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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 18,185편 ◑/자료 16,731편

가나안 여인의 믿음! (마 15:21-28/막 7:24-30)

by 【고동엽】 2022. 2. 6.

가나안 여인의 믿음! (마 15:21-28/막 7:24-30)

 

사람들은 저마다 소원이 있습니다. 자신의 문제, 부모, 형제, 자녀들의 문제 또는 사업의 문제, 건강의 문제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문제에 부딪쳐 그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소원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있지만 도무지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어떤 철학자는 '인간의 한계 상황, 또는 극한 상황' 다시 말하면 '절대 위기, 절대절명의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이 한계상황에 처하면 인간은 절대자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한계상황에 처한 인간, 바로 그 구체적인 인간을 오늘 본문에서 보게 됩니다.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막7장에서는 이 여인을 '수로보니게' 여인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외경에 보면 이 여자의 이름이 '유스타'라고 나와 있고, 딸 이름은 '베레니케'라고 나와 있다고 합니다.
그녀는 과부이며, 가난하고, 천한 삶을 살면서도 딸 하나는 자신의 생명처럼 알고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딸이 흉악한 귀신에 들려 미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딸은 어머니도 알아보지 못하고 괴성을 지르며 머리가 산발된 채 다 찢어진 옷을 입고도 부끄러움을 몰랐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딸의 병을 고치려고 여러 병원, 좋다는 약은 다 써 보았으나 딸의 병세는 날로 심해져만 갔습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요, 안타까운 일입니다.
여러분! 오늘날도 현대인들에게는 이 여인처럼 절박한 문제, 한계 상황에 문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딸의 문제로 밤잠을 못 자면서 괴로워하고 있을 때, 한 기쁜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그 소식이란 예수님에 대한 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땅에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많이 듣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능치 못할 일이 없으며 오병이어로 수 만 명을 먹이는 기적을 베푸셨고, 물 위로 걸어갈 수 있을 뿐 아니라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도 능히 쫓아내시는 능력자라는 소문을 듣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만이 자기 딸을 구원할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복음을 듣는 것이 귀한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 자기의 딸을 고침 받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란 확신과 믿음과 소망이 있었습니다.
성도는 누구나 하나님의 존재를 확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능치 못하심이 없는 분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 마음 중심으로 예배를 드리고 온전히 맡기고 기도하는 자에게 반드시 '응답의 상, 축복의 상, 소원 성취의 상, 문제 해결의 상, 좋은 결과의 상'을 주십니다.
오늘 본문의 가나안 여인은 '소원 성취의 상'을 받았습니다.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 그의 딸이 나으니라." /할/
오늘 여러분들이 이런 응답의 축복을 받으시려면 이 여인처럼 '큰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음에 불타는 소원을 가지고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도 불타는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는 19세의 소년이었을 때, 노예시장에서 쇠사슬에 묶여 마치 짐승처럼 이리 팔리고 저리 팔리는 흑인들을 보고 노예제도를 쳐부수고야 말겠다는 간절한 소원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훗날 법을 공부하고 대통령이 되어, 당시로서는 불가능해 보였던 노예해방의 역사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소원을 주시고 그 소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빌2:13절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아멘!/ ◀제목 소개!▶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처음으로 외국 여행을 떠나시는 모습을 소개합니다. 21절에 보면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다고 했습니다. 두로와 시돈 지역은 유대지역의 접경인 첫 번째 이방지역입니다. 쉽게 말하면 국경지대입니다.
이 지역은 항구도시로서 무역이 활발한 곳이고, 또 우상숭배지역으로 아주 유명한 지역입니다. 아합 시대의 그 유명했던 왕비 '이세벨'이 바로 이 시돈 지방의 출신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이런 우상의 도시에 가신 것입니다.
이곳은 도저히 신앙이 있다고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바로 그런 지역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우리는 아주 충격적인 사실을 만납니다. 바로 큰 믿음을 가진 가나안 여인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의 이름은 성경에 나와 있지도 않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한 번도 만나본 일이 없습니다. 다만 소문으로 들었고, 이야기로만 들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소문으로만 듣던 그 예수님이 지금 두로에 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가서 처음으로 만났습니다. 그런데도 이 여인은 예수님으로부터 대단한 칭찬을 받았습니다.
28절에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그러십니다. 이 여인은 딱 한번 예수님을 만났는데도 큰 은혜를 입었고, 그 믿음을 인정받았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 모두가 그 비결을 배워 이 시대의 큰 믿음의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아멘!/

 

1. 이 여인은 자기 '자신의 처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22).

 

이 여인에게는 귀신들린 딸이 하나 있습니다. 이것은 현대 의학으로는 풀 수 없는 고통스러운 문제입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자식이 귀신들려 이리 넘어지고, 저리 넘어지고 미쳐 날뛴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부모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갈기갈기 찢어지는 심정입니다.
이 여인이 딸의 병을 고쳐보려고 자기가 믿은 신에게도 하소연했을 것이고, 재물을 바쳤을 것입니다. 또 좋은 약을 있는 대로 써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백 약이 무효합니다. 방법이 없습니다. 딸만 쳐다보면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러다가 딸이 죽을 것만 같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평화도, 기쁨도, 안정도 올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딸의 병을 고치는 것을 '큰 소원'으로 삼고, 온 정성과 신경을 쏟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반드시 그 병을 고칠 수가 있습니다. 자신의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이 병들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 병을 고칠 수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흉악한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죄 사함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문제는 자기 자신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모르니까 그냥 앉아 있다가 사람들이 죽는 것입니다.
▶옛날 중국에 '편작'이라는 의사가 있었습니다. 그가 임금님을 만났는데 안색을 보니까 임금의 몸에 병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몸에 병이 있습니다.'라고 진언을 했더니 임금님은 괜찮다고 대답을 합니다.
다음에 또 임금님을 만났을 때 보니까 몸이 좋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몸이 좋지 않습니다.'하고 진언을 하니까 임금님이 대답하기를 '약 팔아먹을 사람이 없어서 나에게까지 와서 약을 팔아먹을 수작이냐?'고 화를 버럭 냅니다.
얼마 있다가 세 번째로 임금을 만났습니다. 그때는 이 '편작'이라는 의사가 아무 소리를 하지 않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임금이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임금이 편작을 향하여 '왜 오늘은 말이 없느냐?'고 묻습니다.
그때 이 의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처음에는 병이 몸 밖에 있어서 침만 맞아도 치료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난번에는 병이 몸 속으로 들어가서 뜸만 뜨면 치료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보니까 병이 뼈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제는 침으로도, 뜸으로도, 약으로도 고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그 임금님은 죽었다고 합니다. 이 임금은 경고를 했는데도 자기 자신을 모릅니다. 지금 병이 깊어가고 있다고 경고를 했는데도 자기 자신이 심각한 병자인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죽는 것입니다. 모르면 죽습니다.
왕하 5장을 보면 그곳에 나아만이라는 아람나라의 군대장관이 나옵니다. 그는 백성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임금으로부터 신임을 받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몸이 썩어 들어가는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그는 병을 고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하다가 계집종의 말에도 귀를 기울여서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왔습니다. 갔더니 선지자 엘리사가 방에 앉아서 내다보지도 않습니다. 그리고는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고만 합니다.
얼마나 황당한 이야기입니까? 자기 나라에도 강이 많이 있습니다. 요단강보다 더 많고, 더 깊은 강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왔는데 내다보지도 않고 요단강에 가서 씻기만 하라고 합니다. 나아만은 몹시 기분이 나빴습니다. 그래서 화가 나서 그냥 들어가려고 합니다.
그때 그의 시종이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장관인 줄만 알지, 자신이 문둥병자인줄은 모르십니까? 이보다 더 어려운 일을 시켜도 그대로 해야하는데 몸을 씻으라는 일도 못하십니까? 시키는 대로 가서 씻으십시오!'
나아만이 그 말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시종의 말대로 가서 요단강가에 일곱 번 씻었더니 그 문둥병이 깨끗이 치료받아 어린아이 살 같이 깨끗해 졌습니다. /할/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문제를 바로 알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나 자신이 살이 썩어 들어가고 있는 문둥병자라는 사실을 모르면 병은 고칠 수가 없습니다. 나 자신이 장관인 줄만 알고 문둥병자인 줄을 모르면 병은 못 고칩니다.
지금 세상에는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나아만은 시종의 충고에 귀가 번쩍한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장관이기 이전에 문둥병자인 것을 아십시오!' 자신의 처지를 밝히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고칠 수가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을 보십시오, 지금 이 여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생활 중에서 최우선 순위가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딸의 병을 고치지 않고서는 그 어느 곳에도 행복이 없고, 기쁨이 없고, 평화가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께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하고 매달립니다. 이 기도야말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순수한 모습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도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보면 모든 인간은 심판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런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고백은 '주여 불쌍히 여겨주옵소서'라는 고백밖에 없습니다.
▶한 노예 상이 있었습니다. 그는 비싼 값에 노예들을 팔아 돈을 버는 것이 인생 최고의 목표였습니다. '동정'이나 '사랑'이란 단어는 그의 사전에는 없었습니다. 주위에서는 그를 '냉혈인간'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마음속에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그는 죄악 된 삶을 정리하고 신학을 공부해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평생 동안 권위의 상징인 목사의 예복을 입지 않았다고 합니다. 항상 노예 복을 입고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노예들을 팔아먹은 죄인이었던 나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고맙기 때문에 은혜를 잊지 않으려고 노예 복을 입는다.'고 했습니다.
이 목사의 이름은 'John 뉴턴'입니다. 전 세계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이 부르는 찬송가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지은 목사입니다. 1절은 이렇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의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주의 긍휼를 덧입고 감사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큼 경건하지도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큼 믿음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큼 충성하지도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 있습니다.
엡2:4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을 인하여" 즉 이 사랑에 근거해서 '주여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할 수가 있습니다. /믿/
이 여인이 그렇게 자신을 철저하게 잘 알고 있으니까 예수님께로 찾아가서 고침을 받은 것입니다. 문제는 자기 자신의 문제를 잘 아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믿/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건강입니까? 재물입니까? 명예입니까?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믿음의 현주소가 더 중요합니다.
'내가 지금 신앙 안에 있는가? 신앙 밖에 있는가? 내가 지금 예수 안에 있는가? 예수 밖에 있는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시인의 말씀을 들어보세요! 시73:28절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할/ 야고보 장로님의 말씀을 들어보세요! 약4:8절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아멘!/

 

2. 이 여인에게는 '뜨거운 신앙의 열정'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세상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세상을 흐리멍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하늘이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삶에는 책임이 따라야 하고,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 가나안 여인을 보십시오,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무언가 이루어질 것만 같았습니다. 만나기만 하면 틀림없이 내 딸이 고침을 받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 여인의 최고의 문제는 딸이 치료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사를 제쳐두고 갔더니 제자들이 길을 막습니다. 접근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여인에게는 목적이 분명합니다. 뜻이 분명히 있습니다. 열망,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런 이 여인의 길을 누가 가로막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어떤 일에 뜻이 있고, 목적이 분명하기만 하면 방법과 길은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제자들의 길을 막으니까 소리로 직접 호소를 합니다.
22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①'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 나와서' 예수 앞에 나왔다는 말입니다. 신앙은 예수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가 주님 계시는 자리입니다. 신앙의 기본은 주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 기본이 없으면 축복이 없습니다. /믿/
②'소리 질러 가로되' 이것은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이 그 여인에게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55:6절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하십니다. 이 여인은 기회를 잡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지금 이 시간이 바로 기회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고후6:2절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할/
여기 '소리지르다'는 말은 악착같이 큰 소리로 부르짖는 기도를 의미합니다. 그녀의 외침은 절규요, 목숨을 내건 하소연이었습니다. 생명같이 귀한 딸의 고생이 곧 자신의 고생으로 여기고 예수께로 호소한 것입니다.
우리가 통성으로 기도하는 것, 생명을 건 기도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들의 기도들 그 어떤 것도 못 들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속으로 생각만 해도 다 알아들으십니다.
그러나 속에 간절한 마음이 있을 때는 가슴이 막 터지는 것 같습니다. 그때는 입술로 조용히 얘기할 수가 없습니다. 가나안 여인이 그랬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와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님의 귀가 작아서 소리 지른 것이 아닙니다.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과 자녀에 대한 간절한 사랑이 바로 가나안 여인의 응답 받은 중요한 비결이 된 것입니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하라'고 하십니다. 구해서 안 되면, '부르짖으라'고 하십니다. 또 성경은 '입을 크게 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채우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여인은 주님께 '소리 질러' 기도했습니다.
렘33:3절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교회 옆에 술집이 생겼습니다. 경건한 분위기가 필요한 교회 옆에 술집이 들어서서 소란하고 주정뱅이들이 지나다니니까 분위기가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주여! 어떤 방법으로든지 술집이 망하게 해 주시옵소서!' 그런데 몇 주 후 그 술집에 불이 났습니다. 술집 주인은 문을 닫을 위기에 몰렸습니다.
그런데 그 주인이 화를 내며 교회를 상대로 고소를 했습니다. 판사 앞에 가서 교인 대표와 술집 주인이 각각 진술을 합니다. 술집 주인은 교회에서 매일 기도한 결과 불이 났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니까 교인 대표는 이렇게 반박했습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기도한다고 불이 납니까? 그게 상식적으로 말이 됩니까?' 그러자 가만히 듣고 있던 판사가 '술집 주인은 기도의 능력을 믿고 있는 사람이니 천당에 가서 하나님께 배상을 받으시고, 교인 대표로 나온 사람은 기도의 능력을 믿지 않으니 이젠 절대로 기도하지 마세요.' 얼마나 비극적인 이야기입니까? 우리가 자칫 잘못하면 이렇게 되기 싶습니다.
기도는 하면서도 확신이 없이 형식적으로 기도하기 쉽습니다. 그러면 곤란합니다. 믿음으로 기도합시다! 기도의 응답의 확신가지고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③이 여인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은 긴 신학적인 설명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왕권을 의미하는 것으로 곧 메시야의 칭호입니다. 주님을 향해 '다윗의 자손'이라고 한 것은 '당신은 메시야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같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신앙은 고백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처럼 고백하는 것이 축복 받는 고백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보았습니다. 즉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의 주님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이 고백 속에는 '내 딸의 병도 주님께서 고치실 수가 있습니다.'라는 확실한 믿음의 고백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이런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④이 여인을 더 깊이 연구해 보면 '모성애의 극치'를 다 시 한번 볼 수가 있습니다. '내 딸을 불쌍히 여기소서'가 아닙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입니다.
지금 딸은 그 자리에 와 있지도 않습니다. 어디에서 무슨 미치광이 짓을 하고 다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25절에서도 같은 말을 합니다. '제 딸이 불쌍합니다. 도와주소서!'가 아닙니다. '귀신들린 딸을 가진 어머니의 이 비참한 모습을 불쌍히 여기시고 주여 저를 도우소서!'
이 여인은 딸의 고통이 곧 자기의 고통으로 알고 자신의 아픈 가슴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나님 앞에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정신병자 딸을 가졌습니다. 이 딸 때문에 나는 화평이 없습니다. 이 딸 때문에 저는 노이로제에 걸려있습니다. 이 딸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나를 비웃습니다. 나는 지금 이 딸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 불쌍한 어머니를 주여 긍휼히 여기소서!' 이렇게 어머니의 아픈 마음을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이 '가나안 여인'이 바로 '예수님이시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에게 우리들은 마치 귀신들린 딸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마음 아프게 하면서 살아가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하나님을 섭섭하게 해 드리며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해가 가십니까?/
다시 본문의 여인을 보세요! 우리는 이 여인에게서 삶에 대한 열망을 보게 됩니다. 문제를 풀어 보려고 하는 굳은 의지를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에게는 길이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반드시 방법이 생깁니다. 그래서 사람이 살아가는데도, 신앙생활을 하는데도 열심과 열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신앙은 '죽으면 죽으리라'는 일사각오가 절대 필요합니다. /믿/할/

 

3. 이 여인에게서 우리는 '무서는 각오'를 보게 됩니다.

 

이 여인에게서 우리는 '예수님이 아니면 길이 없구나!' 사생결단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찾아가기만 하면 문제가 다 풀릴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가서 고쳐달라고 애원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로부터 반응이 세 가지가 나타났습니다.

①첫 번째 반응은 묵묵부답입니다. 22절에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여기 '흉악하다'는 말은 원어로 '카코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위험할 만큼 해로운 상태'를 의미합니다. 죽을 지경이 된 상태입니다. 이런 상태에 있는 여인의 소원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의 반응은 23절에 '예수는 한 말씀도 아니 하셨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무정합니까? 이것은 모욕입니다. 그래서 더 큰소리로 호소를 했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랬지만 계속 무반응입니다. 왜 우리 예수님이 무반응이십니까? 우리들도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열심히 기도했는데 많은 경우에 있어서 예수님은 응답을 안 하시고 침묵만 하실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절하게 눈물을 흘리면서 무릎을 꿇고 울부짖어 기도했는데 새벽기도, 철야기도, 자정기도, 금식기도, 그러함에도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실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이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예수께서 못 들어서 침묵하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시험해 보시기를 원했습니다. 우리가 말로만 '다윗의 자손이여' 고백한다고 응답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 중에 예수님이 메시아이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능력이 많으신 분이라고 모든 성도가 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마음속에 간절함이 없습니다. 신앙의 인내가 없습니다. 이 가나안 여인처럼 신앙의 인내와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믿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침묵하시며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십니다. /믿/
▶이 여인의 끈기를 보십시오, 23절에서 제자들이 '이 여자가 귀찮게 자꾸 따라오고 보채고 있으니 따돌려 보내시라'고 아우성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두 번째 반응이 나오십니다.

②두 번째 반응은 무엇입니까? 24절의 말씀은 '인간차별'의 말씀입니다. 즉 '내가 온 것은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해서 왔지 이방인에게는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큰 모욕입니까?
여러분, 사람이 살다가 가장 슬픈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무시당할 때입니다. 차별대우를 받을 때입니다. 사람이 못 배웠다고 무시를 당할 때, 가진 것이 없어서 무시를 당할 때, 이때가 슬프고 서럽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께 찾아오기만 하면 다 된 줄 알았는데 예수께로 와서 도와달라고 하니까 한동안 대꾸도 없다가 하는 말이 '너는 내 동족이 아니니까 도와줄 수 없다'고 하십니다. 이를테면 민족차별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을 보십시오, 어지간하면 그쯤에서 포기해버리고 말았을 텐데 25절에 더 큰 소리로 '내 딸을 고쳐 달라! 주여 도우소서!'고 부르짖습니다. 신앙은 절대 포기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도 포기하는 것이 얼마나 나쁜 것인지 잘 압니다. 나쁜 것이라면 빨리 포기하는 것이 낫지만, 적어도 기도할 정도로 중요한 것이라면 포기하면 안 됩니다.
▶1849년은 미국의 '골드 러쉬'가 있었던 해입니다. 서부 캘리포니아에 금광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리로 몰려갔습니다.
한 청년이 재산을 정리해 갖고 금광을 구입했습니다. 인부를 채용하고 열심히 굴착을 합니다. 그러나 오래도록 금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포기하고 다른 사람에게 팔아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후 인수자가 1미터 더 파 들어가니까 금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 청년이 얼마나 억울했을까요? 그래도 소용없는 일입니다. 그 청년은 그때부터 그 사건을 인생의 큰 교훈으로 삼고 소위 '1미터 더'라는 신념으로 살았습니다. 때로는 어려움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침내 크게 성공했고 거부가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기도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기도하면 응답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도록 확신을 갖고 간절히, 그리고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응답됩니다.
엘리야가 가뭄 중에 있던 이스라엘을 위해 간절히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기도하자 하나님이 비를 내려주셨습니다. 왕상18:42~46절에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기도하면서 그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 편을 바라보라 저가 올라가 바라보고 고하되 아무것도 없나이다. 가로되 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 그 때 손바닥만 한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조금 후에 구름과 캄캄한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해지며 큰비가 내리는 지라'
만일 일곱 번 되기 전에 포기했다면 영영 비는 내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는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믿/

③세 번째 반응은 더 비참합니다. 26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하십니다. 무슨 말씀인가? 이 여인을 '개 취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욕의 극치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잘못되고 왜곡된 '선민의식'이 있었습니다. 그 왜곡된 선민의식으로 말미암아 소위 '이방인'이라고 불리던 사람들이 얼마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보통 무시가 아닙니다.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고 개 취급을 받았습니다. 말도 안 되는 엉뚱한 생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말도 안 되는 그릇된 '선민의식'을 가지고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셨습니다. 그 여인을 개로 취급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욕 중에서 가장 모욕적인 욕은 모두 개자가 들어가는 욕입니다. '개 같은 놈, 개자식' 이 욕을 듣고 가만히 있을 사람은 아마도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이 여인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는 말을 듣고도 결코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유명한 정치가 '링컨'은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물어 보았습니다. '당신은 화가 나지 않습니까?' 그는 대답하기를 '나라고 왜 화날 때가 없겠습니까? 화나는 소리를 들으면 화가 나지요. 그런데 나는 화가 날 때마다 휘파람을 불면서 화를 날려보내고 있습니다.' '칼 바르트'는 '자존심은 원죄의 뿌리'라고 했습니다.
사실 이런 말을 들으면 딸이 죽는 한이 있어도 그냥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을 보십시오, 화를 내지도 않았고, 돌아가지도 않습니다. 돌아가면 결국 자기만 손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포기하면 내 딸은 죽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27절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이 말은 '옳습니다. 나는 개입니다. 그러나 개에게도 부스러기를 줍니다. 큰 덩어리는 당신의 백성에게 주시고 나에게는 부스러기라도 좋으니 그것이라도 주십시오.'
여러분, 부스러기 은혜라도 꼭 받아야 합니다. 이 여인이 얼마나 집요합니까? 딸의 치료를 위하여 온갖 수모를 마다하지 않고 집요하게 물러서지도 않습니다. 누구든지 이 여인 같은 집요한 신앙만 있으면 하늘 문은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이 여인이 부스러기라도 달라는 것은 그만큼 간절했음을 의미합니다. 절박한 상황 가운데 물러설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매달려 기도한 것입니다. 이런 기도를 가리켜 '강청 기도(强請祈禱)'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막다른 골목에서 절박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에 보면 그런 기도의 예가 많이 나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응답하시고 역사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38장 보면 '히스기야'의 기도가 나옵니다. 그는 중년에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죽음 앞에 괴롭지만, 아직 아들도 없고 나라도 위태롭습니다. 그 절박한 상황에서 그는 벽을 향해 통곡하며 기도합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심정으로 기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15년 간 수명을 연장시켜 주셨고, 그 기간 중에 아들도 주셔서 왕위를 계승하게 해 주시고 나라도 붙들어 주셨습니다.
막5장 보면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여인은 재산 다 날리고 병세는 악화되어 이제 절망 그 자체입니다. 그때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옷자락만 만져도 나을 수 있다는 확신도 귀하지만, 그 간절함이 돋보입니다. 그 여인은 그 기도대로 치유를 받았습니다. '간절한 기도!'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동력입니다. /믿/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이 말 속에는 지독한 끈기가 들어 있습니다. 개 같은 욕을 당하고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또 매달리는 이런 끈기가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용기는 시작하게 하고, 믿음은 계속 하게 하고, 끈기는 마치게 하는 도구'입니다.

▶영국 어느 잡지사에 근무하는 평범한 기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한 가지 일에 몰두할 줄 모르는 끈기 없는 그런 청년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그 당시 대 부호인 '브레이크'를 취재하였습니다. '브레이크'는 구두 밑바닥에 징을 박는 아이디어 하나로 일약 부자가 된 사람입니다.
기자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대부호가 된 비결은 무엇입니까?' 그가 대답하기를 '나는 항상 돈벌이하는 일에만 몰두했소. 한 가지 일을 하면 끈기 있게 그 것만 붙들고 끝장날 때까지 했소. 그 것이 내 인생의 전부요.' 기자는 이 말을 듣고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나도 이제부터 신문과 잡지를 만드는 일에만 전념을 하자. 여기에 내 인생을 걸자.' /할/
그는 신문 사업에 몰두하기 시작했습니다. 파산직전의 신문사를 살려냈습니다. 영국 최고의 신문을 만들었습니다. 신문왕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노스 클리프'입니다.
1차 대전 때 독일 황제 '카이젤'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연합군에게 진 것이 아니라 노스 클리프의 영국 신문에 진 것이다.' 그렇습니다. 무슨 일에나 끈기 있게 하면 승리는 주어집니다.
'밀턴'은 매일 아침 새벽 4시에 일어나 '실낙원'을 집필했다고 합니다. '웹스터'는 '웹스터 사전'을 집필하기 위하여 36년 간이나 자료를 수집을 했고,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은 8년 동안 땀 흘려 완성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도 10년 걸려 완성한 작품입니다. 그는 일에 너무나 몰두한 나머지 식사하는 것조차 잊어버릴 정도였다고 합니다. 꿀벌은 살아 있는 동안에 지구의 세 바퀴나 되는 거리를 날면서 꿀을 모은다고 합니다.
본문에서도 우리 주님이 그 여인의 '끈질긴 간절한 기도'에 응답을 허락하셨습니다. 똑같은 배경을 설명한 막7:29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이 여인의 집요한 신앙 앞에는 사탄도 시험할 수가 없습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그때 주님은 그 여인을 보시고 인자하신 얼굴로 극찬을 하십니다.
28절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할/ 여기서 우리 말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는데, 헬라어 성경 원문을 보면 '여자여' 앞에 '오!'(Ω)라는 단어가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 여인의 기도에 크게 감동 받으셨다는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원더풀!' 이렇게 말씀하신 셈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기도를 듣고 '원더풀!' 하시면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이 여인에게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네 믿음이 크도다.' 참 굉장한 선언입니다. '네 믿음이 위대하다'라는 뜻의 메가톤급 신앙입니다. ▶크다는 개념도 여러 가지입니다. 이를테면 부자도 웬만한 부자는 갑부라고 하고, 더 큰 부자는 거부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크다는 것에도 조금 큰 것, 더 큰 것, 엄청나게 큰 것이 있는데 여기 '네 믿음이 크도다.'의 원어에 보면 '네 믿음이 위대하다'라는 '메가톤'급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의 믿음이 '메가톤'급이라는 말입니다.
또 여기 '소원대로'는 '원하는 만큼'으로 어려운 난관을 극복한 그녀에게 합당한 보상을 하시는 주님의 축복입니다.
어머니의 믿음은 딸을 치료케 했습니다. 그녀의 신앙은 문제를 해결하고 말았습니다. /할/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이 말씀은 오늘 우리를 향하여 주신 말씀입니다. '이 여인을 보아라. 이것이 진짜 믿음이다. 너희들도 이런 큰 믿음을 가지면 능치 못함이 없단다.'라는 결단을 요구하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막7:30절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여러분, 오늘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철야합니다. 금식도 합니다. 봉사도 합니다. 그런데도 별로 변화가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가나안 여인은 단 한 번 예수님을 만났는데도 큰 은총을 입었습니다. 믿음을 인정받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①자기 자신을 잘 알았습니다. ②뜨거운 신앙의 열망이 있었습니다. ③죽으면 죽으리라는 무서운 각오가 있었습니다.
이런 믿음이 이 여인을 '큰 믿음의 소유자'로 만들었습니다. 우리들도 이 믿음을 탐내야 합니다. '네 믿음이 크도다.' 이런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아멘!/
제주도에는 삼무삼다(三無三多)가 있습니다. 삼무는 '울타리가 없고 뱀이 없고 거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삼다는 '여자가 많고 돌이 많고 바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신앙생활에도 삼무삼다를 적용하고 싶습니다. 참으로 우리 안에서 없어져야 될 것이 있습니다. '원망이 없는 신앙생활을 해야 됩니다. 또한 탐욕의 욕심을 부리면 안 됩니다. 그리고 교만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더 적극적으로 '기도하는 신앙, 하나님을 하나님처럼 믿는 신앙, 그리고 감사하는 신앙'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 믿습니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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