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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신앙! (단 3:1-30)

by 【고동엽】 2022. 2. 6.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신앙! (단 3:1-30)

 

오늘 본문은 유다가 멸망하여 바벨론에 포로가 되었을 때에 바벨론 땅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믿음의 사람 다니엘의 친구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이야기로 그들의 높은 신앙을 배워 우리도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제목소개!▶

 

1. 본문의 배경을 먼저 알아보자!

 

주전 605년경 유다 왕 여호와김의 통치 때에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의 공격을 받아 이스라엘이 함락이 되어 수많은 관리들과 인재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갔는데, 그들 중에서 흠이 없고 재주를 통달한 젊은이들을 왕궁으로 데려다가 그 나라의 학문과 언어를 익히게 했습니다.
그 중에 다니엘의 세 친구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도 국비생으로 뽑히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남달리 총명하고 지혜가 많아서 왕궁에서 왕을 모시는 명예를 얻게 되었는데 그러나 이들은 이방 풍습과 타협하지 않고, 굳은 결의로 신앙의 순수성을 지켜나갔습니다.
하루는 느부갓네살 왕이 아주 신기하고 무서운 계시적인 꿈을 꾸었는데 잠에서 깨어난 후에 아무리 꿈을 생각해 보려고 해도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어떤 계시적인 뜻이 있는 것 같은데 알 길이 없었으므로 왕은 바벨론의 모든 박사와 술객들에게 그 꿈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 꿈의 해석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라고 추상같은 명령을 내렸습니다.
꿈을 꾼 본인도 기억하지 못하는 꿈을 그들보고 알아내라고 하니 그야말로 기가 막힌 명령입니다. 그러니 방백들과 술객과 박수들은 그 꿈을 알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왕의 분노가 폭발하여 모든 박수와 술객들을 다 죽이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이때 다니엘이 왕의 비서실장인 아리옥에게 말하기를 '술객들을 다 죽이지 말고 자신을 왕 앞에 데려다 달라'고 합니다. 왕 앞에 선 다니엘이 왕에게 말하기를 '인간의 힘으로는 알 수 없는 은밀한 것이라도 네가 섬기는 하나님은 모든 것을 통달할 수 있는 지혜가 있는 분'이라고 말하고 몇 날 시간을 주면 그 꿈을 자기가 해석해 드리겠다고 약속하고 나왔습니다.
다니엘을 왕궁에서 나오자마자 그의 세 친구들과 함께 전능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드디어 약속의 날 아침에 기도 중에 왕이 꾼 꿈을 그대로 환상 중에 계시를 받아 그 꿈의 해몽을 왕에게 해주었습니다.
그 꿈은 바벨론의 미래뿐만 아니라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보여준 계시적인 꿈이었습니다. 이 꿈의 해석을 들은 느브갓네살 왕은 너무나도 무섭고 너무나도 꿈 해석을 잘 하는 다니엘을 보고 감탄하면서 2:46절에 보면 '왕이 엎드려 다니엘에게 절'을 하면서 '네가 섬기는 하나님이 참된 신'임을 인정하며 다니엘의 신분을 높여 바벨론의 온 도를 다스리는 수석총리로 세우고 그 뒤 친구 셋에게도 한 도를 떼어주고 도지사로 임명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은 그들이 포로로 잡혀 온지 약 20년의 세월이 흐른 뒤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은 느부갓네살 왕이 지금의 중동지방의 통일왕국을 이루고 나서 자신의 세력이 점점 강해지고 자기의 지위의 높음을 자랑하고 자기를 바로 신격화하기 위한 운동이 벌어졌습니다.
두라 평지에 큰 금 신상을 세웠습니다. 즉 자기의 동상입니다. 이동상의 크기가 오늘 본문에 자세히 나옵니다만 성경학자들은 쉽게 이해하기 위하여 지금의 8-9층 되는 빌딩의 높이로 세웠다고 비유합니다. 당시에 엄청난 동상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꿈에 거대한 신상을 보았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은 자기가 꿈에 보았던 신상 그대로 실제로 신상을 만들었습니다. 고대 사람들에게 있어서 거대한 신상을 만드는 일은 어떻게 보면 공통적인 일이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그 모래벌판에 스핑크스를 만들었습니다. 높이가 약 22m, 길이가 80m에 달하는 엄청난 크기입니다. 그때가 주전 약 2500년입니다.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한 것이 주전 586년입니다. 그러니까 느부갓네살 임금이 신상을 세우기 2천년 이전에 애굽은 모래벌판에 거대한 신상 스핑크스를 만들었습니다. 애굽의 람세스 2세는 자기 모양의 거대한 신상을 돌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도 자기가 꿈에 보았던 신상을 세웠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만들었습니다. 아마 자기 모양을 본떴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니까 무엇으로 만들었다고 했습니까? 금으로 만들었습니다. 실제로 느부갓네살 왕이 꿈에 보았던 신상은 머리만 금이었습니다. 두 팔과 가슴은 은으로 되어 있고, 그밖에 놋과 철, 발가락 일부는 진흙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 왕은 신상을 만들 때 몽땅 다 금으로 만들었습니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다니엘이 꿈을 해석해주면서 '왕은 금 머리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자기 나라가 더 이상 다른 나라에 넘어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금 머리로 상징되는 자기 나라가 영원히 든든할 것이라는 의미에서 신상 전체를 금으로 만들었습니다.
느브갓네살이 신상을 완성한 다음 자기를 완전히 높이고 정치적인 유대를 더욱 곤고히 하려는 의도로 낙성식 날짜를 공포하고 그 날 온 나라 지도자들을 초청했습니다. 방백들과 도백과 수령과 재판장과 모사와 율법사와 각도의 관원들을 불러모았습니다.
이제 모든 악기를 동원해서 왕을 찬미하는 음악소리에 맞추어 금 신상에 절할 것을 선포합니다. 한마디로 낙성식 주악이 울려 퍼지면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다 끓어 엎드려 경배하라는 명령입니다.
아마 이북에 못된 어버이 수령 김일성이 부자도 바벨론 왕에게 배워서 자기 동상을 세워 놓고 경배하라고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에' 아무 때나 절하면 안 됩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철두철미한 사람입니다. 완벽주의자입니다. 말 한 마디해서 제대로 안되면 몸은 쪼개고 집은 거름 터로 삼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그의 명령대로 모든 사람이 복종해야 합니다. 모든 악기 소리를 듣는 순간에 '엎드리어 느부갓네살 왕의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라'는 명령입니다.
여러분, 당시 바벨론 제국을 한 손에 쥐고 흔들던 느부갓네살 왕의 불같은 명령입니다. 어느 누가 감히 이 명령에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거역할 사람도 없었거니와 누군가 이 명령을 거역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무리들의 결단을 촉구하기 위해서 6절을 보면 하나의 벌칙이 나와 있습니다. 어떤 벌입니까? "누구든지 엎드리어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 넣으리라" 거대한 금 신상이 중원에 서 있고 그 옆에 무엇이 있는가하면 거대한 풀무가 있습니다. 금 신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금을 덩어리 째 쓸 수는 없습니다. 금을 녹여서 쓰기 위해서 풀무가 필요한 것입니다. 거대한 신상을 만들기 위해서 풀무 또한 얼마나 컸겠습니까?
지금 풀무에 불이 타고 있습니까? 꺼져 있습니까? 타고 있다고 했습니다. 타되 극렬히 타고 있습니다. 지금 거기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풀무에 불이 올라오고 있는 연기를 다 쳐다보고 있습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풀무불의 온도가 섭씨 1000도 정도 된다고 합니다. 보통 소각로의 온도는 800도 정도라고 합니다. 소각로 보다 200도가 높습니다.
"누구든지 엎드리어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 넣으리라"고 했습니다.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왕의 말대로 신상에 절을 하든지 극렬히 타는 풀무 불에 던져지든지 해야 합니다. 우리 같으면 둘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절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뜨겁게 타는 풀무 불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모든 방백, 수령, 도백, 재판관, 모사, 율법사 그리고 각 도의 모든 관원이 줄을 맞추어 질서정연하게 서고, 각양각색의 악기를 든 악사들이 왕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왕의 손이 올라가고 낙성식은 시작되었습니다. 음악이 울려 퍼지고 만백성들이 90척 높이의 황금신상 앞에 엎드려 절을 합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다 엎드려 절을 하고 있는데 유독 세 사람이 기세 좋게 뻣뻣이 서있습니다. 누구인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입니다.
저들은 고개 하나 까딱하지 않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일사각오'의 정신을 가지고 금 신상 앞에 엎드리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들의 마음에는 자기들과 같이 금 신상 앞에 절하지 않고 신앙의 절개를 지키고자 하는 사람이 많이 있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유다에서 온 동족만큼은 하나님 앞에 신앙의 일편단심을 지키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세 친구를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이 풀무불의 위협 앞에 굴복하고 금 신상 앞에 다 절하고 말았습니다. 다행이 다니엘은 국정을 수행하기 때문에 이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길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베벨론 왕의 모든 명령을 지킬 수 있어도 하나님의 계명에 어긋나는 명령을 한마디로 지킬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이들의 신앙이었습니다.
13절을 보면 '느부갓네살 왕이 노하고 분하여'라고 했습니다. 똑같은 말을 두 번 사용했습니다. 노하고 분했다고 했습니다. 대단히 화가 난 것입니다. 왜 왕이 그렇게 화가 났습니까? 왕이 '관현악단의 연주 소리가 나면 내가 만든 신상 앞에 꿇어 엎드려 절해라'고 분명히 명령을 내렸습니다. 거기다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극렬히 타는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라'고 엄한 명령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느부갓네살 왕의 입장에서 보면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 지금 벌어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가 이 신앙을 본받아야 합니다. /아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그 황금신상 앞에 절하지도 않고 똑바로 서 있었습니다. 그러자 곧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포로로 잡혀 온 유다 족속이 왕에게 잘 보여서 수석 총리로부터 방백에 이르기까지 요직을 다 차지하고 있는 것이 본토인에게는 눈의 가시였던 차에 '옳다 기회는 이때다' 하고 저들을 없앨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쾌재를 불렀습니다. 그래서 왕에게 고해바칩니다.

▶세 가지의 죄목을 들어가며 구체적으로 고소합니다.
⑴그들은 왕을 존경하지 않았고, ⑵왕이 경배하는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였고, ⑶왕의 신상에게도 절하지 않았다며 상소문을 올렸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이 '왕을 정면으로 대적하고 왕을 경외'하지도 않았으며 딱 잘라서 '왕의 주권침해요 반역이요 왕권에 대한 도전 죄'라고 죄목을 걸었습니다.
이제 느부갓네살 왕은 그의 권위와 체면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이 세 청년을 벌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자! 나라 안의 신하들과 나라 밖의 사절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바벨론 왕권을 정면으로 도전했으니, 그것도 자기가 황금 머리와 같은 세계 제일의 왕이라고 자부하고 뽐내려고 만든 신상 앞에서 모욕을 당했으니 왕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이 타올라온 것'입니다.
그러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이미 도백이 된지 15년 세월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자신 뿐 아니라 백성들을 지혜로 인자한 덕으로 잘 다스려서 큰 덕망을 얻은 그들입니다. 누구보다도 먼저 왕 자신이 그들의 충성심과 지혜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만약 하급관리들 같았으면 당장 풀무 불 속에 던져 넣으라고 호통을 쳤겠지만 국내외의 인사들이 다 알고 존경하는 인물들이었습니다. 왕은 복받쳐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그들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줍니다.
14-15절 '이제라도 너희가 예비하였다가 언제든지 나팔과 피리소리를 듣거든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리어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 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
한마디로 과거 다니엘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이 신비한 꿈의 해석을 주신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풀무 불 속에서도 너희를 건져낼 수 있겠느냐'는 뜻입니다.
이제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주어진 특별기회입니다. 모든 귀빈들이 숨을 죽이고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왕의 얼굴은 붉다 못해 창백해졌으며 세 사람을 참소 한 갈대아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개가를 부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 히브리 세 청년들의 신앙고백을 들어보십시오.
16-18절의 말씀을 의역해서 보면 '왕이여 이 일에 대하여 우리에게 질문하신다면 우리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우리는 왕의 신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신상에게도 절하지도 아니하겠습니다. 왕은 감히 누가 우리를 구할 수 있겠느냐고 말씀하셨는데 우리 하나님께서는 능히 왕의 손에서 뿐 아니라 풀무 불 가운데서도 건져내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항상 건져내시지 않으십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의 뜻이 있어 건져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순교하게도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든지 간에 비록 우리가 죽임을 당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신상에게도 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몸은 죽여도 영혼을 죽이지 못하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보면 하나님이 안 보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안 생깁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17절 '만일 그럴 것이면'이란 '극렬히 타는 풀무 불에 집어던질 것이면'이라는 말입니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리이다.' 이 말은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고 한 왕의 질문에 대답한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에 대해서 조금도 의심치 않았습니다. 분명하고도 확고한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옛날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하신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사43:1-3절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이 말씀을 다니엘의 세 친구는 깊이 묵상하면서 용기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말씀 묵상이 능력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다니엘의 세 친구는 풀무 불 속에서 죽는 것으로 다 끝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죽고 나서는 더 영화로운 하늘나라에 가서 아름다운 금 면류관을 쓰고 주님과 더불어 영원복락을 누릴 것이라는 내세의 소망,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입니다. /아멘!/
여러분, 이 얼마나 아름답고 고귀한 신앙입니까? 우리 한국 기독교가 100주년을 넘기고 이제 2세기에 접어들었습니다. 한국 기독교 100년 사는 그리 하나님께 영광만을 돌릴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일제 때 그러니까 1938년 9월 3일에 평양에서 장로교 총회가 열렸습니다. 목사들과 장로들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무엇을 결정했는지 아십니까? '신사참배는 우상숭배가 아니라, 애국적 국가의식이다'고 하면서 신사참배를 목사들과 장로들이 모여서 결정했습니다. 한부선 선교사님이 반대했습니다. 추방시켜 버렸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반대했습니다. 목사직을 면직 시켜 버렸습니다.
그 뒤에 많은 신앙의 절개 자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순교'를 당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도 그때 순교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일부 교계 지도자들이 권력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어찌 그들뿐이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생활도 순간순간 얼마나 비굴한지 모릅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고 하면서, 그분을 신뢰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과 세상, 이익과 불 이득을 계산 해 보고 행동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머리를 굴려 보고 이득이 되는 편으로 기울어집니다.
참 신앙인은 무조건 하나님 편으로 기울어 져야 합니다. 지금 당장은 힘들어도, 고난이 와도, 손해가 되는 것 같아도 '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습니다.'라는 고백이 행동하는 믿음인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의 세 친구들의 신앙을 볼 때, 얼마나 부끄럽습니까? 이제 세 청년들의 신앙고백을 듣고 난 왕은 너무 분하여 그 얼굴빛이 변했습니다. 왕의 주위에 있는 모든 사절들은 행여나 그 분통이 자기들에게 떨어질까 봐 모두 떨고 있었습니다.
19절 "느부갓네살이 분이 가득하여" 왕이 얼굴빛이 확 변했습니다. 무안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수치를 당했으니까 얼굴빛이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명하여 이르되 그 풀무를 뜨겁게 하기를 평일보다 칠 배나 뜨겁게 하라" 평소에 풀무불의 온도는 섭씨 1000도입니다. 칠 배라고 하는 것은 꼭 1000도의 일곱 배인 7000도라는 것이 말이 아니라 최고로 온도를 높이라는 말입니다.
잠24:16절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그러면 일곱 번 넘어지고 일어난 다음에 여덟 번째는 일어나지 못한다는 말인가? 그런 말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7이란 숫자는 완전수입니다. 그러니까 칠 배나 뜨겁게 하라는 말은 할 수 있는 대로 최대로 뜨겁게 온도를 올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느부갓네살 임금은 이성을 잃은 것입니다.
그러나 당사자들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그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고 태평합니다. 여러분,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붙잡아 주시면 태평합니다. /할/ 그들은 하나님은 능히 풀무 불 가운데서 건져 주실 수 있다는 믿음이 확실합니다.
설령 하나님이 우리를 구해주시지 않아도 우상에 절하지 않고 기꺼이 순교하리라고 하는 추상같은 마음이 서려있었습니다. 여러분, 이 세 청년들이야말로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절개가 그들로 하여금 죽음도 불사하게 했습니다.
우리도 이들의 신앙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선택할 때 확실한 신앙의 고백 위에 결정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이제 분이 가득하다 못해 넘치는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의 신하들을 향하여 호령을 합니다. '풀무 불을 칠 배나 뜨겁게 하라! 그리고 그들을 그곳으로 던져버리라' 누구의 어명입니까? 드디어 그들은 밧줄에 묶여 군인들의 손에 던지움을 당합니다. 얼마나 그 불이 뜨거웠든지 그들을 호송하고 난 군인들이 타죽어 버렸습니다.
천하를 한 손에 쥐고 호령하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분이 가득하여 칠 배나 뜨거운 불 속에 세 청년을 던졌으니 이제는 모두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왕도 그렇게 생각하고 그들을 모함한 자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한참 후에 왕이 그 풀무 불 속을 들여다보니까 이게 어떻게 된 것입니까? 불 속에서 탄 것이라고는 천하를 호령하는 왕의 권력을 상징하는 밧줄뿐이었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불 가운데서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또 바라보니 이게 웬일입니까? 세 사람이 아니라 네 사람인데 그 중 한 사람은 신의 아들이라고 성경은 밝히고 있습니다. 25절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할/
여러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 왕의 행동을 보고 계셨습니다. 또 세 청년의 절개 있는 신앙고백을 들으셨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시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당신의 신상에게 절하지 않겠소/ 이렇게 멋진 신앙 고백을 주님이 들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불 가운데 오셔서 그들을 지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만유의 주가 되시는 그 하나님은 풍랑도 잔잔케 하시고 불 속까지도 다스리십니다. /믿/
오늘 이들의 믿음에서 우리는 위대한 신앙의 능력을 발견합니다. 오늘날 현대인의 삶을 위협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돈의 위력 즉 황금의 위력입니다. 또 하나는 권력의 위력이요 또 하나는 죽음의 위력입니다.
오늘날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돈 앞에, 황금 앞에, 비굴하게 살아갑니다. 권력의 위력 앞에 많은 사람들이 굽실거리고 살아갑니다. 또한 죽음의 위력 앞에 두려움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이와 같은 황금의 위력도 아니 죽음의 공포까지라도 극복할 수 있게 해준다는 사실도 우리는 본문에서 보았습니다.

 

2. 신앙의 능력은 '황금의 우상 앞에서도 우리의 삶을 자유'하게 해 줍니다.

 

여러분, 돈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돈의 노예가 되면 안 됩니다. 돈을 다스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황금 앞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절하지 않았다는 것은 노예가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들의 눈엔 황금 앞에 절하는 자들이 어리석게 보였습니다. 만물의 머리인 인간이 만물을 다스리고 지배할 권능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 어떻게 그 황금 앞에 절할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는 이래봬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은 존재가 아닙니까? 그들은 절할 수도 없었습니다. 우리도 절하지 맙시다. /믿/
우리가 사는 현대를 가리켜서 산업사회라고 합니다. '누가 물질을 많이 생산할 수 있느냐? 누가 물질을 많이 관리할 수 있느냐? 누가 물질을 많이 소유할 수 있느냐'에 따라서 인간의 가치가 달라지고 있는 세상입니다. 물질에 의해서 인간이 평가 당하고 물질 속에 인간이 예속되어 가고 있습니다.
돈 앞에서는 인정도, 부모도, 형제도, 친구도, 이웃도 없습니다. 저는 돈 때문에 어머니를 구박하는 아들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얼마 전의 신문에는 한 경찰서가 모 형사에게 돈을 받고 범죄를 눈감아 줬다가 다시 들통이 나서 오히려 그 형사가 쇠고랑을 차는 것을 보았습니다. 돈의 위력 앞에 경찰력도 굽실거립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오늘 날 우리가 삽니다. 우리는 신앙을 가진 자입니다. 신앙을 가진 자의 삶은 물질 속에 자기를 예속시키지 아니하고 물질 앞에서도 참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사업을 하거나 장사를 하거나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돈, 돈보다는 사람', 사람을 먼저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믿/
아브라함이 돈 앞에 먼저 혈육을 찾았습니다. 숱한 사람이 황금 우상 앞에 굽실거리고 있을 때 하나님의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초연히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신앙의 능력 속에 황금 앞에서도 자유할 수 있었습니다.
▶3일간 굶은 청년이 너무나 배가 고파서 옆집 담을 넘어가 쌀 한 가마니를 훔쳤습니다. 그 이튿날 생각해 보니 양심에 가책이 왔습니다. '어디 그 집 동정을 한번 살펴보자!' 하고는 그가 다시 그 집에 담을 넘고 몰래 그 가정을 살펴봅니다. 그런데 그 집 아주머니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어제 밤에 저희 집에 쌀 한 가마니가 없어졌어요.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그 쌀을 가지고 갔겠습니까? 하나님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셔서 도적질 안하고 배부르게 먹고살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 도둑 청년의 마음에 감동이 왔습니다. 저런 사람의 쌀을 그냥 다 먹어버렸다가는 하나님이 그냥 두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쌀 한 가마니를 등에 업어지고는 자초지정을 말하고 용서해 달라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여러분, 이 사람이 후에 크게 돈을 벌고 신앙생활을 잘해서 하나님의 교회의 기둥이 되었다고 합니다. 돈보다는 사람을 더 귀히 여긴 옆집에 귀한 신앙을 가진 이웃 덕분에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할/ 우리 모두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드러내는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3. 신앙은 '권력 앞에서도 자유'하게 합니다.

 

결국 세 사람은 왕의 금 신상 앞에 절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체포가 되어 왕 앞에 끌려왔습니다. 대 제국의 제왕 앞에 패전국의 포로의 신분이요, 게다가 왕명을 어긴 죄수의 몸으로 끌려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왕 앞에 도저히 머리를 들 수 없어야 했으며 몸 둘 바를 몰랐어야 했습니다. 게다가 왕은 노발대발하여 다시 명령하기를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가 세운 금 신상에 절하지 아니하다니 그럴 수 있느냐? 다시 한 번 기회를 줄 테니 나팔 소리가 나거든 신상 앞에 절하라!'고 명합니다.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는 왕의 권위적인 명령이 다시 한 번 떨어진 것입니다. 그 누가 왕의 명령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왕의 명령 앞에서도 조금도 위축되거나 무서워하지 않고 오히려 왕의 얼굴을 주시하면서 '왕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당신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풀무 불 속에서 살려주지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당신의 신상에 절하지 않겠소!'
한마디로 아무리 왕의 명령이라 해도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하나님의 뜻을 어긴 그런 명령은 죽더라도 지키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 감히 왕의 명령 앞에 거역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인간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거역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 속에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에, 그들 속에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그 신앙의 힘이 권력 앞에서도 자유하게 한 것입니다. /믿/
인간의 삶이 권력이나 재물이나 제도 앞에 굽실거리며 아부하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에 벗어나면 싸워야 합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교회가 썩어지면 세상은 자연적으로 썩어집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이 썩어져 버린다면 이 사회는 빛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우리가 세상 살아가다 보면 제도나 환경에 따라 상하 또는 여러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부유한 사람이 있는가하면 가난한 사람이 있고, 권력을 쥔 사람이 있는가하면 억압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높이게도 하시고, 낮추게도 하십니다.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십니다. 실패도 성공도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를 들어 지혜로운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넘어뜨리시며 천한 자를 세워 귀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믿/
그러므로 가진 자와 높은 자는 섬김의 자리로 돌아가야 하고,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아멘!/ 시121:1-2절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오늘 본문의 세 주인공들의 신앙 앞에 왕권을 쥔 느부갓네살 왕이 두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할/

 

4. 신앙의 능력은 '풀무 불 속의 죽음'에서도 자유케 해 주는 힘이 있습니다.

 

마침내 다니엘의 세 친구는 왕의 명령에 따라서 극렬히 타는 풀무 불 앞에 끌려갔습니다. 왕은 풀무 불을 평소보다 7배나 뜨겁게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그곳에 세우면서 말합니다.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극렬히 타는 풀무 불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다.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어떤 신이 있겠느냐?' 정말 벌벌 떨지 않을 수 없는 살벌한 분위기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죽느냐 사느냐하는 생의 기로에 놓여진 순간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물은 절벽을 만날 때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장엄하고 아름다운 폭포수가 되는 것처럼, 또 등불은 캄캄한 밤을 만날 때 더 찬란히 빛나는 것처럼, 신앙 또한 역경을 만나게 될 때 그 위력을 발하게 됩니다. 신앙인들은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신앙만 있다면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생의 캄캄한 밤을 만날 때 그 속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할/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저들에게 이런 힘이 어디서 생겼습니까?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누구나 다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죽음을 겁냅니다. 살려고 발버둥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할 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처럼 두려움을 이겨 나갈 수 있습니다. /믿/
'죽음 앞에서도 초연한 신앙의 자세! '내가 죽으면 죽으리라'는 하나님께 맡기는 신앙!' 그 안에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이 임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멘!/
오늘 본문의 주인공들은 머리칼 하나 상하지 않고 신의 아들의 도우심을 받았습니다. 죽지 않고 돌아다니는 그들을 본 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풀무불 가까이 갔습니다. 온 방백과 도백과 모사들과 함께 모였습니다.
왕이 떨리는 음성으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 느브갓네살 왕은 완전히 하나님께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오히려 만조백관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가 그 사자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 몸을 버려서 왕의 명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이렇게 찬양하고 난 느브갓네살 왕은 그 자리에서 조서를 씁니다. '바벨론 도에서 누구든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가볍게 말하는 자는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으로 거름 무더기로 만들겠노라'
이들이 신앙의 절개를 드디어 느브갓네살 왕을 하나님 앞에 무릎 꿇게 만들었으며 온 바벨론 땅에 하나님의 도가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할/
여러분, 우리의 신앙의 힘은 강합니다. 여러분, 황금 앞에서도 권력 앞에서도 죽음 앞에서도 그들은 신앙의 힘으로 승리했습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무너진 사업장에서도, 어떠한 질고 안에서도 핍박과 환란 가운데서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시23: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바울은 고전15:55-57절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초대교회의 교부들 중에 '황금의 입'이라는 별명을 가진 '크리소스톰'의 일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당시 로마 정부는 기독교를 법으로 금지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가 복음을 전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감옥에서 기도하기를 "주님! 감옥에 갇힌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저를 이곳으로 보내 주셨군요.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도 쉬지 않고 복음을 전하다가 결국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다시 기도하기를 "주님! 감사합니다. 성도의 가장 아름다운 죽음이 순교라고 했는데, 저 같은 사람을 순교의 반열에 동참케 하시니 감사합니다." 기도한 후 사형장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런데 사형을 집행하기 직전에 사형중지 명령이 내렸습니다. 그때 그는 또 기도하기를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직도 종에게 할 일이 남았으면 죽도록 충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멋있는 신앙이 아닙니까?

 

5. 그들의 신앙의 결과는 무엇인가?

 

①그들은 풀무 불에 던져졌으나 구원을 받았습니다.
⑴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보자!(28) "그가 그 사자를 보내사" 하나님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극심한 시련 속에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경우에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극심한 시련을 허락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홀로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그 시련 가운데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손을 붙잡고 우리로 하여금 그 시련을 이기도록 보살펴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믿/
⑵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을 구원하십니까?(28)
㈀"자기를 의뢰하고." 사람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물질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자기 힘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구원해주십니다.
㈁"그 몸을 버려서." 롬12:1절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자기 몸을 아끼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구원하십니다.
㈂"왕의 명을 거역하고." 불의 앞에서는 아무리 엄한 왕의 명령이라도 용감하게 거역할 수 있는 신앙, 목에 칼이 들어와도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할 수 있는 일사각오의 신앙을 가졌습니다. 용기 있는 믿음을 가진 자를 하나님은 구원하십니다.
㈃"그 하나님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일편단심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고, 하나님 한 분만을 사랑하는 일편단심의 신앙입니다. /할/
②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았습니다(29).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의 왕이었지만 느부갓네살은 분명한 어조로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선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경멸하는 자는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을 거름터를 삼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방나라에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이 분명한 믿음의 사람이 될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아멘!/
③더욱 그들을 높여주셨습니다.
30절 "왕이 드디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바벨론 도에서 더욱 높이니라."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주를 위해서 자기들의 높은 지위를 다 버렸습니다. 몸을 드렸습니다. 생명까지도 주를 위해서 아낌없이 바친 사람들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오히려 저들을 더욱 높여주셨습니다. 반대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참소했던 갈대아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들은 쫄딱 망했습니다. /할/
그렇습니다. 주를 위하여 헌신하고 충성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높여 주십니다. 우리 모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신앙을 본받는 성림의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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