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소금이 되고 빛이 되어라! (마 5:13-16)
옛날 세 딸을 둔 임금님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임금님이 세 딸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큰딸은 '황금'이라고 했고, 둘째딸은 '보석'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셋째 딸은 '황금이나 보석이 아니라 소금'이라고 했습니다.
임금은 셋째 딸의 말에 의아했습니다. 그래서 '아니 소금이 무엇이 귀하단 말이냐? 구하기 쉽고 값싼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자, 셋째 딸은 방긋 웃으면서 '소금이 귀한 것'을 알게 될 때가 올 것이라고 의미 있는 말을 합니다.
저녁 식사 때가 되었습니다. 셋째 딸은 주방으로 들어가서 임금님의 식사에 일체 소금을 넣지 못하게 했습니다. 드디어 임금님이 식사를 하시는데 도무지 심심해서 먹을 수가 없습니다. 국도 싱겁고, 나물도 싱겁고 도대체 간이 맞는 것이 없습니다. 음식은 간이 맞아야 먹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화가 난 임금님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것도 음식이라고 만들어 왔느냐?'고 역정을 내자 이때 셋째 딸이 달려와서 하는 말이 '아바마마! 어떻게 임금님이 잡수실 음식에 값싸고 보잘 것 없는 것을 넣을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소금을 넣지 않고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임금님은 그때서야 '과연 그렇구나! 황금이 없어도 살고, 보석이 없어도 살지만 소금이 없이는 정말 못살겠구나.' 크게 깨닫고 셋째 딸에게 큰상을 주며 칭찬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소금은 귀한 것입니다. 꼭 필요한 것입니다. 소금이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믿/ ◀제목소개!▶
본문은 그 유명한 예수님의 산상보훈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팔 복을 말씀하셨습니다. 팔 복은 우리 신앙인들에게 삶의 지침서입니다. 즉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팔 복의 정신대로 사는 자에게 오늘 본문을 주셨는데 우리는 본문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세 가지의 상징적인 용어를 발견하게 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에 빛이다. 너희는 산 위에 동네이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어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 되어라'고 명령하신 것이 아닙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한마디로 묶어서 해석한다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제 구실을 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소금처럼 빛처럼 없어서는 안 될 너무나도 소중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믿/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너희는'이란 말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너희는'이란 말을 이해함에 있어서 언제나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생각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는 소금이 아니어도 좋고, 빛이 아니어도 좋고, 산 위에 동네가 아니어도 좋지만 너는 소금이 되어야 하고 빛이 되어야 하고 산 위에 동네가 되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는 주님이 주신 이 말씀을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나는 세상에 소금입니다. 소금이기에 맛을 내야 합니다. 맛을 잃어버리는 밖에 버리어 밟힐 뿐입니다. 나는 세상에 빛이 되어야 합니다. 빛은 옳은 행실을 의미합니다. 나의 빛을 사람들에게 비춰주어야 할 테인데 내 속에 성령의 등불이 가물거리니 어찌해야 할까? 통곡해야 합니다. 나는 산 위에 드러난 동네입니다. 그래서 산아래 동네 사람들에게 좋은 본을 보이고 좋은 소식을 전해야 하는데 그 구실을 제대로 못했으니 엊지면 좋단 말인가?'하고 깨닫고 고백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너희는'이라는 말의 뜻은 다른 사람을 가리키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나 자신의 얼굴과 양심을 향하여 외쳐야 할 경고이며 자책이어야 합니다. /믿/
도산 안창호 선생이 남긴 말 가운데 '나 하나를 건전한 인격자로 만드는 것이 우리 민족을 건전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대는 나라를 사랑하는가? 그러면 그대가 먼저 건전한 인격자가 되라! 백성의 질병을 알거든 그대가 먼저 의사가 되라! 의사까지는 못되더라도 그대의 병부터 고쳐서 건전한 사람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민족개조론의 정신'이라고 했습니다. 나부터 고치고 나부터 바른 인격자가 된다면 민족은 치유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먼저 소금이 되고 빛이 되고 산 위에 동네가 되면 이 세상은 썩지도 않을 것이고 어둡지도 않을 것이며 남들이 손가락질도 안 받을 것입니다. /할/
▶본문의 주시는 의미를 생각해 보고, '소금과 빛의 구실'을 제대로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13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어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인데 그냥 소금이 아닙니다. 세상의 소금이라고 했습니다. '너희는 교회에서 소금이니'라고 하지 않고 '세상의 소금'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만나보면 다 성남성녀입니다. 얼마나 기도도 훌륭하게 잘 하는지 모릅니다. 말씀을 받을 때 '아멘!'으로 화답도 잘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 나가면 어떻습니까? 신앙인의 모습이 사라지고 맙니다. 이것이 우리의 한계입니다. 누구나 교회 안에서는 신앙 인처럼 살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맛을 내고 제 구실을 하는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세상의 빛'이라고 하는 말은 우리 크리스천들의 삶의 현주소가 꿈같은 이상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바닷물 속에 물고기가 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물고기의 현주소는 육지가 아니라 바다 속입니다. 물고기는 바다를 떠나서는 더 이상 존재의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 물고기가 짠 바닷물 속에 살지만 결코 짜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크리스천의 현주소는 '이 세상 속'입니다. 천국이 아닙니다. 물고기가 짠물에 물들지 않듯이 우리가 세상 물에 오염되지 말아야 하고, 더 적극적으로는 소금처럼 빛처럼 맛을 내고 빛을 발하면서 살아가야 된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믿/
소금이 제구실을 못하면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어 사람에게 밟힐 뿐'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는 지금처럼 소금을 정제하는 기술이 발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해 근처에서 생산된 소금에는 때때로 석고와 같은 이 물질이 섞여 있는 경우가 있었다고 합니다. 석고의 색깔은 희니까 육안으로는 소금과 잘 분간이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석고는 짠맛을 내지 않고, 오히려 비위를 거슬리는 역겨운 맛을 냅니다.
그래서 소금에 석고가 많이 섞여 있으면, 소금은 소금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그럴 경우는 어쩔 수 없이 내다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내다버린 소금이 밭이나 정원에 떨어져 식물들에게 지장을 주면 안 되니까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바닥에 내다버린다고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오가며 밟고 다니는 가운데, 소금과 석고는 잘게 부셔져서 먼지처럼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그렇습니다. 소금은 짠맛이 특징입니다. 그 짠 맛 때문에 방부제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이 사시던 그 당시 지중해 연안만 해도 온도가 꽤 높은 지역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냉장고도 없던 시절, 식품을 오래 보관하기가 매우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금만 넣어 놓으면 적어도 한두 달은 신선하게 보존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당시 사람들이 '하늘의 태양 다음으로 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히 여기는 것이 소금'이었다고 합니다.
고대 사람들은 소금을 대단히 귀중하게 여겼습니다. 헬라사람들은 소금을 '신과 같은 것'으로 여겼고, 로마 속담에 '소금과 햇빛은 이 세상을 생기 있게 만들고 향기롭게 한다.'고 했고, '호머'라는 사람은 '소금은 신성하다'고 했고, '플라톤'은 '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 중의 가장 소중한 보물'이라고 극찬을 했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향하여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라고 하신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값진 존재이며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인 것을 상기시켜주시는 말씀입니다. /믿어지면 아멘!/
1.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니'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냐고 묻습니다. 대답은 간단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소금처럼 사는 것이 신앙생활의 모범'입니다. /할/
①'세상에 필수품이 되라!'는 교훈입니다.
소금은 필수품입니다. TV는 없어도 살 수 있습니다. 냉장고도, 장롱도 없어도 됩니다. 그러나 필수품이 있습니다. 쌀 그리고 소금은 필수품입니다. 소금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하신 것은 우리 모두가 있는 곳에서 '필수품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 사람이 교회에 없으면 안 됩니다. 그 사람이 찬양대에 없으면 안 됩니다. 그 사람이 그 회사에 없으면 안 됩니다. 그 사람이 그 나라에 없으면 안 됩니다.
출애굽시대에 모세가 없으면 출애굽이 불가능했습니다. 모세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필수품 지도자였습니다. 대용품이 없습니다.
▶신앙이 좋은 김대혁 집사님은 새벽 5시면 일어나서 출근합니다. 그리고 밤늦게 귀가합니다. 남보다 두 시간 일찍 출근하여 직장 청소, 작업 준비를 합니다. 그리고 일이 끝나고 다른 사람들이 다 가고 나면 뒷정리를 혼자 하고 돌아옵니다.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일찍 가고 늦게 온다고 월급을 더 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도 '내 직장이니 내가 충성해야 한다'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을 사장님이 인정해 주기 시작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사장님이 그 사람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고 행여나 그 사람이 그만둔다고 할까봐 최고의 대접을 해 주고, 만일 누가 이 사람 신경을 건드리면 그 사람을 파면시켜 왔습니다.
이 사람을 건드려서 이 직장에서 나가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직장에 보화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그 직장에서 소금의 역할을 잘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성도의 이름은 소금입니다. 소금은 대용품이 없습니다. 대용품이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소금과 같이 필수품이 되라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믿/
②'세상에서 깨끗하게 살라!'는 교훈입니다.
소금은 그 빛이 희기 때문에 순결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로마인들은 '소금이 가장 깨끗한 해와 바다에서 왔기에 가장 순결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레2:13절에 보면 '네 모든 소제 물에 소금을 치라'고 했습니다. 소금을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 사용되었습니다. 제물은 흠 없는 것이라야 합니다.
▶소금에 순결성을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적용해 보자! 언행심사가 깨끗해야 합니다. 정직한 생활을 해야 하고, 바른 양심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또 도덕적인 순결을 지니고 있어야 하고, 이 사회의 양심이 되어야 합니다. 사업을 하던, 직장 생활을 하던 무엇을 하던지 그리스도인들은 구별되게 살아야 합니다.
약1:27절에서 야고보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세속에 묻혀 살고 있으나 세속에 물들지 말라'고 했습니다.
③'세상에서 방부제 역할을 하라!'는 교훈입니다.
예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신 말씀 속에는 세상의 방부제가 되라는 의미가 강하게 들어 있습니다. 소금은 음식물 등이 변질되거나 부패되지 않도록 하는데 사용됩니다.
우리는 종종 TV에서 봅니다. 어부들이 배를 타고 고기를 잡으러 나갑니다. 고기를 잡자 말자 큰 통에 담아 넣고 소금을 붓는 모습입니다. 생선을 썩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소금은 방부제입니다. 구약은 짐승피로 제사를 드리고, 신약은 예수의 피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구약은 소, 양, 염소, 비둘기 중에 흠 없는 수컷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썩거나 상하지 않게 하려고 소금을 뿌렸습니다. 그래서 성전에는 소금 창고가 있었습니다. 소금은 방부제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세상이 썩지 않게 방부제 역할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여러 가지 변질되고 부패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외면하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세상으로 하여금 썩지 못하게 하는 사람이요, 세상 사람들이 방향 감각을 잃었을 때 바른 길로 방향을 제시해 주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어떻게? 주님의 교훈대로 살면 되는 것입니다. /믿/
사람들 중에는 남을 부패시키고 썩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썩어져 가는 것을 막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글로 막고, 행동으로 막고, 사상으로 막습니다.
한 때 영국이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위기를 맞아 부패하고 있을 때 '요한 웨슬레' 목사가 일어나 새 바람을 일으켰는데 이것이 바로 '성결운동'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자!' 그래야 산다고 외쳤습니다. 잘못된 사상! 잘못된 학문이 대학에 들어가면 대학이 썩고, 지성인들의 머릿속에 들어가면 지성인들이 썩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는 곳에 '너도 살고, 나도 살고, 우리 모두가 사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믿/
▶한 때 역사를 낙관적으로 볼 때가 있었습니다. '인간에게 교육을 시키면 인간은 변할 것이다. 제도를 바꾸고 환경을 바꾸면 세상이 밝아질 것이다.' 라고 하면서 '하나님은 필요 없고, 인간 스스로 선한 노력을 가지고 힘쓰면 낙원을 만들 수 있다'는 환상 속에 사로 잡혔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환상은 무참히도 세계 '제1차 대전과 2차 대전'으로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죄 성을 안은 인간이 만든 역사는 항상 오류를 범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것으로도 인간은 변화시킬 수 없고 근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거듭나야만 변화될 수 있습니다. 변화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방부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할/
▶1919년 기미년 독립운동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시 우리 민족은 2천만이었습니다. 당시 중국은 4억이었습니다. 오늘 날 중국은 13억이고, 우리는 7천만입니다. 그 때 우리 2천만 중에 기독교인은 겨우 1.5%이었습니다. 30만 정도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1%가 3.1 운동을 주도했습니다. 33인의 대표 중에 16명이 기독교인입니다. 그리고 9명이 목사입니다. 태극기를 만들어서 여 성도들의 치마 밑에 감추어 날랐습니다. 일본인들은 깜박 속았습니다.
만세 운동을 주도한 것이 교인들이었습니다. '이 준' 열사는 상동교회 집사였습니다. '유 관순'열사도 이화여고 다니며 정동 교회를 다니던 학생이었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기독교인들이 막강한 역할을 한 것입니다.
④세상에서 '맛을 내는 사람'이 되라는 교훈입니다.
소금은 맛을 조절합니다. 맛을 표현하는 형용사가 있습니다. '달다, 쓰다, 짜다, 맵다, 싱겁다, 시다, 상큼하다, 시큼하다, 덤덤하다.' 수도 셀 수 없는 맛의 형용사가 있습니다.
'오미자차'라는 것이 있습니다. 5가지 맛을 낸다고 해서 오미자입니다. '단 맛, 쓴 맛, 신 맛, 떨떨한 맛, 새큼한 맛' 등 5가지 맛이 있다고 하여 그런 이름이 붙은 것입니다. 그러나 단 맛은 없어도 살 수 있습니다. 쓴맛이 없어도 됩니다. 매운 맛이 없어도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짠맛이 없으면 음식을 먹을 수 없습니다. 소금은 맛의 가장 기분적인 것을 조절하는 기본 조미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도의 맛을 확실하게 내야 합니다. 소금이 짠맛을 확실하게 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울지 않는 새는 새가 아닙니다. 맛을 내지 않는 소금은 소금이 아닙니다. 녹지 않는 소금은 소금이 아닙니다. 소금은 녹아야 합니다. 그래야 맛을 내게 됩니다. 그 곳에서 녹아지는 사람이 소금입니다. 희생하는 사람이 소금입니다. 소금은 녹아야 소금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소금의 핵심은 맛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이 말씀은 '너희는 세상의 필수품'이라는 말이요 '너희는 세상의 맛'이라는 말씀입니다. /할/
우리 인간의 삶 속에 맛을 잃을 때 큰 일이 납니다. 맛이란 딴말로 바꾸면 의미입니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면 보람도 가치도 상실하고 맙니다.
덴마크나 스웨덴 같은 나라는 사회보장제도가 잘 되어 있는 나라이기에 경제적으로 아무 염려 없이 인생을 안심하고 살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나라에서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왜 자살을 합니까? 삶의 맛과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참회록에서 고백하기를 '오, 주님! 내 마음은 내 마음을 지으신 당신을 모시기까지는 참 평안이 없나이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 품에 인길 때 비로소 안정이 있고, 평안히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의 생활은 겉으로는 호화롭고 윤택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내면은 삶의 의미를 상실해 버린 사람들입니다.
'인생이 어디서 와서 무엇 때문에 살고, 어디로 가는가?'를 바로 아는 사람만이 인생의 참 맛과 의미를 아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 많이 사명감으로 살고 맛을 내며 보람 속에 살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삶의 의미를 부여잡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와서 하나님을 위하여 살다가 하나님나라에 갑니다.' 이 삶의 의미를 세상 사람들에게 심어주어야 합니다. /아멘!/
⑤우리는 소금의 교훈에서 몇 가지의 역할을 부여받았습니다.
⑴우리는 세상에서 절대 있어야할 필요한 사람입니다. 필요한 사람은 아무데나 막 가지 않습니다. 꼭 필요한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⑵세상에 썩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입니다. 세상에 썩는 것은 우리 기독교인이 막아야 합니다. 사단의 역사를 막아야 하고, 세상에 만연되고 있는 죄악의 번식을 막아야 합니다.
⑶맛을 내는 역할입니다. 이것은 희생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소금은 녹아짐으로 맛을 냅니다. 내가 죽어져야 맛을 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⑷화목하게 하는 역할입니다. 마9:50절에서 우리 주님은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 하라.'고 했습니다. 싸우는 집이나 교회나 싸우는 단체나 사회에서는 살맛이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싸우는 세상에 소금이 되어 화목동이가 되어 평화롭고 살맛 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아멘!/
골4:6절을 보세요! "너희 말은 항상 은혜가운데서 소금으로 그르게 함같이 하라"고 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말에 정이 떨어지고 재미가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불화를 일으키게 하고 남을 격노케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싫어하십니다. 우리 성도들은 은혜로운 말로써 모든 것을 고르게 해야 합니다.
말로, 행동으로, 재미나게 기쁘게 기분 좋은 분위기를 만들고 화목을 이루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할/
2. '너희는 세상에 빛이라' 빛에 대하여 알아보자!
14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빛의 속성 가운데 으뜸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드러내는 것입니다. 어두움은 모든 것을 감추고 숨기지만, 빛은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환하게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하나의 예를 들어서 설명하셨습니다. 성지 이스라엘에는 산들이 많습니다. 그 옛날 유대인들은 산꼭대기에 집을 짓고 동네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산 위에 있는 동네는 주야로 사람들의 눈에 환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낮에는 햇빛에 반사되어 환하게 뵐 테고, 밤에는 집집마다 켜놓은 등불로 인해서 환하게 보일 것입니다.
이처럼 빛은 자신도 드러내고, 자기 주변에 물체들도 환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그런데 15절을 보세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집안에 있는 어둠을 물리치고, 집안을 환하게 비추려면 등불을 켜서 등경 위에 두어야 합니다. 그런데 등불을 켜서 말로 덮어버리면 주변을 비출 수가 없습니다. 말은 곡식을 될 때 사용하는 그릇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열 되를 한 말이라고 부릅니다.
①빛은 생명입니다. 빛의 반대는 어둠입니다. 그러므로 어둠은 죽음입니다. 때문에 빛이 있는 곳에는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어둠가운데서는 생명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빛은 사랑이고 기쁨입니다. 그래서 빛이 있는 곳에는 사랑의 꽃이 피어나고 그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나 어둠은 미움이고 슬픔입니다. 빛은 소망과 성결입니다. 그러나 어둠은 절망과 더러움입니다. 빛은 믿음과 진실입니다. 그러나 어둠은 불신과 거짓입니다. 하나님이 빛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고 사랑과 기쁨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빛을 비추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②빛의 사명은 '비추는 것'입니다. 철학자 '디오니게스'의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합니다. 어느 소경이 등을 들고 다녔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물었습니다. '앞도 보지 못 하면서 왜 등불을 들고 다니시오?' 소경이 대답했습니다. '내가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나를 보고 부딪치지 말라고 그러는 것이요.'
▶빛은 비추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에 빛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항상 이 세상이 밝도록 빛을 비추며 살라고 하셨습니다.
옛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이방인들의 빛'이라고 했고, 유명한 랍비들을 '이스라엘의 등불'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인류에 크게 공헌한 사람들을 가리켜 '인류의 등불'이라고 하고, 민족에게 공헌한 사람들을 '빛을 남긴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우리를 '너희는 빛이다.'고 하십니다. 얼마나 영광된 말씀입니까?
③빛에는 몇 가지의 종류가 있습니다.
⑴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적인 빛이 있습니다. 창조 장인 창1장에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습니다. 또한 해와 달과 뭇 별들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적인 빛입니다.
⑵하나님께서 비추는 특수한 빛이 있습니다. 행12:7절에 옥중에 잇던 베드로에게 나타난 광채나, 행9:3절의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에게 나타난 빛들은 특수한 빛입니다.
⑶인간들에 의해 만들어진 빛이 있습니다. 촛불, 전등불이 그것입니다.
⑷상징적인 빛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빛으로 비유했습니다. 시27:1절에서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라고 했고, 요일1:5절에서 '하나님은 빛이시니라.'고 하셨습니다. 계22:5절에서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요8:12절에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 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들을 빛이라고 했습니다. 본문에서 주님이 친히 말씀하셨고, 사도 바울도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④어두움에도 몇 가지의 종류가 있습니다. ⑴자연적인 어두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에 따라 해가 지면 어두움이 옵니다. ⑵영적인 흑암이 있습니다. 우리가 물리쳐야 할 어두움은 바로 영적인 어두움입니다.
마4:16절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⑤ 빛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⑴어두움을 밝혀 줍니다. 빛이 들어오면 어두움의 세력은 물러갑니다. 마찬가지로 생명의 빛을 받은 우리가 이 어두움을 물리쳐야 합니다.
태양빛을 듬뿍 받은 달이 밤하늘을 환하게 비춥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듬뿍 받은 자들입니다. 이제는 부패한 이 세상에 은혜의 빛을, 진리의 빛을, 사랑의 빛을 환하게 비추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아프리카 밀림지대에 식인종이 사는 나라에도 리빙스턴, 슈바이처 같은 사람들이 선교사로 들어가서 이 빛을 던져 주었습니다.
단12:3절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이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할/
⑵빛은 사물을 정확하게 판단하는 일을 합니다. 어두운 곳에서는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지만 빛이 오면 추한 것, 모난 것, 둥근 것 다 판별이 됩니다. 또한 빛은 그 진상을 폭로하는 일을 합니다. 악한 것, 선한 것, 그대로 판별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빛이기에 진실을 바로 나타내는 판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무엇이 옳으며, 무엇이 그른가를 정확히 가릴 줄 알아야 합니다.
구약에 이사야 선지자나 아모스 같은 선지자는 그 빛의 사명을 다 한 사람들이요, 신약에 세례요한도 그 빛에 사명을 감당하다가 헤롯에게 목 배임을 당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빛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고난도 핍박도 감수해야 합니다. /믿/
⑶빛은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옛날 이스라엘은 애급에서 나와 가나안으로 가는 도중에 광야를 거치게 되었는데 사막의 길은 방향을 잡기가 어려운 곳입니다. 그 때 40년 동안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해 불기둥으로, 구름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했습니다.
만약 방향을 잡지 못하면 길을 헤맬 수밖에 없습니다. 가로등이나 등대는 방향을 제시해 주는 일을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빛이라고 한 말은 '세상에 죄 속에 빠진 사람들에게, 실패와 좌절과 낙심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소망의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해 주어 바른 삶의 목적을 가르쳐 주어야 할 사명'입니다. /할/
⑷빛은 열을 발사해서 태우는 일을 합니다. 성령을 불로 표현합니다. 우리가 이 불을 받아야 합니다. 이 불이 죄악을 태우고 못된 모습을 바꿔 놓습니다.
⑸빛은 열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빛이 되라고 하시는 말씀은 '뜨거운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뜨거운 사람이 됩니다. 죽은 사람의 특징은 몸이 찹니다. 섬뜩합니다. 살아 있는 사람은 36.5도 적당한 체온을 유지입니다. 빛은 뜨거움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자 실망한 두 제자는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가슴 전체는 실망과 좌절뿐이었습니다. 이 때 빛 되신 예수님이 그들과 동행하였으나 그들은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알아보지 못 했습니다. 죽은 예수가 감히 여기 나타나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을 풀어 주실 때에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알아 본 순간 예수님은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빛 되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뜨거움만 남기고 떠나 가셨습니다. 두 제자는 뜨거운 가슴을 안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뜨거움을 주시는 빛이십니다. 이 빛을 받아 사명을 잘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할/
⑹빛은 열매를 맺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어둠 속에서 갈팡질팡하고 우왕좌왕할 때,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빛의 진리를 전파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고, 원리, 원칙을 지키고 하나님의 진리를 전달해야 합니다. 그럴 때, 세상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통해서 감동을 받고 감화되어 복음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할/
롬13:12절에서 사도 바울은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고 했습니다. '빛의 갑옷을 입자'라는 말은 '빛의 행동을 하자'는 말입니다.
엡5:8-9절에서도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빛 된 행동을 통해서 빛의 열매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아멘!/
3. 소금으로 살고 빛으로 살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여기 '착한 행실'은 영어 성경에서 '굿 웍스'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좋은 일'을 뜻합니다. 또한 헬라어로는 '칼로스' 라고 해서 '아름다운 행동, 고상한 행동, 칭찬 받을 만한 행동'을 뜻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디 가서나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아름다운 일, 칭찬 받을 일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모세는 신12:28절에서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모든 말을 너는 듣고 지키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목전에 선과 의를 행하면 너와 네 후손에게 영영히 복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윌리엄 바클레이'는 '빛을 비추는 것은 우리가 영광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선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행하는 것입니다. 어느 면으로는 교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의 선은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아멘!/
▶어느 교회에 장로님 한 분이 있는데, 그 장로님은 특이하게도 '예수님 동생'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장로님은 사업으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생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기도는 '하나님은 나에게 축복을 주셨습니다. 나는 건강합니다. 자식들도 모두 잘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께 받은 축복과 은혜를 보답하면 되겠습니까?'하는 것이었습니다.
장로님은 교회에서도 헌금을 가장 많이 할 뿐만 아니라, 나가서 구제도하고, 장학금도 주고, 착한 일을 많이 했습니다. 이렇게 착한 일을 많이 하니까 주변 사람들이 이 장로님을 보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붙여 준 별명이 '예수님 동생'이라는 별명이랍니다.
우리 모두도 이런 축복을 받고 착한 일을 많이 하여 '예수님의 동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할/
▶빙점이라는 소설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일본의 여류 기독교 소설가인 '미우라 아야꼬' 여사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한때 척추에 이상이 생겨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만 지내야 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는 병상에 누워서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척추를 다쳐서 꼼짝도 못하고 가만히 누워만 있어야 하는데, 이 기간 동안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그에게 멋진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밝은 웃음을 선사하기로 하자.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고난 속에서도 결코 낙심하지 않고 늘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자!' 그리고는 그때부터 자신의 얼굴 표정을 밝게 하면서, 보는 사람마다 웃어주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의사를 보아도 환하게 웃고, 간호사를 보아도 환하게 웃고, 옆에 있는 환자를 보아도 밝게 웃었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니, 허리를 다쳐서 꼼짝도 못하고 누워 계시는 분이 뭐가 그렇게 기쁘고 즐겁습니까?" 그때마다 '미우라 아야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저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저는 예수님만 생각하면 너무도 행복하답니다." /할/
그는 뒤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내가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동안에, 내가 건강할 때보다도 더 많은 사람에게 전도할 수 있었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낼 수 있었다."
우리가 형통할 때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힘들고 어려운 고난 속에서도 얼마든지 더 큰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때로는 고난이 있을 수도 있고, 때로는 형통할 때도 있을 수 있지만 그 모든 것이 우리에게는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산 위에 동네입니다. 산 위에 동네란 빛이란 말씀과 비슷한 뜻이지만 약간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령 산 위에 어떤 동네 속에 어떤 집 한 채가 있다고 합시다.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불을 피우면 연기가 오르는 것이 보이고, 등불을 키면 그 등불의 빛이 환하게 드러납니다. 마치 바다의 등대와 같습니다. 만약에 앞마당에서 멱살 잡고 싸우면 그 모습도 다 보이는 곳입니다.
뜰 앞 울타리에 울굿불굿 꽃이 피면 그것도 다 보입니다.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지 못할 것'이라고 본문이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산 위에 동네입니다. 입만 벙끗해도 쳐다보고, 달음질해도 쳐다봅니다. 교회가 주목을 받고 비판을 받는 것도 바로 산 위에 동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멋진 동네를 만듭시다! 누구나 이사 오고 싶은 동네를 만듭시다! 봉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가 피어있는 꽃동네 새 동네를 만듭시다!
우리의 가정을 산 위에 있는 아름다운 가정을 만들고, 우리의 교회가 산 위에 소문난 교회로 만듭시다! 그 사명이 바로 나에게 있고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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