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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十字架)의 능력! (고전1:18/벧전2:24-25)

by 【고동엽】 2022. 2. 9.

십자가(十字架)의 능력! (고전1:18/벧전2:24-25)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기독교는 일 년 중 이번 주간이 가장 경건하고 엄숙하며 장엄하고 뜻이 있는 주간에 해당됩니다. 고난주간 첫날인 오늘은 종려주일 혹은 고난주일이라고 합니다. 2천 년 전 오늘 예수님은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을 하십니다. 그 때 군중들은 옷을 벗어서 길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왕으로, 메시아로, 열렬히 환영하며 환호했습니다. 후대에 와서 사람들은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종려주일이라고 불렀고, 초대교회에서는 이 날이 되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시가행진을 했다고 합니다.
둘째 날인 내일 월요일은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신 날 입니다. 거룩해야 할 성전에서 주님은 불결하고 속된 시장바닥과 같은 문란해진 성전의 모습을 보시고는 분노하시며 장사꾼들을 모두 내 보내시고 성전을 깨끗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날 죄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날입니다. 타락할 대로 타락해 버린 예루살렘의 도성, 그리고 그 보다 더 타락한 제사장들의 모습을 보시고는 그들에게 쏟으실 저주의 진노를 대신 나무에게 쏟아 부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둘째 날에 있었던 일입니다.
셋째날인 모레 화요일은 예루살렘 성을 내려다보시며 눈물을 흘리신 날 입니다. 앞으로 40년만 있으면 망해 버리고 말 이 도성의 앞날을 주님은 일찍 알고 계십니다. 그 날, 이 도성이 처참하게 무너져 내릴 그 때를 보시면서 그것도 모르고 오늘 흥청망청 살아가고 있는 저 우매한 민중들을 바라보시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결국 이 도성은 주후 70년에 로마의 디도장군에 의해서 처참하게 무너져 내려 110만 명이 불에 타 숨지고 도성은 산산 조각나는 수난을 겪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의 행렬을 따르면서 눈물짓던 여인들을 향해서 '나를 위해서 울지 말고 너와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고 타 이르셨습니다.
넷째 날인 수요일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모처럼 제자들과 함께 하루를 휴식하신 날 입니다. 그런데 그 날도 가룟유다는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예수를 팔기 위해서 흥정을 하고 다녔습니다.
다섯째 날인 목요일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날 입니다. 그래서 이 날을 세족목요일(洗足木曜日)이라고 부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아시고는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마음껏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고는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나누신 후에 주님은 제자들을 대리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기 위해서 올라가십니다. 이것이 다섯째 날에 있었던 일입니다.
여섯째 날인 금요일은 고난주간의 절정입니다. 이 날이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신 날 입니다. 이 날 예수님은 체포되어 가야바 법정에서 심문을 받으시고, 빌라도 법정에서 심문을 받으시고, 마침내는 군중들에게 맡겨져서 가시관을 쓰시고, 붉은 죄수복을 입으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에 가서 죽으십니다.
이 날이 기원 29년, 니산월, 15일, 금요일, 오전 9시에 못 박혀서 여섯 시간 동안 고생을 하시다가 오후 3시에 운명을 하심으로 예수님은 그 한 많은 인생을 마치셨습니다. 그래서 이 날을 '성금요일'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토요일은 안식일입니다. 모든 유대인들은 이 날은 쉬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금요일 저녁에 매장되어 토요일을 무덤에서 지내시고 제 3일 안식 후 첫날인 일요일 새벽에 부활하십니다. 모든 악과 사망권세를 꺾으시고 살아 나셔서 우리들에게 부활의 소망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다음 주일 새벽이 부활의 아침입니다. 그 후 이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날을 '주님의 날'로 선포하고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그래서 오늘 일요일이 주님의 날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아멘!/
이렇게 해서 우리는 기독교를 말할 때 십자가를 빼 놓을 수 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의 가장 큰 교리 중의 하나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우리 기독교에서 십자가를 빼어 버리면 속된 말로 불 꺼진 항구요, 물 없는 사막이 되어버립니다. 이 십자가의 사건은 우리가 날마다 들어도 감동이요, 감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할/
당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이 다 각기 달랐습니다. 예수님을 모함하고 미워하고 그래서 올무에 걸어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은 예수야말로 이단을 전파하고 유대교를 멸시했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심판을 받아 저주의 대상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생각했습니다.
로마인들은 예수님께서 군중을 선동해 독립사상을 고취했기 때문에 당연히 로마법에 저촉되어 심판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형벌을 당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헬라인들은 원래 예수님을 헬라 나라로 초청해 말씀을 듣기를 원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너무나 무모한 죽음이라고 탄식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와 여러분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세속적인 사람의 눈으로 바라보지 말고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아멘!/ ◀제목 소개!▶


▶하나님께서 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했습니까?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마음을 가다듬고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아멘!/

 

①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죄의 결과가 무엇인가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롬6: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이 죄의 삯을 예수님이 대신 진 것입니다. 사53:5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우리에게 죄가 들어왔고, 이 때문에 예수님은 모든 인류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짊어지시고 무서운 대가를 지불하셔야 했습니다. 아담이 죄를 범했을 때 벌거벗은 수치를 느낀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리고 벌거벗은 수치를 느끼며 온갖 고통을 다 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런 고통을 당하셨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조롱했고 버렸고 하나님조차 예수님을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 극한 고통 속에서 하늘을 향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조차 버림을 당하신 예수께서는 가장 처절한 저주의 대상이 되어 나무에 매달리셨습니다. 성경은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고 신21:23절에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죄의 결과가 무엇인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소위 죄는 시각적인 용어나, 윤리 도덕적인 용어가 아닙니다. 죄는 하나님 앞에 저주를 받고 내어 쫓김을 받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더라도 죄를 대신 짊어졌을 때는 처참하고 무자비하게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 죄입니다.
우리는 죄의 결과를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그처럼 처절한 고난을 당하시고 죄악 가운데서 우리를 건져 주셨는데 오늘날 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구원의 은총을 배척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배척하는 사람들은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서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 아들이라도 죄를 대신 짊어지셨을 때는 무참하게 십자가에 못 박으셨는데 하물며 그 아들의 사랑조차 배반하고 그 십자가의 은총을 배척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냥 놔두시겠습니까? 사13:8-9절을 보세요! '그들이 놀라며 괴로움과 슬픔에 잡혀서 임산한 여자 같이 고통하며 서로 보고 놀라며 얼굴은 불꽃같으리로다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 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임하여 땅을 황무케 하며 그 중에서 죄인을 멸하리니'
그들이 누굽니까? 심판 받을 자들입니다. 여러분 임신부의 고통을 아십니까? 얼마나 괴로우면 얼굴에 지옥 불이 타오른다고 했겠습니까? 역사의 종말이 오면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고함과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실 때 주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살아남을 사람들을 변화되어 약한 몸이 강한 몸으로, 추한 몸이 영화로운 몸으로, 죽을 몸이 신령한 몸을 입고 공중으로 들려 올라가 주와 함께 살게 됩니다. /할/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모든 숨은 죄의 비밀을 다 드러나게 하시고 이 땅을 천재지변으로 심판하시고 나아가서 이 땅의 거민 들을 7년 동안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7년의 처참한 환난이 이 땅을 황무지같이 만들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주님께서는 주의 성도들과 함께 오셔서 야곱의 후손을 중심으로 천년왕국을 세우십니다. 천년 왕궁 이후 무론 대소하고 죽은 자들이 다 부활해서 하나님의 백보좌 앞에 심판을 받고 생명 록에 기록되지 않은 모든 사람들은 마귀와 함께 불과 유황이 타는 못으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이 심판이 얼마나 처참하고 무서운 것인가를 아신 주님께서는 심판 받을 가롯유다를 향해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다면 제게 좋을 뻔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중요하게 깨달아야 할 부분은 '하나님의 심판이 죄에 대하여 얼마나 무섭게 임하는가를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할/ 죄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머리털 보다 더 많은 죄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다 담당하심으로 오늘날을 값없이 믿음으로 용서받고 구원받고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를 다 청산 받았습니다. /아멘!/ 이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믿/

 

②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당신의 그 크고 깊고 위대하신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쉽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분명히 모를 때가 있습니다.
헬라어에는 사랑이란 말이 여러 가지 단어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사랑에는 먼저 남녀간의 조건부 사랑인 에로스가 있습니다. 이성간에는 결혼을 조건으로 서로 사랑하다가 사랑이 깊어지면 결혼합니다. 그러나 그 조건이 깨어지면 이혼해 버리고 남남이 되어 버립니다.
또한 친구간에 사랑인 필레오가 있습니다. 이것은 이기적인 사랑입니다. 아무리 친구가 좋고 사랑한다고 할지라도 내가 있고 난 다음에 친구가 있지 나를 희생하면서까지 친구만 위하는 사랑은 없습니다. 그 때문에 필레오 사랑도 깨어지기 쉬운 이기적인 사랑입니다.
그 다음 부자간의 사랑인 스톨케가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최고최대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부모의 사랑이란 자기의 친자녀에게만 국한되는 사랑이지, 다른 사람에게까지 베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부모의 사랑이 좋고 아름다운 것이라도 이는 한정된 사랑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말씀하신 그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요? 그것은 에로스, 필레오, 스톨케가 아닌 아가페 사랑입니다. /할/ 아가페는 무조건적인 사랑이요, 무한정한 사랑이요, 일방적인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아가페로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이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계산적이거나 타산적이 아닌 사랑입니다. 자기 몸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우리를 위해 몽땅 희생하신 사랑입니다. /아멘!/
우리는 이 아가페 사랑에 은총을 입고 있기에,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하며 버림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죄지은 그대로 빈손 든 그대로 주 앞에 무릎 꿇고 회개하면 다 용서해 주시고 사랑해 주시십니다. /믿/아멘!/ 롬5:8절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할/
말로써 우리가 상대방을 사랑한다는 것은 아주 쉽게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런 희생의 대가를 지불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실로 사랑한다면 희생의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요15:13절에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죄로 원수가 된 우리들을 위해 그 아들을 보내시어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도저히 인간적으로 측량할 수가 없는 사랑입니다.
사람들에게 금이냐, 옥이냐 하고 기른 외아들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만약 동네에 위기에 처해 누구 한사람의 생명을 제물로 바쳐야 온 동네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다고 할 때 어떤 사람이 선뜻 외아들을 내 놓겠습니까? 저도 자식이 넷이지만 못 내놓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도 천지와 만물을 그를 통해 지으신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내어 주시되 그것도 영광스럽게 내어주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제물로 내어주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바로 죄가 되신 것입니다. 고후5:21절에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몸 찢고 피 흘리고 그 영혼을 쏟아 죽으심으로 우리를 대속하셨으니 이 십자가는 하나님의 그 크고 깊고 위대하신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표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멘!/
그 십자가 사랑 때문에 오늘날 불의한 죄를 짓고 버림을 받아야 할 저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의 일방적인 값없이 주시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죄 씻음을 받고 용서함을 받고 의롭다 함을 입게 된 것입니다. /믿/ 그러므로 살인자도 창녀도, 사기꾼도, 변화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의로운 사람으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할/

 

③십자가의 고난은 인간의 가치를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자기를 과소평가하고 있습니다. '나 같은 인간이 살아서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나는 이 세상에서도 소외당하고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고 오고 갈 데 없는 인간이 살아서 무엇을 하겠나? 죽어버려야지!' 이렇게 자신들을 포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우리 한사람, 한사람의 가치가 얼마나 큰 가를 보여주셨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이라도 그 돈을 투자할 때는 그 상품과 그 물건의 가치를 보고서 투자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세상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의 형벌을 주신 것을 우리의 영혼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친히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손수 당신의 생기를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그 때문에 사람은 다른 만물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피조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분신이 바로 우리 인간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천사보다 높고 자연만물보다 귀합니다. 사람의 가치를 금전으로 따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은 사람들이 타락해서 죽어가기 때문에 우리를 건지시기 위해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아 피 흘려 죽기까지 하시고, 대가를 지불하고 우리를 사실 정도로 우리는 대단히 귀한 존재입니다. /할/
또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영생을 주시고 성령을 주시고 생명 록에 기록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까지 삼으셔서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을 상속으로 주실 하나님의 귀한 존재임을 깨달아 알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 벧전2:9절에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우리는 불멸의 존재입니다. 이 세상 만물은 결국 다 낡아지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죽으면 겉 사람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지만 그러나 속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늘나라 영광 중에 거하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만이지' 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눅16장은 부자와 나사로의 죽음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부자는 매일같이 찰나적인 세속을 취하다가 죽으매 음부에 내려가 불 가운데서 고통 중에 아브라함을 쳐다보며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사로를 보내셔서 그 손가락으로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이 부자 대문 앞에서 구걸하던 나사로는 비록 세상에서는 거지로 살면서 천대와 멸시를 받았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며 믿음으로 살았기에 천사의 인도를 받아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낙원에 들어갔습니다.
성경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가 똑같이 육신의 세계를 떠나 영원의 세계에서 계속 존속했다.'고 밝혔습니다. 이 예수님 말씀 그대로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구원을 받지 못하면 음부로 내려갈 것이요, 예수 믿고 구원받은 자들은 천국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④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용서의 대가를 보여주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고난 당하신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저와 여러분을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는 값없이 되지 않고 무서운 대가를 지불해야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를 핍박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용서에 대하여 비난합니다. '기독교는 불륜의 종교요 부도덕의 종교다. 간음한 사람도 살인한 사람도, 음란한 사람도, 그밖에 어떤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회개만 하면 용서해 준다고 하니 부도덕한 종교가 아니고 무엇이냐?'고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무지해서,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죄의 용서를 위해 십자가에서 그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아무런 대가없이 그냥 부도덕을 용서하실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날 성전에서 말씀을 증거하실 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예수님께 끌고 와서 '선생이여,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이러한 여인은 돌로 치라고 했는데 선생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은 율법보다 더 귀한 것이 사람의 생명인줄 아셨기 때문에 이 여인을 살리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친히 허리를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글을 쓰시다가 일어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자 살기 등등했던 사람들이 두려워 다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다 떠났을 때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향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최선을 다해 죄에서 놓아주고 생명을 건져주신 예수께서 부도덕을 조장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은 이 간음한 여인 뿐 아니라 남편을 다섯이나 바꾼 여인의 음란죄도, 바라바의 살인죄도 다 짊어지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모든 죄도 남김없이 용서해 주시기 위해 당신께서 우리의 죄도 짊어지셨습니다.
예수님은 골고다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며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여기에서 이 잔은 우리의 더럽고 추악한 죄가 다 담겨져 있는 잔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잔을 마시지 아니하시면 모든 인류는 죄로 죽어야 합니다. 주님이 이 잔을 마실 때 해도 달도 빛을 내지 아니하고 산천초목도 바다도 울고 떨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잔을 드실 때 하나님께서도 외면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처절하게 절규하셨습니다. 왜 외면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시는데 이렇게 무서운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아멘!/
만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지 않았더라면 저와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헛되이 살다가 영원한 지옥 불에서 영원히 고통 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이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우리를 향해 손을 내미시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또한 사55:1절에서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하셨습니다. /할/

이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행인과 나그네길인 이 세상 길을 걸어가는 동안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섬기며, 또한 전도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부흥시키어 하늘나라의 영원한 면류관을 소유 받는 참 행복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

 

⑤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어떤 십자가인가? 대속의 십자가입니다.
마20:28절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이니라' 또한 딤전2:5-6절에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대속)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
▶대속이 무엇인가? 대속이란, 빚을 갚지 못해 종이 된 자에게 그 빚을 대신 갚아 주고 종 된 상태에서 해방시켜주는 것을 말합니다. 옛날 로마에서는 종이 진 빚을 갚아주고 자신의 종으로 삼았습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은 빚을 지고 갚지 못하면 그 집의 종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희년이 되면 종을 모두 풀어주는 법이 있습니다. 희년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칠년 째는 안식년입니다.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난 50년째 되는 해가 희년입니다.
그 해는 팔렸던 토지는 원 소유주에게로 돌아가고, 노예는 모두 해방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단에게 매여 죄의 종이 된 인간을 위해 죄 없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처형되어 그 죗값을 대신 치르신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통해서만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데 이것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합당한 화목제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대속의 목적입니다. 벧전2:23-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죄에 대해서 죽은 것입니다.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우리로 하여금 의에 대하여 살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는 구원받을 육체가 없습니다(갈2:16). 그러나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게 여겨 주십니다.
즉 인간은 불의하지만, 인간의 의로서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아멘!/ 그러므로 우리의 옛사람은 십자가에서 주와 함께 죽었고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므로 의인의 옷을 입은 새사람으로 살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갈2: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믿는 자들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저가 채찍에 맞으므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시103:3절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대표적인 두 가지 은택이 나오는데 그 첫째가 죄 사함의 은택이며, 둘째가 병 고침의 은택입니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모든 병을 고치시며' /할/
병 고침은 하나님의 구속사업의 계획안에 들어 있습니다. 마8:16-17절에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주님은 믿는 자들을 더 이상 방황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알기 전에는 길 잃은 가엾은 양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제는 영혼의 목자 되신 주님 앞으로 돌아왔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에게 큰 위로와 평안과 희망을 주시고 천국의 방향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할/

 

⑥주님의 대속의 십자가는 창세기에서부터 예표된 사건입니다.
아름다운 에덴동산에서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죄짓는 일을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일이었습니다.
창2:15절 이하에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주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창3:6절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그래서 그 좋은 에덴도 상실하고 그 좋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타락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하고 뺏어버리게 합니다. 그런데 그 열매를 먹으면 아담 부부는 죽어야 합니다. 그것은 이미 그렇게 명령되어진 사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찾아오시더니 아담부부를 죽이지 않고 죄 없는 양을 대신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 양의 가죽으로 아담부부의 옷을 해 입히고 그들을 용서하십니다.
창3:21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동기를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아담부부를 대신해서 어린양이 죽는 사건입니다. 여기서 벌써 대속의 죽음이 나오고, 여기서 벌써 대속의 제물이 등장합니다. 양이 대신 죽음으로서 아담 부부가 살아났습니다. 이것을 대속의 제물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벌써 십자가의 대속의 모형이 나온 것입니다. 여기 죄 없이 죽은 어린양은 죄 없이 죽은 예수의 모형입니다. /할/

 

⑦레위기에도 이미 십자가의 모형인 그림자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매년 7월 10일을 속죄일로 지켰습니다. 그 날 백성들은 일 년 동안의 죄를 속죄 받는 날입니다. 그 당시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날 두 마리의 염소를 제물로 드렸습니다. 한 마리는 잡아서 제물로 성전에 바쳤습니다. 그리고 염소의 피는 제사장에 의해서 속죄 소에 뿌려지고 고기는 제물로 드려졌습니다. 그때 대제사장은 지성소 깊숙이 들어가서 속죄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밖에서 기다렸습니다. 그때 백성들은 밖에서 초 긴장상태에서 기다렸습니다. 왜냐하면 지성소 안에서 제사 드리던 제사장들이 가끔씩 죽어 나오는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사장의 옷에는 방울을 달고 끈을 달아서 속죄 소에 들여보냈습니다.
지성소 속에서 제사지내느라고 몸을 움직일 때마다 방울 소리가 나면 밖에서도 안심이었습니다. 그런데 방울 소리가 나지 않으면 안에서 제사장이 죽은 것이기 때문에 옷에 매달은 줄을 당겨서 끌어냈습니다. 그 지성소 안에는 대제사장 한사람만 들어갈 수 있고 누구도 들어갈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제사장이 바친 제물을 하나님이 받으시면 지성소 안에 빛나는 광채가 비취었습니다. 그 빛을 '쉐키나 광채'라고 합니다. 백성들이 밖에서 기다리다가 지성소 안에서 환한 쉐키나 광채가 나타나면 '우리가 드린 제물을 받으셨구나'하고 안심하고 한 해 동안 죄 사함을 받음을 감사하면서 밖에서 축제가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또 한 마리의 염소는 '아사셀 염소'라고 부릅니다. 이 염소의 머리에 제사장이 손을 안수를 합니다. 그때 안수는 모든 백성들의 죄를 아뢰며 그 죄들을 염소의 머리에 덮어씌우는 안수입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이 염소가 수난의 행보를 시작합니다.
사람들의 모든 죄를 짊어진 염소는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예루살렘 거리를 통과해서 감람산을 지나 동쪽 요단강까지 끌려갑니다. 그리고 동쪽 요단강 넘어 광야에 버려집니다. 이 염소가 예루살렘 거리를 가는 동안 연도에 백성들이 모여 지나가는 어린 염소에게 온갖 저주를 퍼붓습니다. 침을 뱉고 돌팔매질을 하고 털을 뽑고 회초리로 때려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게 합니다.
그렇게 기진한 염소를 끌고 요단강까지 가서 마침내 강 건너 광야에 버립니다. 그러면 이 염소가 광야에서 기진하여 죽던지 피 냄새를 맡고 달려온 맹수들에게 찢겨져서 죽습니다. 그때부터 예루살렘에서는 죄 사함 받음의 축제가 시작됩니다. 이렇게 해서 바쳐진 염소를 가리켜서 '아사셀 염소, 혹은 쉐키나 염소'라고 부릅니다.
레16:7절에 '또 그 두 염소를 가지고 회막문 여호와 앞에 두고 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뽑되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하고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할지며' 또 10절에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뽑은 염소는 산채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 지니라' 그리고 21절에 '아론은 그의 두 손으로 살아있는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아뢰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지니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접근하기 어려운 땅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 찌니라' /할/
여기에서도 벌써 장차 나타날 십자가에서 죽으실 예수의 모형이 나타난 것입니다. 여러분, 이 염소가 예루살렘 연도를 지날 때 뭇 사람들로부터 채이고 찢기고 상처 입은 것처럼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예루살렘 거리를 지날 때 뭇사람들이 침을 뱉습니다. 채찍으로 때렸습니다. 돌팔매질을 했습니다. 그래서 온몸은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그 모습을 이미 수세기 전인 레위기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마침내 골고다에 버려져서 아사셀 염소처럼 피투성이가 되어 죽으십니다. 그러니 이 구원의 도리, 십자가의 도가 얼마나 심오한 사상이고 진리입니까? 이 구원의 정신이 성경 창-계시록까지 이렇게 흐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그렇게 희생시키면서 까지 세상을 구원하실 뜻을 이미 창세기 때부터 계획을 세우신 것입니다.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는 평신도입니다. 마가는 줄곧 예수님의 행보를 눈여겨보다가 고난 받는 주님의 모습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고 주님의 고난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썼습니다. 왜 고난에 초점을 맞추었는가 하면 자신들이 당시 로마로부터 핍박을 받고 이었기 때문인데 마가는 주님이 핍박받는 모습을 보니까 자신들이 지금 받고 있는 핍박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마가는 예수님의 고난과 박해받는 모습을 강조해서 마가복음을 쓰게 됩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의 주제가 고난 받는 예수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고난을 주제로 쓰인 마가복음을 읽고 가장 감동을 받고 은혜를 받은 사람이 가장 위대한 작곡가라고 하는 '헨델'입니다. 이 헨델이 마가복음을 탐독하다가 영감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마침내 헨델이 그 장엄한 메시아를 작곡하게 됩니다.
오늘 사람들은 헨델의 메시아를 연주할 때 헨델이 그 곡을 작곡한 의도와 동기를 모릅니다. 그래서 메시아를 연주할 때 너무 길고 지루하니까 재미없는 곡을 몇 개 뽑아내는데 대부분 비통한 곡들이 들어있는 고난부분들입니다. 그리고 44번 '할렐루야'는 꼭 넣어 연주하는데 사람들은 그 곡이 메시아의 하이라이트인줄 알고 그 곡이 연주될 때는 반드시 일어납니다. 이것은 이 곡을 작곡한 의도를 잘 이해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헨델의 메시아 곡의 하이라이트는 44번이 아니고 전체 52번 중 이사야서 53장을 배경으로 한 51번 '죽임 당하신 어린양'이 하이라이트입니다.
그 곡이 연주될 때 모두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렇게 오해하는 이유는 작곡자의 의도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작곡자는 이 곡을 작곡할 때 호화스런 작곡 실에서 작곡된 것이 아니고 기도 실에서 금식하며 기도하며 예수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이 곡을 만들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메시아의 곡을 들을 때 감동이 오는 것입니다. /할/

 

⑧예수님은 그 구속의 십자가를 지시고도 운명하시면서 감사기도를 하십니다.
요19:30절을 보면 예수님은 고난의 길을 다 가고 십자가에서 6시간동안 신음하시다가 마침내 운명하십니다. 사람들은 마지막 죽을 때 모습이 가지각색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남기는 말 한마디도 가지각색입니다. 예수님은 6시간 동안 십자가에 매달려 고난 받으시다가 마침내 운명하십니다.
눅23:46절에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그런데 요19:30절에 '예수께서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여기 '다 이루었다'고 한 말은 아주 '만족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아버지께서 잘 감당하고 마치도록 도와주심을 감사합니다.'라는 표현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감사의 기도입니다. 진정한 감사는 극한 한계상황에서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감사를 배워야 합니다. /아멘!/

 

⑨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고전1:18절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할/ 여기 능력이라는 말로 '뒤나미스'인데 이 말은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폭탄과 같다'는 말입니다. 즉 반석이라도 폭발시켜 산산조각을 내는 엄청난 힘, 즉 초자연적인 능력을 의미합니다.
다이너마이트는 산도 부수고 바위도 타작하듯이 깨뜨려 버립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에 수많은 위인과 성인과 철인들이 천성 가는 길을 뚫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으나 그들의 수고는 헛수고였습니다. 성인 현인들의 수고는 호미 한 자루, 괭이질, 삽질 하나에 불과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십자가의 다이너마이트만이 천국 가는 고속도로를 건설하셨습니다. /믿/

그렇습니다. ▶죄 사함의 능력입니다! ▶신유의 능력입니다. ▶변화의 능력입니다. ▶구원의 능력입니다. ▶부활의 능력입니다. /아멘!/할/ (종려주일 설교)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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