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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탑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창 11:1-9)

by 【고동엽】 2022. 2. 11.

바벨탑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창 11:1-9)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안락한 가정에 뜻하지 않는 불화가 생겼습니다. 2남 1여를 둔 안락한 그런 가정입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작은 아들이 밤늦게 공부하다가 물을 먹고 물그릇을 마루에 놓았습니다. 아침에 출근시간이 빠른 아버지가 모르고 물그릇을 발로 찼습니다. 물이 마루에 쏟아지자 큰아들을 부르면서 닦으라고 했습니다.
큰아들은 숙제가 바쁘다고 여동생에게, 여동생은 남동생에게 꾸짖으면서 '너 때문에 쏟아진 물이니 네가 치우라'고 옥신각신합니다. 이 모습을 보고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당신 아이들 교육 잘 시키라'고 책망을 했습니다. 아내가 밖에서 듣고는 화가 나서 가까이 있는 개를 발로 걷어찼습니다. 개가 '깨 깽깽'하고 비명을 지릅니다. 그것을 본 남편은 엄청 스트레스를 받고 출근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날 남편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왜 못 왔습니까? 교통사고가 나 버렸습니다. 분이 난 상태에서 과속으로 달리다가 그만 변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집에는 큰일도 아니고 작은 일, 그러니까 남에게 미루다가 화를 당했습니다. /할/
여러분, 우리 서로 미루지 말고 내가 먼저 솔선수범 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오래 전에 '타이타닉'이란 영화가 상영되었습니다. 그 당시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모았고, 아카데미상을 휩쓸었던 그런 영화입니다. '타이타닉'이라는 영어의 뜻은 '강력무쌍(强力無雙)' 즉 '가장 강하다'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실제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극화한 그런 작품입니다.
1912년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그때에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은 그들이 해양제국의 명예를 걸고 영국의 영광을 만방에 자랑하기 위해서 만든 배가 바로 '타이타닉'호입니다. '그들의 능력, 그들의 지혜, 그들의 국권을 다 동원해서 최고를 자랑하는 그러한 배'를 그들이 만들고 '가장 호화스러운 배, 가장 큰배, 가장 튼튼한 배'라고 자랑을 했습니다.
이렇게 자랑을 하고 처음 출항할 때에 온 세상이 떠들썩했습니다. 그리고 이 배가 출항하면서 또 하나 기록을 내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속도입니다. 대서양을 횡단하면서 될 수 있는 대로 빨리빨리 가서 이 배가 크고 강하고 화려할 뿐만 아니라 속도에서도 최고라고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배가 뉴욕에 도착했을 때에 '이 배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배다.' 이렇게 신문에 나기를 바랬습니다. 타이타닉호가 처음 출항할 때 선주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라도 이 배를 침몰시킬 수 없다'고 장담하면서 선주는 그 선장을 다그쳤습니다. ' 빨리 빨리 최고 속도로 가라'고 재촉을 했습니다.
'하나님이라도 이 배를 침몰시킬 수 없다' 하나님은 그 말을 듣고 하나님의 무서움을 알려주셨습니다. 마침내 이 배는 파선이 됩니다. 산산조각이 납니다. 2,208명중에 1,513명이 이 배와 함께 수장되고 말았습니다. 해양 사고 중에 최고의 큰 사고였습니다. 인간의 교만을 하나님이 심판을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교만하면 망합니다. /할/

오늘은 교만한 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제목소개!▶

 

오늘 본문은 노아 홍수 이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홍수를 왜 주었습니까? 죄인들을 보고 회개하라고 하나님은 노아를 통하여 수 백년 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약속하신 홍수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그 후손들은 '이제 우리가 조상처럼 살지 말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말씀대로 살리라' 이렇게 결심해야 되겠거늘 그러한 결심은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저주해서 홍수를 보내? 좋다, 그럼 이제 우리도 힘을 모아서 어떠한 홍수가 오더라도 능히 견딜 수 있는 그러한 탑을, 성을 쌓아보리라' 그러니까 하나님과 한판 겨뤄보자는 식으로 바벨탑을 쌓기 시작했는데 이 사건은 완전히 하나님 앞에 인간의 교만을 드러낸 불순종의 행위입니다. /할/

 

▶오늘 본문은 노아 홍수 후의 사람들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노아의 세 아들을 통해 번성하기 시작한 인류는 또 다시 많은 수로 불어나게 되었습니다. 방주가 머물렀던 아라랏 산을 중심으로 살던 그들이 좀 더 살기 좋은 땅을 찾아 동쪽으로 이동을 하다가 시날 평지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평지라고 한 것을 보니까 그곳은 농사하기에 좋은 땅이었고, 각종 짐승을 기르며 정착 생활을 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시날 평지에서 인간은 아주 획기적인 기술을 하나 개발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벽돌을 구워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 동안 사람들은 움막 같은 것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나무나 풀을 엮어서 집을 지었습니다.
좀 더 발전한 형태가 돌에 흙을 발라 좀 견고한 벽을 만들어 사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곳에서 진흙을 이겨 벽돌 모양을 만들고 그것을 높은 열로 구우면 아주 단단하고 좋은 건축 재료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저들은 이상한 짓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크고 높은 바벨탑을 쌓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때 연대기에 학자들은 홍수 후 150년경일 것이라고 합니다. 인간들의 속성은 처음부터 하늘에 닿으려고 애를 써 왔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처럼 되려하다가 타락했는데 이제 노아의 후손들은 바벨탑을 쌓아 그대로 하늘에 닿게 하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흩어지는 것을 막고 다시 있을지도 모를 홍수에 대비하고 그 탑을 통해서 자기들의 힘과 영광을 후대에게 전하고 과시해 보기 위한 목적으로 높은 성과 대를 쌓았다고 합니다.
바벨탑은 원래는 '하늘에 못'이란 뜻인데 후에 '혼잡하다'는 뜻으로 사용했습니다. 계18장에서는 악의 대표적 상징적 언어를 바벨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바벨탑은 누가 쌓았는가? 학자들의 견해로 니므롯이 쌓았다고 합니다. 니므롯이 누구인가? 함이 낳은 구스의 아들로서 노아의 4대손 입니다.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처음 영걸이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군이 되었으므로'(창10:8-9)라고 했습니다. 영걸이란 히브리어로 '깁보르'인데 좋은 의미로는 '영웅'이란 뜻이며, 나쁜 의미로는 '압제자'란 뜻입니다.
그런데 그는 도덕적으로 존경을 받는 지도자가 아니라 무력으로 제국을 건설한 폭군이었습니다. 그는 사람을 짐승과 같이 잡아죽이는 폭군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특별한 사냥꾼'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가 쌓은 바벨탑의 넓이가 122미터이며, 높이가 46.7미터인 계단식으로 된 7층탑입니다. 바깥쪽에는 벽돌에 역청이 발라져 있습니다. 오늘날의 기술로는 별것이 아니지만 그 당시 건축법으로는 대단한 것입니다.

▶그들이 탑을 쌓기로 한 이면에는 다음의 몇 가지 의도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을 쉽게 집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을 온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다음은 그들끼리 분산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니까 바벨탑을 세운 것은 인간제국을 세우기 위한 시도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 그분의 뜻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간 제국을 건설하려고 합니다. 삼상 8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자기들에게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왕을 달라고 하는 것은 '나를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라'(삼상8:7)고 거절하십니다. 그리고 왕을 세워서 제국을 만들면 너희가 얼마나 불행해 질 것인지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자녀들을 데려다가 노예로 삼고 재산을 빼앗아 갈 것이고 너희가 비참하게 될 것이니 왕을 세워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대도 끝까지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런데 정작 민초들이 자기들의 왕 때문에 얼마나 비참했는지 모릅니다.
바벨론제국 헬라제국 로마제국을 보세요! 한 사람의 독재자를 위해 백성들이 얼마나 피와 땀을 흘렸습니까?
대하드라마에서 '용의 눈물'에서 자기 왕조를 세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의 피를 흘립니까? '왕과 비'에서 삼촌이 자기 왕국을 세우기 위해 조카 단종을 죽이고 김종서를 죽이고 사육신을 죽이고 수많은 피를 흘리고 그 죄값으로 비참하게 죽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현대사에서 박정희, 전두한씨가 정권을 쥐기 위해 얼마나 피를 많이 흘렸습니까?
이러한 몇 가지 의도는 결론적으로 정치적인 힘으로 인간을 통제하고 다스려 보려는 잘못된 의도였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 없이 인간중심의 세상을 만들어보겠다는 불 신앙의 극치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것이 행복의 길이라는 이러한 환상은 인류의 시초부터 있었던 전형적이고, 공식화된 거짓된 논리입니다. 이러한 것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다음의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본향으로 가는 길에서 이탈하게 만듭니다.
▷인간을 포악하게 잔인하게 만듭니다.
▷인간을 실망, 좌절, 절망에 빠지게 합니다.
▷관계를 단절시킵니다. 그것은 '하나님, 인간, 자신, 자연과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아멘!/

▶이제 본문을 함께 상고해 보겠습니다.

 

①그 당시 인간의 언어가 하나였습니다(1).
구음이 하나이니 참으로 큰복입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최대의 과제가 무엇인가? 언어를 정복하는 것입니다. 각 국가마다 수많은 방언들이 있습니다. 국제화 시대에 가장 큰 걸림돌이 무엇인가? 언어의 장벽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정복자의 언어가 곧 세계 공통어가 됩니다. 그러므로 언어를 정복하는 민족이 세계를 정복하게 됩니다.
사람은 먹는 음식에 따라서 치아와 구강이 형성된다고 합니다. 치아의 형성에 따라 방언이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구음이 하나라는 말은 먹는 음식이 같다는 말입니다. 한 솥에서 밥을 먹는 식생활이 같다는 말은 생활양식이 같다는 말입니다. 생활양식이 같다는 말은 동일 문화권이라는 말입니다.
온 땅이 문화가 하나로 통일되어 있으니 얼마나 편리합니까? 문화가 같다는 말은 사상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마음을 교류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축복을 받은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바벨탑을 쌓았으니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할/
하나님께서 언어를 왜 주셨습니까?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는 재능을 왜 주셨습니까? 요1:1절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하시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이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완전하게 전해주고 보여주는 분이라는 의미에서 예수님은 그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아담 그와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언어를 주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담이 처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들은 말씀을 자기 아내 하와에게 전해주었습니다.
창2:16-17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한마디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고 그 뜻대로 살라고 인간에게 언어를 주신 것입니다. 이들은 이런 사명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데 사용했습니다. '자! 우리가 이렇게 가만히 있을 것이 아니다. 앞으로 또 큰비가 내려 다 망할지 모르니 한번 단결하자, 하나님께서 다시 홍수 심판이 없다고 하셨지만 그분이 언제 바꿀지 모르니 어떤 조치를 취하자, 우리가 전천후 피난처를 만들자'
한마디로 하나님의 약속을 못 믿고 하나님께 대적하기 위하여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벽돌을 올리라, 역청을 칠하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말로서 신호를 짜 공사를 잘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으면 언제라도 그 일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믿/

 

②그 사건은 시날 평지에서 일어났습니다(2).
당시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으므로 그 아라랏산 중턱에서 그들이 농사를 짓고 살았습니다. 노아도 포도농사가 잘되어 포도주를 너무 마셨다가 아들까지 저주하는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세 아들의 자식들이 번성하면서 자꾸 밑으로 기름진 곳을 찾아 내려옵니다.
그들이 옮긴 곳은 태양이 잘 비치는 동남쪽을 택했습니다. 시날지방, 후에 아베드 국경이 된 곳입니다. 그들이 그곳까지 간 것은 참 잘했습니다. 강을 끼고 있고, 평탄하고 문명을 일으키기에 안성맞춤입니다. 땅도 비옥하였으니 하나님이 충만하다고 복 주신 그 복을 받을만한 장소입니다. 그런 곳에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고고학자들은 그곳을 아르메니아 북동 지역이라고 합니다. 사실 그곳은 노아 방주가 머물렀던 아라라산 평원입니다(창8:4). 그곳은 하나님의 심판이 물러가고 새 땅이 도래한 곳이니 축복의 성지입니다. 방주가 머물렀던 곳이니 구약시대에 지상 최초의 교회가 머물렀던 곳입니다.
창8:20절에 보세요!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라고 했습니다. 그곳은 후일에 기념 성소가 세워질 아름다운 곳입니다. 그런데 니므롯이 그 무리들과 함께 하나님을 대적하는 바벨탑을 쌓았으니 하나님을 분노케 하신 것입니다.
시날 평지는 기름진 낙원이었습니다. 시날이란 두 강이란 뜻인데 '유브라데와 티그리스'강을 의미합니다. 어찌 보면 네 근원이 흘렀던 옛 에덴을 복원해 주었던 것입니다(창2:10-14).
그 지역을 오늘날 메소보다미아 평원인 바벨론 지역이라고 말합니다. 그곳은 지하자원이 풍부하여 역청이 많은 곳입니다. 그들은 이러한 풍부한 자원을 가지고 부족함을 모르고 살 수 있는 은총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부요함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바벨탑을 쌓고 말았습니다. 아담이 범한 과오를 다시 반복하게 된 것입니다.
이 땅 위에서 가장 어리석은 인생이 누구인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생입니다. 다윗은 시14:1-3절에서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 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하나님께 받은 은총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를 조용히 생각해 보아야 할 때입니다. /아멘!/

 

③인간들이 뭉쳐 결속하자며 내세운 것은 '대신'하자는 것입니다(3).
여기서 '서로 말하되 자'라고 한 것은 하나님을 배제한 인간만의 결속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자리에 니므롯이 대신 앉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맺은 계약의 자리에 니므롯의 아이디어인 계획이 자리를 잡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단을 세워야 할 곳에 바벨탑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자고 했으니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도전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전과 같은 홍수 심판을 하지 않을 것을 위하여 무지개 언약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언약을 불신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물로 심판해도 그 물이 넘치지 못할 높은 탑을 세우자는 것입니다.
'벽돌을 돌로 대신했다'고 했습니다. 자연석이 풍족하지 못했던 바벨론 지역에서는 가마를 이용 벽돌을 구워내는 방법을 개발한 것은 문명의 개가였습니다. 왜냐하면 불에 구운 벽돌은 자연석보다 더 내화성이 강하답니다.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했다고 했습니다. 역청은 지금 아스팔트입니다. 굉장히 단단하게 쌓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기 보면 모조품도 그런 대로 괜찮은 것 같지만 신앙만은 모조품을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지 않습니다. /믿/
돌 대신에 벽돌을 쓰게 되고 진흙대신에 역청을 써도 된다지만 신앙은 모조품을 절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절대 참 신앙, 절대 순수한 신앙, 우리 모두 순수한 신앙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어떤 사람들은 불평 조로 이런 말을 합니다. '예수님도 믿지 않고, 알라신만 섬기는 저 중동 땅에 석유가 펑펑 나오도록 하시고 우리나라를 왜 석유가 한 방울도 안 나오게 하셨는가?' 그런데 여러분 그곳에 갔다 온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석유가 물보다 더 싸다고 합니다.
여러분! 석유 없이는 살아도 물 없이는 못삽니다. 우리나라는 이래봬도 복 받은 나라입니다. 세계에서 생수를 마시는 나라는 다섯 손가락을 꼽는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생수가 얼마나 시원합니까? 지금은 자연오염으로 수질이 많이 불결해 졌습니다만 석유 안 나온다고 불평하지 마시고 생수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할/
중동지방에 물은 석회석이 너무 많아 걸러내지 않고 먹으면 한 달 안에 신장 결석증에 걸린답니다. 그곳은 물을 마시기가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④그들이 바벨탑을 쌓는 목적이 무엇인가? 세 가지가 나옵니다(4).
여기 '성'은 도시를 말하고 '대'는 '탑'을 말합니다. 성과 대를 쌓자. 그런데 하늘에 닿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꼭 하늘에 닿아야 할까요? 적당히 지어도 될텐데, 그 이유는 홍수에 대한 대비책이라고 합니다. 그들의 기억 속에는 조상들이 홍수 때문에 다 죽었다는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 홍수가 어디까지 올라 왔는가하면 아라랏산 꼭대기까지 물이 찼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힘을 모아서 성을 짓고 탑을 쌓되 아라랏산 꼭대기보다 더 높은 성과 대를 쌓으면 홍수가 나도 대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깊은 의도가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반발심입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다 죽였냐는 반발심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이 왜 홍수를 주었습니까? 앞에서도 말씀했지만, '회개하고 방주로 돌아오라고 피할 길'을 주었는데 그들이 죄 속에서 전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그래서 홍수로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무지개 약속도 주셨는데 그들이 그걸 안 믿고 '하나님이 다시 그렇게 심판한다고? 좋아 할 테면 해보라지, 그것을 넉넉히 견딜 수 있는 성과 탑을 쌓아보리라'하고 하나님에 대한 으름장을 놓은 것이 하늘 꼭대기까지 쌓자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할/


⑴세 가지 목적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늘에 닿도록 하자' 탑을 쌓는데 하늘에 닿도록 쌓자는 것입니다. 이 뜻은 '하늘에 맞서게 하자, 하늘에 대항해 보자!'는 의도입니다. 왜 그들이 이런 생각을 했을까? 한마디로 그들 조상이 홍수로 인해 비참한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비참한 심판을 경험했던 그들의 바벨탑을 높이 쌓아 가지고 하나님이 심판할 수 없도록 대항해 보자는 것입니다.
여러분! 불 신앙의 가장 큰 적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한 마디로 의심입니다. 하나님은 창 9장에서 다시는 인류에게 홍수에 심판을 내리지 않으시겠다는 무지개 언약을 주었건만 그들의 죄성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불안하고 그래서 의심을 하게 된 것입니다. /믿/
모든 불 신앙의 뿌리는 의심입니다. 우리 주님은 '왜 의심하느냐?'고 책망하십니다.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물결 같은 마음'입니다. 신앙의 가장 기본은 믿음입니다. 믿기만 하라,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달리다쿰! 소녀야 일어나라! 주님의 능력을 믿었더니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음에서 살아났습니다. /할/
오늘도 믿음의 역사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의심은 파산이 옵니다. 인간끼리도 의심이 생기면 오해가 생깁니다. 오해가 생기면 분쟁이 일어납니다. 마귀는 끊임없이 우리들에게 의심을 일으킵니다. 부부 사이에도, 부모자식 간에도, 친구끼리도 심지어 성도와 목사간에도 끊임없이 의심을 주어 분쟁을 일으키게 하고 파산으로 이끕니다.
우리는 절대로 마귀의 꾐에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믿/ 오늘 본문의 바벨탑을 하늘에 닿도록 쌓아보자고 외쳤던 그들에게 하나님은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마11:23)고 하셨습니다. /아멘!/
㈁'우리의 이름을 내자' 한국인들은 참 유난합니다. 해외에도 여행을 해 보면 반듯한 벽이나 장소에 한국인들이 낙서를 많이 해 놓았습니다. 로마, 런던, 그랜드캐넌 등 가는 곳마다 한국인들의 낙서가 있습니다. 영어로 하지 않고 한글로 자기 이름을 새겨 놓았습니다.
전남 해남의 땅 끝 마을의 기념탑에도 온통 이름을 새겨 놓았습니다. 이름내기를 너무 좋아합니다. 교회들도 이름내기를 너무 좋아합니다. 불우기관에 구호품을 가져가서 전달하고 사진을 찍어 와서 교회 회보에 큼직하게 냅니다. 이것이 바벨탑 사상입니다. /할/
▶미국 남북전쟁의 마지막 전쟁터는 버지니아주 아포마톡스에서 벌어졌습니다. 북군을 이끄는 그랜트 장군이 남군을 이끄는 리 장군에 대승하자, 국회에서 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결정한 것이 있습니다. 전쟁 당시 국방장관 스탠튼 이름, 장군 이름, 그리고 전쟁에서 공을 세운 장군들의 이름을 모조리 국회 의사당 벽에 기록하여 영원히 기념하자고 결의하려고 의견을 냈습니다.
이 때 스탠튼 장관이 말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승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승리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 이름을 기록하지 마시고 성경 구절 한 구절을 기록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시118:23절을 새겼다고 합니다.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그렇습니다. 이 장관은 자기가 승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셨으니 자기 이름이 국회 벽에 기록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아멘!/
이제 본문에 '내고'란 말은 '높이 세운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내 이름을 높이 세우기 위해서 내가 이렇게 거대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운동이 바로 공명주의 운동입니다. '우리 이름을 내고' 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모독입니다. 하나님의 이름 대신에 니므롯의 이름을 넣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주님의 이름에 우리의 이름을 넣는 니므롯 같은 무리들이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높아지기를 원합니다. 우리 주님은 '높아지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낮아지라'고 했습니다. 또 '썩어지는 밀알이 되라'고 했습니다. '남에게 섬김을 받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노아의 후손들은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하여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뜻의 결과는 비참하게 흩어짐으로 분열로 끝났습니다. 분쟁은 다른데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낮아지고자 하는 자에게는 분쟁이 없습니다. 자기를 높이고자 하는 자의 마음과 뜻이 모인 그곳에 분쟁이 일어나고 맙니다. /믿/아멘!/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온 땅에 흩어지지 아니하고 성안에서 모여서 같이 살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온 땅에 흩어지는 것을 면하자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정면으로 거역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사명이 바로 흩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부름 받아 이 자리에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 받고 기도해서 능력 받고 또 다시 사명을 안고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인의 지체로써 가정 속으로, 사회 속으로, 직장 속으로, 사업체 속으로,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예수님의 향기로서 그리스도인의 사신으로 흩어진 한 교회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아멘!/
그래서 교회는 모이는 교회(에클레시아)와 흩어지는 교회(디아스포라)가 있습니다. 모여서 은혜 받고 능력 받아 세상에 흩어져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아멘!/

 

⑵바벨탑에는 정치적인, 과학적인, 종교적인 바벨탑이 있습니다.
㈀정치적 바벨탑은 하나님을 떠나 정치를 잘하여 지상낙원을 건설하겠다는 것입니다. 저 이북의 사상이 그런 사상입니다. 그런데 이북은 국민들의 낙원이 아닙니다. 공산당원들의 낙원이요 김일성 부자의 낙원이 되었습니다.
㈁과학적 바벨탑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과학만능을 믿고 하나님보다 과학과 기술을 더 의지하여 과학의 힘으로 인간을 행복하게 한다는 탑입니다. 그러나 과학도 기술도 하나님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믿/
㈂종교적 바벨탑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신앙 양심을 팔아 그 어떤 종교적인 연합과 단결로 큰 단체를 만들어 연합 사업을 하는 것입니다. 그 좋은 예가 문선명 집단입니다.
말세에는 모든 면에서 바벨탑을 높이 쌓는 시대가 되어 하나님과 그 말씀을 따라 인본주의가 되어 집니다. 이러한 바벨탑을 높이 쌓아 정상까지 올라가면 예수님의 재림과 하나님의 심판이 임합니다.
계18:2절에 바벨론의 멸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바벨론은 인본주의 세상을 가리킵니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또 4-5절에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 /할/

 

⑤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습니다(5).
인본주의는 무신론주의입니다.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⑴과학적 무신론자들이 있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으니까, 하나님은 안 계신다'는 입장입니다. 하나님은 눈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망원경으로 찾아봐도 없고 현미경을 들여다봐도 없는 하나님을 왜 자꾸 있다고 하느냐?' 이것이 과학적 무신론입니다.
소련의 우주 비행사 '유리 가가린'이 달나라에 가서 천체를 관찰하면서 '아무리 살펴봐도 하나님은 안보이더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이 과학적 무신론을 대변하는 말입니다.
⑵인본주의적 무신론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자유를 억압하기 때문에 사람이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없어져야 한다'는 그러한 이론입니다. 쉽게 말하면 '내 위에 또 다른 존재가 있어서 나를 지배하는 이 상황을 견딜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하나님, 제발 날더러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십시오! 나를 내 맘대로 살게 내버려 두란 말이오!' 이렇게 주장합니다. 니체라는 철학자는 '하나님은 죽었다' 그렇게 말한 다음 '아니다, 사실은 죽여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 인간은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것이 인본주의적 무신론입니다.
⑶저항적 무신론자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 살아가는 상황을 잘 보니 이 세상에는 죄도 많고 모순도 많고 얼마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은지 과연 선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지배하신다면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안 계신다' 이것이 저항적 무신론입니다.
'도스도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란 책을 보면 여종의 아들이 주인집 강아지를 보고 장난삼아 돌을 몇 개 집어 던집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고 그 다음 날 주인이 사냥개를 끌고 가서 그 종의 아들을 물어뜯어 죽게 만듭니다. 이러한 비참한 장면을 보면서 이반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외칩니다. '난 세상에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어' 이것이 저항적 무신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계십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쌓고 있는 성과 대를 다 보시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고 '아하 이들을 그냥 두어선 안 되겠구나' 이렇게 생각하셨습니다.
여기 '강림하셨더라'라고 하신 말씀을 한 유대 랍비는 '하나님이 자비의 보좌에서 심판의 보좌로 내려오셨다.'고 주석을 했습니다. 성경 속에 몇 군데를 보면 '강림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기억하고 선악과를 따먹고 동산 숲 속에 숨었을 때 하나님이 강림하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찾으셨습니다.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을 죽이고 숨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가인에게 '가인아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첩 하갈이 큰마누라한테 시기심을 발동시켰다가 혼이 나자 도망치다가 광야에 헤맬 때 하나님이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물음에는 인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를 물으신 것입니다. /믿/
㉣소돔과 고모라성에 하나님께서 강림하여 오셨습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에게 예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5절에서 인생들의 죄악의 바벨탑을 쌓고 있는 그 모습을 바라보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강림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도 죄악의 자리가 이루어지고 있는 그곳에는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강림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인간들이 완전범죄라고 의시대지만 그분은 보십니다. 그 누구도 그분의 눈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아멘!/

 

⑥하나님께서 인간의 악한 마음을 다 아셨습니다(6).
6절을 직역하면 '이제는 그들로부터 그들이 하려고 마음먹은 것들을 끊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을 막을 방도가 하나님께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의 불순한 생각이 절정에 달했으므로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악한 마음이 머리끝까지 와 담았다는 의미입니다. /할/

 

⑦언어를 혼잡케 하신 하나님!(7)
'자 우리가 내려가서' 5절의 강림과 동일한 표현입니다. 여기 '우리'는 복수로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라는 복수를 썼습니다.
'언어를 혼잡케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은 참으로 신사적이십니다.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장 회오리바람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날아가 버리도록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대단히 신사적이시고 또 유머러스한 분이신 것 같습니다.
언어가 혼잡되었으니 위에서 벽돌 올려 하니까 엉뚱한 나무를 올립니다. 일하다가 그들이 낄낄거리고 웃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웃는 것보다 더 짜증이 나고 혈기가 낳습니다. 벽을 올려 소리치는데 역청을 올립니다. 역청 올려 소리칠 때 벽돌을 올립니다. 사람들은 참는 것도 한도가 있어 이제 성질이 나서 주먹이 오고 가고 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이 같으면 생각이 같고, 그들이 이루는 문화가 똑 같습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같은 족속으로 모두가 함께 모여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는 어리석은 생각과 행동을 막으시는데 그것은 그들의 언어를 각각 다르게 하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들은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다 잘 알아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손짓 발짓을 다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아마 대단히 큰 혼란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고 뜻이 통하지 않으니까 싸움도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들이 발견한 것은 그들 가운데 알아듣는 사람이 몇 명씩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들은 말이 통하는 사람끼리 모이게 되었고 그들끼리 족속을 형성하여 각각 자기들의 삶의 자리를 찾아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교만의 극치이자 상징이었던 바벨탑 공사는 자연적으로 그치게 되었고, 그들이 하나님에게까지 높아지고자 했던 인간의 교만은 그렇게 꺾이고 만 것입니다. /할/
아무리 인간의 기술이 발전하고 능력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입니다. 인간 생명을 복제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고 상상할 수도 없었던 우주를 개발하는 놀라운 업적을 이루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인간을 창조주의 자리에 앉게 해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또 하나의 바벨탑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 무너진 바벨탑을 보면서 혹시 우리 속에 이런 무너져야 할 바벨탑을 쌓아놓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 자신을 살펴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아멘!/
혹시 하나님보다 더 신뢰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의 바벨탑입니다. 우리가 물질을 하나님보다 더 신뢰한다면 하나님은 그 물질을 다 흩어버리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물질의 바벨탑 속에 갇혀 있다가 멸망당하지 않도록 그 물질을 흩어버리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모습을 살피시고 계십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이 땅의 것을 의지하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대신하려 한다면, 우리에게 있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도전하려 한다면 하나님은 '자 우리가 내려가서 저들이 하는 일을 살펴보자'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저들이 쌓고 있는 바벨탑을 더 이상 쌓지 못하도록 저들이 의지하는 바를 흩어버리자'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것을 이루어놓았을지라도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섬긴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욱 놀라운 것을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믿/ 우리에게 더욱 큰 지혜를 주시고, 더욱 큰 능력을 주시고, 더욱 아름다운 삶을 살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할/

 

⑧하나님이 막으시면 이길 자가 없습니다(8).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지고 맙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흩어져 땅에 충만하라고 흩어질 것을 명하셨는데 그들은 흩어지지 말자고 굳게 손을 붙잡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의지를 불통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할/ 하나님이 막으시면 인간의 모든 행사는 수포로 돌아가고 맙니다. /믿/

 

⑨바벨탑의 인간문화는 하나님이 막으심으로 혼잡문화로 끝나고 말았습니다(9).
바벨이란 말의 뜻은 혼잡, 혼란입니다. 즉 언어의 혼잡, 사상의 혼잡, 행동의 혼잡이 다가와서 그들을 분열시키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을 위하여 힘을 모으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단결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는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바벨탑 사건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⑴인간의 한계의식을 알아야 합니다. 전 미국 닉슨 대통령 당시 그 안보담당 특별보좌관이었던 헨리 키신저는 한계의식을 곧 그의 정치 철학으로 삼았습니다. 인간은 모든 일에 한계의식을 느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혜자인 솔로몬도 우리에게 모든 것이 한계가 있음을 말씀해 주십니다.
전3:1-4절에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우리는 모든 일에 한계의식을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한계의식은 곧 하나님과 인간을 구분하는 경계선입니다. 우리가 신앙 인이 된다는 것은 인간의 한계의식을 느끼며 바벨탑을 중지하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할/아멘!/
⑵하나님은 우리에게 신앙의 탑을 쌓을 것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어를 혼잡케 하심으로 사람들을 흩어지게 했습니다. 언어의 혼잡은 곧 사상의 혼잡입니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하나님 중심으로 인간이 다시 모이는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바벨탑에서 뛰어 내려 십자가 밑으로 모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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