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 왕의 처음 신앙과 나중 신앙! (대하 16:7-14)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행복하고 평안할 때나 문제가 없을 때는 만나기 어렵습니다. 캄캄한 밤중에 별빛이 빛나는 것처럼 삶의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보화는 깊은 땅속에서, 바윗돌 속에서 캐내야만 빛나게 됩니다. 진주는 바다 속에 있는 조개의 상처 속에서 생겨납니다. 산호와 같은 보화도 깊은 바다 속에서 자라납니다. 인간의 참된 보화도 우리의 심령 깊은 고뇌 속에서, 실패와 고통 속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인생을 오래 살았던 고참들은 자랑스럽게 산전수전 다 거쳤다고 이야기합니다. 주님의 제자들이 풍랑 가운데서 배가 뒤집힐 지경에 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고, 사도바울도 빌립보 감옥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으며,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인생을 구원해 내는 참된 진리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할/
오늘 본문 속에 나오는 아사 왕은 고난 중에 하나님을 찾아 형통한 복을 누리다가 등이 따습고 배불러지니까 하나님을 버리고 말았습니다. 신앙은 시종일관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할/ ◀제목 소개!▶
▶본분의 배경입니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이었던 솔로몬은 마지막 생애에 많은 아내들을 얻어 치마폭에 빠졌습니다. 첩들의 말을 듣고 우상과 사신들을 섬겼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솔로몬이 죽고 난 후에 이스라엘은 북방 이스라엘과 남방 유다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바로 지금의 우리 분단된 조국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나라가 분열되고 난 다음 유다에서 제3대 왕으로 아사라는 왕이 즉위하게 됩니다. 아사 왕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신앙의 개혁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쳐나갔습니다.
▶아사 왕의 처음 신앙의 모습을 14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⑴아사는 하나님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함'으로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았습니다(2). 올바른 지도자의 마음을 가졌습니다. 이것이 귀한 신앙입니다.
⑵아사는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우상을 깨끗하게 제거했습니다(3). '이방 제단과 산당을 없이하고 주상을 훼파하며 아세라상을 찍고' 5절에 '또 유다 모든 성읍에서 산당과 태양상을 없이하매' 그 당시 남 유다에는 온갖 다양한 우상들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그 사회 속에 깊숙이 스며 들어와 있었습니다. 이미 '이방 제단'과 '산당'이 있었습니다. 집안에만 모시고 개인적으로 우상을 숭배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공적으로 함께 우상 숭배할 제단이나 예배 장소가 세워져 있었다는 뜻입니다. 여기 '주상' 즉 돌 따위로 만든 반영구적인 우상이 사람들이 다니는 길가에 버젓이 서 있어서 아무나 그 앞에서 절할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아세라 상' 즉 농산물의 풍성한 수확을 가져다준다는 여신의 목상이 논밭 어귀마다 세워져 있었습니다. 또 '태양상' 즉 고대 근동 사회에서 유행하던 태양숭배 역시 이미 유다에 수입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것들을 아사 왕이 다 정리를 했습니다.
아사의 열정이 얼마나 컸느냐? 대하15:16절에 보면 '아사 왕의 모친 마아가가 아세라의 가증한 목상을 만들었으므로 아사가 그 태후의 위를 폐하고 그 우상을 찍고 빻아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랐으니' 얼마나 아사의 우상을 철폐하려는 열정이 강력했는지 모릅니다. 온 백성에게 우상을 제거하라고 하고 이제 실행하는데 아사의 어머니, 왕의 어머니 태후가 우상을 만들자 그 아들이 가만히 안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그런 짓을 했지만 왕은 어머니로 하여금 태후의 위를 패했습니다. '당신은 왕의 어머니로서의 태후의 자격이 없습니다.' 모범을 보여야 하는데, 그래서 얼마나 과감합니까? 얼마나 단호했습니까? 하나님이 싫어하는 일을 제거함에는 인정사정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정말 하나님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하는 것이었으며 하나님을 찾는 바른 자세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아사 왕 초기의 그 나라에 평안을 주셨습니다. /할/
⑶아사 왕은 백성들에게 '그 율법과 명령을 지키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4).
⑷아사 왕은 백성과 함께 주를 찾았습니다(7). '우리가 주를 찾았으므로 주께서 우리에게 사방의 평안을 주셨느니라' 여기서 '주를 찾았다.'는 말은 바른 예배의식을 의미합니다. 지금도 우리가 주를 찾으면 평안을 선물로 받습니다. /믿/
⑸평안할 때 성곽을 재건하고 군대를 더욱 훈련시켰습니다. 7-8절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평안함을 주셨으니, 이때에 성읍을 건축하고 대군을 양성하자'라고 했습니다. 완벽한 국방을 위해 헐어진 성벽들을 재건하고 새롭고 튼튼한 성벽을 세웠습니다. 그것을 보신 하나님은 아사 왕의 행위를 좋게 여기시고 유다 나라를 크게 부흥케하는 축복을 내려주었습니다. /아멘!/
▶바로 그때였습니다. 구스나라(지금은 에티오피아) 대왕 세라가 백만 대군과 벙거 삼백 승을 거느리고 유다에 쳐들어왔습니다. 유다 역시 '오십팔 만'명의 병력이 있었지만 당시의 기동부대라 할 만한 병거는 전혀 없었던 까닭에 전체적으로는 압도적인 열세에 있었습니다.
양쪽 군대가 '마레사의 스바다 골짜기'에서 서로 대진하고 전투에 돌입할 즈음에 아사 왕은 먼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11절에 '그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여호와여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 밖에 도와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컨대 사람으로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그렇습니다. 세상에서는 강한 자와 약한 자의 차이가 날 때에는 그 사이를 메울 별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즉 약한 자는 반드시 지게 되어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아사 왕은 그런 불가피해 보이는 양자의 차이를 간단하게 메워 버릴 능력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을 믿고 있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약한 자를 택하사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고전1:27) 분이심을 그는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오니'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여기 '의지하다'는 말은 히브리어에서는 '쉬다, 눕다, 기울어지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동사로, 즉 자기를 완전히 하나님 쪽으로 기울여서 눕혀 놓은 가운데, 자신은 마음 푹 놓고 쉬고 있는 것이 바로 '주를 의지하는' 상태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끝으로 '사람으로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완전히 하나님 속에 뉘어 놓고 맡겨 놓았으니, 이제 저 적군이 상대하는 자는 유다 백성이나 아사 왕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입니다. '저는 완전히 하나님 품속에 들어와 있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친히 저들을 상대하시고 처리해 주십시오.'라는 기도입니다.
아사 왕이 엎드려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왕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사 왕을 도와 주셔서 아사 왕이 나가 싸우매 에티오피아의 백만 대군을 다 진멸하여 한 사람도 살아서 고향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할/ 이렇게 대 승리를 거든 유다 군사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나팔을 불고 북을 치고 춤을 추며 유다로 돌아왔습니다.
유다로 돌아온 아사 왕은 온 국민과 함께 소 700마리와 양 7,000마리를 잡아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아사 왕은 전심으로 여호와만을 찾고 섬기기로 일대 큰 결단을 내리고 누구든지 국민 중에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은 죽이기로 작정했습니다.
아사 왕이 이와 같이 일심으로 하나님만을 섬기자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여시고 축복을 내려 주셔서 유다 민족은 그야말로 태평성대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무려 20년 동안 어떠한 이웃나라도 감히 유다를 넘겨다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15:19절에 '이때부터 아사왕 35년까지 다시는 전쟁이 없으니라'고 했습니다. 긴 세월동안 그가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 나라가 편하고 백성이 편하고 왕궁이 평안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되자 유다는 점점 더 부강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20년 동안 아무 일도 없이 나라가 부강하고 태평성대를 구가하니 그만 아사 왕의 신앙이 시들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16장에 보면, 20년이 지나고 난 다음 북방인 이스라엘의 왕 바아사가 군대를 거느리고 유다를 쳐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바아사의 군대가 그 옛날 에티오피아의 군대에 비하면 훨씬 약함에도 불구하고 아사 왕은 마음속에 두려움을 가진 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아니하고 곧장 성전으로 뛰어가 성전에 있는 금과 은과 왕궁에 있는 금과 은을 취하여 아람 왕에게 보내 아람왕 벤하닷에게 지원병을 청했습니다.
그래서 아람왕의 군대가 이스라엘을 치게 하였고, 결국 이스라엘의 군대를 벧하닷의 군대와 싸우느라 유다의 공격을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유다의 선견자 하나니가 아사 왕을 찾아와 왕을 엄히 꾸짖었습니다. 오늘 읽어 드린 본문이 바고 그 내용입니다.
'왕이여! 어떻게 이렇게 망령된 일을 하였습니까? 이십 년 전에 에티오피아의 백만 대군이 왔을 때 당신의 군대가 많아서 이겼습니까? 무기가 좋아서 이겼습니까? 그때 왕이 여호와를 의지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셔서 이기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제 와서 어찌하여 망령되게 하나님의 성전에 백성들이 들인 금과 은을, 또한 왕궁의 금은을 취하여 이방나라 믿지 않은 아람 왕에게 주고 이스라엘을 치게 해서 이 난국을 모면하려고 합니까?'
이 말을 들은 아사 왕은 대노하여 하나니를 잡아 옥에 가두고 그의 말을 동조하는 백성들도 학대했습니다. 이런 일이 있고 난 후 삼 년 후 아사 왕의 발에 병이 났습니다. 그런데 병세가 아주 심해 백방으로 의사를 불러 치료를 해도 낫지 않았습니다. 아사 왕은 발병으로 많은 고생을 하다가 2년 후 쓸쓸하게 죽어버렸습니다.
성경은 이 상황을 본문 12-13절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사가 왕이 된지 삼십 구 년에 그 발이 병들어 심히 중하나 병이 있을 때에 저가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더라 아사가 위에 있은 지 사십 일년에 죽어 그 열조와 함께 자매' 다른 곳도 아니고 발에 병이 나서 죽었습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던 아사 왕이 나중에 가서 신앙을 잃어버리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을까요?
①그 20년 태평세월에 하나님을 찾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가장 중대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주여, 마음의 평안, 가정의 평안, 생활의 평안을 주시옵소서! 또한 부귀영화를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실상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여시고 축복을 부어 주셔서 가내가 평안하고 생활이 부요하게 되면 으레 하나님을 떠나고 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병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은혜를 입어 깨끗하게 치료받은 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고 자만하다가 다시 병이 도져 죽어간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또한 물질에 축복, 사업에 축복을 받아 살만하게 되니까 슬그머니 하나님 편에서 떠나간 신앙 인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머지않아 다 두드려 맞고 잘못을 알고 다시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자도 저는 많이 보았습니다.
선민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태평성대를 누릴 때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 신을 섬겼습니다. 이것은 배신입니다. 어려울 때는 있는 힘을 다해 여호와를 찾다가 환경이 열리면 하나님을 찾는 것을 제쳐놓고 육신에 정욕, 안목의 정욕, 이 세상의 자랑을 따라 사는 자들이 많습니다.
옛날에 그렇게 복음이 성황 하던 영국이나 미국이 잘 살게 되니까 세속으로 다 빠져나가 하나님의 성전이 텅텅 비어 예배당이 술집으로 둔갑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이 갖고 있는 심성입니다.
사람이 괴롭고 고통스러울 때는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그러나 평안하고 좋은 환경이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물결에 흘러 들어가고 맙니다. 어떻게 보면 삶의 고난이 영적으로 더 무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신앙인들의 고난은 바로 축복의 통로임을 알아야 합니다. 고난을 신앙의 밥으로 생각합시다. 밥을 먹음으로 사람이 건강을 유지할 수 있듯이 고난은 신앙을 튼튼하게 해 줍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다가오는 고난이 우리에게 늘 손해만 갖다 주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한편으로 우리에게 은총과 축복을 주시지만 또 한편으로는 고난과 외로움을 내려 주심으로 고난과 괴로움을 통해서 자아를 깨뜨리며 하나님을 찾도록 만들어 주시기도 합니다. /믿/할/
예수께서도 '등 따습고 배부르고 아무런 고난도 체험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눅6:24-26절에 '그러나 화 있을찐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찐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찐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분명히 지금 '부유하고 배부르고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 받는 사람, 현실에 만족하는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런 사람은 현실에 만족하고 집착해서 그만 이십 년의 태평세월에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기도하는 법을 잊어버린 아사 왕처럼 영적으로 죽어버리기 때문입니다. /할/
이러므로 우리의 환경가운데 고난의 밤을 맞아 슬픔이 닥쳐온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를 채찍질하시고 징계하십니다.
욥5:17-19절에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아멘!/
요삼1:2절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영혼이 잘 되려면 햇빛 비취는 좋은 날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영혼이 잘되기 위해서는 비 오는 날과 바람 부는 날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환란과 시험이 다가와 눈물을 흘리며 금식하고 주님께 부르짖어 기도할 때가 있어야 합니다.
고난이 오는 것은 우리를 망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앙의 밥을 주어 신앙이 더욱 뜨거워지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는 자가 되어서 하나님께 응답 받고 체험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기 위함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이러므로 아사 왕은 20년 동안 태평세월을 지내면서 이 세상의 연락에 취해 신앙을 잃고 타락했다가 끝내는 죽음을 맞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불쌍합니까?
②아사 왕은 신앙을 잃고 문제에 부딪혔을 때 하나님의 신령한 믿음의 방법을 취하지 아니하고 인간적인 육신의 방법을 취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유다를 쳐들어 왔을 때 하나님 앞에 나아가 부르짖는 것을 잊어버리고 허둥거리며 자기의 명철을 이용했습니다. 그래서 아사 왕은 하나님의 소유인 성전의 은금이나 왕궁의 은금을 가리지 아니하고 아람 왕에게 주면서 '당신의 아버지와 우리 아버지가 서로 동맹을 맺고 화친한 것처럼 당신과 나도 화친하자 이 은금을 드릴 터이니 이걸 받고 이스라엘군대를 쳐주시오'
여기서 아람 왕에게 성전의 은금을 내어준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범죄보다 더 큰 죄악으로 하나님을 팔아 넘긴 악행이 됩니다.
10절에 또 아사왕은 선견자 하나니가 와서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는 것을 책망하자 왕은 크게 노하여 하나님의 종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죄를 지적 받고도 깨닫지 못하고 회개할 줄 모르는 악한 심령을 드려냈습니다.
다윗 왕도 하나님께 죄를 범한 일이 있었으나 하나님의 종 나단을 통하여 책망을 받고 가슴을 치면서 통곡하며 회개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회개하는 심령을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로 대하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교훈대로 살아야 합니다. 흑암에 권세에서 구원받아 하나님의 아들이라 인침을 받았습니다. 우리 주님은 마4:4절에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오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셨으며, 또 히10:38절에서 사도 바울은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 사람과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의 생각하는 그런 지혜나 지식이나 경험을 따라 살아서는 아니 됩니다. 인간의 경험이나 지혜는 단지 참고로 할 뿐 최후에 결단을 내릴 때는 하나님께 나와 기도하고 말씀과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과 함께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할/ 믿음으로 살기 위해서는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해야 하며 매일 기도하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이 길은 결코 쉽지는 않습니다. 하루아침에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과의 피나는 싸움이 있어야 합니다. 경건의 생활은 고된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훈련소에서 땀을 많이 흘리면 전쟁터에서 피를 적게 흘린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이 서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훈련은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엎드려 기도할 때도 훈련받는 초년병처럼 열심히 매어 달릴 때 성령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며 큰 권능이 임하시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멘!/
이렇게 믿음으로 살려고 하면 가까운 이웃들로부터 비난하고 조소하고 손가락질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아주 노골적으로 핍박도 옵니다. 그러나 축복의 길은 비난과 조소를 두려워하지 않고 굳건히 믿음에 설 때 우리의 가슴속에 생명수가 넘쳐날 뿐만 아니라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하나님의 은총에 붙잡히게 됩니다. /믿/
잠3:5-7절에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우리는 하나님과 인생을 동업한 존재입니다. 동업자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멀리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아사 왕처럼 됩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을 믿음으로 행하며 항상 하나님께 모든 일을 맡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을 우리가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까?
벧전5:7절에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할/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신앙 사상을 발견하게 됩니다.
⑴맡기는 내용입니다. 무엇을 맡기라고 했는가? '너희 염려'를 맡기라고 했습니다. 인생 길에 가장 무거운 짐인 '염려를 맡기라'고 했습니다.
⑵얼마만큼 맡길 것인가? 맡김의 정도입니다. 베드로는 '다 맡기라'고 했습니다. 일부만 맡기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업도, 건강도, 자녀도 다 맡기라고 하십니다.
⑶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맡기는 대상이 중요합니다. '주께 맡겨야'합니다. 우상에게 맡기거나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이 세상에는 마음놓고 나를 맡길만한 대상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염려, 근심, 걱정이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신당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오직 믿음의 대상이 하나님 한 분밖에 없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님은 요14:1절에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십니다.
⑷맡기는 태도입니다. '맡겨 버리라'입니다. ▶무거운 짐을 벗어 던져버리듯이 몽탕 맡겨 버리라는 것입니다. ▶염려하고는 관계를 끊어버리라는 것입니다. ▶'맡긴다.'는 말은 '믿는다.'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잠16:3절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여기 '행사'는 인생사의 크고 작은 모든 일들입니다. 가정의 일, 자녀들의 일, 사업장의 일, 부모님의 건강의 일들까지도 다 포함합니다. 하루를 하나님께 맡기는 일로 시작하여 1년, 10년, 일생을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모두 맡기는 것입니다. 하루의 건강 뿐 아니라 평생의 건강까지 맡기는 것입니다. 자녀들의 입시 문제 뿐 아니라 자녀의 삶 전부를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업의 계획까지도 다 맡겨야 합니다. 최고의 지혜자 솔로몬은 '너희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희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할/
시37:5절에서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여기 '길'은 과거 지나간 길이 아닙니다. 현재의 길과 앞으로 살아가야 할 미래의 인생의 길입니다. 이 길은 평탄한 길인지 험난한 길인지 아니면 좋은 길인지 슬픈 길인지 아무도 알 수 없는 미지의 인생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맡겨주면 '이루어 주신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이룬다'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믿/
시55:22절에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 하시리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다 맡기시기 바랍니다.
기도의 결과까지도 주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막11:24절에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아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맡긴 것만큼 책임져 주십니다.' 그러니까 맡긴 것만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맡긴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로 하나님께 내 문제를 맡기는 것, 내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시42:5절에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할/
④아사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선견자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10절에 '아사가 노하여 선견자를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그 말에 크게 노하였음이며 그 때에 아사가 또 몇 백성을 학대하였더라' 우리가 인생을 걸어갈 때 잘못된 길로 걸어가면 성령께서 선지자의 입을 통해 경고합니다. 또한 우리가 기도할 때 성령께서 고요하고 잠잠하게 여러분의 영속에 말씀하시고 말씀을 읽을 때 말씀이 두 날 가진 검같이 신령과 골수를 쪼개며 말씀으로 깨닫게 해줍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언제나 좋은 것만을 말씀해 주시지를 않습니다. 좋은 의사는 병들었을 때 병들었다고 지적해 줍니다. 좋은 의사는 환자가 죽은 병에 걸렸을 때 당신은 건강하다 당신은 괜찮습니다. 당신은 산다고 거짓말해서 환자가 준비 없이 죽어가도록 놔두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잘못된 것을 말씀의 검으로 찢고 수술합니다. 아사 왕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를 저버린 사람입니다.
▶삼상15장에 보면 사울 왕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사울은 사무엘을 통해 옛날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괴롭히며 싸움을 걸었던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에 사울은 군사를 동원하여 아말렉을 치고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따르지 않았습니다. 아말렉 왕 아각을 사로 잡아왔고 그 왕의 가축과 소유 가운데 모든 좋은 것을 남겨두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들만 진멸을 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사무엘이 책망하자 사울이 둘러대며 말하기를 '그것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 그러나 사무엘이 속아넘어갈 리가 없습니다. 그가 사울에게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
그리고 단호하게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그렇습니다. 사울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습니다. 25절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다'고 했고, 26절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다'고 두 번이나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다는 것은 말씀이신 하나님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아말렉을 진멸하라! 진멸하되 다 진멸하라!' 이 명령을 어겼고,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울을 버려 전쟁터에서 비참하게 죽게 했습니다.
여기 아사왕과 사울왕은 비슷합니다. 사울 왕을 한 번 정검해 보고 우리는 절대로 그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⑴성공했으나 실패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선택받아 왕의 자리에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왕의 자리에서 쫓겨납니다. 삼상31:1-6 보면 사울은 또 다른 전쟁에서 전사합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부상당한 후 자살해서 죽습니다. 그 아들들도 같이 전사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버림받은 인생'이요 '퇴짜 맞은 인생'입니다. 사울은 이래서 '성공 같은 실패'의 주인공이 된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결코 이런 인생이 되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 보시기에 성공한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를 다시 한 번 축원합니다. /아멘!/
⑵사울의 실패 원인이 무엇인가? 명목상의 신앙 때문입니다. 신앙에서 성공하면 인생에서도 성공하고, 신앙에서 실패하면 인생에서도 실패합니다. 그의 신앙은 겉보기에 형식적으로는 그럴 듯했습니다. 제사를 꼬박 꼬박 드립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입에 붙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았고,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흔히 '무늬만 가진 성도'라고 부릅니다.
마7:21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⑶감사가 빠진 신앙인이었습니다. 신앙은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하는 마음이 빠지면 그 신앙은 거짓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감사해야 합니다. 그것은 신앙의 기본입니다. 괜히 스스로 '거물'인척 하면 '고물'이 됩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이름부터 사울에서 바울로 바꾸었습니다. 사울은 '큰 자'라는 뜻이고, 바울은 '작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의 고백을 보십시오! 고전15:10절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렇습니다. 겸손히 감사하며 사는 신앙이 참 신앙입니다.
⑷그는 진실이 빠졌습니다. 신앙은 진실입니다. 그리고 정직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신 분입니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이런 편재성을 믿는다면 진실과 정직은 기본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하나님의 눈을 속이려 듭니다. 뻔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나중에 들통이 나니까 변명하고 자기 합리화를 시도하고 간교한 모습을 보입니다.
⑸헌신이 없는 믿음 때문에 그는 망했습니다. 믿음은 섬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 주시는 이유도 섬김과 헌신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오직 자신의 욕심만 채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좋은 것들을 챙깁니다(삼상15:9).
스코틀랜드의 경건한 장로 교인의 가정에 이런 가훈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섬기기 위해 구원받았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돈 버는 것도, 우리 자녀들이 공부하는 것도 나만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에게 나눠주기 위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할/
⑤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망했습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⑴세상을 향해 가다가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을 가리켜 회개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눅15장의 탕자의 비유에 보면,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 향락과 방종의 세계에 깊이 빠지게 되었습니다. 방종이나 타락의 생활은 출발은 감미로워도 마지막은 비참합니다.
아버지를 떠났던 탕자는 제멋대로 자유를 만끽했고 인생을 엔조이할 수 있었습니다 만은 그러나 오래가지 못해 갈 곳이 없고 쓸 것이 없었습니다.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마저도 마음껏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깨닫고 돌이켜 아버지께로 돌아왔습니다.
여기 아버지는 하나님을 상징한 것이고 아들은 성도를 상징한 것입니다. 이 사람은 가진 재산을 모조리 탕진했고, 술친구며 주변에 맴돌던 여인들이 그의 곁을 떠났으며 그가 갈 수 있는 길은 두 갈래였습니다. 하나는 아버지의 품이었고, 또 하나는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돌이켜 아버지께로 돌아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탕자의 위대한 회개입니다. 이 길이 살길입니다. /할/
여러분, 우리가 죄악의 길에서 돌이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은 축복 중에 축복입니다. /믿/
⑵주님을 의지하고 살다가 세상을 향해 떠나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불순종의 사람, 배신의 사람, 무지몽매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떠난 가룟유다는 무지몽매하게 목매달아 자살하고 배가 터져 창자가 터져 나왔습니다. 이런 사람을 시49:20절에서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본문의 아사왕이 이런 사람입니다. 선견자가 와서 꾸짖을 때 그는 통회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처럼 보좌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고 통회하며 자복했더라면 하나님께서 아사 왕을 일으켜 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꾸짖으실 때는 버리기 위함이 아니라 더욱 가깝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되는지 아십니까? 제일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 생활 속에서 회개가 되기 때문입니다.
옷에 먼지가 묻고 얼굴에 때가 묻는 것은 거울을 들어다 보지 않는 한 스스로는 알 수 없습니다. 말씀을 읽어야 죄를 알고 회개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읽으면 믿음이 생겨납니다. 롬10:17절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할/ 말씀 없이 인간적으로 아무리 '믿습니다.'하며 고함을 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밥을 먹지 않고 '나는 기운이 넘친다.'고 외쳐 받자 정말 기운이 있을 리가 만무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의 양식입니다. 말씀 속에 있는 영의 양식을 취하지 아니하고는 신앙에 힘을 얻을 수 없습니다.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말씀을 받아들이면 신앙의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말씀을 받아들이면 신앙의 힘이 생기고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갈 수 있는 자리에 들어서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말씀을 읽으면 헌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주님께 헌신하고 주님께 더욱 가까이 나가며 성공의 인도함을 받아야 인생을 성공적으로 보낼 수가 있습니다.
또한 말씀을 읽으면 기쁨이 생겨납니다. 마음속에 기쁨이 없으면 삶의 동기가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살면서 마음속에 기쁨이 넘쳐나면 생활이 윤택해지고 아름다워집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기쁨이 있어야지 예수님을 믿고도 기쁨이 없으면 잘못된 신앙입니다. 기쁨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상표입니다. 빌4:4절에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아멘!/ 그러나 우리의 삶 속에는 기뻐할 수 없는 슬픈 일이 종종 다가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기도하면 은혜의 파도가 밀려와 슬픔은 다 씻어주고 마음속에 기쁨이 넘쳐나게 해줍니다. /할/
이 은혜의 파도 없이 마음속에 기쁨을 일으키는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한번 기쁘다고 해서 계속 기뻐지지는 않습니다. 마귀는 우리의 기쁨을 빼앗으려고 끊임없이 독을 품어대기 때문입니다. 이 마귀의 독을 하나님의 권능으로 묶어 버려야 합니다. /믿/
이처럼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회개하고 믿음을 얻고, 헌신하며 기쁨이 넘쳐나면 타락하지 아니하고 믿음 위에 굳게 서게 됩니다. 아사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말씀을 들려주는 선견자를 오히려 감옥으로 보내므로 회개할 기회를 잃어버리고 죽음을 맞았던 것입니다.
⑥아사 왕은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버림을 당했습니다.
그가 발에 중병이 들었을 때 그는 의사들을 불러 열심히 치료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9:12절에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병들게 될 때 병원에 가서 치료받을 수 있는 것은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약5:15-16절에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찌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할/
그런데 아사왕은 발에 병이 점점 심해졌을 때 의원들에게만 의지하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의원들은 주술사였습니다. 미신적인 방법으로 치료하는 사람입니다. 아사 왕은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방법을 의지함으로 멸망을 받고 말았습니다.
결론적으로 아사 왕은 처음에는 믿음으로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육체로 불 신앙으로 끝났습니다. 그의 죄는 하나님을 찾지 아니함이요, 문제에 부딪칠 때 믿음을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했으며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의 쓴잔을 마셨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해야 합니다. 아니 더더욱 새로워져야 합니다. /아멘!/ 기독교는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그러니까 '처음보다 나중이 좋았더라'입니다. 우리는 아사 왕의 신앙을 본받지 말고 오직 하나님 편에 서서 '인정받는 신앙인, 축복 받은 신앙인 승리하는 신앙인'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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