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나님이 광야를 지나게 하는가? (출 17:1-7)
우리 국민의 의무 가운데 교육의 의무가 있습니다. 교육은 개인과 국가가 다 같이 잘 살아가는 방편이 됩니다. 그래서 의무교육 수준이 더 높은 나라일수록 그 나라가 잘 살고 모든 면에서 앞서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이만큼 잘 살게 된 것은 일찍부터 교육에 투자했기 때문입니다. 극성스러운 엄마들의 힘이 큽니다. 그래요! 아는 것은 힘입니다. 알기 위해서는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도 하나님의 학교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이 학교를 꼭 졸업하게 만드십니다. 그곳은 바로 광야학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학교를 만들어서 그곳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기르고 영적 훈련을 받게 하십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광야를 거치지 않으면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광야는 한 마디로 영적인 훈련을 받는 훈련소와 같은 곳입니다.
오늘날 광야학교는 성도들의 고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수없이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광야를 통과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육신의 질병으로 또 어떤 사람은 사업의 부도로, 또 가정의 불화로, 자녀들의 문제로, 또한 사람을 잘못 만나 고통을 받기도 합니다.
모함을 당하기도 하고, 어려운 처지에 처하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만약 이와 같은 처지에 있는 분이시라면 아마도 당신은 지금 광야학교를 지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행여나 오늘 이 자리에 광야학교를 지나고 있는 성도 님들이 계십니까? 그 학교를 졸업하셔야 합니다. 참고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약1:2-4절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우리가 인생에 광야를 통과할 때, 불평과 원망을 품으면 부정적인 마음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고난 그 자체보다는 부정적인 마음이 영혼을 파괴하여 쓴 물을 내게 됩니다. 그리하면 내 안에 평화와 기쁨과 소망은 산산조각이 나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고난이 왔을 때는 믿음으로 받으시고, 긍정적으로 바라보면 그 고난은 악마로 왔다가 천사로 바꿔지게 됩니다. /믿/아멘!/
1. 왜 고난이 우리에게 유익이 됩니까?
▶고대 희랍의 전설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솜씨 좋은 어느 조각가가 신전에 장식할 석상을 만들기 위하여 커다란 대리석을 정으로 쪼개고 있었습니다. 열심히 대리석을 파 나가고 있던 조각가의 귀에 신음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자세히 들어보니 그것은 대리석이 내는 고통스러운 신음소리였습니다. 조각가가 '왜 신음소리를 내느냐?'고 물었더니, 대리석은 '당신이 지금 나를 날카로운 정으로 쪼고 있지 않습니까? 내 몸에 붙은 살점이 이렇게 무참하게 쪼개져 나가 땅에 버려지지 않습니까?'하고 괴로운 듯이 불평을 합니다.
그러자 조각가는 크게 노한 목소리로 꾸짖기를 '어리석은 대리석아 내가 너의 몸을 다듬어서 훌륭한 석상으로 만들지 않았다면 너 같은 뭉뚝한 돌덩이가 무슨 재주로 그 거룩한 신전에 세워져 후세 사람들에게 존경과 찬양을 받을 수 있겠느냐? 너의 고통은 일시적이다 잠시만 참어라'고 호통을 쳤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고난은 새로운 삶을 창조하는 도전이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평안한 생활 속에서는 발전과 변화가 없습니다. 신앙의 위기도 평안하다 할 때에 더 찾아옵니다.
▶고난은 사람들을 회개하게 합니다. 인간은 고난이 다가와야 깨어집니다. 사람이 자기 고집대로 살고 하나님을 반역하며 살다가도 고난을 당하면 자아가 깨어져 인간적으로 모든 것이 정비되고 하나님 중심으로 서게 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고난은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갈 수 있도록 해주고 하나님만을 전폭적으로 의지할 수 있도록 합니다. 신앙적으로 나태했던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면서 새벽기도를 불평 없이 나가고 철야예배도 열심히 하게 되고 세상의 환경과 조건도 바라보지 않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됩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시55:22절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 /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로 신음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애굽에서 건져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모세의 인도로 애굽에서 나오긴 했지만 어느 곳으로 어떻게 가야할 지 잘 알지 못한 채 떠났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그들이 가야할 방법을 결정해 주셨습니다. 그 길이 바로 홍해를 통한 광야의 길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것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곳으로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애굽을 따라 가나안으로 가는 길은 둘이었습니다. 하나는 애굽의 북쪽에서 가나안의 남쪽으로 가는 지름길로써 직행하다보면 4-5일 밖에 걸리지 않는 짧은 길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홍해를 건너 광야를 횡단하는 길인데 매우 멀고 험한 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멀고 험한 그 길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그들을 훈련시켜 강한 선민이 되게 하시려고 광야학교에 집어넣은 것입니다. /믿/
▶중국 사람들은 아이가 갓 태어나면 먼저 젖을 먹이는 것이 아니고 '오향'이라 해서 다섯 가지의 맛을 알게 한다고 합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가장 먼저 초 한 방울을 혀에 묻혀 준다고 합니다. 초가 얼마나 십니까? 그러면 아이는 얼굴을 찡그릴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소금을 혀로 핥게 합니다. 세 번째로는 씀바귀 대에서 나오는 하얀 진 액을 혀에 묻혀서 맛을 보게 합니다. 그러면 이 아이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울어댑니다. 그때 가시로 혀끝을 살짝 찌르면 아이는 더욱 사정없이 울어댑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탕을 혀끝으로 핥게 해줍니다. '쓴맛, 신맛, 짠맛, 아픈 맛 다 보인 후에 비로소 단맛'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맵고 짜고 쓰고 아픈 맛을 감내하지 못한다면 인생의 단맛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음식을 통해서 교육을 한다는 것입니다.
▶고난이 인생을 명품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유익이 됩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향수는 '프랑스 제'입니다.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향수는 병든 고래의 몸에서 짠 기름을 원료로 하여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즉 아픔과 고통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우황청심환은 강심제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우황은 병든 소의 몸에서 만들어집니다. 병들지 않은 소에 몸에는 우황이 없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공명 좋은 바이올린은 로키산맥의 수목 한계선에서 자란 나무로 만든 바이올린이라고 합니다. 높고 깊은 계곡에서 비바람과 눈보라의 추운 날씨의 고통 속에서 죽지 않고 살아난 나무가 공명에 가장 좋은 원료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고난과 역경 뒤에 위대한 작품들이 나오고 명품들이 나오듯이 광야학교를 졸업하면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축복이 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몸이 너무 약하여 병약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병 때문에 체질이 약하여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길 '나는 약하기에 육체로 힘을 쓰며 살 수 없습니다.'하고 기도했더니 하나님은 그에게 '생각하고 사색하는 습관'을 주셨습니다.
그가 생각하고 사색하다가 위대한 철학자가 되어 '순수이성 비판론'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의 몸의 병약함이 오히려 인생을 풍요롭게 만든 것입니다. /할/
벧전2:19절에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또 벧전 3:17절에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고난은 인생을 정금으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과정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질병, 역경, 부도, 자녀의 문제 등의 수많은 고난은 정금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훈련 과정'입니다. 욥23:10절에서 욥의 고백이 무엇인가?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고 했습니다. 그래요! 고난은 정금 만드시는 하나님의 훈련 과정입니다. /할/
2. 고난! 여기에는 몇 가지 뜻이 있습니다.
⑴인생이 걷고 있는 길이 인생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즉 인생사라는 게 자기 뜻대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행복해지고 싶지만 불행해지고, 잘 살고 싶지만 못살게 되고, 건강하고 싶지만 병들고 성공하고 싶지만 실패하는 까닭은 세상이라는 게 내가 원하고 바라는 대로 안 된다는 이치 때문입니다.
렘10:23절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 하니이다" 즉 하나님께서 걸음을 지도하신다는 것입니다. 또 잠16:9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잠16:3절에서도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 /할/
⑵광야학교를 통하여 연단의 길은 멀고 험하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입니다.
물론 쉽게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과 고난의 의미를 바로 깨닫지 못합니다. 자기 힘으로 성공하고 잘 살게 된 줄로 오해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메시아 민족으로 연단 하신 것입니다. 훈련과 연단은 하루아침에 되지 않습니다. 멀고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는 것은 돌연변이입니다. 대개 금방 사라집니다. 그러나 다져서 올라간 스타는 영원히 빛을 내게 됩니다.
그래서 주석가 메튜헨리는 인생의 여정 길을 말할 때, '우리의 여행이 끝날 때, 때가 이르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⑶고난을 통하여 자기를 돌아보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범죄 할 때 징벌하십니다. 믿음의 사람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범했을 때 하나님은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 하리라'고 하셨습니다(삼하12:10-12). 하나님의 기대가 크고 하나님께 총애를 받는 사람일수록 죄를 용납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가혹하게 징벌하십니다.
한편 다윗은 하나님께 징벌을 받아 극심한 고난을 당하게 되었을 때 시32:4-5절에서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또 그는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⑷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그 멀고 험한 길로 인도하신 것은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만일 가까운 길로 가게 되면 블레셋 땅을 통과해야 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당시 싸움 잘하기로 이름난 족속이요, 호전적인 민족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오합지졸입니다. 싸울 줄도 모릅니다. 블레셋과는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갑자기 애굽에서 도망 나오자마자 싸움이 벌어졌다면 이스라엘은 크게 당황하고 실망하여 애굽으로 되돌아가려고 아우성을 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너무도 잘 알고 계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먼 길을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체적인 섭리요, 배려입니다.
여러분! 오늘날도 하나님은 우리를 돌아서 가게도 하시고 기다리라고도 하십니다. 또 인생 길에 어둡게도 하시고, 고독하게도 하십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 속에는 하나님의 깊고 오묘하신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지나놓고 나면 '아하! 하나님이 그때 그래서 그렇게 하셨구나!' 깨닫게 되어 집니다. /믿/
⑸오늘 설교 주제가 광야입니다. 광야는 길이 없고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이 없고 기쁨이 없는 곳입니다. 본문 1절에는 마실 물이 없다고 했습니다. 광야는 세 가지가 없습니다. '길이 없고, 먹을 것이 없고, 재미가 없는 곳, 즉 즐거움이 없는 곳'입니다. 그래서 광야 길에서 흔히 일어나는 현상은 원망과 불평과 낙심입니다.
대게 고난 당할 때 원망 불평, 낙심이 찾아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습니다. 백성들이 기뻐 뛰며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리고 사흘 길을 걸어서 도착한 곳이 수르 광야입니다. 그곳엔 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물을 찾아 마라라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다행이 그곳엔 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물이 써서 먹을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이스라엘은 원망을 하기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이스라엘이 모세를 향해 원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모세를 원망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망에 길들여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걸핏하면 원망을 일삼았습니다. 물이 없다고 원망했고, 길이 험하다고 원망했고, 심지어 하나님이 매일 내려주신 '맛나'가지고는 영양실조에 걸린다며, 무화과며 석류 과일이 없다고 원망했고, 고기가 먹고 싶다고 원망했습니다.
원망에 길들여지면 원망이 많아지고, 감사에 길들여지면 감사가 많아지는 법입니다. 긍정에 길들여지면 인생만사를 긍정적으로 관망하고 해석하지만, 부정에 길들여지게 되면 모든 것을 부정적인 관점에서 듣고, 보고, 말하게 됩니다.
그래서 습관이라는 것은 귀합니다. '로버트 슐러' 목사님은 '불가능한 일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존재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생각 때문에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원망은 부정적인 입술의 고백이고, 마귀가 가장 좋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이래서는 아니 됩니다. 부정대신 긍정, 원망대신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우리는 원망하면 안 되는 대상 셋이 있습니다.
⑴하나님과 다투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 다툰다는 것은 하나님을 욕하고 원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달걀을 가지고 제 아무리 바위들을 친다고 해도 바위들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1세들은 결국 하나님과 다투다가 결국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⑵주의 종들과 다투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모세와 다툰 사건은 하나님을 시험한 사건으로 기록했습니다. 2절 상반 절에 '모세와 다투었다'고 했는데 2절 하반 절에서는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모세에게 '왜?' 라며 덤비는 것은 하나님께 덤비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모세를 반역하고 시험하는 것은 하나님께 반역하고 시험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 반역하면 되는 일이 없습니다.
또한 주의 종을 배신해도 되는 일이 없습니다. 주의 종과 다투면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성도가 목사와 다투면 손해를 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너희 영혼을 인도하는 자'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히13:17절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목사뿐만 아닙니다. 세우신 직분 자들과도 다투면 안 됩니다.
▶세계적인 하나님의 종 조용기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한때 골프를 즐겼답니다. 그런데 골프를 치면서 그 당시 말썽을 피우던 장로님, 권사님의 이름을 대며 골프 공을 때렸답니다. '○○장로 모가집니다. ○○권사 모가집니다'하며 힘껏 쳤더니 스트레스가 풀리더랍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난 후에 보니 그 장로님의 사업이 뒤죽박죽 되어가고, 또 권사님의 가정과 육신이 만신창이가 되더랍니다. 그 때 깨닫고 하나님께 회개했다는 간증을 들었습니다. 주의 종이 저주하면 저주가 임합니다.
민22:6절 "그대가(주의 종)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을 내가 앎이니라."
⑶이웃과 형제와도 다투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주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즉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 주님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또 형제와 다투면 하나님은 우리들의 기도와 찬송과 예배를 받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다가도 형제가 원망 살 일이 있으면 그 예물을 그곳에 놓아두고 먼저 화해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와서 드리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인생의 광야 길을 지날 때 불평하고 원망할 일들이 참 많습니다. 부모가 원망스럽고, 남편이 원망스럽고, 친구가 원망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어려울 때 좀 도와주었으면, 왜 못 본체 할까? 야속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원망하고 불평하면 내 마음이 먼저 섭섭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가 떠나갑니다.
욥은 그 많은 재산과 열 자녀들을 잃었지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악창까지 생겨 고통이 극에 달했을 때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잿더미에 앉아 기왓장으로 몸을 긁고 있었을 때 그의 아내조차 욥에게 '당신은 그래도 믿음을 굳게 지키겠는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욥2:9절에서 저주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결코 어리석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4. 욥1:21-22절 속에서 '욥의 신앙의 고백'을 들어보자!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⑴공수래공수거의 인생을 고백합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쉽게 표현하면 알몸으로 왔다가 알몸으로 간다는 고백입니다. 여러분! 욥의 이 신앙 고백이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줍니까? 유명 디자이너도 관속에 들어갈 때도 수의 한 벌이면 족합니다. 재벌 총수도 수의 한 벌 밖에 걸치지 못합니다. 우리 모두는 욥의 고백대로 알몸 인생입니다. /믿/
⑵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이 고백이야말로 알몸 인생 고백보다 더 위대한 고백이 아닙니까? 솔로몬은 그의 전5:15절에서 '저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 것도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⑶하나님만이 우리의 경배의 대상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고난과 절망 중에서 부른 찬송입니다. 욥의 찬송의 정신이 무엇입니까? 재산이 불타고 자식들이 참변을 당하고, 자신은 병들고, 아내는 곁을 떠나는 처절한 고난에 시달린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절대로 버릴 수 없다는 것이 욥의 찬양의 정신입니다.
⑷이 모든 일에 범죄 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우리가 이런 욥의 신앙을 배워야 합니다. /아멘!/
5. 왜 사람들이 원망합니까?
⑴불신의 결과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모든 원망은 하나님을 향한 불신에서 온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전쟁 때문에, 마시는 물 때문에, 길 때문에, 생활의 불편 때문에, 위기와 고난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런데 그 원망의 뿌리에는 불 신앙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믿음 없는 사람일수록 원망이 잦은 법입니다.
⑵자기가 져야할 책임을 남에게 떠넘기기 위해 원망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랬습니다.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을 서로 탓하고 원망했습니다. 아담 이후 모든 인간들은 자기의 잘못을 남에게 떠넘기기 일 수였습니다. 그 때부터 누구 탓이라고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⑶악한 습관 때문에 원망합니다. 감사하는 습관, 웃는 습관, 화목 하는 습관,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므로 나쁜 버릇은 빨리 버려야 합니다. 원망도 버릇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밟아 보지도 못하고 다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고전10:10절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6. 광야학교에서도 우리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 임마누엘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출13:20-22절을 보자! '그들이 숙곳에서 발행하여 광야 끝에 담에 장막을 치니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하시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자. 하나님은 광야 길에서 당신의 자녀들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항상 하나님이 그들 앞에 행하셨습니다. 미2:13절 '그들의 왕이 앞서 행하며 여호와께서 선두로 행하시리라' 하나님은 우리의 보호자요 인도자이십니다.
여러분, 아무리 인생광야를 만났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 인생 길에 앞서 가십니다. /믿습니까?/ 우리는 주님만 따라 가면 승리합니다. 찬434장에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내 주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 /할/
이스라엘이 낮에 행군할 때 구름기둥이 앞서 인도해 주었습니다. 태양이 작열하는 저 사막 지방의 열풍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는 요 며칠 더워서 고생들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그 사막의 열풍을 하나님은 구름기둥으로 덮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밤에는 환한 불기둥으로 그들을 지켜 주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기둥을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그 기둥이 멎는 곳에서 장막을 치고 쉬었습니다. 광야 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출13:22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평지를 지날 때도 험한 골짜기를 지날 때도, 낮에도, 밤에도, 저들이 보채고 하나님을 원망할 때도, 또 돌을 들어 모세를 치려고 할 때도 하나님은 사랑과 은혜의 기둥을 제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출16:13-20절에 보면 배고프다고 보채고, 고기 먹고 싶다고 소리 지르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은 맛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셨습니다. 맛나는 모양이 갓씨 같이 둥글고 색깔은 서리처럼 가늘고 흰 것이었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습니다.
출16:15절에 모세가 백성들에게 '이것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또 메추라기는 체구가 작고 길이는 7인치 정도 밖에 되지 않은 철새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철새 때를 이스라엘 진중으로 대 이동시켜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잡아먹게 했습니다. 그런데 먹을 것을 주실 때도 두 가지 원칙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매일매일 일찍 일어나서 거둬야 했습니다. 조금만 늦어도 썩어 없어집니다. 그리고 매일 하루 분씩만 가져와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믿지 못하고 저장 하고자 하는 욕심으로 일주일, 한 달 분을 모아 쌍아 놓았는데 이 만나는 24시간이 지나면 썩어 없어지게 되어 있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래야만 그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만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새로운 것으로 먹어야 합니다. /아멘!/
두 번째는 맛나를 주실 때도 토요일은 이틀 분을 가져가도록 했습니다. 그 이유는 주일은 먹을 걱정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그분의 뜻대로 살 때 범사에 형통한 복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영혼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내 영혼이 잘되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리라'고 축복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이 신 광야를 떠나 르비딤에서 장막을 쳤습니다. 백성은 마실 물이 없으므로 모세를 원망하고 당장 물을 달라고 소리칩니다. 그들은 손에 돌을 들었습니다. 당장이라도 모세를 죽일 것 같습니다.
이때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백성들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때 하나님이 '모세야 너는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내가 네게 지시한 한 반석 앞으로 지팡이를 들고 나아가라! 내가 호렙산 반석 위에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리하면 물이 나올 것이다.'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치니 반석이 터지고 물이 솟아올라 이스라엘이 다 먹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은 구약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상징적 의미를 우리에게 잘 계시해 준 내용입니다.
이 말씀의 해석을 바울은 고전10:4절에서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즉 반석으로부터 마셨다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물을 마셨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자기 자신이 반석임을 비유했습니다. '나의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본문에서 반석을 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위에 죽임 당한 것을 상징합니다. 이 말씀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에 성령님을 보내주실 것을 아름답게 묘사한 것입니다.
주님은 요7:37절에서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거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쳤다고 했습니다. 지팡이는 나무를 의미합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반석처럼 깨어졌습니다. 광야 시험 중에도 예수님을 만나면 생수가 터집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길에 목마름으로 고통 중에 있을 때, 반석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수를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어떤 분은 반석을 믿음으로 풀기도 합니다. 또 변치 않은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로 풀기도 합니다. 다 맞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너는 반석을 치라'는 말씀에 모세도 당황했을 것입니다. '땅을 파라, 모래를 파라'고 한다면 이해가 쉽습니다. 그런데 반석을 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 속에는 '믿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믿음으로 반석을 치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의 공식은 사람의 이성과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떤 과학적인 실험이나 논증으로도 밝혀지진 않습니다. 믿음의 역사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생각으로 지팡이로 힘껏 바위를 쳤다면 지팡이만 부러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반석에서 물이 솟아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도저히 불가능한 곳에서도 하나님이 가능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반석을 쳐야 합니다.
'하수를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이 지팡이가 무엇을 하던 지팡이입니까? 광야에서 양을 칠 때에 가지고 가셨던 지팡이입니다. 그 지팡이는 특별히 다듬은 지팡이도 아니고 하나님이 특별히 하사하신 지팡이도 아닙니다. 그냥 평범한 지팡이입니다. 하나님은 그 지팡이를 가지고 가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쓰실 때, 우리의 어떤 지식과 기술을 보고 쓰시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마른 막대기와 같이 보잘 것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 보잘 것 없는 존재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들어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은 것 귀한 일입니다. 이 막대기가 반석을 쳐 생수를 내게 했습니다. 믿음은 기적입니다. 광야 같은 인생길이라 할지라도 이 믿음 가지고 나가십시다. 고난 중에도, 시련 중에도, 생수의 공급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 만나면 모든 문제는 해결됩니다. /믿/
▶오늘 제목입니다. '왜 하나님이 광야를 지나게 하시는가?' 광야에서 배우는 것이 무엇입니까? 택함 받은 아브라함의 자손은 그토록 사랑하시면서 빨리 가나안으로 데려가지 않으시고 광야에서 40년 간 고생시킨 이유가 무엇입니까?
광야는 마치 유격 훈련을 시키는 곳과 같은 특수한 지형 조건이 있는 곳입니다. 광야는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사람도 생물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붙잡아야 되고 하나님께서 잡아 주시지 않으면 안 되는 곳입니다.
7. 광야를 지나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⑴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라! 내가 의지했던 배경, 인간의 의지와 실력과 지식은 모두 다 끊어버리고 하나님만을 붙잡을 수 있도록 허락한 곳이 광야입니다.
⑵지난날의 애굽 생활을 청산하는 곳입니다. 신학적인 용어로 구습을 끊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 있을 때에 세상을 바라보았습니다. 바로를 바라보았습니다. 영적으로 애굽은 죄악 세상이고, 바로는 사탄이라고 합니다. 그곳에서 백성을 건져내고 하나님의 약속된 은혜의 땅 가나안으로 직접 인도한 것이 아닙니다.
광야를 거치게 한 것은 애굽의 생활을 정리하고 죄악된 생활을 끊어버리고 거룩한 삶을 준비하는 곳이 광야입니다. 광야를 통과해야 가나안으로 갈 수 있습니다. 죄인이 곧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없습니다. 죄를 끊어버려야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할/
⑶광야는 인생을 다시 한 번 새롭게 하는 곳입니다.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고 고난을 당할 때 중요한 것은 자기를 돌아봐야 합니다. 행여나 내가 하나님 앞에 교만하지 않았는가? 너무 인색하지 않았는가? 하나님을 업신여기지는 않았는가?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귀합니다. 깨달은 자는 겸손해 집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쓰십니다. 광야는 나 자신을 깨뜨리는 곳이요, 그래서 하나님은 발견하는 곳이요, 메마른 심령 속에 생수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지름길입니다.
8. 하나님은 고난 가운데서도 분명한 약속 몇 가지를 주십니다.
⑴고난 중에도 인내하고 기쁘게 여기라고 하십니다.
약5:11절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욥은 끈질기게 하나님을 바라보며 원망 없이 인내하는 중에 결국 하나님은 욥을 인정하셨고, 욥은 과거보다 큰 갑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약1:2-4절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⑵고난 중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해주시고 인도해 주시겠다고 성경에는 여러 번 약속했습니다.
사43:2절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물을 건너고, 강을 건너고, 불을 건너는 것은 우리가 당하는 시련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 큰 시련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십니다.
시121:3절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치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시121:7절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이 약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⑶주님은 고난 중에서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피할 길을 열어주신다고 약속했습니다. 고전10:13절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당하는 고난에 피할 길을 열어주십니다. 또 고난 중에서도 능히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갈 힘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뿐입니까?
⑷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시30:11절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하나님은 욥의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의 슬픔을 거두어 가시고 다시 기쁨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다윗의 슬픔을 거두어 가시고, 기쁨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고난도 거두어 가시고 기쁨으로 회복시켜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⑸현재의 고난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약속하셨습니다. 롬8:18절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무슨 말입니까? 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을 나중에는 넘치도록 위로하시고, 넘치도록 보상하시고, 넘치도록 축복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어디에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하나님의 위로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아멘!/
⑹결론적으로 우리들에게 일어난 어떠한 고난도 신앙으로 풀기만 하면 모든 것이 내게 유익이 됩니다. 시119:71절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욥42:5절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고난 중에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광야학교가 중요합니다. 욥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요셉도, 다니엘도, 다윗도 광야학교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교회의 고난도, 개인 적인 삶의 고난도, 우리 모두 참고, 이기며 하나님을 바라보십시다. 시121:8절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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