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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풍랑을 만난 사람들! (욘 1:1-17)

by 【고동엽】 2022. 2. 6.

풍랑을 만난 사람들! (욘 1:1-17)

 

관상을 아주 잘 보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직업으로 관상을 봐 주는 사람이었는데 정말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딱 소리가 나게 잘 봅니다. 길을 가다가 지나가는 사람을 보고 '저 사람은 사장이고, 이 사람은 과장이고, 또 저 사람은 고아원출신이고, 이 사람은 지금 마누라와 별거중이고, 저 사람은 감방에 몇 번 갔다 온 별이 몇 개다' 한 번 보고 한 마디 던지는 말 모두가 맞아떨어집니다. 그래서 별명이 '족집게 도사'로 통하는데 그의 집은 항상 새벽부터 손님이 문전성시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이 족집게 여인이 관상을 보다가 의문점들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합니다. 관상학적으로 보면 분명히 한쪽다리 병신이어야 될 사람이 멀쩡하고, 장님 될 관상인데 두 눈 똑바로 뜨고 다니며, 무당이 될 관상인데 사업을 해서 돈을 잘 법니다. 그러니까 예외가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상하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한 이 족집게 여인은 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 그런 사람마다 쫓아다니며 조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벌써 죽었어야 할 사람이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서 수소문 해봤더니 교회 집사입니다. 거지 상이 틀림이 없는데 양복을 쫙 뽑아 입고 다니 길래 알아봤더니 재벌회사의 중역으로써 교회 장로님이십니다. 벼락 맞아 죽을상인 사람이 아무 일없이 장사도 잘 하고 행복한 얼굴로 걸어가기에 따라가 봤더니 대문에 '○○교회 성도의 집' 교패가 붙어 있습니다.
'야 이상하다, 사람마다 운명을 타고나는 법인데, 태어날 때부터 이미 팔자가 지어져서 나오는 법인데 예수 믿는 사람은 왜 이럴까?' 이상하기도 하고 궁금해지기도 한 이 족집게 도사가 '도대체 교회가 어떤 곳인가?' 알아보기 위해 주일예배에 참석했다가 그 날 은혜를 받고 족집게 도사 때려치우고 지금은 그 교회에 믿음이 좋은 권사 님이 되었다고 합니다. /할/
여러분, 사람의 운명이 어떻게 지어져 이 세상에 나왔던 관계없이 예수만 잘 믿으면 축복의 주인공이 되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요5: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잠19:23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느니라" 고후5: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할/ ▶오늘은 '요나'서에서 은혜를 받으십시다!
▶옛날 어느 고을에 효자로 소문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효심이 얼마나 극진한지 마을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합니다. '홀 아버지를 그렇게 잘 섬길 수가 없다'는 소문을 들은 그 고을의 원님도 그를 가상히 여겨 관가로 불러다가 상을 내리고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 고을에 새로운 원님이 부임해 왔습니다. 새로 오신 원님이 국정보고를 듣던 중 그 동네에 효자로 소문난 사람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기뻐서 그를 관가로 불렀습니다.
'듣자하니 효자로 소문이 자자한데 어떻게 노부를 공경하는고?' 묻자 '말씀드리기 황공하오나 아버님께서 아무 걱정 없이 아무 불편 없도록 편안하게 보살펴 드리고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원님이 이번에는 '아버님의 연세는 얼마 시며, 아버님이 혼자되신 지는 얼마나 되었는고?' '예, 금년 60세시고 홀로되진 지는 10년이 되었습니다.'
효자는 스스로 자기 대답에 만족해하며 '전에 원님처럼 나에게 칭찬과 후한 상금을 내리시겠지'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원님의 불호령이 떨어졌습니다. '저 불효 막심한 놈에게 곤장 스무 대를 매우 쳐라' 효자의 볼기짝이 불이 나고 심한 통증에 시달리고 있는데, 원님은 추상같은 한 마디의 훈계를 했습니다.
'네가 나이 50에 혼자되었다고 생각해 보아라. 네 자식들이 무엇을 해 주어야 네 마음이 가장 기쁘겠느냐?' /아직도 무슨 소린지 헤매는 분이 있습니다./
동네 사람들의 등에 업혀서 돌아온 아들에게 아버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무슨 큰 잘못을 했기에 심한 매를 맞았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들은 죽어 가는 목소리로 자초지종을 말씀드렸습니다. 끝까지 듣고 있던 아버님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리기를 '이제야 원님다운 원님이 오셨구나!' 하더랍니다.
그렇습니다. 이 효자는 아버지의 뜻과는 관계없는 효도를 해서 원님에게 혼 줄을 당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주인공인 요나도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자기 뜻대로 '다시스'로 내려갔다가 풍랑을 만나 여러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주고 자기는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는 고난을 당한 이야기입니다.
요나서는 구약 속에 들어있는 신약성경입니다. 요나서는 구약 속에 들어있는 이방인들을 위한 복음전도서입니다. 요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직 이방인들에게 전달되기 800년 전,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구원이 이를 것임을 이미 말씀하신 책입니다. 자신들만이 선민이요 이방인들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이 없다고 생각하는 유대인의 정경 가운데 어떻게 요나서가 들어갈 수 있었는지 이는 참으로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할/ ◀제목소개!▶

 

세상을 바다로 비유하고 그 바다 가운데 살아가는 인생들이 수없이 많은 풍랑을 만나 고통 당하는 이야기는 수도 없이 많이 나옵니다. 오늘 풍랑을 만나 절망 가운데 빠진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배가 풍랑을 만나면 선장실도, 갑판의 기관사도, 일등사도 이등사도 다 흔들리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 길에 풍랑이 만나면 모든 것이 다 흔들립니다.
'헤밍웨이'는 그의 작품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세 가지의 인생의 풍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자연의 풍랑'입니다. 두 번째는 '질병의 풍랑'입니다. 여러분, 자연의 바람도 엄청나지만 우리 개인에게는 질병의 풍랑도 엄청납니다. 난데없이 무슨 암이 몰아닥친다. 불치의 병이 몰아닥친다 해 보십시오. 얼마나 큰 풍랑입니까? 세 번째는 '사람에게서 오는 풍랑'입니다. 이것도 병 이상으로 큰 풍랑입니다. 남편이 일으키는 풍랑, 자식이 일으키는 풍랑, 사업을 같이하던 친구로 말미암아 오는 풍랑, 이웃으로 말미암아 오는 풍랑, 이런 풍랑도 큰 풍랑입니다.
엡5:6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풍랑을 일으키십니다. 불순종하는 자에게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이 풍랑은 누구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바로의 궁궐에도 하나님은 풍랑을 일으키십니다. 헤롯의 궁궐에도 풍랑을 일으키십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로 살지 못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도망갈 때 풍랑이 일어납니다. /믿/
오늘 저는 성경에 나타난 풍랑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살펴보면서 왜 그들이 풍랑을 만났는가? 그 원인을 알아보고 배우기를 원합니다! /할/

 

1. 불신 때문에 만난 풍랑이 있습니다(마14:22-33).

 

마14:22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주님의 명령을 받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갈릴리에서 그들이 깊은 밤에 풍랑을 만났습니다. 같은 풍랑이라도 밤에 꺾는 풍랑은 더 고생스럽고 위험합니다.
제자들은 죽게 되었다고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우린 이 사건 속에서 제자들도 풍랑을 만난다는 사실과 믿음이 있다는 사람도 풍랑을 만나면 겁내고 소리 지르고 몸부림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때 제자들이 배를 타고 먼저 가라고 하신 분이 예수님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그토록 겁에 질려 아우성 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네들끼리 예수님 몰래 도망치는 길이었다면 몰라도 예수님이 '너희들끼리 먼저 배를 타고 건너가라'고 해서 떠난 길이라면 책임자가 따로 있기 때문에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됐을 것입니다.
문제는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풍랑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다면 모든 것이 다 문제가 되고 사건이 되고 탈이 됩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분량대로 역사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갈릴리 바다의 풍랑보다 더 심각한 역사의 풍랑과 가정과 사업과 생활의 풍랑을 잔잔케 할 수 있습니까? 예, 있습니다. 예수를 잘 믿고 그 분만을 의지하면 어떠한 풍랑도 이길 수 있습니다. /믿/ ▶그분은 능치 못하심이 없는 분이십니다. /아멘입니까?/ 베드로처럼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믿고 소리칠 때 건짐 받은 것처럼 오직 주님을 믿고 바라볼 때만이 모든 풍랑은 이기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할/

 

2. 주의 종의 말을 듣지 않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행27).

 

행27장을 보면 로마 황제에게 재판을 받기 위해 바울이 배를 타고 로마로 호송되고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물론 그 배는 여객선이기보다는 무역선 아니면 곡물을 실어 나르는 곡물선 이었습니다. 그 배에는 죄수들이 타고 있었기 때문에 백부장이 호송 책임관으로 함께 승선을 했습니다.
배가 미항에 정박했을 때 바울은 '떠나면 풍랑을 만난 것'이라고 경고를 했고, 선장과 선주는 '떠나도 상관없다'고 우겼습니다. 일이 그렇게 되자 최종 결정을 내려야 할 사람은 총책임자인 백부장입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바울의 말을 무시해 버립니다. 행27:11절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그래서 그 배는 미항이라는 항구를 떠났습니다. 행27:28절을 보면 그러한 백부장의 오판 때문에 그 배는 풍랑을 만나게 되었고, 배에 실었던 모든 화물과 기구들까지 모조리 바다에 던져 버려야 했으며 죽음의 바다에서 죽음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상식적으로 백부장이 죄수의 말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상식이 신앙 앞에서 무너지는 경우'는 너무나 많습니다.
여러분! 내 상식과 내 경험과 내 지식으로 판단했던 일들이 엄청난 실패를 가져올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좀 창피스럽더라도 백부장이 하나님의 종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면 그토록 큰 불행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도하는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이 지혜를 주시고 영감을 주십니다. 오늘날도 신앙 생활하는 성도들이 주의 종의 말을 자신들의 지식과 판단보다 우습게 여기고 일을 하다가 낭패 당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여러분! 주의 종들과 상담하고 의논하는 것은 지혜 중의 지혜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3. 본문의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1-2절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여기서 보면, 하나님은 요나에게 세 가지로 명령하십니다. '일어나라! 가라! 외치라!'입니다. 사60:1절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고 하십니다. 불교는 앉아있는 문화요 기독교는 일어나는 문화입니다. 일어나야 갈 수가 있습니다. 가서 외쳐야 합니다. '쳐서 외치라'는 말은 '잠든 영혼을 깨우고 죽은 영혼을 살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사명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아멘!/
기독교는 누워 절망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누워 앉아서 구경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죄의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종교입니다. 절망의 자리에서, 실패의 자리에서, 질병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종교입니다. 사명을 향하여 소명을 향하여 일어나는 종교입니다. /믿/
이 시간에 행여 불 신앙의 자리에 앉아 계신 분이 계십니까?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무관심의 자리에서 팔짱끼고 구경하듯이 신앙 생활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나밖에 모르던 이기심의 자리에 앉아 계신 분이 계십니까?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사명을 손에 붙들고 일어나십시오. /할/ 일어나야 무엇을 해도 합니다.
▶요나 선지자가 활동하고 있을 당시 앗수로라는 나라는 이스라엘 주변에 있는 강대국으로써 이스라엘의 숙적이었습니다. 그들은 툭하면 이스라엘을 위협했고 침략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쳐들어와서 많은 것을 노략질해 갔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나라 수도인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라고 하는 것이 요나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요나는 도저히 그 명령에 순종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원수의 나라에 들어가 구원의 소식을 전할 수 있겠는가?' 사실 그들이 폭삭 망하는 것을 기대했던 요나였습니다. 왜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할까요? '요나(요, 나)'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면 '요놈의 나' 때문입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경험으로 하나님의 생각을 일축한 것입니다. 니느웨는 이방인의 도성이요 요나가 싫어하는 원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니느웨로 가는척하고 전혀 방향이 다른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요나가 탄 그 배는 가는 도중 엄청난 풍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풍랑이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공격을 일삼는 니느웨 사람들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요나 때문에 일어났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요나는 우리 모두의 그림자입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요나 자신이 풍랑의 원인이라는 것은 깨닫고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시오! 당신들이 이 풍랑을 만난 것은 다 나 때문이요'라고 고백한 것과, 요나를 바다에 던졌을 때 바다의 풍랑이 잔잔해 졌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아멘!/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욕심 때문입니다. 우리가 욕망의 노예가 되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고 어리석음을 범하게 됩니다.
둘째는 편견 때문입니다. 이 편견도 우리의 시야를 좁혀 놓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인생을 판단하는 잣대를 마련해 놓고 그 잣대대로만 판단하고 주장합니다. 그 편견에 사로잡히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데 큰 걸림돌이 됩니다. 고정관념과 편견은 우리로 하여금 어리석음을 범하도록 이끌어 갑니다.
셋째는 감정 때문입니다. 느낌이나 감정은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눈을 흐리게 만들 때가 있습니다. 너무 기분이 좋으면 분별력을 잃고 쉽게 판단을 합니다. '그 사람 느낌이 좋아 한 번 믿어보지!' 그래서 잘못 판단합니다. 너무 기분이 나쁘면 부정적 관점으로 사물을 보기 쉽습니다. '그 사람 기분 나쁜데, 왠지 이번 일은 느낌이 좋지 않아' 이런 감정과 느낌이 때로 우리로 하여금 어리석음을 범하게 합니다.

 

4. 오늘 본문에서 몇 가지 교훈을 알아봅시다.

 

①'마침'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3절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요나는 동쪽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는데 하나님의 낫을 피하여 다시스로 도망하였고 욥바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났습니다.
▶우리는 3절에서 주목해야 할 단어 하나가 나옵니다. '마침'이라는 단어입니다. 마침 배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요나는 원하는 대로 욕망대로 길이 열렸다고 모두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했습니다. 여러분, 마귀는 인생의 타락의 길에도 '마침' 준비해 놓고 기다립니다. 이것은 나를 영원히 멸망의 길로 인도하려고 준비한 '배'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이 준비하신 '마침'이 있습니다. 17절 '이미 물고기를 준비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이미'는 '마침'과 같은 의미입니다. 마침 길이 열려서 그 길을 달려갔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은 '이미 큰 물고기를 준비하고 입 벌리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요나는 이 물고기 때문에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믿/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 지라!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마침 배를 만났고 좌석을 구해 배에 승선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⑴하나님의 명을 거역했는데도 일이 잘 되더라는 것입니다.
⑵믿음의 자리에서 떠났는데도 원하는 대로 매사가 잘 되더라는 것입니다.
⑶주님의 뜻을 거스르고 자행자지 하는 대도 일들이 잘 되더라는 것입니다.
⑷하나님의 일을 버리고 육신의 욕심대로 사는데 건강하고 사업도 잘 되더라는 것입니다.
⑸하나님의 낯을 피해서 죄악의 길, 불의한 길을 가는 대도 원하는 일들이 잘 되어 가더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잘 될 수도 있습니다.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래가지 못한다는데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죄는 항상 그 대가를 지불하게 만드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그의 보호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지 않고 서쪽 다시스로 간 것은 '하나님께 불순종함이요,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회피함이요, 무책임한 처신이요 배은망덕함이요 어리석은 처신'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아멘!/
여러분! 하나님의 종이 하나님의 명을 불순종하고도 형통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가 구원의 은혜를 저버리고 배은망덕하는데도 하나님이 복을 주실 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②하나님의 명을 거슬린 요나는 혹독한 징계를 받습니다.
⑴요나가 타고 가던 배는 풍랑을 만났습니다.
⑵배의 사공들은 배를 가볍게 하려고 배의 모든 물건들을 바다에 던졌습니다. 물질의 손해를 본 것입니다. 남을 도와야 할 하나님의 백성이 자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피해를 입힌다는 것은 큰 저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람을 잘 만나야 합니다. /믿/
⑶요나는 배 밑에서 길이 잠이 들었습니다. 이는 분별 없는 행위입니다. 주위 사람들이 자기 때문에 재난을 당해서 죽어 가는데 자기만 안일하게 지낸다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요, 무분별한 행동이요, 책망을 받을 만한 행동입니다.
⑷요나는 선장에게 꾸중을 들었습니다. 6절에 '자는 자여! 어쩜 이뇨!' 다시 말하면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는가?'라고 꾸짖었습니다.
▶이 말을 다시 조명해 보면 이렇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하나님의 사람답게 처신하지 않았느냐?
㈁네가 어찌하여 하나님의 종답게 처신하지 않았느냐?
㈂네가 어찌하여 네 직분에 충실히 못했느냐? 이런 꾸중입니다. 지금 요나가 누구에게 이런 책망과 꾸지람을 듣고 있습니까? 이방인에게 이런 모욕을 당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빛처럼 살고, 소금처럼 처신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뭡니까? 한마디로 세상 사람들에게 멸시와 조롱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이때 요나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불안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벌벌 떨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징계입니다. /믿/
③선원들은 요나를 바다에 던졌습니다.
④요나는 고기 뱃속에서 3일 3야를 지냈습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하나님을 멀리하면 징계가 따릅니다. 바울은 히12:5-6절에서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⑤요나를 보면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요나가 어떤 누구인가? 왕하14:25절에 보면, 북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 때 '이스라엘이 다윗 왕 때처럼 크게 부강하고 영토를 회복하리라'는 예언을 했던 애국선지자입니다.
요나의 아버지 이름은 '아밋대'인데 그 이름의 뜻은 '아멘, 즉 믿습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요나'는 '비둘기'라는 뜻입니다. '아멘'인 아버지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았던 믿음이 좋은 아버지였습니다. 믿음이 좋은 아버지는 그의 아들 요나도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비둘기'라고 지어주었습니다. 장차 비둘기처럼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기를 바라서 그렇게 지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는 말씀을 어기고 다시스로 도망간 불순종한 선지자였습니다. 여러분, 믿음이 무엇인가? 믿음의 속 알맹이는 순종입니다. 순종하지 않는 믿음은 헛것이요 죽은 것입니다.
약2:17절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었느니라.'고 했고, 또 20절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이라고 했으며, 26절에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복음) 쳐서 외치라'고 했습니다. 니느웨는 세속세계를 말합니다. 즉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이 사는 도시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사는 도시요, 회개해야 할 사람들이 사는 곳이요, 아직도 구원받을 기회가 있는 사람들이 사는 도시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이 모두 구원받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나를 니느웨로 파송했던 것입니다.
요나가 가야 할 곳은 니느웨입니다. 요나가 가야 할 곳은 예루살렘이 아닙니다. 시온성이 아닙니다. 요나가 가야 할 곳은 비둘기 같은 평화가 없는 사람들이 사는 곳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이런 도시는 망해야 되고, 이런 도시는 빨리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도시는 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것도 이방의 도시요, 죄악의 도시에 가서 전해봐야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요나에게 그곳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가야 할 곳도 바로 니느웨요, 죄악된 세상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의로운 사람들이 사는 곳이 아니라 죄인들이 사는 곳입니다. 오늘의 니느웨는 바로 우리의 삶의 자리요,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이 살아가고 있는 죄악의 도시입니다. 바로 이런 곳에 관심을 가지시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하십니다.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고 하삽니다.
저와 여러분의 니느웨는 어디입니까? 가정입니까? 집안입니까? 회사입니까? 아니면 학교입니까?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이웃입니까? 우리가 싫든 좋은 가야 할 니느웨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성을 향하여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부르시고 가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외치라고 하십니다. 적어도 구원받아야 백성이 있는 곳은 모두가 니느웨성이요, 우리가 생각할 때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곳이 바로 니느웨입니다. /아멘!/
딤후4:2절을 보세요!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할/ 그런데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니느웨로 가고 있습니까? 요나처럼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전도는 하지 않고 핑계를 대고 나는 가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가기를 바라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이 기도할 때 전도대상자가 있습니까? 니느웨 성읍에 가서 전도한 것이 언제입니까? 혹시 까마득하게 잊어버린 지 오래되지 않았습니까?
지금 다시스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고통 당하고 계시는 분은 없습니까? 풍랑을 만나도 왜 만나는지를 알지 못하고 우둔하게 하늘만 쳐다보고 바람이 자기를 기다리며 파도가 잔잔해 지기를 기다리는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가는 가운데 풍랑을 만났고 그 풍랑은 자신 때문인 것을 깨닫고는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했습니다. 요나는 원인을 자신에게로 돌리는 일말의 양심은 살아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은 큰 물고기로 요나를 삼키게 하셨습니다.
이 물고기는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안전장치를 마련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아직도 늦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불순종하여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른 길로 갔더라도 하나님은 미소짓는 물고기 예비해 두고 계십니다.

 

5. 풍랑이 왔을 때 우리의 삶의 급선무는 '신앙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고 깨닫고 뉘우치고, 주님 안에서 들어와야 합니다. 선원들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인하여 우리에게 임하게 되었는가를 알고자 하여 곧 제비를 뽑았습니다.
그때 제비는 요나에게 뽑히고 맙니다. 여러분 제비 뽑을 일이 하나님의 주관이랍니다. 잠16:33절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그렇습니다. 죄인은 피할 길이 없도록 하나님이 섭리하십니다.
①무리들이 요나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합니다. 8절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컨대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고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으며 고국이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네 생업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이 물음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냐? 사람의 일을 하는 자냐? 신령한 은혜 속에 사는 자냐? 썩을 양식만을 위해 사는 자냐?'를 묻는 말입니다.
②또 '어느 민족에게 속하였느냐?'고 물었습니다. 소속이 어딘지 밝히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자냐?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냐?' 어떤 삶을 사는 백성이냐고 물은 것입니다. '거룩한 백성답게 사느냐? 죄를 범하면서 죄의 종으로 사느냐?'를 묻고 있습니다.
또 8절을 보자! '어디서 왔으며 고국이 어디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누구의 지시를 받고 사는 자냐? 무슨 목적으로 사는 자냐? 어디로 가는 자냐? 지옥이냐? 천국이냐?'를 묻는 말로도 풀이가 됩니다.
'고국이 어디냐? 지옥이냐? 천국이냐? 돌아가는 본향이 어디냐?'고 묻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질문을 받았을 때, 요나는 가슴을 쳤을 것입니다. 내가 왜 하나님을 떠났다가 이방 사람들에게 비웃음거리가 되었을까? 가슴을 쳤을 것입니다.
③요나의 대답을 보십시요! 9절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다' /할/ 이 대답은 자기의 생업과 소속을 분명히 깨닫고 자신의 신앙을 회복하는 모습은 보여주고 있는 말입니다. /아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자기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선민이라면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백성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란 말이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어 나아갈 백성이라는 말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의 선민입니다. /믿/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이 말은 나는 하나님의 특별한 복을 받는 자란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면서 특별한 복을 받는 자들입니다. /믿/
우리들은 주님의 보혈로 씻음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인침 받은 선민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모신 거룩한 백성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믿으십니까? /아멘!/
요나는 고백합니다. '나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잡니다.' 이 말은 나는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믿고 그를 섬기는 잡니다. 나는 하나님이 복의 근원임을 믿고 그를 섬기는 자입니다.
'나는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란 말은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능력이 많으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절대 진실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그 성호의 뜻이 무엇입니까?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 말씀하신 바로 신실히 이행하시는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우리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확실하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어떠한 고난과 역경과 실패와 좌절에 처했다 할지라도 먼저 할 일은 '자기의 신앙을 점검하고 그 신앙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회복이 무엇입니까? 자기가 설자리를 바로 찾는 것입니다. 우리가 설자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요, 그를 의지하는 자리요, 그를 두려워하는 자리요, 하나님을 높이는 자리요, 하나님을 믿고 그 뜻을 준행하는 자리'입니다.
신앙의 회복이란 자기의 잘못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회개하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요, 받은 직분, 받은 사명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할/ 우리가 깨닫고 돌아서기만 하면 하나님은 다시 새 일을 행하십니다. /믿/

 

6. 깨닫는 요나는 재난의 원인이 자기에게 있음을 고백합니다.

 

12절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할/ 이 말은 '나 때문에 이 큰 풍랑을 만난 것'입니다. 진실한 고백입니다. 여러분, 제 아무리 큰 풍랑이라도 원인만 제대로 빨리 찾으면 해결됩니다. 여러분 모든 원인이 나한테 있다고 고백할 때 의외로 문제가 빨리 회복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이 요나가 끝까지 버티면서 자신의 정체를 숨겼다든지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오기를 부렸다면 그 배는 침몰해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한글에 '나'라는 글자는 굉장한 변수를 가진 자입니다. 점하나를 밖에 찍으면 '나'자가 되지만 안에 찍으면 '너'라는 글자가 됩니다. 점 하나에 역사에 판도가 달라지고 개인의 운명이 좌우되고 문제의 실마리가 결정됩니다.
'나'와 '너'의 의미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처럼 큽니다. '나 때문이다.'라고 할 때와 '너 때문이다.'라고 할 때의 의미는 크게 다릅니다. '나 때문이다.'라는 깨닫는 신앙과 '너 때문이다.'라고 고집하는 신앙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 요나는 '나 때문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불순종했기 때문에 이 풍랑을 만났다고 했습니다. 내가 교만했기 때문에, 내가 충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믿음의 방법으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풍랑이 왔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히 자기를 발견하는 자를 다시 세우십니다. /믿/ 욥5:18-19절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 여섯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할/ '나 때문이로소이다.' 깨닫는 신앙은 사함을 받습니다. 고침을 받습니다. 다시 회복하는 하나님의 축복이 임합니다.
▶옛날 어떤 장로님 댁에 새 며느리가 들어 왔습니다. 이 장로님 집이 옛날 집이라 문지방이 높았는데 며느리가 밥상을 들고 들어오다가 문지방에 걸려 넘어져서 밥상을 엎어버렸습니다. 새댁이 얼마나 무안하겠습니까? 그것을 본 시어머니가 얼른 뛰어 나오더니 '아가야, 어디 다친 데는 없니? 내가 좀 돌보지 못해서 미안하다. 내 잘못이다.'고 말합니다. 또 시아버지가 얼른 뛰어나오더니 '아가야, 어디 다친 데 없니. 내가 돌보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합니다. 또 건넌방에서 열심히 책을 읽던 신랑이 나오더니 '부모님, 죄송합니다. 제가 잘 돌봤어야하는데...'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장로님 가정이 화목한 비밀이 바로 '나 때문입니다.'에 있었습니다.
▶어떤 안락한 가정에 뜻하지 않는 불화가 생겼습니다. 2남 1녀를 둔 안락한 가정입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작은 아들이 밤늦게 공부하다가 물을 먹고 물그릇을 마루에 놓았습니다. 아침에 출근시간이 빠른 아버지가 모르고 물그릇을 발로 찼습니다. 물이 마루에 쏟아지자 큰아들을 부르면서 닦으라고 했습니다.
큰아들은 숙제가 바쁘다고 여동생에게, 여동생은 남동생에게 꾸짖으면서 '네가 쓴 물이니 네가 치우라'고 옥신각신합니다. 이 모습을 보고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당신 아이들 교육 잘 시키라'고 책망을 했습니다. 아내가 밖에서 듣고는 화가 나서 가까이 있는 개를 발로 찼습니다. 개가 '깨깽깽'하고 비명을 지릅니다. 그것을 본 남편은 불쾌해서 출근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날 남편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왜 못 왔습니까? 교통사고가 나 버렸습니다. 분이 난 상태에서 과속으로 달리다가 그만 변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집에는 큰일도 아니고 작은 일, 그러니까 남에게 미루다가 화를 당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서로 미루지 말고 내가 먼저 솔선수범 하는 성도들이 됩시다! /아멘!/
다시 욥을 보자! 죄의 대가를 감수했습니다. 12절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이 고백이 귀합니다. 아름다운 신앙인의 태도요 지도자의 모습입니다.
잠28:13절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할/ 요나는 깨달았습니다. '네가 기도하지 않아서, 네가 세상일에 분주해서, 내가 앞장서지 않아서' 이런 풍랑이 왔습니다. '이 모든 것이 나 때문입니다.'라는 절규입니다.
깨달은 요나는 '나를 바다에 던지라'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꼭 던져야 할 사람을 던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나 바다에 던진다고 풍랑이 잔잔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선장을 던져도 안 되고 기관사를 던져도 안 되고 요나를 던져야 합니다.
심청전을 보면 시집 안간 처녀를 던져야 바다가 잔잔해지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죄도 없고 결혼도 하지 않은 처녀를 던져야 바다가 고요해진다고 합니다만 본문의 경우 죄 있는 장본인인 요나를 던져야 바다가 잔잔해 진다고 합니다. 15절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의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할/
17절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삼일 삼야를 물고기 배에 있으니라' 하나님을 요나를 위하여 큰 물고기를 예비해 놓았습니다. 그 속에서 3일 3야로 회개케 하시더니 다시 그를 육지에 토하게 하시고 하나님은 요나를 더 크게 더 위대하게 사용하셨습니다. /아멘!/
▶니느웨로 돌아선 요나를 보자! 2:1절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기도는 넘어진 인생이 재기할 수 있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을 기도의 골방으로 삼았습니다. 2절에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가 어떤 기도를 했을까요? 회개를 했습니다. 요나는 자신의 불 신앙을 깨닫고 어쩌면 가슴을 치면서 대성통곡을 했을 것입니다. ▶누가 복을 받을 수가 있습니까? 시32:1절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할/
▶결론입니다. 여러분! 풍랑이 왔습니까?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풍랑입니까? '내 죄로소이다' 깨닫기만 하십시오, 그리하면 풍랑은 잔잔해 지고 새로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할/ 건짐을 받습니다. 새로운 사명을 받습니다. 그 풍랑을 이기면 간증거리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인의 어떤 고난도, 풍파도 이기고 나면 간증거리가 됩니다. 많은 간증거리를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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