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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예레미야! (렘 1:4-14)

by 【고동엽】 2022. 2. 11.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예레미야! (렘 1:4-14)

 

꿈이 그 사람을 만듭니다. 1937년 미국 '미시간 주'의 '앤아버'라는 곳에서 태어난 '톰 마네건'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톰 마네건에게는 짐이라는 형이 있었는데, 어머니는 두 아들을 다 키울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나가서 일주일 내내 일을 해봐야 27불 50센트, 한 주에 3만원밖에 벌지 못하니까 아들 둘을 키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 톰은 결국 고아원으로 보내야 했습니다. 톰은 고아원에서 자라며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환경 속에서도 항상 그의 마음속에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는 '디트로으트 타이거즈'라는 야구팀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언젠가는 내가 타이거즈 야구팀의 구단주가 되겠다.'라는 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황당하기 짝이 없는 소망입니다. 고아 처지에 오르지 못할 높고 높은 나무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꿈을 가지고 늘 기도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그가 23살 되었을 때에 형과 함께 조그마한 피자가게를 시작했습니다. 500불의 자본금에 400불을 대출 받아서 900불로 가게를 인수하고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피자가게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톰에게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당시 미국에는 음식을 배달해주는 문화가 없었습니다. 음식을 먹으려면 반드시 차를 타고 식당까지 가서 먹어야 하는데, 처음으로 집으로 배달해주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또한 시켜 먹을 때에도 동일한 맛을 느낄 수 있도록 뜨거운 음식을 30분 이내에 집으로 배달해주는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30분이 지나면 음식값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피자 배달 서비스를 시작하여 전 세계적인 피자그룹으로 발전했습니다.
1970년대 200여 곳의 체인점을 냈고, 지금은 미국 전역에 5,300여 체인점에 11만 5천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대기업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 회사가 바로 유명한 도미노 피자입니다. 1년 매출이 25억불,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약 2조 3천억 원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무것도 없이 900불로 시작한 도미노 피자가 세계적인 그룹이 된 것은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훗날 그는 말하기를 C.S 루이스가 쓴 '순전한 기독교'라는 책이 자신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고 했습니다. 그 책을 잃고, '나도 주님을 섬겨야겠다.'라는 결심을 했다고 합니다.
그 후 그는 많은 자선 사업을 하며, 교회도 세웠습니다. 그리고 1983년에는 그가 어릴 적 꿈대로 디트로이트 타이거즈를 5천 300만 불에 인수했습니다. 그가 LA 타임스 지와 인터뷰를 할 때 이러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꿈을 꾸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 꿈은 마음속에 분명하게 그리고 최선을 다해 나갈 때 그 꿈이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꿈은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할/
오늘은 구약의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아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제목 소개!▶

 

여기 소명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다'는 말로, '하나님께서 구별해서 선택했다'는 뜻도 있고, 또 하나님의 자녀로, 사명자로 부름을 받았을 때 사용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하여 하나님의 사명자로 불렀다'는 뜻입니다. /할/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 불러주신 것이 아닙니다. 엡2:1절에 보면 '허물로, 죄로' 우리의 영혼이 죽었습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입니다. 엡2:2-3절에 보면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그런 우리를 엡2:4-5절에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셨고(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할/
우리가 근본을 바로 알고 살아야 합니다. 죄로 허물로 죽어야 마땅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주께서 구원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할/
▶이솝의 우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사자 한 마리가 산에서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빠졌습니다. 너무 깊어서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빠져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한 사흘을 굶으면서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 그곳으로 토끼가 지나가다가 그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숲 속의 왕인 사자가 눈물을 흘리며 '좀 살려달라'고 사정을 했습니다. 그러자 마음 약한 토끼가 고민을 하다가 '건져주어도 안 잡아먹는다'는 약속을 받고 큰 나뭇가지 하나를 구덩이에 던져주었습니다. 사자는 그것을 이용해서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막상 나오니까 사자의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사흘 동안이나 굶어서 제 정신이 아닌데 지금 눈앞에 맛있는 먹이 감이 있으니 욕심이 난 것입니다. 그래서 토끼에게 '내가 배가 너무 고파서 너를 잡아먹어야겠다'고 그럽니다. 그러니 토끼가 깜짝 놀라서 '세상에 이런 배은망덕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당신을 살려주었는데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렇게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 마침 여우가 지나가다가 그 모습을 보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토끼가 자초지종을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여우가 지혜를 발휘했습니다. '사자 왕이여, 이 토끼가 구해 주기 전에는 어떤 모습으로 있었습니까?' 그러자 사자가 함정으로 다시 뛰어 들어가더니 '이렇게 하고 있었지' 하고 말을 했습니다. 이에 여우가 '그럼 원래대로 그냥 그렇게 계십시오'라고 말한 후에 '토끼야 뛰자' 하고 그냥 가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자신의 본성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내가 본래 어떤 사람이었는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존재입니다. 이것을 망각해서는 안됩니다. /할/ 이런 우리를 주께서 불러 주셨습니다. 정말 믿음 안에서 바로 살아야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수가 있습니다. /할/

 

①예레미야는 누구인가?(1-3).
'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 중 '힐기야'의 아들입니다. 그는 유다의 마지막 선한 왕인 요시야 왕 13년에 주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아 약 18년 정도 요시아와 함께 활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요시야가 애굽과의 전쟁에서 전사하고 난 후 유다는 애굽의 속국이 되었고,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왕이 된지 석 달만에 애굽으로 끌려갔습니다. 사실 유다는 요시야가 죽고 난 뒤부터 이미 기울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아하스가 애굽으로 끌려가자 요시야의 다른 아들인 여호야김이 등극했고, 또 그의 뒤를 이어 여호야 긴, 시드기야가 차례로 등극하고 난 뒤 유다가 멸망합니다. 이런 아주 어려운 시대에 예레미야가 활동을 했습니다.
그 당시 동쪽에 있는 바벨론이 침공했습니다. 애굽은 왼쪽 즉 서쪽에 있는 나라이고, 바벨론은 오른쪽 즉 동쪽에 있는 나라인데, 그 강대국 사이에서 시달림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동방에 있는 바벨론으로부터 침공을 당했을 당시 힘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속국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북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는 이스라엘인들을 흩어 이방인들을 살게 하여 혼혈정책을 썼고, 바벨론은 포로정책을 즉 인질정책을 썼는데 이 때 다니엘도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이것이 요시야가 죽고 난 뒤 요시야의 두 번째 아들 여호야김 때의 일어난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그 이후 여호야긴이 즉위하여 석달 만에 또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바벨론에 포로로 가게되었는데 이 때 에스겔도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난 후 마지막 왕인 여호야긴의 삼촌인 시드기야가 즉위하였는데 시드기야 역시 하나님 앞에 악한 왕이 되었으므로 BC586년 유다는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성전도 이 때 모두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환란 기에 예레미야가 선지활동을 약 50년을 했는데 정말 힘든 시기에 그가 그 사명을 감당한 것입니다. /할/
그가 외친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가서 외쳐라' 무엇을 전하라고 하셨습니까? '너희가 망한다고 외쳐라. 그리고 구원이 있다고 외쳐라' 멸망과 구원을 동시에 외치라는 것입니다.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10)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부여하신 특별한 사역은 '파멸'과 '회복'입니다.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고, 넘어뜨린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모든 부정과 불의와 거짓과 우상숭배를 타파하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을 의지한 유다는 멸망할 것'이라는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선민이라고 자부하는 그들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만을 사랑'해야 하는 민족임에도 그들은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이 망한다. 예루살렘 성전은 불 타버린다. 이 백성은 70년 동안 바벨론에 가서 포로가 될 것이다.' 이 끔찍스러운 심판을 예언할 때 얼마나 가슴이 터지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명령은 단호하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이 심판의 메시지 뒤에 새로운 구원의 통로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파괴가 있고 건설이 있느니라. 뽑아버리고 다시 심을 것이니라'
왜? 그래야 할 이유가 뭔가? 한마디로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에 빠져 있었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애굽을 의지하는 정치적 의지가 있고 사상이 썩고 부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파괴하고 다시 건설할 것이니라. 가서 외쳐라'고 하신 것입니다. /할/

②이 사명을 감당하라고 그를 소명하셨습니다(5).
예레미야의 소명은 그냥 받은 소명이 아닙니다. 무당들도 하늘로부터 신이 내려온 강신 무당과 자기가 무당 훈련을 하여 무당노릇을 하는 습득무당이 있다고 하는데 선지자 중에서도 자기가 선지자 노릇을 하고 싶다고 자원하여 나선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전적으로 하나님으로의 붙들림을 받아서 역사를 행한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민족들과 왕국을 위하여 세우셨다고 하셨습니다(10). 여기서 '세우다'는 말은 '대리인으로 감독자로써 일을 맡기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일을 맡기신 것입니다. 이는 국가 원수의 대리인으로 외교업무를 수행하는 대사와 같습니다. 비록 그는 부족한 인간이지만, 이제 그의 말은 신적인 권위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렘23:29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하나님의 사람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처럼 강한 능력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불'같은 말씀입니다. 아무리 강한 바위라도 '쳐서 부수뜨리는 방망이' 같은 말씀입니다. 그 어떤 것도 다 해결하는 능력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으로 사람이 변화되고, 가정이 변화되고, 교회가 변화되고, 나라가 변화됩니다. 그 어떤 것도 다 변화됩니다. 이 사명을 받은 사람이 바로 우리 모두입니다. /할/

 

③본문에서 우리는 '인생을 설득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경을 보면 대체로 하나님은 아버지의 이미지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미지는 일반적으로 성경에 나타난 이미지와는 무척 다릅니다. 낯설고 생소한 이미지입니다. 차라리 어머니에 가까운 이미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부르시는 장면을 보면 우리는 일반적인 하나님의 모습과는 다른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용을 보십시오!
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무슨 말씀인가? 하나님께서 친히 예레미야를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신다는 사실을 알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의 응답이 걸작입니다. 그 말씀을 듣자 울기부터 합니다. 그리고 핑계를 댑니다.
6절에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무슨 소린가? '나는 아이처럼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에 선지자 노릇을 할 수가 없다.'는 핑계를 대고 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를 달래십니다. 7절에 '너는 아이라 하지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찌니라' 그러니까 '말 잘 못해도 괜찮다. 네가 할 말은 내가 다 일러 줄 테니 너는 그것만 가서 전해라'고 설득하십니다.
그래도 꼼짝하지 않자 하나님께서 예레미야가 겁을 먹고 있음을 아시고 또 달래셨습니다. 8절에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그러니까 '겁을 먹지 말라 내가 함께 갈 것이고 문제가 생기면 너를 지켜줄 것'이라고 설득하십니다.
어디 그뿐인가? 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친히 그 손을 그의 입에 대시며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말씀의 능력을 부어 주셨습니다. /아멘!/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이쯤이면 '아멘, 할렐루야'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아직도 아멘을 하지 않습니다. 11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또 예레미야를 달래시고 설득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13절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내게 임하니라' 하나님께서 또 예레미야를 달래시고 설득하고 계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느낍니까? 마치 어머니가 어리광을 부리고 있는 아이를 달래고 설득하는 그런 모습이 아닙니까? 속이 까맣게 타면서도 참고 견디며 설득하는 바로 그 모습입니다. /할/
여기서 우리는 고전13:7절의 사랑의 의미를 마음에 새기게 됩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지금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참아주셨고, 믿어주셨고, 바라봐 주셨고, 또 견뎌주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멘!/
어디 예레미야 뿐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 모두를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십니다. /믿/ 그래서 우리를 참아 주시고, 우리를 믿어주시고, 우리를 바라봐 주시고, 우리를 견뎌주고 계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할/ 그래서 오늘도 우리가 이렇게 주님 앞에 나올 수 있고, 오늘도 이렇게 은혜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아멘!/
그런데 예레미야는 왜 그렇게도 아멘을 하지 못했을까요? 위에서 말씀드린 그 당시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예레미야가 살던 시대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암울했던 시대였습니다. 국내적으로는 요시야 왕이 죽은 후에 우상숭배가 극성을 부리고 영적으로 어둠이 너무도 짙게 깔렸던 시대입니다. 국외적으로는 바벨론이 등장해서 당시 근동의 패권을 장악하고 정복의 길에 나서서 지리적 요충지에 자리하고 있던 유다의 멸망은 이제 시간문제로 남았던 절박한 시기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되 심판을 선포해야 했습니다. 유다의 죄 때문에 바벨론에게 멸망당할 것이라고 선포해야 했습니다. 차라리 '바벨론에게 빨리 항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길'이라 외쳐야 했습니다. 그래서 민족주의자들, 국수주의자들에게 매국노라고 비난을 받아야만 될 형편입니다. 정말 힘든 상황입니다. 자기 백성들의 멸망을 선포하고, 나아가 그 백성들에게 민족의 반역자 소리를 들어야 하는데 어찌 그리 쉬운 결단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레미야는 아멘하지 못했습니다. 핑계를 대고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의 속을 까맣게 타게 하면서도 버티고 있었습니다. 물론 예레미야 입장에서 보면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절박한 상황 속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했다면 아멘 했어야 합니다. 풍전등화와 같은 국가적 위기 가운데서 도대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 방황하는 저 어리석은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했다면 아멘 했어야 합니다. /할/
더더욱 하나님의 안타까운 심정을 헤아릴 수 있었다면 아멘 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뜨거운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면 아멘 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길이 자신에게 정말 영광된 길이요 복된 순교의 길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면 아멘 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면 아멘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면 아멘 할 수 있습니다. 그저 내 입장만 생각하고 그저 나만 손해 보는 것 같아서 아멘을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참 행복한 성도들은 다 아멘 하실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④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든 일에 '소명 의식'을 가지고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국가의 난국에 예레미야를 사명자로 민족의 지도자로 불렀습니다. 나라가 위태로운 상태에 있었는데 분단된 조국은 부패하고, 정치 지도자들은 타락하였고, 경제 질서는 제 길을 가지 않아 가난한 사람은 너무나 가난하여 굶주리고 부한 사람은 호화롭게 살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때 예레미야를 하나님이 불렀습니다. 예레미야가 나선 것 아닙니다. 대통령에 국회의원에 출마한 것도 아닙니다. 나 지도자 시켜 달라고 금식기도 한 것 아닙니다. 하나님이 부르셨습니다.
기드온을 불렀습니다. 솔로몬을 불렀습니다. 다윗을 불렀습니다. 바울을 불렀습니다. 모세를 불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불렀습니다. 또 저와 여러분들을 불렀습니다. /할/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자로 부르시지만, 더 나아가 사명자로 부르십니다. 소명의식이란 무엇입니까?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일이 하나님이 주신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 일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주어진 일을 '내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고'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명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예레미야에게 일을 맡깁니다. 누가 맡깁니까? 하나님입니다. 자기가 좋아서 한 일이 아닙니다. 다시 한번 4-5절을 보십시오. ⑴복중에 짖기 전에 알았다고 합니다. ⑵태에서 나오기 전에 구별하셨다는 것입니다. ⑶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다고 하십니다. 10절 보십시오. 누가 세웁니까? 하나님이 세우십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우리가 매사 일을 할 때 하나님께서 맡긴 일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들에겐 부족합니다.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소명의식입니다. 생산을 하는 자도 소명의식을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소비하는 자도, 공부하는 자도, 대통령도, 공무원도, 신앙인도, 종교 지도자도, 직장인도 소명의식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을 할 때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욕심으로, 명예를 위해, 이익을 위해, 권력을 위해, 출세를 위해 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게 되면 너 죽고 나 살자는 식이 되고 결국 함께 죽습니다.
오래 전에 우리가 경제면에서 IMF의 통치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구조 조정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금융구조 조정하라는 것입니다. 기업 구조 조정하라는 것입니다. 경제 구조 조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소명의식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일이고 하나님이 맡겨 주신 일이라는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저 욕심대로 하고 돈만 되면 다하면 안됩니다. 남이 노래방하면 나도 노래방하고 남이 소수방 하면 나도 소주방하고 남이 통닭구이하면 나도 통닭구이 합니다. 누가 아이디어를 내어 유망 산업이 되면 우후준순처럼 일어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 같이 망하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소명의식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공부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직장 생활하는 것도, 교회 생활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명감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청소하는 것도, 식당일 하는 것도, 교역자 일하는 것도, 전도하는 것도, 봉사하는 것도 소명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준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많은 것이 필요합니다. 그 중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소명의식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아멘!/ 정치인은 정치인대로, 경제인은 경제인대로, 교육가는 교육가대로, 종교인들은 종교인대로 소명의식을 회복해야 합니다. /할/

⑤사명자들은 자기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해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능력이 없습니다. 특별한 기적을 일으킨 것 아닙니다. 무능력하게 잡혀갔습니다. 평생 독신으로 사는 길이었습니다. 반역으로 고발을 당해 옥에 갇혔습니다(37:4-15). 진흙 구덩이에 던져짐(38:1-6)을 당했습니다. 애굽으로 끌려갔습니다(43:5-7). 전승에 의하면 결국 애굽에서 순교를 당했다고 합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주어진 일을 해 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약점, 허물 단점 다 아십니다. 그리고 맡기신 일입니다.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을 주십니다. 수가 적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를 통하여 얼마든지 일할 수 있습니다. 기드온의 300명의 군사를 사용하십니다. 시대마다 많은 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을 사용합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의인 10명을 찾았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다수가 지배하는 시대처럼 보입니다. 물량이 숭배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교회에서까지도 숫자가 우상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중심에는 참으로 그 시대를 이끌어간 소수가 있었습니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어 가는 개척자가 되어야 합니다. '리빙스턴'이 아프리카에서 위대한 선교사역을 이룩하고 있을 때 한 선교단체에서 그에게 편지가 왔습니다.
'우리는 당신을 도울 선교사를 파견할 예정입니다. 당신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는 쉬운 길이 있으면 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리빙스턴은 회신에서 '당신들이 쉬운 길로 오려는 선교사들을 파송 하려면 나는 그들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전혀 길이 없어도 오려는 사람들을 원합니다.'라고 말했답니다. /할/

 

⑥사명자는 어떤 일에도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의 힘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지금 그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심판과 회복을 전해야 합니다. 회복한다는 메시지는 쉽습니다. 그러나 자기 백성이 멸망될 것을 선언하는 선지자의 심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고 싶겠습니까? 그러나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고 외쳤습니다. /할/
소명의식을 가진 사람은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일합니다. 사람들은 조건을 보고 능력 있는 사람만 사용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사람에게 사명을 주고 그에 따른 힘을 주셔서 사용하십니다. /아멘!/
고전1:25-29절을 보세요!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할/

 

⑦소명의식을 가진 사람은 열방을 바라보아야 합니다(5,10).
사람들은 자기 나라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세울 때 누구를 위해 세웠습니까?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습니다.
우리에게는 두 개의 조국이 있습니다. 하나는 대한 민국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일본의 '내촌감삼'은 '내게는 두개의 제이자(J)가 있다. 하나는 Japan(일본)이요, 다른 하나는 Jesus(예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내 조국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열방을 향하여 복음을 전하고 선교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아멘!/

 

⑧살구나무 환상을 왜 그에게 보여주었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말씀을 그에게 확인시켜 주시기 위함입니다. /아멘!/ 11-1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한 가지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살구나무 가지의 환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살구나무 가지를 보여주시면서 하신 말씀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살구나무 가지를 보여주셨을까요? 팔레스틴 지방에서 살구나무는 우리나라에 매화처럼 아직 추운 겨울인데 흰 꽃을 피우면서 봄을 예고해 줍니다. 다른 모든 나무들은 추위에 죽은 듯이 움츠리고 있을 때 살구나무만 생명력을 자랑하면서 아름다운 꽃을 피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나무의 이름을 히브리어로 '솨케드'라고 불렀습니다.
이 솨케드라는 말의 뜻은 '지킨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추운 한 겨울에서도 하나님께서 이 살구나무의 생명을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셔서 추위 속에서도 꽃을 피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 살구나무를 보게 하셔서 장차 추운 겨울 혹한 속에서도 살구나무를 지켜주신 것처럼 그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지켜주실 것을 약속하고 다시금 확인시켜 주고' 계십니다. /할/
그렇습니다. 예레미야가 사역을 해야 할 때는 따뜻한 봄철이 아닙니다. 싱그러운 여름철도 아닙니다. 찬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치는 혹독한 겨울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데 아무도 듣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말씀하셨는데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사람들 모두가 그들의 말은 듣지만 예레미야의 말은 듣지 않습니다. 모두가 예레미야의 말이 잘못됐다고 손가락질합니다.
그 때 예레미야도 자칫 믿음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정말 '내가 외치는 이 말씀이 옳은 것인가? 모두가 그렇지 않다고 하는데 나만 그렇다고 하는데 정말 그럴까?' 의심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마다 예레미야는 살구나무 환상을 다시 기억습니다. 한 겨울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살구나무를 지켜주시고 꽃을 피게 하신다는 것을 저가 기억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기필코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할/
다윗도 그랬습니다. 눈물의 골짜기를 지날 때 모두가 다 다윗을 조롱하고 비웃었습니다. 시22:8절에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모두가 다윗의 믿음이 잘못됐다고 손가락질했습니다. 말하자면 다윗의 신앙생활 역시 한 겨울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다윗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더욱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 또한 자기 나름대로의 살구나무 환상을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멘!/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이 때로는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한 겨울을 지날 때가 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모두가 다 손가락질하고 나 자신도 정말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가? 나를 사랑하신다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회의가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살구나무를 보십시오, 맞습니다. 살구나무를 보아야 합니다. 예레미야가 보았던 그 살구나무를 우리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키시고, 반드시 그 약속을 이루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아멘!/할/

 

⑨끓는 가마의 환상을 왜 또 그에게 보여 주셨는가?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13-1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또 다른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끓는 가마가 북에서부터 기울어져있는 것입니다. 가마가 펄펄 끓고 있는데 그 가마가 북쪽에서부터 남쪽으로 기울어져 있어서 그 내용물이 이제 남쪽으로 흘려 넘치기 일보직전입니다.
이것은 당시 저 북쪽에서 일어난 신흥강국 바벨론이 유다를 침공해서 저 펄펄 끓는 물이 쏟아지는 것처럼 참혹한 고통이 임할 것을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급한 재난의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살고 있는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에 감당키 힘든 재난이 임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할/
예레미야는 자기 살자고 대중 인기몰이에 영합하고자 하는 유혹도 받았을 것입니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고 조용히 가족들만 데리고 피난 갈 생각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역자라고 공격을 받으면서도 매국노라고 조롱을 받으면서도 예루살렘 거리로 뛰쳐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도 듣지 않아도 다가오는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끓는 가마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남쪽으로 기울어져 흘러내리려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며 예루살렘 성에 다니며 임박한 재앙을 전했습니다. 옥에 갇히고 매를 맞고 심지어 유대인들에 의해 애급으로 끌려가 처참하게 죽어가면서도 말씀 전하는 일을 그만 할 수가 없었습니다. 끓는 가마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할/ 우리도 이런 심정을 가지고 서울 장안에 복음을 주어야 합니다. /아멘!/
렘4:19절에서 예레미야가 이런 고백을 합니다.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 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니 이는 나의 심령 네가 나팔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 그리고 20:9절에서도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을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왜 그가 이런 고백을 하고 있을까요? 끓는 가마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심령 속에도 이런 불붙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아직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한 끓는 가마를 보아야 합니다. 다급한 마음, 안타까운 마음으로 저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뜨거운 눈물로 저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알려야 합니다. 지옥이 있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이 일에 눈을 뜨게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⑩하나님께서 '반드시 그와 함께 하실 것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17-19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다시 격려의 말씀으로 저를 설득하십니다. '일어나 고하라, 두려워 말라, 너를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 성벽이 되게 하였다.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이라...' 하나님께서 그에게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큰 고통 가운데로 가게 될 것이다. 네가 말씀을 선포하지만 저들이 듣지 않고 너를 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또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아멘!/할/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고통을 없애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예레미야가 고통 당할 때 그 고통 속에 함께 하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면 그 어떤 고통도 이길 수 있습니다. /믿/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통을 아십니다. 우리에게 그 고통이 있어야 할 것도 아십니다. 그래서 고통을 없애주시기 보다는 우리의 고통 속에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그 고통을 함께 나누어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그 고통 속에서 예레미야를 구원해 주실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고통 때문에 예레미야가 죽는다든지, 돌이킬 수 없는 큰 상처를 받는다든지, 그리고 절망의 나락을 떨어지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 고통을 이기고 승리하도록 이끌어 주시겠다는 약속의 확신입니다. /할/
그렇습니다. 이 약속은 우리들에게도 주신 약속의 확신입니다. 우리 삶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눈물의 골짜기가 다가와도 결국 우리는 그 골짜기를 벗어 나오게 될 것입니다. 왜? 주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이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진심으로 소원합니다. /할/
▶세계적인 동화작가 안데르센이 청년시절에 저명한 여류작가 '브레멘'을 만나기 위해 여객선에 올랐습니다. 선장과 대화 중에 자기의 여행목적을 말하자 선장은 애석한 표정으로 '브레멘'여사가 '외국여행을 떠났다는 조간 신문의 뉴스를 보았다.'고 말합니다. 안데르센은 실망이 컸습니다. 가난한 청년에게 뱃삯과 시간 손실이 컸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 시간쯤 뒤에 선정이 달려왔습니다. '안데르센씨 이건 기적입니다. 작가 브레멘 여사가 이 배에 타고 있습니다.' 그는 그녀와 한 배에 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너무 기뻤습니다. 그는 훌륭한 작가와 많은 대화를 하면서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좋은 작품을 쓴 것도 이 날 받은 영감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훌륭한 사람과 함께 있는 것도 은혜인데, 하물며 세상우주만물의 창시자인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은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하나님은 '네가 어디로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내가 너희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믿는 사람은 그 신앙의 행위가 다릅니다. 뭐든지 자신 있게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겸손한 자와 함께 하십니다. 은혜를 주십니다. 굳세게 하십니다. 도와주십니다. 의로운 오른손으로 붙들어 사용하십니다. /아멘!/
여러분, 초등학교 교과서에 보면 자석을 가지고 실험하는 것이 나옵니다. 저희들이 어렸을 때 못 같은 철이나, 쇳가루를 끌어당기는 자석을 보면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자석에 못을 하나 붙이면 그것이 또 자석이 되어 다른 못을 붙일 수도 있었습니다. 특히 모래가 가득 있는 곳에 자석을 갖다 대면 그 안에 섞여있던 쇳가루만 붙어 나오는 것을 보면서 탄성을 지르기도 했습니다.
흙이나 모래 속에도 쇳가루만 분리해서 끌어당기는 자석처럼, 예수께서는 부정한 세상 속에 섞여 살고 있는 우리들을 끌어내어 구원을 얻게 하셨습니다. 섞여 있을 때는 모래와 쇳가루를 구별하기 어렵지만 자석을 가져다 대면 특별히 쇳가루만 자석에 붙어 나오듯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구별되어 주님께 속하게 된 특별한 존재들입니다. /아멘입니까?/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셨다'(딤전1:12)고 직분을 맡겨주신 주님께 감사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불러주신 특별한 존재들이기에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참 행복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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