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들에서의 기적 (마 14:13-21)
오늘 우리는 2010년도의 마지막 주일인 끝자락에 왔습니다. 개인적으로도, 나라 적으로도 참 어려운 일들이 많았습니다. '광저우'에서 기쁜 소식들이 들여오던 날, 저 이북의 김정일이 연평도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민족의 자존심이 굉장히 상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좋은 일은 감사하시고, 불행한 일은 잊어버립시다. 어쨌든 한해동안 수고하셨습니다. /할/
중요한 것은 절대 포기해서는 아니 되고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체 올해 마지막주일에 빈들에 서 있는 기분이라 할지라도 새로운 마음가짐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영국의 역사를 바꾼 윈스턴 처칠이 상원의원에 출마했습니다. 당당히 이기리라고 모두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반대였습니다. 낙선하고 말았습니다. 처칠은 자존심이 상하고 기분이 상하여 두문불출했습니다. 사람을 만나기도 기피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창가에 서 있던 그는 우연히 벽돌공의 날렵한 손놀림을 주시하게 되었습니다. 벽돌공은 벽돌 한 장을 쌓고 그 위에 콘크리트를 발랐습니다. 그런 과정을 계속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한참 후에 견고하고 거대한 담벼락이 완성되었습니다. 처칠은 할 일이 없었기에 멍하니 그 모습을 처음서부터 끝까지 바라보았습니다. 그 때 처칠은 마음속으로 다짐하기를 '인생은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아올리는 작업이다. 인생 여정을 여기에서 포기할 수는 없다. 지금부터 다시 시작한다.'
그 날 벽돌공의 모습을 보고 용기를 얻은 그는 다시 정치계에 뛰어들어 평생 지치지 않고 활동하는 성공적 인물이 되어 영국의 젊은이들의 정신적인 지주로 남아있습니다. /할/
본문은 그 유명한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이 기적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4복음서의 저자가 다 중요하게 다뤘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나 혼인 잔치에 물로 포도주를 만든 기적은 '질을 바꾸는 기적'이라 한다면 오늘 본문의 나오는 기적은 '양을 바꾸는 기적'입니다. 주님은 질도 고치시고, 양도 늘리십니다. 그분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능력이 있으시며 심지어는 죽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멘!/ ◀제목 소개!▶
①빈들에 가신 예수님! '빈들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인가?'(13)
여기 빈들이란 넓은 들판이라는 말과 광야라는 말과 같습니다. 여기 오늘 빈들에서 기적이 일어난 장소입니다. '빈들'은 사람이 살지 않는 곳입니다. '빈 들'은 삶에 필요한 것들이 채워지지 않는 곳입니다. '빈 들'은 의지할 데가 없는 곳입니다. 동시에 '빈 들'은 인간적인 생각과 계산이 전혀 먹혀 들어가지 않는 곳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는 곳이 바로 '빈 들'이요, 광야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어디에서 금식하고 기도하였습니까? 바로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시면서 그의 공생애는 시작된 것입니다. 이 장소는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계속 기도하신 자리입니다. 새벽에도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빈들은 바로 기도하는 장소입니다. 기적은 기도하는 장소에서 일어납니다. 기도 없는 곳에는 천하없어도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기적의 주인공이 됩니까?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교회가 기적이 일어납니까? 기도하는 교회입니다. /아멘!/
또한 빈들(광야)의 또 다른 영적인 의미는 '그 시대 역사적 암흑기'임을 증거 해 주는 말씀입니다. 그때 당시 사회상은 진리와 정의의 빛은 사라지고, 악이 판을 치고 있던 암흑의 시대였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바로 날이 저물어 가는, 점점 어두워져 가는 시대가 아닌가 싶습니다. 양심이 어두워지니 보험금을 노리며 처자식을 죽이고 불을 질러 위장했다가 범죄가 들통이 났습니다. 이런 사건은 비일비재합니다.
일찍이 '알버트 슈바이쳐'는 '현대 문명은 황혼기에 이르렀다'고 했고, '아놀드 토인비'는 '현대문명은 위기에 직면했다'고 했고, '오스왈드 스핑글러'는 '현대문명은 몰락 기에 접어들었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롬13;12-14절에서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했고, 베드로는 벧전4;7절에서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경고했습니다. /할/
예수님은 어떤 소식을 들었습니까? 우리가 전번 시간에 배웠습니다. 주의 길을 예비하려 이 땅에 왔던 당대의 의인 세례요한이 진리를 외치다가 살로메의 춤 값으로 헤롯왕의 칼날에 무참하게 목이 잘렸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이 비보를 들은 예수님은 그 시대의 악함과 그 악한 시대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을 위해 주님은 제자들에게 특수한 사명이 무엇인가를 가르치시기 위해 제자들만을 데리고 한적한 곳, 벳세다 들판에 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조용히 기도하시기 위해 광야에 오신 것입니다. 또 헤롯의 칼날을 피하기 위해서 광야로 오셨습니다. 아직 주님은 십자가를 지실 때가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항상 모든 일을 그 분의 '때'를 따라 일하셨습니다. 그래서 일하실 때마다 '때가 차매' 일을 하셨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 세상에는 인간의 때와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인간의 때는 원어적으로는 '크로노스'라고 하고 하나님의 때는 '카이로스'라고 합니다. '카이로스'라는 말은 '기회'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바로 기회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바로 성공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잘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유월절 어린양으로 십자가에 달리셔야 하는데 그때가 오지 않았으므로 헤롯의 칼날을 피하여 광야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빈들에 가신 것은 제자들에게 쉴 기회를 주시고, 또한 새롭게 신앙으로 무장하기 위해 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벳세다 광야에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막6:33절에서 그 당시 상황을 '그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저희인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저희보다 먼저 갔더라'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군중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먼저 그곳에 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말씀 받는 태도가 정말 대단합니다. 우리들에게도 이런 열성이 있어야 합니다. /아멘!/
②빈들에서 큰 무리를 돌보신 예수님! (14)
'예수님께서 큰 무리를 보시고...' 광야에 모인 무리를 큰 무리라고 했습니다. 21절에서 그곳에 모인 숫자가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광야에 모일 수 있었겠습니까? 오천 명이 넘는 숫자는 굉장한 숫자입니다. 더구나 옛날 그 이 천년전의 시골광야에 몇 백 명도 아니고 오천 명이 넘은 수많은 사람이 어떻게 모일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똑같은 배경은 설명한 요6장에 보면 그때가 마침 유월절이 가까운 때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일 년에 세 차례의 명절이 있는데 그 중 가장 큰 명절이 유월절입니다. 이 유월절에는 12살 이상이면 예루살렘으로 거의 다 모입니다.
그러니까 갈릴리 근방에 사는 유대인들이 유월절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벳세다 광야에 모인 것입니다.
▶왜 이 큰 무리들이 벳세다 광야에 모였습니까?
⑴요6:2절에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
그렇습니다. 그들이 거기에 모인 것은 예수님의 표적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야! 저 예수님은 죽인 자를 살리시고 병든 자를 일으켜 세우신다더라' 소문을 듣고 그 표적을 보려고 몰려왔습니다. 그 중에는 병든 자로 많았습니다.
본문에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 그들은 표적을 보려고 왔는데 그 표적은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모하는 자에게 임합니다. /믿/
⑵그들이 모인 이유 중에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습니다.
요6:15절에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해마다 유월절이면 예루살렘을 향하는 유대인들, 이들은 나라 잃은 백성들로 로마 사람들에게 핍박받으며 비참하게 살아갑니다. 그런 그들은 늘 갈망합니다. '언제 이 민족이 해방될 것인가? 어느 때나 우리를 제대로 이끌어 줄 왕이 나타날 것인가?'
이런 탄식과 갈망 속에 예수님의 대한 소문이 파다합니다. '아! 그분은 선지자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능력을 행하십니다. 그 분이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아가 아닙니까?' 아마도 그곳에 모였던 오천 명의 마음속에는 이분을 모시고 가서 이스라엘의 왕을 삼고,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예루살렘을 메시아의 왕국으로 만들겠다는 욕구가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그들의 바람과는 아무 관계없이 그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또 막6:34절에 보세요!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왜 예수님께서는 민중들을 목자 없는 양으로 보았습니까? 이것은 우리 인생 전부를 상징한 말로써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모습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양은 온순하지만 한번 목자의 품을 떠나면 자기 스스로는 길을 찾아 돌아올 수 없는 짐승이 양이랍니다. 고로 양은 꼭 목자가 있어야만 합니다.
성경에서 주님은 우리 인간을 양으로 비유해서 말씀하십니다. 마9:36절에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또 마10:16절에서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다'고 하시면서 예수님 자신을 가리켜 요10:11절에서 '나는 선한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심령이 정말 예수님을 따를 때 부족함이 없습니다. 시23:1-2절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할/
예수님은 그들을 병만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인생의 바른 길로 가는 삶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할/
③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먹게 하소서! (15)
'저녁이 되매' 상당한 시간이 흘러갔음을 보여준 말입니다. 그들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주님의 말씀에 경청했습니다. 주의 말씀을 달고 오묘한 말씀이며 영혼의 양식이요, 생명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무리들이 듣고, 심령의 갈증이 해소되며 기쁨이 샘솟았습니다. 말씀에 도취되면 시간이 가는 줄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무엇이든지 전념하면 배고픔을 모릅니다.
1742년 4월 헨델이 그 유명한 메시아를 작곡할 때의 일입니다. 그는 영감을 놓치기 싫어 23일간이나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작곡에 열중했습니다. 대단한 열정 아닙니까? 23일 만에 작곡을 마친 헨델은 하인에게 밥을 가져오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리고 가져온 밥상을 개 눈 감추듯 먹어 치우고는 죽은 사람처럼 쓰러졌습니다. 무엇이든지 전념하면 배고픔을 모릅니다.
그 날 벳세다 광야에는 장정만 5천이 넘는 군중이 들판에서 배고픔도 모르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모르거나 혹은 잘못 알고 있기에 영혼이 병들기도 합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호4:6절에서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무지를 깨우쳐 주시며 망령된 생각들을 고쳐주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빈들에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가르침은 믿음으로 잘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할/
본문 속에 제자들은 무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은혜 받는 것에 대하여는 신경 쓰지 않고 그들을 빨리 보내어서 먹는 문제를 해결하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말씀하십니다. '이곳은 빈들입니다. 예수님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무슨 말인가? 빈 들판에 먹을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식당도 없고, 구멍가게도 없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제자들이 현실을 바로 진단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믿음은 지식과 과학을 초월합니다. /믿/ 제자들의 요구에 예수님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④예수께서 가라사대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16)
이 얼마나 황당한 말씀입니까? 제자들은 합리적인 말을 했습니다. '흩어져 각자 알아서 사먹게 할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십니다. 정말 답답한 이야기입니다. 한 두 사람들도 아니고 오천 명이 넘는 사람에게 어떻게 먹을 것을 준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여러분, 다른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시험해 보시려고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특히 요한복음에는 빌립을 지목해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6:6절에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본문에서 제자들의 반응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만 4복음서를 종합해보면 제자들의 반응을 볼 수 있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할 때 제자들의 반응은 무엇인가?
⑴회피적인 반응이었습니다. 배고픈 거야 자기들이 정신 없이 앉아 있다가 그렇게 된 것이지 우리의 잘못이 아닙니다. '우리는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니 먹는 것까지 신경 쓸 것 없지 않는가?'라고 생각했습니다. 막6:36절에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사람들이 굶든 말든 나와는 상관이 없으니 그냥 보내자는 무관심한 반응입니다.
⑵계산적인 방법입니다. 요6:7절의 빌립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빌립은 계산이 빠르고 사리를 잘 분별하는 사람입니다. 오천 명이 넘는 저 많은 사람들은 시장기를 없앨 정도로만 먹여도 이 무리를 먹게 하려면 이백 데나리온의 돈이 들겠다고 머릿속으로 열심히 계산을 했습니다.
그래서 '200 데나리온의 돈이 있어야 먹일 수 있다'고 보고합니다. 당시 일꾼이 열심히 일하고 받는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입니다. 200데나리온이면 일곱 달치 월급의 액수입니다. 빌립은 정확하게 문제를 파악했지만 주님의 시험에 합격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신앙은 과학적인 수치가 아닙니다.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산적이고, 사무적이고, 형식적인 사람에게는 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바라보고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기적을 이루십니다. /아멘!/
▶오늘도 빌립과 같은 계산에 빠른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인생살이가 자신의 계산적으로 되어지지 않는다는 현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서 살 수 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교만한 생각들을 다 버려야 합니다. 아직도 교만이 있는 한, 주님은 어떻게 할 것을 미리 아시고도 그대로 내버려두십니다.
'코페르니쿠스'는 폴란드가 낳은 위대한 수학자요, 천문학자요, 저술가였습니다. 온 세상이 '천동설'을 믿고 있던 시대에, 지구가 태양 주변을 돈다는 경이적인 '지동설'을 발표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던 사람입니다.
'코페르니쿠스'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깊이 경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당시에 부패했던 천주교회의 핍박을 받기도 했으나 그의 믿음은 변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약한 몸으로 일생을 마칠 무렵에 그는 자신을 과학자나 천문학자로 생각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한 죄인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무덤의 묘비에 아래와 같이 써 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이 베드로에게 보여주신 그 사랑을 간구하지 않습니다. 또는 바울에게 내려주신 능력을 간구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주님과 함께 달렸던 강도에게 베푸신 그 자비만을 구하나이다. 진정 그 자비를 구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내 자신이 하찮은 보리떡같이 부족한 존재임을 깨닫고 주님의 도우심을 의지하고, 주님의 자비하심을 바라는 자에게만이 기적을 일어납니다. /할/
⑶우리가 주목해야 할 태도는 안드레와 같은 태도입니다. 안드레는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요6:9절에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그는 최선을 다해서 어린 아이 도시락을 예수 앞에 보이며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예수님께서 '해결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예수님께 문제를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안드레는 많이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숫자의 개념은 약합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믿음은 아주 적극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포기하지 않고 어린아이 한 명을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그가 가지고 온 보리떡 5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주님께 드렸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위대한 축복의 역사는 가만히 앉아서 실망이나 하고 원망이나 하는 사람에게 절대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안드레처럼 적극적인 믿음으로 예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부탁했던 행동적인 사람에게 나타난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축복의 역사는 가만히 앉아서 실망이나 하고 원망이나 하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 하심을 믿고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기적을 베푸십니다. /믿/
여러분! 기도하고 찾으십시오. 기도하고 구상하고 사람들을 만나십시오. 하나님의 축복은 기도만 하고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에게는 허락지 않으십니다. 안드레처럼 적극적으로 찾아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찾아 나설 때, 사람들을 만나게 해 주시고 조건과 여건과 환경을 주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일도 빌립처럼 계산적이고 타산적으로 하면 안 됩니다. 안드레처럼 적극적으로 행동으로 옮기면서 부딪쳐야 합니다. 전도도 부딪치면 됩니다. 모든 문제는 그 문제 속에서 해결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창조적인 능력을 주셨습니다. 까치는 수 백 년이 지나도 집을 짓는 방법이 똑같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창조적인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의 주택문화는 얼마나 발달했습니까? 안드레처럼 찾으면 우리에게도 길이 보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먹을 것을 주라'는 주님의 명령에 제자들이 세 가지 핑계를 대셨습니다.
⑴빈들이라고 하는 장소 핑계입니다.
사람들은 장소가 나쁘다고 핑계를 많이 합니다. 부정적인 사람은 '장소'를 항상 핑계합니다. 예수님도 그 곳이 빈들인 줄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무리에게 먹을 것을 주라는 것입니다. 왜?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빈들이 아니라면 그리고 시장 터라면 그들 스스로 먹을 것을 해결하도록 내어버려 두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자보다는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자'를 찾으시고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사람들은 장소가 나쁘다는 핑계를 많이 댑니다. 가게 터가 안 좋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업장은 장소가 그리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의 빈들은 장소로써는 정말 제로입니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난 장소입니다. /아멘!/
⑵저물었다는 시간 핑계입니다.
사람들은 시간이 없다고 합니다. 세상일에는 수 없이 많은 시간을 투자하면서도 하나님의 일에는 시간이 없다고 합니다. 해가 저물었기 때문에 먹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앞서면 항상 때를 핑계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늦은 때를 심각하게 보신 것이 아니라 늦은 시간까지 '주려 있는 무리들'을 심각하게 보시고 먹어야 한다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제자들의 마음과 예수님의 마음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에는 '나 중심적' 사고가 있고, 예수님의 마음에는 '너 중심적' 사고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너의 필요를 나의 이익보다 먼저 생각하는 '사랑의 마음'을 가졌습니다. 우리가 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할/
또 사람들은 나이 핑계를 많이 됩니다. 40대 사람을 만나면 '내가 10년만 젊었더라도' 그럽니다. 50대도, 60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간이 누리가 일하기에 가장 적절한 나이입니다. /아멘!/ 그러므로 시간이나, 나이, 핑계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할/
⑶이백 데나리온이 부족하다는 돈의 핑계입니다.
사람들이 돈이 부족하다고 자본금 핑계를 가끔 합니다. 그러나 자본금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들의 신앙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엄청난 자원을 가지고 계십니다. /믿/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영의 아버지가 부잔데 무엇이 걱정입니까? 신앙 안에서 작은 자금으로 대 사업을 이룬 사람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거대한 디즈니랜드는 작은 생쥐하나를 놓고 기도하다가 얻어진 축복입니다. E랜드에 박성수 사장님은 500만원을 가지고 하늘의 문을 두드린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안드레처럼 생산적이고 적극적인 신앙의 삶을 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이 말씀에는 몇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⑴너희가 책임지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책임을 지라는 것입니다. 구제하는 것, 교회에서 하는 일입니다. 저 이북의 내 동포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도 교회의 의무입니다. 그런데 연평도 사건 이후로 사늘해 졌습니다.
⑵하나님께 간구하라는 뜻입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분명히 약속했으니 너희들이 하나님의 그 약속을 믿고 간구하는 뜻입니다. 한번 주님께 매달려 보라는 말입니다.
⑶우리를 향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영적인 필요를 채워주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돈이 많이 흥청망청 잘되는 것 같습니다만 영혼은 얼마나 갈급하지 모릅니다. 육적으로 풍요로운데 영적인 빈곤상태가 바로 현실입니다. 그들에게 말씀으로 채우고 기도로 채우고 사랑으로 채우고 소망으로 채워줘야 합니다. /할/
⑤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17)
안드레가 어린아이에게서 가져온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주님께 올렸습니다. 본문에서 제자들이 가지고 왔다고 했지만 요6:8절에서는 분명히 안드레가 가지고 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광야에 기적의 주인공은 뭐니, 뭐니해도 이 어린아이입니다. 이 아이의 희생은 그렇게 큰 것이 아닙니다. 작은 희생입니다. 그런데 이 작은 희생이 이런 커다란 기적을 일으키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본문의 보리떡은 당시 사람들의 음식 가운데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것 우리가 자랄 때 보리개떡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물고기는 정품이 아닌 어부들이 버린 물고기입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어부들이 고기를 잡게 되면 상, 중, 하, 등급을 매겨 고기를 추립니다. 그리고 상품가치가 없는 것은 모래 바닥에 버립니다. 이 버린 고기를 주어서 어린이 도시락을 반찬으로 싼 것입니다.
⑥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축사하신 예수님! (18-19)
예수님은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도록 하셨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을 경우 혼돈을 막기 위함입니다. 군중은 100씩, 혹은 50씩 떼를 지어 앉았습니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질서를 바라십니다. 가정에서의 질서, 사회에서의 질서, 교회 안에서의 질서입니다. 질서는 행복을 창조합니다. 그러나 무질서는 불행을 초래할 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보잘 것 없는 오병이어를 하나님 앞에 축사하셨습니다. 축사하셨다는 말은 감사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나누어주도록 명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주어도, 주어도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드디어 5천명이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부스러기를 주워 모았습니다. 열 두 광주리였습니다. /할/
▶오병이어의 기적의 비결은 오직 감사 한 가지였습니다. 감사만 하셨는데도 축복이 따라 왔습니다. 이것이 감사의 능력입니다.
⑴감사만 했는데도 '원대로' 먹을 수 있었습니다. '앉은 자들에게 나눠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할/ 감사하면 오늘도 '원대로'의 축복이 임합니다. /믿/
⑵감사만 했는데도 '먹고 남는 풍요'가 있었습니다. 감사 전과 감사 후가 전혀 다릅니다.
가난의 언어가 부요의 언어로 바뀌어졌습니다. '이백 데나리온도 부족하다.'는 말이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로 바뀌었습니다. '어린 아이가 가진 오병이어가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라는 빈곤의 언어가 '저희가 배부른 후에'라는 풍요로 바뀌었습니다. 모자랄 것 같다는 말이 '남았나이다'라는 즐거운 비명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중간에 있는 것이 바로 감사입니다. 축사입니다. 감사만 해도 풍요가 있습니다. /아멘!/
⑦감사만 했는데도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20-21).
한 사람의 음식으로 먹은 사람이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뺀 장성한 남자 5천명이 먹고 남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성경의 숫자는 항상 남자 장정만 계수 합니다.
그러니까 본문의 사람의 숫자는 일만 명일 수도 있고, 2만 명일 수도 있습니다. 감사만 해도 기적이 일어납니다. 먹고 남은 부스러기만 해도 12광주리나 남겼습니다. 감사는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입니다.
시인은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할/
▶광야의 기적을 이루는 원리를 배워보겠습니다.
⑴현재 있는 것을 통하여 기적을 이루십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의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양치는 지팡이입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가지고 있는 그 지팡이를 사용하셔서 가나안을 향하여 광야 길에 온통 기적을 뒤흔드는 지팡이로 삼으셨습니다.
사르밧 과부에게 현재 가지고 있는 밀가루 한 움큼, 기름 한 방울은 역사를 일으킵니다. 주님은 지금도 '현재 네게 있는 게 무엇이냐? 그것을 가져 오라' 여러분들이 현재 가기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께 드리십시오, 기적이 일어납니다.
⑵하나님의 기적을 보잘 것 없는 것에서 일어납니다. 어린 소년 보잘 것 없는 그가 가지고 온 도시락, 정말 보잘 것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때때로 자신을 돌아보면서 너무 작아 보일 때가 있고, 초라해 보일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보잘 것 없이 보이고 우리의 봉사가 보잘 것 없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 작은 것 보잘 것 없는 희생과 헌신을 통해서 오늘도 기적을 이루십니다. /할/ 어린 소년 다윗이 하나님의 능력에 손에 맡기니까 거인 골리앗을 물리친 것입니다. 기드온은 300명의 작은 군대로 수십만의 미디안 군대를 무찔렀습니다.
너무 작다고 보잘 것 없다고, 과소평가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보잘 것 없는 것을 들어서 기적을 일으켜 5천명이 먹고 12광주리를 남겼습니다.
⑶하나님의 기적은 감사할 때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수많은 무리 앞에서 지극히 적은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하나님 앞에 지극한 감사를 올렸습니다.
광야의 기적은 감사로 시작됩니다. 우리는 인생 광야를 지나서 순례자들입니다. 그 길가다 보면 여러 가지 답답한 환경에서 몸부림 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감사하십시오, 거기에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아멘!/
감사한 조건이 수두룩해도 감사해지 않고 불평하기를 작정하면 얼마든지 불평할 수 있는 조건이 생기고, 원망스럽고, 복잡하고, 답답해도, 감사하겠다고 결심만 하면 감사한 조건을 찾을 수 있습니다. 감사하던 불평하던 그것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다릅니다. 시50:23절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할/
⑷광야의 기적은 '나눠줌'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요6:11절에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할/ 기적은 나누는 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법칙을 주는 자에게 옵니다. 갈릴리 바다는 물을 나눠줍니다. 산 바다가 되었지만 사해 바다는 주지 않아서 소금 바다가 되었습니다.
눅6:38절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⑸오늘도 내 인생 광야 같고 빈들 같은 '막다른 골목'에서 기적은 일어납니다.
기적은 막다른 골목에서 일어납니다. 인생 사면초가에 있을 때, 그리고 철두철미하게 망하고 실패한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그때 새 길이 보입니다. 새 문이 열립니다. 새 눈이 뜨입니다. 새 생각이 열립니다. 이 때 '믿음의 주요 온전케 인도하시는 예수를 바라봐야' 됩니다.
⑹기적의 통로는 뭐니뭐니해도 '순종'의 터널을 건너야 합니다.
기적은 막다른 골목에 처하기만 하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이 세상에 막다른 골목에 처한 사람이 어디 한두 사람입니까? 그렇다고 그들 모두에게 기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기적이 일어나는 곳에는 또 순종이라는 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신앙의 삶에는 이 순종이라는 요소가 참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아람왕국의 국방장관 문둥병자 나아만이 문둥병을 고치려고 엘리사를 찾아갑니다. 선물을 가득 싣고 갔더니 문도 열어보지도 않고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합니다. 기분이 나빴습니다. '내 나라에도 요단강보다 더 깨끗한 강이 있는데, 내가 누군데, 내다보지도 않고, 그럴 수 있느냐'고 불쾌해서 그냥 돌아가려고 합니다. 그때 하인이 말합니다. '그 보다 더 힘든 일도 해야하는데 일곱 번 씻기만 하라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쉬운 일을 왜 못합니까? 한번 해 보십시오' 그래서 가서 씻었더니 문둥병이 깨끗하게 고쳐졌다고 했습니다. 그 날의 기적은 순전히 순종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어린 아이의 순종이 귀합니다.
⑺광야의 기적은 헌신과 희생한 어린아이에게 열두 광주리가 돌아갑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자기 헌신, 자기희생이 없이는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 어린아이는 감사하는 마음과 희생과 헌신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일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렸습니다. 자신의 점심을 굶으면서 희생과 헌신으로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작고 보잘 것 없는 헌신이 5천을 먹이고도 열 두 광주리를 남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실 때 꼭 인간들을 동참시키십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온 이 어린아이가 없었다면 이 기적을 행하지 못하셨겠습니까?
아닙니다. 주님은 어린아이 없이도 얼마든지 기적을 행하여 많은 사람들을 놀라시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역사 하심에 우리 인간을 참여시켜 은혜를 누리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가장 놀라운 체험을 하고 복을 받은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자신의 도시락을 몽땅 바친 어린아이였습니다. 하나님은 크고 많은 것에 감동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비록 작은 것이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는 손길을 기쁘게 받으십니다. 그가 드린 것은 지극히 하찮은 보리떡이었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를 어디에다가 쓰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손에서는 다섯 개로 끝나 버리지만 하나님의 손에서는 5톤의 기적이 일어나는 재료가 됩니다. /할/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일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한 동역자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는 당신의 놀라운 계획의 도구로 사용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의 은혜를 우리에게 넘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던 사람이 갑자기 교회를 떠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대게 자신이 없어지면 '교회 일이 잘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어디 맛 좀 봐라'는 식으로 떠납니다.
그런데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누군가가 빠져나가면 그 자리에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세우십니다. 그리고 쓰시고 크게 복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부족하고 연약한 나를 일할 수 있게 부르시고 섬기고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헌금을 드리고 구제하고 봉사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의무가 아니라 특권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어린아이와 같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드리는 자가 되어 열 두 바구니가 남아도는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할/
⑻모든 기적의 근원은 '오직 예수'입니다. /할/
성경에 나오는 모든 기적은 예수님이 주체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는 모든 문제의 열쇠이고, 모든 문제의 해결사이고, 모든 기적의 본질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나의 구주로, 나의 목자로, 나의 인도자로, 나의 영혼의 주인으로' 모셔들여야 합니다. 아무리 안드레와 같이 시도하는 사람이 있어도, 아무리 어린아이와 같이 희생하는 사람이 있어도 주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결코 축복이 임하지 않습니다.
⑼예수님의 축복은 제한이 없습니다.
출20:6절에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또한 신1:11절에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현재보다 천배나 많게 하시며 너희에게 허락하신 것과 같이 너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여기서 천배는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축복을 의미합니다. 천 대, 천 배에서 단순히 1,000이라는 숫자가 아니고 무한정이라는 뜻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의 분량입니다. 롬14:8절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런 믿음이 귀한 믿음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축복은 믿음의 분량대로 나타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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