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베푸신 잔치! (사 25:6-12)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여러 가지 형태의 초대를 받습니다. 이제 봄이 완연합니다. 꽃들이 만발하고 새들이 울부짖으며 아지랑이 아롱대는 봄 동산의 초대는 아가씨들의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시원한 바람! 그칠 줄 모르는 바다! 녹음방초 우거진 낭만이 긷던 여름 산과 강과 바다는 젊은이들에게 낭만을 줍니다.
가을은 어떻습니까? 단풍이 붉게 물들고, 황금물결 치는 오곡백화의 초대! 우리를 풍요롭게 해 주지 않습니까? 그런가 하면 눈 덮인 겨울 설경은 얼마나 깨끗하고 아름답습니까? 이와 같은 초대들은 하나님이 베푸신 자연의 초대입니다.
이와는 달리 사람이 사람을 부르는 잔치의 초대도 있습니다. '생일초대, 약혼식, 결혼식, 개업초대, 회갑초대' 등이 있습니다. 어쨌든 초청을 받았다는 그 사실이 우리의 마음을 얼마나 기쁘게 하는지 모릅니다. 거기다가 청하는 사람이 훌륭하고 유명한 분이면 더욱 더 기분이 좋습니다.
회사의 사장님이 은밀히 불러 파티에 초청을 했다면 그 사원은 큰 영광으로 생각하고 충성을 다짐할 것이며, 나라의 대통령이 만약 저와 여러분을 초청해 준다면 이것은 엄청난 행운이요 가문의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인생들의 초대는 극히 제한된 초대요, 신분이 비슷한 사람들과의 초대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하나님의 초대는 차별이 없고, 상하가 없고, 구별이 없습니다. 배운 사람도, 못 배운 사람도, 건강한 사람도, 병든 사람도, 부자도, 가난한 자도, 실패자도 성공 자도, 남여노유 빈부귀천 막론하고 그 누구도 제한하지 않는 초청입니다.
'불교는 초상집 같고, 유교는 제삿집 같고, 기독교는 잔치하는 집과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대개 절에 가면 계속 향불을 피우기 때문에 초상집에 온 기분이 납니다. 그래서 불교는 깊이 믿으면 믿을수록 허무해집니다. 불교에서는 극락을 말합니다. 이 세상은 욕심 때문에 고통이 생기는데 극락은 욕심이 없는 곳 '미르바나'라고 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무념무상'의 땅입니다. 생각해 보면 허무한 것입니다.
유교는 갓을 쓰고 도포를 입고 있기 때문에 제사지내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리고 유교는 믿으면 믿을수록 사람이 완고해 집니다. 그리고 유교의 무릉도원은 한가함입니다. 신선도에 의하면 바둑을 두는 노인과 낮잠을 자는 아이, 차를 끓이는 소년이 있습니다. 따분하고 지루합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찬양하고, 즐거워하고, 기뻐합니다. 기독교를 믿으면 믿을수록 기쁨이 충만하고 즐거움이 넘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잔치하는 집과 같습니다. 기독교의 천국은 잔치가 있는 곳입니다. /아멘!/ ◀제목 소개!▶
본문은 구원받은 자의 기쁨을 천국잔치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에 천국 잔치에 참여하여 영원히 기뻐할 것이나, 예수님을 믿지 않은 자는 모압 나라 같이 진흙 속에서 울부짖을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6절에 '연회를 베푸시리니' 대단히 귀한 복된 잔치임에 틀림없습니다. 잔치는 즐겁습니다. 개인의 가정에서 베푸는 잔치나 교회가 마련하는 잔치나 나라가 주관하는 잔치라도 다 귀하고 즐거운 것입니다.
여러분, 무슨 잔치든 간에 잔치의 결과가 좋아야 더욱 귀한 잔치가 될 수 있습니다. 생일잔치를 하든지 약혼이나 결혼잔치 또는 좋은 집을 사서 집들이 잔치를 한다든지 어떠한 잔치든지 간에 그 결과가 좋아야 합니다.
어떤 경우는 즐거운 잔치 집에서 의견 충돌이 일어나는가 하면 감정대립이 오고 갈 때가 있으며, 술 취한 취객으로 인하여 즐거운 잔치가 엉망이 되는 경우를 저는 종종 보았습니다. 부모님 회갑 잔치 끝에 부모의 재산 문제 때문에 형제간에 칼부림까지 일어난 사건도 있습니다.
▶조선 정조 때의 명제상인 정홍순대감에게 혼례를 앞둔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딸의 혼례가 가까워 오자 부인은 혼사 준비에 쓰일 비용이 걱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정홍순대감은 딸의 혼사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 태평하기만 합니다. 부인은 애가 탔지만 번번이 이야기 할 기회를 놓쳐 버렸습니다. 혼사가 보름 앞으로 다가왔을 때 정홍순대감이 부인에게 혼수 비용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러자 부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혼수 마련에 팔백 냥. 잔치 비용에 사백 냥 정도면 되겠다.'고 합니다.
정 대감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날짜에 맞춰 모든 것을 다 준비하겠노라고 약속을 합니다. 그런데 혼사 전날이 와도 주문해 놓았다는 혼수와 잔치에 쓸 물건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답답해진 부인이 다그치자 정 대감이 허허 웃으며 말하기를 '내 분명히 일러두었는데도 물건과 음식을 보내지 않은 것을 보니 아마 돈을 받기가 곤란해서 그랬나 봅니다. 그렇다고 소인배들과 큰소리로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냥 집에 있는 것들로 적당히 치릅시다.' 얼마나 기가 막힌 말인가?
혼례는 그럭저럭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사위는 여간 섭섭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혼례를 치른 후 몇 년이 지나도록 처가에 발길을 뚝 끊어 버렸습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정 대감이 딸과 사위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같이 갈 때가 있다고 합니다. 사위는 달갑지 않은 얼굴로 장인의 뒤를 따랐습니다. 정 대감이 한참을 가더니 웬 새집 앞에서 멈춰 섰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내 지난날 너희 혼례에 쓸 비용을 물으니 무려 천 이 백 냥이나 들겠다고 하더라, 하루 즐겁게 보내자고 그 많은 돈을 쓰느니 차라리 혼례는 간소하게 치르고, 그 비용을 따로 이용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해서 그 돈을 불려서 이 집을 짓고 또 얼마간의 농토를 사 두었으니, 이만하면 너희가 평생 살아가는데 부족하지 않을 게다.' 비로소 장인의 마음을 알게 된 사위는 큰절을 올리면서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한 것에 대하여 미안하게 생각했습니다. /할/
▶잔치에 좀 우스운 이야기도 있습니다. 잘 사는 어느 집 어른의 생일 날, 온 종일 손님이 끊이지 않고 드나들었습니다. 소도 잡고, 돼지도 잡고, 술에 떡에 상다리가 부러질 만큼 풍성하게 잘 차린 잔치였습니다.
시집 온지 얼마 안 되는 이 집 며느리는 나이도 어리지만 철이 덜 든 모양입니다. 온종일 들뜬 기분으로 있다가 날이 저물어 손님들이 다 가고 시아버지는 마당에서 바람을 쐬고 있는데, 이 집 며느리는 상에서 먹다버린 소 뼈다귀와 돼지 뼈다귀를 모아서 꼬리치는 개에게 주었습니다.
조금 있으니까 이 집, 저 집에서 냄새를 맡고 모여온 개들도 온 마당이 가득 찼습니다. 이 집 며느리는 기분이 좋아서 뼈다귀를 던져 주면서 혼자 소리치기를 '아이고, 오늘이 개 생일이구나!' 이 소리를 들은 시아버지는 완전히 기분이 상했다는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째든 잔치는 결과가 좋아야지 결과가 나쁘면 차라리 하지 않은 것만 못합니다.
▶성경에는 잔치에 대하여 기록한 사건이 몇 군데 있습니다.
①단5장에 벨사살 왕이 베푼 잔치가 있습니다.
당시 바벨론에 메대 왕 다리오가 바사 군대와 연합하여 바벨론 성을 완전히 포위했습니다. 이 바벨론 성은 너무 견고하고 거대한 성입니다. 성안에는 몇 년 먹을 양식이 저장되었고, 성 밑으로는 유브라데 강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먹고 마시는 것은 아무 염려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너무 오랫동안 성이 포위되었고, 바벨론의 장수와 군병들의 사기가 급속도로 저하되어서 그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서 벨사살 왕이 베푼 잔치입니다. 그는 자기의 아버지 느부갓네살왕이 예루살렘을 공략할 때 성전에서 빼앗아온 금과 은으로 된 성소에서 쓰는 그릇들을 가져다가 술을 따라 먹고 춤을 추며 놀았습니다.
▶그 잔치에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⑴먼저 잔치를 베푼 주인공은 벨사살 왕으로 대단한 권력을 행사하는 자이고, 잔치를 베푼 장소는 궁궐로써 영광스러운 장소입니다. 그리고 잔치에 차린 음식은 그 나라에서 가장 맛있고, 영향 있는 재료로 훌륭한 요리사가 솜씨를 발휘한 것입니다.
⑵잔치에 초대받은 손님은 나라의 고관대작들입니다. 무려 천명이나 모인 매머드 급 잔치입니다.
⑶중요한 것은 잔치의 목적이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성소에서 쓰는 그릇을 사용해 가면서 우상 앞에서 향락을 즐기는,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행위였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제자 드리는 그릇에 술을 부어서 먹는 것도 큰 죄인데 그들은 자기들이 섬기는 우상과 귀신들을 찬양하며 하나님을 모독하였으니 하나님께서 그냥 두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십계명 중에서 인간관계를 언급한 제 5-10계명을 잘못하여 범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다시 돌이킬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나 제 1-4계명을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우상을 만들지 말라, 안식일을 거룩이 지키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는 계명, 즉 하나님의 존립과 성체에 관한 계명을 어겼을 때에는 하나님께서는 회개의 기회를 주시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 사이에 서로 잘못된 일을 하나님께서 다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무너뜨리는 행위를 하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십니다. 또한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용서가 없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자기 돈을 가지고 하나님을 속였기 때문에 무서운 심판을 받았습니다.
▶2차 대전 때 일본 천왕을 '일본의 신'으로 섬기면서 천왕의 신과 여호와 신의 싸움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런 선포를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본체를 모독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원자탄을 맡고 항복하게 만들었습니다.
또 독일의 히틀러는 '훗날 역사에 신이 있었다면 바로 독일의 히틀러가 신이라고 말할 것이다.'라고 교만할 때 하나님께서 그를 치셨습니다.
⑷잔치하는 중에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한 참 잔치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는데 한 손가락이 왕이 앉을 맞은편 벽에 나타나 글씨를 쓰고 손가락이 없어졌습니다.
왕의 얼굴이 초죽음이 되었습니다. 사지를 떨면서 이 글을 읽고 해석하는 자에게 국무총리를 삼겠다고 했습니다. 마침내 태후에 권면을 듣고 다니엘을 불러서 해석하게 됩니다. 다니엘의 해석은 무엇인가? 단5:25절에 '기록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메네'는 '세어보았다'는 뜻으로서 하나님이 여러 해 동안 그의 날을 세어보시다가 '이제 너의 시대는 끝났다'고 정지 신호를 내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끝났다고 선언하시면 인생들은 하던 모든 것을 중지해야 합니다. 벨사살 왕이 교만하여 하나님을 대적했을 때 하나님은 그의 날을 끝나게 하셨습니다.
▶'데겔'은 '무게를 달아보았다'는 뜻으로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들어 났다는 것입니다. ▶'우바르신'은 무게를 잰 결과로 왕의 나라가 끝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과 호흡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끝났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끝난 것입니다.
여러분, 그 분이 부르시면 가야 합니다. 실제로 그 날이 벨사살의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30절을 보면 '그 날 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한 나라의 운명과 한 개인의 운명을 정하신다는 사실을 가르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주권에 승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인생들의 행동을 달아보십니다. 삼상2:3절에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
⒜인간의 죄악을 달아보십니다. 죄악의 잔이 차고 넘치게 되면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가 임하게 됩니다. 소돔과 고모라성도 주의 불 심판을 받아 멸망하고 그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노아 때의 심판의 기준도 인간의 '강포함'입니다(창6:13).
⒝인간의 선행도 달아보십니다. 죄 짓는다고 금방 심판이 내리지 않는 것처럼 선행도 금방 축복과 상급이 내리는 것이 아니라 원하시는 어느 분량이 차야 응답과 상급이 내립니다. 기도도 분량이 차야하고, 십일조나 헌금 생활도 정성의 분량이 차야 합니다.
⒞인간의 정성을 달아보십니다. '하나님의 저울에는 정성이 무겁다'는 서양 격언이 있습니다. 또한 '천국 가는 길은 정성의 길을 가는 것이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과부가 엽전 두 냥 바친 것을 제일 많이 바쳤다고 칭찬하신 것은 그 여자의 정성이 제일 컸기 때문입니다.
▶어느 때 정성이 드러납니까? ⇒사랑으로 하면 정성이 드러납니다. 사랑하는 믿음이 있을 때 정성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첫 열매, 첫 것에 대하여 귀하게 보십니다. 왜? 첫 것은 정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최선을 다할 때 정성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찬송도, 기도도, 헌금도, 감사도 최선으로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최고를 보시는 분이 아니고 최선을 다하는 성도들의 믿음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성실함도 달아보십니다. 우리의 성실을 달아보시는데, 이 성실은 착한 양심에서 착한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양심은 하나님의 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바르게, 진실하게, 착하게 살아야합니다. 그래야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예수 믿고 변화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달아보십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히11;6).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자녀입니다(요1:12). /할/
⑸벨사살 왕이 벌린 잔치의 결과가 어찌되었습니까? 잔치가 열리는 그 밤이 밝기 전에 벨사살 왕은 메데의 다리오 왕에게 죽임을 당하고 바벨론은 인류 역사에서 종지부를 찍고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벨사살 왕이 베푼 잔치였습니다. 잔치를 베푼 사람이 왕이요, 잔치를 한 장소가 궁궐이요, 차린 음식이 훌륭한 궁중 요리와 손님들을 내 놓으라 하는 권세 자들이 먹고 마시고 즐겁다고 춤을 추었으나 그 결과는 왕이 죽고 나라가 망한 것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하나님은 한 개인의 생사화복뿐만 아니라 나라의 운명도 결정짓는 능력이 그분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②막6:21-29절에 헤롯왕이 베푼 잔치가 있습니다.
어느 날 저 팔레스틴 헤롯 왕궁에서 호화로운 대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문무백관이 동석하고 산해진미로 배를 불리며 흥겨운 음악이 반주되어 모든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있었습니다.
이 잔치의 주인공은 헤롯대왕이요, 장소는 호화로운 궁궐이었으며, 이 잔치에 청함을 입은 손님들은 대신, 장군, 갈릴리의 귀족들이 초대되었습니다. 이 잔치의 목적은 헤롯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잔치였습니다.
잔치가 무르익어 갈 즈음 특별 순서가 있었는데 아리따운 처녀가 미끄러지듯 춤을 추며 왕 앞으로 나타났습니다. 그 처녀를 왕후의 전남편의 딸이라 왕의 조카 되는 살로매였습니다.
잠깐 헤롯왕을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 유대나라의 헤롯왕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포악하기 그지없는 사람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살해하기 위하여 베들레헴의 두 살 이하의 어린아이를 무참히 학살한 장본인입니다.
그는 많은 여자들을 거느리고 살았으며 자식들의 수가 엄청났습니다. 오늘 본문의 헤롯왕이 바로 그 헤롯 왕가의 아들로 배다른 동생 빌립을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살고 있는 포악한 왕입니다.
이 헤롯의 생일잔치에 빌립의 딸, 살로매가 특별순서로 춤을 추었습니다. 왕은 춤추는 살로매에게 '네가 원한다면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노라'고 장담을 합니다. 그러나 살로매가 구한 것은 나라의 절반도 아니요, 금은보화도 아니요, 그녀의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세례요한의 목을 요구했습니다.
당시 헤롯왕의 불륜을 한 사람도 지적하지 않았으나 회개를 외친 세례요한은 헤롯과 그의 부인 헤로디아에게 그들의 불륜을 무섭게 꾸짖고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의인이 진리를 전하다가 감옥에 들어갔고, 또한 사람을 높이는 헤롯의 생일잔치에 목숨이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일을 여기에서 끝나지 아니하고 세례요한의 죽음은 두고두고 왕을 번민케 했습니다.
결국은 왕은 미쳐서 죽어버렸고, 나라도 망치고, 가문도 전부 멸망을 받았습니다. 헤롯왕은 생일잔치를 호화로이 벌였으나 그 결과는 멸망이었습니다.
이 땅에는 진리를 전하다 죽어간 수많은 순교자들이 있었습니다. 손양원, 주기철, 소크라테스, 또한 스데반 집사, 그들은 모두 억울한 죽음으로 일생을 마쳤습니다.
불의한 세력은 그때 잠깐은 승리하는 것 같지만 종국에는 진리가 승리하고 의인이 승리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③마14:13-21절에 예수님께서 베푸신 잔치입니다.
잔치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요, 장소는 왕궁이 아닌 벳세다 광야입니다. 잔치의 음식을 어린아이의 점심으로 가지고 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아주 초라하였습니다. 잔치의 목적은 '사람으로 베고픈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려는 것이요,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잔치를 베푸신 것'입니다.
이 잔치에 초대된 사람은 귀머거리, 장님, 앉은뱅이, 병신, 정신병자 등 불쌍한 사람들이었으며 모인 수는 남자만 5천명이 된다니까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합하면 기만 명이 됩니다. 이 잔치에 시중 든 사람은 열두 제자였으며 잔치는 질서가 있었습니다. 그 많은 숫자가 모였으나 예수님께서 50명씩 질서 있게 앉게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문란하지 않고 질서가 있습니다. 당시 하루 종일 굶은 사람들이므로 아우성을 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순서 있게 질서를 잡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일은 언제나 질서 있게 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바쁜 일이 생기면 순서 없이 덤벼듭니다. 여기에는 예수님이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이 잔치에 특이한 것은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신 다음에 떡을 나누어졌습니다.
이 잔치에 네 가지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모든 사람이 배가 부르고, 모든 사람이 기뻐하고, 모든 사람이 감사하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주님이 베푼 잔치에는 모든 사람이 다 배불렀습니다. 어느 사람은 배가 부르고 어느 사람은 배가 고프지 않았고 전부 배가 불렀고, 또 배가 부르니까 기뻤습니다. '야! 신기하다. 보리떡인데 맛이 있구나' /할/
주님만 따라가면 속 사람은 은혜를 받고 겉 사람의 모든 문제는 해결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염려는 없어지고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네 번째는 너도, 나도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믿/
여러분, 아무리 좋은 음식을 차리고, 잘난 사람들이 모였다 할지라도 그 결과가 하나님께 욕이 되고 나라를 팔아먹는 일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면 결국은 망하게 됩니다. 모든 잔치는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자기의 문제가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할/
④이제 본문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잔치를 생각해 보십시다.
6절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 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
⑴본문의 잔치의 주인은 천지를 창조하신 만 군의 하나님 여호와입니다.
⑵하나님이 베푸신 잔치의 장소는 '이 산'입니다. 즉 하나님이 복 주시는 동산으로써 시온산입니다. 신약에서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오늘의 교회는 신성한 예루살렘입니다. 하나님은 풍성한 하늘 잔치를 참 행복한 교회에 열어주셨습니다. /할/
⑶잔치에 음식을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입니다. 하반 절의 이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릴 충만한 기쁨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하늘나라의 신령한 만나를 먹는 곳입니다. 다윗도 하나님의 은혜를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는 것과 같이 영혼이 만족하고 기쁘다'고 했습니다(시63:5).
⑷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은 구속받은 성도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속죄함을 받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바로 살기를 원하는 성도들을 청하십니다. 여기 '만민'이라고 하셨으니 민족이나 인종의 구별이 없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모든 족속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의 은혜는 모든 사람들에게 베푸는 하나님의 궁중 잔치입니다.
그렇습니다. 천국잔치는 인간적으로 예쁘고 돈이 많고 지식이 있고, 권세 높은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교만을 버리고 다른 사람을 의지하는 어리석은 생각을 버리고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만 믿고 받은바 은혜를 감사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를 원하는 모든 성도들이 청함을 입습니다. /할/
⑸하나님께서 잔치를 베푸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먼저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복을 주시려는 목적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원수 되었던 담을 하시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영원히 사는 복을 주시려고 하나님은 잔치를 베푸십니다.
또한 인간끼리의 싸움을 없애도 화목하게 하려는 목적입니다. 이 땅에는 끊임없이 분쟁과 시기와 다툼이 일어납니다. 오늘날 이 땅에는 의인을 괴롭히고 약자를 괴롭히려고 싸움을 일으키는 자가 많습니다.
세상에는 싸움이 끝날 때가 없습니다. 전쟁이 계속되고 재판소에 소송하는 싸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비극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의 싸움을 끝나게 하시려고 하늘나라 천국에 우리를 초청하신 것입니다. /믿/
또한 하나님이 잔치를 베푸시는 목적은 근심과 죄악과 질병의 문제를 해결하여 평안을 주시려는 것이요, 슬픔의 눈물을 씻어 주시고 기쁨을 채워주시려는 목적이요, 실수와 부끄러움을 없이 하고 성공의 영화를 주시려는 목적이요, 사망이 다시없는 영생을 주시려는 목적 때문에 잔치를 열었습니다. /할/아멘!/
⑹하나님이 베푸신 잔치의 결과입니다. 잔치에 참여한 자와 참여하지 못한 자의 결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한 사람의 결과는?
⒜무지와 흑암이 사라지고 영생을 얻습니다(7). 여기서 '면박과 휘장'은 가리개를 말합니다. 삶과 죽음, 세상과 천국에 대하여 희미하게 알던 것이 자세히 알게 됩니다. 또한 사망을 제거함으로 사망과 상관없는 영생을 얻게 됩니다. /아멘!/
⒝눈물과 수치가 제하여 집니다(8). 죄가 있는 곳에는 슬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죄가 없는 천국에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수치스러운 일들은 전부 제하여 주시므로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가리고 사는 일은 전혀 없습니다. /할/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합니다(9). 하나님은 구원을 시작할 뿐만 아니라 완성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여호와를 기다리면서 모든 고통과 핍박을 참아온 사람들은 마침내 구원을 기뻐하여 즐거워할 날이 옵니다. /할/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본문 10-12절 안에 보면 모압과 같이 된다고 했습니다. 이 모압이란 어떤 나라입니까?
⒜음란한 민족입니다. 모압 족속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소돔, 고모라에서 멸망을 면하고 도망쳐 나와서 소알에 이르니 굴에서 피난살이 할 때 큰딸이 아버지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한 다음에 그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모압인데, 그 후손이 모압족속입니다. 음란의 씨입니다. 이렇게 조상부터 음란했습니다.
⒝우상숭배를 하는 족속입니다. 이들은 불 우상을 섬기는데 가난한 집의 아들 딸 중에서 잘 생기고 흠이 없는 아기를 돈을 주고 사다가 그들의 우상에 어린 아기를 올려놓아 태워 죽이면 복을 받는다면서 무자비하게 우상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미워하는 족속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유다 민족을 미워했는데 오늘날까지 예수 믿는 나라를 미워하는 족속으로 남아있습니다.
모압은 세 가지의 죄가 있습니다. 하나는 육체의 음란이요, 그 다음은 우상을 섬기는 영적 음란이요, 그 다음은 이유 없이 의인을 미워하는 악한 죄입니다. 이 세 가기 죄를 범하는 모압은 하나님께 심판을 받는 대표적인 인물로 등장합니다.
10절 중반 절에 보면 '모압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거름물 속의 초개의 밟힘같이' 밝혔습니다. 여기서 거룸물은 소, 돼지가 있는 곳에 풀을 던졌다가 꺼난 그 더러운 것을 쌓아 놓은 거름더미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는 자들은 모압 족속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배울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는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잔치를 베풀고 그 결과가 좋은 잔치가 되어야 합니다. /아멘!/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남에게 유익이 되고 교회와 불신자에게 덕이 되는 잔치를 베풀어야 합니다.
또한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는 자는 모압의 무리에 섞어 심판을 받고 지옥에 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인정받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을 멸한 뿐만 아니라 하늘잔치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믿음으로 참고 은혜로 참고 예수님의 재림의 그 날까지 온전히 성령으로 충만해 있어야 합니다. /믿/
▶성경에 두 종류의 잔치가 있습니다. 종말론적인 잔치와 현재적인 잔치입니다.
⑴종말론적인 잔치는 '어린양의 혼인잔치'와 '새들의 잔치'가 있습니다.
계19:9절에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이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는 누가 참석합니까? 하나님의 초청장을 받고서 수락한 사람들이 참석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 땅위에 사는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혼인잔치에 참석할 수 있는 초청장이신 예수님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어 준 초청장이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혼인잔치에 갈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초청 받은 사람들이기에 우리가 바로 복된 자입니다. /믿/
새들의 잔치가 있습니다. 계19:17-21절에서 '새들의 잔치'라고 하는데 이것도 하나님의 '큰 잔치'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잔치는 어린양의 혼인잔치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새들이 모든 자들의 살을 먹는다고 합니다.
'또 내가 보니 한 천사가 해에 서서 공중에 나는 모든 새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와서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 왕들의 고기와 장군들의 고기와 장사들의 고기와 말들과 그 탄자들의 고기와 자유한 자들이나 종들이나 무론 대소하고 모든 자의 고기를 먹으라 하더라.'
끔찍한 잔치입니다. 어린양의 잔치와 대조되는 잔치입니다. 새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을 거부하고 저주한 사람들의 살을 먹는다고 것입니다.
여러분, 주위에는 가족, 친척, 친구, 동료들 중에서 아직 예수님을 거부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이 새들의 먹이가 되지 않도록 우리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믿/
⑵현재적인 잔치는 이 땅에서의 잔치에 참여하는 예배입니다.
사람들은 천국잔치는 죽어서만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정확한 말은 아닙니다. 천국 잔치를 지금 이 땅에서도 누릴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천국을 누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교회,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가정,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직장이 바로 그 잔치자리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이 예배가 바로 천국 잔치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예배시간에 풍성한 음식을 준비해 놓고 계십니다. 우리를 초청하신 하나님께서는 예배 시간을 통해서 이 세상에 없는 몇 가지 중요한 복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먼저 사죄의 은총입니다. 죄 용서를 통해서 모든 올무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새롭게 씻어진 새 마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아멘!/
▶그 다음에 예배를 통해 성령 충만, 성령의 은사를 내려 주십니다. 이것은 수 십억 짜리 빌딩보다, 하버드 대학에서 수십 개 박사학위 받는 것보다 훨씬 더 귀한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셔서 하나님의 복을 모두 받게 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성령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합니다. 죄를 이기게 합니다. 거짓을 이기게 합니다. 음란을 이기게 합니다. 혈기를 이기게 하고 마귀를 이기게 합니다.
▶또한 기쁨을 주십니다. 마음의 평안도 주십니다. 이 모두가 예배를 통하여 허락하신 축복입니다. 여러분, 이 귀한 은혜가 넘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눅14:16-24절에 보면,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열고 사람을 청하였더니 다 사양을 했습니다. 사양하는 이유는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한다.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야한다. 나는 장가들었으니 못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 때 주인이 말하기를 '핑계 대는 사람은 할 수 없으니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했습니다. 천국 잔치에 초대하면 지금도 이런 핑계를 대고 사람들이 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들을 강권해서 데리고 와야 합니다. /아멘!/
▶이제 우리는 종교인으로 살지 말고 신앙 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흔히 기독교를 종교의 하나로 구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수용될 수 있는 말이지만, 좀 더 깊게 따져 들어갈 때에는 틀린 말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엄격한 의미에서 '종교의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참된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믿/
이것은 기독교가 옹졸한 독선주의자라서 그런 것이 결코 아니라, 이 세상의 수많은 종교들 중에 오직 기독교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을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서로 인정해 주면서 소위 종교들 사이의 이해와 화합을 도모하는 것이 마치 참된 종교인의 너그러운 자세인양 자랑들하고 있는 이 시대에, 오직 기독교만이 성경과 예수님 자신의 선포를 따라 '구원의 길은 단 한 길,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라는 사실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기독교는 정말 참된 종교인 까닭에 유일한 구원의 길을 자신 있게 선포할 수 있으며, 여타 종교들은 자기네의 구원 개념부터가 확실치 않은 까닭에 다른 종교를 통한 구원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쓰는 '종교인'이란 말과 우리 기독교인을 지칭하는 '성도' 혹은 '신앙인'이라는 말도 언뜻 비슷한 것 같지만 본질적으로는 엄청난 차이가 있게 됩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는 그야말로 대표적으로 '종교적인 사회'였습니다. 그 나라에 살던 모든 유대인은 어쨌든 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율법을 읽고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며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처럼 겉으로는 꼭 같아 보이는 사람들 가운데 '외식적인 종교인'과 '진실한 신앙인'이 엄연히 구별되어 있었습니다.
바리세인들은 자기 의를 드러내며 거들먹거렸지만 세리는 가슴을 치며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여기서 우리 예수님은 바리세인을 '외식적인 종교인'으로, 세리를 '진실한 신앙인'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연보 궤에 부자의 헌금과 과부의 두 렙돈을 보시고 부자를 '외식적인 종교인'으로, 과부를 '진실한 신앙인'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종교인은 '사람 앞에서의 외식'에 신경을 쓰지만, 신앙인은 '신전인격자의 자세'만 지킵니다. /할/ 종교인은 '자기 욕구 충족'을 위해 살지만, 신앙인은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바치려 고 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에 의를 구하라' 이런 삶에 무게를 두고 삽니다. /아멘!/
▶이제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지금 유대인들이 예수를 영접하는 일들이 기하급수로 늘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도 무시하지 못 할 재림징조입니다. 우리는 지금 긴장할 때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재림 징조와 모든 현상이 지금 나타나고 있습니다.
C. H. 패터슨은 핵무기보다 무서운 것을 4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북핵문제로 시끄럽지만 사실은 핵무기보다 다음 네 가지가 더 무섭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⑴인구의 폭발입니다. 지금 벌써 인구가 70억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⑵가난과 기근입니다. 수천만 명씩 일 년에 죽어 가고 있습니다. 기후의 변화 때문도 그 원인이고 인구의 증가도 원인입니다.
⑶공해입니다. 수질 오염, 대기 오염, 오존층 파괴 등으로 지구의 끝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⑷대인관계의 파괴입니다. 사랑이 식어지고 상상도 못 할 악한 일을 하게 되는 시대입니다.
유영철 연쇄 살인 사건은 이루 상상도 못 하던 사건입니다. 한 사람이 아무나 여자들 21명을 죽인다는 것은 정상적이 아닙니다. 이런 말세 징조, 재림 징조가 너무나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재림이 우리에게 주는 축복이 큽니다. 우리는 들림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동안에 헤어졌던 모든 이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아멘!/ 그리고 그 날부터 다시는 고통이 없고 다시는 슬픔이 없고, 다시는 아픔이 없는 천국에서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재림을 앞두고 어떤 신앙생활을 하여야 하는가?
⑴깨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재림을 대비하며 가져야 할 자세를 분명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24:24절에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항상 재림을 맞을 준비를 하며 살아야 합니다. 언제 주님이 오신다고 할지라도 '아멘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당당하게 맞을 준비를 하며 살아야 합니다.
⑵수고에 대한 보상이 있다는 약속을 믿고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고전15:51절 이하에서 바울은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생활에 대하여 분명한 푯대를 제시하여 주고 있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여러분, 천국 잔치에 다 초대받을 것에 대하여 감사하며, 감격하는 신앙의 행위가 날마다 열매로 맺게 되시기를 진심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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