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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롬 5:1-4)

by 【고동엽】 2022. 2. 10.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롬 5:1-4)

 

어느 초원에서 생긴 일입니다. 하루는 동물의 왕이라고 불리는 사자가 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그 틈을 이용해서 굶주린 하이에나가 사자의 새끼 한 마리를 잡아 먹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멀리 달아났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사자는 그 사실을 알고서 노발대발했습니다. 사자는 즉시 초원의 모든 동물을 한 자리로 불러모아놓고 하이에나가 저지른 악행을 발표하면서 하이에나를 전멸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또한 사자는 그 일에 초원의 모든 동물들이 협조를 하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모든 동물들은 하이에나가 저지른 악행을 듣고서 경악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동물의 왕인 사자가 그런 일을 당했다면 누구도 예외 없이 똑같은 일을 당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걱정스러운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번 일로 인해서 '초원의 평화가 깨어지지는 않을까?'하는 염려였습니다.
그래서 나이 많은 코끼리가 조용히 사자를 찾아갔습니다. 코끼리는 사자에게 조심스럽게 이렇게 부탁을 드렸습니다. '사자님, 물론 하이에나가 저지른 악행에 대해서는 마땅히 응징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지금 초원의 모든 동물들이 이번 일로 인해서 평화가 깨어지지는 않을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왕께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번 일에 대한 노여움을 푸시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사자가 화를 벌컥 내면서 말하기를 '무엇이라고? 이런 굴욕스러운 일을 그냥 참고만 있으라고? 그렇게 비겁해서야 내 어찌 동물의 왕이라고 불릴 수 있겠느냐?'
코끼리는 다시금 사자에게 말했습니다. '왕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진정한 용기는 자기 힘을 휘두르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힘을 절제하는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왕께서 큰 아픔을 당하셨지만 그래도 분별력을 잃지 아니하시고, 평소와 같이 침착하고 위엄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신다면 초원의 모든 동물들은 왕을 더욱 존경하고 잘 따르게 될 것입니다.'
역시 사자는 동물의 왕이었습니다. 그는 코끼리의 말을 듣고서 일리가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사자는 자기의 분노를 참고 코끼리의 말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그 결과 초원의 평화는 그대로 유지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멀리 달아났던 하이에나는 그 소식을 듣고서 한편으로는 다행스럽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자를 비웃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주변에 있는 동물들에게 헛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사자는 겁이 많은 동물이야. 나하고 싸우기가 싫으니까 나를 피하는 거야' 그 소리를 듣고 나이 많은 코끼리가 하이에나를 찾아갔습니다. 코끼리는 자기의 큰 발로 하이에나를 사정없이 짓밟은 채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놈아! 똑바로 들어 두어라. 사자가 너 같이 입만 살아서 나불대는 짐승을 정말 두려워해서 참고 있는 줄 아느냐? 사자는 모든 동물의 평화를 위해서 자기의 아픔을 억누르면서 참고 있는 거야!' /할/ 여러분!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평화를 원하고 있습니다.
롬12:18절에서 바울 사도는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이웃과 평화를 이루어야 됩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화평을 누려야 합니다. /아멘!/ ◀제목 소개!▶

 

예수님은 평화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골1:20절에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할/
예수님은 평화가 필요한 곳에 찾아가셨습니다. 누구도 관심 없던 38년 된 병자를 찾아가셨습니다(요5:2-9). 모두가 외면한 군대 귀신들린 거라사인을 찾아가셨습니다(눅8:26-39). 아들 잃고 슬퍼하는 과부를 찾아가셨습니다(눅7:11-17). 사람을 거부한 사마리아 여인에게도 찾아가셨습니다(요4:1-42).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까지 찾아가셨습니다(요21:15-23). 찾아가셔서 평화가 없는 곳에 평화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평화의 왕으로 찾아오십니다. 죄로 하나님과 원수 된 사람에게 찾아오십니다. 질병으로 평화를 잃은 자를 찾아오십니다. 부모 자녀간에 담이 생긴 가정을 찾아오십니다. 물질 문제로 황폐해진 일터를 찾아오십니다. 전쟁으로 찢겨진 나라에도 찾아오십니다. 오셔서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를 선물하십니다.
예수님은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고 말씀하십니다. /아멘!/

1. 우리가 누려야 할 큰 은혜를 1절에서 두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①'의롭다'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무엇을 보시고 의롭다 하시는 것입니까? 믿음! 우리의 믿음 한 가지를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 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었은 즉' 여기 '얻을 것이요'가 아니라 '얻었은 즉' 완료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을 때에 앞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현재 구원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롬3:24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5:9절에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예수의 피가 귀합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이스라엘 백성의 생명을 구원한 것 같이 하나님은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보고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할/
여기서 '의'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죄인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를 죄인인 우리에게 옷 입혀서 의롭다하여 의인으로 간주해 놓으시고 만나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용서하신다는 것은 '단순히 용서했다는 소극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또한 '잠깐만 참으셔서 죄인을 살짝 눈감아 주신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의롭다 하신 것은 '지난날의 잘못을 깨끗이 씻어주시고 전혀 새로운 관계,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틴 루터'는 신앙을 정의하기를 '하나님과 바른 관계'라고 했습니다. 바른 관계는 '의의 관계요, 화평의 관계'입니다. /아멘!/

②'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삶'입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인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입니다. /할/ 우리가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얻는 선물이 화평입니다. 세상에는 좋은 것이 많지만 화평처럼 좋은 것은 없습니다. 가정이나, 단체나, 개인이나, 나라에 이르기까지 이것이 필요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 안에서 화평을 누리려고 하면 먼저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고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만 바로 되면 그것이 곧 화평입니다. /아멘!/
▶여기 화평을 '누리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폴라우시스'라는 말입니다. 이 말 속에는 몇 가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⑴'즐긴다'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과 즐기라는 것입니다.
화평은 그냥 품고 있거나 간직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즐기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화평이 가치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물질이라는 것은 그냥 가지고 있으면 값이 없습니다. 그 물질이 값이 있으려면 즐겨야 합니다. 10억, 20억씩 소유만 하고 있는 것은 소용없는 일입니다. 고리 대금업자가 수십 억씩을 움켜쥐고 사는데 그것은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그런 분은 대부분 음식다운 음식 한번 먹어 보지도 못하고, 옷다운 옷 한 벌을 제대로 못 입고 삽니다. 그것을 그냥 움켜쥐고 있다가 어느 날 초라하게 죽고 맙니다. 그런데 가끔 신문을 보면 50억씩, 100억씩 대학에 희사를 하고, 어느 연구 단체에 기금으로 기증을 했다는 기사가 나곤 하는데 이것이 즐기는 것입니다. 물질을 대학 발전을 위해서 기증함으로써 마음으로 즐기는 것입니다. 두고, 두고 기뻐하고 보람을 느끼며 즐기는 것입니다. /이해가 됩니까?/할/
집도 그렇습니다. 양지 바른 언덕 위에 좋은 집을 지어서 남에서 전세를 주고는 주인은 빛 때문에 사글세를 살면 그것은 행복도 아니고 기쁨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좋은 집을 지었으면 내가 들어가 살아야 하고 내가 그곳에서 쉬고, 자고, 내가 가꾸고 해야 그것이 향락이고 즐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그것만으로는 완전한 행복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내가 그 하나님으로 더불어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 하나님을 높은 선반 위에 올려놓고는 쳐다만 보고 있으면 그것은 신앙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내 집에 와 계시고, 내 일터에 와 계시고, 내 인생에 와 계시고, 내 중심에 오셔서 역사 하실 때 비로소 나는 그 하나님으로 더불어 즐기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은 즐기는 생활이어야 합니다. /아멘!/
⑵'아는 것'입니다. 화평을 누리려면 알아야 합니다. '아폴라우시스'라는 말에는 '알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즐기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느냐 하면 뭔가를 알게 될 때 얻어집니다. 그래서 '아는 것이 힘'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고 즐기려면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왜 죽으셨습니까? 내 죄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죄로 인해 우리와 하나님의 사이에 막힌 담을 헐어 버리기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주님이 죽으심으로써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할/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같은 신비스러운 도리를 알고 난 후에 고백하기를 '나는 이제부터 예수만을 알기로 작정했다.'고 했습니다. 이 도리를 몰랐을 때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기 위해서 열심이었는데 알고 보니까 그럴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를 바로 알고 난 이후에는 자신이 박해하던 그 예수를 자신이 박해를 당하면서 전하고 다니다가 그 자신이 그 예수 때문에 마지막에는 순교를 하게 됩니다.
이 도리를 알고 나니까 죽을 용기까지도 생겨난 것입니다. 이것이 '깨달음이 주는 축복'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힘은 '깨닫고, 알고, 이해할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깨달아 값을 알고 존재를 알게 될 때' 거기서 오늘 기쁨은 엄청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고난이 와도 기뻐하고, 환난 속에서도 오히려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4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앎이로다' 이것 때문입니다. /할/ 알기 때문에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 사이에는 굉장한 차이가 있습니다. /믿/
아무리 쓰라린 환난이 주어져도 그 환난의 의미를 미리 알고 있으면 그 환난이 오히려 즐거울 수가 있습니다. 매를 맞아도 저분이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때리는 매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으면 오히려 그 매는 고맙고 즐거울 수가 있습니다. 모르니까 기분이 나쁘고, 원망스럽고, 불쾌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매는 똑같은 매지만 화평 중에 맞는 매는 아프지가 않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화평을 즐기라'고 했습니다. 화평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은 환난 속에 들어 있는 '사랑의 의미'를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의미는 이런 것입니다. 봄이 되면 과원지기가 나무의 가지치기를 합니다. 보면 농부는 날카로운 전지 가위를 가지고 돌아다니며 과일 나무의 가지들을 사정없이 잘라냅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아깝게 왜 가지를 잘라내느냐고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잘라내야 나무가 건전하게 자라고 열매를 더 많이 맺는다는 것을 농부는 잘 알기 때문에 미련 없이 잘라냅니다.
여러분, 과수원에 한번 가 보십시오. 탐스러운 열매나 굵직한 열매가 맺혀 있는 나무는 다른 나무보다 가지가 적습니다. 그것은 잘라내어 양분이 다른 데로 가는 것을 방지시켜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열매가 큽니다. 그렇지만 산 속에 심겨져서 마구 자란 사과나무를 보십시오. 보면 가지도 많고 열매도 계란 만하게 달려 있습니다. 손질이 안 되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열매는 그런 열매가 아닙니다. 맛이 있고, 크고, 탐스러운 열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우리들의 삶 속에서 때로 가지치기를 하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지를 치실 때는 사정없이 내리치십니다. 그때는 우리들이 모두 아파합니다. 그것을 환난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농부가 과일 나무를 사랑하기 때문에 가지치기를 하듯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가지치기를 하는 것입니다. /아멘!/
⑶'보는 것'입니다. '아폴라우시스'라는 말에는 '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화평을 누리고 즐기려면 볼 줄 알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2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고 했습니다.
화평은 현재적인 것만이 아니고 극히 미래 적입니다. 스데반 같은 이는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웃으며 죽어갔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 '아폴라우시스' 즉 '본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내세적인 천국의 화평을 보았기 때문에 지금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그 화평을 즐기는 것입니다. /할/
그래서 사람은 이 화평의 눈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 세상이 모두 소망적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화평의 마음과 눈을 가지고 세상을 보고, 나를 보고, 이웃을 보는 것', 그것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생활'입니다.
⑷'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바른 예배입니다. 요4:24절에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23절에서는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배에는 몇 가지 중심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예배는 감사가 필수 조건입니다. 감사 없는 기도, 감사 없는 찬송, 감사 없는 헌금, 이런 것들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감사가 빠지면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기쁨과 즐거움으로 드려야 합니다. 한마디로 예배를 축제의 분위기가 되어야 합니다. 시66:1절에 '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발할지어다' /할/ 우리들이 드리는 예배는 기쁨을 가지고 드려야 합니다. 구원받은 기쁨, 하나님 안에서의 보호와 인도를 받는 은총! 이런 마음이 찬송으로 기도로 예배로 이어져야 합니다.
㉢예배는 보는 것이 아니고 드리는 '드림'입니다. '우리 예배 보러 가자'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예배는 모든 것을 전부 드리는 것입니다. 찬송을 드리고, 기도로 드리고, 헌금으로, 내 몸도, 마음도 다 드리는 것입니다.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 하나님의 능력을 사모하는 마음,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하는 마음, 이 마음이 없으면 온전한 예배라고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만나기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축복도, 은사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아멘!/
㉤주일을 소중이 여기는 마음입니다. 주일을 온전히 성수하는 것, 축복 받는 비결입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명하셨습니다. 구약에 보면 온전한 주일을 지키는 자에게 네 가지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건강의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야곱의 업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야곱의 업이란 '빈손 들고 멀리 하란으로 도망갔지만 돌아올 때는 엄청난 부를 가지고 온 것'을 가리킵니다. ㈂연합해서 하나가 되는 복을 주시고, ㈃성결의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교회를 가리켜 성전이라고 말씀합니다. 거룩한 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거룩한 전입니까?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시122:6-7절에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네 성안에는 평강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이 있을지어다'
㉦준비하는 마음이 귀합니다. 예배를 위하여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준비한 그릇대로 복을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준비한 만큼 은혜를 주십니다. 준비는 정성으로 해야 합니다. 입고 나갈 옷도 준비해야 합니다. 성경, 찬송, 헌금, 모두 준비해야 합니다. /할/

 

2. 믿음으로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2)

 

이 은혜에 들어갔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진노의 줄에, 멸망의 줄에 서 있을 때에 우리를 의인의 자리에 옮겨 놓으신 이 자리바꿈이 바로 은혜의 자리'입니다.
①'또한 그로 말미암아' 1절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입니다. 왜 반복합니까? 그만큼 예수가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행4;12절에서 베드로가 이스라엘의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 앞에서 외치기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외치면서, 오직 구원을 얻을 방법은 오직 예수뿐이라고 못 박았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가리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멘!/
②'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니' 그러니까 구원받은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자리에 서 있는 은혜를 입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내가 지금 믿음 안에 있는 것이 주님의 은혜'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주님이 지켜주셔야 합니다. 믿음으로 서 있도록 예수께서 은혜로 붙잡아 주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붙잡아 주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어떤 계시록 학자는 대 환란 뒤에 예수님이 오시는데 그때 믿음을 지키기가 어렵다고 말합니다. 이 소리 들으면 겁이 나서 신앙생활하지가 무섭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우리 연약한 인간이 그 환난 때, 믿음을 지킬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붙잡아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정해 놓으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을 받은 잡니다. 그러므로 확실히 천국 가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믿음을 지킬 수 없습니다. 그분이 지켜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큰 믿음, 굳센 믿음, 강한 믿음으로 붙잡아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여기서 대단히 중요한 단어 하나 나오는데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는 말이지만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주는 말입니다.
여러분, 옛날 구약 시대의 성막을 한번 생각해 봐야 실감이 납니다. 이방인들은 감히 그 성막 안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밖에서만 쳐다보아야 합니다. 유대인들만 성막 안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막 안에는 들어가지만 성소 안에는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성소의 뜰만 밟을 수 있었습니다.
성소 안에는 누구만 들어갈 수 있었는가?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소와 그 안 더 깊숙한 곳에 있는 지성소 사이에는 아주 굵은 휘장이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이 지성소 속에는 제사장이라도 감히 들어갈 수 없습니다. 대제사장 한 사람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아무 때나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일년에 단 한번 대 '속죄일'에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아주 조심스럽게 들어갔습니다.
대제사장은 거룩한 세마포 옷을 입게 되어 있었는데, 옷 밑에 방울을 달았습니다. 대제사장이 걸을 때마다 딸그랑딸그랑하고 소리가 나도록 한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간 뒤 딸그랑딸그랑하는 소리가 들리면 아직도 대제사장이 살아 있다는 증거고, 만일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갔는데 딸그랑딸그랑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그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이 그 사람이 싫어서 치셨다는 의미입니다. 제사장이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만큼 지성소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무서웠습니다.
그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는 휘장이 언제 갈라졌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의 죄 값을 다 지불하시고 '다 이루었다!' 운명하시던 그 순간에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굵은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다 찢어졌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이제는 너희가 들어와도 좋다'고 하나님이 허락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은혜의 자리에,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나감을 얻게 된 것입니다.
히4:16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엡3:12절에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할/
③'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삶을 마감하고 영원한 천국이 우리에게 허락되었음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할/
▶주님이 준비한 천국과 지옥은 어떤 곳인가? ▶지옥부터 알아보자!
⑴전체가 불입니다. 불 못이라고 합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하는 곳입니다. 불은 심판을 상징하고 저주를 뜻합니다. 구약 시대 때 큰 범죄인에게는 불로 태우는 심판을 하셨습니다.
⑵어두운 곳입니다. 마8:12절에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⑶세세토록 고통스러운 곳입니다. 영원한 고통입니다.
⑷슬피 울며 이를 가는 곳입니다. 사람이 너무 고통스러우면 이를 갈게 됩니다. 엄청난 괴로움을 참을 수 없어서 이를 갑니다. 마13:50절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⑸구더기도 죽지 않는 곳입니다(막9:48).
⑹하나님이 없는 곳입니다.
⑺누가 그 지옥을 갑니까? 예수 믿지 않는 자들이 가는 곳입니다. 마10:28절에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천국은 어떤 곳인가?
⑴밤이 없는 곳입니다. 밤은 죄악과 공포의 상징입니다. 밤은 위험합니다.
⑵질병과 고통이 없는 곳입니다. 과학이 발달한 문명한 나라에도 질병과 고통이 수없이 많습니다.
⑶죽음과 슬픔이 없는 곳입니다. 계21:3-4절에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일러라'
⑷염려와 근심이 없는 곳입니다. 세상에는 근심과 걱정이 끊일 날이 없습니다. 사업 때문에, 자식들 때문에,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온갖 염려와 근심이 끊일 날이 없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잘 사는 나라 스위스에서 자살하는 사람이 제일 많다고 합니다. 천국에는 염려와 근심이 없습니다.
⑸유혹과 죄가 없습니다. 즉 사단의 음모가 없는 곳입니다.
⑹바다가 없습니다. 계21장에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바다가 없다는 것은 폭풍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인생의 풍랑이 없는 곳입니다.
⑺천국엔 예수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요14:3절에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나 있는 곳에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으리라' /할/
기쁨이란 미래지향적인 것입니다. 오늘 어려움이 있고, 고난이 있다 할지라도 내일의 승리와 약속이 있으므로 우리는 기뻐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의 승리의 삶을! 또 바라보십시오, 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할/

 

3. 믿음의 사람들은 환란도 즐거워해야 합니다(3-4).

 

①'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예수 믿으면 환난이 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믿으면 환난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와 함께 동행했던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풍랑을 만났습니다. 인생의 삶이란 고통과 슬픔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어떤 사람은 정신적으로, 또 육체적으로 또 환경에 의해서, 사람들로 인한 슬픔도 있고, 배신도 있고, 환난이란 인간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것입니다.
욥5;7절에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낫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환난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 환난은 우리의 신앙을 성숙시킵니다. 이 환난은 신앙적으로 매우 유익을 가져다줍니다. 바울은 수 없이 많은 환난을 당한 자입니다. 영광을 바라보면서 즐거워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것은 고차원적인 높은 신앙의 경지입니다. 이것은 오래 믿는다고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환란과 시련을 통해서 훈련받은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렇습니다. 환란은 신앙의 훈련입니다. /아멘!/
▶바울이 환난 중에도 '내가 기뻐한다'는 고백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이 해답은 고후12;7-10절의 말씀을 읽어보면 이해가 됩니다. 사도 바울에게 어떤 고질적인 질병이 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세 번이나 이 병이 떠나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네가 약할 그때에 강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할/
그는 약할 때에 하나님을 더 의지했고, 그때마다 하나님께 더 매달렸더니 하나님이 그를 강하고 담대하게 세워주셨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얻어지는 진리는 성도가 환난을 당할 때, 주님께 매달리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게 됩니다.
▶중국에 활을 잘 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본래 이 사람은 활을 잘 쏘지는 못했는데 매우 특별하게 가르치는 스승 때문에 활을 잘 쏘게 되었습니다. 그 스승은 처마 밑에다 이를 잡아 매달아 놓고서 그 작은 이를 매일 쳐다보되 꿩만큼 크게 보일 때까지 시각적인 훈련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제자는 집중적으로 이를 주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시간이 흐르자 조그마한 이가 꿩으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훈련으로 명사수가 되었답니다.
여러분! 우리는 연약하지만 하나님의 권능은 큽니다. '나는 연약하지만 하나님의 권능은 크시다'고 믿는 믿음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크게 보일 때까지 하나님은 훈련을 시키십니다. /할/
▶성도들의 환난 뒤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프리미엄이 따라옵니다. 몇 십 년 전 한 미국인 부부가 인형같이 예쁜 딸 셋을 데리고 여행을 떠났습니다. 대서양을 건너는 중에 불행하게도 배가 암초에 부딪쳐 파선을 당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습니다. 그들 부부는 겨우 생명을 건졌으나 인형 같은 세 딸은 그만 물 속에 영원히 잠겨버렸습니다.
그들의 슬픔은 너무나도 컸습니다. 그들의 통곡은 듣는 이의 간담을 녹아나게 했고, 그 와중에서도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찾았습니다. 어느 날, 부인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부모 잃은 고아들을 돌보라는 음성이었습니다. 두 부부는 의논 끝에 잃어버린 세 딸을 생각하고 부모 잃은 고아들을 자신들의 친자식처럼 돌보기로 결심했습니다. 드디어 그들은 '아메리칸 캐롤'이란 고아원을 설립하고, 미국에서 가장 인정받는 고아원이 되었고 수없이 많은 인재들을 길러내고 있답니다. 이들은 세 딸 잃은 어려움을 신앙으로 극복한 것입니다.
환난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찾는 삶의 교정의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바로 알게 됩니다. 시46:10절에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하나님을 깨닫기만 하면 다시 은혜로 축복하십니다.
시30:5절에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욥42:10절에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할/
②환난은 인내를 이룬다고 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인내는 질긴 힘을 말합니다. 인내는 고난을 견디어 나갈 뿐만 아니라 모든 장애물을 헤치고 나갈 분투를 의미합니다.
▶모든 운동선수는 피나는 노력으로 자신과의 싸움을 합니다. 권투 선수는 주먹을 움켜지고 샌드백을 두드리고 고된 훈련을 합니다. 마라톤 선수는 오랜 시간동안 뛰는 고통을 일부러 많이 겪어야만 근육이 튼튼해지고 질긴 힘을 받게 되는 인내심을 갖게 됩니다.
사실 참을성이 없는 사람, 큰일 못합니다. 모든 위대한 성공 자들은 다 참고 견디어 냈습니다. 여러분! 환경이 어렵습니까? 참고 견디십시오,
▶아브라함도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믿음으로 살면서 수없이 많은 환난을 받았지만 잘 참고 견디어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야곱도 20년이나 고난의 대가를 치르고 거부가 되었으며,
▶요셉은 30년이나 절망적인 삶을 살다가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는 40년이나 긴 광야의 세월, 환난과 절망의 늪에서 헤매다가 하나님의 위대한 종이 되었습니다.
종교 개혁자 루터는 말하기를 '환난은 축복을 가져다주는 지름길' 이라고 했으며, 약5:11절에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욥은 그 어려움 중에도 참고 이겼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신앙인 들도 강한 신앙 인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이 고난은 하나님께서 바로 가라는 교정의 뜻이 있습니다. 자식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부모가 매를 드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 고난은 훈련용으로도 볼 수 있고,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환난을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히12:5절에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인내가 무엇입니까? 인내는 무턱대고 참는 것이 아닙니다.
주머니에 돈이 하나도 없는데 사람들이 무시를 합니다. 그때 입술을 깨물며 그 무시를 참는 것은 인내가 아닙니다. 그것은 할 수 없어서 참는 것입니다. 지금 20평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데 60평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무시를 합니다. 지금 돈이 없어서 남의 집에서 셋방살이를 하고 있는데 집 주인이 무시를 합니다. 그래도 죽은 척하고 참습니다. 그것은 인내가 아닙니다. 그것은 할 수 없어서 참는 것입니다. /할/
성경에서 말하는 인내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지금 60평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데 20평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자꾸만 교만을 떨고 돈 자랑을 하고 손가락을 내보이고 밍크 코트를 입고 교만을 떨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서도 아무 말 없이 그냥 앉아 있는 것이 인내입니다. 그것이 성숙한 인내입니다. 그 인내의 힘은 인격에서 나온 인내입니다. 훈련에서 나온 인내입니다. 그것이 바로 고상한 인격입니다.
권세나 능력으로 말하자면 예수말고 누가 또 있습니까? 그런데도 그 앞에서 욕하고 침 뱉으며 채찍질하며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순순히 죽어가면서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하고 아무 소리하지 않고 죽어 가는 그것이 인내고 겸손이고 성숙입니다. 할 수 없어서 참는 것이 아니고, 능력은 얼마든지 있지만 뜻을 위해서 참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인내입니다. /아멘!/
③'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니라' 연단은 본래 쇠붙이에 쓰는 말입니다. 즉 금이나 쇠를 불 속에 넣었다가 꺼내어 때리면 점점 강하게 되는데 이것이 연단이라고 말합니다. 약1:3절에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욥23:10절에서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성경에서 황금이나 금과 은을 믿음을 가리킵니다. 황금은 변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앙도 변해서는 안 됩니다. 뭔가 잘 될 때는 열심이고, 안 된다고 원망하고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항상 기뻐하라' 여기서 '범사에, 항상'이라는 단어가 귀합니다. 신앙은 변해서는 안됩니다. /믿/
또 연단은 경험을 뜻하기도 합니다. 많은 경험을 가진 사람은 어떠한 어려움이 다가와도 과거의 경험이 있기 때문에 능히 환경을 극복하고 이겨냅니다. 그러므로 환난을 통해서 질긴 힘을 얻고 인내를 통하여 연단을 얻고, 연단은 신앙의 체험을 가져다줍니다. 벧전1:7절에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함이라'
그렇습니다. 훈련이나 연단이 왜 필요한가 하면 더 강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이나 물건이나 신앙도 강하면 좀처럼 흔들리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자살을 해서 죽는데 통계를 보면 자살하는 사람 가운데 가난한 집사람은 자살하는 비율이 아주 적다고 합니다. 자살은 원래 사치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자살은 여유 있는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정말 가난한 사람은 살아가는 데 전념하느라고 죽을 생각도 못합니다. 돈 많고 한가하고 유복하게 자라난 사람들이 마음이 유약해서 자살해서 죽는 것입니다.
편안하고 유복하게 자라난 사람은 의식주가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모릅니다. 그런데 사람이 굶주리게 되면 밥 한 덩어리가 금 덩어리보다 더 귀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정말 배고픔으로 연단을 받고 환난을 당해 보고 고통을 당해 본 사람은 세상을 보는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이고, 더 소중한 것이 무엇이고, 꼭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잘 압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절약하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스스로 아낄 줄 압니다.
사기꾼 야곱이 성자 이스라엘로 바뀌기까지에는 거기에 연단의 삶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훈련기간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기간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그 훈련기간 동안에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는 정오의 빛같이 빛나는 존재로 우뚝 서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이 그 강한 훈련을 받고 나서 비로소 애굽의 총리가 되어 30세의 나이에 나이 많은 문무백관들을 당당하게 거느립니다. 무슨 힘으로 그렇게 될 수 있었느냐 하면 형들에게 팔린 경험, 종살이 경험, 감옥살이 경험들을 겪는 그 훈련기간을 통해서 얻은 지혜로 거느린 것입니다. 그 결과 요셉은 어느 날 정오의 태양과도 같이 세상에 나타나게 되지 않습니까? 이것이 훈련과 연단의 의미입니다. /할/
4절 끝에 '앎이로다' 여기 '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매를 맞는다고 할 때, 저분이 나를 사랑해서 때리는 매라고 생각하면 그저 고맙고 감사할 뿐입니다. 요셉은 자신을 팔아먹은 형들을 원망하지 않고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하셨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아는 자의 고백입니다.
여러분, 갈6:9절을 보세요!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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