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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크리스천의 승리! (고후 4:7-11)

by 【고동엽】 2022. 2. 9.

크리스천의 승리! (고후 4:7-11)

 

눅5장에 보면, 베드로가 갈릴리 바다에 나아가서 밤새도록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았지만 그 밤에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본래 배트랑 급 어부였습니다. 그는 고기를 잡는 기술도 대단합니다. 그가 그 날 밤 처음으로 그물을 던진 것도 아닙니다. 그는 밤이면 밤마다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아온 경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밤에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실패자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그 밤에 그가 노력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노력도 했습니다. 말하자면 베드로는 자신의 기술과 경험과 노력, 이 세 가지를 총동원해서 고기를 잡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도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배트랑 급 베드로가 밤새도록 노력했지만, 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는 것 그 자체가 기적입니다. 날이 밝아오자 그는 허탈한 마음을 달래면서 그물을 깨끗하게 씻어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실패자인 베드로에게 그 때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그의 배에서 심방예배를 드리시고 나서 말씀을 주시기를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그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린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그 뿐만이 아닙니다. 7절에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할/
전날의 한 숨이 변해서 만선의 기쁨이 되었습니다. 또 불경기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네 이웃에게도 경기회복을 주었습니다. 두 배에 가득 채워지는 만선의 축복 자가 되었습니다. /할/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 실패를 보상하고도 남는 큰 성공을 거두게 된 것입니다. /아멘!/ 여러분! 기독교는 실패를 바꿔 승리자로, 성공 자로 만드는 종교입니다. /믿/
오늘 우리도 말씀을 통해서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만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제시해 주시는 삶의 방향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순종하겠다는 결단이 이 시간에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를 다 해결 받고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라는 만선의 축복을 받아 우리의 삶이 더욱더 풍요롭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제목 소개!▶

 

사람들은 인생이 강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참으로 약한 존재입니다. 모두가 다 마음의 문을 열고 숨결을 들어보면, 그 마음속에 절망의 몸부림이 있고, 가슴마다 탄식이 서려있는 것을 봅니다. 인간은 '상한 갈대, 꺼져 가는 심지' 같은 존재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인생의 연약함을 질그릇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 질그릇입니까? 하나님이 인간을 흙으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한 사람을 아담이라고 했습니다. 아담이라는 말은 '흙이요, 먼지요, 티끌'이라는 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인간의 육신은 흙에서 왔고, 영혼은 하늘에서 왔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죽으면 육체는 흙으로 가고 영혼은 하나님나라로 갑니다. 어떤 사람은 인간이 흙이라고 하면 '어디 사람이 흙이냐?'고 반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몰라서 그런 소리를 합니다. 인생은 흙에서 왔기에 우리는 질그릇과 같은 존재요 깨어질 가능성이 있는 존재입니다.
그렇게 장담했던 내 건강이 어느 날 갑자기 질그릇처럼 깨어져버립니다. 그렇게 든든하고 믿음직스럽던 내 남편이, 내 아내가 어느 날 갑자기 질그릇처럼 깨어져버렸습니다. 그렇게 든든하던 내 사업체가 갑자기 질그릇처럼 깨어졌습니다. 그렇게 확고했던 내 위치가 어느 날 갑자기 질그릇처럼 깨어져버렸습니다. 그 큰 꿈과 영롱한 은색무지개의 찬란한 비전이 어느 날 갑자기 질그릇처럼 째어져 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깨어지는 존재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 질그릇에 불과합니다. 평범하게 흙으로 만든 이 질그릇은 흙의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쉽게 깨어집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도 바울은 인간은 질그릇이 분명한데 그 질그릇 속에 보배를 가졌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오늘 우리가 이 본문 속에서 큰 위로가 되고 용기가 솟아납니다. 그렇다면 질그릇 속에 담긴 보배가 무엇인가? 국어사전에 보면 보배란 ⑴금은, 주옥 등의 귀중한 물건. ⑵매우 귀중한 사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로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본문에서 말하는 보배는 무엇을 말합니까? 예수님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모셨다는 말이요, 성령님을 모셨다는 말이요, 진리를 담았다는 말입니다. /할/ 한마디로 질그릇과 같은 연약한 인생의 심령 속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가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믿음이 보배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가는 삶, 이것이 질그릇에 담긴 보배입니다. 이 보배를 담은 질그릇은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믿/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 귀한 보배를 외면합니까? 무지해서 그렇습니다.
사실 가진 자나 없는 자나 배운 자나 못 배운 자나 모두 근심 없이 기쁨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또 인간에게 기쁘게 살 권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근심하지 않고 한 생애를 살 수 있습니까?
그것은 무거운 짐을 버려야만 가능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 인생 길에 두 가지 무거운 짐이 있다고 가리킵니다. 하나는 죄의 짐이요, 또 하나는 걱정과 근심의 짐입니다. 그런데 죄의 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으로만 처리할 수 있고, 근심과 걱정의 짐은 성령의 능력으로만 정복할 수 있습니다. /아멘!/
이 말씀은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나타나는 삶에 모습입니다. 여러분, 질그릇 같은 내 인생 속에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게 되면 분명히 보기에는 질그릇 같은 존재인데 시간과 공간을 제한을 받고 있는데도 그 속에 자유하는 삶의 감격이 있고, 현실적인 패배 속에서도 영원한 승리를 체험하게 되며 가난하면서도 부요함을 감사하며, 슬픈 가운데 있으면서도 기뻐할 미래를 바라보게 됩니다. /할/
고후6:8-10절의 사도바울의 고백을 들어보겠습니다.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자로다'
그런데 사실은 보배와 질그릇은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사실 질그릇으로는 보배를 담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보배가 질그릇에 담겨졌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모셨기 때문에 담겨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이 사실은 몇 가지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신분의 변화입니다. 그릇이란 그릇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는 그 속에 담겨지는 내용물이 더 중요합니다. 그릇은 내용물에 따라서 신분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질그릇이지만 그 속에 금이 담기면 금 그릇이라고 부릅니다.
▶가치의 변화입니다. 신분이 변함과 동시적으로 가치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질그릇으로만 있을 때는 단돈 몇 푼에 거래되는 것이 그 속에 보배가 담기면 엄청난 고가로 흥정이 됩니다.
▶용도의 변화입니다. 그릇은 속에 든 내용물에 따라서 놓일 장소가 달라집니다. 오물이나 쓰레기를 담으면 뜰이나 구석진 곳에 버림을 받습니다. 그러나 보배가 담기면 안방이나 장롱 속으로 들어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보잘 것 없는 질그릇 같은 존재이나 그 속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우리는 천국의 시민이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질그릇 속에 담긴 보배는 주인이 담아 둔 것입니다. 질그릇 자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질그릇은 보배를 통해서 덤으로 받는 은총입니다. 그러므로 질그릇된 우리의 고백이 있다고 하면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고전15:10)이라는 말 외에는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사도바울의 삶 속에 역사하신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이 오늘 저와 여러분 안에 살아 역사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
▶항상 싱글벙글하며 살아가는 넝마주이 아저씨가 있었습니다. 어려운 형편에서도 늘 기뻐하며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주위 사람들이 볼 때 너무나 이상합니다.
'아니, 당신 가진 것이라곤 넝마 바구니 하나 뿐인 사람이 뭐가 좋아서 그렇게 싱글벙글 하오?' 넝마주이 아저씨가 대답합니다. '나에겐 넝마 바구니말고도 많은 것이 있답니다.' ⑴나에게는 영생이 있습니다. ⑵크고 아름다운 집이 천국에 있고요, ⑶하늘로부터 매일매일 내려오는 평강이 있고, ⑷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이 있고요, ⑸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요, ⑹나만을 사랑하는 아내가 있고요, ⑺부모에게 순종하는 건강한 자녀들이 있고요, ⑻건강한 몸이 있어 열심히 일할 수 있고요, ⑼영원히 녹슬지 않는 생명의 면류관이 있고요, ⑽그리고 모든 것을 풍족하게 채워주시는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갑니다. /할/ 이런 사람이 부자입니다. 그렇습니다. 질그릇 속에 보배가 담김 그리스도인들은 승리자의 삶을 살수가 있습니다. /아멘!/

 

①인간의 본질(질그릇)을 바로 알고 살아야 겸손해 집니다(7).


⑴사람은 진흙으로 지음 받은 질그릇입니다.

창2:7절에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성경은 사람을 가리켜 진흙으로 만들어지는 질그릇이라고 묘사합니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사64:8). '사람과 짐승이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 가니라'(전3:20).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이 그릇은 우리니'(롬9:21,24).
'이 그릇은 우리니' 사람은 진흙이요 질그릇입니다. 사람은 흙으로 지음을 받았고 흙을 밟으며 흙과 더불어 살다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도록 지음을 받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렘18:6절에 보면, '우리는 길가에 버려진 진흙이 아니고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진흙'입니다. 하나님은 진흙인 우리들을 손안에 담으시고 우리들을 아름답고 쓸모 있는 그릇들로 만드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사람 하나 하나가 잉태되는 순간부터 아름답고 쓸모 있는 그릇으로 만들어 가시는 토기장이이십니다. 시인의 고백이 잇습니다. 시139:13절에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할/
우리는 잉태되는 순간부터, 태어나는 순간부터 특이 주님을 믿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아름답고 쓸모 있는 그릇들로 지어져 가는 진흙 덩이들입니다.
모세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아름답고 쓸모 있는 그릇으로 지어져 갔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나 사울은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부터 아름답고 쓸모 있는 그릇들로 지어져 갔습니다. 사람은 진흙이요 질그릇입니다. 하나님의 손안에서 아름답고 쓸모 있는 그릇들로 지어져 가는 질그릇들입니다.


⑵우리는 질그릇입니다. 그런데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입니다.

어떤 그릇은 인생의 초기에 깨어지고 어떤 그릇은 인생의 중반기에 깨어지고 어떤 그릇은 인생의 말기에 깨어집니다. ▶인격이 깨어지기도 합니다. ▶신앙이 깨어지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다가 중도에 부서지고 깨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일성수도 포기하고 예배생활도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도덕이 깨어지기도 합니다. 다윗의 경우는 성적 순결히 깨어졌습니다. ▶건강이 깨어지기도 합니다. 에바브로디도의 경우는 불치의 병으로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사람은 깨어질 수밖에 없는 지극히 연약한 질그릇들입니다. 인격도, 신앙도, 도덕도, 건강도 쉽게 깨어지는 질그릇 같은 존재가 사람입니다. 이 점을 바로 알고 살아야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아멘!/


⑶그러나 사람은 깨어지고 마는 존재로 끝나지 않습니다. 한번 실수했다고 해서 아주 넘어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한번 불치의 병에 걸렸다고 해서 아주 쓰러지고 마는 존재가 아닙니다. 한번 망했다고 아주 망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할/ 에레미아 선지자가 강조하는 것은 질그릇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비록 깨어지고 부서질 수는 있으나 그렇다고 그것이 끝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토기장이 되시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손안에 있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시지 않고 붙잡아 주십니다. 다시 아름답고 쓸모 있는 그릇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깨어진 질그릇이 회개하는 마음으로, 다윗처럼, 베드로처럼 하나님께 나와서 회복의 은총을 간절히 바라고 기다리면 마침내 회복의 은총을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
바울은 성도는 고귀한 보배를 담은 특별한 질그릇이라고 했습니다. 그 보배는 사람은 지극히 연약한 질그릇이지만 가장 귀한 보배인 예수님의 생명을 담은 질그릇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생명이 자기 안에서 움직이는 것을 체험할 때마다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이 넘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할/
이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을 때 속에서 꿈틀거릴 때 세상의 어떤 것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능력의 심히 큰 것이 자기 안에 잇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어떤 세력도 바울을 넘어뜨릴 수가 없었습니다. 환난과 핍박과 죽음의 세력도 바울을 넘어뜨릴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보배를 담은 질그릇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담은 보배입니다. 그 생명이 있는 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버린바 되지 않고 망하지 않는 보배로운 그릇임을 감사하며 담대하게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할/


⑷질그릇은 관리를 잘 관리하고 보관해야 합니다.

▶건강도 잘 관리해야 합니다. 병들면 아무리 충성심이 강하다고 해도 충성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건강을 잘 지켜야 합니다. ▶인격도 잘 관리해야 합니다. 윤리와 도덕면에서, 사회생활에서 죄와 짝하지 말아야 하고 불의와도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도 잘 관리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이 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의 대적 사탄 마귀는 우리들을 넘어뜨리려고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벧전5:8).
그런데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가끔씩 믿음이 깨어진 사람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깨어진 그릇은 어떤 사람입니까? 낙심한자들입니다. 그리고 불평과 불만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말만하고 봉사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깨어진 그릇이 버림을 받듯이, 장차 마지막 심판 때에 주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7:21-23절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얼마나 무섭습니까? 신앙이 깨어지면 버림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신앙도 잘 관리하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②내 안에 보배가 되신 예수가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지켜주십니다(8-9).


⑴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습니다.

오해 마십시오. 성경은 예수 믿는다고 세상에 당하는 문제를 만나지 않는다고 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는 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갖가지의 우겨 싸임을 당합니다.
어떤 때는 환난이 우겨 싸고, 어떤 때는 원수가 우겨 싸고, 어떤 때는 고난이 사방으로 우겨 쌉니다. 어떤 때는 질병이 우겨 쌉니다. 어떤 때는 물질이 없는 것으로 우겨 쌈을 당합니다. 이 모든 것을 묶으면 세상은 문제덩어리입니다.
여기서 '싸이다'란 말은 '좁은'이란 말과 '장소'란 말의 복합어로서 사방이란 말은 완전히 포위된 상태로서 한곳도 희망을 걸 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를 말하기도 하고, '우겨 쌈을 당하여도'는 원래 '즙을 짜기 위해 포도주를 짖누르다.'는 뜻입니다. 아주 어그러지는 고통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환란과 역경 때문에 사면은 온통 둘러싸인 체 몸부림을 쳤습니까? 어떤 사람은 슬픔에 싸이기도 하고 낭패와 실망에 싸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빚 독촉에 사방이 막히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달랑달랑한 사업의 밑천 때문에 이리 뛰고 저리 뜁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어떤 긍지에 몰려도 빠져나갈 길이 없습니다.
고전10:13절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할/
절벽입니까? 깜깜합니까? 서면초가에 꽁꽁 묶였습니까? 환경을 바라보고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며 믿음의 방법을 찾으십시오,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피할 길을 주십니다. 기도하면 열릴 줄 믿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아멘!/
신앙의 사람들은 실패와 함께 성장한다는 아주 쉬운 영적인 원리를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성도는 온통 죄악으로 둘러싸여도 싸이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죄악의 물결이 파도처럼 넘쳐도 죄악의 물결에 싸이지 않는 삶, 이것이 올바른 성도의 삶입니다.
요셉은 질그릇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담았기에 보디발 아내의 달콤한 유혹이 그를 둘러쌌지만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하면서 도망갔습니다.
살아있는 물고기는 물 속에 있어도 짠물이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죽은 고기 뱃속에는 들어갑니다. 죽은 신앙은 죄가 들어갑니다. 마찬가지로 그 어떤 인간도 질그릇 자체로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다만 질그릇 속에 담긴 보배를 통하여 이길 수가 있습니다.
또 원수가 우리를 둘러칠지라도 싸이지 않습니다. 다니엘을 보십시오, 그를 시기하는 방백들은 다니엘을 없애려는 계략으로 왕 외에 다른 신에게 구하거나 숭배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넘기로 했습니다. 천하에 이런 엉터리 명령을 만들어 전국에 발표했습니다.
다니엘은 온 나라가 원수들을 둘러싸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질그릇에 보배를 가졌기에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기도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사자 굴에 던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질그릇 속에 보배의 능력을 사자 굴을 천사 굴로 바꿔놓았습니다.
엘리사가 도단성에서 아람군대에게 포위되었을 때가 사면초가입니다. 왕하6장에 엘리사가 도단성에 그 종 게하시와 함께 있는데 아람 왕이 이 소식을 듣고 자기를 괴롭힌 엘리사를 잡으려고 온 군대를 다 보내 도단성을 에워싸게 했습니다. 이 사실을 밤중에 게하시가 나와서 보고 놀라 그 주인 엘리사에게 나아와 고하게 됩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전혀 놀라지 않고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여유 있는 표정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두려워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는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왕하6:16)고 하면서 '하나님 이 게하시의 눈을 열어 보게 하여 주옵소서' 엘리사의 기도가 끝나자마자 게하시의 눈이 열렸습니다. 게하시는 영의 눈이 열려 하늘에 수많은 불 말과 불 병거가 엘리사를 둘러 진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엘리사가 다시 기도하여 아람군대들의 눈을 멀게 하니 그들이 앞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아람 군대가 엘리사를 잡으려고 도단을 에워 쌓지만 하나님의 크신 능력은 오히려 그들로 엘리사에게 잡히도록 하여 모두 사마리아 성으로 끌려가게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질그릇 같은 우리에게 임하신 참 보배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면 하나님의 엄청난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하시므로 마귀의 에워쌈을 능히 물리칠 수 있습니다.
요16:33절에 우리 예수님이 우리를 향하여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얼마나 멋있는 말씀입니까? 마딘 루터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무릎을 치며 외쳤습니다. '오!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격려이며 보상인가? 이런 말씀이야말로 예루살렘에서 로마까지 무릎을 꿇고 기어가면서라도 전해야 할 가치 있는 말씀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믿고 의지한 사람은 세상을 이기신 주님 때문에 담대하게 도전하고 대처할 수 있습니다.
자살하는 사람들 대부분의 동기는 이젠 더 이상 길이 없다는 절망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처절한 실패를 딛고 일어서서 성공한 사람들은 그래도 '길은 있다.'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할/ '내가 세상을 이겼느니라' 이 선포는 세상에 있는 환난, 시험, 고통, 아픔과 사탄이 권세까지 다 이겼다는 말씀입니다. /믿/ 그리고 놀라운 것은 내가 세상을 이겼으니 너희는 담대하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주님이 세상을 이겼는데 왜 내가 좋아하고 담대해야 합니까? 그것은 세상을 온통 이기신 주님이 지금 나를 지키시고 이기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⑵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치 않습니다.

인생살이가 순풍에 돛단배처럼 평탄한 것만은 아닙니다. 어려움도 있고 장애물도 가로막힐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 세상 사람들은 술병을 들어 마시거나 약병을 들어 마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신앙 인은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여러분, 성도의 내일은 오늘과 다릅니다. 하나님은 한마디로 절망하는 오늘과는 전혀 다는 내일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믿/ 그래서 성도의 내일은 오늘과 다릅니다. 창1장과 2장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장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물고기 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공중의 새,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은 인간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창3장으로 넘어가면서 분위기가 캄캄한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으스스합니다. 마귀의 유혹과 그 유혹에 넘어간 아담 하와의 범죄로 하나님의 저주가 벼락같이 임합니다. 모두가 절망이요, 저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늘과 다른 내일을 약속해 주십니다. 창3:15절에서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가 탄생하여 마귀를 멸망시킬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그 후부터 하나님께서는 어제나 오늘과 다른 내일을 약속하셨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40년 간 그 고통스러운 광야를 행진할 수 있었던 강력한 힘을 오늘과 다른 내일이 있다는 소망 때문입니다. 내일은 만나가 내리고 내일은 메추라기가 내리며 내일은 젓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보이기에 지긋지긋한 오늘을 참게 만드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아멘입니까?/
이스라엘 역사가 우리 신앙 인들의 모토가 됩니다. 강대국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몹시 괴롭혔습니다. 그 후 앗수르가 멸망당하자 이스라엘은 해방의 기쁨을 맛보는가 했더니 더 강력한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침범하여 포로로 잡아가 버립니다. 간신히 곰을 피했더니 사자가 덤벼든 격입니다.
사41장은 바벨론의 포로가 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14-15절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니라 보라 내가 너로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 기계를 삼으리니 네가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를 만들 것이며 작은 산들로 겨 같게 할 것이라' 이 말씀의 뜻은 성도의 내일을 오늘과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은 지렁이 같은 이스라엘, 그러나 내일은 반드시 타작 기계 같은 이스라엘이 될 것입니다.
지렁이는 멸시받는 동물이요, 짓밟히는 동물이요, 천한 동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 지렁이와 같습니다. 왜?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노예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일은 새 타작기계로 쓰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기계는 기계자체로 아무 소용이 없고 쓰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기계입니다. 누군가가 써 주어야 하는 기계입니다. 마귀가 쓰면 마귀의 기계이고, 하나님이 쓰면 하나님의 기계가 됩니다. 대통령이 쓰겠다고 하여도 좋아서 날뛰는데 하나님께서 쓰시겠다니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질그릇 속에 그리스도 예수님을 모신 사람은 하나님이 쓰십니다. /할/ 우리는 지렁이가 능력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등뼈도 없이 흐믈대는 보기만 해도 밥맛 떨어지는 동물입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산을 부스러기로 만든 능력을 주마' 얼마나 큰 능력입니까?
이스라엘은 오늘날 우리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사방으로 포로가 되었습니까? 염려 마십시오,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질그릇 속에 보배를 담은 성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막9:23절에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아멘!/
하나님은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낙심치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신앙생활을 하면서 선한 일을 했는데도 시험이 닥치고 열심히 하나님을 공경하고 주일 성수하고 십일조 생활을 잘 하는데도 환난이 닥치고 답답한 일이 계속됩니까?
참으십시오, 바울은 갈6:7-9절에서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둔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진실하신 분이십니다. 거짓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선을 심는 사람에게는 선을 거두고, 악을 심는 사람에게는 악을 반드시 거두게 하십니다.
그런데 선을 심었는데 환난이 올 때가 있습니다. 정직하게 살았는데 억울한 일을 당한 때도 있습니다. 생선을 달라고 기도했는데 뱀이 나타나고 떡을 달라고 기도했는데 돌이 나타날 때도 있습니다. 이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그러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선을 행하되 낙심치 말라, 때가 이르면 반드시 거두리라, 때가 이르면 응답되리라, 때가 이루며 하늘 문이 열리리라' /아멘!/


⑶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않습니다.

히11장에 보면 믿음의 선배들이 하나님의 사업을 하다가 핍박받는 사람을 소개합니다. 11장에 따르면 희롱, 채찍질 옥에 갇힘, 돌로 맞고, 톱으로 잘랐으며 칼에 맞아 죽고, 궁핍과 환난과 학대 등의 핍박을 있음을 말해줍니다.
오늘날도 이런 핍박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기 때문에 때때로 부모님이나 친척이나 직장에서 버림받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참고 기뻐하십시오!
마5:10-12절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또 바울은 딤후3:12절에서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여러분이여 모든 사람이 우리를 버린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절대로 버리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해 주시면 만사는 ok입니다. /아멘!/
중세기의 성자 크리소스톰은 유독시아라는 왕후에 핍박을 받아 멀리 추방을 당하면서 말하기를 '나를 쫓아내면 엘리야처럼 되어 까마귀가 나를 조석으로 도울 것이요, 바다에 던지면 요나처럼 될 것이요, 돌로 친 다면 스데반처럼 될 것이요, 목을 자른다면 세례요한같이 될 것이요, 매를 친다면 사도바울 같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난 큰 도움이시라'고 담대하게 외쳤답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다 나를 버린다 할지라도 우리 주님은 나를 절대로 버리지 않습니다. /할/


⑷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시37:24절에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또 잠24:16절에서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우리 믿음이 사람을 거꾸러져도 망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지십시오, 망했다고 탄식하는 분이 있습니까? 이 시간에 넘어진 사람이 있습니까? 일어나십시오, 망하지 않습니다.
성도의 특색은 실패를 않는 것이 아니라 실패해도 칠전팔기로 극복하는 것입니다. 로버트 슐러 목사는 '망했다고 생각할 때 더욱 매달려라, 세월이 지나면 그들의 암담했던 시절은 되돌아보고 그때가 우리에게 가장 좋은 시절이었다고 회고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빌4:11-13절에서 고백하기를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얼마나 위대한 신앙인의 삶의 승리입니까?
여러분, 크리스천은 거꾸러져도 질그릇 속에 담긴 무한한 주님의 능력이 이기게 하십니다. 전투에는 질는지 몰라도 결국 전쟁에서는 지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지시기를 소원합니다. /할/
스데반은 예수님을 증거 하다가 죽음을 당했으나 승리했습니다. 행7:56절 이하에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할/ 질그릇은 깨어지고 피투성이가 되었으나 그의 영혼은 망하지 않는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아멘!/
▶초대교회에 네로 황제의 핍박 속에서도 신앙을 지킨 성도가 있었습니다. 그는 황제의 명령으로 체포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굽히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치고 고문을 해도 끄덕하지 않습니다.
황제가 '저놈을 극악무도한 죄인들과 같이 있도록 감방에 집어넣어라'고 불호령이 떨어졌습니다. 그때 신하가 손을 흔듭니다. '황제님, 그건 안 됩니다. 그 사람은 전도할 기회가 왔다고 더 좋아할 것입니다. 얼마 있지 않아 그 안에 있는 사람의 모조리 크리스천이 될 것입니다.' 오래 전에 고재봉이라는 사람은 도끼로 일가족을 몰살한 살인죄를 저질렀지만 그가 주님을 영접한 뒤 많은 죄수들을 구원시켰습니다.
또 다시 황제가 추상같은 명령을 내립니다. '저놈을 굶겨라' 그러자 신하 한 사람이 말하기를 '굶기면 금식기도에 들어가 삼층 천에 올라가는 신비한 입신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놈을 내어 목을 쳐라'고 하자 '황제님, 저들의 제일 큰 상급은 순교입니다. 그래서 죽으면서도 '하늘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하고 찬양하며 갑니다.'
화가 잔뜩 난 황제가 '아니 저 예수쟁이들은 무슨 힘이 있어서 저렇단 말이냐?'고 하자 신하가 대답하기를 '그들 속에 영원한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셨기 때문입니다.' /할/ 맞습니다. 본문은 '우리가 항상 예수님을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을 예수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망하지 않았습니다. 왜? 예수님의 흔적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우리 육신의 질그릇에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셨기 때문에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할/

 

③크리스천의 승리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⑴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형식적인 믿음이 있고, 행함이 있는 믿음이 있습니다. 죽은 믿음이 있고, 산 믿음이 있습니다. 히11: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⑵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소망은 인간이 가진 마지막 끈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자살자가 속출하는 것도 한 마디로 말해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가장 큰 소망은 뭐니 해도 부활의 소망, 천국의 소망입니다. 잠14:32절에 '악인은 그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 /할/
⑶말씀입니다. 베드로는 말씀에 의지해서 그물을 내리다가 만선의 복을 받았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3만 오천 이백 개의 약속이 들어 있습니다. 잠13:13절에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패망을 이루고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얻느니라.'
⑷순종입니다. 삼상15:22절에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⑸기도입니다. 기도가 응답입니다. 요14:14절에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렘33:3절에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마7:7-11절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말씀은 기도의 세 단계를 뜻합니다.
골4:2절에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⑹감사입니다. 시50:23절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⑺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10절에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갈6:17절에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이 말씀을 쉽게 표현하면 '나는 예수를 닮았다. 나는 예수의 제자다'라는 선언입니다. 흔적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스티그마'로, '표식 곧 마크'란 말입니다. 스티그마는 그 당시 주인의 소유물의 표시로서 짐승의 몸에다 쇠 도장(인)을 찍는 표시였으며, 또 노예의 몸에 찍은 것을 스티그마, 즉 흔적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최고의 보배는 우리 주님의 부활의 능력을 덧입는 것입니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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