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강의 사람! 감사의 사람! (골 3:12-17)
골1-2장은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교리편이며, 그리고 3-4장은 예수님 때문에 새사람 된 사람이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사회적으로 어떻게 생활할 것인지 그 원리를 보여주는 생활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더러운 옷을 벗어내듯이 과거의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데 본문 8절에서는 '이제는'이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즉 전에는 죄 가운데서 살았으나 이제는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평강의 사람,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실패와 저주와 불안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도저히 평강의 주인공으로 살 수 없었고, 감사할 수 없는 처지였으나 이제는 은혜 받고 새사람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으니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의 마음을 주장하게 하고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선물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은 다양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시는 것 가운데 가장 귀한 선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제일 좋은 선물은 평안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실 때에 어느 집에 가든지 먼저 할 일은 '그 집에 평안하기를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평강을 주신다.'고 했고, 또 '네 경내를 평안케 하시고 아름다운 말로 너를 배불리시며'(시147:14) 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은 성도는 평안을 선물로 받습니다. 평안은 큰 힘이고 축복이고 선물입니다. 국가의 큰 축복은 평화입니다. 그래서 그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사람은 평안을 얻으려고 합니다. ▶이 땅에서 전쟁은 어느 면으로 보더라도 피해야 합니다.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한 가지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전쟁도 불사합니다. 그만큼 평화는 귀한 것입니다. /믿/
'힐타'라는 사람은 '평화! 이것이야말로 이 지상에 있어서 행복에 가까워지는 최대의 기름길'이라고 했으며, '메킬리'는 '평화를 위해서가 아니면 싸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엄청난 환난! 피 흘림, 파괴, 죽음을 당하면서도 평화를 얻는 목적을 가지고 싸운다.'고 했습니다.
최고의 선물은 평안입니다. 평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도 평안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요, 가정에서도 평화는 정말 귀한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가정에 폭력이 난무 하다면 그 가정은 전쟁터나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은 안식처이어야 합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평화가 없이는 사랑도, 행복도, 기쁨도, 감사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평화가 있을 때 가장 번영하고 잘 살게 되고 모든 문명 문화가 찬란하게 발달하고 발전했습니다.
다윗 왕이 나라를 다스릴 때 평안하여 나라가 통일되었고, 솔로몬이 평화로울 때에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우리나라도 세종대왕 때 평화가 있었기에 훈민정음을 비롯하여 우수한 발명품들이 쏟아져 나와 온 백성들이 잘 살 수가 있었습니다.
그 후 수백 년 동안 환란과 전쟁과 가난과 싸움이 있던 우리나라에 근대 몇 십 년 동안 평화가 주어지자 우리가 지금 얼마나 잘 살고 있습니까? 몇 년간의 평화 때문에 눈 깜짝할 사이에 국가가 달라졌습니다. 농촌이 달라졌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장 반가운 인사가 무엇인가? '나 요즘 잘 있어! 모두 평안해!' 이 보다 더 좋은 소식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정말 안타까운 소식은 '나 요즘 힘들어! 사업이 부도났어! 나 이혼했어! 병원에 입원했어!' 이 얼마나 힘들고 충격적이고 가슴 아픈 소식입니까?
현대인들에게 가장 귀한 축복은 삶의 평안입니다. 그런데 수없이 많은 인생들이 이 땅에서 참 평안과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자가 그 물질로 평안을 얻지 못하고, 권력이, 인기가, 그 삶을 평안하게 못합니다. 왠지 아십니까? 그런 것들이 평안의 출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돈이 평안을 주지 못합니다. 권력이, 명예가, 인기가 평안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솔로몬은 그의 전도서 2:22-23절에서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고 했습니다.
마음에 평안이 있어야 참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안식은 평안으로부터 오는 쉼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들을 당신의 품으로 우리를 초청하고 계십니다. 마11: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렇습니다. 주님만이 우리에게 참 평안을 주실 수 있습니다.
15절 첫머리를 보세요! '그리스도의 평강'이라고 했습니다. 평강은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지 내 것이 아닙니다. 즉 주님께서 평강의 근원이시고 출처이시지 우리가 평안을 제조하거나 생산하는 것이 아닙니다.
▶15절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평강과 감사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제목소개!▶
1. 평안에 대하여!(15)
①평강이라는 낱말의 뜻이 무엇인가?
⑴히브리어에 평강은 '누아흐'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 뜻은 '쉬다, 정착하다, 머물다.' 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즉 평강은 어느 한 곳에 마음을 정하고 머물며 쉬는 것을 말합니다. 여행이 아무리 좋아도 즐거워도, 가정만 하겠습니까? 계속 떠돌이처럼 짐을 꾸려야 하는 안정이 없는 것이 여행입니다. 내 영혼의 닻을 영원한 포구이신 주님께 내리고 거기서 머물고 거기서 쉬는 '누아흐'의 상태가 평강입니다.
⑵평강을 '메누하'라고 하며 그 뜻은 '고요한, 안정된'입니다. 평강의 현상은 우리에게 고요함과 안정됨을 줍니다. 즉 고요하고 안정된 마음의 상태가 평강입니다.
⑶'샬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뜻은 '평화, 잘 있는, 행복한, 건강한, 정다운, 번영,'을 말합니다. 샬롬은 '행복하고 정답고, 평안하며 그리고 좋은 것'입니다.
⑷헬라어로는 '에이레네'라고 합니다. 그 뜻은 '평화, 하나 됨, 고요, 안식' 등입니다. 즉 주로 마음의 평화, 평온을 뜻하는 것으로서 평강이라는 용어 자체만으로도 뿌듯하고 좋은 것입니다. /아멘!/
②평안의 출처가 어디인가? '오직 예수만이 평안의 출처'가 되십니다.
눅2:1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분명히 밝히고 계십니다. '하나님께는 영광이고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평강,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주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귀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영생입니다. 요3: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하나는 평안입니다. 요14:27절에서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성경 곳곳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평강의 출처가 되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렘33:6절 "내가 이 성을 치료하며 고쳐낫게 하고 평강과 성실함에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이 한 구절 속에 하나님의 사역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⑴치료하시고, ⑵고치시고, ⑶낫게 하시며, ⑷평강을 주시고, ⑸더 풍성케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29:11절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사26:12절 "여호와여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평강을 베푸시오리니 주께서 우리 모든 일을 우리를 위하여 이루심이니이다" /할/ 평강의 출처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평안을 얻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평안의 출처가 되시는 하나님을 잘 모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사26:3절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의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구라파의 더위와 동남아의 더위에는 차이점이 있답니다. 구라파의 더위는 제 아무리 불볕처럼 뜨거워도 그늘 아래만 들어서면 시원합니다만, 동남아의 더위는 그늘 아래 들어서도 숨이 막히고 땀이 줄줄 흐릅니다. 우리는 구라파의 더위와 동남아의 더위 속에서 세상의 평강과 하나님의 평강을 비유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평강의 그늘에 들어서기만 하면, 제 아무리 무섭고 두려운 세상의 폭염과 문제도 신선해지고 해결이 됩니다. /믿/ 그러나 세상 평강은 우리에게 참 시원함을 주지 못합니다. 참된 평강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총이며 선물입니다. /아멘!/
③그 평강이 우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평강이란 영적인 것이며 정신적인 것이기 때문에 먼저 마음에 임해야 합니다. 몸이 편하다고 해서 마음도 편한 것은 아닙니다.
▶이민 간지 15년이 지난 어느 가정의 이야기입니다. 2남 1녀의 자녀가 모두 결혼하여 가정을 떠났고, 두 부부만이 살고 있습니다. 사업도 크게 성공하여 넓은 땅에 대저택을 짓고 남편도, 아내도 최고급의 승용차를 따로 굴리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부부가 행복하지 못합니다. 이유는 남편이 다른 여자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부부는 함께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렸습니다. 곁에 따고 있던 아내가 또 그 여자이야기를 끄집어냅니다. 남편은 그 사실을 방어하기 위해 아내의 결점을 꼬집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소리로 시작된 말다툼이 점점 커지기 시작하더니 서로가 소리를 지르며 상대방을 헐뜯고 공격합니다. 화가 치밀 대로 치민 남편이 시속 120K를 달리던 자동차의 브레이크를 힘껏 밟았습니다. 그 순간 자동차는 급회전을 거듭하면서 고속도로 난간을 들어 받은 후 6미터 벼랑으로 굴러 떨어 쪘습니다. 남편은 현장에서 즉사했고, 아내는 만신창이가 된 채 병원에 옮겨 치료를 받았지만 3년이 지난 후에도 의식이 돌아오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그 날 그들이 몰고 간 자동차는 한국 돈으로 2억이 훨씬 넘는 최고급의 승용차였다고 합니다. 평강이란 넓은 저택 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2억 짜리 승용차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평강이란, 기쁨이란, 행복이란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가난해도 가족이 함께 둘러앉아 찬송 부르고 기도하고 서로를 위로하며 감사하는 생활, 바로 그것이 평강이 넘치는 삶입니다. /믿/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평강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평강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도록 내 마음을 내어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고 당부하신 것입니다. /아멘!/
▶'샬롬'이라는 말은 '평강'이란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인사법은 '샬롬'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진정 평강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나라를 뺏고 빼앗기는 계속되는 반복 속에서 나라를 겨우 되찾고 그들이 평강을 얻으려고 이집트와 중동 여러 지역과 미국과 여러 나라들과 협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협상을 해도 그들은 진정한 평강을 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평강을 주시려고 예수그리스도를 그들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집트와 다른 어떤 나라와 평강을 얻기 위해서 협상하기보다는 정말 그들이 평강을 얻는 길은 한 길 밖에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와 협상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가 평강의 출처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여러분! 마음에 평강이 있습니까? 가정에 진정한 평강이 있습니까? 여러분! 삶의 현장에 진정한 평강이 있습니까? 바울은 옥중에서도 평강이 넘쳤고, 감사와 기쁨이 넘쳤습니다. 그가 감옥에서 에베소교회와 빌립보교회, 골로새교회에 쓴 옥중서신들을 보면 그의 마음의 평강을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왜? 예수그리스도께서 그의 마음을 주장하도록 내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할/
▶한남동에 어느 돈 많은 사모님이 있었습니다. 시골에서 올라온 아주머니를 가정부로 두고 있었는데, 이 부자는 돈이 많아도 가정이 평안하지 못하고 복잡합니다. 남편은 남편대로, 자식들은 자식들대로 문제가 많아 항상 다툼이 일어납니다. 이 부자는 매일 수면제를 먹어야 잠이 오고, 술을 마셔야 잊어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정부 아주머니는 언제나 기쁘고 즐겁고 평안하고 명랑합니다. 그러니까 안방은 지옥이고 골방은 천국입니다. 가정부는 평안가운데 살고 주인은 항상 근심가운데 삽니다. 주인은 술로 살고 가정부는 찬송으로 삽니다.
어느 날 주인이 '집 주인인 나는 기쁨이 없는데 아주머니는 남의 집에 살면서도 늘 기쁘니 그 이유가 뭡니까?'라고 묻자 가정부가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나는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도 없고, 또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함을 압니다. 입을 것과 마실 것이 있으면 족하고 네 마음에 예수님을 모시고 사니 초막이나 궁궐이나 그 어디라고 즐거울 뿐입니다. 이제 병들면 이 몸 벗어버리고 하나님께로 갈 것이니 아무 걱정도 없고 그저 기쁘고 즐거울 뿐입니다.'
이 말을 들은 주인집 아주머니가 잠 못 이루는 밤에 생각하기를 '지금까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았단 말인가? 열심히 벌어서 모았지만 그것이 지금 나에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래 나도 아주머니를 따라 교회에 가자' 이렇게 결심하고 결단한 그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은혜를 받고, 그의 생애 속에 '하나님 앞에 한 작품을 남기리라'고 마음먹고 한남동에 고딕 건물로 아름답게 교회를 건축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 앞에 나와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여러분, 환경이 어렵고 복잡합니까? 삶의 범사에 염려가 있습니까? 염려는 우리 마음에 평강을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염려는 갈라진 마음이요, 두 마음을 품은 것입니다.
잠17:22절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요14:1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나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속에 근심은 내 근심보다 더 큰이를 만나야 없어집니다.
사실 모든 염려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불신에서 오는 것입니다. 모든 염려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맡기게 될 때, 마음에 쉼을 얻게 됩니다.
시37:5절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맡길 때 비로소 마음에 평안을 찾을 수 있습니다. /믿/
④15절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우리는 이 구절 속에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평강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오래 전 미국 '웨스트 포인트'에 있는 육군 사관학교의 입학시험 문제 가운데 '이 땅에 군인이 왜 필요합니까?' 즉 '미국군의 존재이유를 쓰라'는 문제가 나왔습니다. 각양각색의 대답 가운데 가장 많은 두 가지를 보면, 하나는 '미합중국을 위해 싸우기 위해서'이고, 또 하나는 '미합중국의 평화를 위해서'라는 응답이 주류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정답은 '미합중국의 평화를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어느 나라 군대도 싸움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싸워도 평화를 위해 싸우는 것이지 전쟁이 군인의 목적이나 존재이유는 아닙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이 왜 존재합니까? 교회는 왜 이 세상에 존재합니까? 그것은 평화를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본문을 주목해야 합니다.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교훈을 찾아야 합니다.
⑴나 자신의 평강을 소유해야 합니다. 나 자신이 평안하지 않고서는 남에게 평안을 줄 수 없습니다. 즉 내 마음 속에 그리스도의 평강이 늘 언제나 차고 넘쳐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인 성령을 근심 되게 말아야 합니다.
엡4:30절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⑵이제 나 자신이 평강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성 프란시스'의 기도문처럼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옵소서!' 이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때로는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평화를 줄 수고 있고, 상처를 줄 수도 있습니다. 눈빛 때문에, 내 말 한마디 때문에, 내 손짓 하나 때문에, 상처가 될 수도 있고, 화목을 줄 수도 있습니다. 이왕이면 우리가 가는 곳에는 평화가 넘쳐나야 합니다. /믿/ 내가 속한 구역이 화목 되고, 내가 속한 단체가 화목 되고, 내 가정, 내 직장 분위기가 나 때문에 화목이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한 몫을 다 하는 것이 됩니다. /할/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이 힘으로 권력을 잡고 황제로 즉위하는 대관식 날 그의 부인 조세핀은 화려한 드레스에 진주목걸이, 수없이 반짝이는 보석들, 드레스에 걸쳐진 망토의 길이가 12m나 되어 황제의 두 여동생이 그 자락을 잡아주는 호화스런 대관식을 치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혼과 유배 생활로 끝장이 나고 말았습니다. 권력도, 미모도, 보물도 가졌으면 뭐 합니까? 올바로 사용될 때에만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역사는 교훈하고 있습니다.
⑤그리스도의 평강은 세 가지 큰 영적인 본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바로 '죄 사함을 받은 자가 누리는 은혜'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죄 사함을 입은 그 기쁨이 바로 평강입니다. /아멘!/
두 번째는 '구원의 확신에 따른 기쁨'입니다. 내가 구원받은 그 기쁨을 가지고 감사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평강으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구원이 기쁨의 근원이 되는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평강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영적인 일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일에 헌신할 때, 몸 된 교회를 위해 헌신 할 때, 생명의 복음을 전할 때, 그리스도의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믿/
2. 감사하는 자가 되라!(15)
어느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에 하나님이 거하시고 불평하는 마음에 마귀가 거한다. 축복은 감사의 문으로 들어왔다가 불평의 문으로 나가버린다. 감사하면 감사할 조건이 오고 불평하면 불평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 또 오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 믿고 구원받아 새 사람이 된 성도들에게 또 하나의 생활강령은 '감사하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했고,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했고, ▶'무엇을 하든지…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15,16,17절에 반복하여 감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맥추감사절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맥추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던 3대 절기 중 하나입니다. ▶이스라엘의 3대 절기는, 유월절(무교절), 맥추절(칠칠절), 초막절(수장절)입니다.
맥추절은 이스라엘이 곡식을 거두기 시작하여 7주를 계산한 후에 지켰습니다. 그 때문에 맥추절은 여러 별명이 있습니다. 한 주가 일곱 번 지난다고 해서 '칠칠절'이라고 부르고, 또한 칠칠에 49일이기에, 50일 째 지킨다고 해서 오순절이라고도 부릅니다. 특히 이때는 보리나 밀을 추수했기에 맥추절이라고 불렀습니다. 히브리말로 '추수절'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맥추절은 첫 열매를 드리는 절기입니다. 출23:16절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고 했습니다. 맥추절의 가장 큰 뜻은 '처음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처음 것'이란 맨 먼저 거둔 것 다시 말해 '가장 소중한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처음 것에 대한 애정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처음 것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처음 것'이란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의미하지만 사실은 '모든 것'을 말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소유의 근원이시고, 처음과 나중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 어떤 것도 우리의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신16:10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맥추절을 칠칠절이라고 하는 것은 '수를 세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단순히 수를 세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첫 보리와 밀을 베고, 7주간의 수를 세는 것인데 이는 축복의 수를 세는 것입니다.
'이 만큼 거두게 하셨구나. 이 만큼 축복하셨구나.' 하면서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세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사람들은 수를 세는 데에 약합니다. 하나님께 받은 것을 기억하는 것에도 약합니다. 부모에게 받은 사랑을 기억하는 것도 약합니다. 수를 잘 세는 자가 평강의 사람이요 감사의 사람입니다. /믿/
여기 '자원한다.'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즐거움'으로 기꺼이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요, 또 하나는 '최선을 다하여'라는 뜻이 있습니다.
▶맥추절의 또 다른 의미는 '즐거워할지니라.'입니다. 신16:11절에 맥추절(칠칠절)을 지킬 것을 말씀하시면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나오는 절기는 '그 날이나 기억하고 보내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절기는 그냥 지키기 위해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복으로 감사하며 그 감사로 인해 기쁨이 충만할 수 있는 절기가 되어야 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섬기고 봉사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이루어 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하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십시오! 감사는 천국의 언어입니다. /아멘!/
▶16년 동안 병상에 누워 살아온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사지를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으며, 늘 통증 가운데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렇지만 할머니 입에서는 늘 감사하는 말이 흘러 나왔습니다.
할머니는 엄지손가락 하나를 쓸 수 있게 해주신 것에 대해 늘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 손가락으로 성경책장도 넘길 수 있었고, 빨대를 이용해 차도 마실 수 있었으며, 음식도 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그 할머니에게 '어떻게 그렇게 감사하는 생활을 할 수 있느냐'고 묻자,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시면 우리는 두려울 것이 없으며, 낙심될 일도 없습니다.
'키게로'는 '감사하는 마음은 가장 위대한 미덕일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미덕의 근원'이 된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모든 만사를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모든 것에 감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움직이는 힘입니다. 시50:23절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여러분, 숨 쉴 수 있다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없는 것, 모자라는 것에 집착하지 말고 있는 것, 남은 것에 감사하며 삽시다. /할/ 지금 아무 것도 감사할 것이 없다면 코를 한 번 막아 보세요! 숨을 쉴 수 있는 것에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구원받은 은혜를 감사하자! 죽을 수밖에 없는 나를 구속의 은혜로 건져 주셔서 영생을 얻게 하신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직분 주신 은혜를 감사하자! 딤전1:12절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날마다 도와주시는 은혜를 감사하자! 히4:16절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때를 따라서 돕는 것은 꼭 필요할 때에 도와주신다는 뜻입니다. /할/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지내 온 것 주의 크신 은혜입니다. 앞으로도 자나깨나 주의 손이 항상 살펴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①감사와 평강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이라야 마음에 평강이 넘쳐나게 됩니다. 감사는 하나님이 주신 복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염려는 하나님께 맡기고 현재 나에게 감사할 조건을 찾아내야 합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한 분이 지난여름에 서울대학에 다니는 아드님을 잃어버렸습니다. 동해안에 갔다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모임에 오셔서 위로하자 '하나님이 더 좋은 세상으로 뽑아 가셨다'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에서 나는 주님의 모습을 본 것 같았습니다.
감사는 우리 마음에서 원망과 불안을 쫓아버립니다. 내 마음에 평강이 머물면 감사는 저절로 샘솟기 마련입니다. 우리 모두 감사하는 성도들이 됩시다.
고전1:4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할/
②감사와 평강의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가?(12)
⑴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이 가장 큰 감사입니다.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요15:16). 사도 바울도 이 교리를 깨닫고 '어머니 태로부터 선택'되었고(갈1:15), 창세전에 나를 선택(엡1:4)' 했다고 그는 감사했으며 끝까지 충성했습니다.
우리가 인물이나 물질이나 학벌 좋다고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와 사랑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 얼마나 감사해야 합니까? /할/
어떤 집사님이 이런 헌금기도를 했습니다. '오 하나님! 쇼핑할 때는 만 원짜리가 그렇게 작아 보이는데 헌금할 때는 어찌하여 그렇게 크게 보이나이까?" 감사를 모르는 사람의 기도입니다.
⑵선택받은 사람들이 감사와 평강을 누리기 위해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살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긍휼'이란 어려운 처지에 빠진 남을 불쌍히 여길 줄 아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자비'는 그처럼 불쌍히 여겨지는 대상을 두고 어떻게 도와주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자비는 사랑의 속성입니다. ㈂'겸손'이란 모든 경우에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길 줄 아는, 대인관계의 가장 기본에 해당되는 자세입니다. ㈃'온유'는 말씀으로 잘 길들여진 상태의 '점잖음'입니다. 즉 남을 대하는 태도가 부드럽고 온화한 것을 가리킵니다. ㈄'오래 참음' 즉 인내는, 신앙인의 덕목입니다. 참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내 자신을 이기는데도 인내가 필요하고, 다른 사람을 대하여도 인내가 절대 필요합니다. ▶이 다섯 가지가 우리에게 감사가 되고 평강의 재료가 됩니다.
③용서하는 마음속에 평강이 있고 감사가 있습니다(13).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여기 '혐의'라는 말은 '비난하다'라는 말에서 유래된 말로, '혐의가 있다' 즉 '비난할 만한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누구나 비난받고 책망 받고 욕먹을 만한 일들이 있습니다. '누가 뉘게'라고 한 말씀은 누구든지, '너나 나나'라는 뜻이요, 결국은 '너도나도 혐의는 있다'는 것이며, 그것을 용납하고,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또 여기 '혐의'란 말은 상대방에 대하여 좋은 감정이 아닌 것을 의미합니다. 상대방에 대하여 미워하는 마음이나, 분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분한 생각과 증오심을 마음에 품고 있으면 그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약화시킵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혐의라고 합니다. 혐의를 극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누구나 일시적으로 분을 낼 수 있습니다. 부부간에도 살다보면 싸우게 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을 마음에 품으면 그것이 병이 된다는 말입니다. 옛날에는 그것을 가슴앓이라고 했고, 속병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속이 숯검정이 되어버렸다고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분을 낼 수도 있지만, 그것을 마음에 품고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남을 미워하는 마음, 증오심을 마음에 품고 있으면 그것이 암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마음의 응어리를 갖고 있으면 혈액순환도 잘 안되고 신진대사도 잘 안되기 때문에 그것이 병의 원인을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너를 용서해 주신 것처럼 용서하라' 여러분! 용서란 피차 해야 합니다. 잘못한 사람이 용서를 빌지 않으면 아무리 용서해 주고 싶어도 용서가 안 되는 것이고 반대로 아무리 잘못했다고 빌어도 용서할 사람이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못한다고 한다면 용서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께서 너를 용서하신 것처럼 너도 그리하라'는 용서의 명령입니다.
막11:25절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④'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14)
여기 '온전하게 매는 띠'라는 표현은, 성도교제의 최종단계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초대교회 당시 사람들이 옷을 입을 때에는, 이것저것 걸쳐 입고 제일 마지막에 허리띠를 매어야 옷차림이 완성되었습니다.
사랑은 성도교제에 있어서 그런 최종단계, 최고의 덕인 것은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즉 교회 안의 모든 성도들이 진실한 사랑을 서로 나눌 수 있게 되면, 그것은 마치 그 교회 전체가 한 공동체로서 함께 띠를 매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렇게 사랑의 띠를 함께 매고 있는 한 몸 안에서는 자연히 '평강'이 유지되고 '감사'가 끊임없이 솟아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멘!/
⑤풍성한 말씀만이 우리를 평안케 합니다(16).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위대한 능력입니다. 막9:2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할/
하나님의 말씀 속에 풍성히 거하기 바랍니다. 그 안에 능력이 있고, 은혜가 있고, 축복이 있고, 진정 주님이 주시는 평강을 붙잡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하게 거하게 하라'고 당부한 것입니다.
▶음식의 맛을 아는 방법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넉넉하게 먹는 것으로 아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맛을 보는 것으로 아는 것입니다. 손끝에 찍어 먹어도 맛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배를 불릴 수는 없습니다.
말씀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말씀을 넉넉하게 먹어야 우리의 영혼이 풍성해지고 풍요로워집니다. 그러나 말씀을 맛만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맛을 잘 압니다. 그러나 그들의 영혼은 굶주리고 지쳐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평강이 임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말씀 안에 풍성히 거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많이 읽고 많이 듣는 것이 축복입니다. 믿/
'헤밀턴'은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⑴구원의 힘을 가진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죽은 자를 살렸고, 앉은뱅이를 일으키셨으며, 파도도, 바람도, 잠잠케 다스렸습니다.
⑵인간의 조건을 성취시키는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십시오, 기도할 때 주님의 말씀 붙잡고 기도하십시오, 실패가 성공으로 바뀔 것입니다.
⑶인간의 생명을 보존케 하시는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 꾸준히 거한다는 것은 말씀하신 주님을 내 마음에 모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마음에 주님을 모셨다는 증거는 주님처럼 생각하고, 결정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안에 주님이 계시면 크게 아멘 합시다. /할/
⑥피차 권면하고 가르침을 잘 받는 자는 평강을 붙잡습니다(16).
교회는 가르치는 것과 권면하는 일을 힘쓰는 곳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혜로'라는 말과 '피차'라는 말입니다. 제 아무리 훌륭한 교훈이라도 지혜가 모자라면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열심도 있고, 신앙도 좋은데 지혜가 모자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말이지만 지혜롭게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싫어하고 따돌림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생활이나 사회생활에는 지식보다 지혜가 더 필요합니다. 지혜란 지식을 적용하고, 활용하는 능력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혜를 받아야 합니다. /믿/ 지혜로운 말과 권면, 교훈은 교회 생활의 필수조건입니다.
우리는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라'는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피차'란 서로간입니다. 서로 가르치고 배워야 합니다. 이유는 서로에게서 배울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 권면하고 권면을 배워야 합니다. 권면과 비난을 혼돈하지 마십시오, 권면은 애정 어린 충고이며 조건이고 도움이지만 비난은 악의에 찬 공격행위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남을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피차 권면하고 가르침을 잘 받을 때, 우리는 연합을 이루고 회복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특히 권사님들, 구역장님들, 제 식구들을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권면하시기 바랍니다.
⑦신령한 노래를 부르는 삶은 평강의 삶이요 감사의 삶입니다(16).
오늘 중요한 것은 '신령한 노래'를 부르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찬송은 모두가 신령한 노래들입니다. 신령한 노래는 신령하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노래라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내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찬양하고' 마음에 감사함으로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 속에 감사한 마음이 있어야 신령한 노래가 나올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 평강이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고 권면 했습니다.
감사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감사와 입에 붙은 형식적인 감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 깊은 속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도 있으며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입니다.
⑧감사도 평강도 주의 이름 속에 있습니다(17).
예수의 이름은 성도의 인감도장입니다. 예수님의 인감도장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라고 합니다. 예수의 이름은 성도가 갖고 있는 하나님의 인감도장입니다.
여러분, 인감도장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어떤 직함을 가진 사람의 인감도장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그 자신의 인감도장을 우리에게 주셨고 무슨 일을 하든지 이것으로 쓰라는 것입니다. 감사도 그의 이름을 힘입어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이 예수님의 인감도장을 감사하는데 너무 사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 사욕으로 남용하고 있습니다.
벧전4:11절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이 말씀하는 것같이 하고 일에나 누가 봉사하면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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