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된 인생과 영광된 인생! (수 7:1/행 9:26-43)
어떤 농부가 가날픈 호박 넝쿨에 큰 호박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는 하나님을 향하여 불평을 했습니다. '저 가날픈 가지에 저렇게 큰 호박을 열게 하시면 어쩌자는 겁니까?' 그리고는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찼습니다.
그리고 이 농부가 호두나무 밑에 가서 앉아 쉬다가 위를 올려다보니까 그 나무에 호도가 열렸는데 큰 나무에 비해서 어울리지도 않게 너무 조그마한 열매가 맺힌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는 또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불평을 했습니다. '이렇게 큰 나무에 저렇게 작은 열매를 맺게 하셔서 어쩌자는 겁니까?'
이 농부는 한심하다는 생각으로 혀를 차고는 호두나무 밑에 누워서 낮잠을 잤습니다. 한참 잠을 자고 있는데 호두열매 하나가 이 불평 많은 농부의 이마에 떨어졌습니다. 깜짝 놀라 깬 이 농부는 호두나무 열매 하나가 떨어져서 자기 이마를 때렸다는 것을 알게 되자 번뜩 그의 뇌리를 스쳐 가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호두나무에 열린 호두알이 작았으니 망정이지 이 호두알이 호박만 했더라면 어쩔 뻔했는가?' 그리고는 하나님을 향해서 태도를 고치고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참 잘하셨습니다. 호박 넝쿨에서 큰 호박이 열리게 하시고 호두나무에서 작은 열매를 맺도록 만들어 놓으신 것 참 잘하신 일입니다.'
사람들은 다 자기 위주로 살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많은 인생들이 나오는데 그 중에서 보면 자기 위주로 산 사람이 있고 하나님 중심으로 산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은 항상 두 부류입니다. 인본주의 아니면 신본주의입니다.
구약에 '아간'이라는 사람과 신약에 '다비다'라는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서 ◀욕된 인생과 영광된 인생▶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수7장에 보면 아간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나옵니다. 이 아간이라는 사람은 누가 봐도 아주 욕된 인생을 살았던 사람으로 평가됩니다. 그의 인생은 결국 수치스럽게 끝을 맺고 말았습니다. 아간을 생각해 보면서 우리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결심과 결단이 우리 안에 있기를 소원합니다.
수7장의 배경을 보면, 지금 여호수아가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을 향하여 들어가고 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려면 반듯이 두 성을 점령해야 하는데 하나는 여리고 성이고, 또 하나는 아이 성입니다.
여리고 성은 구약 성경에서만 65번씩이나 언급할 정도로 아주 견고하게 지어진 철벽 성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그 여리고 성을 활 한번 안 쏴보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아주 쉽게 점령을 해버렸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사기가 충천해서 그 여세를 몰아 두 번째 요새인 아이 성을 치게 된 것입니다. 아이라는 말은 '소산'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주 적은 성에 인구 12,000정도인 작은 성으로써 여호수아가 점령하기에는 그렇게 부담되지 않은 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편안한 마음으로 아이 성을 진격해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쉽게 점령하리라고 믿었던 이 아이 성에서 그만 여호수아 군대는 36명의 전사자를 내고 3천명의 군대 모두가 혼비백산해서 도망치는 참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실망한 여호수아와 백성들은 탄식을 하면서 황당해 했습니다. 그래서 원인조사를 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아간이라는 사람이 여리고 성을 점령하면서 얻은 모든 전리품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야 되는데 그 물건에 손을 댄 것입니다.
수7:10-11절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한 나의 언약을 어기었나니 곧 그들이 바친 물건을 취하고 도적하고 사기하여 자기 기구 가운데 두었느니라"
아간이 바쳐진 제물 중에서 시날산 외투 한 벌과 은 200세겔과 금 한 덩어리를 훔쳐다가 자기의 장막에 숨겨 놓았습니다. 이 시날산 외투는 바벨론 산 의류를 말하는데 당시는 최고의 옷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왕족들이나 방백들이 주로 입는 외투였습니다. 아간이 그것을 훔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와 재앙이 온 백성에게 임한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 일에 분노한 백성들이 아간과 그의 가족들을 끌어내서 훔친 외투와 금 덩어리를 가지고 함께 골짜기로 데리고 가서 거기서 돌무더기에 쌓아 불살라 죽이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그 골짜기를 가리켜서 '아골 골짜기'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은 '슬픔의 골짜기'라는 뜻입니다. 그때부터 아골 골짜기하면 저주의 골짜기가 되어 버렸고, 아간이 생각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아간의 인생을 가리켜서 '욕된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인생을 욕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욕된 인생을 저주하십니다.
1. 아간이 왜 욕된 인생을 살았습니까?
①탐욕때문입니다.
탐욕은 과한 욕심을 말합니다. 사람이 욕심이 없이 살수는 없지만 욕심이 과하면 욕이 됩니다. 그래서 재물 욕, 명예욕이 지나치게 많은 사람은 실수하기 쉬운 것입니다. 여기 아간이라는 사람은 결국 이 탐욕 때문에 망했습니다.
골3:5절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약1:15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탐심이 있는 곳에 만족을 모르고 그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사기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며 불법을 행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간이 손 된 물건이 어떤 물건입니까? 하나님께 받쳐진 물건입니다. 여기에 손을 댔다면 탐욕에 눈이 먼 사람입니다. 수6:18절을 보면 그렇지 않아도 '전리품에 손을 대면 이스라엘에게 재앙이 내린다'고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물건에 손을 덴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것입니다. 말씀을 무시했다는 것은 말씀하신 하나님을 무시한 것입니다. 결국 아간은 자기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었고 결국 온 집안이 망하게 되었습니다.
탐욕이 있다면 이웃도 하나님도 안보입니다. 탐욕이 우상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탐욕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대로 살아야 합니다. /믿/
오늘날도 보면 이 탐욕 때문에 그 인생이 그만 욕되게 끝나버리는 사람들이 너무 나 많습니다. 권력에 탐욕을 부리다가, 물질에 탐욕을 부리다가, 명예에 탐욕을 부리다가, 그만 욕을 당하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탐욕은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 마지막을 욕되게 만들고 추하게 만듭니다. 바울은 갈5:16절에서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또 24절에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했습니다.
②'자기주의 즉 인본주의'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사람을 속여서라도 부정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으려는 욕심이 있습니다. 이것이 이기주의입니다. 나만 잘 살면 된다는 것입니다. 나만 배부르면 된다는 것입니다. 나만 수지맞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기가 나오고 속임이 나오고 불법이 나오고 변칙, 편법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런 삶의 태도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속이는 저울을 미워하신다'고 잠11:1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왜 저울을 속입니까? 자기에게 이익을 더 남기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내가 이익을 많이 남겼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누군가를 그만큼 더 손해 보였다는 말과 같습니다. 내가 오늘 큰 횡재를 했다는 말은 누군가가 큰 손해를 보았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이렇게 혼란스러운 것도 알고 보면 이 같은 자기주의, 이기주의의 태도들 때문입니다. 나만 잘되고, 나만 잘 먹고 살면 된다는 이기심 때문에 세상이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아간이 그래서 물건을 훔쳤습니다. 나만 수지맞으면 그 만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고 나발이고 나만 잘되면 된다는 그 이기심 때문에 그는 아골 골짜기에서 저주받고 죽었습니다. /얼마나 불쌍합니까?/
③아간은 '자신의 신분을 망각'했습니다.
아간은 유다지파입니다. 당시 유다지파는 최고의 명문 지파였고, 장자지파였습니다. 결국 그 지파에서 다윗이 태어났고, 예수님이 탄생한 것입니다. 그 지파의 자손이 아간입니다. 한마디로 명문가의 집안입니다. 그 사실을 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욕된 인생인 것입니다.
수7:1절에 보면 거기에 아간의 족보가 다 나와 있습니다. 좋은 일로 그 조상이 나온 것이 아니라 욕된 일로 나왔으니 얼마나 명예롭지 못합니까? 전설에 의하면 그 날 아간의 행위가 밝혀지던 날 유다지파의 청년들이 지파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흥분해서 아간을 끌고 아골 골짜기로 가서 그를 용사의 칼날로 죽이고 불태워서 돌무더기에 쌓아 놓았다고 합니다.
자기를 상실한 사람은 결국 이렇게 그 인생이 욕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이렇게 시끄러운 것도 모두 자기의 본분을 상실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굉장한 신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룩한 성도, 존귀한 자,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하여 '빛이고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큰 사건의 주역들을 보면 모두가 크리스천들입니다.
우리는 지난번 DJ 정권 때 '옷 로비 청문회'에서 하나님이 재판 받은 것을 보았습니다. 자신의 신분을 망각한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이 수모를 당하신 것입니다.
④왜 사람들이 욕된 인생을 삽니까?
한마디로 종말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가서 심판을 받는다는 종말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방종하거나 자기 본분을 망각하지 못하게 하는 아주 중요한 정신입니다.
사람이 방종하다가도 이 종말의식을 생각하게 되면 그 방종에서 탈출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막강한 권력을 누리고 있어도 이 의식만 있으면 자신을 지키고 욕망을 제어할 수가 있습니다.
히9: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세계를 제패하였던 알렉산더 대왕 이야기입니다. 지혜로운 신하에게 대왕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정치를 잘 할 수 있겠는가?' 그 신하는 죽은 해골을 가지고 와서 말을 합니다. '이 해골을 책상 위에 놓고 정치를 하십시오.'
그 후 알렉산더는 해골을 책상 위에 놓고 정치를 했습니다. 그는 그 해골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다짐을 했습니다. '나도 이렇게 될 것이니 다 버리고 오직 정치만 잘 하자'고 다짐한 것입니다. 그래서 해골이 될 몸이니 전리품은 하나도 갖지 말고 다 싸운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깨끗한 정치를 했습니다. 모두를 버리고 오직 한 가지에만 전념했습니다. 그는 마지막 죽음 앞에서 '빈손 들고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보여주라고 하면서 관에서 양손을 내놓게 했다고 합니다. 위인다운 삶의 철학입니다.
▶사람은 대게 어린아이 때는 장난감에 의해 움직인다고 합니다. 그리고 10대가 되면 대부분 이성에 의해서 움직이게 되고 30대가 되면 사업을 위해서 온 정열을 쏟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다가 40대가 되면 명예를 찾기 시작합니다. 그때는 명예를 위해서 온 힘과 열을 쏟습니다.
그러다가 5-60대가 되면 모두 철학자가 된다고 합니다. 사람이 이 나이가 되면 모든 종교적인 사람이 되고 철학자가 됩니다. 사람들은 그때부터 비로소 인생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고 종말을 생각하게 되고 인생의 깊은 의미를 깨우쳐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사람이 나이가 들게 되면 모두 철학자가 되게 만드셨고 종교성을 가지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게 되면 부리던 탐욕도 조절하게 되고 탈선하던 생활에서도 돌아오게 되고, 인생의 길이 생각나게 되고 죽음을 생각하게 되고 비로소 종말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종말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언젠가 하나님 앞에 선다는 이 종말의식이 있는 사람은 세상 함부로 살수가 없고 방종할 수도 없습니다.
▶1950년 스웨덴의 작가 '라게르크비스트'(1891-1974))라는 사람은 예수님이 빌라도의 재판을 받을 때 명절을 당하면 총독이 무리의 소원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전례가 있어서 민중을 향하여 빌라도가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고 물으니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라'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바라바는 살아났습니다. 그 때 살인강도 바라바의 회심을 다룬 작품 '바라바'를 발표했습니다. 그는 그 작품으로 인해서 그 다음 해인 1951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간단합니다. 바라바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군중들에게 섞이지도 못하고 멀리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았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아니셨다면 자기가 마땅히 거기에 매달렸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살인강도 바라바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무리 그가 흉악한 죄인이었지만 자기 때문에 의로운 사람이 대신 죽어야 한다는 사실이 고통스러웠습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데' 하는 회한의 정이 그의 마음속에서 맴돌기 시작했습니다. 며칠이 지났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이상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는데 다시금 살아나셨다는 소문이었습니다. 바라바는 그 사실을 좀 더 파악해 보기 위해서 예수님의 제자들과 접촉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가까이해 주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바라바는 다시금 옛날 생활로 되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닥치는 대로 도적질을 했습니다. 때로는 강도 짓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끊임없이 골고다 사건의 충격이 맴돌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는 다시금 로마 병정들의 손에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노예가 되었습니다. 로마로 팔려갔습니다. 거기서 바라바는 노예 생활을 하는 가운데 아주 독실한 기독교인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바라바는 그에게서 감화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라바는 노예 생활을 하는 가운데 기독교인이 되었고 예수를 잘 믿는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로마의 황제 네로는 로마 시가지에 불을 지르고 그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렸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체포를 당했습니다. 그 때 바라바도 스스로 이렇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나도 기독교인입니다. 나를 잡아가십시오!' 처음에는 아무도 그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바라바는 스스로 체포를 당했습니다.
로마의 원형극장 안에는 수많은 십자가들이 서 있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죽어가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위로했습니다. 하늘나라의 소망을 이야기하면서 서로를 격려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바라바에게 만큼은 말을 걸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어디까지나 바라바는 살인강도요 흉악한 범죄자였습니다. 바라바는 끝까지 고독했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걸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가운데 밤이 깊었습니다. 구경꾼들도 다 지나갔습니다. 어두움을 밝히고 있던 횃불도 하나 둘 씩 꺼졌습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순교하는 사람들도 숨이 다 멈추어졌습니다. 그러나 살인강도 바라바만 홀로 생명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러다 바라바도 기운이 진했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어두운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오, 주여! 내 영혼을 당신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그러면서 바라바도 조용히 숨을 거두게 됩니다. 이것이 이야기의 줄거리입니다. 예수 안에 변화된 인생은 욕된 인생이 아니라 영광된 인생으로 바뀌게 됩니다. /할/
⑤욕된 인생을 살았던 아간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그는 탐욕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자기주의, 이기주의로 살았고, 자신의 신분을 망각했고 종말의식을 잊어버린 사람입니다. 그러다가 욕된 인생을 살다가 비참하게 저주받고 아골 골짜기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절대로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 앞에서, 또 자기 앞에서 영광된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삶을 '하나님 앞에 경건, 이웃 앞에 경건, 자신 앞에 경건'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삶이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할/
2. 이제 행19장에 나오는 '다비다'라는 인물을 보겠습니다.
행9장의 배경을 잠깐 정리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룻다라고 하는 곳에 전도를 갔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순회전도자였습니다. 우리나라에도 한때 순회전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김익두, 길선주, 이성봉' 같은 부흥사들은 그때 순회 전도자들이었습니다.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전도 집회를 가졌습니다.
여기 베드로도 지금 순회 전도 차 룻다라고 하는 곳에서 전도를 하고 있는데 그때 그곳에서 약 18Km나 떨어진 욥바라는 곳에서 몇 사람이 다급하게 찾아와서 하는 말이 '사람이 죽었으니 빨리 가서 살려달라'는 것입니다.
그 죽은 사람이 누구냐 하면 다비다라는 여제자라고 합니다. 유대이름으로는 '다비다'이고, 헬라 이름으로는 '도르가'라는 여인입니다. 지금 다비다가 죽었으니 빨리 가서 살려달라고 애원을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일행을 따라서 급히 욥바로 갔습니다. 가 보았더니 다비다의 사신을 깨끗이 정돈해서 다락방에 눕혀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주위에는 여러 명의 과부들이 모여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울고 있었습니다.
▶나라마다 보면 장례 법이 각각 다릅니다. 아랍 국가는 사람이 죽으면 그 날로 모래사막에다 장사를 지냅니다. 애굽 나라에서는 죽은 사람을 미이라로 만들어서 얼굴에 화장을 하고 정장을 입혀서 입관하되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상반신을 내 놓고 장례를 치른답니다.
우리나라는 사람이 죽으면 무지막지하게 21마디를 다 묶어서 입관한 다음 3일 후 가서 장례를 치릅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전통을 보면 사람이 죽으면 하루를 넘기지 않습니다.
행5장을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었을 때 곧 바로 메워다가 장사를 지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 법에는 죽은 시체를 가까이하는 것도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무덤을 스치거나 시체를 보기만 해도 부정하다고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다비다의 시신을 깨끗이 정돈해서 다락방에 놓고 울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파격적인 행위이지만 그 속에는 믿음이 있는 행동이고 처사였습니다.
왕상 17장을 보면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 죽었는데 그때 멀리 있던 엘리야가 과부의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와서 그 죽은 아이를 안고 다락방에 올라가서 그 아이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더니 그 아이가 살아난 기사가 있습니다.
또 왕하 4장을 보면 수냄 여인의 아들이 죽었을 때도 갈멜산에 있는 엘리사를 모시고 와서 그 아이를 안고 다락방으로 올라가 침상에 높여 놓고 간절히 기도해서 살려냈습니다.
그러니까 다비다의 죽음을 목격한 사람들이 그 사건들을 떠올리며 룻다에 있는 하나님의 종 베드로를 모셔온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와서 보니까 여러 명의 과부들이 모여서 울고 있습니다.
이 과부들은 평소 다비다의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다비다의 죽음을 애석해 하고 있으며 진실로 울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죽었을 때 이렇게 진심으로 울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인생은 성공적으로 인생을 살아간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런데 사람이 죽었을 때, 우는 것은 가만히 보면 모두가 자기 신세타령을 하면서 우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이 불쌍해서 우는 것보다는 자기 신세타령이 더 많습니다. 그런데 여기 다비다의 죽음을 놓고 동네의 과부들이 다 모여 울고 있는 것은 그런 눈물이 아닙니다. 모두 다비다는 생각해서 우는 울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다락방으로 올라가서 죽어 있는 다비다에게 '다비다야 일어나라'고 40절에서 명하였습니다. '일어나라'는 말은 아람어로 '달리다굼'입니다. 지금 베드로가 예수님께 배운 대로 하고 있습니다.
막5장을 보면 회당장의 딸이 죽었을 때 예수님이 가셔서 그 아이에게 '달리다굼'했습니다. 그 말은 '내가 너를 일으켜 세우노니 일어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여기서 '달리다굼' 합니다. 그 말은 '주님이 일으켜 세우신다. 그러니 너는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할/
그랬더니 죽었던 다비다가 일어나 앉았다고 40절에 기록합니다. 여기서 죽었다가 살아난 것은 기적 중에 기적인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그 다비다가 어떤 인생을 살았기에 이런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까?
▶우리도 다비다의 인생을 한 번 돌아보고 우리들도 그런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①다비다는 선하게 살았습니다.
사람은 폐일언하고 선하게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기본이 되는 삶의 모습입니다. 본문 36절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 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욥바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서북쪽으로 약 55Km 떨어진 거리에 위치한 해안 도시로서 현재는 '야파'로 불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처음으로 여 성도에게 제자란 말을 썼습니다. 이 여인은 헬라파 유대인입니다. 이 다비다라는 이름의 뜻은 '선하다.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이 여인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스러운 여인으로 불리어졌습니다.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여인, 어떠한 여인이 아름다운 여인입니까? 얼굴이 예쁘고, 팔등신으로 쭉 빠진 균형 잡힌 몸매가 아름다운 여인입니까? 물론 이런 여인은 보기에도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아름다운 여인이란 맑은 영혼을 소유한 신앙의 선행을 베푸는 그런 여인을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다.
벧전3:3-4절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심령이 썩지 않고 살아있는 사람, 주님이 주신 사랑의 마음을 가진 여인이 바로 다비다였습니다. 그래서 사랑스런 여인은 그 생활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딤전2:9-10절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다비다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로 주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사랑의 생활을 실천하는 여인이었습니다. 다비다를 '여 제자'로 부른 것은 그녀는 벌써 그리스도인이 되어 주님을 섬기는 축복의 멤버가 된 여인이기 때문에 그를 여 제자로 부른 것입니다.
선행과 구제는 주님의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그가 죽었을 때 그렇게 애석해 하고 슬퍼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다비다는 선행의 삶을 살았습니다. 모범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덕을 세우며 살았습니다. 본을 보이며 살았습니다. 바른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다비다를 다시 살릴 수 있을까?' 다급한 마음으로 베드로에게 가서 매달린 것입니다. 얼마나 흐뭇한 광경입니까?
이것이 바로 인생의 맛입니다. 이것이 이웃이고 우정이고 사람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살았느냐 그것은 죽은 날에 가 보아야 평가가 나옵니다. 그래서 사람의 평가는 죽은 후에 내려집니다. 그래서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 석 자를 바로 남겨야 한다.'는 속담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생전에 높은 권좌에 앉아서 부귀, 영화, 공명을 다 누리는 아첨의 소리를 다 들었지만 죽은 후에 세인들로부터 무서운 지탄을 받고 악평을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생전에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아픔을 주고 불화를 일으키고 분란을 일으키다가 일생을 마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게 살다 가면 사람들이 별로 애석해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만큼의 시간을 살다가 가는데 그 시간동안 명예로운 이름을 남기고 가기 위해서 선하게 착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원수 맺고 살아가면 안 됩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아픔을 주거나 불화를 안겨 주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지나친 탐욕으로 그 인생을 욕되게 해서도 안 됩니다. 주어진 환경 속에서 감사하며 선하게 살아야 합니다.
본문에 다비다는 비록 가진 것이 많지는 않았지만 자기의 주어진 조건 속에 선행을 다했습니다. 당시 과부들은 소외된 계층이요 가난의 대명사였습니다. 그들을 돌본 것입니다.
다비다는 성공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그의 이름의 뜻인 '선하게 아름답게' 살다 간 여인입니다. 결국 이 여인은 이름 값을 하고 죽은 것입니다. /아멘!/
②베푸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구제를 많이 했습니다. 39절에 보면 과부들이 베드로에게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였다고 합니다. 이 말은 죽은 다비다가 가난한 과부들의 옷을 손수 바느질해서 입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과부들이 죽은 다비다를 위해서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되도록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람은 나누는 삶을 살 때, 가장 행복하고 기쁩니다. 거기에 삶의 값이 있습니다. 사람이 평생을 살면서 베푸는 삶이 없으면 자신이 어려운 일에 처해 있을 때,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심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들에게는 먼저 찾아가 주는 삶, 그래야 나도 어려울 때가 오면 도움을 받게 됩니다. 철저하게 심고 거두는 법칙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인생을 좋은 것을 심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웃이고, 우정이고, 사랑입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다비다는 배고픈 자들에게 빵을 주었고, 헐벗은 자들에게 옷을 지어 입혔습니다. 사람이 가장 멋있고 인간다운 때가 언제가 하면 바로 베풀 때입니다.
나눔의 생활은 주는 이에게도 받은 이에게도 기쁨이 있습니다. 거기에 인생의 행복이 있고, 기쁨이 있고, 삶의 값이 있습니다. 주님은 주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는 자가 수지맞습니다.
눅6:38절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여러분, 사해 바다가 왜 죽음의 바다가 되었습니까? 받기만 하고 줄 줄 모르기 때문이요, 움켜쥐기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음의 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갈릴리 바다는 다릅니다. 얼마나 풍요롭습니까? 그 속에 수많은 물고기 떼가 뛰놉니다. 주변에 있는 수목들도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물이 고여 있지 않고 계속해서 순환하기 때문입니다. 요단강을 통해서 자기의 물을 내려보낼 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죽음의 바다처럼 적막하고, 무가치한 삶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의 삶은 갈릴리 바다처럼 늘 풍요롭고 축복된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그러기 위해서 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할/
⑴성경은 '주라'고 하십니다! 주는 것이 풍요로운 삶을 사는 비결이 됩니다. 주님은 주라고 하시면서 아무런 조건도 덧붙이지 않으셨습니다. 누구에게 주라는 것입니까? 필요한 자에게 누구든지 주라는 것입니다. 언제 줍니까? 아무 때라도 주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주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무엇을 주라는 것입니까? 그 사람의 필요를 주라는 것입니다. 물질이 필요한 자에게는 물질로, 사랑이 필요한 자에게는 사랑으로, 복음이 필요한 자에는 복음으로 주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성전 미문에 않자 있는 거지 앉은뱅이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을 너에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어라!'고 외칠 때 그는 벌떡 일어났습니다.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언제든지 주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곳에는 풍요로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할/
⑵주는 자에게 주님의 보상이 따릅니다.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여러분, 사람의 손이 큽니까? 하나님의 손이 큽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손이 더 크십니다. 사람에게 보상받지 못했다고 섭섭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갈6:9절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할/
⑶어떤 보상입니까?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후히 되어: 쩨쩨하게 주시는 문이 아니라 많이 주신다는 말입니다.
㈁누르고: 꾹꾹 눌러서 조금이라도 더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흔들어: 사이사이에 빈틈이 하나도 없도록 주님께서 채워 주신다는 것입니다.
㈃넘치도록 하여: 그렇습니다. 주님은 넘치게 주시는 분이십니다.
다윗의 고백은 '내 잔이 넘치나이다.'입니다. 이 말씀 속에 몇 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내 그릇에 비해 부어주신 은혜가 과분하다는 뜻입니다. 정직하게 표현해 보면 내 그릇은 작은 종지에 불과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동이로 부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내 노력에 비해 성과가 크다'는 감격의 표현입니다. 크게 봉사하지도 못했는데, 크게 부르짖는 기도도 못했는데, 하나님이 은총을 쏟아 부어 주셨음을 고백합니다. ▶내 잔이 넘친다는 이 말씀 속에는 지금 계속 이어지는 진행형입니다. 어제까지 넘치게 부어주신 하나님이 아니라 오늘 지금, 현재 이 시간에도 넘치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의 잔을 채워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
그 분이 채워 주셔야 '우리의 일생이 풍부합니다. 삶이 풍성해 집니다. 신용의 잔도 넘쳐 납니다. 기쁨의 잔이 넘칩니다. 행복의 잔이 넘칩니다.' /할/
㈄안겨 주리라: 우리가 찾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하나님이 직접 찾아오셔서 하나님의 축복을 한 아름 우리의 품에 안겨 주신다는 것입니다.
③다비다는 좋은 이웃으로 살았습니다.
먼 사촌보다 가까운 이웃이 더 좋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웃은 그만큼 소중한 존재입니다. 사람은 좋은 이웃을 만나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 축복입니다. 또 좋은 이웃이 되어 주는 것은 축복입니다. 그리고 좋은 이웃으로 살아가는 것도 복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한 동네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것도 이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다비다는 이웃들에게 진실한 이웃으로 살았습니다. 이런 다비다가 있었기에 제 2의 다비다, 제 3의 다비다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아멘!/
어떻게 보면 여기 다비다는 세상을 참 초라하게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가 남긴 유산이라고 하면 속옷과 겉옷 몇 벌뿐입니다. 그런데도 이 여인은 이웃들에게 아주 진실한 이웃으로 살았습니다. 선행을 하고 베풀어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의 감동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생사는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베드로가 다비다는 살린 것이 아니고 베드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살리신 것입니다. 왜 살려주셨는가 하면 하나님도 감동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아간과는 대조적입니다. 그러니까 인생은 욕된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다비다는 영광된 인생을 살다간 사람입니다. 우리도 이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멘!/
④다비다의 일로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나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40절에 보면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 보내고' 베드로의 치유의 모습은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은 것입니다. 막5:40절에 보면, 예수께서 아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에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다 내어 보내고 살리셨습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야이로를 살릴 당시 예수님이 하신 대로 배운 것 같습니다.
원래 제자는 스승을 본받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무릎을 꿇고 기도' 했습니다. 지금 베드로는 혼자 깊은 침묵 속에서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독과 침묵과 간절한 기도만이 하나님의 능력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막9:29절에서 말씀하시기를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의 기도의 능력이 다비다를 살렸습니다.
41절에 그가 살아났습니다. '그의 산 것을 보이니'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이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과학이 아닙니다. 과학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의 기적입니다. 이 기적은 논리나 지식이나 토론과 같은 심중에 의해서 얻어진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얻어지는 체험입니다. /믿/아멘!/
42절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 다비다가 죽었다가 살아난 소문이 그 지방에 퍼지니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우리는 이 시간에 나 자신을 향하여 몇 가지 질문을 해 봐야 합니다.
⑴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예수님께로 오는가 아니면 떠나는가?
⑵나 때문에 예수님이 '증거'되는가 아니면 가리워 지고 있는가?
⑶나 때문에 형제가 위로를 받는가 아니면 상처를 받고 있는가?
⑷나 때문에 교회가 평안한가? 아니면 시끄럽고 다툼이 일어나는가?
⑸나 때문에 교회가 부흥하고 있는가 아니면 부흥의 암적 구실을 하고 있는가? 여러분, 우리 이런 비전의 기도제목을 갖읍시다. '하나님! 내가 만나는 한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게 하시고, 그 영혼 변화시켜 30배, 60배 100배 열매 맺게 하소서.'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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