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창 3:1-14)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에덴동산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 모든 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셨습니다. 에덴동산의 관리자로 두셨습니다. 에덴동산은 천국의 모형입니다.
그곳은 '집 걱정도 없고, 은행이자 걱정도 없고, 질병이나 사고의 걱정도 없고, 기름 값 오른다는 걱정도 없고, 입시문제 직장문제 결혼문제, 또 진로문제 때문에 걱정이 없고, 옷을 걸칠 필요 없고, 그러면서도 전혀 부끄럽지도 않고 죄질 생각도 없는데, 먹을 것은 무수히 많고, 춥지도 덥지도 않은 적당한 기후며, 세월이 흘러가도 주름살 하나 생기지 않고 싱싱하게 살 수 있던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너무 좋은 환경가운데 우리 첫 사람, 아담과 하와를 살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얼마나 행복했겠습니까? 그런데 그 행복을 지키는 한 기둥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선악과'나무입니다. ▶이 나무는 어떤 의미입니까? 인간을 골탕 먹이려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인간을 한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있는 나무였습니다.
▶그 나무를 통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 나무를 보면서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는 나무였습니다. 또 ▶사람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 동산을 관리하는 '청지기'라는 것을 깨우쳐 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이 나무를 보면서, '나는 피조물이요,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라는 질서를 알게 하고 법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것만은 절대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절대적인 명령입니다. 그것을 어기면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요?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다면 그것은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창2:16-17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이 금지 명령을 어겼습니다. 불순종했습니다. 뱀은 여자를 유혹했습니다. 여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해서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어서 먹게'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이것을 죄라고 하는데 그 죄 성은 유전되므로 '원죄'라고 합니다.
'메튜 헨리'는 창3장을 '성경의 모든 이야기 중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라고 했습니다. 창3장에 나타난 기록은 단순히 아담의 범죄한 기록이기보다는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전 인류에게 미친 죄의 기원을 말해주고 있고 원죄(原罪)를 말하고 있습니다(롬5장).
인간은 하나님께 죄를 범하게 되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하나님으로부터 피하여 도망하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피하여 나무 숲 사이에 숨었습니다.
사람들은 죄를 범하고 하나님께 불순종하고서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으면 숨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명령을 어겼던 요나는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배 밑창으로 내려가 숨었습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께 붙잡혀 다시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다 피할 수 있어도 하나님만은 어떤 인간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빼앗아 살면서 자기의 범죄를 감추려 했습니다. 우리아를 전쟁에 내보내 최전방에서 싸우다가 죽게 했습니다. 완전범죄를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단'선지자로 하여금 그 죄악을 낱낱이 폭로하게 하셨습니다.
후에 다윗은 다음과 같은 시를 기록했습니다. 시139:7-10절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은 동산 나무 숲 사이에 숨은 아담과 하와를 찾아오셔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는 이 물음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를 범한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오셔서 물으신 '최초의 질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어디에 있는지를 몰라서 물으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엘로힘'의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이 질문은 장소를 묻는 지리적인 질문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동산 무화과나무 속에 숨어있는 것을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 질문의 진의가 무엇인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 질문은 영적 좌표를 물으신 질문입니다. 아담이 서있는 영적 좌표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해 주신 것입니다. 서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음을 깨닫게 하시려고 물으신 질문입니다.
여기서 '아담아'라는 말은 '사람아, 즉 인생아'란 뜻입니다. 따라서 이 질문은 그 당시 아담에게만 질문하신 것이 아니고 우리 인생 전체에게 물으신 질문입니다.
'인생들아! 너희들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 이런 질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끔 우리의 위치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점검해 보고 수정할 것은 수정하면서 살아야 바른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나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가? 아니면 잊어서는 안 될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닌가? 부모로써의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가? 자식으로써의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가? 남편으로써, 아내로써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가?'를 점검해 보고 살아야 합니다. /믿/
더욱더 중요한 것은 성도로써의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가? '목사의 자리에 있는가? 집사의 자리에 있는가? 성도의 자리에 있는가? 행여나 악인과 죄인과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아닌가?' 한번 스스로 점검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다윗은 시편 1편에서 이 자리문제가 복을 받고 못 받는 근본적인 이유가 된다고 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자리'란 말과 '길'이란 말이 동의어로 사용되어 있고, '꾀'란 말도 같은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리에 따라 길이 달라지기도 하고, 자리에 따라 꾀에 넘어가기도 하고 안 넘어 가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믿/ 다시 한 번 우리 모두 '우리들이 서 있는 자리'를 점검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만약 지금 네가 서 있는 자리가 신앙 밖에 자리라면 빨리 깨닫고 서 있어야 할 자리를 찾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1. 범죄하고 하나님을 떠난 아담의 실존적인 모습과 특징이 무엇인가?
①범죄한 뒤에 아담은 벗고 살았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벗었다'는 말은 옷을 입고, 안 입고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담이 범죄한 후에 도덕과 양심을 벗어버렸다는 의미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의의 세마포 옷'을 입어야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데 그들이 '의의 세마포 옷'을 벗어 버렸습니다.
여기서부터 인간의 비극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포기해 버린 아담! 그 때부터 인간들은 짐승들도 하지 않는 짓을 해 가면서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살게 되었습니다.
②범죄한 뒤 그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기 시작했습니다.
8절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나무에 숨은지라" 죄지은 어린아이는 부모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않고 피합니다. 죄인의 속성입니다. 그러나 시139:7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사람이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가는 것이 아니고 점점 더 멀리 떠나는 태도를 취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멀리하시지 않고 더욱 가까이 찾아오시는 모습을 오늘 본문에서 봅니다.
그렇습니다. 어리석은 인생들은 하나님을 피하여 살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피하여 살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믿/
③죄짓고 난 뒤 그들은 동산 나무사이로 숨었습니다.
죄인들의 특징 중의 하나가 바로 '숨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깊은 산골짜기라도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자수하여 광명을 찾는 길이 사는 길입니다. 회개하고 마음의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아멘!/
④그들은 두려워했습니다.
두려움! 죄인들의 특징입니다. 그처럼 친근하던 하나님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아버지에게 죄를 범하면 아버지가 두려움의 대상이 됩니다. 남편에게 죄를 지으면 남편이 두려움의 대상이 됩니다. 부모에게 죄를 지으면 부모가 두려움의 대상이 됩니다. 교통신호를 무시하고 운전하게 되면 교통순경이 두려움의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피하게 됩니다.
사실 세상을 살기가 얼마나 두렵습니까? 길가는 것도 두렵습니다. 택시를 타는 것도 두렵습니다. 비행기 타고 여행하는 것도 두렵습니다. 이번 캄보디아 여행길에 불행을 당한 가족들을 보고 우리가 얼마나 안타깝게 생각했습니까?
또 건강 때문에 두려움이 오고, 사업 때문에 두려움이 오고 또 물가가 치솟는 것을 보고 두려움이 옵니다. 그런데 성경은 365번이나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요일4:18절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여기 사랑과 믿음은 '동일 어'입니다.
⑤아담과 하와는 핑계를 대고 변명을 합니다.
즉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아담은 하와에게, 하와는 뱀에게 전가했습니다.
창2:2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시고 그 다음에 하와를 만드시고 하와를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인도합니다. 아담이 하와를 보니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그래서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하며 감탄했습니다.
▶바로 그 시간에 아담이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너무 예쁘고 귀여운 이런 사람을 어떻게 저에게 주셨습니까?' 감사기도를 하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예뻐야 네가 사랑하지 않겠냐?'고 했답니다. 그 다음에 아담이 하나님께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이 사람이 맹할 때가 있거든요. 그건 왜 그렇습니까?' 그때 하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이놈아, 그래야 너 같은 놈을 사랑할 것이 아니냐?'고 하셨답니다. /믿거나 말거나/
어쨌든 이렇게 예쁘고 아름답고 좋았는데 이제 와서 엉뚱한 소리를 합니다. 죄를 짓고 나서 한다는 소리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저 여자가 먹으라고 해서 먹었나이다.' 이 말의 책임이 누구입니까? '왜 저런 여자를 주어서 죄를 짓게 만듭니까?' 이런 이야기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 책임을 묻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실패한 자들은 다 남의 탓이라고 변명을 합니다. 또 오늘의 불행이 다 팔자가 나빠서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이처럼 어두워진 것이 다 지도자들의 책임이라고 핑계를 됩니다. 그러나 지도자의 책임만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변명하지 않고 책임을 질 줄 아는 사회가 밝은 사회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에 누구 때문이라고 핑계하지 아니하고 나 때문이라고 솔직히 시인했습니다(욘1:12). 죄는 자기가 범하고 그 책임을 타인에게 전가시키는 것은 죄를 지은 사람으로서는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속담에 '방귀 뀌고 성낸다.'는 말은 모든 책임을 타인에게 전가하는 자를 꼬집는 말이기도 합니다.
범죄한 아담은 '양심과 도덕'을 벗어버렸고, 하나님을 피하며 살았고, 숨어살았고, 두려워 떨며 살았고, 이 핑계 저 핑계 변명의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이 다섯 가지가 오늘 범죄하고 숨어있는 아담의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 속에 숨어 있는 아담에게 하나님이 오셔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찾으십니다.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이 우리를 찾으시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룻소'는 '인간의 마음 속에는 두 가지의 소리가 있는데 하나는 마음에서 나오는 양심의 소리요, 또 다른 하나의 소리는 육체에서 나오는 정욕의 소리'라고 했습니다.
2. 그 당시 에덴동산에서 어떤 소리가 있었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촌에는 소리들로 그득 차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너무 큰 소리는 들을 수 없다고 합니다. 과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는 엄청나게 큰 소리인데 너무 커서 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 작은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특히 전파는 이 공기 속에 가득 차 있는 데 전혀 들리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주변은 수많은 소리들로 가득 차있습니다. 원망의 소리, 불평의 소리, 탄식의 소리, 대권을 눈앞에 둔 정치인들에게는 서로 자기들이 최고라고 우기는 소리, 또 모함의 소리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에덴동산에서도 여러 가지 소리가 있었습니다.
①사탄의 소리가 있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을 반역하다가 타락한 천사라고 성경은 밝히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동산입니다. 그러나 그런 아름다운 동산에도 마귀는 있었습니다. 마귀가 없는 곳은 없습니다.
또한 마귀의 공격에서 예외인 사람은 없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까지도 마귀의 공격의 대상이었습니다. 그 마귀는 첫 사람 아담과 하와를 공격했습니다. 마귀는 아담과 하와에게 나타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도록 작전을 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이 사탄의 소리는 하나님에 대한 권위와 능력을 의심케 하는 말입니다. 이 소리를 들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에 대하여 의심을 품기 시작합니다.
오늘날도 사탄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바싹 다가와 의심의 소리를 질러댑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의심케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축복'에 대하여 의심케 합니다.
사탄의 소리를 듣고 하와가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해서 임의로 말한 말입니다. 창2:17절에서 하나님은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와는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벌써 넘어가고 있습니다.
눈치를 챈 사탄이 이어서 공격합니다. 3-4절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는 말은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무시하는 말이요, 더 나아가서 '너도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탄이 아담에게 최초의 유혹은 '너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유혹입니다.
고대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신이 되기를 원했고 신의 흉내를 내려고 했습니다. 인간이면서도 인간 그 이상의 존재가 되고 싶어 안달을 했습니다. 신이 되려는 유혹가운데 가장 큰 유혹은 사람들을 자기의 노예로 삼고 사람들을 지배하고, 다스려서 자기 마음대로 부려보고 싶은 욕망에서 나온 발로입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신이 될 수 없습니다. 특히 인간은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피조물입니다. /믿/
사탄의 소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케 하며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교만한 마음을 주어 죄를 짓게 합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허영심에 빠지도록 유혹을 합니다. 그리고 적극적이고 호전적으로 접근해서 오늘도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사탄의 공격에 넘어가 선악과를 먹고 말았습니다. 사단의 소리를 듣고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육신의 정욕), 보암직도 하고(안목의 정욕),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이생의 자랑) 나무'로 보였습니다(6절).
그래서 그 실과를 자신이 따먹고 남편에게도 주어 아담도 금단의 열매를 먹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곧 '행위언약(行爲言約)의 파계'입니다.
먹자 말자 아담과 하와는 마귀의 말이 거짓말임을 알았습니다. 즉시 두려움이 왔습니다. 그래서 마귀 소리를 들으면 언제나 결론은 파멸입니다. /믿/
▶사탄은 어떤 모습으로 인간을 유혹하는가?
⑴정체를 숨기며 접근합니다. 1절에도 사탄이 자기의 정체를 숨기고 그 하수인 뱀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사탄의 중요한 전략 중 하나는 자기의 모습을 숨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도 사탄이라고 하지 않고 뱀이라고 속여서 나옵니다. 떳떳한 사람은 언제나 자기를 보여주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자기를 숨기는 것처럼 사탄은 언제나 자기를 숨기고 우리에게 접근하는 것입니다.
⑵간교합니다. 본문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간교하다는 말은 '커닝을 한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는 '잔재주가 많다'는 말입니다. 또 '간교하다'는 말은 곧 '지혜롭다'는 뜻입니다. 얼마나 지혜로운지 사람을 하루아침에 쫄딱 망하게 해 놓았습니다. 사람을 교묘한 수법으로 유혹해서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느끼게 만들었습니다.
⑶사탄은 천사의 모습으로 접근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탄을 무섭고 공격적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귀는 대부분 천사의 모습을 하고, 공격적인 모습이 아니라 회유 적인 모습, 남의 약점을 파고드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⑷사탄은 또 인간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여기에 보면 뱀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탄이 뱀을 통해서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탄이 언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는 사탄이 말을 통해서 일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⑸살인자요, 거짓의 아비입니다. 요4:44절에 보면 마귀에 대하여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⑹도적질하고 죽이려고 이 땅에 왔습니다. 요10:10절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⑺사탄이 인간을 유혹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호와를 가까이 하는 것이 내게 복이라'고 했습니다. /아멘!/
②사람의 소리도 있었습니다. 사탄의 지배아래 있던 하와는 그 인격 속에 하나님의 말씀대신에 사탄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그를 완전하게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남편에게도 권하여 먹게 합니다. 6절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었더라!' 그러니까 처음부터 남자는 여자에게 약했습니다.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소리를 들은 것이 아니라 하와, 즉 사람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사탄은 부부의 대화를 통하여 하나님의 소리를 막고 하나님과의 대화를 단절시켰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죄를 짓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여자가 죄를 짓게 한 장본인이라고 해서 여자의 소리를 막았습니다. 그래서 구약에 보면 여자들의 소리가 거의 없습니다. 인구조사에서도 여자는 제외시켰습니다.
▶그들이 죄를 짓고 발견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처럼 되었나요? 아닙니다. 선악과를 따먹자마자 그들의 마음은 죄로 인한 고통이 끝없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이 대답하기를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여러분, 사탄의 말대로라면 하나님처럼 되어 당당했어야 될 테인데 풀이 죽어서 겨우 하는 소리가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이 소리는 불안과 절망과 공포에 떠는 소리입니다. 한마디로 '두렵다'는 것입니다.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을 피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자신의 진실을 보시는 것이 두렵고, 무섭고, 떨리기 때문입니다. /믿/
③양심의 소리도 있었습니다.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이 소리는 아담의 양심의 소리입니다.
'칸트'는 '저 하늘에게는 반짝이는 별이 있고 사람의 마음속에는 양심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속에 양심의 재판소를 두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양심은 못 속입니다.
▶미국 백악관 전시실에 전시되어 있는 가운데 가장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어느 초등학교 아이가 보낸 편지와 1불 짜리 돈이라고 합니다. 그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대통령 할아버지! 제가 우리 집에 온 편지에 우표에 도장이 찍히지 않았기에 떼어서 사용하였습니다. 양심에 가책이 되어 우표 값을 보냅니다.' 백악관을 이것을 '미국의 양심'이라고 자랑하며 전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양심은 언제나 참된 것을 증거 해 줍니다. /아멘!/
④하나님의 소리가 있었습니다.
범죄한 인간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소리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입니다. 범죄한 인간은 고통과 두려움 속에 헤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고통과 두려움 속에 방황하는 인생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소리가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벌거벗은 고통 속에 있는 그들을 찾아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주께로 나오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믿/
하나님이 어느 때 그들에게 찾아오셨나요? 8절 '날이 서늘할 때에'입니다. 여기서 '날이 서늘할 때'란 말은 시간이 많이 지나서란 말로 원어에는 '바람이 살랑살랑 불 때'입니다. 지금 그들은 무엇으로 수치를 가리고 있습니까? 무화과 잎으로 엮어서 입을 해 입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찾아오실 때는 바람이 살랑살랑 불 때입니다.
여러분, 바람이 살랑살랑 불 때 잎사귀가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금방 말라버립니다. 빨래도 바람이 살랑살랑 불 때 잘 마릅니다.
본문의 배경을 쉽게 생각해 보면 그들이 애써 만들어 입은 옷이 아무 쓸모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하나님께서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스펄죤'은 이 구절을 설명하면서 '하나님이 시간이 많이 지나고 나서 오셨다는 의미는 범죄한 인간을 죽이고 말겠다는 조급한 모습으로 오시지 않았음을 보여준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조급히 칼집에서 예리한 칼을 빼 가지고 급하게 오신 것이 아니라 날이 서늘할 때 동산을 거니시며 오셨다고 했습니다.
조용히 하루가 끝나는 마지막 시간에 하나님이 오셨다는 것은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며 화내시기를 더디 하시며,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심을 보여준 것'입니다. 오셔서 조용히 아담을 부르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이 물음은 가인을 향하여도 있었습니다. 창4장에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첫 사람에게 던진 처음 질문과 연결되는 질문입니다. 가인을 향한 이 질문은 '네 형제가 어디에 있느냐?'로 바꾸어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 질문은 신약에 와서 '네 이웃은 어디 있느냐?'로 발전됩니다. 사람은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니고 함께 사는 존재요 더불어 사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으로 우리에게 '대 강령'을 주셨습니다. 이웃을 도와주어야 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이웃 사랑의 극치는 뭡니까? 밥 한 그릇, 옷 한 벌이 아닙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도해서 하나님의 나라의 주인공으로 세워야 합니다. 이것이 이웃 사랑의 극치입니다. /아멘!/
3. 우리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사람의 소리를 듣는 것도 귀합니다. 또 양심이 소리를 듣는 것도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영 음을 듣는다는 것은 정말 귀한 일입니다.
세계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그림은 '밀레'의 '만종'입니다. 밀레는 소리가 들리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늘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정말 만종을 보면 종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행복한 부부의 대화 소리가 막 들리는 것 같습니다. 그들의 기도소리가 들리고, 하나님이 그들을 축복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할/
▶어느 장로님이 승용차를 타고 여행을 떠났습니다. 교회 일이 아니라 사적인 일로 떠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교회 돈으로 기름을 넣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속에 음성이 들렸습니다. '하나님의 것과 네 것을 구별하라' 그러나 별일 없으려니 하고 달리다가 교각을 들이받아 자동차가 대파되어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장로님은 크게 회개했다고 합니다. '교회 돈으로 기름을 넣을 때부터 불안했던 것은 하나님의 소리'였습니다. 하나님이 들려주는 소리를 들어야 바로 갈 수 있습니다. /할/
오늘 설교 주제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향하여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이 물음은 우리의 현 주소를 묻는 질문입니다. 신앙의 현주소를 묻고 있는 말씀이요, 인격의 현주소를 묻고 있는 물음이요, 또 환경에 문제를 묻고 있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너희 형편이 어떤가? 건강은 어떤가? 사업은 어떤가? 신앙은 어떤가? 지금 너희의 서 있는 곳이 믿음의 자리인가? 하나님의 영광가운데 서 있는가? 아니면 불 신앙의 자리에 서 있는가?'를 묻고 계십니다.
또 하나님은 직분 자들에게도 묻습니다. 목사에게 '너는 맡겨준 양들을 잘 양육하고 관리하고 있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또 성도들에게, 앞서 있는 직분 자들에게 묻습니다. '맡겨준 일을 잘 감당하고 있느냐?' 하나님은 예리한 눈으로 보시고 판단하십니다.
그리고 잘 한자에게는 아낌없이 상을 주십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를 남긴 자들에게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너희의 상급이 크니라. 나의 즐거운 잔칫상에 참례함을 받으리라!' /할/ 그러나 게으르고 꾀를 부린 자에게는 엄하게 벌하십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바깥 어두운 곳에서 이를 갈며 슬피 울리라'고 하십니다. 이곳은 지옥 불 속을 말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무섭습니까? 우리 모두 천국의 상급을 위해 충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할/
여러분, 우리 한 번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 보자! 사람들은 가끔씩 자기의 자리를 확인해 봅니다. 등산가들은 정상을 향해 가면서 이 길이 옳은가를 확인해 봅니다. 사업가는 자기의 기업의 장래가 확실한가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확인합니다. 황해 사는 배의 정확한 위치를 지키며 바닷물을 힘차게 가르며 달려갑니다. 공부하는 학생도 자기의 실력을 확인해보고 입학원서를 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신앙인들에게도 현재의 믿음을 점검해 보고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아멘!/
하나님은 우리들의 믿음을 시험해 보십니다.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신 하나님이 오늘도 저와 여러분들을 시험해 보십니다. 예수께서 38년 된 병자를 보시고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여러분, 병든 자는 누구나 다 낫고자하는 소원이 있습니다. 주님도 그것을 아시고 물으신 것입니다.
주께서 물으신 이유는 그의 믿음을 보시려고 물으신 것입니다. '내가 너를 낫게 할 수 있는 줄을 믿느냐?'라는 물음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십니까? 오병이어의 기적을 믿으십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써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아멘!/
그렇습니다. 그분은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주님께 무리들이 와서 묻기를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맞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할/ 그분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4.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 물음 속에 몇 가지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①범죄하고 무디어진 심령을 깨우치는 촉구의 질문입니다.
죄는 특징이 있는데 사람의 심령을 무디어지게 합니다. 죄는 양심을 죽이는 독약입니다. 그래서 죄를 범하면 가슴을 칠 줄을 모릅니다. 눈물을 흘리지도 아니합니다. 심령이 무디어집니다. 양심의 가책도 없습니다. 어둠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깨닫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비된 양심을 '화인 맞은 양심'이라고 했습니다.
마비된 양심, 화인 맞은 양심은 죄가 죄인 줄도 모르고 깨닫지도 못합니다. 착각 속에 빠집니다. 우월감에 빠집니다. 자신이 대단한 존재로 착각합니다.
사람들은 다 각기 자기 잘난 맛에 산다고 하지만 하나님 앞에 잘난 척 하다간 자기만 손해 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손해를 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왜?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믿/
맨 먼저 하나님께서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신 것은 죄 속에 있는 아담의 실체를 깨닫게 해 주시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아담이 죄를 깨닫고 철저하게 회개하고 주께로 나오라는 음성입니다. /할/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저주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책망하시려고 오신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서늘할 때에 시간을 그들에게 주시면서 오신 것은 죄를 발견하고, 죄를 뉘우치고, 죄를 고백하라고 오신 것입니다. /아멘!/
사람들은 사업이 망하거나 자식의 학업이 떨어지면 발을 동동 구르며 통곡합니다만 죄로 인해 영혼이 파멸되는 것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가장 귀중한 것이 우리의 영혼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네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형통하겠고, 영 육간에 강건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②슬픔을 표현하는 사랑의 질문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다른 말로 바꾸면 '아담아 네 꼴이 무엇이냐, 왜 벌벌 떨고 있느냐, 왜 나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려고만 하느냐' 이러한 뜻입니다.
하나님이 기대했던 대답은 무엇입니까?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먹지 말라는 것을 먹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거역했습니다.'라는 대답입니다. '왜 이 사실을 모르느냐?'하시며 슬퍼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③구속의 은총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15절에 '여자의 후손'이라는 말과 21절에 '가죽옷'이라는 단어가 나오고 있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어서 나와서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를 바라보아라! 그 분 안에 구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예표인 '가죽옷'을 입으라는 음성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에게 무화과 나뭇잎으로 만들었던 옷을 벗기시고 가죽옷을 입히셨습니다. 이 가죽옷은 희생제사 곧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가죽옷을 만들기 위해서 동물이 죽어서 희생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의 죄를 씻기 위하여 동물의 죽음과 그 가죽옷으로 인간의 수치를 가리게 하셨습니다.
아담의 죄를 위하여 짐승이 피를 흘리고 희생한 것처럼, 우리의 죄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시고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이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가죽옷을 입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믿/
기독교 신앙은 '이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을 때에 하나님과 영적으로 회복이 되고 구원의 능력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지어 주시는 가죽옷을 입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십자가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아멘!/
▶우리가 벗고 새롭게 입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
⑴죄의 옷을 벗고, 용서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옷을 입는 이유는 '추위를 피하고, 멋을 내고,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서' 옷을 입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가죽옷은,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죄 용서함'을 예표하는 옷입니다.
⑵사망의 옷을 벗고, 생명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무화과 나뭇잎의 옷은, 사망의 옷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사망의 옷을 입었습니다.
창3:19절에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곧, 죄의 삯은 사망임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죄는 반드시 벌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입었던 무화과 나뭇잎의 옷은 '사망의 옷, 죽음의 옷'입니다. 그것은 언젠가는 썩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입혀 주신 가죽옷은 '영생의 옷, 생명의 옷'입니다. 또 가죽옷은 하나님의 '사랑의 옷, 은혜의 옷, 긍휼의 옷'입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옷'을 의미합니다.
④'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는 질문은 하나님을 멀리 떠난 죄인을 찾으시는 애절한 부르짖음입니다.
마치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음성이요,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심정입니다. 뿐만 아니라 '네가 어디 있느냐?'는 질문은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도와주겠다. 네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는 의미가 담긴 말씀입니다.
⑤'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 물음 속에 세 가지의 문제가 들어 있습니다.
⑴'너는 어디에서 왔는가?' 생명의 근원을 묻고 계십니다. 인간의 생명이 어디에서 왔습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생명을 불어넣어서 영적인 존재가 되게 했습니다(창2:7).
⑵'너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신앙 안인가? 신앙 밖인가? 주안에 있는가? 주밖에 있는가? 이 질문이 중요한 질문입니다.
⑶'너는 어디로 가는가?' 지금 너희 길이 '천국행이냐? 지옥행이냐?'를 묻고 계십니다.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나님께로 가는 존재입니다. /믿/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옛날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고 질문하셨듯이 오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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