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향수! (삼하 23:13-17)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다윗이 그의 젊은 시절에 사울 왕으로부터 말할 수 없는 박해를 받으며 좇기는 삶을 살았던 역사를 기억합니다. 사울 왕은 이스라엘 초대 왕으로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를 통하여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가 처음에는 열심히 뛰었으나 차차로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고 자기 교만에 자기주장대로 행하고 살았습니다. 삼상1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선지자 사무엘에게 명하기를 '사울에게 아말렉 족속을 완전히 멸망시키라'는 명령을 하십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이 명령을 받고 출정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아말렉을 대파하고 돌아오는 길에 아각 왕을 포로로 잡고 많은 짐승과 재물을 약탈해 가지고 왔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면 거역한 것입니다.
아말렉 족속들은 에서의 존자인 아말렉의 후손들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출애굽할 때 광야에서 틈틈이 이스라엘 백성을 대적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대적한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대한 대적이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출17:14절에서 '아말렉 족속을 완전히 없애버리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이루기 위해 사울을 통해서 아말렉의 모든 것을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고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왕이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도전함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늘 죄악을 이기고 하나님께 순종할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연약함으로 늘 넘어지고 쓰러지고 불 신앙과 불순종에 빠지기가 일수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범죄에 빠졌다 할지라도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주여!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하고 회개하기만 하면 좋으신 하나님은 우리를 다 용서해 주십니다.
그런데 사울은 회개하기는커녕 그 범죄를 합리화하기에 급급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서 베들레헴에서 양을 치는 이새의 아들 다윗을 찾아 그에게 기름을 붙고 이스라엘 왕으로 예비하셨습니다.
그리고 몇 해가 지났습니다. 블레셋이라는 나라에서 이스라엘을 쳐들어 왔는데 골리앗이라는 거장을 앞세워서 파죽지세로 이스라엘을 몰아 부치고 있을 때, 어린 다윗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군대에 있는 형들을 면회 같다가 골리앗이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는 것에 울분 하여 물 맷돌로 골리앗을 넘어뜨린 사건으로 다윗은 일약 용맹스러운 장군이 되고 사울 왕의 사위가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기도가 사울은 10%, 다윗은 100%이므로 그때부터 사울 왕은 다윗을 죽이려고 호시탐탐 그를 괴롭혔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눈을 피해 산에서도, 들에서도, 타관객지에서도 타국에서도 고생을 많이 하면서 유랑의 생활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다윗이 이제 인생 황혼기에 접어들어서 지나간 날을 회상하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의 배경은 사울의 눈을 피해 은신생활을 하며, 방랑생활을 하며 일어났던 사건을 배경으로 과거를 추적하는 이야기입니다.
13절을 보니까 여기 다윗은 아둘람 굴속에서 인생의 가장 황금 같은 시기에 역경과 시련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사울 왕의 눈을 피해 도망 다니는 것도 고달픈데 13절에 보니까 블레셋 군대가 르바임 골짜기에 진을 치고 있으므로 다윗을 더욱 사면이 벽으로 먹혀버린 듯한 어두움의 골짜기를 통과하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그는 왕이었지만 면류관이 없는 왕이었습니다. 나라 없는 왕이었습니다. 그리고 보좌가 없는 다시 말해서 백성이 없는 왕이었습니다. 더욱이 다윗의 마음을 슬프게 했던 사실 가운데 하나는 그의 고향인 베들레헴이 블레셋 적군에 떨어지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는 더욱 고민하고 진통하고 서러웠습니다.
다윗이 처하고 있었던 아둘람이라는 장소에 뜻은 본래 '심판'이라는 뜻입니다. 다윗은 이 장소의 뜻같이 어쩌면 자기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처럼 그렇게 그의 인생에서 위기와 실망을 겪고 있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가 있는 처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어린 시절의 꿈과 낭만, 그리고 행복을 추억할 수 있는 어린 시절의 고향, 베들레헴이 그의 눈앞에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고향을 향하여 나갈 수 없는 형편입니다. 적의 포위망으로 완전히 절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둘람 굴속에서 베들레헴을 바라보며 어린 시절의 향수를 되새기고 있었을 것입니다. 목동시절의 추억과 우물가의 사연들이 주마등처럼 다윗의 머리를 스쳐지나갔을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 제목이 ◀다윗의 향수!▶입니다.
때는 추수기였습니다. 날씨는 덥고 갈증은 더욱 심각해가고 있는데 갑자기 어린 시절 베들레헴의 우물가에서 마시던 상쾌한 물 생각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부르짖고 있었습니다.
15절에 '다윗이 사모하여 가로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누가 나로 마시게 할꼬 하매'
이 말은 그 누군가를 향하여 구체적으로 자기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는 부르짖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독백과 같은 그의 영혼의 절규이자 차라리 탄식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들레헴 우물물의 간절한 사모의 정을 나타내는 다윗의 고백인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다윗의 부르짖음을 곁에서 들었던 세 사람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이 세 사람을 세 용사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세 용사는 다윗의 절규소리를 듣고 다윗을 돕기로 결심했습니다. 아둘람 굴속에서 절규하는 왕을 위하여 그들은 모험을 결심합니다. 세 용사들은 피를 뿌리며 적군 불레셋의 적군 진영을 헤치고 베들레헴까지 당도해 물을 길어 마침내 이 다윗의 갈증 난 목을 축이는 아름다운 사건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본문의 사건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을 연상케 합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사랑이 오늘 우리를 향해서 구체적으로 다가오는 모습을 이 사건을 통해서 추적해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다윗의 모습은 어쩌면 저와 여러분의 죄인의 모습을 연상시켜주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던 하늘의 왕자가 아둘람의 굴속에서 좌절과 실패와 불안을 경험하고 있는 삶의 스토리는 인생을 살고 있는 모든 죄인들의 삶의 이야기와 어쩌면 그리 흡사합니까?
이 우주를 정복할 수 있는 권세를 위임받고 하나님의 거룩한 왕자로 지음을 받은 인간이 이제 그의 생의 가장 어려운 시기를 통해서 전락과 슬픔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의로움 앞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자리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왜 그런지 아시지요? 아담의 타락으로 범한 죄가 우리 안에 왔기 때문입니다.
여기 다윗이 자기가 처한 인생의 어두운 시대 속에서 간절히 베들레헴의 우물물을 동경했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가 처한 심판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목마르게 요구하고 있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우리 모두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 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지옥은 물이 없는 장소입니다. 그곳은 영원한 목마름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구원의 거룩한 사건을 말할 때 목마름에 타고 있는 영혼들에게 필요한 한 잔의 물처럼 다가오는 영생의 축복을 허락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요4장에 나오는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를 아시지요? 예수님이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로 세상에서 버린 받은 한 여인을 만나러 가셨습니다. 그 여인의 영혼의 상처를 씻어주고 구원의 샘물을 주시려고 그곳에 가셨습니다.
그곳 야곱의 우물가에서 여인을 만난 예수님이 친히 '네게 물을 좀 달라'고 말을 건너자, 자기에게 물을 달라고 요청하는 그분이 유대인임을 알았던 사마리아 여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어라'
이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다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그리고 이어서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그러자 이 여인이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여기서 우리는 주님께서 여인에게 주시고 싶어했던 영생의 거룩한 선물을 하나님의 물로 비유시키고 있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할/
어떤 점에서 인생은 누구나 목말라하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으나 심각한 심령의 갈증을 겪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참 사랑이 없었고, 참 만족이 없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그 여인은 실패한 인생이었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그 어느 누구도 그 여인에게 참 생명을 줄 수가 없었습니다.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수'는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께서 주시는 성령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값없이 성령을 베풀어주십니다. 여기서 성령을 물로 비유하셨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할/
또 요7:37-39절에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또 계21:6-7절에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할/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문자 그대로 목마른 세상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우물물에서 마시는 어떤 물로도 이 갈 한 목을 축일 수는 없습니다. 권력의 물이 우리 영혼의 욕구를 채우지 못했습니다. 쾌락의 물이 우리의 영혼의 욕구를 채우지 못합니다. 재물로도, 학식으로도, 어떤 제도로도, 우리 영혼의 갈급 함을 채울 수가 없습니다. 그 물은 다시 목마름이 오고, 허전함이 오고 그러다 급기야는 다윗처럼 절망하게 되고 맙니다.
목이 타는 추수기의 한날 베들레헴의 우물물을 동경하며 주저 않아 있던 다윗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본문 속에서 다윗에 이러한 물음에 대하여 해답을 가지고 있었던 위대한 세 용사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 사람의 이름을 보니까 대단히 엄청난 진리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예견할 수 없습니다.
23장을 통해 우리는 이 세 사람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먼저 18절에 '또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 '아비새'니 저는 그 삼인의 두목이라 저가 창을 들어 삼백인을 죽이고 그 삼인 중에 이름을 얻었으니' 그리고 20절에 '또 갑스엘 용사의 손자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니 저는 효용한 일을 행한 자라 일찌기 모압 아리엘의 아들 둘을 죽였고 또 눈 올 때에 함정에 내려가서 한 사자를 죽였으며' 그리고 거슬러 올라가 9절에 '그 다음은 아호아 사람 도대의 아들 '엘르아살'이니 다윗과 함께 한 세 용사 중에 하나이라'
이 세 용사의 이름은 대단히 의미 심장한 시사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맨 처음 아비새의 이름은 히브리어적인 뜻은 '은혜의 아버지'입니다. 두 번째 등장하는 용사의 이름은 브나야인데, '하나님의 아들, 여호와께서 세우신다.'는 뜻이고, 세 번째 용사는 엘리아살입니다. 그 이름의 뜻은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할/
우리는 세 사람의 이름을 통해서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그는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에 모든 상황과 문제 속에서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성령의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해 주시며 우리의 연약함과 완악 함을 아시고 깨뜨리십니다.
본문에 보면 '누가 나로 하여금 베들레헴의 우물물을 마시게 할 꼬' 다윗이 독백처럼 외칩니다. 다윗의 요청은 아니지만 세 용사는 스스로 이 다윗의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구원을 호소한 것은 아니지만 내 모든 처지와 아픔을 아시고 내 문제를 감당하시기를 결정하시며 내가 처한 삶의 자리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모습을 연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아비새의 하나님, 은혜의 아버지시며, 브나야와 엘르아살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 용사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찾아오시는 거룩한 하나님의 구속의 드라마를 더욱 설명하게 한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가장 존귀한 것으로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자 예수님, 그는 친히 자신을 대속의 제물로 드리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누가 그에게 죽음을 강요한 것이 아닙니다. 상황이 그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도 아닙니다. 역사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보낸 것도 아닙니다.
그가 이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내가 스스로 내 목숨을 버리노라'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성자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커다란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 자신을 구속의 제물로 기쁘게 드렸던 하나님이십니다. /믿/
그는 인간을 구체적으로 돕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처절하게 버림을 받고 외면을 당하시면서 까지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우리의 구원을 도우시며 삶의 필요를 공급하시며 날마다의 삶 속에 구체적으로 간섭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의 영의 속성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다윗을 도왔던 이 세 용사의 거룩한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그림자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다윗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세 용사는 죽음의 자리인 전쟁터로 스스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세 용사의 사랑과 용기와 희생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용서, 하나님의 희생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이 세 용사가 다윗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취한 영웅적인 행동과 모험은 세 용사의 피를 요구했습니다. 그들의 희생의 피가 아니고는 다윗의 문제를 해결될 수 없는 그런 절박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피를 흘려 다윗이 그토록 사모하던 구원의 물을 제공하는 사실도 우리는 발견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 물을 받았던 다윗의 감격을 우리는 이해해야 주님의 우리를 사랑하신 구속의 감격을 맛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이 물을 받아들고 감격스런 그의 고백을 16-17절에 있습니다.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충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리며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갔던 사람들의 피니이다 하고 마시기를 즐겨 아니하니라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
이 말은 다윗이 그물을 마시지 않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세 용사가 피를 흘려 제공한 이 물을 차마 그냥 받을 수 없다는 감사와 감격의 토로입니다.
여러분! 이 다윗의 감사를 이해하십니까? 영광스런 구원의 물이 제공된 사실을 기뻐하면서 하나님아버지에게 이 물을 부어 바치는 다윗의 모습을 통해서 구속함을 받은 피조물의 감격을 우리는 찾아야 합니다.
이 구속함의 감격을 우리가 소유하고 간직하기에는 너무나도 존귀하고 감격스러운 사건입니다. 이 물을 마시기 위해서 우리가 노력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친히 확증해 주셨습니다.
내가 없는 곳에서 하나님이 구원의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내가 없을 때 하나님은 구속의 주님을 보내셨습니다. 내가 없는 그곳에서 주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셨고,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구속의 사역을 다 완성하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증보자가 되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나와서 값없이 이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요청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이 구속의 감격에 취했던 사도 베드로는 이와 같이 고백했습니다. 벧전1:18-19절에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할/
이 고백은 베드로의 고백만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피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아 새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로 세우심을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이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희생의 피로 이루어진 구원을 감격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할/아멘!/
다윗은 친히 하나님 앞에 이 물을 부어드리며 이 물이 더 필요한 영혼들을 위해서 쓰여지기를 원했던 그 열망처럼 우리에게도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전도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한 번 사마리아 여인과 주님의 만남에서 이루어진 대화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구원의 거룩한 사건을 생수에다 비교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A. 핑크'라는 성서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물을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구원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구원받지 않아도 될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했습니다.
이 물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구원도 누구에게나 필요하며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죽을 수밖에 없는 절박한 사건이 구원의 사건입니다. 물은 날마다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생을 날마다 필요합니다.
이 하나님의 영생의 사건을 우리가 죽은 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을 하나님만이 지니고 있는 삶의 집입니다. 그것은 죽은 후에 우리가 누리는 천국에서의 영원한 기업뿐만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생명을 통해서 살아야 할 구체적인 삶의 모든 것을 포함하는 생명입니다.
주께서는 이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고 싶어하십니다. 그래서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거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할/
물은 다른 것으로 대치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꼭 그것으로만 해결될 수가 있는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구원은 이 구원의 사건 외에 다른 것으로 우리의 모든 것을 채울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구원만이 인간의 영혼의 절박한 요구를 채울 수 있는 유일한 대답입니다.
물은 값없이 주어집니다. 그것은 하나님 선물로 주어진 것입니다. 구원 또한 인간의 노력이나 행위나 공로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엄청난 하나님의 선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속으로부터 솟아나는 물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거룩한 구원의 선물을 받았을 때 우리는 내 안에 스스로 행복의 샘터를 갖게 됩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외부의 환경이 나에게 행복의 샘터를 갖게 됩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외부의 환경이 나에게 행복의 조건을 부여해 주어서 행복한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찾아오시고 내 속에 영생의 샘터가 생길 때 스스로 모든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습니다. /할/
이 물은 살아 있는 생수입니다. 이 구원은 살아서 내 영혼을 지배하고 나를 감격하게 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삶에 사건입니다. 할/
'누가 나로 하여금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마시게 할 꼬' 어두운 굴속에서 절규하던 다윗처럼 우리의 살에 어둡고 캄캄했습니다. 외롭고 답답합니다.
자, 다윗의 갈급을 채워줬던 세 용사처럼 우리 삶의 목마름을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에게 크신 선물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모두 그분의 생수를 받아 영혼에 목마름뿐만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도 풍성한 생수를 체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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