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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의 삶의 지혜! (전 7:13-14)

by 【고동엽】 2022. 2. 10.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의 삶의 지혜! (전 7:13-14)

 

우리는 지상낙원이라고 부르는 덴마크에 대하여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덴마크는 1864년 프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함으로 남부의 기름진 땅 전부를 빼앗겼습니다. 또 그동안 전쟁을 치르느라 국내 경제는 도탄에 빠졌고, 패전으로 인한 사회혼란은 덴마크를 존폐의 위기에 몰아 넣었습니다.
전쟁터에서 패잔병으로 돌아온 남자들은 대낮부터 술을 마시고 길거리에서 치고 부수고 악을 쓰며 술 주정을 부립니다. 여자들은 살아가기 위에 외국인들에게 몸을 파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덴마크의 주민들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곤고와 고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패전으로 인하여 모든 전쟁의 비용을 물어야 했고, 그에 대한 배상도 해주어야 했으며 기름진 국토를 다 잃어버렸으며 사회는 혼란과 무질서로 빠진 덴마크가 이런 위기에 놓여 있을 때 그 역경에 도전을 부르짖는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가 바로 '그룬트비' 목사님입니다.
그는 나라의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 속에 분연히 일어나 '하나님을 사랑하자! 나라를 사랑하자! 자연을 사랑하자!' 이 세 가지 사랑운동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그는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는 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해야 하는 것'뿐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룬트비 목사님은 농민학교를 세워 성경을 기초로 한 정신적 자원을 심어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왔으며 하나님 안에서 그들은 역경을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인 힘을 공급받았습니다.
이때 또 한 분의 위대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패전에서 돌아온 공병 대령 달라스는 '밖에서 잃은 국토, 안에서 찾자'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국민들에게 호소합니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을 모아 광막한 늪지대요, 얼어붙은 동토의 땅인 유틀란트 반도를 개간하고 나무를 심기 시작했습니다.
유틀란트 반도는 북쪽에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땅이며 모든 사람들이 버려진 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달라스는 포기하지 않고 버려진 땅 위에 기도와 믿음으로 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무는 심자마자 죽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달라스는 절망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하고 연구하여 심고 또 심었습니다. 드디어 달라스의 숙원이 이루어졌습니다. 집념의 연구를 통해 알프스의 전나무를 접붙여 동토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우수한 품종의 나무를 개량해 냈습니다.
달라스는 그 나무를 해변에 심었습니다. 그 결과 그 나무들이 자라 울창한 숲을 이루게 되자 북부에서 몰아치는 북풍설한을 막아내는 방파제가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그 모래땅에 들어가 거센 고난과 싸웠습니다.
그 후 덴마크는 100년 만에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인 농업국가로 발전하게 되었고, 이 배경을 통해 자원을 양성하여 공업국가로도 번영하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덴마크는 하나님을 믿는 자원을 통해 고난을 극복하고 찬란한 역사를 이룬 선진국이 되었고, 지금은 지상낙원이라는 살기 좋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할/
만일 덴마크가 패전했을 때 그룬드비 목사나 달라스 대령이 일어나 고난에 대한 억센 도전을 하지 않았다면 덴마크는 크게 패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고난은 우리를 죽이는 검은 그림자만은 아닙니다. 우리를 살리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온 고난을 올바르게 대처한다면 그 고난은 개인을 발전시키고 나라를 발전시키는 위대한 원동력이 될 줄 믿습니다. /아멘!/ ◀제목 소개!▶

 

성경 욥5:7절에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이 있는 곳에 고통의 문제는 그림자처럼 피할 수 없이 따라오고 있습니다. 갓난아이가 '으앙' 하는 울음소리를 내며 세상에 태어나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은 세상살이가 괴롭기 때문이라고도 말합니다.
사실 인생이란 '으앙' 울면서 왔다가 '아이고, 아이고'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가야 하는 괴로운 길이 분명합니다. 어떤 철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했으며, 옛 어른들은 '젊어서 고생은 사서고 한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도 했습니다.
인간의 괴로움은 결코 어떤 특정인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겪어야 하는 보편적인 것이랍니다. 잠27:1절에서 당대의 최고의 지혜 자는 말하기를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간혹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저 사람에게는 나 같은 고민이 없겠지?' 그러나 그 사람에게도 인생의 괴로움이 있습니다. 꽃가마 속에서도 한 숨이 나오고, 비단금침에서도 걱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10년 전이 좋았었지, 그땐 참말로 봄날이었는데' 그러나 10년 전 바로 그 당시도 역시 괴로웠던 시간들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인생은 누구를 막론하고 항상 괴로움과 더불어 고난에 붙여 곤고한 삶을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는 인생을 자주 언급합니다. 약4:14절에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바울은 히11:13절에서 인생을 '나그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인생은 '안개와 같은 인생살이, 나그네와 같은 인생살이'입니다. 그런 인생들을 향하여 우리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이라고 표현했으며, 바울은 롬7:24절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탄식했으며, 또 오늘 본문은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인생의 가는 길에는 순탄한 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역경도 있습니다. 성공할 때가 있는 반면에 실패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칫하면 환경자체를 바라보기 쉽습니다. 그리고 그 환경에 따라 감사하기도 하고 원망하기도 합니다. 때로 용기를 잃기도 하고,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여기에 인간의 약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 13절에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인간의 생사화복은 하나님께서 주장하시고 하나님께서 섭리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할/
우리의 생 가운데 발생하는 제반사는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뜻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결코 우연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역사요, 계획임을 믿어야 될 것입니다.
계속해서 13절을 보면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라고 묻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은 인간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여러 가지 시련과 환난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련과 환난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인생들에게 필연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 시련과 환난을 당하지 않으려 하거나 혹 시련을 당하였을 때에라도 그 시련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섭리를 외면한 채 불평한다는 것은 합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전도자가 이처럼 시련을 회피하거나 불평하는 행위를 금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어떠한 개인의 삶의 행로를 굽게 하시고 환난을 주셨다면 그 환난은 환난을 당하는 자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아름다운 계획에 한 부분임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믿/할/


▶인간에게는 몇 가지의 비밀이 있습니다.
①환란이 비밀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언제 환난이 닥쳐올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내가 언제 어디서 살다가 어떻게 환란이나 곤고가 닥쳐올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믿음이 없이는 한시도 마음놓고 살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의 전부를 주님께 맡기고 사나 죽으나 주의 것으로 살아야 할 줄 믿습니다. /아멘!/
②죽음이 비밀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내일 죽을 것을 모르고 수 백년 살 것처럼 날 뜁니다. 어떻게 보면 사람의 죽음이 비밀이란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만일 인간이 자기 죽는 날짜를 안다면 미리 낙심하고 죽음이 두려워서 온 식구 친척들까지 난리가 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③말세에 예수님의 재림이 비밀입니다. 요즘 잘못된 이단 종말론자들 때문에 예수님의 재림신앙이 곤욕을 받고 있습니다. 엄청난 사회의 충격을 준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은 분명히 있는데 그 때와 그 시는 아무도 모릅니다.
주님은 성도들이 날짜와 시간을 정해 놓고 광적으로 오시라고 기도한다고 해서 오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는 벧후3:10절의 말씀처럼 '도적같이 오신다'고 했고 '홀연히 오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도적은 예고 없이 옵니다. 어떤 도적이 '나 몇 월, 몇 일, 몇 시에 너희 집을 털러 간다'고 예고해 놓고 가지 않습니다. 도적은 밤에 주인이 잠잘 때 가만히 몰래 들어옵니다.
우리는 주님이 언제 오시는 것에 신경 쓰지 마시고 늘 깨어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기름을 준비하는 성도들이 되십시다. /아멘!/ 그리고 주어진 가정을 잘 지키고, 직장과 사업과 모든 삶의 현장에서 최선을 다하여 달려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할/

 

오늘 본문은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형통하고 즐겁고 일이 잘될 때에는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매일같이 형통하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다음에 가서 핵심적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곤고한 날이 오기 전에 미리 기도하고 고민하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고민이라고 모두 부질없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마땅히 해야 할 고민이 있습니다. 이런 고민은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고민입니다. 그래서 이런 고민은 더 할수록 좋고 사람으로 하여금 성숙하게 하는 그런 근심입니다.
또한 '형통한 날에 기뻐하라'는 것은 일이 잘 되어갈 때 그리고 성공했을 때 바로 믿고 바르게 살라는 뜻입니다. 사업이 잘 될 때 정신 차려서 더 잘 믿으라는 것이고, 몸이 건강할 때 정신 차리고 예수님을 잘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형통하고 일이 잘되면 그 형통을 육체를 위한 기회로 삼고 하나님과 이별합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형통하십니까? 형통한 날에 하나님과 함께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기뻐하라고 하신 것은 더더욱 '믿음으로 충성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기쁘게 여기십니다. 히11: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할/

1. '형통한 날에 기뻐하라!' 이것이 우리의 삶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형통한'이란 말은 '토브'란 말로 '좋은, 선한, 아름다운'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형통한 날이란 '성공한 날, 번영의 날, 평안의 날, 영광의 날'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곧 성도가 하는 일마다 잘되는 때를 의미합니다. 즉 육신적으로 강건하고, 사업이 잘되고, 영적으로 평안한 때를 말합니다.

▶그러면 성도는 어떻게 해야 형통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①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때 형통에 복이 있습니다.
신29:9절에 '그런즉 너희는 이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의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라' 또한 수1:8절에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아멘!/
②하나님께 기도하면 형통의 길이 열립니다.
역대하 26장에 보면 웃시야 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5절에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의 사는 날에 하나님을 구하였고 저가 여호와를 구할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케 하셨더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③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할 때, 여러분! 형통한 복을 받습니다.
시122:6절에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라'
④하나님 앞에 바른 회개가 이루어질 때 형통의 길이 열립니다.
잠28:13절에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⑤열심히 부지런히 일하십시오! 그리하면 형통의 길이 열립니다.
시128:2절에 보세요! '네가 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라' /할/
⑥이렇게 하나님의 축복으로 형통할 때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형통할 때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여기 '기뻐하라'는 말은 '좋은 마음으로 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곧 좋은 세월에 선하게 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좋은 때를 이용하여 선한 일을 많이 하라는 말씀입니다.
물질적인 형통이 있을 때 선교하며 구제하며 선한 일에 사용하라는 말씀이요, 건강할 때 주를 위해 봉사하며 헌신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평안한 기회를 만났을 때 그리스도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힘써 일하라는 말씀입니다. /아멘!/
사람들은 종종 일이 잘될 때, 형통하게 될 때 방탕하기 쉽습니다. 가난하고 궁핍에 처했을 때에는 하나님만이 그의 삶의 전부였는데, 부자가 되고 나서 교만해지고 방탕하여 하나님을 배반하는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삼상12:4절에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 또 전3:12절에서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할/
⑦기뻐하라는 복음은 사도 바울만 전한 것이 아닙니다. 그 전에 벌써 솔로몬을 통하여 주신 복읍입니다. 솔로몬은 기쁨을 누리며 사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전3:12과 22절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노라' '내 소견에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이는 그의 분복이라'
그렇습니다. 기뻐할 줄 아는 것이 행복이요, 기뻐할 줄 모르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건강해도 기뻐할 줄 모르고,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어도 기뻐할 줄 모르고, ▶밤에 단잠을 잘 수 있어도 기뻐할 줄 모르고, ▶가정이 있고 부모형제 처자가 있어도 기뻐할 줄 모르고, ▶공부할 수 있는 학교가 있고 일할 수 있는 일터가 있어도 기뻐할 줄 모르고, ▶운동도 하고 등산도 할 수 있는 건강한 몸이 있어도 기뻐할 줄 모르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나라가 있어도 기뻐할 줄 모르고, ▶마음껏 기도하고 예배드릴 수 있는 섬기는 교회가 있어도 기뻐할 줄 모르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오늘 솔로몬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기쁨을 누릴 줄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요 행복한 사람입니다.
건강하기 때문에 기뻐하고,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기 때문에 기뻐하고, 밤에 단잠을 잘 수 있기 때문에 기뻐하고, 집이 있고 부모형제 처자가 있기 때문에 기뻐하고, 공부할 수 있는 학교가 있고 일할 수 있는 일터가 있기 때문에 기뻐하고, 운동도 하고 등산도 할 수 있는 건강한 몸이 있기 때문에 기뻐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나라가 있기 때문에 기뻐하고, 마음껏 기도하고 예배드릴 수 있는 교회가 있기 때문에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아멘!/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분부입니다. 어떤 사람이 기뻐할 수 있습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는 은혜의 사람이 기뻐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처한 처지에 자족할 줄 아는 겸손한 사람이 기뻐할 수 있습니다. 생각과 성품이 단순한 사람이 기뻐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형통한 날은 성공하며 기뻐하는 날이요, 영광의 날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날을 맞이할 때 보통 사람들은 교만하여 쾌락과 방황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사람들은 더욱 겸손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오늘 나의 형통은 내가 잘나고 똑똑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요,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 형통할 때 모두 기뻐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

 

2.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이것이 우리의 삶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곤고'라는 말은 국어 사전에 보면 '곤란하고 괴로움'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곤고한 날'이란 '환난의 날이요, 실패의 날이요, 불행의 날이요, 재난의 날'을 말합니다. '고통과 슬픔이 지배하는 때'를 말합니다.
그러면 인생에게 언제 이런 곤고한 날이 다가옵니까? 그 이유는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이 '성도를 훈련하시기 위해 그 방법을 사용하시는 것'이고(욥, 다니엘과 세 친구), 또 하나는 '죄를 범하기 때문에 오는 경우'입니다.
롬2:9절에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여기 '곤고하다'는 말은 '고통스럽고, 힘들고, 어려운 형편'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할/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곤고한 날은 어떤 날입니까?
①삶에 기쁨이 없을 때를 말합니다.
전12:1절에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여기 곤고한 날은 바로 낙이 없는 날이라고 전도서 기자는 말합니다. 그러면 낙이 없는 날은 언제입니까? 한마디로 자기의 일에 보람과 가치를 느끼지 못할 때 낙이 없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감정에 상처가 생기고 삶에 기쁨을 잃어버립니다.
여러분, 하시고 있는 어떠한 일에도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십시오, 런던 광장을 청소하는 한 청소부는 '나는 이래봬도 지구의 한 모퉁이를 깨끗이 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큰 자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니 이 얼마나 감사 감격한 일입니까? 주의 영이 저와 여러분의 심령 깊은 곳에 성전 삼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할/
아무리 경제적으로 풍성하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 삶의 현장에서 보람과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런 사람은 한마디로 곤고한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할/

②큰 시험으로 고통을 당할 때입니다.
욥2:13절에서 욥이 시험 당할 때의 모습을 보고 '칠일 칠야를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곤고함이 심함을 보는 고로 그에게 한 말도 하는 자가 없었더라'고 했습니다. 시험을 당하는 그 자체가 곧 곤고한 생활입니다.
욥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루아침에 그 많은 재물이 날아가 버리고 생떼 같은 열 자녀를 잃어버렸으니 그의 삶이 얼마나 곤고했겠습니까? 거기다가 욥 자신도 악창에 걸려 잿더미에서 앉아서 기왓장으로 그 상처를 긁어내는 처량함을 상상해 보십시오, 조강지처 마누라는 위로는커녕 '당신이 믿는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라'고 저주까지 하면서 떠나가 버렸습니다. 이렇게 '시험이 바로 곤고'입니다.
야고보서는 사람에게는 두 가지의 종류의 시험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험으로 이는 '믿는 자를 연단 시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보다 더 온전하게 하며 축복해 주시기 위해서 받게 하는 시련으로써의 시험'입니다. 이 시험을 '도미마조'라고 원문은 말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마귀가 행하는 시험으로 이는 사람을 유혹해서 죄악에 빠지게 하는 유혹으로서의 시험'입니다. 이 시험은 '페이라죠'라고 합니다.
이 시험을 대부분 외부로부터 오는 시험이라기보다는 자기 내부로부터 솟아오르는 정욕의 시험입니다. 어째든 그것이 유혹이든 시련이든 시험을 받는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것이요, 이기기 힘든 것입니다. 따라서 시험을 당할 때 우리는 곤고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믿/

③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가 내려지는 때가 곤고한 때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의 성읍들이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을 때 모든 백성은 곤고함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욥21:17절에 '재앙이 그들에게 임함이나 하나님이 진노하사 그들을 곤고케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환경 속에는 우리를 곤고케 하는 일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곤고한 날일수록 더욱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사람이 성공적인 삶을 사느냐? 실패한 삶을 사느냐'의 다른 것은 어떠한 어려운 가운데서도 좌절하지 않고 그 어려움을 잘 극복해 나가느냐 못 나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수많은 성공자의 뒷이야기는 그 어려움을 잘 참아 냈다는 것입니다. 대개 많은 사람들은 곤고한 날을 맞게 될 때 쉽게 좌절하거나 포기할 때가 많습니다. 때로는 원망과 불평으로 모든 것을 비관하기도 합니다.
'우리 부모를 잘 만났으면 이 고생 안 하는데, 형제가 조금만 밀어줘도 되는데, 어디 너 두고 보자, 그래 얼마나 잘 사는가 보자' 사람들은 곤고한 날에 낙심과 좌절과 원망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성공자들은 절대로 낙심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원망하지도 않습니다.
욥은 그런 곤고함 중에도 결코 어리석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욥1:21-22절에서 욥의 신앙고백을 한 번 들어 봅시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할/ 이것이 욥의 신앙고백입니다.
여러분, 믿음의 사람들이 원망하고 불평하면 불 뱀이 와서 뭅니다. 그러므로 곤고한 날에 원망이나 불평은 전혀 해결책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낙심 가운데 빠지게 됩니다. 낙심을 하게 되면 인간은 더욱 약해집니다.
잠24:10절에 '네가 만일 환난날에 낙담하면 네 힘의 미약함을 보임이니라' 곤고한 날에 낙심에 빠지면 인생살이는 더더욱 고달파집니다. 또 낙심하며 살다보면 자포자기되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범죄의 수렁으로 빠지게 될 수도 있습니다.
대하28:22절에 '이 아하스왕이 곤고할 때에 더욱 여호와께 범죄하여' 그러므로 여러분, 곤고한 날일수록 포기하지 마시고 더더욱 용기를 가지고 하나님께 매달리시기 바랍니다. /아멘!/

 

▶그러면 믿음의 사람들이 곤고한 날에 어떤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본문은 '곤고한 날에 생각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 '생각하라'는 말은 '보라, 반성하라, 찾으라, 결심하라'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①우리가 고난 당할 때 다음 세 가지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⑴나 자신의 잘못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고난과 시련의 이유를 밖에서 찾지 말고 먼저 자신 속에서 찾아보라는 원어 적인 의미가 그 속에 들어 있습니다. '내 탓이로소이다. 내가 잘못했나이다' /아멘!/
그렇습니다. '보라'는 말에는 나 자신을 보라는 말입니다. 연약한 나 자신, 죄인인 나 자신을 보며, 다른 사람의 형편을 보라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다른 사람의 가난이나 질병이나 슬픔을 몰랐지만, 곤고할 때는 남의 어려운 사정을 이해하게 되고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겸손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기회가 됩니다. 성도는 겸손할 때 은혜를 받습니다. /할/
여러분, 깊이 생각하고 자신을 반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잠4:19절에서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곤고 함을 당하여도 그 원인을 생각하지 못한다면 이런 사람은 영적으로 어둡기 때문이요,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다윗의 위대성은 그가 곤고한 날에 처해 있을 때 자기를 바라보고 깊이 생각해 봤습니다. '맞아! 그래! 이 일을 하나님이 싫어하셨어!' 그가 깨닫고 가슴을 치며 침상을 적시고 하나님께 회개했더니 하나님이 기쁘게 여기시고 '네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하셨습니다.
시25:18절에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 다윗은 곤고한 날에 자기를 돌아보았으며 뿐만 아니라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회개했습니다. 여러분, 일이 꼬이고 범사가 잘 안될 때 자기를 돌아보시는 것이 축복 받는 비결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모든 문제를 믿음 안에서 풀어야 합니다. 세상 적으로 풀면 더 꼬이고 막힙니다. /믿/
⑵고난 당하는 다른 사람을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위로 받기 위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위로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은 자기와 똑같은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끼리 위로 받기를 원합니다. 가령, 사업에 망한 사람들, 성공한 사람이 찾아와 위로해 주는 것보다 같이 망한 사람이 위로할 때 동감을 합니다.
대학에서 떨어진 사람은 떨어진 사람끼리 위로를 받습니다. 합격한 사람이 찾아와서 위로해 주면 자격지심에 아니꼽게 보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고난 당하는 자는 고난 당하는 자에게 찾아가서 '저도 이런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 다시 한 번 도전합시다' 이렇게 권면하면 위로가 됩니다. /할/
⑶고난 당할 때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곤고한 날에 괴로울 때, 우리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이런 가사의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 평화의 주님 바라보아라, 세상에서 시달린 친구들아 위로의 주님을 바라보아라, 눈을 들어 주를 보라. 네 모든 염려 주께 맡기라. 슬플 때에 주 예수 얼굴 보라. 사랑의 주님 안식 주리라' /할/
왜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까? 그것은 우리 주님께서 몸소 고난을 당하셨고 또 이 고난을 치료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아멘!/

②'곤고한 날에 생각하라'는 말은 '주님을 찾으라'는 뜻입니다.
삼성의 창립자였던 고 이병철 회장은 평생 세 가지가 마음대로 안 된다고 늘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합니다.
'자식이 마음대로 안되고, 경쟁사업 상품 미원이 마음대로 안되고, 자신이 즐기는 골프가 마음대로 안 된다'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자기 힘으로 안 되는 것이 어찌 세 가지 뿐이겠습니까?
우선 그 많은 돈을 쌓아 놓고도 자신의 생명을 연장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분이 살아 계실 때, 물도 일본에서 날라다 마시고, 채소는 무공해 재배로 키운 것을 먹고, 해마다 건강진단을 받고, 규칙적인 운동과 몸에 좋다고 하는 모든 보약을 다 먹었지만 그 생명 자기 마음대로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남 왕국 유다 왕으로 29년 동안 통치했던 히스기야 왕이 죽을병에 걸려 이젠 모든 소망이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때 변방에 앗수르가 막강한 군대를 이끌고 성을 포위했습니다.
이 때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을 찾았다는 것은 기도했다는 말입니다. 사38:16절에 '원컨대 나를 치료하시며 나를 살려주옵소서'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리고 왕하20:2절에서는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도가 살길입니다. 기도가 응답이고 기도가 축복입니다. /아멘!/ 하나님의 응답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왔는데, 왕하20:5-6절에 '너는 돌아가서 내 백성의 주권자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일만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겠고 내가 네 날을 십 오년을 더할 것이며 내가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내가 나를 위하고 또 내 종 다윗을 위하므로 이 성을 보호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셨더라' /할/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을 찾았더니 그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실 뿐만 아니라 쳐들어온 앗수르 군대까지 하나님께서 멸하여 주셨습니다. /아멘!/
다윗도 곤고한 날에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시86:1-2절에 '여호와여 나는 곤고하고 궁핍하오니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 나는 경건하오니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 내 주 하나님이여 주를 의지하는 종을 구원하소서'
다윗은 어려운 환경에 처할 때 어려운 문제에 부딪칠 때 무엇보다도 먼저 여호와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 나를 구하소서, 나를 건지소서' 그렇습니다. 기도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스펄죤' 목사는 '기도는 그 날의 생활을 여는 열쇠이고, 그 날의 생활을 닫는 자물쇠'라고 했고, '맥콘키'는 '기도하는 골방은 하나님의 은혜의 배급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렘33:3절에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또 우리 주님은 마7:7절에서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요14:13절에서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삶이 곤고하십니까? 어떠한 문제가 있습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전심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만져주시고 치료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멘/

③'곤고한 날에 생각하라'는 말은 곧 '새로운 결심을 촉구하라'는 말씀입니다.
곤고한 날은 새로운 결심을 하는 때입니다. 시77:12절에서 시인은 '주의 모든 일을 묵상하며 주의 행사를 깊이 생각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깊이 생각하라는 말씀은 '깊이 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요나는 곤고한 날에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욘2:7절에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그리고 새로운 결심을 했습니다. 즉 그렇게 가기 싫었던 원수의 나라 니느웨로 갈 것을 결심한 것입니다. 이렇듯 새로운 결심을 한 요나를 하나님께서 곤고함에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여러분, 곤고한 날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언제 갑자기 어려운 지경에 빠지게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어떠한 지경에 처하더라도 그 곤고한 때에 결코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곤고한 날에 생각하라'는 말씀을 부여잡고 주님을 바라보시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깨닫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멘!/
여러분, 믿음은 능력입니다. 믿음은 축복입니다. 막9:23절에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또 히10:38절에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할/

 

3.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하루에 밤과 낮이 있고 일년에 춘하추동 사 계절이 있듯이 인생 여정에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이 병행해서 있다는 말씀입니다.
전3:4절에 보면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이와 같은 변화는 우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섭리로 이루어지는 조화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전3:11절에 보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또는 조화롭게' 하셨다'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조화의 지혜입니다.
사실 세상에 낮만 있다면 사람이 살기가 힘들 것이고 세상에 여름만 있다면 살기가 지겨울 것입니다. 만일 세상에 형통한 날만 있다면 사람들은 모두 게을러지고 안일해지고 타락하고 말 것입니다.
만일 세상에 곤고한 날만 있다면 사람들은 모두 슬퍼하고 우울하고 약해지고 낙심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도 바울에게도 형통한 날들과 함께 곤고한 날들을 주셨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도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을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우연도 아니고 불행도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의 조화이며 우리의 유익이며 행복입니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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