬긴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그런데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우상의 놀라운 생존 전략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긴장을 늦추고 철저하게 대비하지 않으면 언제 어떤 형태로 우상이 나타날지 모른다는 사실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할/
실제로 이런 우려가 사실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주시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 아래 시내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우상을 섬기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상은 잡초처럼 우리 마음속에 생겨납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 마음속에도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위해 죽도록 충성하겠다고 결단하고 헌신하는 사람들 마음속에도 나타납니다. 경계를 늦추고 안일하게 대하다 보면 어느새 내 마음을 장악해 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토록 힘주어 우상숭배를 경계하신 것입니다. /할/
우상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눈에 보이는 우상입니다. 사람들이 만들어 세워놓은 우상을 말합니다. 다른 하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우상입니다. 사람들이 마음속에 들인 우상을 말합니다.
눈에 보이는 우상을 세워놓은 일은 하나님 보실 때 가증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더 문제는 우리 마음속에 들인 우상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더 문제삼으시는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아무런 능력도 없는데 그것을 의지합니다. 아무런 권위도 없는데 그것 앞에 절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 자리에 대신 들어앉은 것들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상을 만드는 일도 하나님 앞에 큰 죄이지만 우상을 섬기는 일은 더 큰 죄입니다.
현대에 우상은 ‘하나님 보다 더 의지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돈입니다. 돈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서 그 사람의 마음을 지배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명예가 또 어떤 사람에게는 권력이 우상이 됩니다. 청소년들에게는 연예 스타가 우상이 되어 그 마음을 지배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상의 심각한 문제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 자리에 우상이 자리를 잡습니다. 하나님 대신 믿음의 대상이 됩니다. 하나님 대신 사람들을 지배하고 다스리고 통치합니다. 우리가 그래서 우상을 척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멘!/
⑵바울은 엡4:22절에서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고 했습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여기 구습은 옛날의 습관을 말합니다. 예수를 믿기 전의 습관을 말합니다.
우리가 이 습관대로 말하고 습관대로 생각하며 행동하고 좋아하는 것을 벗어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도 좋은 습관이 있다면 감사하게 여기고 잘 살려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 믿기 전에 우리에게 나타났던 못된 습관들은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이 옛 습관이 다시 우리를 옛날로 돌아가게 합니다.
▶옛날 김유신 장군이 습관적으로 들르던 술집이 있었습니다. 그 술집에 이제는 안가겠다고 다짐을 했건만 그가 조는 틈에 말이 습관적으로 술집에 간 것입니다. 그래서 김유신 장군이 잠에서 깨어나 자기가 사랑하는 말을 칼로 베어 죽이면서 자신의 나쁜 습관을 고쳤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할/
▶대도 조세형씨, 그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훔치는 것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그 습관을 완전히 뿌리뽑지 못했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간증하고 돌아다니니 남의 이목이 있어 습관이 잘 절제가 되다가 일본에서는 무의식중에 습관이 나온 것입니다. 대도라는 분이 좀도둑 노릇을 하다가 망신을 당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도적질하는 것만 습관이 아닙니다. 게으름도 습관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고 나서도 믿기 전의 게으름을 버리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도 늦고, 약속 시간도 늦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 믿고 나서도 입만 뻥끗하면 거짓말을 하는 사람 있습니다.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남 흉보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는 사람 있습니다. 앉았다 하면 남 흉보는 것을 재미로 알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술 담배가 습관이 되어 있는 사람, 도박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는 사람, 여러 가지 잘못된 것에 습관이 되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옛사람의 습관인데, 이것을 그대로 가지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엡4:23-24절에서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아멘!/
⑶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약4:6절에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교만의 구체적인 형태는 무엇일까요?
윤리 신학자였던 ‘라인홀드 니이버’는 인간에게 있는 교만을 네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첫째, 권력적 교만입니다. 낮을 때는 겸손 하지만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교만이 생길 수 있습니다.
둘째, 지적 교만입니다. 모를 때는 모르기 때문에 겸손할 수 있지만 알게 되면 모르는 사람을 무시하게 되고 자기만 똑똑한 줄로 생각합니다.
셋째, 도덕적 교만입니다. 부도덕 할 때야 별 수 없이 조용히 지내지만 조금이라도 도덕적으로 내세울 것이 있으면 다른 사람들을 부도덕하게 보고 자신을 높이 평가합니다.
넷째, 영적 교만입니다. 신앙인들에게 가장 무서운 것이 바로 영적 교만입니다. 자기가 최고라고 착각하는 경우입니다. 교회가 작으면 무시를 하고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우리 모두 겸손한 신앙인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할/
우리가 겸손하면 복을 받습니다. 잠3:34절에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또한 잠22:4절에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할/
⑷분노도 버려야 합니다.
시37:8절에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여기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는 말은 ‘분노를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분노는 하나의 감정입니다. 분노 자체는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 누구에게나 마음속에 타오를 수 있는 감정입니다. 그러나 분노의 동기는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습니다. 대부분 악한 분노가 어디서 생기는가?
▶억울할 때 생깁니다. 창4:5절을 보면 가인이 분노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 가인이 분노하게 된 것은 억울한 마음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자기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냐는 것입니다. 이 억울한 마음은 대체로 자기의 주관적인 판단, 자기의 욕심이 근거하기 때문에 억울한 마음이 들게 되고 그래서 분노하게 됩니다.
▶시기할 때 생깁니다. 가인은 아벨에 대해 시기하는 마음을 갖게 됐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기뻐하시고, 아벨을 인정하시고, 아벨을 칭찬하시는 모습을 보니 시기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비교하고 경쟁하는 심적 환경 속에서 사람들은 시기하는 마음을 갖게 되고 그 마음이 하나의 악한 동기가 돼서 분노를 가지게 됩니다.
▶감정조절의 실패 때 생깁니다. 마음속에서 악한 마음이 일어날 때 이것을 조절하지 못하게 되니까 그 결과로 분노가 일어나게 됩니다. /할/
▶분노가 일어나면 이성을 잃게 됩니다. 상황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분노가 일어나면 올바른 인간관계가 깨집니다. 분노의 책임을 전적으로 타인에게 돌리고 격한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드러냅니다. 그래서 물건을 던진다든지, 문을 쾅 닫는다든지, 사람을 때린다든지, 욕설을 한다든지, 멱살을 잡고 죽이니 살리니 이런 지경까지 가게 됩니다. 이래서 분노가 무섭습니다.
▶그러면 이 분노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엡4:26-27절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할/
여기서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는 말은 분노가 마귀에게 사로잡히는 올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분노를 마음속에 담고 있으면 마귀에게 조종을 당하게 돼서 결코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설 수가 없습니다.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결코 이런 사람의 예배를 받으시지 않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그야 말로 영적으로 엉망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갈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분노를 버려야 합니다. /믿/아멘!/
⑸욕심도 버려야 합니다.
약1:15절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이렇게 무섭습니다. 그래서 눅12:15절에서 주님이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 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탐심’이라는 말의 원어 적인 뜻은 ‘자신이 이미 가진 것보다 더 가지려고 하는 욕심’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탐심은 탐욕이라고도 하고, 넓은 의미에서 욕심이라고도 합니다. /할/
▶욕심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첫째로 개인적인 욕심입니다.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욕구를 제어하지 못하고 더 채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개인적인 욕심을 이겨야 합니다. 즉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아멘!/
둘째는 관계 적인 욕심입니다. 남의 것이 탐이 나서 욕심을 부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결국 관계를 좋게 발전시키지 못하고 깨어지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몇 년 전, 한 신문의 만화에 소개된 내용입니다.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나뉜 두 목초지가 있었습니다. 두 목초 지는 비슷한 크기였고 각각 푸른 풀이 우거져 있었습니다.
각 목초 지에는 노새가 한 마리씩 있었는데, 두 마리 다 철조망 울타리 사이로 고개를 집어넣어 반대편 목초 지의 풀을 뜯고 있었습니다. 풀을 뜯기가 훨씬 어려운데도 울타리 너머의 풀이 더 좋아 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풀을 뜯던 노새들의 머리가 울타리 사이에 끼여 버렸습니다. 아무리 해도 빠져나갈 수 없게 되자 노새들은 겁을 집어먹고 시끄럽게 울어대는 그림입니다. 이 만화의 제목이 ‘욕심’입니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법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이겨야 합니다. /할/
셋째, 심지어 하나님 앞에서까지 욕심을 제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수 7장에 나오는 아간이라는 사람이 그랬습니다. 결국 그는 돌로 맞아 죽어 저 아골 골짜기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것을 탐내서는 안됩니다. 결코 이런 욕심을 부려서는 안되겠습니다. 막12:17절에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말3:8-10절에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할/
그렇습니다.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골3:5절에 ‘욕심은 우상숭배’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자족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빌4:11-12절에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우리가 사도 바울 처럼 자족하는 삶을 살게 되면 욕심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아멘!/

③경주의 자세가 무엇인가? 인내입니다(1)
신앙생활은 인내하는 것입니다. 인내 없이는 면류관을 쓸 수 없습니다.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면류관은 인내한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예수님의 인내를 기억하십시오. 본문 2절은 말씀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온갖 수치와 고통을 참아내셨습니다. 예수님이 인내할 수 있었던 이유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 값으로 온 인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는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바라보면서 참으신 것입니다. /할/
‘No Cross, No Crown!’ 십자가 없이 면류관은 없습니다. 고난 없이 영광도 없고 십자가 없이 부활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막8:34절에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할/
여러분, 어떤 한계 상황에 이르렀습니까? 주님의 인내를 생각하며, 조금만 더 인내하십시오. 인내하는 자가 승리합니다. 바울은 노년에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딤후4:7-8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아멘!/
▶오늘 본문은 11장 소위 '믿음의 장'과 연관이 있습니다.
11장은 믿음 장으로 믿음의 싸움을 싸우다가 승리한 위대한 선배들이 수십 명이 나옵니다. 그들이 '허다한 증인들'입니다. 이들 믿음의 선배들의 공통점은 인내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인내입니다. 기도의 응답도, 하나님의 축복도, 우리가 들어가야 할 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도 인내로 참고 견디는 자들에게 주어진 은총입니다. /믿/아멘!/
예수님의 인내를 3절에서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인내는 '일하면서 참는 인내'입니다. 우리는 흔히 인내라고 하면 '참는 것'을 생각합니다. 문을 딱 닫아걸고 기분이 가라앉을 때까지 그 고통을 혼자서 삼키는 것을 생각합니다.
▶우리도 기도하면서 인내하고 봉사하면서 인내하고 충성하면서 인내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약1:4절에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일수록 더 많이 참아야 합니다. 교회에서도 일반 성도들보다는 집사가, 권사가, 더 참아야 하고 인내해야 합니다. 교회가 어렵다고 떠나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복 받을 자를 추리고 계십니다. /믿/

 

2. 우리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2).

 

믿음의 경주에 있어서 목표가 중요합니다. 마라톤 선수가 목표지점을 향해 달려나가듯, 우리도 우리 삶의 유일한 목표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달려 나아가야 합니다. /아멘!/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런던 올림픽 남자 유도 81kg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김재범 선수는 신실한 기독교인입니다. 그는 그동안 훈련에 온 힘을 다하면서, 오직 1등을 목표로 알람을 맞춰 놓고 기도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번 런던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는 의사의 만류에도 하나님만 의지하면서 경기 전날까지 진통제를 맞아가며 훈련에 임했습니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았다면 금메달을 따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깨, 팔꿈치, 손가락, 무릎, 허리 등 정말 부상이 많고 네 번째 손가락은 인대가 끊어졌지만,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니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졌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그를 비난하는 안티 기독교 악플러들에게 페이스 북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 욕하는 건 괜찮아. 하지만 하나님 욕은 제발 부탁인데 하지 말아 줘. 나는 올림픽 금메달보다 하나님이 더 중요하거든’ 김재범 선수의 최종 목표는 금메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할/

 

①신앙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를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여기 바라본다는 원어는 '안드로포스'인데 사람도 '안드로포스'입니다. 즉 땅을 보는 자가 아니라 위를 바라보는 자,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란 의미입니다.
골3:2절에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위를 바라보고 살아야 할 존재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위를 바라보고 산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땅에 살면서도 관심은 하늘나라에 두고 살았습니다. 그는 거부로 큰 성을 쌓고 살수도 있고 대궐 같은 집을 짓고 살수도 있었지만 언제나 장막에 거하며 나그네처럼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낮에는 구름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제나 위를 바라보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스데반 집사는 사람들로부터 돌 세례를 맞아 죽을 때 돌을 들어 던지는 사람들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오직 머리를 들고 위를 바라보았습니다. 그 때 스데반은 예수님께서 보좌에서 일어나셔서 자기를 내려다보고 계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본 스데반은 기쁨이 충만하였고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했습니다.
노아도 위를 바라보고 산 사람입니다. 노아에게 홍수 심판을 대비하여 방주를 지으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방주는 맨 위쪽 지붕에 창을 하나만 내도록 특별하게 설계되어 있었습니다. 하늘이 보이는 창 외에는 어디에도 창이 없었습니다. 여기에는 오직 하나님만 생각하고 하늘만 바라보라는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의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할/


②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의 주가 되십니다. '믿음의 주요'
이 한 마디 속에는 예수님에 대하여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주'라는 말은 '생명의 주인'이심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만은 여기서는 '지배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지배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그 분의 지배아래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정말 우리들이 그 분의 지배아래 들어가 있느냐? 그 분이 시키는 대로 살고 있느냐?'입니다. 힘들고 고단하고 피곤해도 새벽기도를 하고 있는가? 아까워도 십일조를 온전히 드리고 있는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고 있는가?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있는가? 신앙생활은 그 분의 지배를 받는 생활입니다. 예수님의 우리의 믿음의 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또 여기 '믿음의 주'라는 말은 '믿음의 창설자, 믿음의 인도자, 즉 스승'이라는 뜻입니다. 경기하는 운동선수들에게는 코치가 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믿음을 지도하시는 스승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신앙의 달음박질을 잘하려면 그리스도의 인도를 잘 받아야 합니다. 즉 지도를 잘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멘!/

 

③예수님은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여기 '온전케'하신다는 말은 '완성한다는 말과 책임진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주님은 약한 존재를 강한 존재로 완성해 주시고, 깨어진 것들을 싸매어 주시고, 찢어진 것들을 한데 묶어 하나 되게 하십니다. /믿/
여기 온전케 하신다는 가장 깊은 뜻은 우리의 믿음과 인격을 온전케 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를 바라보고 그분의 인도를 잘 받으면 우리의 신앙의 인격이 날마다 자라나 끝내는 온전해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아멘!/

 

④그런데 우리가 바라보지 말아야 할 몇 가지 대상이 있습니다.
⑴자기 자신은 바라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은 연약합니다. 유혹과 시련에 빠지기 쉽습니다. '조석변개', 이랬다저랬다 하는 변덕이 심합니다. 저도 제 자신이 맘에 안들 때가 너무 많습니다. 또 자신의 과거에 실패를 볼 필요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낙심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과거에 잘 나갔던 때만 생각하면 교만하기 쉽습니다.
⑵다른 사람을 볼 필요도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사람을 보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사람은 약하기 때문입니다. 허물 많고 실수도 많습니다. 아무리 잘 믿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허물이 보이기 마련입니다. 주의 종에게도 허물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 바라보고 예수를 믿으면 믿다가 낙심하기 쉽고 넘어지기 쉬우므로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믿/
⑶환경을 바라보지 말아야 합니다. 베드로도 환경 바라보다가 물 속에 빠졌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바라보다가 죄에 빠졌고, 다윗은 밧세바의 누드를 보다가 간음죄, 살인죄를 지었습니다. 롯의 아내는 소돔 성의 세상 향락이 그리워 그곳을 뒤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할/

 

⑤어떤 예수를 바라보아야 하는가?
⑴십자가에서 내 죄 때문에 피 흘려주시고 나를 구원하신 예수를 바라보자!
그렇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그분이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 직전에서도 우편 강도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을 때 좌우 편에 강도와 함께 달리셨습니다. 모든 군중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머리를 흔들며 침을 뱉고 욕을 할 때, 좌편강도도 예수님을 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우편 강도는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순간 우편 강도 마음속에는 전광석화와 같이 계시의 빛이 떠올랐습니다.
‘이분은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구나’라는 믿음이 왔습니다. 그 믿음을 붙잡은 우편 강도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우편 강도의 신앙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고전1:18절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할/
⑵부활의 예수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분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영광의 주님이십니다.
⑶재림의 예수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보며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참 행복한 교회는 항상 깨어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모이기를 힘쓰고, 모여서 뜨겁게 기도하고, 영혼구원의 사명 감당하는 교회로 달려갑시다. /할/
⑷치료의 주님을 바라봅시다. 아담 이후 인간은 다 병이 들었습니다. 영이 병들고 마음이 병들고 몸이 병들고 생활이 병들었습니다. 그 때문에 가정이 병들고 사회가 병들고 역사가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병은 누가 치료할 수 있습니까? 서울 대학이 치료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안기부가, 서울시장이, 이 대통령이 치료할 수 있습니까? 못합니다. 그들도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인간을 치료할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창조주이십니다. 그분은 날 때부터 앉은뱅이를 고치셨습니다. 소경을 고치시고, 문둥병을 고치시고, 각양각색의 어떠한 질병도 다 고치셨을 뿐만 아니라 죽었던 자를 살리시는 창조주의 능력이 그분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 육신이 아픕니까? 그 분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치료의 여호와니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병을 온전케 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아멘!/
⑸환난에서 구해주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풍랑을 만났던 제자를 구해주셨습니다. 주님의 능력은 오늘도 풍랑을 잠재울 수가 있습니다. /믿/ 우리들의 가정의 풍랑을 잠재워주십니다. 사업의 풍랑도 잠재우십니다.
시91:15절에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주님은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강하고 담대하라 나는 세상을 이기었느니라’ /할/
⑹우리를 축복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는 눈을 들어 동서남북 사방을 바라보라’ 아브라함이 바라보았던 그 땅, 그가 밟은 모든 땅은 모두가 옥토로 변하여 축복의 땅이 되었습니다. /믿/
⑺입으로 시인하며 바라보십시다. 사람은 ‘마음에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릅니다.
⑻좋은 것으로 상주실 분임을 인정하면서 바라보십시오.
⑼감사하면서 바라보십시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느니라!’ 주님은 물고기 두 마리, 보리 떡 다섯 개를 들어 하나님께 감사 드렸더니 기만 명이 먹고도 12광주리를 남기는 기적을 낳았습니다. 온전케 하시는 주, 책임져 주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할/
본문 2절은 ‘십자가를 참으신 주님을 바라보라’고 했고, 3절은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예수를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아멘!/

 

⑥예수님의 십자가는 어떤 십자가인가?
⑴수치스러운 십자가였습니다. 파렴치범, 반란죄, 정치범을 처형하는 형벌로 성 밖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십자가형은 두고두고 그 명예와 이름이 땅에 떨어지고 지탄받는 수치스러운 형틀이기에 참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참았습니다.
⑵십자가형은 육신 적으로도 고통스럽습니다. 손과 발에 못을 밖에 매단 후 고통 받다가 햇볕에 말려 죽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십자가형입니다. 팔목이 찢기고 발목이 찢기는 아픔은 숨을 멈추는 순간까지 계속됩니다. 그 고통은 정말 참기 어려운 고통입니다.
⑶정신적인 아픔, 하나님 아버지에게 버림받는 고통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정신적 아픔을 십자가에서 체험하셨습니다. 그래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부르짖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러한 아픔을 다 참으셨습니다. 그리고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우리 주님의 기도문입니다. 이 기도를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아멘!/
⑷부끄러움을 참으신 주님의 인내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자존심과 체면과 자신의 입장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침해를 당하거나 무시당했을 때는 싸우기도 하고 헤어지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벌거벗겨 죽는다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2절에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다'고 했습니다. 주께서 멸시와 조롱과 천대와 십자가의 고통까지를 개의치 아니하는 것은 그것들이 잠시 동안으로 끝나는 것들이라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고통이나 부끄러움은 잠시 동안이지만 영광은 영원한 것임을 아는 사람들은 그 어떤 부끄러움도 견딜 수가 있습니다.
⑸배신감도 참으셨습니다. 큰 소리 칠 수 없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역했습니다. 한마디로 죄인들이 예수님을 거역했습니다. 한마디로 죄인들이 주님을 정죄했습니다. 그것은 굴욕이고 모욕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참으셨습니다.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셨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겠습니까?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참으셨습니다. 심지어는 가롯 유다의 배신도 참으셨습니다.
우리도 참아야 합니다. 부르심에 합당한 상급을 바라보면 참을 수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 참을 수 있습니다. 왜 참아야 합니까? 주님이 참았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님만이 우리들이 바라보아야 할 위대한 신앙의 스승이십니다. /할/아멘!/
⑹사랑의 시금석은 인내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그렇다고 하면 그를 위하여 참아야 합니다. 들어주어야 합니다. 만나주어야 합니다. 기다려주어야 합니다. 그를 위한 희생이 따라야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피 흘리기까지 참아주셨습니다.
우리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에게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24:13)고 하셨습니다. /할/
▶'챨스 카우만'은 '향수를 담았던 그릇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그 조각마다 향기를 풍긴다.'고 했습니다. 예수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달려가도 향기가 나고 걸어가도 향기를 풍깁니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예수를 증거하고, 성공과 번영 속에서도 예수를 높이게 됩니다. /할/

 

⑦예수님을 바라보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⑴마음이 평안합니다. 요14:27절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⑵마음이 기쁨이 충만합니다. 요15:10절 이하에서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함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하박국은 합3:17절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우리의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할/ 영적인 부요, 마음의 기쁨입니다. 우리 모두 이와 같은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⑶주님을 진정 사랑하게 됩니다. 사람은 누군가를 진정 사랑하면 그 사랑의 감정이 나를 행복하게 만듭니다. 잠8:17절에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할/
⑷속 사람이 강건해집니다. 여러분, 굳은 땅에 물이 고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심지가 견고한 사람에게 평강에서 평강을 더해준다고 했습니다.
⑸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꾼으로 자원하게 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외친 그의 일성은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주의 일꾼으로 써 주소서!’ /할/
⑹예수의 이름을 주는 자가 됩니다. 즉 능력자가 됩니다. 행3장에 보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된 사람에게 베드로가 ‘예수의 이름으로 걸어라’고 명하자 벌떡 일어나 걷고 뛰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의 이름이 능력입니다. /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장거리 경주입니다.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우리를 향해 응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고 우리의 목표되신 예수님만 바라보며 믿음으로 참고 견디며 끝가지 경주하는 참 행복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메모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