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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지혜 속에 사는 자와 땅의 지혜 속에 사는 자! (약 3:13-18)

by 【고동엽】 2022. 2. 12.

하늘의 지혜 속에 사는 자와 땅의 지혜 속에 사는 자! (약 3:13-18)

 

시인 최승호씨가 쓴 '황금 털 사자'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평생토록 오직 자기만을 위하여 살아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람과의 이해득실로 얽힌 세상에서 손해보다는 이익을, 실보다는 득만을 취하면서 살다보니 노년이 되었을 때 주위에 남은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는 쓸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에게 외로움을 달래주는 것이라곤 오직 사과 궤짝에 쌓아 놓은 '돈'뿐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에게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사람에게 헌신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마지막 기회마저 자기를 위해 쓰고 말았습니다. 가지고 있던 돈을 몽땅 털어 순금으로 만든 관을 구입하여 그 속에서 죽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결국 그는 금으로 만든 관속에서 죽은 뒤 그 금관에 누운 채로 매장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날 밤, 그의 시체는 금관을 탐낸 무리들에 의해 무덤 밖에 내팽개쳐지고 말았습니다.
그의 시체는 굶주린 들쥐에게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굶주린 들쥐들은 그의 시체의 배를 터뜨리며 내장까지 남김없이 뜯어먹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기만 위하려는 이기심의 마지막이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작가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오늘 제목에 '땅의 지혜 속에 사는 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할/
▶오래 전에 언론에 염소할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연일 화제가 된 일이 있었습니다.
경남 함양군 안의면 산골짜기에 사는 78세 된 정갑연 할머니는 염소 30여 마리를 키우며 홀로 사는 분입니다. 그는 시장 한번 가지 않고 평생 아껴 모은 전 재산 1억 원을 고향 고등학교에 장학금으로 내놓았습니다.
대통령까지 감동이 되어 비서관을 통해 감사의 편지로 격려했습니다. 한글을 모르는 할머니에게 안의면 면장이 대통령의 편지를 대신 읽어줬다고 합니다.
비록 이 할머니는 배운 것은 없지만 세상사는 이치를 알고 계셨습니다. 이런 사람을 '하늘에 지혜 속에 사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할/ ◀제목 소개!▶

 

본문에 '지혜'란 말이 나오는데, 사람마다 생각하는 지혜의 정의가 다 다릅니다. 그러나 대개 보통 사람들은 '처세술'을 지혜라고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 머리가 잘 돌아가고 그리고 꾀가 있어서 어려운 일을 헤쳐 나가는 그런 기술들을 가리켜서 지혜'라고 말합니다.
학문적으로는 '지식을 바르게 사용하는 인격과 기술의 총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지혜란 굉장히 폭 넓은 개념입니다. 그 속에는 지식도 기술도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지혜에 대한 정의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정의는 전혀 다릅니다. 잠1:8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니라'고 말씀합니다. 즉 지혜의 핵심은 '하나님 앞에 선 그 사람의 삶의 태도'입니다. '신전의식'속에 사는 사람의 모습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자의 모습입니다. /아멘!/
오늘 본문은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라고 묻고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이 물음에 우리 인간들이 '누구는 지혜롭고, 누구는 어리석다'라고 판단할 자가 없습니다.
사실 인간은 다른 사람을 평가할 능력이나 자격이 없습니다. 만약 다른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을 평가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할/
▶눅12장에 보면 한 부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부자는 세상 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전혀 어리석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농사를 풍성하게 잘 지은 것을 볼 때도 그는 지혜로웠습니다. 풍성한 수확을 낭비하지 않고 창고를 지어 잘 저축한 것을 볼 때도 그는 지혜로웠습니다.
한 번에 써 없애는 사람들과 비교해 볼 때도 이 사람은 미래를 대비하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 사람은 결코 어리석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정말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주님은 그를 향하여 '어리석은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정말 지혜로운 사람입니까?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어리석다고 평가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멘!/
여러분, 사람들이 아무리 지혜롭다고 해도 하나님이 어리석다고 평가하면 그 사람은 세상의 평가가 어떠하든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지혜로운 자라고 하시면 세상이 어떻게 평가를 하든 그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믿/
그렇습니다. 하나님만이 인간의 어리석음과 지혜로움을 평가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어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래 너는 지혜로운 자라'고 말씀하실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서의 바른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할/

 

①'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13)
본문에서는 두 가지로 우리의 지혜를 보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는 '우리의 선행이며, 다른 한 가지는 지혜의 온유함'입니다. 여기에 특별히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고 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온유한 사람입니다. 온유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말로 떠들어도 지혜롭지 못한 것입니다.
▶아프리카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 한 영국인 귀족이 있었습니다. 그는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일이 되면 늘 자기의 가족을 데리고 교회로 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루는 영국인 귀족이 그 나라의 소년 한 명을 하우스보이로 채용을 했습니다. 소년은 조용한 가운데 자기의 맡은 일에 충실했습니다. 그래서 영국인 귀족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이 뜻밖에도 영국인 귀족을 찾아와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오늘은 제가 이 집에서 일한 지 꼭 석 달째가 되는 날입니다. 제 마음 속에 뜻한 바가 있어서 이제는 이 집을 떠나야 될 것 같습니다. 주인님, 그 동안 저를 잘 돌보아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하고 인사를 합니다.
영국인 귀족은 깜짝 놀랐습니다. 이제 막 정이 들려고 하는데 그만 두고 떠난다고 하니까 너무나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소년을 이렇게 달래보았습니다.
'얘야, 월급이 적다면 내가 좀 더 올려 줄 테니 떠나지 말고 여기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 안되겠느냐?' 그러자 그 소년은 놀랍게도 이런 말을 합니다.
'제가 돈 때문에 이 집을 떠나려고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제가 이 집에 오기 전에 한 가지 결정 못한 일이 있습니다. 제가 기독교를 믿어야 할 지, 그렇지 않으면 회교를 믿어야 할 지 망설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마음 속으로 이렇게 작정했습니다. 기독교를 믿는 집에 가서 한 3개월 일해 보고, 그 다음 회교를 믿는 집에 가서 또 3개월 일해 보고 난 뒤에 제가 믿을 종교를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3개월 동안 기독교를 믿는 집에서 일했으니까, 이제는 회교를 믿는 집에 가서 일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면 안녕히 계십시오.'
당찬 이 소년의 말에 영국인 주인은 가슴이 뜨끔했습니다. 그는 호소하듯이 소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너는 왜 진작 그런 이야기를 내게 해 주지 않았느냐?'고 했습니다. 이 소리를 한 것을 보면 뭔가 깨름직한 행동을 보였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지나간 다음에 그렇게 말해 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여러분, 이 일화가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 주님은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고 하십니다. /할/
행함으로 우리의 믿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실천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야고보서의 대 주제가 무엇입니까? '행함으로 우리의 믿음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장로님은 약2:26절에서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에는 행함이 따라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은 믿음이며 거짓된 믿음입니다.
야고보 장로님은 그의 서신 야고보서를 통해서 '참 믿음과 거짓 믿음'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참 지혜와 거짓 지혜'를 우리에게 대조시켜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참 지혜는 자기의 변화된 삶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된 지혜는 말로 떠드는 것입니다.
⑴'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이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나는 지혜로운 자다, 나는 총명이 있는 자다. 그러니 내 의견대로 따르라' 이렇게 말로만 떠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무는 그 열매를 보아서 아는 것입니다. 열매가 좋아야 나무가 좋은 것이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면서 나무가 좋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지혜에는 열매가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머리 속에 생각으로만 있는 지혜는 온전한 지혜가 아니고, 열매로 맺혀져야 하는데 어떤 열매가 되어야 하는가 하면, 여기서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그랬습니다.
지혜는 선한 일을 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것이 참 지혜의 본질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염소 할머니의 삶이 참 지혜자의 모습입니다. /할/
⑵'선행'이란 '착한 행실'을 말합니다. 선행을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향한 신앙적인 선행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보여주신 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신앙적인 선행입니다. 더 쉽게 말한다면 먼저 예수를 잘 믿는 것이고 그 다음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할/
▶미국에 4살 난 어떤 어린이가 상속을 받아 백만장자가 된 일이 있습니다. 신문기자가 '그 많은 돈을 가지고 무엇을 하겠느냐?'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 어린이는 어린이다운 대답을 했습니다. '사탕을 사 먹겠습니다'
만약 그 아이가 나이를 먹어도 4살의 정신연령을 가지고 물려받은 유산으로 평생 사탕이나 사먹고 산다면 유산을 물려준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이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보혜사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보증해 주시는데, 우리들이 세속적인 욕망에 사로잡혀서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마음이 답답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 하고 싶은 일들이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기뻐하고 좋은 일인지, 아니면 고작 사탕이나 사 먹고 싶어하는 백만장자 아이와 같은 생각인지 한번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할/
둘째, 이웃을 향한 사회적인 선행이 있습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 외로운 가정을 돌보는 일, 고아들을 돕는 일, 무지한 자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일, 환자들을 찾아 위문하고 기도해 주는 일, 타락한 자들을 찾아 재 결심시키고, 낙심한 자들을 찾아가 위로하고 권면하는 것들이 사회적인 선행입니다.
또한 사회적인 선행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은 전도입니다. 행10:38절에 보면 주님께서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받으시고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셨습니다. 주님이 하신 선한 일이 무엇입니까? 바로 복음을 전파하신 일입니다. 전도가 선한 일입니다. 그래서 성도와 교회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을 써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전도는 교회의 심장소리입니다. 전도가 중단된 교회는 심장이 멈춘 교회나 다름이 없습니다. /할/
⑶'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지혜로운 사람은 온유한 사람입니다. 온유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말로 떠들어도 지혜롭지 못한 사람입니다. /믿/
그래요, 참 지혜는 온유하게 행하게 합니다. 대부분 지혜가 좀 있으면 교만하기 쉽습니다. 남을 판단하고 무시하기 쉽습니다. 주의 일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존경받고 칭찬 받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진짜 지혜로운 사람은 오히려 오랜 연단 과정을 거쳐서 얻게 되는 온유함으로 행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아멘!/
▶미국 사람들이 즐기는 경기 가운데 로데오 경기가 있습니다.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 위에 올라타고서 날뛰는 말 위에서 오래 견디는 사람이 이기는 경기입니다. 들에서 잡은 야생마는 힘이 넘치고 또 미친 듯이 날뛰기 때문에 로데오 경기 외에 다른 용도로는 별로 쓸모가 없습니다.
그러나 전문 조련사가 길을 들이면 서서히 말을 듣기 시작하고 나중에는 탈 수 있게 되는데 그렇게 얌전해져서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가 온유함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온유는 잘 길들여진 마음입니다. /할/
성경의 인물 중에 모세가 온유한 자라고 하나님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민12:3절에 보면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또 일찍이 주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마11:29) /아멘!/

 

▶지혜에 종류가 두 가지입니다.
본문에 위로부터 난 지혜와 땅에서 난 지혜의 두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17절에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하는 말이 나옵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지혜를 말합니다. 이런 지혜가 있는 반면에 땅에서 난 지혜도 있습니다. 15절에 보면,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아브라함과 조카 롯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 살게 되었을 때 그들은 많은 재산으로 인하여 함께 살기가 어려웠습니다. 종들이 서로 다투는 일들도 생겼습니다. 그래서 서로 헤어져 살기로 했습니다. 헤어져 살아야 하는 그들에게 어느 지역을 차지하느냐 하는 일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이때 조카 롯이 먼저 물이 있고 양을 치기에 좋은 소돔과 고모라 지역을 선정했습니다. 언듯 보기에는 롯이 지혜 있는 자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지혜는 참된 지혜가 아니었습니다.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었습니다. 롯은 그 소돔과 고모라성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한 성임을 알지 못하고 그저 목축하기에 좋다는 이유만으로 그곳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 결과 롯은 그 많던 재산과 부인과 사위 등 모든 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반대의 땅인 가나안땅을 선정했습니다. 그 땅은 메마른 땅입니다. 사람들이 볼 때 이것은 지혜롭지 못한 선택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지혜는 위로부터 하나님이 주신 지혜였습니다. 그 결과 아브라함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할/

②땅에 속한 지혜는 어떤 것인가?(13-16)
15절은 거짓된 지혜의 특징입니다.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세상적이고, 정욕적이고, 마귀적인 지혜'를 하나님이 주셨을 리가 없습니다. 결국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것입니다. 자기를 파멸로 이끄는 것입니다.
▶어떤 가정의 아버지가 죽어서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자기 아들도 죽어서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그러니까 한 가정의 부자가 함께 지옥에서 상봉을 한 것입니다.
얼마나 기막힌 일인가? 아버지는 아들을 나무랐습니다. '이놈아, 나는 너의 행복을 위해서 온갖 못된 일도 서슴없이 자행하면서 살았는데 네가 어떻게 해서 지옥에 왔느냐?' 그랬더니 아들이 뻔뻔스럽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왜 지옥에 왔냐고요? 아버지 때문에 지옥에 왔지요! 왜 내게 많은 재물을 물려주셔 가지고, 그것을 허랑 방탕하게 쓰면서 죄를 짓다가 이렇게 지옥에 오도록 만들었습니까? 차라리 그런 것을 물려주지 않았다면, 제가 더 열심히 정직하게 살지 않았겠습니까?'
아버지는 아들 때문에 지옥에 갔습니다. 또 아들은 아버지 때문에 지옥에 갔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꾀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결국은 자기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것입니다. /할/
⑴여기서 말한 '세상 적인 것, 정욕 적인 것, 마귀 적인 것', 이 세 가지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협하는 3대 적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곳에서 얻어진 지혜는 하늘의 지혜, 참 지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엡2:1-2절에 마귀의 정체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했습니다.
전에 우리는 밖으로 세상의 지배를 받고 안으로 마음의 부패와 함께 육체의 욕심의 지배를 받고 사는 마귀의 종노릇을 하며 살았었습니다. 마귀의 종이었던 우리는 세상적이고 정욕적이고 마귀적 이었습니다.
⑵세상 적인 지혜는 육신 적인 지혜입니다. 자연적인 지혜요, 본능적인 지혜입니다. 이것은 아담이 범죄 함으로 인간 내면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타락한 인간의 본질로서 하나님의 성품과는 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적인 지혜는 성령의 충만함이 없을 때 활동합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 적인 지혜는 성령의 통제가 없을 때 활동하게 됩니다. 세상 적인 지혜는 마귀 적인 지혜입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얼마나 지혜로웠습니까?
창3장에 보면 사람을 찾아와서 유혹하는 지혜를 사용합니다. 하와에게 와서 마귀는 말을 걸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 하시더냐?' 마귀의 지혜를 보세요. 처음에는 인간의 호기심을 자극시켰습니다. 그리고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고 속삭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선악과를 보니까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하게 보여 입에는 침이 돌고 먹고 싶어 못 견딜 정도까지 되게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손으로 따먹었습니다.
이런 마귀의 지혜는 오늘도 우리의 마음과 생활 속에 깊숙이 스며들고 있습니다. 자신의 자존심과 판단을 절대시하려는 사람들의 생각에 마귀는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땅에 속한 모든 지혜를 배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을 우리 속에 있는 무슨 부패한 지혜, 세상적이고 육신적인 지혜는 마귀에게서 온 것입니다.
▶'에이트겐'이라는 신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옥으로 내려가는 사닥다리에는 세 개의 계단이 있다. 그 첫째계단에는 '세상 적이요'라고 기록되어 있고, 둘째 계단에는 '정욕 적이요' 그리고 바로 지옥문 앞에 있는 셋째계단에는 '마귀 적이요'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땅위의 지혜는 지옥으로 내려가는 사닥다리입니다.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지옥으로 인도하는 것이 이 땅위의 지혜입니다. 이런 지혜를 어떻게 참된 지혜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위로부터 내려온 참된 지혜로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그러면 세상 적인 지혜의 특성은 어떻습니까?
⑴시기입니다(14).
시기심의 뿌리는 이기적인 욕망입니다. 자기가 중심이 될 때 그 결과로 초래되는 것이 시기심입니다. 시기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믿는 사람에게도 있습니다. 먼 사람보다는 가까운 사람, 모르는 사람보다는 아는 사람에 대해서 시기하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사이에서도 '누가 높은 자리를 차지 할 것이냐?' 하는 것 때문에 시기심이 불타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그렇게 미워하고 사사건건 시비를 건 것도 그 내면에는 시기심 때문이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시기했습니다. 하만이 모르드개를 시기했습니다. 요셉의 형들도 그 시기심 때문에 동생인 요셉을 돈 얼마를 받고 팔았습니다. 사울 왕은 시기심 때문에 나라를 위기에서 건진 영웅이요, 자기의 사위인 다윗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습니다.
성경은 '땅에 있는 지혜는 시기를 초래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잠14:30절에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마음에 평화를 간직할 때는 그 평화가 육신의 생명처럼 유익하지만 시기하는 마음은 자신을 파멸하는 고통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욥5:2절에는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는 어리석은 자를 멸한다'고 했습니다. /할/
▶헬라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운동 선수의 친구가 챔피언이 되어 굉장한 축하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운동 선수는 영광 받는 친구 선수의 경쟁자로서 마음속에 시기를 품게 되었고 그 운동 선수를 기념하여 세워진 동상이 보기 싫어 마음속으로 '저놈의 동상을 무너뜨리고 말리라'고 다짐했습니다.
그래서 매일 저녁 어두울 때 사람들이 다니지 아니하는 때를 틈타서 그 동상의 기초를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게 파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날이 걸려서 결국 이 사람의 생각했던 대로 일이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그 동상이 결국 넘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동상이 넘어지는 순간 이 사람이 기초 밑에 있다가 깔려 죽고 말았습니다. 시기심 때문에 동상도 넘어지고 그 자신은 깔려 죽었습니다.
'호레이스'는 '시기에 가득 찬 사람은 다른 사람이 번창하는 것만큼 말라간다'고 했고, '사무엘 존슨'은 '시기하는 사람은 언제나 초조하므로 조용히 누워 있을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할/
⑵다툼입니다(14).
세상 지혜를 가진 사람이 있는 곳에는 파벌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가정을 갈라놓습니다. 직장에 파벌을 조성합니다. 교회를 분리시킵니다. 사회 각 분야에 당파를 만들어 분열을 초래합니다.
마귀의 지혜가 활동하는 데는 어디나 다툼이 있고 불화가 있고 분열이 있습니다. 이 다툼의 영은 세상에 속한 지혜로서 가정의 화목을, 직장의 평온을, 사회의 아름다움을 빼앗아 갑니다.
⑶자랑하는 것입니다(14).
세상의 지혜는 자기를 자랑하는 교만입니다. 고전1:29절에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아무런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아무도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사실 앞에 감사할 뿐입니다. 이 구원의 감격이 없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없는 사람일수록 자기의 자랑을 많이 합니다. /할/
⑷거짓입니다(14).
자기를 자랑하다 보면 때때로 과장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거짓이 동반되기 쉽습니다.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고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이기려고 애쓰다 보면 거짓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요사이 매스컴을 통해서 선전하는 물건 중에 많은 부분이 사실과 다르다고 해서 물의가 생기곤 하지 않습니까? 경쟁하다 보면 자연히 거짓이 생깁니다.
⑸세상적인 지혜의 결과는 무엇인가?(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거짓된 지혜가 있는 곳에는 요란함이 있습니다. 세상을 시끄럽게 만듭니다. 요즘 대선정국아 뜨겁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서로가 서로를 물고 뜯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시기로 오는 다툼 때문입니다.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세상을 점차로 악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세요. '끔직한 살인 사건, 사기 사건, 이런 사건, 저런 사건이 얼마나 많은가?' 인간의 꾀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밀림의 성자 슈바이처 박사가 밀림 속에서 식인종 추장을 만났습니다. 서로 친해졌습니다. 하루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그 당시 유럽에 번지고 있던 세계대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슈바이처 박사가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있던 식인종 추장은 궁금한 듯 박사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그 전쟁의 결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습니까? 한 열 명이 죽습니까? 아니면 한 백 명이 죽습니까?' 슈바이처 박사는 껄껄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백 명, 천 명이 문제가 아니고 당신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죽습니다.'
그러자 그 말을 듣던 식인종 추장이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이렇게 묻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하군요. 백인들은 사람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하던데, 도대체 그 많은 사람들을 다 죽여서 무엇에 쓸려고 그러는 것입니까?'
세상 적인 지혜의 결과가 그렇습니다. 점차로 악해 지는 것입니다. 땅의 지혜는 세상을 더욱 시끄럽고 악하게 만들뿐이기 때문입니다. /할/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사울과 다윗을 향하여 군중들이 외칩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라' 이 말을 듣고 사울 왕은 다윗을 시기합니다. 그리고 그를 죽이기 위해 자신의 지위를 악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이 다윗에게 보여준 이런 모습은 결코 하늘에서 내려온 지혜가 아닙니다. 그것은 땅의 지혜요 정욕적인 지혜요 악마적인 지혜입니다. 땅의 지혜는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가 최고여야 합니다. 함께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남을 짓밟고 남을 죽이고 그 위에 자신을 세우려고 하는 정욕적입니다. 거기에는 분명히 악마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여기에 비해 스데반 집사의 지혜를 보십시오. 그는 자기를 돌로 치는 자들을 위하여 저들이 알지 못하고 저러니 저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이 위로부터 내려온 지혜요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입니다.
여러분들의 어떤 결정 때문에 다른 사람이 시기를 하고 다툼이 일어납니까? 그것은 위로부터 내려온 지혜가 아닙니다. 세상 적인 지혜 일 뿐입니다. 위로부터 내려온 지혜는 다른 사람들을 가슴 아프게 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피눈물을 흘리게 하지 않습니다. /할/

 

③하늘의 지혜는 어떤 것인가?(17-18)
하늘의 지혜는 세상 지혜와는 비교되는 지혜입니다. 세상에 속한 지혜는 위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늘에 속한 지혜는 어디서 옵니까? 오늘 주신 말씀 17절을 보세요.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다'고 하십니다.
하늘의 지혜는 위로부터 오는 지혜입니다. 온전한 선물과 각양 죽은 은사가 다 위로부터 주어지는데 그 중에 하나가 지혜입니다. 이 지혜는 세상에 속한 지혜와는 달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지혜로써 주님과의 교제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제가 왜 이 본문으로 설교합니까? 하늘에 지혜를 받자는 것입니다. /할/

⑴하늘의 지혜는 온유입니다(13).
하늘에 속한 지혜는 온유입니다. 온유는 잘 통제되고 절제되어 잘 다스려진 훈련된 인격을 말합니다. 온유는 나를 다스리고 지배하시는 성령님으로 인해서 나타나는 우리의 인격의 한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지혜를 받은 사람에게는 온유함이 있습니다. /아멘!/
▶유명한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일화가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남아프리카연방의 통합을 위해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아프리카 부족의 추장들 여럿을 초대하여 왕실에서 만찬을 베풀었습니다. 만찬을 베풀기 전, 아프리카 추장들에게 식사법에 대한 교육을 했지만 막상 만찬이 시작되자 눈치를 살피던 추장들이 포크와 나이프를 제쳐놓고 손으로 먹기 시작했습니다.
각료들과 신하들이 긴장한 가운데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 때 여왕이 자신도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손으로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서로 눈치만 보던 분위기가 아주 좋아졌습니다. 모두들 기분 좋게 식사를 마쳤고 회의도 아주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추장들은 여왕이 하는 일은 모두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여왕이 인상을 쓰며 추장들을 나무랐으면 회의가 실패했겠지만, 추장들에게 맞춰줌으로 회의를 성공시킨 것입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부드러움이 추장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든 것입니다.
잠25:15절에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부드러우면 강한 자에게 질 것 같지만 부드러운 혀가 뼈를 꺾는 것입니다. /할/
⑵성결입니다(17).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성결이란 거룩하고 청결한 것입니다. 거룩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대인관계에도 성결이 필요합니다. 성결이란 말은 본래 구약 종교의식에서 사용된 말입니다. 구약시대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성결'이라고 기록된 띠를 이마에 두르고 자나깨나 하나님께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할/
성결은 성도의 능력이요, 교회의 능력입니다. 제 아무리 그 방법이 좋고 기가 막히다 하더라도, 성결하지 못하면 그것은 위로부터 난 지혜가 아닙니다. 이것은 교회가 어떤 일을 하고자 할 때도 그렇고, 성도가 어떤 일을 하고자 할 때도 그렇습니다. 성결치 못한 일은 위로부터 난 지혜가 아닙니다. 아무리 큰 것을 준다고 해도 그 지혜를 따라가면 안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성결을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 그렇습니까? 위로부터 난 지혜는 성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할/
⑶화평입니다.
성결은 하나님 앞에서의 나의 자세이고, 화평은 인간에 대한 나의 자세가 됩니다.
화평이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원수 맺지 않아야 합니다. 왜 화평을 강조합니까? 그것은 화평할 수 없는 상황이 많기 때문입니다. 좋을 때는 누구나 화평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좋지 않을 때도 화평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맺힌 것이 있다면 늘 풀어야 합니다. 혹시 예물을 드리다가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것이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두고 가서 형제와 화목한 후에 드려야 합니다.
그만큼 화평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할/
⑷관용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관용이란 말을, '법 이상의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관용은 죄를 눈감아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만약 주님께서 우리를 우리의 허물대로 대하신다면 누가 주님 앞에 온전히 설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우리의 죄를 분명히 알게 하시고, 그 죄에서 떠나기를 원하시지만, 죄인된 우리를 품어 주셨습니다. 그 사랑으로 덮어주시는 것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하셨습니다(벧전4:8).
⑸양순입니다.
양순(良順: 어질 양, 순한 순)은 겸손하며 수용적인 태도를 말합니다.
우리의 못된 기질 가운데 튀는 기질이 있습니다. 내가 좀 의견이 맞지 않아도 구태여 그 의견을 냄으로 분란을 일으킬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꼭 전체의 의견에 브레이크를 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러한 태도가 그 회의를 발전시킨다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전체의 의견이라고 무조건 따라가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습관처럼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위로부터 난 지혜가 아닙니다.
자신을 죽이고 전체 함께 따라가는 것도 지혜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자기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빌2:3절에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할/
⑹긍휼입니다.
긍휼은 막연하게 불쌍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먹을 것이 없는 자에게 배부르게 하라고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빵을 떼어서 나누어주는 것이 긍휼입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에는 이 긍휼 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긍휼로 말미암아 많은 선한 열매가 가득합니다.
또한 긍휼이란 말과 짝이 되어 나타나는 말이 '은혜'입니다. 은혜란 전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호의입니다. 긍휼은 마땅히 저주받아야 할 사람을 불쌍히 여겨 저주를 중단하고 나아가 그 사람을 불쌍히 여겨 동정을 베푸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긍휼은 은혜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저주를 받아야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저주하지 아니하셨을 뿐 아니라 구원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긍휼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하나님을 말씀할 때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 하나님의 지혜를 받은 사람들도 긍휼을 베풀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아멘!/
주님도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늘에 속한 지혜를 가진 사람은 긍휼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믿/
⑺선한 열매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주님 안에 있으면 우리 삶에 선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우리가 예수 믿는 성도임을 증거하게 됩니다. 이는 성령에 의한 열매입니다.
⑻편벽이 없다고 했습니다.
여기 편벽함이 없다는 말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 것입니다. 모두에게 잘 해주는 것입니다. 부자에게나 가난한 사람에게나 배운 사람에게나 못 배운 사람에게나 잘 났든 못났든 평등하게 다 잘 대해야 합니다. 힘있는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다른 사람을 뭉개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또 편벽은 흔들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세상에 속한 지혜는 반대로 편벽합니다. 많이 흔들립니다. 이익과 기분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쉽게 타협하고 야합합니다.
이익에 따라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합니다. 규범이나 윤리나 표준도 없습니다. 이익이나 명예가 목적입니다.
이런 사람에겐 이렇게, 저런 사람들에겐 저렇게 위장된 자세로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짓 지혜입니다. 진정한 지혜는 편벽 됨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으니까 언제나 솔직한 자세로 나가는 것입니다.
⑼거짓이 없습니다.
이 말의 뜻은 마스크를 벗었다는 말입니다. 위장이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고 아무 것도 숨기려 하지 않습니다. 세상 지혜로 살아가는 사람은 여러 가지 가면이 있습니다.
삶을 편리하고 이롭게 하게 하기 위해서 많은 가면을 준비해서 때와 형편에 따라서 가면을 바꿔 씁니다. 그러나 하늘의 지혜로 사는 사람에게는 가면이 필요 없습니다. 그들은 본래의 모습대로 살아가며 주안에서 만들어지는 자기의 삶을 그대로 노출시키며 삽니다.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긍정할 줄로 압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화평의 열매를 맺습니다. /아멘!/
⑽결론적인 말씀입니다. 화평과 의의 열매를 맺습니다(18).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우리가 어떤 지혜를 심고 어떤 지혜로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거기에 따라 열매를 거두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심는 대로 거두게 마련입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를 심어야 의의 열매를 거둘 수 있고 성령의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세상 적인 지혜, 정욕 적인 지혜, 귀신 적인 지혜를 심으면 결국 그런 열매를 거둘 수밖에 없습니다.
▶이 지혜를 어떻게 얻습니까?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그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주십니다. 약1:5절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위로부터 오늘 지혜,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가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이 지혜가 세상을 바꿉니다. 이 지혜가 나를 변화시킵니다. /할/
한때는 지하자원이 풍부한 나라가 부자 나라가 되고 선진국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기술과 지식이 없으면 선진국이 될 수 없습니다. 나라가 작다고 하더라도 지식과 기술, 지혜가 앞선 나라가 선진국가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누가 더 좋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는가?' '누가 더 지혜로운 사람인가?'하는 것이 성공을 결정하는 요인입니다.
그래서 현대는 창의력, 즉 지혜의 시대입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가진 기술이나 배경도 중요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지혜입니다. 지혜 있는 사람이 성공적이고 풍성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전10:10절에서 '…오직 지혜는 성공하기에 유익하니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지혜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야 합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록펠러'는 '내 사업의 성공비결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지혜다'라고 했습니다.
작은 부자는 자기의 노력과 수고로 이루어지지만, 큰 부자는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 합니다. 냇가에 가서 물을 떠오는 것은 사람의 노력으로 할 수 있지만, 큰비는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셔야 합니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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