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의 기원)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고 살자! (시 121:1-8)
어느 덧 2010년이 지나고 대망의 2011년을 맞이했습니다. 지난해 힘들고 어려웠던 모든 일을 다 잊어버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신년 새해를 준비하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런데 새 해가 되면 가장 많이 하는 것이 무엇인가? 결심입니다. 그런데 그 결심이 조석변개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바보는 결심만 한다'라는 책에 보면 결심에 필요한 것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①결심에는 정말 결심이 필요합니다. 결심이 결심되기 위해서는 결심이 결심되게 하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믿음의 사람들을 보면 결심을 한번 하게 되면 결심이 결단된 분들입니다.
가장 그 본을 보인 사람은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할 때도, 이삭을 바치라고 할 때도, 이스마엘과 하갈을 버리라'고 할 때도 그 결심이 결심되게 했습니다. /할/
②결심에는 인내, 즉 꾸준함이 필요합니다. 바보는 결심만 합니다. 그러나 꾸준함이 없습니다. 인내가 없습니다. 쉽게 포기합니다. 탈무드에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내하는 자의 편이다.'
영국의 정치가인 '불크'는 '절대로 절망하지 말라. 만일 절망하더라도 일하면서 절망하라. 처음에는 성공하지 못하였더라도 다시 시도하고 다시 도전하라'고 했습니다.
③새해에는 '새로운 마음의 변화'가 새해를 새롭게 살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가장 중요합니다. 아무리 새해가 되었어도 마음이 달라지지 않으면 아무 것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복 주시는 사람은 마음부터 바뀝니다.
바울 사도는 엡4:22-24절에서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즉 새로운 마음을 갖으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의 변화는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 됩니다. 롬12:2절에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새해를 맞으려면 마음에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아멘!/
'클레멘트스톤'은 말하기를 '마음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인격이 바뀌고 인격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고 했습니다. 왜 그렇게 마음이 중요합니까?
⑴마음은 생명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잠4:23절에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할/ 생명의 불꽃이 마음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마음이 밝아야 합니다. 마음이 어두워지면 생명도 어두워집니다.
⑵마음은 생각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왕상3:12절에서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주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솔로몬의 지혜가 머리에 임하지 않고 마음에 임하였다는 것입니다.
머리로 굴리는 지혜는 잔꾀라고 합니다. 순간적으로 돌아가는 머리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마음으로부터 임하는 지혜는 슬기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생각을 담는 놀라운 그릇입니다. 잠23:7절에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생각을 마음에 담고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사람 됨됨이가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할/
⑶마음은 믿음을 담는 그릇입니다. 롬10:10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여기서 '마음으로 믿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이 믿음을 담는 그릇이라는 말입니다.
마음에 어떤 믿음을 담고 사느냐에 따라 결과가 나타납니다. 할 수 있다는 믿음을 담으면 할 수 있습니다. 못한다는 믿음을 담으면 그 믿음대로 안 됩니다. 병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을 담으면 나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마음의 믿음대로 축복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중요합니다. /아멘!/
⑷일치된 마음으로 새해를 출발합시다! 겔11:19절에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무엇보다도 금년에 나라와 교회에 필요한 것이 바로 일치된 마음입니다. 정치가들의 마음이 일치되어야 합니다. 국민들의 마음이 일치되어야 합니다.
이대통령의 당부도 국민통합을 말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성도들을 사랑하는 일치된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할/
⑸부드러운 마음으로 새해를 출발합시다! 겔11:19절에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요즘 사람들의 마음은 무엇인가에 다 찔려서 상처투성이의 마음들입니다. 누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바짝 긴장하고 경계하고 과잉 반응합니다. 혹시 누가 내게 손해를 끼치지 않나 해서 경계합니다.
굳은 마음에서 부드러운 마음을, 새 마음으로 받읍시다. 온유한 마음, 그것은 바로 주님의 마음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니' 그래서 바울은 빌2:5절에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아멘!/
⑹어떻게 우리가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는가? 겔36:26절에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받아야 새 마음을 받을 수 있고, 변화된 삶을 살수가 있습니다. 슥4:6절에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고 하셨고, 오늘 본문에서 시인은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아멘!/ ◀제목 소개!▶
오늘 본 시편은 바벨론 70년 포로생활에서 해방이 되어 돌아왔을 때 그 감격을 노래한 찬양 시입니다. 그 배경을 잠깐 생각해 보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선민입니다. 그런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죄를 짓고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하나님으로부터 징벌을 받아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잡혀갑니다.
BC 598년에 1차로, 587년에 2차로, 582년에 3차로 잡혀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70여 년 동안 그들은 피눈물나는 포로생활을 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BC 538년에 바사 고레스왕의 칙령이 떨어져 모두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게 됩니다.
바벨론에서 포로로 살아갈 때 그들이 고국으로 귀환할 것이라는 희망은 전무했습니다. 미래가 암담하고 캄캄했습니다. 그래서 포로 중 일부는 바벨론에서 현지인과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정착하여 바벨론 우상을 섬기며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일부는 가지고 온 보따리를 풀지 않고 언젠가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미 정착지로 살았습니다. 그들의 삶은 고달팠습니다. 고난의 외로운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시137편을 보면 '우리가 바벨론의 어느 강변에 앉아 시온을 기억하여 울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던 그들에게 어느 날 해방령이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기쁨으로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꿈만 같은 일입니다. 시126편을 보면 '그때 우리는 꿈꾸는 같았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70여 년 만에 그리던 고국으로 귀환하여 오는 동안 저 멀리 시온산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때 그 감회가 얼마나 강렬했겠는가? 저는 길을 가다가 정읍 집, 전주 집, 김제 집 간판만 보아도 마음이 푸근해집니다. 그리고 고향에 내려가다가 고향의 뒷동산만 눈에 들어와도 또 감정이 달라집니다.
▶어느 재미교포는 중학교 2학년 때 미국에 이민을 갔습니다. 지금 나이가 칠순을 넘겼으니 그 정도면 이제는 미국사람이 다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해가 갈수록 고국에 대한 그리움은 더 진해진다고 합니다. 자기 집 정원에 심겨진 나무도, 고급 승용차도 보기도 싫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매년 한차례씩 고국에 돌아와 공기를 마시고 가야 비로소 1년을 살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내 나라는 좋든 싫든 마음의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이 마음의 고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가정이 마음의 고향입니다. 그래서 저녁이면 누구든지 다 집으로 돌아갑니다. 내가 태어난 고향도 마음의 고향입니다. 그래서 명절 때가 되면 한사코 고향에 가려고 애를 쓰고 죽어서도 고향에 묻히고 싶어합니다.
성전도 마음의 고향입니다. 영적인 고향입니다. 그래서 살아가다가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몸이 아플 때마다 성전을 찾아가게 됩니다. /할/
여기 이스라엘이 70여 년 만에 고국에 돌아오는 길에 멀리 예루살렘 성이 보이고 그 성을 둘러싸고 있는 시온산이 보일 때 그 백성들이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그 감격과 함께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멀고 험한 것을 생각하면서 그 길에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을 믿고 감사하며 찬송한 시가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이 다시 세워진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갈 때마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로 이 시가 불려졌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으십시다! /할/ 이 세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우리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삽니다. 남을 도와주기도 싫고, 남에게 도움을 받기도 싫다고 하는 사람이 있지만, 이 세상을 홀로 살아가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은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의존적인 존재인 것입니다.
어릴 때에는 부모의 도움을 받고, 학교에 들어가면 선생님의 도움을 받고, 친구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선배와 형제, 친지의 도움을 받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남편의 도움, 혹은 아내의 도움이 필요하고, 사회생활을 하려면 이웃의 도움이 필요하고 나라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세상은 더불어 사는 세상입니다. 또 한 걸음 더 나가서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이미 받았고, 현재 받고 있으며, 앞으로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고, 우리가 이 땅에서 살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감사하며 사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독일의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는 당시의 부패하고 타락한 종교를 개혁하려고 나셨는데 여러 가지 어려움에 부딪쳐서 낙심하고 절망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그는 밤하늘에 떠있는 수많은 별들을 바라보면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우주를 운행하시는 하나님이 자기도 도와주신다는 것을 믿고 마음에 평안함과 위로를 얻어 그 어려운 종교개혁을 이뤄내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져지지 않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주장하시고, 우리의 삶을 돕고 계시며, 인간의 생사화복을 지금도 주관하시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믿/아멘!/
도움을 주기는 하면서도, 도움을 받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더욱이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성도로서 늘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중에도 우리의 모든 삶의 현장에 참여하시는 '조용한 동업자'이십니다.
시46:1절에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렇습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만이 오직 우리의 도움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지하여 도움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①눈을 들어 산을 보라! 여기서 산은 무엇을 의미하는가?(1)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⑴여기서 말하는 산은 '시온산'을 가리킵니다. 예루살렘 남서쪽 구릉에 성산이라고 일컫는 시온산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해마다 많은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듭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바로 이 시온산입니다.
그렇습니다. 시온산은 하나님의 보좌를 상징하고 장차 메시아가 도래할 산이며 메시아가 재림하실 산이기도 합니다. 지금 순례자들이 이 산을 바라보면서 느껴지는 감정을 이 시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⑵여기서 말하는 산은 하나님의 보좌를 가리키고 하나님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히브리인들은 시온산을 하나님의 모습으로 생각하여 그 산을 성산이라 일컬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시온산을 바라보기만 해도 반가웠고 위로가 되었고 위안을 받곤 했습니다.
그래서 이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면 제일 먼저 보이는 시온산을 올려다보면서 여기까지 인도해 주신 그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음으로 이 시를 고백했습니다.
⑶산은 때로 인간에게 많은 교훈과 깨달음을 줍니다.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많이 하면서 살아가도록 만들어 줍니다. 예부터 사람들은 산을 신의 품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높고 큰산을 성산이라고 했고 영산이라고도 했습니다. 또한 산에는 산신령이 있다고 해서 산을 섬기는 풍습이 있었던 것도 알고 보면 산을 신의 품으로 여기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산은 생각하는 사람들이 즐겨 찾아갑니다. 옛 시인들은 산을 찾아가서 산을 소재로 해서 시를 읊었습니다. 정치인들도 산에 올라가 마음을 비우고 왔다고도 합니다. 사실 그 마음은 하나님만 아시지 우리는 비우고 왔는지 더 채우고 왔는지 모릅니다.
철학자 칸트는 생전에 산을 즐겨 찾았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괴테는 '네 영혼이 피곤하거든 산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산은 메마른 마음을 적셔 주고 공허한 영을 만족하게 해주는 곳입니다.
예수님도 새벽에 산을 자주 찾았다고 복음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묵상하고 기도하고 생각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날 밤에도 겟세마네 동산을 찾으셨습니다.
⑷'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히브리인들은 산을 곧 하나님의 품으로 생각했고 보좌로 생각했습니다. 순례자들은 예루살렘으로 순례의 길을 떠날 때 시온산 자락을 보기만 해도 위안을 받았고 하나님을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기뻐했습니다.
⑸또 여기서 산은 '고난과 역경일 수도 있고, 낙심과 절망일 수도 있고, 좌절과 패배일 수도 있고, 인생의 문제, 즉 요약하면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불가항력'적인 일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말에도 '절망이다, 갈수록 첩첩산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난관에 봉착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진정한 성숙은 인생의 산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고난과 역경을 통하여 인생은 성숙해 지고 신앙도 뜨겁게 됩니다.
진정한 감사, 진정한 기쁨, 진정한 행복은, '건강을 잃은 환자만이 건강의 행복을 알고, 가난과 추위 속에 떨어본 사람만이 한 칸 방의 고마움을 알고, 죽음의 선고를 받았던 사람만이 삶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아멘!/
실제로 사람들이 고난과 역경을 만나면 좌절하고 절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실제로 인생의 산을 만나면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고 의지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분명히 응답을 받고 일어납니다. 왜 그렇습니까?
②산은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역할도 합니다(2).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할/ 그래서 시인은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그리고 바로 '나의 도움이 거기서 오기 때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언제나 산에 마음을 두고 살았습니다. 산은 곧 하나님이었고 모든 문제를 그곳에서 풀려고 했습니다.
여러분, 앞이 콱 막히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면 맨 먼저 어디를 찾아가야 하겠습니까? 산으로 가야 합니다. 가서 저 높은 곳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눈을 들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 거기서 해답이 나오고 길을 찾게 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히브리인들은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남의 나라에 포로로 잡혀가 살면서도 예루살렘의 그 산을 향하여 기도를 했습니다. 힘이 약하여 눌리고 짓밟힘을 당할 대도 사람들은 그 산을 바라보면서 마음의 위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앞으로 있을 마지막 때에는 메시아가 그 산으로 강림하여 그곳에 깃발을 꽂고 세상을 향하여 호령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이런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할/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사람이 역경 중에서는 누구나 도움을 찾는 것이 사실입니다. 세상 권세에서 도움을 찾으려고 정치적 빽을 찾아 나섭니다. 얼른 보면 그것이 제일 해결할 수 있는 유일의 방법인 듯 합니다.
지금은 누구나 해외 여행을 마음만 먹으면 다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때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여권을 가지려면 반드시 신원조회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 신원조회가 떨어져야 여권 수속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신원조회를 담당했던 부서가 '중앙정보부'였습니다. 지금은 안기부로 그 이름이 바꿔졌지만 그 당시 중정의 힘은 대단했습니다. 신원조회가 나오지 않아 난관에 부딪혀 있을 때, 거기서 한번 전화만 한통화 해 주면 당장에 해결되곤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정치적인 권세를 의지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권세처럼 무상한 것도 없습니다. 권좌에 있던 사람들의 물러난 후에 그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감옥에 가고, 백담사에 샀습니다. 그런 줄은 하루아침에 썩은 동아줄 같이 의지할 것이 못됩니다. /안 그렇습니까?/
또 사람들은 힘들 때 때로는 재물을 의지하려고 합니다. 물론 재물의 힘은 대단합니다. 놀라운 힘으로 우리 앞에 다가옵니다. 그런데 그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 같지만 그러나 인생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재물로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이 다 인생의 문제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돈만 있으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 줄 그렇게 착각하고 '돈, 돈'하면서 살아갑니다.
▶한 청년의 얘기를 은유적(隱喩的)으로 기록한 글이 있습니다. 어느 날 사탄이 한 청년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열 개의 병을 보이면서 '이 중 아흡 개의 병에는 꿀물이 들어 있고, 한 개에만 독약이 들어있는데 열 개중 하나를 마시면 엄청난 돈을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청년은 자신의 현실을 생각하면서 돈 만 있으면 다 해결될 것 같아 드디어 사탄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그래 딱 한번만 하는 거야, 이번 한번이면 평생을 고생 안 해도 될 테니까' 청년은 떨리는 손으로 진땀을 흘리며 한 병을 골라 마셨습니다. 아찔했습니다. 곧 청년은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야, 내가 살았구나!'
사탄은 청년에게 엄청난 돈을 주고 돌아섰습니다. 그러면서 다음에 언제라도 남은 9개중 하나를 마시면 돈을 곱으로 주겠다는 말과 함께 웃으면서 유유히 사라졌습니다. 청년은 오랜 방탕생활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온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돈이 떨어지자 다시 반복하여 사탄을 불러내곤 했습니다. 처음에는 고민을 했으나, 나중에는 어느 병을 골라야 할까 고민하지도 않았습니다.
어느덧 청년은 백발이 되었습니다. 이제 딱 두 병이 남았습니다. 노인은 벌벌 떨리는 손으로 그 중에 하나를 골라야 했습니다. 노인은 마침내 마지막 잔을 마셨습니다. 노인은 끝까지 살아 남았습니다. 노인은 순간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사탄은 남은 마지막 잔을 훅 하고 마셔버렸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처음부터 독약이란 없었다. 그러나 너는 돈이라는 나의 독약에 이미 죽어가고 있어. 나는 너의 청춘을 망가뜨렸지. 사람으로 태어나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모르고 오로지 돈만 아는 최고의 바보로 만들었지. 너는 이제 영원히 죽게 될 거야' 이렇게 말하고 사탄은 유유히 웃으면서 사라져버렸습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우리로 생각하게 하는 말입니까? 세상의 모든 의지하는 줄은 끊어질 줄들입니다. 아무리 그것이 튼튼한 것 같지만,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합니다. 오직 여호와를 의지하는 믿음뿐입니다.
오늘 시편기자는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나의 도움이 하늘과 땅을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도움'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에제르'의 '지원하다, 구조하다, 구원하다'라는 뜻인데, 어려움이나 위험한 순간에서 구해주거나, 일을 해결해 주는 것을 말합니다.
도움의 종류는 적군의 손에서 구해주는 군사적인 도움과 고아나 과부, 질병에 걸리거나 개인적인 곤경에서 구해주는 비군사적인 도움이 있습니다. 이런 도움은 세상 적인 방법과 인간의 노력으로 되어지는 것 같지만, 사실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도와주어야 된다고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손길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무엇인가? 기도입니다. 기도가 능력이고, 기도가 축복의 통로입니다. /아멘!/
▶영국의 청교도 정치가 가운데 '크롬웰'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크롬웰은 어렸을 때 유모의 손에서 자랐습니다. 그가 요람에서 잠을 자고 있을 때, 집에서 키우던 원숭이 한 마리가 그를 안고 지붕 위로 올라가 버렸습니다. 아이는 그만 죽는다고 울고 있습니다. 온 집이 난리가 났습니다. 지붕 위에서 원숭이가 아이를 놓아 버리면 큰일입니다.
가족들은 난리를 피웠습니다. 모두 발을 동동 구르고 있습니다. 그때 할아버지가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 기도하자' 그 소리에 가족들이 모두 '이 문제가 기도해서 될 일입니까?'하고 한마디씩 합니다.
사실 이 문제가 기도해서 될 일입니까? 이 할아버지의 말씀이 참 어리석게 들립니다. 이 위급한 때에 기도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보다 먼저 방에서 이불을 가져다가 땅에 깔고 혹시 아이가 지붕 위에서 떨어질 것에 대비하는 것이 현명한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사다리를 놓고 지붕 위로 올라가 어떻게 해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런 방법들이 더 현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심각하게 생각해 볼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런 방법은 세상사람들이 재빠르게 할 수 있는 방법들입니다. 아마 모든 사람들은 이런 경우를 당하게 되면 시키지 않아도 맨 먼저 그런 방법들부터 써 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인들이 그들과 무엇이 다릅니까? 신앙이 주는 힘이나 영향이나 역할은 무엇입니까? 그 위급한 상황에서 '모두 기도하자'는 할아버지의 제안이 유치하게 들리고 우습게 들리고 한심하게 들리십니까?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 지점에서 조용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할/ 이 할아버지는 더 강하게 요구하기를 '잔말말고 함께 기도하자'고 소리쳤습니다.
그래서 모두 할아버지의 뜻에 따라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고 기도를 했습니다. 사람들은 기도를 하면서도 온통 지붕 위에 있는 아이 생각뿐이어서 억지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할아버지만은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십니다. 하나님은 단 한 사람의 기도라도 간절한 기도를 받으십니다. /믿/
그때 지붕 위에 올라가 있던 원숭이가 갑자기 저지른 자기 행동에 당황하고 있었는데 가족들이 눈을 감고 기도하는 동안 조용히 아이를 안고 내려와 마당에 놓고 다시 올라가 버렸다고 합니다.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 순간적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할/ 이 어린 아이가 자라서 후에 영국을 살린 '크롬웰' 장군입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기도가 주님의 손길을 움직이는 통로입니다. 요14:14절에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아멘!/
③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은 어떤 것인가?(3-4)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⑴'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여기 '실족'은 히브리어 '모트'로 '비틀거리다, 흔들거리다, 미끄러지다'는 뜻인데, 매우 불안정한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발을 잘못 디디거나 행동을 잘못하여 재앙이나 혼란에 빠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광야 길을 가다보면 구덩이가 있기도 하고, 낭떠러지가 있기도 하고, 어둠 속에서는 길을 잃을 수도 있고, 사나운 짐승의 공격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자는, 구덩이나 위험한 곳에 미끄러져서 빠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⑵'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십니다.
여러분, 내 자식도 내가 못 지킵니다. 12시가 지나고 한시가 되면 자동적으로 눈이 감깁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십니다.
사람이 졸고 자는 것은 생리현상입니다. 피곤하면 졸고 때가 되면 잠이 오는 것입니다. 물론 습관적으로 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졸 때와 깰 때 잠잘 때와 일할 때를 구별짓지 못하는 사람은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파수꾼이 졸면 전선이 무너지고, 골키퍼가 졸면 그 팀이 패합니다. 기도의 불침번을 서야 할 사람들이 졸면 사단의 군대가 쳐들어옵니다.
마13:24절 이하에 일꾼들이 어느 날 밭에 나가 씨를 뿌렸는데 며칠이 지난 후 다시 나가 보았더니 곡식과 함께 가라지(잡초)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된 것은 원수가 와서 사람들이 잠자는 틈을 타 가라지 씨를 덧뿌리고 갔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조는 것은 큰일입니다. '예배 멀리 하는 것, 기도 멀리 하는 것, 교회 봉사 멀리 하는 것' 모두 다 영적으로 잠자는 자의 현상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우리를 지켜주신다고 했습니다.
이 신앙만 있다면 '넘지 못할 산이, 건너지 못할 강이, 오르지 못할 언덕'이 어디 있겠습니까? /할/
▶나그네의 인생 길에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가려는 목적지가 분명해야 합니다. ㉡길을 안내하는 안내자가 있어야 합니다. ㉢보호자가 필요합니다.
길을 갈 때 어려움을 당하면 우리를 모든 환난에서 보호해 줄 보호자가 절대로 있어야 합니다. 인생길이 험하고, 마음이 지쳐서 살아갈 용기가 없어지고, 병에 걸리고, 사탄의 공격을 받을 때,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고 인도하여 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믿/ 그렇다면 그 분의 도움을 받는 통로가 무엇인가? 기도입니다. /아멘!/
▶전쟁터에서 한참 교전 중일 때, 앞장섰던 한 병사가 적의 총탄에 맞고 쓰러졌습니다. 총알이 비 오듯 쏟아지는 가운데서 부상당한 병사는 살려달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때 소대장이 '누구든지 뛰어가서 저 병사를 구해 오라'고 명령했지만, 모두 무서워서 아무도 나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병사가 시계를 보더니 '소대장님 제가 가겠습니다'하고, 참호에서 뛰쳐나가 부상당한 병사를 업고 달려왔습니다.
교전이 끝나고 소대장이 '자네는 어떻게 담대하게 뛰어나갔는가?'라고 묻자, 이 병사는 '제가 뛰어나간 그 시간은 바로 제 어머니가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보호해 주시는데 무엇을 무서워하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 기도가 자녀에게 용기를 주고, 희망을 줍니다. 아내가 남편을 위해서 기도하고, 백성들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되 가족이 실족하지 않게 하시고, 나라가 민족이 실족하지 않게 해 주십니다. /아멘!/
④하나님은 '낮의 해도, 밤의 달도 해치지 못하게' 지켜 주십니다(5-6).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우리나라의 여름은 중동에 비하면 더위도 아닙니다. 중동의 낮의 해는 50도가 넘는 빛을 발합니다. 해는 그 빛이 아주 강하게 내려 비치기 때문에 샘의 근원을 마르게 하고, 사람의 머리에 쬐어서 일사병에 걸리게 합니다.
일사병에 걸리면 열이 나고, 숨이 막혀서 즉사하거나 속히 죽기 때문에 사막의 여행자들은 일사병을 가장 무서워합니다.
또 달빛 아래서 잠을 자다가 해(害)를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낮의 열기가 밤에는 극도로 추운 냉기로 변해서 달빛을 받고 잠을 잔 사람은 심한 현기증을 느끼는데, 좀더 심하면 정신이상이나 간질, 열병에 걸리게 된다고 합니다. 이것을 월사병(月斜病)이라고 합니다.
정신 이상자를 영어로 '루나틱'(lunatic)입니다. 그 말은 로마시대의 '루나'라는 '달신'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사막을 여행하는 사람이 도중에 야영을 하게 되면 내리 비추는 달빛이 사람들을 미치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낮의 해와 밤의 달을 피해야 하는데, 우리 하나님께서는 낮이나 밤이나 우리의 그늘이 되어주셔서 어떠한 피해도 당하지 않게 지켜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할/
출13:21절에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하시니' 이스라엘 백성을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그렇게 보호하시고 인도하심으로 지켜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앞장서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뒤를 따라 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 멋대로 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없고, 불기둥과 구름 기둥 아래에 거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움직이면 함께 움직이고, 하나님께서 멈추시면 우리도 멈추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행동을 일치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시23:4절에서 다윗 왕이 말하기를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害)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망의 골짜기, 죽음 가운데에 있다고 할지라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아멘!/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 중에서 버림받은 사람이 있었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안전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는 많은 범죄와 사고와 위험이 있습니다. 매일 매스컴에서 전해지는 소식이 그런 것이 아닙니까? 사건과 사고, 위험과 재난이 언제 우리에게 닥칠지 모릅니다.
이런 세상에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않는다면 불안 속에서 떨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낮의 해가 상치 아니하고, 밤의 달도 해치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할/
⑤하나님의 도우심은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도 지켜주신다'는 언약입니다(7).
여기 '환난'은 '재앙, 기근, 질병, 슬픔, 악한 일' 등 인간이 당하는 여러 종류의 고통을 총체적으로 의미하는 말입니다. 세상이 살벌합니다. 절대 보호자가 필요합니다. 세상에 절대적인 권력도 재물도 우리의 영원한 보호자가 될 수 없습니다.
다윗은 시27:5절에서 고백하기를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 초막(草幕)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바위 위에 높이 두시리로다' 또 시138:7절에 '내가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소성케 하시고 주의 손을 펴사 내 원수들의 노를 막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 /아멘!/
⑥하나님의 도우심은 '출입부터 영원까지'입니다(8).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이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할/ 여기 '출입'은 밖으로 나가고,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말하는데, 한 사람의 전 생활 영역에서의 모든 삶과 일들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출입을 지키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가정과 직장과 사업과 계획하는 모든 일들을 영원히 지키고 보호하시며 복되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또 '지키신다'는 말은 '우리를 해하고 넘어뜨리려는 원수와 위험과 위기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몇 해 전에 미국의 허리케인 참사로 공포에 떨고 있는 강대국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 당시 뉴스를 보던 사람이 혀를 차며 '거긴 예보도 없었나요'라고 말했지만 예보가 무슨 소용이 있으며 연구소가 무슨 소용이 있으며 국방부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바닷물이 밀려오는데 누가 그것을 막아낼 수 있겠습니까?
본문에서 '지키신다'는 단어가 무려 여섯 번이나 반복됩니다. 그렇습니다. 그 분이 도와주시고 지켜주셔야 안전합니다. /아멘!/
우리의 가정도 남녀간에 사랑도 그분이 개입하실 때 완전합니다. '마이클 거리언'은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 있으면 그들의 뇌는 차츰 사랑에 빠져들도록 작용한다.'고 했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고 체취를 맡게 되면 옥시토신이라는 호르몬이 강하게 분비되어 두 사람을 하나로 묶어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 년쯤 지나면 호르몬과 뇌의 화학작용이 변하기 시작하여 상대방의 결점을 알아내고 화를 내기도 하고 짜증스러워지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결혼해 애 낳고, 나이 들고, 웃고, 울고, 다투고, 헤어지고, 만나고, 히히덕 거리고, 소리 지르며 살아가는 것이 부부의 삶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이 싫어 수녀가 된 여인이 수녀원에 들어가면 사람 만나지 않고 고요한 묵상으로 하루,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들어갔으나 거기도 사람이 있었고 문제가 있었습니다. 절에 가도, 수녀원에 가도 사람은 있기 마련입니다.
사람은 사람과 더불어 사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과 주고받는 우정, 교제, 사랑은 허실하고, 허약해서 쉽게 금가고, 쉽게 깨집니다. 그래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해 주셔야 안전합니다. /믿/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이 말씀은 참 중요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눈을 들어 저 높은 곳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평상시가 아니고 위급한 때일수록 더 그렇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든 해답이 거기로부터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할/ ( 신년대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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