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성장의 비결! (벧전 2:1-3)
'톨스토이'는 그의 작품 '이반의 죽음'에서 '죽음에 관한 심각한 한편의 드라마'를 남겼습니다. 주인공인 이반은 젊은 검사로 비교적 순탄한 생활을 하는 가운데 도시로 영전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이반은 젊은이로써의 누릴 수 있는 이 자랑스러운 모든 행복은 그가 의사에게 진찰을 받는 순간부터 다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의사는 그가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려 얼마 못 가서 죽게 될 것이라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그의 놀라움과 두려움과 절망은 비결 때가 없습니다. 이반은 이 충격적인 비극을 안고 침대에 누워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대학시절에 배운 논리학의 삼단논법인 '카이우스는 인생이다. 인간은 죽는다. 그런고로 카이우스는 죽는다.'는 논리학의 명제가 옳다고 믿어왔던 이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카이우스에게 관한 것이며 다른 사람의 일이지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생각은 추호도 생각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죽음의 문제가 바로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할 때 이 젊은 검사는 견딜 수 없는 고독과 비참함과 그리고 신의 무정함을 생각하며 슬프게 또 슬프게 울었답니다.
여러분, 인생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먼 길을 가는 나그네랍니다. 누구나 매일 매일 길을 갑니다. 오늘도 가고 내일도 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인생 길을 걸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과연 어떤 길을 가고 있는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성경 렘21:8절에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라'고 하십니다. 또 신30:19절에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자신을 가리켜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요14:6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이 있고, 행복의 길과 저주의 길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길을 선택하는 선택권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길이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통행수단의 길'이 있습니다. 사람이 다니고 자동차가 다니고 기차가 다니는 통행로를 다 길이라고 합니다. 또 하나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지켜야 할 도리를 길'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사람은 도덕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지켜야 할 도리가 있고 윤리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윤리적인 도리가 있습니다. 그것을 가리켜 길이라고 하고 도리라고도 합니다. 짐승과 사람이 다른 점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만은 하는 짓과 걷는 길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길을 가는 데는 다음 몇 가지가 필요합니다.
⑴목적지가 분명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은 나온 것이 있는가 하면 가는 곳이 있습니다. 출발점이 있는가 하면 종착점이 있습니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을 흙으로 만들었다'고 했으며 그 '인간은 결국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실업자들의 하루에는 목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하루에 일과가 있고 시간이 정해져 있습니다.
뉴욕 행 비행기는 기상 조건으로 두세 시간 연착할 수는 있어도 반듯이 뉴욕 카네기 공항에 도착해야 합니다. 뉴욕 행 비행기가 만약 모스크바로 간다든지 평양으로 간다면 그것은 큰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로 가야 할 인간들이 항로를 바꾸어 다른 곳으로 가고 있다면 이것은 비행기가 항로를 바뀐 것과는 비교가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앞에 두 가지의 길이 있다고 했습니다.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행복의 길과 저주의 길, 또 성경은 이 길을 좁은 길과 넓은 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좁은 길은 좁기 때문에 가기가 힘들고 그래서 가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가면 갈수록 편하고 좋아집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주님과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믿/
그런데 또 넓은 길은 넓고 평탄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가고 있으나 그 길은 가면 갈수록 좁아지고 어려워집니다. 여기서 말하는 '좁은 길'은 '천국 가는 길'이요, '넓은 길'은 '지옥 가는 길'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좁은 길을 택한 사람들입니다. 그 길은 가는 길이 힘이 들고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길이 생명의 길이요, 축복의 길입니다. /믿어지면 아멘!/
⑵길을 가는데 안내자가 필요합니다. 먼 여행을 떠나는 사람일수록 안내자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지금 미지의 세계, 그 미래를 향하여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내자는 그 지리가 밝은 자라야 합니다. 주님은 마15:14절에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시며 인간을 만드신 분이기에 내 인생 길에 안내자로써는 최고입니다. /믿/ 주님은 배고픔도 겪으셨고 슬픔도 겪으셨고 억울함도 겪으셨고 죄 없이 매도 맞으셨고 까닭 없이 버림도 받아보신 분이시기 때문에 내 인생 길에 동행자로써 제일입니다.
그 분은 친히 '내가 곧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길이 생명의 길이요 축복의 길이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한 인생의 안내자로 삼고 신앙의 성공 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⑶먼 길을 가는 나그네에게 보호자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여행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리에겐 절대 보호자가 필요합니다.
성경은 그 보호자를 하나님이라고 가르쳐 줍니다. 시121:7절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이 보다 서 큰 선언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맞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길이 되십니다. /믿/
여러분 잘 사는 사람이 더 잘 살고 행복한 사람이 그 행복을 지켜 나가는 길이 있습니다. 외롭고 쓸쓸한 사람들과 버림받고 밀려난 사람들이 위로 받고, 사랑 받는 길이 있습니다. 왜 사는가? 어디로 가는가?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인가를 모르는 사람들이 올바르게 사는 길이 있습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그래서 나날을 고통과 싸우며 살아가는 불행한 사람들이 고침 받고 새롭게 태어나는 멋진 길이 있습니다.
갈등과 증오와 불평이 사라지고 화해와 사랑이 넘치는 세상을 만드는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이 곧 '내가 곧 길'이라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사는 것입니다. /믿/ 만약 길을 잃고 헤매던 사람이 길을 찾았다면 더 이상 헤맬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옛날 어떤 사람이 광산에서 등불을 들고 갱 속에 들어갔다가 등불이 꺼졌습니다. 출구가 어디인지 동서남북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꼭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때 지혜가 떠올랐습니다. 석탄을 실어 나르는 철길이 생각나서 신발을 벗어들고 발을 철길에 대고 나갔더니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밖으로 무사히 나갈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길을 찾아야 합니다. /아멘!/
사람들은 끊임없이 길을 가면서 사람을 만납니다. 어떤 성인은 우리 인생 길에 네 가지를 잘 만나야 된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부모'를 잘 만나야 합니다. 부모를 잘못 만나면 평생 고생합니다. 학교 공부를 못합니다. 가정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또 삶의 환경이 나빠집니다. 부모를 잘 만난다는 것은 그 만큼 중요합니다.
그러나 부모를 잘못 만난다고 할지라도 두 번째로 잘 만나야 되는 것은 '스승'입니다. 스승을 잘 만나면 모든 조건을 감수 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웁니다. 그러나 스승을 잘못 만나면 그 생활이나 삶이 달라질 수가 없습니다.
'좋은 선생은 훌륭한 제자를 만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스승보다 더 중요한 만남이 있는데 그 세 번째 만남이 '친구'입니다. 참으로 친구를 잘 만나면 그 친구를 통해서 어려운 세상을 같이 이길 수가 있습니다. 친구를 잘 만나면 어려운 일, 힘든 일, 괴로운 일이 있을 때,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또 고통을 당할 때, 그 고통을 같이 나눌 수가 있습니다.
그래요, 친구도 중요합니다. 어떤 친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삶의 운명도 인격도 바뀔 수가 있습니다. 부모에게 의논 못할 일도 친구에게는 할 수 있고, 남편에게, 아내에게, 말못할 형편도 친구에게 도움을 청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좋은 친구를 만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할/ 그런데 그 보다 더 중요한 만남이 있습니다. 누구인가? 그 네 번째 만남은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믿/
생명을 조정하시고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뱃속에서부터 인생의 마지막 죽음에 이르기까지 우리 인생 전부를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복중에 제일 큰복입니다. 여러분 부모를 좀 잘못 만난다 할지라도 스승을 잘못 만난다 할지라도, 또 친구를 잘못 만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바로 만나면 인생을 바로 살수가 있습니다. /동의하시면 아멘!/
오늘도 하나님만 만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여러분 오늘날도 하나님을 만나면 우리의 삶 속에 알지 못하던 크고 비밀한 일이 깨닫게 됩니다. 사람을 변화시키고, 환경을 변화시키는 분이 누군지 아십니까? 바로 우리의 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남태평양의 어느 섬에서 있었던 일이랍니다. 시원한 야자수 그늘에서 토인 한 사람이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그곳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어떤 서양인이 지나가면서 '서양에서는 웬만큼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 아니면 그런 책도 읽지 않는다.'고 하면서 비아냥거립니다.
그런데 그 토인은 얼굴을 들어 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면서 '그러나 내가 이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당신은 여기서 무사히 지나갈 수 없었을 거요! 나는 왕년에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종이었지만 예수를 믿은 후 옛날에 악습을 버리고 딴 사람이 되었소! 만약 내가 하나님의 가르침을 몰랐더라면 지금쯤 당신은 나의 뱃속에 있었을 것이요!' 이 소리를 들은 서양 사람이 사시나무 떨듯 총총히 사라져 버렸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삶의 안내자로, 보호자로, 동반자로 모시기를 바랍니다. 요3: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1: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할/ ◀제목소개!▶
오늘 본문을 보십시다. 1-3절까지 우리는 두 가지를 찾아 볼 수 있는데 하나는 '믿음의 성장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나오고, 다른 하나는 '신앙의 성장의 비결'을 계시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2절을 보자!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이 자라기를 원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의 신앙이 쭉쭉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믿/
오늘 본문을 기록한 베드로는 아마도 신앙 성장의 중요성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 가운데 가장 뼈저리게 체험했던 사람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베드로처럼 자주 넘어지고 베드로처럼 자주 실패하고, 자주 침체 속에 빠졌던 제자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우리의 신앙 성장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누구보다 더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전 후서를 끝마치는 마지막 절인 벧후3:18절에서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가 우리에게 마지막 부탁한 것은 '우리의 신앙이 자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라가야 합니다. 신앙은 성장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한 사람의 인격이 성장함에 따라 많은 변화가 옵니다. 어린아이가 자라지 아니하면 보통 비극이 아닙니다. 자라야 힘을 씁니다. 내 인격 속에 지식이 자라면 세상에서 대우를 받습니다. 내 사업체가 커지면 모든 사람이 척사 대접을 합니다. 국력이 커져야 세계무대에서도 무시당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성장해야 합니다. /믿/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면 늘 마귀의 밥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합니다.
성도는 어디까지 성장해야 합니까? 엡4:15절의 말씀처럼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나야' 합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의 분량 따라 축복을 주십니다. '내 믿음대로 될지어다.' /아멘!/
그런데 신앙 성장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본문 1절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1-2절에서 보면 신앙 성장의 비결 세 가지를 제시해 주고 있는데 '버리라! 사모하라! 그리고 자라나라!'입니다.
우리가 자라나기 위해서는, 그리고 신앙 성장을 위해서는 우선 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악독, 궤휼, 외식, 시기, 그리고 비방하는 말'입니다. 이것들을 버려야 우리의 믿음과 인격이 자랄 수가 있습니다. /할/
그런데 본문 1절은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앞장에 있는 말씀, 특별히 1:23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너희가 거듭난 것이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다'고 하신 말씀과 연결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이 '그러므로'라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영양분을 섭취하려면 '먼저 우리 속에 있는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언급된 다섯 가지의 죄악들은 거듭난 자에게 합당치 않은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 성도는 마땅히 이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여기 '버리고'는 마치 낡고 더러운 옷을 벗어버리듯이 벗어버리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벗어야 새 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옛 사람을 벗어야 새 사람으로 덧입게 됩니다. /믿/
1. 그러면 우리가 벗어버려야 할 죄악들은 무엇입니까?
①악독을 버려야 합니다. 악독은 부당한 방법에 근거한 성취 욕구를 가리킵니다. 남을 해치려는 심사, 그리고 자기만이 차지하려는 심사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여기 악독은 '악의, 악덕, 악한 행위'를 뜻하는데 남을 해하려는 마음의 악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죄악은 미움과 살인의 행동을 유발시키는 출발점입니다.
▶유람선에 원인 모를 구멍이 나서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사람들이 다 죽고 그 중에 처녀, 총각 두 사람만이 간신히 살아서 무인도에 도착을 했습니다.
남자가 말합니다. '저 단둘만이 있으니 예긴 데요 나랑 결혼 안 할 레요' 그러자 여자가 말하기를 '단 둘이 있다고 날 우습게 보는 군요, 난 머리 좋은 남자 아니면 결혼 안 해요' 그러자 남자가 하는 말이 '아! 그래요, 그럼 잘 됐네! 네가 얼마나 머리가 좋은데요, 사실 배에 구멍을 낸 게 나걸랑요'
여러분, 단 둘이 살려고 배에 구멍 낸 사나이! 남들 다 죽어도 나만 잘되면 된다는 생각! 부동산 투기도 그렇고, 폐수 흘러 보내는 것도 그렇고, 바로 이런 사람이 오늘 본문이 말하는 악독한 사람입니다.
②궤휼을 버려야 합니다. 궤휼이란 말의 본래의 뜻은 낚시를 할 때 낚시 바늘이 보이지 않게 미끼를 끼워서 물고기를 잡는 것처럼 '미끼로 잡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거짓되고 간사한 말로 남을 속이는 마음입니다. 한마디로 '교활하고 음흉한 마음'입니다.
더 깊이 들어가면 사기할 목적으로 남을 꾀거나 부추겨서 나쁜 짓을 하게 하고, 남을 선동하여 못된 일을 하게 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궤휼은 남을 속여서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궤휼은 순전의 반대입니다. 세상은 온통 궤휼한 자로 가득 차 있습니다. 속임수가 난무하는 세상입니다.
여러분, 남을 속이는 모든 행위는 갈수록 더욱 심각해질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말세의 징조들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말세의 징조를 보여주는 딤후3:12절에서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서 사람들을 잘 만나야 됩니다. 사람을 잘못 만나면 자기 것 다 빼앗기고 병신이 되기 쉽습니다. 사기꾼들은 얼마나 말이 그럴듯한지 모릅니다. 세상에 살면서 한두 번씩은 이런 사기꾼들에게 넘어가 보지 않은 사람 없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 좋은 사람, 형통한 사람을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믿/
③외식을 버려야 합니다. 한마디로 것과 속이 다르고 말과 행동이 다른 것을 외식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아주 싫어하시고 질색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특별히 싫어하셨던 것도 그들이 외식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마23:25절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도다.' 또 27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다.'고 하셨습니다.
악으로 가득한 사람이 겉으로는 미소작전으로 선을 가장하는 사람, 마음은 엉뚱한데 있으면서 생각해 주는 것같이 행동하는 사람,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잘 보이기 위해 환심을 사고나서 어느 결정적인 순간 자기의 유익을 챙기는 그런 고등사기꾼입니다.
궤휼과 외식은 남을 속인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궤휼은 남을 이용해 먹으려고 속이는 것이고, 외식은 남에게 잘 보이고, 또 자신을 과시하려고 속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실하시므로 외식을 미워하시고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세인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외식'이라는 말은 본래 '가면'이란 말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가면을 쓴 배우들의 연기를 가리킬 때 외식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④시기를 버려야 합니다. 시기는 내가 가지기를 원하지만 가지지 못한 것을 남이 가지고 있을 때 그것을 부러워하며 미워하는 것입니다. 옛말에 '사돈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했고, 지금은 '사촌이 자가용을 사면 자기는 교통순경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시기심은 무섭습니다. 가인은 자기 동생 아벨을 시기해서 결국은 죽이고 말았습니다. 사울 왕은 여인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는 말 때문에 강한 시기심에 사로 잡혔고, 그 시기하는 마음 때문에 결국 악령에 사로잡혀서 비참하게 살다가 갔습니다.
이 시기심은 남을 괴롭힐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악하게 하기 때문에 신앙성장에는 아주 큰 걸림돌이 됩니다. '크리소스톰'은 '좀이 옷을 갉아먹듯이, 시기심은 사람의 영혼을 갉아먹는다'고 했습니다.
잠14:30절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 여러분,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잘 될 때 기뻐해 주고 그 사람을 본받아 자기도 잘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할/ 갈5:15절에서 바울은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망한다.'고 했습니다.
⑤비방하는 말을 버려야 합니다. 비방은 '대항해서'와 '말하다'라는 합성어입니다. 그러므로 비방은 '악담, 중상'을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을 헐뜯고, 명예를 훼손시키며, 무고히 중상 모략하는 것입니다. 대권주자들의 정치 현실을 보십시오. 참으로 암담한 정치 현실입니다.
또 비방은 남의 허물이나 약점을 들추어내고 거짓으로 남을 비난하며 악평하는 죄입니다. 민12:1절 이하에 미리암이 그의 오라비인 모세를 비방하다가 하나님 앞에 벌을 받아 문둥병이 발했습니다.
잠18:8절에 보면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배속 깊은 데로 내려간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비방의 죄를 지으면서도 그것을 별미처럼 즐길 수 있습니다.
▶비방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시키게 됩니다. 잠16:28절 '패려한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말쟁이는 친한 벗을 이간하느니라.' 잠17:9절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또 비방이 왜 나쁜가하면 비방은 '하나님의 재판권을 찬탈하는 무서운 죄악'이기 때문입니다. 약4:11-12절 '형제들아 피차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 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입법자나 재판 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데 이웃을 판단하느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악독과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하는 말'은 옛 사람에게 속한 것들입니다. 거듭난 성도의 영적 성장에 이런 것들은 암적 존재입니다. 그래서 1절에 '모든'이라는 말을 세 번씩이나 반복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런 것들을 일체 깨끗이 버리라는 뜻이요, 흔적도 남기지 말고 청산하라는 뜻입니다.
엡4:22-24절에도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베드로를 통하여 우리 신앙의 성숙을 방해하는 것들을 다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믿/아멘!/
2. 신앙의 성장을 위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2절에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니라' 했습니다. 또 빌2:12절에 보면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했습니다.
여기 신령하고 순전한 젖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성경 66권의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신앙성장의 비결이 됩니다.
▶2절과 5절에서 나오는 '신령'이라는 말이 무엇인가? 이 말은 '영적인 또는 성령의'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신령한 젖을 먹어야 되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말씀대로 살아야 됨을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①'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젖을 먹으면 아이들이 자라납니다. 여기 '순전하다'는 말은 '한가지 밖에 모른다.'는 말입니다. 갓난아이들이 바라는 것은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엄마 품과 젖 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너희도 갓난아이들 같이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합니다. 신령한 젖은 하나님 말씀입니다. 성도가 신앙이 성숙해 지는 데는 말씀 밖에 없습니다.
시19:10절에서 말씀을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요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도다.'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이 '돈 보다 더 좋고 먹는 것보다 더 즐겁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시119:131절에 '내가 주의 계명을 사모하므로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성숙하느냐? 안 하느냐?는 바로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느냐? 아니하느냐? 와 정비례합니다.
여기 '사모하다'는 말은 '간구하다, 갈망하다, 욕망하다'라는 의미로써 사막에서 물을 찾는 사람처럼, 사슴이 헐떡거리며 시냇물을 갈망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려는 태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②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지 않습니까? 신령한 젖인 하나님의 말씀의 맛을 체험해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3절을 보세요!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어린아이가 엄마의 젖을 처음 한번 맛보면 그 다음부터는 정신 없이 빱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시34:8절에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참 맛은 힘들지만 말씀을 순종할 때 보게 해 주십니다. 벧전2:8절에서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면 넘어지게 정해 놓으셨다'고 했습니다. 순종하면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체험하게 되지만, 순종하지 아니하면 넘어지게 된다는 것을 꼭 명심해야 합니다. /할/
▶아이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어린 아이들의 대표적인 특징은 이기심입니다. 사실 어린아이들처럼 이기적인 존재는 없습니다. 얼마나 자기만 압니까? 어머니가 바쁜지, 아픈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배가 고프면 울고불고 매달립니다. 체면도 없습니다.
여러분 모든 것이 이기심 때문에 베드로가 지적한 죄들이 유발됩니다. '악독, 궤휼, 시기, 외식, 비방' 이것들이 다 이기심에서 유래됩니다. 이런 것들을 극복하고 이겨내기 위해서는 성장하면 됩니다.
어린아이가 자라 장성하면 부모의 사정, 형편을 알고 자기 이기심을 죽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면 이런 악들이 제거됩니다. /믿/
그런데 우리의 신앙성장의 비결은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롬10:17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할/
③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켜서 '순전하고 신령한 젖'이라고 했습니다. 순전하고 거짓이 없는 섞인 것이 없는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젖에 다른 것을 섞어 놓으면 맛은 더 있고, 보기에는 먹음직스러울지 몰라도 본래 젖이 지닌 본질은 변질되기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에 철학을 가미하고 과학이나 기타 인간적인 방편이 섞이게 되면 말씀의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잘 알았기에 철학도 율법도 다 팽개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하기로 작정했다고 했습니다.
▶조용기 목사님이 철학적인 설교를 했다가 마침 철학교수가 갈급한 마음으로 교회에 갔었는데 설교에 실망하고 목사님에게 충고를 했다고 합니다. 조용기 목사님의 예와 집에 보면 그 교수님이 '철학 강의는 철학교수에게 맡기고 목사님은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하라'고 충고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씨앗과 같습니다. 그래서 말씀 그대로 우리 마음 밭에 뿌려야 싹이 나고 움이 돋고 자라나 30, 60, 100배의 열매를 냅니다. 그런데 종자의 모양을 아름답게 하느라고 자르고 깎고 형체를 다르게 만들면 그 씨앗은 생명을 잃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철학이나 과학이나 인간 지식에 맞지 않는다고 잘라내고 높이게 되면 그 말씀은 이미 생명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66권만 전하고 배우고 받으십시다. /아멘!/할/
신령한 젖은 하나님의 말씀의 신령한 젖을 의미합니다. 시19:10절에서 그 말씀을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도다'로 표현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떡으로도 비유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성숙을 위해서 우리 모두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어린아이를 봅시다. 건강한 어린아이들은 젖을 무척 사모합니다. 엄마의 젖을 얼마나 찾습니까? 건강한 아이입니다.
④만약 어린아이가 식욕이 없다면 두 가지 이유일 것입니다.
⑴병들었기 때문입니다. 질병이 오면 식욕을 잃어버립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으로 영적으로 병들어 있으면 말씀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죽은 나무는 성장이 없듯이 우리의 영이 죽으면 성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사모하라는 말은 '심히 사랑함으로 동경한다.'는 말입니다. 사슴이 갈증이 나서 시냇물을 찾듯이 그렇게 갈급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⑵식욕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가 식욕이 없을 때는 대부분 다른 간식을 많이 먹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군것질을 많이 하면 식욕이 없어집니다. 여기서 영적으로 다른 것을 대하는 것은 세상에 빠지는 것이요, 죄악에 빠지는 경우로 비교할 수 있습니다.
죄를 짓게 되면 말씀은 떠나가 버리고 은혜를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축복은 떠나가고 마귀의 종이 되어 이리 터지고, 저리 터질 수밖에 없습니다.
⑤갓난아이처럼 말씀을 사모하는 태도는 어떤 것인가?
⑴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상고하는 것입니다. 행17:11절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 했다고 했습니다. 깊이 묵상하고 적용해 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⑵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것입니다. 중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설교'로만 들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다. 살전2:13절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아멘!/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때 내 심령 속에서 역사가 일어납니다. '깨닫는 역사! 뉘우치는 역사! 회개하는 역사! 결심, 결단의 역사'가 일어날줄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건강하게 잘 자라려면 음식을 잘 먹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혼의 건강을 위해서는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잘 먹어야 신앙 성숙의 지름길이 됩니다. /아멘!/
⑶사모하는 마음으로 신령한 젖을 먹고살면, 우리가 복을 받게 됩니다. ▶첫째 우리의 영혼이 잘됩니다. 사랑의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면, ▶두 번째로 '우리의 범사에 하나님의 축복이 차고 넘치게 되어 형통의 복'이 임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잘 기며 신령한 삶을 살 때 하나님은 그의 범사에 복을 주셔서 큰복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다시 말해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이 복을 주신 것입니다. /할/
▶그 다음에 신령한 은혜 속에 사는 자에게 우리 하나님은 '육신의 건강'도 허락해 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
⑷우리가 육신 적으로도 잘 먹고 건강하려면 운동을 해야 하듯이 우리의 영혼의 건강도 운동이 절대 필요합니다. 특별히 운동 중에 '기도 운동! 봉사 운동! 전도 운동'이 있습니다. 전도 운동은 예수를 자랑하는 운동입니다. 성도는 이 운동을 잘 해야 성숙하고 교회도 성숙하게 됩니다. /아멘!/
3. 베드로는 우리에게 말씀을 사모하라고 했는데 그 말씀은 어떤 것입니까?
⑴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말씀입니다. 딤후3:16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⑵성도들을 올바르게 살도록 해줍니다. 시119:11절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⑶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해줍니다. 시119:105절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⑷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의 마음과 생각과 뜻을 감찰하십니다. 히4:12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십니다.
⑸말씀 속에 복이 들어 있습니다. 계1:3절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신앙은 결심과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버릴 것은 버리는 결단과 취할 것은 취하는 노력의 결단이 절대 필요합니다.
▶철학자 '키일케골'의 글입니다. 어느 날, 겨울이 되자 철새들이 남쪽으로 날아가다 배가 고팠습니다. 그때 철새 대장이 말했습니다. '얘들아! 저 밑의 옥수수를 뜯어먹고 가자.' 그래서 옥수수를 배불리 먹은 후에 다시 날아가는데 그때 철새 한 마리가 '이 맛있는 옥수수를 두고 어떻게 떠나랴? 내일 떠나자!'고 하면서 계속 옥수수 밭에 남았습니다.
다음 날, 그 철새는 떠나야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또 중얼거렸습니다. '이 맛있는 음식을 두고 어떻게 떠나나? 내일 떠나자!' 그렇게 밤낮 내일 떠난다고 결심만 했습니다. 얼마 후, 첫 눈이 내리자 철새는 진짜 결심했습니다. '이제 떠나자!' 그런데 그 동안 옥수수를 너무 많이 먹어 날갯죽지에 살이 붙어 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 철새는 첫 눈에 파묻혀 죽고 말았답니다. /슬픈 이야기입니다./
▶히말라야 산 속에 가면 '야맹조'란 새가 있습니다. 이 새는 낮에는 열심히 놀다가 밤이 되면 남의 새 둥지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그 둥지의 주인 새가 불청객인 야맹조를 막 쪼면서 한참 구박합니다. 그러면 야맹조는 너무 서러워서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결심합니다. '정말 서러워서 못살겠다. 내일은 꼭 내 둥지를 짓겠다.'
다음 날이 되자 야맹조는 어제 눈물로 했던 결심을 잊어버리고 또 여기저기 놀러 다닙니다. 결국 밤이 되어 남의 둥지 신세를 질 수밖에 없어서 또 남의 둥지에 들어가면 또 한참 쪼이고 구박을 받습니다. 그때도 또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다짐합니다. '정말 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해서 못 참겠다. 내일은 반드시 내 둥지를 짓겠다.' 그렇게 내일, 내일 하다가 아직까지도 둥지를 못 짓고 지금도 히말라야 산 속에서 구박받고 살고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무엇을 버려야 하고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압니다. 그런데 '내일 하자!'고 결심만 하다가 소중한 시간을 다 버리고 뒤늦게 후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내일 하자!'고 마루는 습관을 단호히 끊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간이 결심과 결단의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이 은혜 받을만한 때요 지금의 구원에 날'이기 때문입니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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