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하나님 은혜 속에 사는 것이 축복입니다! (고전 15:9-10)

by 【고동엽】 2022. 2. 10.

하나님 은혜 속에 사는 것이 축복입니다! (고전 15:9-10)

 

요즘 사람들이 많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뉴스 보기가 부끄럽다. 뉴스를 보면 답답하다.' 또한 '정치를 보면 혼란스럽다'고 말하고, '경제를 보면 투명하지 못하다'고 말하고, 이 사회를 향해서는 '진흙탕'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모두 나라 걱정을 하는데, 왜 이 나라가 어렵습니까? 그 이유는 '나라보다 우선 내가 먼저'하면서 '자기 몫만 더 채우려는 욕심'때문입니다.
요즘 대권주자들의 행보가 빨라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나라를 위해서 대통령이 되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가문을 빛내기 위해서, 정말 자기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인지, 정말로 나라를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양보할 생각은 없는지' 묻고 싶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은 요나단과 같은 인물입니다. 요나단은 장차 왕이 될 사람입니다. 요나단 입장에서 보면 다윗은 왕위를 위협하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사울 왕은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요나단은 다윗을 보호하고 끝까지 그를 세워줍니다. 다윗이라는 위대한 왕이 세워질 수 있었던 것은 요나단 같은 인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사울 왕은 어떻습니까? 처음에는 나라를 위해 일하는 왕이었습니다. 왕으로 세워질 때는 겸손했습니다. 삼상15:17절에 보면 '그가 스스로 작게 여길 그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할/
사울이 '하나님을 위할 때, 나라를 위할 때, 국민을 위할 때' 사울 왕은 승승장구했습니다. 그런 사울 왕이 하나님께 왜 버림을 받았습니까? 교만이 하늘을 찔렀기 때문입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뜻을 내세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말렉 족속과 소유를 다 진멸하라고 하셨을 때, 자신의 욕심 때문에 좋은 것을 남겨두고 아각 왕을 생포해 왔습니다(삼상15:9). 교만하면 버림을 받습니다. /믿/
지금 이 나라에는 진정한 애국자가 필요합니다. '나라를 위해서 희생할 수 있는 자, 나라를 위해서 양보할 수 있는 자, 나라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가 필요합니다. /아멘!/
에스더는 왕후로서 온갖 부귀와 영화를 가진 자입니다. 에스더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높여주신 이유를 알았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동족을 살리기 위해 어명이 없음에도 왕 앞에 나갔습니다. 죽음을 각오한 결단입니다.
에스더는 '내가 어찌 내 민족의 화 당함을 참아 보며 내 친척의 멸망함을 참아 보리이까?'(에8:6)라고 말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이 고백을 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이 시대의 에스더가 되어서 나라를 위해 기도합시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딤전2:1-2절에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할/
6월은 호국 보훈의 달입니다. 어제는 6,25가 터진지 61년이 되는 날입니다. 우리는 절대 6,25와 천안함의 만행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한때는 동양의 예루살렘 도성으로 불리던 평양은 김정일부자의 우상숭배의 도성이 되었습니다. 평양 대 부흥운동의 진원지였던 그곳이 하나님을 버리고 주체사상의 아성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곧 패망의 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북한은 지구상의 가장 비참한 '생지옥의 땅'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다 아시고 보시는 분이십니다.
한편 대한민국은 어떻습니까? 60년대만 해도 북한보다 못 살던 나라였고, 70년대만 해도 한국이란 나라를 알아주는 사람을 외국에서 만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88년도에 올림픽을 서울에서 개최하고서야 비로소 세계 속에 그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 불과 이십여 년 사이에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로 비약했습니까?
최근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지가 선정한 '세계 최고의 나라' 순위에서 전체 100개 나라 가운데 우리나라가 15위에 올랐다고 합니다. /할/ 이 잡지는 '삶의 질, 경제의 역동성, 교육수준, 국민건강, 정치환경' 등 5개 부문의 평가를 실시한 결과를 종합했는데 한국이 총점에서 15위를 한 것입니다.
아시아에서 우리보다 앞선 나라는 9위의 일본뿐입니다. 세계최강이라는 나라 미국이 11위이고, 유럽의 선진대국 독일이 12위이며, 영국이 14위, 프랑스가 16위인데 우리가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15위를 차지한 것입니다.
'교육수준'에서는 핀란드에 이어 2위이고, '경제의 역동성'에서는 싱가포르, 미국에 이어 3위입니다. 지난 40년 간 1인당 GDP 상승률이 4위이며, 인터넷 보급률은 세계 1위입니다. 머리 좋고 공부 잘하기도 세계 최상위권으로 나타났습니다. /할/
그토록 짧은 세월에 이렇게 눈부시게, 어지러울 정도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한 나라가 또 있는 줄 아십니까? 없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최근 독일의 유명 자동차 회사 '폴크스바겐' 그룹의 회장은 인터뷰 기사에서 말하기를 '지난해 경제위기 속에 성장을 이룬 자동차회사는 단 2곳뿐이었다. 폴크스바겐과 현대자동차다. 현대차는 우리의 매우 심각한 경쟁자다. 한국자동차회사를 가장 주목할 만한 라이벌로 보고 있다. 우리의 경쟁자는 도요타가 아니라 현대차다.'라고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이었습니까?
여러분,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한국의 경제가 한강의 기적을 이루고 있을 때, 한국 교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분명 어떤 상관관계가 있다고 보지 않습니까? 한국교회가 기도하므로 하나님이 이 민족 위에 복을 쏟아 부어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믿/
남과 북의 극명한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버린 북쪽이고, 하나님을 붙잡고 몸부림치는 남쪽이라는 것 아닙니까? 이것이 세계 최빈국 북한과 세계 최고의 나라 15위 남한을 가른 결정적 요인이 아니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다 바라는 민족의 흥왕이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분명은 알아야 합니다. /할/ 지금 북한이 죽기 살기로 중국에 매달리고 있는 것을 보면 정말 딱한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 매달리면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로 다 해결될 터인데 엉뚱한 데 목을 매고 있으니 참 불쌍한 노릇입니다. 그들이 잘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속에 들어와야 삽니다. /믿/ 그들이 빨리 깨닫게 되기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할/ ◀제목 소개!▶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같이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보면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기대만큼 사는 사람, 기대 이하인 사람, 기대 이상인 사람' 이렇게 세 종류가 있습니다.
올림픽이나 아시아 게임에서도 그렇습니다. 금메달을 기대했는데 기대대로 금메달을 따는 선수가 있는가하면, 금메달을 기대했는데 동메달도 못 따고 실망을 안겨 주는 선수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메달을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금메달을 목에 걸고 귀국하는 선수도 있습니다. /할/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도 같습니다. 기대이하인 사람이 있습니다. 삼손이 이에 속합니다. 삼손은 대단한 장수였습니다. 맨 손으로 사자를 찢어 죽이는 힘이 있었습니다. 나귀 턱뼈 하나를 집어 들더니 1,000명을 죽이는 장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가 블레셋의 손아귀에서 이스라엘을 구해 주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기생 들릴라에게 폭 빠져서 결국은 두 눈이 빠져 비참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기대이하의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할/
그러나 성경을 보면 기대 이상의 사람들이 많습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엄청난 일을 한 기대 이상의 사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우리들도 기대 이상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떻게 기대 이상의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은혜로 '사명을 만나면 기대이상의 사람'이 됩니다.
기드온이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기드온은 농사꾼이었습니다. 밀농사를 하고 있을 때 천사가 나타나서 말하기를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삿6:12) 그리고 이스라엘의 적 '미디안을 쳐 부시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기드온은 못 한다고 거절하자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이 하리라'(삿 6:16)고 약속해 두십니다.
농사꾼이 졸지에 총사령관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권능을 믿고 나가 싸웠습니다. 그리고 크게 승리했습니다. 몇 명의 군대로 이겼습니까? 겨우 300명의 용사를 데리고 나가 싸워 대승했습니다. /할/
누구도 기드온이 나라를 구하리라고 기대하지 않았고, 또 기대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해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명을 만나면 기대이상의 사람이 됩니다. 어떤 일에 사명을 받고 그 일을 기어코 이루려고 애쓰면 그 사명 만한 사람이 됩니다. 그것이 기대이상의 사람이 되는 비결입니다. '내가 사명을 받으면 사명은 사명만큼 나를 길러 줍니다.' /믿/ 사명자는 생각도 다릅니다.
▶미국 시카코 신학교 교정에는 그 학교 출신 선교사들 동상이 나란히 서있다고 합니다. 외지에 가서 복음을 증거 하다가 하나님 앞에 간 위대한 복음의 사명 자들입니다. 그 중에 한 명이 '에콰도르'에 가서 복음을 전했던 '엘리어트'입니다.
그가 28살에 에콰도르에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원주민들에게 잡혀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순교 당한 그의 시신을 모교 교정으로 가지고 와서 장례를 치렀습니다. 결혼한 직후에 순교를 당했습니다. 애도하는 그의 아내 곁으로 가서 기자가 위로하면서 말했습니다.
'부인! 세상에 이런 비극이 어디 있습니까?' 그 때 부인이 소리를 지르면서 말하기를 '비극이라니요? 복음을 위하여 장렬하게 목숨을 바쳐서 하늘나라에서 큰 상급이 기다리고 있는 데 비극이라니요?' 기대 이상의 사람입니다. /할/


▶은혜 중에 은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모두 기대 이상의 삶을 살게 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직접 만나지 못 해도 하나님을 만난 사람을 만나면 기대 이상의 사람이 됩니다. 만난 그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
누가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 바울을 따라 다니면서 큰 사람이 되어 누가 복음을 썼습니다. 마가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 베드로를 따라 다니면서 복음서를 제일 먼저, 그리고 제일 자세하게 썼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인 모세를 따라 다니면서 모세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할/ 이를 전문적인 용어로 '접촉의 영'이라고 부릅니다.
고전4:17절에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을 만나면 하나님의 영에 접촉되어 나 이상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기대이상의 사람이 됩니다. /할/
오늘 본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 기대 이상의 복음 전도자가 된 사도 바울은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은혜란 여러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만은 가장 큰 것은 '죄와 허물로 죽어야 마땅한 죄인들을 주님의 보혈로 씻겨주시고 그 크신 사랑으로 인해, 사죄와 구원의 은총'을 주심을 말합니다. /할/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의 아버지 '켄트' 공작은 독실한 크리스천이었습니다. 켄트 공작의 임종시 의사가 공작을 위로하기 위해 '공작의 위대한 정치적인 공적을 열거하며, 공작의 사후는 확실하게 보장되어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공작이 '내가 구원 얻는 것은 공작이기 때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이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할/
▶초대교회 김익두 목사님은 본시 소문난 깡패였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조직폭력배의 우두머리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고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새 사람이 되고 난 뒤 평소에 자기가 괴롭히던 사람을 찾아다니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여러분! 과거에 여러분을 괴롭히던 김익두는 이미 죽었습니다. 여기 서 있는 사람은 새롭게 거듭난 김익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저처럼 예수님을 믿고 새 사람이 되십시오'
하루는 어떤 아주머니가 그를 한 번 시험해 보고 싶었습니다. '정말로 김익두가 죽었는지 어디 한 번 확인해 봅시다.' 그러면서 그는 바가지에 찬물을 가득 담아서 지나가던 김익두의 얼굴에 끼얹었습니다. 그러자 김익두는 빙그레 웃으면서 아주머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주머니, 지금도 아주머니가 그 자리에 살아 계신다는 것이 김익두가 죽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뒤에 김익두는 하나님의 은혜로 목사가 되어 그는 가는 곳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를 찬양하며 간증했습니다. 김익두가 말을 잘해서 대 부흥사가 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언제나 확신에 찬 음성으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나 같은 죄인도 버리지 않으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나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새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물며 여러분이야 말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만 믿으면 저처럼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천국을 선물로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고서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래 맞다 맞아. 하나님께서 김익두 같은 사람도 사랑하신다면 나 같은 사람도 틀림없이 사랑하실 것이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듣고 감화를 받아 예수님 앞으로 몰려오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바울은 본시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김익두는 본시 깡패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목사가 되고, 부흥사가 되고, 총회장이 되고,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나된 것도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아멘!/ 하나님이 내게 주신 직분,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사명은 내가 잘나서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우리에게 주셨다는 사실을 깨닫는 축복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할/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내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나의 살아가는 모습이 달라지고 미래의 운명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만남에는 잘된 만남도 있지만 만나지 말아야 하는 만남도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상적으로 만난 만남을 말할 때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만남을 이야기합니다. 플라톤은 정치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큰 정치가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청년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우연하게 당대의 최고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만나게 됩니다. 소크라테스와 대화하는 동안에 플라톤의 마음이 변했습니다. 그래서 정치가가 되겠다는 꿈을 버리고 철학자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그래서 플라톤이라는 유명한 철학자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만남을 말할 때 이 둘의 만남을 '가장 이상적인 만남'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만남보다 더 위대한 만남이 있습니다. 그 만남은 생각이 바뀌고 살아가는 모습이 바뀌고 나아가 운명이나 미래의 삶까지 송두리째 바뀌는 근본적인 만남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이고 우리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그 만남으로 변화를 받은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자신의 삶의 모습만 변한 것이 아니라 사회에 공헌하고 인류 역사에 업적을 남긴 예가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할/
▶일본의 '스즈키'라는 이 사람은 일본의 악명 높은 야쿠자였는데 예수 잘 믿는 한국 여성을 만나 그가 예수 믿고 은혜를 받아 야쿠자 생활을 청산하고 오늘날 목사가 되어 옛 부하 60여명과 함께 전도생활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세상에는 참 신기한 일도 많습니다. 이것은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은혜입니다. /할/
또 변화를 말한다면 사도바울을 빼 놓을 수가 없습니다. 바울도 변화의 대명사입니다. 바울이 변화 받기 전에는 우리들이 잘 아는 바와 같이 '포악 자, 잔인했던 사람, 영웅심이 대단했던 사람, 그리고 그리스도인을 잡는데 혈안이 되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을 사명으로 알았고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 일에 생명을 걸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마침내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리고는 변화를 받습니다. 변화를 받는데 참으로 엄청난 변화를 받았습니다. 그가 변화를 받은 후에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그 고백 내용이 오늘 본문 속에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보면 몇 가지로 바울은 자신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①'나는 지극히 작은 자'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9).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리고는 또 '나는 만삭되지 못하여 태어난 자'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고백은 마치 사납던 맹수가 순한 양이 되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는 또 딤전1:15절에서는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습니다. 참 많이 변화한 모습입니다.
변화 전에는 참 기고만장하고 우월감이 대단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어갈 때 그 모습을 보면서 박수를 치고 미소를 지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변화 후에는 '나는 지극히 작은 자'이고 '나는 만삭되지 못한 채 태어난 사람'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변화를 말하지만 '사람이 이렇게까지 변화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것을 '복음의 극치' 또는 '믿음의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참으로 불가능을 이렇게 가능하게 만듭니다.
사실 바울은 모든 면에서 볼 때 결코 작은 사람이 아닙니다. 사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볼 때, 바울은 목에 힘을 주고 살 수 있는 큰 자였습니다.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다른 제자들보다 모든 면에서 작은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왜 자기가 작은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사도란 예수님의 열 두 제자에게 주어졌던 이름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자들로서 침식을 함께 하며 예수님에게 직접 교훈을 받고 예수님에게 직접 파송을 받았던 자들을 사도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님을 따라다닌 제자도 아니고 예수님과 함께 음식을 나누면서 함께 생활한 사람도 아니고 또한 예수님의 생전에 얼굴을 한 번도 만나 본 일이 없던 자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따르던 자들을 핍박하고 박해하던 자입니다.
어느 한날도 다메섹에서 큰 집회를 구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복음전도 대회를 계획하고 있을 때 사울은 자기가 큰공을 세울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대제사장의 공문서를 받아 집회에 참석한 성도들을 잡아죽이려고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가는 길을 주님께서 딱 가로막으셨습니다. 이때 사울은 '주여, 누구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우리 주님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말씀하시자 바울은 그 자리에서 꺼꾸려지고 말았습니다.
그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은 다음 주님을 핍박하던 박해자가 변하여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마귀의 종이 아니라 주님의 종으로 거듭났습니다.
따라서 사도의 서열상으로 보면, 바울은 맨 마지막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맨 나중에 사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를 가리켜서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사도'라고 했습니다. 이는 그의 겸손한 인품에서 나온 고백입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의 사도 가운데 가장 일을 많이 했습니다. 가장 교회를 많이 개척했고 가장 많이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가장 많이 큰 일을 했습니다. 바울은 엄청난 일을 했습니다. 그가 소아시아에 세운 교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또한 그가 얼마나 많은 기적을 일으켰습니까? 이처럼 그는 엄청난 공로가 있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바울을 따라 다니던 많은 사람이 그를 얼마나 칭찬했습니까?
그런데도 바울이 은혜 받은 뒤에는 겸손한 신앙의 자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8절에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 겸손해 합니다. 이것이 은혜 받은 자의 모습이고, 우리에게 주시는 메세지입니다. /할/

 

②'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10).
여기서 '나'가 둘입니다. 나의 나된 것의 앞의 나와 뒤에 나가 있습니다. 앞에 나는 누구이고, 나중에 나는 누구일가요? 앞에 나는 예수 믿기 전에 나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 나는 바리새인입니다. 교만했습니다. 사울 이었습니다. 사울이라는 말은 '최고 큰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후의 사울은 바울이라고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가장 작은 사람'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이 사용했던 손수건만 병자에게 던져도 병이 나았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삼층천에 갔다 왔습니다. 최고의 영적 체험을 했던 사람입니다.
앞에 '나'는 '사울'입니다. 뒤에 '나'는 '바울'입니다. 사울이 바울이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고백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 내가 누구보다도 수고를 많이 했지만 그것도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할/
사도바울은 모든 선한 동기를 하나님께 돌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참다운 신앙이요 바람직한 신앙의 초점입니다. '내가 있던 자리를 하나님께 돌리는 것' 이것이 변화한 신앙의 내용입니다.
▶현정화 탁구선수는 16년 동안의 선수생활 중 가장 잊지 못할 경기로 1993년 세계선수권 대회를 손꼽습니다. 당시 허리를 심하게 다쳐서 은퇴하려했던 현정화는 세계선수권대회 대표선수로 뽑혀 힘겨운 훈련을 계속해야만 했습니다.
그녀는 밤마다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게 해주세요.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 주세요' 그녀는 마침내 준결승에서 역전승을 거두고 결승에 올라가서 중국선수에게 완승을 했습니다. 우승하는 그 순간 그녀는 마루바닥에 꿇어앉아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할/
우리들이 살아가다 보면 '나'를 강조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내가 강하게 되면 그 자리는 시끄럽게 됩니다. 세상이 이렇게 시끄러운 것은 모두 사람들이 강해서 그렇습니다. 이렇게 내가 강해지면 우리 주님은 왜소해져 버립니다. 내가 부각되면 주님은 그만큼 초라해집니다. 내 자리가 강하면 주님이 내게로 오실 여백이 없어집니다. 여기에 우리가 신앙의 눈을 뜨고 바로 살펴야 할 부분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의 신앙고백을 들어보면 '나'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내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 이것이 참 변화된 신앙인의 고백입니다. 나는 전부 없어지고 그 자리에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성숙한 신앙고백입니까?
어떤 사람은 '내가 기도해서', '내가 열심히 해서', '내가 했더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은혜의 안목으로 보면 내가 했기에 된 것이 아닙니다. 사실 내가 한 것같이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하게 하셔서 한 것임을 깨달아야 됩니다. /아멘!/
인생은 무엇인가를 위하여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사람을 위하든 돈을 위하든 권세를 위하든 쾌락을 위하든 나름대로 삶의 목적을 정해놓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어느 의과대학에서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두 명의 학생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둘이 병원의 복도를 걷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매우 고통스런 표정으로 허리를 숙이고 엉거주춤하고 걸어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 학생이 말했습니다. '저것은 분명히 류머티스 관절염이야.' 그러자 다른 학생이 머리를 저으며 말했습니다. '천만에, 저건 디스크가 틀림없어.' 둘은 서로 자기가 옳다고 옥신각신 했습니다. 그때 그 남자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아주 힘겹게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저, 화장실이 어디죠?'
사람의 경험이나 지식은 한계가 있습니다. 사람의 판단 역시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나의 틀에 하나님을 가두어서는 안됩니다. 나의 경험에 하나님을 가두어서도 안됩니다. 나의 지식에 하나님을 가두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만을 위해, 성공을 위해, 출세를 위해, 재물을 위해 고달프고 힘든 인생을 살지 말고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할/
▶헬렌 켈러는 삼중 장애인으로 '시각장애, 청각장애, 언어 장애'를 안고 살았으니 인간적으로 얼마나 안 됐습니까?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혹시 '하나님이 원망스럽지 않느냐'고 묻자 그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은혜를 헤아리기도 바쁜데, 어찌 원망할 시간이 있겠습니까? 감사하고 기뻐하기만 해도 시간이 모자랄 지경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고백입니까? 관점의 차이입니다. /할/
이런 그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계속 베푸니 마침내 장애인 최초로 대학 교육을 받고(하버드대), 사회복지가로서 세계적 명성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의 고난으로 인해 오히려 하나님께 더 크게 영광을 돌리는 생애가 되었습니다. /아멘!/
저도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새삼스럽게 느끼곤 합니다.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지 않았더라면, 지금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 세상을 살아가고 있을 것인가?'
이것은 저 뿐만이 아니고 여러분들도 모두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까지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누이 모두 하나님의 뜻 앞에서 순종하며 충성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아멘입니까?/할/

 

③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더욱 충성할 것을 다짐하고 있습니다(10).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여기 '수고하였으나'(코피아오 κοπιαω)는 '탈진한 정도로 열심히 노력한다'는 뜻입니다. 재미있게 설명하면 '코피 나게 일한다'는 우리말하고 비슷한 말이기도 합니다.
고후11:23-27절에서 바울 사도의 고백을 보세요!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우리도 은혜대로 봉사합시다. /할/ 어떤 교회 권사님은 93세의 고령에도 교회 강단 청소를 사명으로 알고 매주일 예배 1시간 전에 오셔서 기쁨으로 찬송하며 닦고 계신답니다. 한 번은 목사님이 너무 힘드신 것 같아서 '그만 하시라'고 하니 '하나님의 사명은 은퇴가 없어요'하시며 환하게 웃는 모습이 마치 천사같이 보였다고 합니다. /할/

 

④'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나는 날마다 죽음의 위협을 받고 산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바울은 언제 죽임을 당할지 모르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생명을 노리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고백했습니다. 어쩌다가 일시적인 위협을 받는 것도 일생에 걸쳐 영향을 미칠 것인데 하물며 날마다 죽음의 위협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위태로운 삶이겠습니까?
또 하나는 '나는 예수를 위해서 나의 모든 영광과 욕망을 죽이며 산다'는 뜻입니다. 예수 때문에 날마다 죽음의 위협 속에서 산다는 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여러분, 날마다 협박 속에서 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또 욕망을 죽이며 살아가는 일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속에서 꿈틀거리는 욕망, 이것을 제어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어느 알코올 중독자가 회개하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술을 끊고 신앙생활을 잘 했습니다. 그런데도 술집 앞에만 지나가면 속에서 욕망이 꿈틀거린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욕망을 죽이려고 빨리 가게로 달려가서 우유를 사서 배불리 마신다고 합니다. 그러면 배가 부르니까 술 마시고 싶은 욕망이 가라앉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디 쉬운 일입니까? 이것이 죽는 생활입니다.
날마다 죽지 않으면 또 빠지게 됩니다. 옛날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회개했다는 사람들이 자꾸만 실패하고 옛 생활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이 욕망의 유혹을 떨쳐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요즘 살 빼기 위해서 다이어트 하는 분들의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아주 눈물겹습니다. 자신과 싸워 이겨야 하고 욕망과 싸워 이겨야만 날씬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자니 얼마나 어렵습니까?
▶어느 부인이 다이어트를 하려고 의사를 찾아 왔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하면 살을 뺄 수 있습니까?' 의사가 말합니다. '그저 식이요법이 최곱니다. 현미밥 한 그릇에 멀건 야채 죽, 그리고 과일 한 개만 먹도록 하세요' 그 말을 듣던 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기를 '그런데 선생님, 그걸 식전에 먹습니까? 식후에 먹습니까?'하고 묻더라고 합니다. 내가 죽는다는 일은 이렇게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며칠 하다가 대부분 실패하지 않습니까?
▶김익두가 목사가 된 후 기차를 타고 부흥회를 갑니다. 그런데 옆자리에 어느 노인이 와서 앉더니 줄담배를 피워댑니다. 옆에서 담배 연기 때문에 죽을 지경입니다. 담배를 다 태우면 또 새 담배를 꺼내 불을 붙입니다. 자기도 전에는 담배를 피웠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옛날 같았으면 문제를 간단히 해결할 수 있습니다. 주먹 한방이면 끝납니다. 그런데 지금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옆자리로 옮겨 앉으니까 그곳까지 좇아와서 옆에 앉아 연신 담배를 피워댑니다. 참다 못한 김익두가 살짝 밀친 것이 그만 담뱃대가 부러지면서 땅바닥에 떨어져 버렸습니다. 옛 가락이 조금 나온 것입니다. 여차하면 가라앉았던 옛 가락이 몽땅 쏟아질 판입니다.
그러자 노인이 벌떡 일어나며 하는 말이 '그러면 그렇지, 김 익두가 김 익두지 별수 있나?' 그러는 것입니다. 그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 김익두가 '나를 아느냐'고 물으니까 노인이 말하기를 '나는 몇 년 전에 당신한테 맞아 죽을 뻔했던 사람인데 그때 도망쳐서 겨우 살아난 사람이라' 그럽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당신이 목사가 되고 부흥사가 되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마침 차를 타고 보니 당신이 앉아 있기에 내가 한 번 시험해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김익두가 '죄송하다, 미안하다'고 연신 사과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노인 하시는 말씀이 '괜찮다'고, '그만하면 됐다'고, '옛날 같았으면 나는 오늘 뼈도 못 추릴 것인데 그만하면 됐다'고 하면서 '나도 이제 예수 믿겠다'고 하더랍니다.
단 번에 다 죽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옛날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했습니다. 신앙인들의 삶은 날마다 죽는 생활입니다. 날마다 죽지 않으면 금방 욕망의 노예가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옛날로 돌아가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할/

 

⑤'구원에 대한 확신'을 고백하고 있습니다(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서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라고 고백합니다. 이 말은 '만약 구원이 없다면 얼마나 불쌍한 인생인가?'라는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심각한 질문입니다.
여러분, 정말 인간에게 구원(천국)이 없다면 어떤 의미가 있다고 보십니까? 한마디로 우리가 이처럼 애쓰고 힘써서 신앙 생활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누구인가? 빌3:20절에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할/
▶그러므로 우리는 ⑴'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아야'고 합니다. 고후6:1절에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⑵그리고 받은 은혜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고 합니다. 딤전4:14절에 '안수 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받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고 하십니다.
⑶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함을 얻고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딛3:7절에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 뿐만이 아닙니다.

⑷은혜로 영육간에 부요한 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고후8:9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할/
⑸천대까지 이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신5:10절에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아멘!/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6.25사변의 참상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하마터면 공산당에서 삼킬 뻔했습니다. 다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은혜였습니다. 우리는 6.25를 통해서 공산당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6.25당시 목회자들이 부산에 모여 회개하며 기도하기를 시작하면서 6.25이후에는 철야기도와 새벽기도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 기도는 오늘날 놀라운 축복을 가져왔습니다. 6.25가 아니면 지금 우리는 이렇게 살 수 없습니다. 6.25도 은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때로 우리에게는 가난이 은혜요 실패가 은혜요 병든 것이 은혜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현재 이 모습 이대로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또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감옥에도 찾아오십니다.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다가 빌립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행16장). 베드로의 감방에도 찾아오십니다. 어려움과 환난과 고난과 역경과 가난과 질병 속에 있는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롬5:3).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메모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