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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나무의 비유! (요 15:1-11)

by 【고동엽】 2022. 2. 6.

포도나무의 비유! (요 15:1-11)

 

포도의 계절입니다. 오늘 저는 ◀포도나무의 비유!▶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유교의 고전인 '예기'(예법을 가르치는 법)에 보면 한 사람이 인격적으로 균형 있게 성장하고 성숙해 지려면 다음과 같은 과정을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⑴아이가 자라서 밥을 먹게 되거든 바른 손으로 먹도록 가르치라! 이것은 기본입니다. 모든 것의 출발은 오른 손으로 밥을 먹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말입니다.
⑵아이가 여섯 살이 되거든 숫자를 가르치고 동서남북을 가르치되 그 이치를 가르치라! 이를테면 '자연의 이치를 가르치라'는 말입니다.
⑶사람이 일곱 살이 되거든 남녀가 자리를 함께 하지 않고, 같은 자리에 앉아서 먹지 않는 다는 것을 가르치라! 즉 남녀유별이라는 말인데 여기서 '남녀 칠세 부동석'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지금은 일곱 살이면 '사랑타령'을 합니다.
⑷아이가 스무 살이 되거든 관례(冠禮)를 행하여 예법을 가르치라! 이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와 자유와 책임을 가르치라는 말입니다.
⑸또 사람이 성장해서 '서른 살이 되거든 장가를 보낼 것이고, 나이 마흔 살이 되거든 비로소 벼슬을 하게 하되 나라의 정치가 도(道)와 맞으면 복종하게 하고 옳지 않거든 벼슬을 과감히 버릴 줄 알게 하라!' 이것이 조선시대에 한 사람을 공인으로 만들기 위해서 가르치던 법이었고 절도였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한 사람의 인격 있는 공인을 만들어 내는데도 이와 같은 법과 과정과 순서가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한 사람의 성숙한 신앙 인이 되기까지에는 몇 가지의 과정이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주님을 따르는 단계'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따르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줄을 잘 서야 합니다. 지금 한나라당이 이 씨와 박 씨가 팽팽한 접전을 벌리고 있습니다. 이제 얼마 있으면 당의 경선이 있습니다. 여기서 이겨야 대권에 도전할 수 있습니다. 이 때 '누가 줄을 잘 섰는가?'가 판가름이 납니다.
우리는 누구를 따르는 자들입니까? 주님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믿/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신앙은 주님을 따르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주님의 부름에 순종해서 따라 나서는 삶이 신앙의 기본이고 기초가 됩니다. 이 출발이 잘 되면 신앙생활을 승리할 수 있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신앙도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서 고향을 떠남으로서 시작됩니다. 모세의 신앙도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해서 지팡이 하나를 들고 애굽으로 출발하면서 시작됩니다. 사도바울의 신앙도 다메섹에서 주님의 부름에 순종하여 따라 나섬으로써 시작됩니다.
따라나서는데 필요한 것은 결단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부르심에 배도 그물도 가정도 다 내버려두고 주님을 따라 나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는 자기의 것을 많이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결국 신앙인의 싸움은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나의 일을 얼마나 버리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당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의 십자가를 달게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할/
▶두 번째 단계는 '주님과 동행하는 단계'입니다. 주님을 따라 나섰으면 언제 까지나 그냥 수동적으로 쫓아가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과 동행을 해야 합니다. 이 단계가 한 단계 성장한 단계입니다.
그런데 동행하는데도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주님과 방향이 같아야 합니다. 주님은 앞으로 가시는데 우리가 옆으로 가도 안 되고 뒤로 가도 더더욱 안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데는 방향이 중요합니다. 또 목적도 같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목적은 십자가를 통한 천국입니다. 이것이 분명해야 신앙생활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아멘!/ 그리고 동행에는 보조가 잘 맞아야 합니다. 호흡도 잘 맞아야 합니다. 동행의 의미는 함께 한다는데 있습니다. /믿/
▶세 번째 단계는 '주님을 꼭 붙잡는 단계'입니다. 우리들이 다 연약한 인간이다 보니까 신앙생활을 하는데도 마음이 한결같지가 않습니다. 때로는 피곤하기도 하고, 쉬고 싶기도 하고, 싫증도 나고 그렇습니다.
그러다 보면 어떤 때는 신앙생활 하는 것이 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놀지도 못 하고, 여행도 못 가고, 즐기지도 못하고, 그래서 억울하다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이때가 가장 위험할 때입니다. 이 때 놓치면 큰일입니다. 이런 위기가 올 때 우리는 더더욱 예수를 붙잡는 단계가 필요합니다. /믿/ 이 때 한번 이탈하면 돌아오기가 힘이 듭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때 한번 신앙의 줄을 놓치고 나서 아직까지도 다시 붙잡지 못하고 어두움의 길로 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 영혼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신앙생활의 어려운 단계가 바로 이 단계입니다. 우리가 혹시 이 단계에 머물러 있다면 오늘 이 시간 주님을 꼭 붙잡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네 번째 단계는 '주님께 붙잡히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까지 오르게 되면 신앙은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단계에 오르게 되면 신앙생활은 아주 쉬워집니다. 자동차가 탄력이 붙으면 저절로 굴러가는 것처럼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손을 잡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아이가 힘에 빠지면 잡고 있던 어머니의 손을 놓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아이는 넘어지기 쉽습니다. 그렇지만 이 아이가 안전하려면 어머니의 큰손에 붙잡혀야 합니다. 그러면 내 힘이 아무리 빠져도 놓칠 염려가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도 주님 손에 꼭 붙잡히는 단계까지 가야 합니다.
이쯤 되면 '나는 내가 아닙니다. 나는 주님의 것'이 됩니다. 그 때는 주님이 나를 당신의 마음대로 주관을 하게 됩니다. 내가 주님과 동행하던 길에서 이탈을 하고 싶어도 그 분이 용납을 하지 않습니다. 내가 주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아가 자유하고 싶어도 내 마음대로 되지를 않습니다. 이것이 붙잡히는 신앙생활입니다. /할/
신앙생활이 여기까지 오면 아주 '능력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 단계까지 올라와야 믿음으로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경지에 오르게 되면 신앙생활은 재미가 있어집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상태에 와 있습니까. 그렇다고 이 단계에서 만족해하면 안 됩니다. 마지막 단계가 하나가 더 있는데 이 단계가 신앙의 완성 단계입니다. /할/
▶다섯 번째 단계는 '주안에 상주하는 단계'입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신앙의 단계입니다. '너희는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한마디로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이 단계가 가장 잘 조화된 신앙의 단계입니다.
이 단계를 한번 조명해 보자! 먼저 인간관계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 누구인가? 부부입니다. 그래서 부부는 '무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부인을 안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말하는 안사람이란 집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집안에 있다는 것만은 아닙니다. 내 안에 있는 사람! 그래서 언제나 함께 있는 사람, 함께 살고, 함께 일하고, 함께 생활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는 말씀은 '나와 함께 호흡하고, 나와 함께 생활하고, 나와 함께 일하자'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 주님이 그러자는 것입니다. 서로 안에 거하는 것이 부부의 원리입니다. 이 원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로 발전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분이 우리의 신랑이 되고 우리는 그의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 단계까지 기필코 올라가는 성림의 귀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요한복음의 특징 중의 하나가 예수께서 친히 '나는 무엇이다'라는 선언입니다. 헬라어로는 '에고 에이미'이며, 영어로는 'I am'입니다.
모세가 호렵산 떨기나무 불꽃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모세가 물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그때 하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에고 에이미', 우리말로 번역하면 '나는 자존자이다'는 뜻입니다(출3:14).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에고 에이미'는 존재의 시작, 만물의 근원, 즉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나는 참 포도나무'라는 말도 바로 '에고 에이미'입니다. 예수님은 여러 번 '에고 에이미'를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곧 생명의 떡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양의 문이다'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부활이다' 바로 이런 말씀 속에 예수님의 신성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말씀들을 종합해 본다면 '내가 바로 하나님이다'는 말씀입니다. /아멘!/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로 가는 도중이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농부시고 주님은 참 포도나무시고 제자들은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아니한 가지는 과실을 맺을 수 없는 것처럼 주님 안에 거하지 않는 사람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5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예수님은 언제나 가까운 곳에서, 실질적인 곳에서 비유를 알기 쉽게 말씀하셨습니다. 산에서 말씀을 증거 하시다가 새를 보시고,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산의 백합화를 보시더니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고 교훈 하십니다. 멀리 씨 뿌리는 자를 보시더니 씨 뿌리는 자의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이 포도나무 비유도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시다가 포도원의 포도를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포도나무에 비유하셨고, 성도들을 가지로 비유하셨습니다. 포도나무이신 주님께 가지인 성도는 붙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농부이신 하나님이 관리하시면서 열매 맺지 않는 가지는 잘라버리시고, 열매 맺는 가지는 더 잘 맺도록 해 주십니다. 포도나무 관리자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또 이 비유는 신비로운 비유입니다. 포도나무와 가지는 생명 적인 연결입니다. 포도나무와 가지와의 생명적 관계에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는 신비로운 관계로 비약하는 설명입니다.
식물학적으로 보면, 가지가 없는 줄기가 없고 줄기가 없는 가지는 살수가 없습니다. 잘 아는 대로 나무에는 원줄기와 가지가 있고 가지에는 잎이 있습니다. 잎은 가지에 붙어서 태양열을 받아 줄기에게 주고, 또한 줄기는 뿌리에서 오는 진 액을 받아 잎으로 연결시켜 서로 의존하고 삽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줄기가 먼저입니다. 서로 같이 연결되어 있지만 가지는 몇 개 끊어져도 줄기는 살 수 있지만, 줄기를 끊으면 가지는 다 말라 버립니다. 원줄기는 생명의 근원으로서, 예수가 우리의 생명줄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할/

 

1. 예수님만이 참 포도나무입니다(1절).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그냥 포도나무가 아니라 참 포도나무라고 하십니다. 말하자면 거짓 포도나무가 있다는 뜻이 깔려 있습니다. 이단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 포도나무 비유는 구약에서도 많이 사용된 비유입니다. 시80:8절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방을 쫓아내시고 이를 심으셨나이다"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와서 열방을 쫓아내고 심으셨다고 합니다. 누구를 말합니까?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을 포도나무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또 사5:2절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 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
예수님은 '참 포도나무'라는 말씀을 통해 구약 성경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계십니다. 구약성경의 메시지는 이겁니다. '나는 너희를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해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한 너희 하나님이다. 그런데 어째서 내게 순종하지 않느냐?' 하나님께서는 극상품의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나안 당으로 옮겨 심었는데, 그 포도나무는 악한 가지를 내고 들 포도를 맺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찍어버리려고 하십니다. 참고 참으셨습니다. 지금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습니다. 마지막 순간입니다. '이제라도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살려니와 그렇지 않고 계속 불순종하면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는 것이 구약의 메시지입니다.
또 렘2:21절을 보세요!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찜이요" 이스라엘을 포도나무로 비유하면서 참 종자로 심었는데 악한 가지가 되었다는 탄식이십니다. 이것은 전 인류에 관한 이야기도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모양대로 선하게 지은 아담이 그만 범죄 하므로 악한 자가 된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참 포도나무'는 잡종이 아닌 순전한 포도나무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은 '좋은 포도나무, 참 포도나무'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할/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은 농부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포도나무를 가꾸는 과수원지기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 '참 포도나무의 주인'이라는 말씀입니다. 주인이기 때문에 참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를 살펴보시고 나쁜 가지, 병든 가지는 잘라버릴 권한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인의 주권입니다. 나쁜 가지를 그대로 두면 좋은 가지로 가는 영양분만 축내게 됩니다. 병든 가지를 그대로 두면 원 줄기로 병균이 옮겨져 나무 전체를 병들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병든 가지를 잘라내는 권한이 참 포도나무의 주인의 권한입니다.
여러분, 포도원 농장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있는 열매 맺지 않은 가지를 잘라내실 때 거기에 고통이 있고, 아픔이 있지만 이런 작업을 통해서 우리는 다듬어 지고 아름다워 지며 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아멘!/

 

2. 깨끗한 가지만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2-3).

 

3절 '너희는 이미 깨끗해졌다'는 말씀이 이해가 됩니까? 우리 모두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김을 받고 말씀으로 깨끗하게 됐고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할/ 그래서 우리 모두는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안 열립니다. 풍성하기는커녕 말라비틀어진 것도 열리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온전히 깨끗해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전지 된 가지에서 병균이 옮겨졌습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 병균이 우리 속에서 열매를 열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병든 가지를 잘라내고 바로 소독을 했는데도 워낙 독성이 강해서 그만 우리에게 옮겨지고 말았습니다. 세상 약으로도 안됩니다. 의사의 수술 칼로도 안됩니다. 오직 능력의 말씀으로만 그 병든 곳을 도려내고 잘라낼 수 있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스가랴 선지자가 외쳤습니다. 슥4:6절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할/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입니다. 예리한 칼입니다. 좌우에 날이 시퍼렇게 선 칼입니다. 그래서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병균을 죽일 수 있고 도려낼 수 있습니다. 병든 영과 혼을 찌르고 썩어진 관절과 골수를 쪼개고 새롭게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으로 새로워지면 '행실의 열매, 신앙의 열매'들을 풍성하게 맺을 수가 있습니다. /믿/

 

3. 누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주안에 있는 자'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본문1-11절까지 보시면 주님은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듯이 '내 안에 거하라'는 말을 7번이나 하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전체에 무려 40번이나 나옵니다. 얼마나 중요한 말씀이면 강조, 강조, 강조하고 계십니까?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이것이 온전한 연합입니다. 주님과 내가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은 은혜입니다.
①내 안에 거하라! 무슨 말씀입니까? 이 말의 단어 적인 뜻은 '머무르다'는 말입니다. 곧 이 말은 '끊임없는 교제 가운데 계속적인 수액을 공급받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의 신학의 근간이 '내 안에 거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갈2: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말씀이 바울의 중심 신학인 '인(in) 그리스도' 즉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학입니다. 그리스도인 이라는 말도 바울 공동체인 안디옥 교회에서 나온 말인데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단지 나라는 존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내가 없어집니다. 그리고 그 존재의 근원이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으로 바뀌어집니다. 내가 없어지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대로 예수님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엔 그리스도의 신학'입니다.
우리의 존재의 변화가 은혜입니다. 내 안 에 계신 그분을 따라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신앙의 아름다운 덕목들이 이루어지게 될 줄 믿습니다. /아멘!/
②또 '내 안에 거하라'는 말은 '내 품안에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이 땅에 태어날 때 길거리 아무 데서나 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품안에 태어납니다. 국가라고 하는 품, 가정이라고 하는 품에서 태어나고 자라납니다.
또 일생을 살면서 작고 큰 학교, 기관, 조직, 직장의 품에 들어가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품을 무시하고 품을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품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품이든지 그 품안에서 사는 삶에 훈련과 적응이 절대 필요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품안에 안기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안에 있으면서도 그 안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안에 있으면서도 언제나 밖에 사는 사람, 그러니까 한 가족의 품에 있으면서도 언제나 밖에서 맴도는 사람,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언제나 교회밖에 맴도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사이드가 있고 아웃사이드가 있습니다. 그런데 품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 안에서 기쁨과 사랑을 얻습니다. 그러나 품밖에 있는 사람들은 모든 것이 불만이고 불평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 이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환경에서 좋은 대우를 받아도, 마음이 떠난(밖에 있는)사람은 싫고, 짜증나고 괴롭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울지라도 그 품안에서 즐거워하고 감사하면 축복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주님과 하나 되는 삶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것은 주님 안으로 들어오는 삶과 같습니다. 쉽게 말하면 나의 삶이 죄악 세상을 떠나서 예수님과 하나 되어 그 안에서 은혜로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에서 우리가 주안에 있는 것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것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가지가 아무리 능력이 있더라도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능력이 없더라도 붙어 있는 가지는 열매를 맺습니다. 물고기가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물밖에 있으면 소용이 없고 능력이 없어도 물 속에 있는 것이 많은 영양분을 받아 삶의 풍성함을 누릴 수가 있게 됩니다.
여러분! 예수를 떠나면 아무리 능력이 많더라도 열매를 맺을 수가 없지만, 부족하거나 연약할지라도 주님 안에 들어가면 주님이 주시는 창조의 은혜를 받습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주님! 능치 못하심이 없으신 그분 안에서는 무엇이든지 부족함이 없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할/
그런데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도 그 안에 풍성함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분명히 내가 그 안에 살고 있지 못하는 증거입니다. 아직도 옛 생각을 끊지 못한 삶은 절대로 열매를 맺을 수가 없고 풍성한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 안에 기쁨이 있고, 그 안에 은혜가 있고, 열매가 있습니다. 주님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할/ 이때부터 우리 주님이 우리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본문의 강조 점은 '가지인 우리가 포도나무 줄기에 붙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4. 왜 가지는 포도나무에, 왜 성도는 주님께 붙어 있어야 합니까?

 

①붙어 있어야 살기 때문입니다.
포도나무는 가지가 잎 피고, 꽃 피고, 열매 맺는데 필요한 모든 자원을 공급할 절대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가지가 땅 속에 있는 습기와 양분을 직접 끌어올리지는 못합니다. 가지는 다만 포도나무에 붙어 있기만 하면, 나무가 그 뿌리로 땅 속에 깊이 내려 생존과 결실에 필요한 모든 자원을 충분히 가지에 공급해 줍니다.
가지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은 나무에 단단히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제대로 붙어 있지 않다면 열매를 맺을 수 없고, 결국에는 불에 던져지게 됩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예수님의 가지입니다. 예수님의 가지가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 세상에는 참 포도나무의 가지가 못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 아무나 예수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천국 자녀로 택해주시지 않으면 예수를 믿을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인도해 주시지 않으면 예수 믿지 못합니다. 교회에 나올 수가 없습니다. 마귀가 장난치면 주일 지키기가 참 힘듭니다. 주일날만 되면 꼭 무슨 일이 생깁니다. 동창 모임에다 계모임이다. 피치 못할 사람의 결혼식이다. 사탄 마귀가 장난치는 겁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역사 하시면 마귀가 장난을 치지 못합니다. 어림도 없습니다. 예수님께 찰싹 붙어있으면 사탄 마귀가 얼씬거릴 수도 없는 줄 믿습니다.
주님께서도 분명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가지인 우리의 영적인 생활, 육신적인 생활, 금세와 내세의 생활, 그밖에 모든 생활에 필요한 충분한 자원을 공급할 책임이 주님께 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지 않고, 인간적인 방법대로 살다가 낭패와 실망을 당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분명히 다른 세계 속에 사는 존재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당부하십니다. 마4:4절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바울은 롬1:17절에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새로운 세계에서 믿음과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자원을 공급해 주십니다. ▶어떤 자원을 주실 까요?
⑴죄 사함의 자원을 공급하십니다. 여러분 죄 사함은 우리 주님의 보혈로밖에 씻겨지지 않습니다.
⑵치료의 자원을 공급해 주십니다. 주님은 이 땅에 치료자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영혼에 병든 사람, 육신에 병든 사람, 그밖에 모든 생활에 병든 사람들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영원토록 동일하셔서 지금도 치료의 사역을 행하십니다.
여러분! 이 세상 어떤 병과 씨름하고 계십니까? 영혼의 병입니까, 육신의 병입니까, 생존의 병입니까, 주님께 의지하십시오! 출15:26절 "나는 너희를 치료하시는 여호와임이니라" /할/아멘!/
⑶무궁한 축복의 자원을 공급해 주십니다. 또한 ⑷천국의 자원을 공급해 주십니다. 그리고 ⑸삶의 일체의 자원을 공급해 주십니다. /믿/
우리는 줄기를 떠난 가지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물을 떠난 고기는 상상 할 수도 없이 죽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떠난 사람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줄기 떠난 가지는 죽은 가지인 것처럼, 주님을 떠난 사람은 살았으나 죽은 잡니다. 예수는 생명줄이십니다.
▶비행기가 하늘을 날고 있습니다. 그 비행기에는 조종사, 과학자, 목사, 그리고 배낭을 가지고 여행하는 청년 모두 4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비행기가 고장이 나서 추락하고 있었습니다. 그 비행기에는 공교롭게도 구명대가 3개밖에 없었습니다. 평소에 훈련이 잘 되어 있는 조종사가 재빨리 구명대 한 개를 매고 바다로 뛰어 내렸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두개를 세 명의 손님에게 던졌습니다. 그 다음 과학자가 '나는 국가가 필요로 하는 과학자니 살아야 한다'고 하면서 하나의 구명대를 매고 뛰어 내렸습니다.
그 다음에 목사가 하나밖에 안 남은 구명대를 청년에게 주면서 말합니다. '여보게 젊은이 주님을 믿나?' 청년이 대답합니다. '죄송합니다. 아직 주님을 믿지 않습니다' 목사는 구명대를 청년에게 주면서 '그러면 자네가 가지고 뛰어 내리게! 나는 주님을 믿으니 지금 죽어도 천국을 가네! 자넨 살고 나면 꼭 주님을 믿게나! 나는 자네를 지옥에 보내고 싶지 않네' 이때 청년이 태연하게 말합니다. '목사님! 염려하지 마십시오! 과학자가 제 배낭을 붙들고 뛰어 내렸습니다.' 사고 난 비행기에 구명대가 생명줄인 것처럼, 고장 난 인간, 죄로 말미암아 죽어야 할 우리 모두에게 생명줄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줄기 떠난 가지는 살아 있는 것 같으나 죽은 가지인 것처럼, 주님을 떠난 사람은 살아있는 것 같으나 죽은 사람들입니다. /믿/
그래서 주님은 6절에서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이는 주님께 붙어 있지 아니한 사람은 지옥 불에 들어감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가장 큰 문제는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전도 명령을 내리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좀 가난하게 살아도 괜찮습니다. 지위가 좀 낮아도, 육신이 좀 아파도 큰 문제 아닙니다. 문제는 주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은 요3:18절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우리는 주님께 붙어 있어야 삽니다. 그래서 줄기에 붙어 있는 가지처럼 붙어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②붙어 있어야 축복을 받습니다.
가지는 줄기에 붙어 있어야 줄기로부터 영양을 받아 결실을 맺게 됩니다. 붙어 있어야 살고 붙어 있어야 받습니다. 떨어지면 죽고 떨어지면 받지 못합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줄기에 붙어 있는 가지는 수분을 공급받습니다. 영양을 공급받습니다. 모든 것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떨어진 가지는 공급을 받고 싶어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는 어떤 축복이 있습니까?
⑴'스스로' 되는 '저절로'의 원리 속에 살게 됩니다. 원리라는 말은 사물의 근본이 되는 이치라는 말입니다. 어떤 일에 있어서 먼저 그 원리를 아는 일이 중요합니다. 원리를 알면 모든 일이 쉽습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 스스로, 저절로 되어지는 원리 속에 살게 됩니다.
⑵감옥 문이 스스로 열려지는 원리입니다. 행12:1-10 절의 말씀을 보면 베드로는 감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간절히 하나님께 빌었다고 했습니다. 놀라운 것을 헤롯이 베드로를 끌어내어 처형하려는 바로 그 전날 밤에 주의 천사가 자고 있는 베드로를 깨웁니다. 베드로의 손에서 쇠사슬이 벗어집니다. 급히 띠를 띠고 신을 신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천사를 따라가는데 베드로는 그때까지 환상을 보는 줄로 알았습니다. 놀라운 것은 파수꾼들이 지키고 있는데도 모릅니다.
더 놀라운 것은 베드로가 굳게 닫힌 쇠문이 있는 곳에 이르니까, 행12:10 절에 보면 "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시내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저절로 열리는지라"했습니다. 문이 저절로 열려졌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연 것이 아닙니다. 간수가 연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우연도 아닙니다. 쇠사슬이 벗겨지고 쇠문이 저절로 열리게 된 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순전한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인 것입니다.
▶바다가 갈라지는 원리입니다. ▶오병이어의 원리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스스로, 저절로의 원리 속에 살게 됩니다.
⑶마찬가지로 스스로 열매 맺어지는 원리입니다. 4-5절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8절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열매 맺는 삶, 축복입니다. 생활의 열매, 사업의 열매, 수고한 대가의 열매, 오늘 본문의 더 귀한 열매는 성도의 선한 행실의 열매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성령의 바람으로 이루어지는 열매, 주님은 열매로 그 사람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⑷기도의 응답을 받습니다. 7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께 구하면 기도 응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⑸주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9-10절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이 사랑은 위로부터 온 것입니다.
⑹주님의 기쁨을 받을 수 있습니다. 11절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 이 기쁨은 세상 그 누구라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요16:22절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5. 붙어 있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입니다. 시계는 시간을 가르쳐 주라고 만든 것입니다. 자동차는 굴러가라고 만들었습니다. 시간을 가르치지 못하는 시계는 시계도 아닙니다. 굴러가지 않는 자동차는 자동차도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사람은 사람도 아닙니다.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일본의 어떤 가정주부가 남편의 수입이 적어서 동네에 구멍가게를 냈습니다. 이 아주머니가 정직하고 친절하게 물건을 판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손님이 점점 많아졌고, 물건이 달리게 되어 트럭으로 물건을 들여놓으며 하루 종일 정신 없이 팔아야 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루는 남편이 퇴근하여 바쁘게 장사를 하고 있는 부인을 보고 '여보, 우리 동네 다른 가게들은 우리 가게 때문에 손님이 거의 없대. 저 건너가게는 아예 곧 문을 닫아야 할 형평이래' 이 말을 듣고 그 부인은 물건을 트럭으로 주문하지 않았고, 파는 물건의 종류도 줄여서 손님들이 찾아오면 '그 물건은 건너편 가게에 가시면 살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후로 장사로부터 벗어나 시간이 많아진 부인은 하나님께 묵상하는 삶을 살았고, 또 틈틈이 글도 쓰기 시작했는데 그가 바로 일본에서 그 유명한 '빙점' 이라는 유명한 소설을 남긴 미우라 아야꼬 여사입니다.
▶김활란 박사는 우리나라 여성의 거성입니다. 그는 일생 하나님을 잘 섬기다가 가신 분입니다. 그가 세상 떠나기 3일 전에 김 옥길 총장에게 '내가 사흘 후에 갈 터이니 내 주변을 정리해다오, 옷은 의대 의상학과로 보내고, 생활도구는 식당으로 보내라, 내 집을 학교 관계 처로 사용하라, 고려청자는 박물관으로 보내라, 평생 살면서 죄 안 지려고 노력은 했지만 그러나 나도 모르게 지은 죄가 있을지도 모르니 신문 광고를 내라. 내가 미쳐 용서를 구하지 못하고 떠난다고 말해다오!'
김 박사는 이 말을 마치고 3일 후에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이 유언을 조선일보에 실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까? 그래서 주님은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제자 되는 길도 주안에 거할 대 자격이 주어집니다. 제자란 '배우는 자, 따르는 자'란 뜻으로 성경에 259번이나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그분의 철학과 그분의 인격을 배워야 합니다. 마11:29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들의 이중적인 생활을 이렇게 꼬집었습니다. '일요일에는 예수님을 닮은 듯합니다. 그러나 월요일에는 아담과 하와처럼 맛있게 선악과를 따먹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삽니다. 화요일에는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처럼, 불평하며 삽니다. 세상을 불평하고 사람을 미워하고 증오하고 마음으로 살인하며 삽니다. 수요일에는 시날 평지 사람들처럼 바벨탑을 쌓습니다. 교만이 하늘을 찌릅니다. 목요일에는 가롯 유다처럼 예수를 팔아 돈을 버는 일에 정신 없이 뛰어다닙니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예수라도 팔 수만 있다면 팔겠다는 배짱으로 삽니다. 금요일에는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처럼 술 먹고 방탕합니다. 오직 먹고 마시고 노는 것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토요일에는 다윗처럼 부하의 아내와 간통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가슴 치며 통곡이나 했습니다만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런 통곡도 없습니다. 그리고 일요일에는 다시 교회에 가서 '오,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눈물 뿌리며 회개하지만 월요일이 되면 다시 똑 같이 반복하며 산다'고 꼬집었습니다. 얼마나 부끄럽습니까?
여러분! 열매를 많이 맺으십시오. 생활의 열매, 물질의 열매, 행실의 열매! 또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사랑의 열매, 성령의 열매, 입술의 열매, 전도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떻게 해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할/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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