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부장의 믿음! (마 8:5-13)
오늘은 한국교회가 어버이 주일로 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이 땅의 모든 어머니 아버지들에게 우리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식이 부모를 잘 섬기는 법을 우리는 효도라고 말합니다. 특히 동양인들에게 이 효 사상은 매우 중요한 삶의 도리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고로 부모를 잘 섬기는 자식들을 효자 효부라 불렀고 때론 그런 자식들에게 나라에서 상을 주기도 했습니다.
특히 동양인들은 부모가 살아 계실 때는 물론이거니와 돌아가신 후에는 제사라는 방법을 통해 부모와 죽은 조상들의 영혼을 섬겨왔습니다. 그리고 제사를 통해 죽은 영혼들에게 개인과 가정 그리고 심지어는 국가의 번영을 기원했습니다. 이는 부모나 조상을 공경하는 선을 넘어서 저들을 신격화하여 섬긴 것이 되기 때문에 기독교에서는 우상으로 보았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조상들을 공경하되 조상들의 죽은 혼령들을 신으로 섬기는 것은 금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죽으면 다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고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는 것이지 귀신이 되어 세상을 떠돌거나 어떤 초인간적인 능력을 가지고 세상에 존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부모님이 소천하신 후에는 그 날을 기리기 위해 제사가 아닌 기념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의식을 추도식이라고 합니다. 이날은 형제 자매들의 다 모여 주의 종을 모시고 부모님의 생전을 삶을 기리며 온 자녀들이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면서 사는 날 동안 바른 삶을 살기를 결단하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도 음식을 간소하게 준비하여 가족과 이웃이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우리 기독교는 효를 가르치는 종교입니다. 십계명에 보면 제1-4까지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계명이고, 그리고 5-10까지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을 가르치는 계명인데 그 첫 번째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고 두 번째가 '살인하지 말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에게 부모를 공경하는 일이 세상의 어떤 일보다 중요하고 우선함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할/
▶서울 중앙청 뒤쪽에 효자동(孝子洞)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동네가 효자동이라고 불리게 된 유래가 있습니다. 옛날 어느 집에 술을 좋아하시는 어르신이 계셨는데 그 날도 술을 드시고 집에 들어와 아들네 방에 들어와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이불 밑에 어린 손자가 있는 것도 모르고 그 위에 누어 잠이 들어서 아이가 깔려 죽었다고 합니다. 밭에서 일하다가 돌아와 이것을 본 며느리가 그런 사실을 시아버지가 아시면 속상할까봐 얼른 죽은 아이를 업고 남편한테로 달려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남편에게 몰래 아이를 묻고 오라고 했답니다.
이 말을 들은 남편은 죽어 있는 아들을 보고 '이 불효자식, 할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한 자식'이라고 냅다 뺨을 한대 쳤더니 그 뺨을 맞고 죽었던 아이가 번쩍 살아났다고 합니다. 이 소문이 퍼져서 임금님은 그 효자 효부에게 상을 내리고 그 효심을 기리기 위해 그 동네를 효자동이라고 부르게 했답니다. /할/
성경을 보아도 부모에게 효하는 자에게 복을 주실 것을 약속합니다. 홍수 이후의 인류의 조상이 되었던, 셈과 함과 야벳의 복과 저주의 길이 효도가 그 원인이 되었음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효도의 결과로 셈과 야벳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복된 삶을 누렸으나 함으로 인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후손이 당한 고난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 노아가 술에 취하여 벌거벗은 수치를 들어낸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노아의 실수 보다 오히려 불효했던 함의 실수에 더 큰 관심을 보입니다. 즉 아비가 실수로 수치를 들어내었다고 할지라도 자녀는 부모의 수치를 들어 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불효한 함은 저주를 받았고 효도한 셈과 야벳은 복을 받았습니다(창9:20-27).
하나님께서는 효도하는 자들에게 두 가지 복을 약속하십니다. 신5:16절에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첫째는 여호와께서 '네게 준 땅에서 생명이 길도록 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장수의 복입니다. 두 번째는 '복을 누리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날 동안에 행복 그 자체를 약속하시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형통하고 잘되고 번성함으로 누리는 풍성한 복입니다. /할/
독일 격언에 '한 아버지는 열 아들을 기를 수 있으나 열 아들은 한 아버지를 봉양키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효도할 것을 강력하게 명하고 계십니다. 잠23:25절에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고 당부하고 계십니다.
오늘 저는 진짜 믿음을 가진 ◀백부장의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건강한 사회와 병든 사회가 있습니다. 건강한 기업과 병든 기업이 있습니다. 구제 금융으로 혹은 권력의 뒷받침으로 유지되는 기업은 건강한 기업이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몸도 건강한 몸이 있고, 병든 몸이 있습니다. 계시록을 보면 건강한 교회와 병든 교회가 나옵니다. 건강은 그만큼 우리에게 소중하고 귀한 것입니다. 건강을 잃을 때 무든 것을 잃게 됩니다. 먹는 것도 기쁠 수 없고, 반가운 사람도 반가울 수가 없습니다.
건강해야 사업도 진행할 수 있고, 가정도 잘 이끌 수가 있습니다. 병들면 가정도 직장도 사업도 세상도 다 괴롭고 싫고 귀찮습니다. 그래서 건강은 모든 일의 기초요, 기쁨이 됩니다.
우리의 믿음에도 건강한 믿음이 있고, 병든 믿음이 있습니다. 병든 교회, 병든 믿음은 주어진 사명도 감당하지 못합니다. 기도도, 전도도, 충성도, 모든 봉사도 건강한 믿음만이 감당할 수 있습니다. 육신이 건강해야 모든 것이 자신이 있듯 건강한 믿음이 충성할 수가 있습니다. 역사를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믿/할/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건강한 믿음이 나옵니다. 가버나움에서 일어난 일인데 가버나움은 베드로의 고향으로 군사 요충지입니다. 그래서 로마군 사단급 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곳입니다. 거기에 한 백부장이 있었습니다. 백부장은 병졸 100여명을 인솔하는 지휘관으로 오늘로 말하면 대대장급입니다.
이 백부장이 하루는 예수님께 찾아와서 '내 하인 한 명이 중풍으로 누워 몹시 괴로워하고 있는데 내 하인을 고쳐 주십시오'하고 탄원을 합니다. 당시 하인은 파리 목숨과 같았습니다. 인격도 인권도 기대하기 어려운 대상이었습니다. 거기다 그 하인이 중풍에 걸려 누워있습니다. 회복이 불능입니다. 주인이 버리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그 주인 백부장이 예수께 직접 쫓아 와서 '내 하인을 고쳐 달라'고 간구합니다. 이런 경우는 좀처럼 없는 경우입니다.
이 모습을 예수님이 보시고 '당장 가자, 내가 고쳐주마'하고 흔쾌하게 승낙하셨습니다. 보통 일이 아니니까 예수님도 마음에 감동을 받으셨을 것입니다.
그랬더니 백부장이 '우리 집까지 가시는 것은 너무 죄송한 일이니 여기서 말씀만 하셔도 고쳐지리라 믿습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또 감동을 받으셨습니다. 어지간하면 예수님을 모시고 가서 자기 집도 자랑하고 종이 많음도 과시하고 자기의 권세를 과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고생하며 가실 것까지 없습니다, 여기서 말씀만 하셔도 낫을 줄 믿습니다.'하고 대답을 합니다. 이 백부장의 말에는 두 가지 믿음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직접 가서 몸에 손을 얹고 기도하고 안수하지 않아도 낫을 줄 믿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말씀 속에 절대 능력이 있음을 믿는 믿음입니다. 참 대단한 믿음입니다. /할/
복음서를 보면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그런데 직접 가지 않고 고치신 경우가 두 번 있습니다. 하나는 요4:46절에 기록된 왕의 신하 아들을 고치신 경우이고, 두 번째는 본문에 경우입니다. 백부장은 여기서 말씀만 하셔도 고쳐질 줄 믿었습니다.
그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이 감동하셨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예수께서 놀랍게 여겨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10)고 하시고, '세상 사람들이 많이 천국에 갈 것'(11)이지만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12)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택함 받은 유대인들은 천국에 가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백부장에게 말씀하시기를 가라 네 믿은 대로 되라'(13)고 보내셨는데 '그 시로 그 하인이 깨끗하게 치료'받았습니다. 이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본문을 한번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5-6절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와하나이다."
예수께서 문둥병자를 고치신 후에 곧 바로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선교의 중심지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지역으로써 로마의 군단 급 이상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버나움에 들어 가시자마자 한 사람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백부장이었습니다. 백부장에 대해서 알아보자면 당시의 배경을 알아보아야 합니다.
당시 유대나라는 백여 년 동안 로마의 식민지로 있었습니다. 로마 정부는 이스라엘에 분봉 왕으로 헤롯을 세웠는데 그는 한마디로 정치 청부업자였습니다. 로마 정부에서 유대나라의 3백 억의 세금을 받아야 되겠다고 하면 헤롯은 로마의 가이사 황제에게 3백억 원의 세금을 바치기로 계약을 하고 백성들에게 한 5백억 쯤 거두어 남은 돈은 가로채는 정치 하청업자 노릇을 한 것입니다.
당시 로마의 군대가 헤롯 휘하에 속한 군대로써 유대인들에 대하는 태도는 너무나 잔인했습니다. 유대인들을 개 취급했고, 인권을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은 바로 로마의 정규 군인으로써 가버나움 지역의 한 치한 책임자입니다. 그러니까 100명의 부하를 가지 백부장은 세력이 엄청 큰 것입니다. 그 세력을 가지고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한마디로 원수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백부장은 그런 전형적인 나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유대인들을 돕고 살았습니다. 유대장로들은 그의 인격을 높이 평가했던 사람입니다.
본문의 사건과 동일하게 취급한 눅7:5절 이하를 보면 당시 유대나라는 로마인들에게 모든 재산을 착취당하였으므로 가난하여 그 마을에 회당<교회> 하나도 짓지 못하고 있을 때 안타깝게 여긴 백부장이 자기의 재산을 들여서 교회를 세워주었다고 나옵니다.
그만큼 본문의 백부장은 신앙이 있었고, 인격이 있었고, 인정이 있었고, 덕망이 있었습니다. 당시 이방인 사람인 백부장이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사건부터가 빅뉴스입니다.
▶여기서 백부장의 신앙을 한번 진단해 보겠습니다.
⑴간구하는 신앙인이었습니다.
'간구하여 가로되' 대단히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는 로마의 정규군인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신앙의 역사를 원한다면 예수 앞에서 계급장을 떼어야 합니다. 교회에 와서 계급장을 달고 다니면 안 됩니다. 내가 그래도 사장인데, 박사인데, 무엇인데, 안됩니다. 교회는 누가 나오던 다 신자로 나오는 것입니다.
▶과거 이승만 대통령이 정동교회에 출석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처음에 대통령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 의자에 앉으니까 목사님이 송구스러워 '아이고, 대통령 각하, 여기에 어떻게 않으십니까? 이 위로 앉으시지요.'
그랬더니 이승만 박사가 하는 말이 '목사님 제가 여기 온 것은 대통령으로 온 것이 아닙니다. 신자로써 예배를 드리기 위해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신도들이 앉아 있는 자리에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얼마나 멋진 신앙입니까? 적어도 그런 자세를 성도들이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 앞에 기도도 할 수 있고, 무릎을 꿇을 수 있고, 참다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데' 계급장을 달고 나와서 목에 힘을 주면 그 사람은 바로 영적 중풍병자요, 문둥병자입니다. /믿/
백부장은 예수님께 나온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여기 '간구하여 가로되'라는 말은 기도했다는 말입니다. 그의 신앙이 얼마나 큰 믿음인가는 여기서 나타납니다. 겸손하게 주님 앞에 나올 뿐만 아니라 간구하는 신앙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간구하는 기도는 보통 기도와는 다릅니다. 마음이 원이 되고 한이 되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눈물로 애타게 부르짖는 기도가 간구의 기도입니다. 간구의 기도는 힘이 나가고 역사가 일어납니다.
약5:16절에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할/
⑵예수님은 자기의 생명의 주인으로 믿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여기 '주여!'라는 말은 '아도나이!'라는 말인데 '당신은 나의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그런 고백입니다. 이 고백 속에는 '나는 당신의 종이니이다.'라는 고백도 아울러 들어있는 말입니다.
그 당시 권세 있는 백부장이 예수님을 생명의 주인으로 고백했고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라는 고백은 파격적이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로마인들은 그들의 주인이 그들의 황제인 가이사라고 떠들어 됐지만 가이사는 얼마 못 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에 불과합니다. 백부장은 영안이 열려 있는 신앙입니다.
⑶인간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내 하인이 중풍 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백부장은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었고, 또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백부장이 예수님께 나아와 병든 사람을 고쳐달라고 했던 그 병든 사람은 백부장의 아내가 아닙니다. 아들도 형제도, 친척도 아닙니다. 자기의 종이었습니다.
그는 크고 작은 전쟁을 치르면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또 죽는 것을 목격하기도 한 군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죽음을 대수롭잖게 여길 수도 있는 사람입니다. 더욱이 그 당시의 종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인이란 헬라어로 '파이스'인데 이 말은 '종', 또는 '노예'라는 뜻입니다. 당시의 종(노예)은 하나의 물건으로, 재산으로 취급되었습니다.
지금은 자유를,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하는 미국 땅에서도 불과 150여 년 전에 흑인 노예가 시장에서 소, 돼지와 함께 거래되었습니다.
100년, 150년 전에도 사람이 물건처럼 시장에서 매매되었는데 2,000여 년 전 백부장의 노예, 종은 말할 것도 없이 하나의 물건에 불과합니다. 재산이었습니다. 종이 죽는다 해도, 종을 죽인다 해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자기 하인의 아픔을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얼마나 인자한 사람입니까?
백부장은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고,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촌에는 병든 부모를 버리는 자식이 있는가 하면, 병든 자식도 버리고, 형제도 버리는 세상인데, 오늘 본문의 백부장은 자기 종을 끔찍이 사랑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 아름다운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해 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백부장을 통해서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깨닫게 됩니다. 백부장은 자기의 종을 불쌍한 이웃으로 본 것입니다. 주님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 따라 살기를 다짐한 사람입니다. /할/
▶7절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이런 귀한 신앙을 보신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하십니다. 즉 응답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백부장은 '간구하는 신앙, 예수님을 자기의 생명의 주인으로 고백하는 신앙, 병든 종을 내 몸같이 사랑한 백부장의 귀한 인격과 신앙' 앞에 주님의 마음이 움직인 것입니다.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억지로 가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기분 좋게 흔쾌히 승낙하신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부탁한 것을 억지로 마지못해 해 주는 부모도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무엇을 부탁하면 마지못해 억지로 해주는 분이 있습니다.
이럴 때, 받는 분도, 해주는 분도 기분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기분 좋게 흔쾌하게 승낙했습니다. 여기서 '내가'라는 말을 사용하여 치유의 주체가 '예수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할/
그런데 백부장의 신앙은 8절에서 더 귀한 진가가 나옵니다.
▶8절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8절에서 우리는 백부장의 신앙을 더 귀한 진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⑴겸손한 신앙입니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이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월성과 절대 거룩 성을 깨달은 백부장의 겸손한 믿음입니다.
당시 백부장 정도면 공중에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는 권세 높은 지위입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예수 앞에서 자신을 죄인으로 보았습니다.
베드로도 이와 비슷한 고백을 했습니다. 눅5장에 밤이 맞도록 고기를 잡았으나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실패자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오셔서 예배를 드리신 후에 '깊은 곳으로 그물을 내리라!'고 하자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더니 고기가 심히 많아 두 배가 물 속에 잠기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무엇이라고 고백한 줄 아십니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무릎을 꿇을 수가 있습니다. 자기와 의인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주님!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 고백 속에는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런 분이 나 같은 미천한 집에 오실 수 있습니까? 주님 앞에 자기를 낮추고 주님을 존귀해 여기는 신앙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겸허한 마음의 자세는 은혜를 받을 만한 그릇이요, 주님은 영접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마음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축복하십니다. 약4:6절에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할/
▶영국의 최고의 왕은 빅토리아 여왕이랍니다. 대영제국이란 말은 빅토리아 여왕 때문에 생겼습니다. 이 왕이 얼마나 신앙생활을 잘했는지 모릅니다. 그는 항상 이런 고백을 했답니다. '주님께서 나의 생전에 이 세상에 재림하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하루는 신하들이 '폐하! 어찌하여 주님이 살아생전에 재림하시기를 원하십니까?' 여왕은 '주님이 나의 살아생전에 오시면 내가 쓰고 있는 왕관을 주님 발 앞에 바쳐드리고 싶어서'라고 말했답니다.
주님을 최고로 생각하는 이 여인이 바로 18세에 왕위에 올랐으나 영국은 가장 강대한 국가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백부장처럼 주님을 높이는 사람, 빅토리아 여왕처럼 주님을 높이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믿/
⑵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는 신앙입니다. '다만 말씀에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나이다.' 왜 예수님이 이 사람을 그렇게 칭찬하셨는지를 본문에서 알 수 있습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백부장의 신앙은 말씀을 의지하고 믿는 신앙이었습니다. 성도들 중에는 여러 가지 유형의 성도들이 있습니다. 체험을 좋아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혹은 부흥회에 가서 이상한 체험을 했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진동이 왔습니다. 등등, 체험을 했기 때문에 예수 믿는다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 모두가 체험이 있기를 바랍니다.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체험은 표준이 될 수 없습니다. 체험은 사람에 따라서 다르기 때문에 자기의 체험은 신앙의 표준으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표준으로 해야 합니까? 말씀입니다. 본문의 백부장의 신앙이 위대하다고 하는 것은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하는 말씀의 신앙, 바로 그것이 위대한 신앙입니다. 기독교란 말씀의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신 성경 66권을 온전히 믿는 믿음이 귀한 신앙입니다. /아멘!/
어떤 사람들은 '믿음에는 이유와 조건이 없습니다. 무조건 믿어라'고 말합니다. 참 잘 믿는 것 같습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에는 믿을 수 있는 이유와 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감정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감정에 사로잡혀 금방이라도 기적은 나타날 것처럼 흥분하다가도 환경이 조금만 달라져도 금방 좌절하고 신앙은 까먹어 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말씀을 믿는 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많이 들어야 합니다. 또한 말씀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세계적인 부흥목사 D.L 무디 목사는 '참 믿음은 창1:1절에서부터 계22:22절의 끝 절까지를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이 귀한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 이 믿음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9절에서는 자기 삶의 경험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9절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이 사람은 남의 수하에도 있어보고 상관으로도 있어본 사람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 사람이 자기 직업의 경험을 통하여 천국의 비밀을 깨닫는 것입니다.
군인은 명령 계통에 죽고 삽니다. 자기도 남의 수하에 있을 때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왔습니다. 그러므로 천지의 대 주제이시며 만 왕의 왕이신 주님께서 '내 종의 병이 나을지어다.'하고 명령만 내리시면 천군 군사가 동원되어 종을 괴롭혔던 원수마귀를 몰아내지 않겠습니까? /아멘!/
▶10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백부장의 믿음을 보신 예수님께서 감탄하시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⑴예수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셨습니다. 여기 '기이히 여기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다우마조'인데 '놀라다, 이상히 여기다. 감탄하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기이히 여기신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고급장교로써 그 당시 종으로 팔려 다니는 노예, 그것도 병든 종을 불쌍히 여겼으니 '정말 이 사람은 인격자로구나!' 놀라시고 감탄했습니다.
두 번째는 유대인들은 어려서부터 성경을 공부하면서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찾은 참 성도가 드문데, 백부장은 로마 사람으로서 예수님을 구주로 믿었으니 얼마나 기이한 일입니까?
가롯유다는 3년이나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주님의 교훈을 들었고, 예수님이 행하시는 이적을 보았고, 5천명에게 떼어주시는 떡을 먹었지만 은 30냥에 눈이 어두워 예수님을 팔아먹었으니 정반대의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⑵예수님이 인정해 주고 칭찬해 주었습니다. '이스라엘 중에서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이 말씀은 인정해 주고 칭찬해 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이만한 믿음'은 '위대한 믿음, 엄청난 믿음, 큰 믿음'이라는 뜻이요, '네 믿음대로 되어지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할/
믿음은 혈통으로, 가문의 전통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신앙생활 잘 했다고 해서 아들이 신앙생활 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 아들, 장로 아들이라고 해서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 많이 했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눅7:9절에 보면 예수님도 백부장의 믿음을 기이히 여기셨습니다.
왜냐하면 이방인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하나님과 그의 율법에서 제외된 상태였고, 예배와 말씀 속에서 자라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이방인인 백부장의 믿음이 예수님을 놀라게 했습니다.
'이만한 믿음, 큰 믿음, 놀라운 믿음, 상식을 뛰어 넘는 믿음'을 가질 때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 올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적이 임합니다.
오늘 백부장은 이방인이었지만 주님 앞에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성경 속에 믿음이 없다고 책망 받은 사람들은 놀랍게도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본문 26절은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두려워할 때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책망했습니다. 또 마14:31절에 보면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주님을 보고는 물위를 걷다가 바다와 물결을 보고 무서워 빠져 들어갈 때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느냐?'고 책망했습니다.
마17장 변화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께서 아홉 제자들이 귀신들린 어린아이 하나를 고치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을 때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라고 책망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백부장은 예수님의 제자도 아니면서 칭찬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인정받고 칭찬 받았다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사람은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자식은 부모에게 인정받아야 합니다. 학생은 선생으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사장에게 인정받은 직원은 행복한 직원입니다. 남편에게 아내에게 인정받는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쁜 습관이 있습니다. 자신을 크게 보고 남을 적게 보는 습관입니다. 자기의 생각은 모두 옳고, 남의 생각은 모두 어리석게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자기가 자기를 인정한다고 그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저 사람은 확실히 믿어'하고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이 인정해 주었습니다.
여러분, 사람의 인정도 중요한데 하나님이 인정해 주셨다면 더 이상 뭘 바라겠는가? 한번 따라 하십시다. '예수님에게 인정받으면 틀림없다.' /아멘!/할/
▶11-12절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이 말씀은 굉장히 어려운 말씀이고 영적인 말씀인데 무서운 말씀입니다. 동서로부터 이스라엘 밖에서 구원받은 백성이 물밀 듯이 올 것인데 그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겠지만 '나라의 본 자손들' 즉 선택받았다고 자만심과 교만에 꽉 차있는 사람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울며 이를 감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선택받은 유대인이라고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믿음이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직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 믿는 최고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천국에 가는 것이 최고의 목적입니다. 예수를 잘 믿읍시다. 성도의 본분을 잘 지키십시다. 형식적이고 의식적인 믿음은 천국은커녕 음부에 들어가 고통 중에 이를 갊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무섭습니까?
▶13절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
백부장의 믿음은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가라! 내 믿음대로 될지어다.' 그래서 백부장은 믿고 집에 돌아가 보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⑴종의 병이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일어나 웃으면서 뛰어 다니며 부지런히 일하게 되었습니다.
⑵백부장의 마음에 근심이 떠나갔습니다. 종은 병이 낫고 백부장은 마음의 근심의 병이 고쳐졌습니다.
⑶종과 백부장은 믿음으로 천국의 시민이 되었습니다. /할/
⑷'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 여기 '그 시로'는 '바로 그 순간부터'라는 말입니다. '네 믿은 대로 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는 무한정' 하심을 나타낸 말씀입니다.
'네 믿음대로'란 '네 믿었던 대로'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백부장의 믿음이란, 말씀만으로도 능히 질병을 다스리실 수 있는 권세가 예수님께 있음을 믿었던 백부장의 믿음을 의미합니다.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믿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도 어쩔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우리는 어느 곳,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믿음대로 되어지는 종교입니다. 크게 믿으면 크게 됩니다. 적게 믿으면 적게 됩니다.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 모두 큰 믿음을 가지십시다. 백부장은 그의 믿음대로 종의 병이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일어나 부지런히 주인을 위해 충성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주님이 의도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헤아려보아야 합니다.
⑴먼저 본문의 의도는 먼저 된 유대인들의 믿음 없음을 고발하려는 말씀입니다. 즉 '이 이방 군인의 믿음이 얼마나 깊고 철저하고 투철하냐? 그런데 왜 먼저 된 이스라엘에게는 이런 믿음 있는 사람이 없느냐?'하고 탄식하신 것입니다.
이웃집 아이는 늘 100점을 맞아 옵니다. 그런데 우리 집 아이는 늘 60점을 맞아옵니다. 그러고도 대견한 것처럼 시험지를 들고 오면서 큰 소리로 '나 60점이나 맞았다.'고 떠들며 옵니다. 그때 어머니는 참 속이 상할 것입니다. 예수님 마음도 그랬을 것입니다. 저 이방 사람도 저런 믿음이 있는데 왜 이스라엘 백성 중에는 저런 믿음 있는 사람이 없는가 탄식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고향 땅인 벳새다와 가버나움에 가셔서 전도했을 때 듣지 않고 배척을 하자 경고하시기를 '이 모든 권능과 기적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은 벌써 베옷을 입고 눈물로 회개하였을 것'(마11:20-24)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두로와 시돈은 바알숭배 중심지로 예부터 이방문물의 중심을 이루던 곳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은 이방인도 저렇게 믿음이 좋은데 왜 내 백성들은 이렇게 무지하고 믿음도 없고 고집스러우냐는 말씀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할/
⑵백부장의 전인격적인 믿음을 칭찬해 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만 하셔도 내 종이 나을 줄 믿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위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여기서 주님이 감동을 받으셨습니다. 또 백부장의 겸손한 모습에서 감동을 받으십니다.
이런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믿음이 있다고 다 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일은 종합적인 인격 즉 전인적 인격의 신앙이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할/ 백부장을 통하여 믿음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상당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전인적인 신앙인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 준 사건입니다.
⑶이 일은 단순한 인격이나 믿음만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십자가를 지는 용기의 삶이 필요함을 메시지로 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려면 매사 불화하고 갈등하고 다툼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불화와 갈등과 다툼이 해결되는 곳에 가 보면 누군가 용기 있게 십자가를 진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하인 중풍병자가 마침내 고침을 받게 됩니다. 그 하인 중풍병자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 중풍병자 하인이 고침 받은 것은 순전히 주인 백부장의 믿음과 용기와 수고 때문입니다.
이런 수고와 용기와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있는 곳에 이런 기적이 일어나고 화해가 이루어지며 회복이 일어납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오늘 이 시대의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믿/
⑷하인의 회복을 통하여 신앙의 본질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신앙의 삶은 회복의 삶입니다. /아멘!/ 예수께서 가신 곳마다 회복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가정이 회복되고, 몸이 회복되고, 말씀을 통해서 삶이 회복되었습니다. 눈먼 자들이 시력을 회복하였고, 앉은뱅이들이 회복되어 일어났습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멸망 받을 사람들이 천국의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모두 회복의 역사입니다. /할/ 여러분, 주님이 우리에게 그 회복의 사역을 하라고 하십니다. 오늘 회복되어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결론입니다. 백부장은 주님을 최고로 알고 믿었습니다. 이방인이지만 훌륭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주님은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는 분이라고 확실히 믿었습니다. 주님만이 절대자요, 주님만이 영원한 자요, 주님만이 만병의 치료 자시오, 주님만이 나에게 기쁨도 행복도 주시는 분이심을 믿었습니다.
백부장의 믿음은 '장교의 명령에 부하가 복종하고 주인의 명령에 종이 복종하는데 하물며 예수님의 명령을 누구라서 거스르겠느냐?' 이런 믿음입니다.
미국 '로버트 로우리' 목사님은 그의 찬송 시 343장에서 '울어도 못하네! 힘써도 못하네, 참아도 못하네, 그러나 믿으면 하겠네, 주 예수를 믿어서 그 은혜를 힘입고 오직 주께 나가면 영원 삶을 얻네'라고 찬양했습니다.
우리 모두 백부장의 믿음을 배우십시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가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할/아멘!/ (일 어버이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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