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 돌아와 사례한 그 한 사람! (눅 17:11-19)
일 년 중 가장 풍성한 계절은 가을입니다. 그래서 이 가을을 '감사의 계절'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가을 중에도 11월은 '감사의 달'입니다. 풍성한 곡식과 땀의 소산물을 거두어들이는 가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다음주일에 '추수감사절'로 알곡을 주신 우리 하나님 앞에 감사예배를 드리는 주간입니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오늘 본문 17절에서도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찾으십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사계절로 불평하는 사람'입니다. 말 그대로 시시때때로 불평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매사에 불평합니다. 가뭄과 더위가 계속되면 타 죽겠다고 짜증을 내다가 장마철이 되면 구질구질하다고 불평합니다. 여름에는 더워서 못살겠다고, 겨울에는 추워서 못살겠다고 불평합니다.
둘째는 '조건부로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감사는 세상 사람들도 하는 감사입니다. 셋째는 '전천후로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이런 사람이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감사를 해야 할까요? '넘치는 감사'를 하라고 바울 사도는 말씀하십니다. 골2:6-7절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⑴감사의 동기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은 자들입니다.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우리에게는 감사가 넘칠 수밖에 없습니다. /아멘!/
⑵감사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믿음에 굳게 서야 합니다. 감사는 '믿음의 결과요, 열매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감사와 믿음은 언제나 정비례합니다.
▶'크리소스톰' 이라는 유명한 믿음의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을 로마 황제가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감옥에 가두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기도하고 찬송하고 감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황제가 불러다 묻습니다. '너는 어떻게 된 놈이기에 감옥 안에서도 기도하고 찬송하고 감사를 하고 있느냐?' 그러자 크리소스톰이 '예수 때문에 감옥에 갇힌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감옥에 갇혔으니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이 소리를 들은 황제가 성질이 나서 명령합니다. '그럼 저 놈에게 아무 것도 주지말고 굶겨라' 그래서 굶기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며칠동안을 아무 것도 주지 않고 굶겼는데도 여전히 기도하고 찬송하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황제가 다시 묻습니다
'도대체 굶어가면서도 무엇이 그리 감사하다는 말이냐?' 크리소스톰은 '주님을 위해서 금식하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러면서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황제가 화가 나서 끌어내어 매를 치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매를 맞으면서도 그는 '감사합니다'를 연발합니다.
'매를 맞으면서 무엇이 감사하다는 말이냐?' '주님을 위해서 맞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주님은 나를 위해서 채찍에 맞으셨고 십자가에서 찢겨 죽으셨는데 내가 그 분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게 되었는데 얼마나 감사합니까?'
여러분! 이것이 진짜 신앙입니다. 이런 감사가 진짜 감사입니다. 이런 감사는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입니다.
황제가 '끌어내어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이 소리를 듣자 크리소스톰은 기다렸다는 듯이 소리치며 '감사합니다. 내 영혼을 받아주소서!' 황제는 '대체 죽으면서도 감사한 것이 무엇이냐?' 그는 '믿는 사람에게 최고의 영광과 최고의 축복은 순교입니다. 이 순교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순교의 반열에 참여 할 수 있는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 나를 참여시켜 주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황제가 기가 막혀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내 보내라 이런 놈은 죽여도 아무 소용이 없다' /순교사의 이야기입니다./
⑶감사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인색한 감사, 마지못해서 억지로 드리는 감사가 아니라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넘치게 드리는 감사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할/ ▶다음 주일은 일년에 단 한번 있는 '추수감사절'로 예배를 드립니다. '넘치는 감사'를 준비하시고, 한 영혼이 한 영혼씩 추수의 열매로 영광을 돌리는 복된 감사절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제목소개!▶
1. 본문의 정황을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지방을 지나 가실 때 일어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지형은 아주 묘한 곳입니다. 사마리아와 유대 국경 사이의 버려진 아주 척박한 땅입니다. 그곳은 아무도 살려고 하지 않는 버려진 지역입니다. 그 지역에 불쌍한 나환자들이 촌을 이루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곳을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지나가신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소외된 사람, 불행한 사람을 찾아가시는 사랑의 주님이심을 보여주는 발걸음이십니다. 거기에 열 명의 문둥병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며 애절하게 예수님께 간구를 했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간구를 들으시고 '너희 몸을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당시에는 '제사장이 문둥병이 나았다'고 판정해야 가족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열 명이 제사장에게 가다가 다 깨끗함을 입었습니다. /할/
그런데 아홉 명은 제각기 제 길로 가버렸고, 오직 그 중에 한 사마리아인이 돌아와서 예수님 앞에 감사를 했습니다. 그때 주님은 그 사람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시며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①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보면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⑴그 열 명 가운데 아홉은 유대인이었고 한 사람은 사마리아인이라고 했습니다.
⑵그 아홉은 고침을 받은 후에 제각기 갈 길을 가버렸고 오직 한사람만 예수께로 왔습니다.
⑶그 아홉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했으나 그 한 사람 사마리아사람은 큰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⑷그 아홉은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았고, 오직 한사람만 주님께 사례했습니다.
⑸그 아홉은 믿음에 대한 칭찬이 없었고, 오직 돌아온 한 사람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칭찬과 인정을 받았습니다. /할/
②열 사람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⑴그들 모두 다 문둥병자입니다. 구약에 문둥병자란 철저하게 버림받은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은 문둥병을 부정한 병으로 취급했기에 이 병에 걸린 사람들은 성안에서 추방당하고 마을에서도 가정에서도 쫓겨나 격리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었습니다. 어떤 부자나 권력을 가진 자라도 문둥병에 걸리기만 하면 그들의 인생은 끝난 것과 같았습니다. 전염성 때문에 사람들을 가까이 하지를 못했습니다. 어쩌다가 건강한 사람들을 만나면 문등병자들은 '나는 부정하다. 나는 부정하다.' 하고 소리를 쳐야만 했습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몇 군데 문둥병자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민12장을 보면 잠시 동안이긴 했지만 모세의 손이 나병에 걸렸던 일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모세에게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또 모세의 누나 미리암이 주의 종 모세를 비웃고, 헐뜯다가 문둥병에 걸렸던 사건이 있습니다. 그리고 왕하 5장에 보면 탐욕에 눈이 어두워 손대선 안 될 재물을 몰래 훔쳐서 숨겼던 엘리야의 종 게하시가 문둥병에 걸렸었고, 아람나라 국방장관이었던 나아만도 문둥병에 걸렸으며, 대하26장에 보면 제사장만이 하나님의 성전에 분향하는 것을 월권하다가 웃시야왕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문둥병자가 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고침을 받은 사람도 있고, 고침 받지 못한 사람도 있었지만 나병은 불치병이며 고통에 병임은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⑵그들 열 사람 모두 예수님을 만나자 고침을 받았습니다. 열 사람 모두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은혜를 받았고, 사랑을 덧입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열 사람 중에 아홉은 말 한마디 없이 제각기 돌아가 버렸고, 오직 한사람만 예수님 앞에 엎드렸다고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③그 당시 사마리아 땅은 어떤 땅인가?
본문에서 예수님이 사마리아 지방으로 가신 것이 귀한 일입니다. 그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과 유대인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은 관계에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멸시 천대를 했으며 사람 취급은커녕 개 취급을 했습니다. 이유는 그들이 이방사람들의 죄를 이어받은 혼혈민족이라는 것입니다.
원래는 같은 이스라엘의 핏줄이었지만, 나라가 앗수르와 바벨론 제국들에 의하여 망한 후에, 북조 이스라엘 땅에 남아 있던 일부 백성들이 이방인들과 통혼하여 생긴 혼합 민족이 바로 사마리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해방 받고 돌아왔던 순수한 유대인들은 이들을 자기 동족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아예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여행길에도 사마리아 사람들을 만나지 않겠다고, 그 땅을 밟지 않겠다고 일부러 요단강을 건너 동쪽으로 갔다가 남쪽으로 내려와 다시 건너 예루살렘으로 가는 우회의 길을 택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마리아 길을 거리끼지 않고 지나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지방색을 타파하셨고, 특히 사마리아 사람들도 다 같은 하나님의 자녀요 구원받아야 할 사람으로 보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제각기 가버린 아홉 명이 바로 유대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택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택함을 받았다는 것은 책임을 전제합니다. 유대인은 그 어느 민족보다도 택함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겨야 하며 감사를 드려야 하며 율법을 지켜야 하는 민족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방인보다는 모든 면에서 나은 면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의 아홉 사람은 이방인에 비해 나을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로 돌아온 사람은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손가락질하는 사마리아 사람만이 주님께 찾아온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께 감사했다고 했습니다.
'바클레이' 주경학자는 '사복음서 가운데 이 사건만큼 인간의 배은망덕을 신랄하게 묘사한 곳은 없다'고 했습니다.
④아홉 사람이 고침 받은 병이 어떤 병입니까?
어떤 병인데 배은망덕하단 말입니까? 레13:45-46절에 보면 일단 나병이 걸렸을 때, 취하는 행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털을 풀고, 손으로 윗입술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 외쳐야 하며, 다른 사람에게 접근하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마을에서 떠나 격리되어야 하며 성전출입도 못합니다.
학설에 의하면 나환자가 서 있는 곳에서 건강한 사람들 쪽으로 바람이 불면 500미터는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만큼 철저하게 부정한 병으로 규정했고 접근을 막았습니다. 그 병을 말씀 한마디로 고침을 받았는데 그들 아홉은 말 한마디 없이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그것은 무서운 배은망덕입니다.
⑤우리는 세 가지의 은혜를 배은망덕해서는 안 됩니다.
⑴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누구였습니까? 나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문둥병보다 더 무서운 죄에 빠진 존재입니다. 죄와 허물로 인해 질병과 사망의 위기에 빠져 파멸할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독생자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이 땅에 보내주셔서 우리 인간의 죄와 허물의 문제를 그 아들 예수님께 감당시키시고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아홉 명의 문둥병자보다 더 큰 은혜를 우리가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배반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믿/
⑵부모님의 은혜입니다. 낳아 기르시고, 가르쳐 주신 그 부모님의 은혜를 우리가 어찌 잊을 수 있습니까? 가을하늘을 날아가는 기러기 새끼도 제 어미보다 앞서 날아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람이라면 기러기 새끼보다는 나아야합니다.
그런데 어떤 자식들은 자기 혼자 자란 줄로 생각하고 부모의 은혜를 저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구약의 교훈은 부모에게서 불효하는 자식을 돌로 치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기독교는 효를 가르치는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자식들은 부모에게 효도하십시오, 순종하십시오, /할/
⑶이웃을 배신 말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더불어 사는 사람들입니다. 도와주고 격려해 주면서 살아야 합니다. 남을 배신하면 그 사람도 배신을 받게 됩니다.
본문의 아홉 사람은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배신했습니다. 오직 했으면 주님께서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찾으셨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아홉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이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구원받아야 할 한 생명, 한 생명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이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하신 것은 구원받아야 할 아홉의 생명은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⑥아홉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어떻게 보면 그 아홉 사람에게도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믿음도 보통 믿음이 아닙니다. 소리 높여 '예수 선생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간구하는 기도가 대단합니다. 여기 '예수 선생님이여!'하고 불렀는데 우리가 흔히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그런 선생님과는 다른 의미의 선생님입니다. '위에 계신 분이시여'란 의미입니다. 즉 '위에 계셔서 소원을 들어 주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믿음을 보면 예수께서 메시아이심을 인정하는 그런 믿음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리 높여' 부르짖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성경 곳곳에 보면 '부르짖으라! 소리 높여 찾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렘33:3절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시50:15절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곤고할 때나 환난 날에 부르고 소리 지르면 하나님이 들으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할/
그리고 그들은 순종하는 믿음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제사장에게 몸을 보일 때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한마디로 순종하는 믿음도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문둥병자를 만난 곳이 어디입니까? 사마리아 땅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제사장을 만나려가려면 예루살렘으로 가야합니다. 그 길이 가까운 길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이 주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며 떠났습니다.
그 문둥병이 언제 치료됐습니까? 가는 도중에 치료된 줄 믿습니다. 아홉 명의 믿음은 보통 믿음이 아닙니다. 능력 있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능력이 임합니까? 순종하고 나와야 합니다. 보통 능력이 아닙니다. 자기의 병이 나을 것을 믿는 믿음이야 말로 보통 믿음이 아닙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구원받은 믿음이 그들에게 없었습니다. 기도하는 믿음도 있었습니다. 40일 작정기도 하는 믿음도 있었습니다. 성가대로 하나님께 찬양할 수 있는 믿음도 있었습니다. 병 나을 믿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구원받을 믿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다 중요한 것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구원받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아멘!/
열 문둥병자는 다 깨끗함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다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들의 믿음은 자기 스스로의 믿음이었습니다. 제사장에게 가서 보일 믿음을 가지고는 있었으나, 주님을 향한 믿음, 주님께 돌아오는 그런 믿음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비극이었습니다.
⑦그렇다면 '어떤 믿음이 구원받을 만한 믿음'입니까?
이것이 중요합니다. 한마디로 예수께로 돌아오는 것이 구원받은 믿음입니다. 현대적 감각에 의하면 거룩한 주일을 성수하는 자가 구원받는 믿음입니다. 18-19절을 보겠습니다.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여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온 자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로 돌아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예수님께로 향해 시작되었다면 예수께로 돌아와야 믿음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돌아와야 합니다. 죄 속에서 돌아와야 합니다. 불 신앙과 불순종에서도 돌아와야 합니다. 집을 나간 탕자가 '스스로 돌이켜' 집으로 돌아왔듯이 모든 죄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주님께로 돌아와야 구원을 받습니다.
제사장에게 보인다는 말은 몸이 깨끗해진 증거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아홉 사람은 병이 나은 후 자기 중심으로 돌아갔습니다. 유독 사마리아인 한 사람만, 예수 중심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처음도 예수요, 나중도 예수입니다. 그 아홉은 돌아간 자요, 한 사람은 돌아온 자입니다. 그 아홉은 은혜를 배신한 자요, 그 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한 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의 중심은 무엇입니까? 돌아간 자입니까? 돌아온 자입니까? 우리 모두 돌아온 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할/
⑧예수님의 관심은 어떤 자에게 있습니까?
돌아간 것은 먼저 자신만을 생각하는 자로 구원받을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았다는 것은 예수께로 돌아온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께로 돌아온 자는 하나님 중심으로 살고, 하나님 생명으로 사는 자입니다.
예수님의 관심도 '공부를 많이 했느냐? 돈이 얼마나 많으냐? 얼마나 높은 위치에 있느냐?' 이런 것에 있지 않습니다. 오직 '네가 구원을 받았느냐?' 구원받을 생명에만 관심이 계십니다.
인간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을 떠나 사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여기에 불행이 있고, 탄식이 있고, 멸망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문제를 만났을 때 두 가지 반응을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떠나는 방법입니다. 믿음의 방법으로 풀지 아니하고 자기감정대로 푸는 자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종말은 불행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문제를 만나면 믿음 안으로 더 들어옵니다. 예수께로 돌아온 자입니다. 더 상당하고, 더 의논하고, 더 보고하고, 금식하고 매달려 기도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으로 축복하십니다. /믿/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은 예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돌아간다는 말과 돌아온다는 말은 다릅니다. 돌아간다는 말은 자기중심으로, 그러나 돌아온다는 말은 하나님 중심입니다.
오늘날 세상을 향하여 돌아갈 것을 생각한다면 이 사람은 주님을 등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도 돌아갈 사람들이 아니고 돌아온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예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로 돌아와야 합니다.
사55:6-7절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에게 외치십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할/
▶그런데 예수님께로 돌아올 때 몸만 돌아와서는 안 됩니다. 마음도 돌아와야 합니다. 행동도 돌아와야 합니다. 생각도, 물질도, 재능도 주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몸도, 마음도, 물질도, 재능도, 행동까지도 돌아올 때, 그 사람은 온전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믿음이 됩니다. 지금 그것을 본문에서 지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믿/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가나안 땅으로 갑니다. 가나안 땅으로 가는 것은 하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몸은 홍해를 건넜는데 마음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마음이 하나님께 있지 않았습니다. 몸은 애굽에서 나왔지만 마음은 애굽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도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2세들이 들어간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그 기준은 어디에 두었습니까? 자기에게 두었습니까? 하나님께 두었습니까? 하나님께 기준을 두고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자가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입니다. 몸도 마음도 물질도 재능도 하나님께 돌아와야 하나님은 더 넘치는 복을 주십니다. /믿/아멘!/
2. '돌아간 사람 그 아홉 사람'을 조명해 보겠습니다.
사마리아 성 입구의 열 명의 문둥병자들은 똑같이 예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들의 마지막 희망은 예수를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예수를 만나자 그들은 필사적으로 소리를 지르며 자신들을 고쳐달라고 간구 했습니다.
그 모습은 바로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부르짖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 세상을 살다보면 종종 인생의 폭풍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이런 때에 기도하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불치의 병으로 병원 수술실에 들어갈 때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을 사람이 누구며, 어떤 가족이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겠습니까?
새벽 기도에도 나오고, 심야기도회에도 나오고, 금식기도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그 기도가 이루어지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기도가 이루어진 다음에, 그에 합당하게 감사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수술을 무사히 마치고 회복되어 퇴원하고는 하나님께 정말 헌신적인 감사를 하는 이는 그렇게 많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①'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말씀 곳에는 ⑴감사치 않는 인생에 대한 예수님의 탄식이 들어 있습니다. 감사를 잃어버린 자에게 안타까워하시는 말씀입니다. 감사를 잃어버린 사람은 더 크고 귀한 복을 빼앗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⑵예수님께서 서운해서 찾으시는 음성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근심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엡4:30절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⑶하나님의 영광을 찾고자 하는 예수님의 탄식입니다. 18절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고 하셨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육적인 욕구를 채우기 위해 주께 나왔던 자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구가 채워질 때 언제든지 믿음의 길에서 떠날 수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않는 인생들이었습니다(롬1:21). 저들은 예수님이 베푸신 은혜에 배은망덕한 사람들입니다.
②돌아가 버린 아홉 명의 사람들은 무슨 마음으로 돌아오지 않았는가?
불 신앙 때문에 돌아갔습니다. '진짜 나았는지 확인해 보아야겠다. 나은 것은 분명하지만 앞으로 또 재발하지는 않을까? 이제 보니 내가 앓고 있던 병이 문둥병이 아니었던 것 같아!' 이런 마음이 있지는 않았는지 모릅니다.
③그들이 어떤 병에서 건짐을 받았는가?
저주스런 문등병에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문둥이 시인 '한하운'씨가 이러한 시를 남겼습니다. <손가락 한 마디/간밤에 얼어서/손가락이 한 마디/머리를 긁다가 땅 위에 떨어진다./이 뼈 한 마디 살 한 점/옷깃을 찢어서 아깝게 싼다./하얀 붕대로 덧 싸서 주머니에 넣어 둔다./날이 따스해지면/남산 어느 양지 터를 가려서/깊이 깊이 땅 파고 묻어야겠다.>
▶또 이런 시도 썼습니다. 전라도 길 '소록도(小鹿島)로 가는 길'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낯선 친구 만나면/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천안(天安) 삼거리를 지나도/수세미 같은 해는 서산(西山)에 남는데/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가는 길/신을 벗으면/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가도, 가도 천리(千里), 먼 전라도 길>
이것이 문둥병자의 처지입니다. 예수님 당시도 율법은 문둥병자들을 가까이 하면 부정해지는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동리밖에 기거해야만 했고, 건강한 사람이 그 근처를 지나가게 되면 '우리는 부정하다. 우리는 부정하다'고 큰 소리로 외쳐야만 했습니다.
이처럼 처참한 질병에 걸려 절망의 상태에 있었던 열 명의 문둥병자들이 예수님의 능력에 의해 깨끗하게 고침을 받았습니다. 눈썹이 빠지고, 코와 귀가 썩고, 손가락과 발가락이 썩어 떨어지며 이러한 가운데 죽을 날만 기다리던 문둥병자들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그런데 그 아홉 명은 그냥 기뻐 뛰며 자기들의 갈 길을 가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지켜보신 예수님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고 하셨습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감사하는 사람이 이렇게도 적으냐?'라는 의미입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 은혜를 아는 예의 바른 사람을 찾으시는 예수님의 심정을 읽을 수 있습니다.
'괴테'는 말했습니다. '감사를 모르는 사람,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인생을 가장 불행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마귀의 세계에는 감사가 없습니다. 지옥에는 감사가 없습니다. 감사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것, 감사할 줄 모르면 그리스도인은 마귀에게 속아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입니다. 이러한 사람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총이 머물게 됩니다. 감사할 때 마음의 평안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감사할 때 마음의 행복이 있습니다. 감사할 때 건강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셨습니다. 감사하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
3. 예수께로 돌아온 그 한 사람을 한번 조명해 보겠습니다.
①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15).
여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예배드림을 말합니다. 신앙인의 우선순위는 하나님께 영광스러운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내 중심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병 고침 받고 돌아와 영광을 돌린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 한 명뿐입니다. 그 아홉은 감감 소식이 없습니다. 그 아홉은 어디에 갔습니까? 종교 개혁자 칼빈은 '그 아홉 사람은 과거에 대한 기억을 잊어버리려고 멀리 떠나버렸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너무 알면 피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은혜를 입은 자가 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것이 떳떳하지 못합니다. 돌아와야 합니다. 충성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입으로 하나님께 찬송하고 영광을 돌린다고 말합니다. 그것만으로 영광이 됩니까? 내 입술의 찬송이 하나님께 드려지면 영광입니다. 내 물질이 하나님께 드려지면 영광입니다. 내 몸이, 내 재능이, 하나님께 드려지면 영광입니다.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 영광입니다. 떠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은혜 받은 곳에서 충성을 해야 합니다. /할/
②주님 발아래 엎드렸습니다(16).
여기 '엎드려'는 자기가 할 수 있는 가장 겸손하고 존경하는 자세로 사례하였다는 말입니다. 왜 그가 엎드렸습니까? 예수님의 높으신 인격과 사랑과 능력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엎드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겸손과 경배를 의미합니다. 교회에 나오기는 하지만 엎드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기는 하지만 허리를 굽힐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축복하십니다. 구원받은 자의 자세는 겸손입니다. 은혜를 깨닫는 자는 겸손해집니다. 겸손은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는 자기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부자가 되면 부자가 된 만큼 겸손해지고, 높은 지위에 오르면 그만큼 겸손해집니다.
어떤 사람은 상대적으로 겸손해 지는 자도 있습니다. 높은 사람 앞에서는 겸손한 것처럼 보이나 자기보다 낮은 사람을 보면 교만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부자를 보면 기가 죽다가도 가난한 사람만 보면 우쭐거립니다. 아직은 겸손히 아니고 교만이 잠깐 고개를 숙인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온 겸손은 상대를 초월합니다. 시간을, 공간을 초월합니다. 어디에 있든지 겸손하고 어느 시에나 어느 환경에 있든지 겸손해야 합니다. /아멘!/
③이 사람만 하나님께 감사를 했습니다(16).
여기 '사례하다'라는 말은 '단순한 감사가 아니라 깊은 환희와 감격에 넘쳐 나오는 감사'입니다. 아무런 소망도 없었던 인생이었습니다. 치유될 방법도 없기에 자신을 저주하며, 자학하고, 세상을 비관하며 살아야 했던 사마리아인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예수님께 돌아와서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감사와 감격의 눈물로써 사례했습니다.
'사례한다'는 말은 '감사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례는 '마음과 뜻과 정성과 물질을 포함한 감사행위를 의미'합니다. 진정한 감사는 몸과 마음과 물질과 재능을 드릴 때 빛이 나고 영광이 드러나게 됩니다.
▶세계적으로 쓰임 받고 계시는 조용기 목사님이 십일조를 바치지 못하는 집사님을 불렀습니다. '집사님!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생각만 돌아올 것이 아니라 몸도, 물질도 재능도 돌아와야 합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바치십시오, 아까워서 못하십니까? 가난해서 못하십니까? 집사님이 십일조를 안 한다고 교회에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교회를 다 책임져 주십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집사님의 영혼 때문입니다. 주께서 집사님에게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몸도, 마음도, 물질도, 집사님에게 영적인 사건이 일어나야 하는데 집사님이 아직도 못 돌아온 것이 안타깝습니다'고 하면서 간절히 기도해 주셨답니다.
이 집사님이 그때 크게 깨닫고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분이 바로 '엘칸토'의 회장님이라고 합니다.
④헌금을 드리는 사람들의 기분도 여러 가지랍니다.
⑴'기분파' 헌금 인이 있다고 합니다. 사전에 준비된 헌금이 아니라 기분에 따라 되는 대로 드리는 헌금입니다. 기분이 좋으면 많이 드리고 기분 나쁘면 헌금을 드리지 아니합니다. 하나님은 기분파 헌금보다는 준비된 정성된 마음으로 드리는 헌금을 기뻐 받으십니다.
⑵'간섭파' 헌금 인이 있다고 합니다. 헌금을 드리는 데는 인색하고, 드려진 헌금에 대하여 이런 저런 간섭하고 주장하기를 좋아하고, 교회 재정을 간섭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간섭파 헌금도 기뻐하시지 아니하십니다.
⑶'눈치파' 헌금 인이 있다고 합니다. 자기의 능력에 따라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정성된 헌금이 아니라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자신의 체면 유지를 위해 드리는 눈치파 헌금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⑷'찌꺼기' 헌금 인이 있다고 합니다. 가정에서도 좋은 음식은 주인들이 먹고 찌꺼기는 개나 소나 짐승에게 줍니다. 수입이 생기면 자기의 가정에서 써야할 것 다 쓰고 남는 것으로 드리려고 하는 찌꺼기 헌금도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물건사고 팁 주고 먹고 마시는 데는 만 원짜리도 작아 보이는데 그런데 헌금을 드리는 때에는 만 원짜리가 그렇게 커 보인다는 것입니다.
⑸'준비된' 헌금 인이 있다고 합니다. 가인의 제사를 하나님이 열납하지 않으셨고 아벨의 제사를 열납하신 것은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마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주일 예배를 드리러 올 때에도 많던 적던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깨끗한 돈으로 전성되게 준비된 헌금을 드리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아멘!/
▶헬라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아내인 '크산티페'는 소문난 악처였다고 합니다.
하루는 소크라테스가 제자들과 함께 이런저런 토론을 하느라 집에 늦게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크산티페는 그를 향하여 바가지를 긁기 시작합니다. '아니, 남자가 되어서 처자식이 먹는지 굶는지도 모르고 밖으로만 쏘다니면 다냐? 들어오기는 왜 들어 오냐? 차라리 나가서 살지!' 그러면서 바가지에 찬물을 담아서 물벼락을 씌웠습니다.
그러니 소크라테스가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그런데도 소크라테스는 쓴웃음을 짓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금 전에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들리는 것 같더니 결국 물벼락이 떨어지는구먼'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소크라테스의 친구가 참다못해 그를 밖으로 불러내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 여보게! 어떻게 저런 여자하고 일평생을 같이 살 수 있겠나? 지금이라도 갈라서는 것이 낫지 않겠나?' 그 때 소크라테스가 이런 명언을 했다고 합니다. '아닐세! 나는 늘 내 아내로 인해서 감사한다네. 생각해 보게 만일 내게 저런 악처가 없었더라면 내가 어떻게 철학자가 될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그것도 자기를 모독하고 악담을 퍼붓는 악처로 인해서 감사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우리들이야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으로 인해서 감사하고, 또 내 주변에 있는 모든 것으로 인해서 감사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아멘!/
▶저는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온 몸, 그 몸이 신령한 몸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온 시간, 이것이 영생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온 물질, 이것이 하늘의 보화입니다. '너희는 하늘에 보화를 싸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행에 저축하는 자가 이 땅에서 필요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백지수표를 받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돌아온 한 사람에게 우리 주님은 온통 관심이 있으십니다. 17절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말씀을 주목해 봅시다. 18절도 중요합니다.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19절은 결론입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할/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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