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은 오직 전진 뿐 입니다! (히 10:32-39)
딤전4:15절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이 권면은 바울이 디모데에게만 준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진보, 즉 전진'해야 합니다. 자신의 이상과 목표를 설정해 놓았다면 그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전진해 나가야 합니다. 세상이 이렇게 발전하고 발달한 것은 끊임없는 인간의 전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보란 '성장하고 발전해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육신도 자라야 하고, 그 안에 있는 인격도 자라야 합니다. 특히 신앙생활에 있어서 중단 없는 끊임없는 진보가 있어야 합니다. ◀제목소개!▶
믿음은 우리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귀중한 선물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고도 믿음을 성장시키지 못하고 전진해 가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슬퍼하십니다. 38절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또 39절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할/
뒤로 물러간다는 말은 후퇴한다는 말로서 '철회하다, 뒤로 끌다'라는 의미입니다. 뒤로 물러가는 사람은 자신의 목적이나 계획을 쉽게 철회해 버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남을 뒤로 끌어내리는 사람입니다. 신앙생활도 보면 자신만 주저 않는 것이 아니라 남까지 주저앉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 보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본문에 뒤로 물러가는 사람은 '자신도 주저 않고 남도 끌어내리는 그런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앞으로 가게 지으셨습니다. 그것이 창조의 원리입니다. 그래서 굼벵이도 지렁이도 개미도 앞으로 갑니다. 하루살이도 앞으로 날아갑니다. 자동차도 비행기도 사람도 앞으로 갑니다. 지구도 뒤로 돌지 않고 앞으로 돕니다.
출14:12절을 보면 홍해 앞에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다고 소리치며 원망했고, 출16:3절을 보면 신 광야에 이른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굶어 죽는 것보다는 애굽의 고기 가마 곁에서 실컷 먹고 죽는 것이 좋을 뻔했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전진하려는 생각도 없었고, 오직 뒤돌아 가려는 궁리에 바빴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보면 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과거 지향적인 사람'입니다. 늘 옛날을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왕년에. 내 소싯적에' 이런 사람은 발전이 없습니다.
두 번째는 '현실주의자'들입니다. '안일주의자'라고도 합니다. 이들에겐 과거도 필요 없고, 미래도 필요 없습니다. 지금 이대로가 좋습니다. 지금 이 자리가 좋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도 '당장 오늘 나한테 무슨 복이 떨어지느냐? 나한테 뭐가 오느냐?' 득을 따지고 유익을 따집니다. 그들이 바로 현실주의자들입니다.
세 번째는 '미래 지향적인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뒤로 물러서지 않고 전진하는 사람들입니다. 앞을 보고 달려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분명히 뜰 것이다' 믿고 나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에 보내시고 열 가지 재앙을 퍼부으면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나오게 한 것은 그들에게 가나안이라는 미래지향적인 복지를 향해 전진하라고 건져주신 것입니다. /믿/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영원한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걸핏하면 뒤로 되돌아갈 궁리만 합니다. 오늘날 믿음의 사람들이 뚝 하면 시험에 빠지고 게으름에 빠지고 불 신앙에 빠집니다.
본문은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합니다. 또 뒤로 물러가면 침륜에 빠진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뒤로 물러나는 사람입니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고, 조건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보면 모이기에 힘쓰지 아니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25절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행2:46절에 보면 초대교회는 날마다 교회에 나왔다고 했습니다. 공부를 제대로 배우려면 학생은 학교를 매일 가야 합니다. 우리도 온전한 신앙을 가지려면 교회에 잘 나와야 합니다. 모여야 뭐가 되도 됩니다. '예배에 성공해야 인생도 성공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모여야 복을 받습니다.
▶왜 오늘 날 사람들이 모이기를 싫어합니까?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①세상이 너무 분주해서 그렇습니다. 이 시대의 특성이 그렇습니다. 웬일인지 분주합니다. 별로 하는 일이 없는데 살아가는 것이 그렇게 분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주일날 교회에 나와 한 시간 예배드리는 것도 그렇게 어려울 수가 없습니다. 왔다가도 예배가 끝나기가 무섭게 가야합니다. 이렇게 생활이 번잡하고 분주하면 신앙생활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우선 정신적인 여유가 없습니다. 마음의 여유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고 하면 삶의 현장에서 일의 우선순위가 분명하게 정해져야 합니다. 주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할/
분주하게 살아가다가도 예배드리는 날이 되면 모든 것을 다 놓아두고 먼저 하나님 전으로 달려 나와 나의 신앙을 고백하고 구원받음에 대한 감사와 바로 살지 못함에 대한 회개와 우리들의 삶 속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주님께 맡기는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기본입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계명으로 정하셨습니다. 구약의 다윗은 예배 중심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산 자입니다.
시73:17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여기서 다시 눈을 뜹니다. 더러워진 마음을 씻어서 새로운 관점에서 세상을 보게 됩니다. 안경을 닦듯이 흐려진 마음을 닦아서 새로운 마음,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됩니다.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예배드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성령의 감동을 받으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 때에야 비로소 '그 결국을 알았나이다.' 이제야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혜의 근본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면 우리가 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다윗은 예배드리다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모이기에 힘쓰는 성도들이 됩시다. 그래야 하나님을 바로 알고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②형식주의 때문입니다. 우리나라가 형식주의 때문에 망한 나라입니다. 대충대충 건설하다가 오래 전에 성수대교가 무너졌고,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적이 있다면 그것은 형식주의입니다. 이 형식주의는 신앙 인들에게서 진지한 마음을 빼앗아 갑니다. 눈물도, 순수함도 빼앗아 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 신앙생활을 할 때 큰 감격 속에 합니다. 첫 신앙 때 우리에게 얼마나 기쁨이 있었고, 얼마나 열심히 있었습니까? 그런데 오늘 우리들의 가슴속에 첫 신앙의 감격이 얼마나 남아 있고, 그때의 기쁨이 얼마나 남아 있습니까? 그때 그 열심히 다 어디로 갔습니까?
그것은 우리들의 신앙이 그만큼 나도 모르는 사이에 형식화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감격도 사라지고, 눈물도 사라지고, 기쁨도 사라지고, 열심도 없어지고 남은 것은 형식만 남은 것입니다. 이때부터 신앙이 지극히 형식주의로 흐르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서 가장 큰 적은 바로 이 형식주의입니다. 주일날 예배드리러 나왔는데도 마음에 감격이 없고, 그냥 그저 의무적으로 형식적으로 예배를 드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예배는 내 마음과 정성과 뜻을 모아 하나님께 드리는 산 제사입니다. 형식주의가 오늘날 우리의 신앙을 좀 먹게 하고 모이기를 싫어합니다.
③안일주의 때문입니다. 신앙이 이렇게 형식화되면 곧 바로 안일함에 빠지게 됩니다. 주일이 돌아와도 전혀 준비가 없습니다. 오히려 토요일 날은 밤늦게까지 놀거나 TV를 보다가 늦게 잠을 잡니다.
그러니까 주일날 아침에 일어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다가 예배 시간이 가까워오면 고민이 많아집니다. "교회를 가야되느냐? 아니면 계속 잠을 자야하느냐?" '이것이 문제로다'입니다. 그렇게 고민을 하다가 '그래도 교회에 가야지!'하고 일어나려고 하면 몸이 천근만근입니다. 몸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용기를 내어 일어나면 시간은 이미 지나가고 있고 허둥대며 교회에 와 보면 예배는 중간쯤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런 안일주의 속에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이 사라지고 맙니다.
사실 예배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드려야 할 소중한 시간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받은 것에 감사 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헌신 중에 가장 큰 헌신은 예배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나와의 약속된 시간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믿/
④지식으로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신앙이 후퇴입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지식적으로 하나님을 믿습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홍수 속에서 살아갑니다. 라디오를 켜고, TV를 켜고 컴퓨터를 켜면 기독교 방송, 극동방송에서 유명한 목사님들의 설교가 쏟아집니다. 그래서 지식적으론 굉장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신앙은 아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입니다. 머리로, 생각으로, 지식으로 가는 신앙은 구원의 힘이 없습니다. 기독교는 가슴의 종교입니다. 머리의 종교가 아니라 가슴으로 믿는 종교입니다. 기독교를 체험하는 종교입니다. 체험하는 신앙은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식으로 믿는 신앙은 힘이 없습니다.
▶옛날이야기입니다. 학자 세 사람이 조그만 배를 타고 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이 유식한 학자 셋이 노를 젓는 뱃사공을 보니까 참 무식하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중 한 사람이 뱃사공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천문학을 아시오" 그러자 뱃사공은 "나는 무식해서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 학자는 "당신 세상을 헛살았구먼!" 하고 멸시하듯 사공을 쳐다보았습니다. 또 한 사람의 학자가 다시 뱃사공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철학을 아시오" 뱃사공은 "나는 무식해서 모릅니다." 그 학자도 "당신 뭣 때문에 살고 있소" 하며 비웃었습니다.
세 번째 학자가 또 물었습니다. "당신 생물학을 아시오," "무식해서 모릅니다." 이 세 학자들은 자신들의 지식이 최고 인양 자랑하면서 무식한 뱃사공을 측은하게 바라보았습니다.
이때 강풍이 불어왔습니다. 배가 흔들리다가 그만 뒤집히고 말았습니다. 모두 물에 빠져 허우적거립니다.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칩니다. 이때 사공은 아주 여유 있게 헤엄을 쳐서 물가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세 학자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들 수영할 줄 하시오" 그러자 세 사람이 똑 같이 말합니다. "할 줄 모릅니다. 살려주시오" 그때 사공이 담뱃대에 담배를 피워 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들은 세상 헛살았구먼! 그 나이에 수영도 할 줄 모르다니, 그렇다면 당신들의 인생은 이제 끝장이요" 그러고는 그냥 돌아가 버렸다고 합니다.
여러분, 사람이 물에 빠지면 수영이 최고입니다. 그때는 철학도, 천문학도, 생물학도 다 필요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도 모두 죄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여기에 빠지면 다 사망입니다. 돈도 지식도 권력도 다 무용지물이 됩니다. 무엇이 최고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생명의 구주로 믿는 믿음이 최고입니다. 이 믿음이 세상을 이기고 죄를 이기고 자신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됩니다.
그런데 오늘 많은 사람들이 가슴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생각으로, 지식으로 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말은 많아지고 경건은 없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세상일이 바쁘다고 모이기를 싫어합니다. 또 형식주의, 안일주의 때문에 신앙의 껍데기만 남았습니다. 거기다가 지식으로 하나님을 알다가 힘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본문은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그 다음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 하리라" 36절 끝을 보면 "뒤로 물러가면 침륜에 빠진다."고 합니다. 또한 38절에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명령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버리지 말라'와 '물러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살아라!'입니다.
1. 이 명령문이 떨어지게 된 배경을 먼저 알아야 은혜가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히브리서는 A. D 60년경에 기록된 성경입니다. A. D 60년경이라면 이해하시기가 어려우실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좀 더 말씀드리면 그때는 그 이름도 유명한 악명 높은 로마의 황제 '네로'(A.D 37-68년)가 통치하고 있었던 시기입니다. 네로는 16살에 황제가 되어 황제로 있는 동안에 자기의 아내 '옥타비아'를 살해하고, 자기의 '모친'을 살해했는가 하면 그 형제들을 살해하기도 했던 황제입니다.
그는 기독교인들을 핍박할 구실을 찾기 위해 로마 시에 일부러 불을 지르고 기독교인들을 로마 대 화재의 방화범으로 몰아 핍박하고 죽였던 사람입니다. 주후 60년에 베드로가, 68년에 바울이 각각 그 네로에 의해서 순교 당했습니다. 바로 그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그때에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는 방법도 극도의 잔인한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을 붙잡아다 그 몸에 짐승의 가죽을 씌워 사냥개에게 던지거나 굶주린 사자 굶에 던져 넣기도 했습니다. 아니면 높이 세운 쇠기둥에 사람을 산채로 묶어서 그 몸에 기름을 발라 불을 붙여, 인간 횃불을 만들어 거리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었고, 비방거리가 되게 했습니다.
본문 32-33절을 보세요!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이 말씀이 바로 그 시대의 역사적인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때에 로마 제국은 극렬하게 기독교인들을 탄압했습니다. 때문에 도처에서 신앙을 가졌던 그리스도인들이 배교하기 시작하였고,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서 주를 부인하고 교회를 떠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 속에서도 신앙을 지켰던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가혹하고 잔인한 형벌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당시의 신앙인 들의 앞에는 두 길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배교를 하든지 아니면 순교를 하든지 둘 중에 하나였습니다.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사람의 마음은 같습니다. 그때도 헤롯의 권력이 무서워서 믿음을 저버리고 예수를 저주하고 떠나 간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대신에 로마의 황제 '가이사'를 신으로 숭배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32-34절에 보면 초대교회의 고난 사를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그들은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받았던 고난의 내용은 히11:36-38절에 나옵니다.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 없는 축복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시34:19절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시119:71절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딤후2:3절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벧전3:17절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둘째로, 그들은 다수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셋째로, 그들은 산업을 빼앗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신앙 때문에 재산을 몰수당했습니다. 재산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재산과 목숨을 맞바꾸는 것이 오늘의 세상입니다. 그런데 초대 교회 성도들은 평생 모은 재산을 송두리째 빼앗기고도 두려워 않았습니다. 재산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재산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재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영생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은 가치를 위해 담대하게 인생을 거는 것이 진정한 용기입니다.
한국의 초대 교회사를 보면 일본의 신사참배를 끝까지 반대하다가 순교를 당한 주기철 목사님같은 분들도 있습니다. 일제 때에 신사 참배는 분명한 '제 일, 제 이 계명'을 위반한 범죄적 행위입니다. 그 때도 어떤 분은 목숨 걸고 신사 참배를 거절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것을 '국민의례'이니, 단순한 '의식'이니 하면서 우상 앞에 굴복한 자들도 많았습니다.
오늘 날 우리의 현실 속에도 신앙이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지만 세속주의와 인본주의 적인 신앙으로 빠져 전진보다는 편의주의 자기 합리주의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절대 그렇게 살아서는 아니 됩니다. 뒤로 물러가면 침륜에 빠집니다, 그러니 우리는 올라가야 합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40:31절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 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아멘!/할/
2. 담대함을 버리지 맙시다(35).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상을 얻느니라." 여기 담대하다는 말은 '겁이 없고 용기가 많다'는 말로써 '확신'이라는 말입니다. 확신을 가진 사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확신이 없으면 작은 일에도 두렵고 걱정스럽고 떨리기 마련입니다. 확신이 있는 사람은 어떤 환경 조건 가운데 던져 질지라도 자신의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또 '담대하다'의 반대말은 '비굴하다, 겁내다'입니다. 그러니까 '담대 하라'는 말은 '비굴하거나 겁내지 말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앞에서 잠깐 말씀드렸습니다 만은 히브리서가 기록된 목적 중에 가장 큰 것은 고난 받는 성도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려는 것입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로마 정부의 박해를 받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옥에 갇히고, 재산을 빼앗기고 직장에서 쫓겨나고 많은 고통이 뒤따랐습니다. 쫓겨나고 빼앗기는 박해 속에서 성도들이 흔히 겪을 수 있는 두려움이나 공포 때문에 담대함을 버릴 수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고 하면서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32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그리스도인이 된 후'를 말합니다. 그리고 '고난의 큰 싸움에 참여 한 것'은 '믿는 이들을 핍박하는 자들에게 대하여 당당히 대항하며 목숨조차 기꺼이 내어놓았던 용기 있는 신앙의 행위'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짐승의 가죽을 쓰고 사냥개에게 물어 뜯김을 당하고, 수많은 구경꾼들이 모인 원형 경기장에서 사나운 맹수와 싸우다 죽임을 당하고, 또는 기름에 흠뻑 젖은 인간 횃불이 되어 죽어가면서도! 이런 말할 수 없는 모욕거리와 구경거리가 되면서도 그리스도를 배반치 아니하고 신앙을 지킨 역사 속의 '그리스도인들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담대한 용기를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용기 있는 행동은 또 있습니다. 33절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무슨 말입니까? 요즘도 그렇습니다. 뜨는 사람들! 권세와 힘이 있는 사람을 가까이 하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비난받는 사람들! 죄인 취급받는 사람들을 가까이 하려는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왜 없습니까? 그들과 사귀려면 희생과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 예수 믿는 것이 항상 위험의 표적이 되었으며, 그런 이들을 가까이 하는 사람들도 동일한 취급을 받는 시대인데도 그들과 영적인 교제가 있었습니다. 아무리 자기에게 불이익이 온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다 순교하고 핍박을 받는 자들과 함께 고난을 나누려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 신앙에 회의가 일어나고, 침체되고, 게을러 질 적에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신앙의 선배들을 생각하고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강조하고 있는 말씀이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은 담대함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의 배짱이 좀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는 말은 '확신을 버리지 말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담대함을 버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①예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주안에 있으면 담대합니다. 지금도 우리 주님은 우리들의 심령을 노크하고 계십니다. 계3:20절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요15:7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할/
②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신앙을 가질 때 담대해집니다. 비 오고 바람 불고, 폭풍이 이는 밤에도 태양은 여전히 찬란히 빛나고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시련과 환난의 바람이 불어와도 우리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살아 계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사41:10절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할/
이스라엘 지도자 모세가 죽고 여호수아가 그 후계자가 되었을 때 여호수아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는 모세처럼 기적과 이적을 행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대면한 적도 없었고, 큰 권능과 위엄을 사람들 앞에서 행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모세와 비교할 때 너무나 초라했습니다.
그런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수1:9). 또 수 1:6,7절에서도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담대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그의 오른손을 붙들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③담대해야 '큰 상'을 받습니다. 세상에서 상 싫어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운동장에서 뛰고 달리는 선수들이 무엇을 바라보고 뛰고 달립니까? 상하나 바라보고 달립니다. 상하나 때문에 그들은 고통을 참고 감수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사랑이 뭐 길래'가 아니라 '상이 뭐 길래'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상은 '노벨상'입니다. '노벨'은 스웨덴의 화학자이며 발명가입니다. 1863년 폭약을 발명하고 공장을 세워 폭약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공장이 폭파되어 동생과 종업원 4명이 희생되는 비운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는 그 후 폭약 때문에 거부가 되었고, 그가 마지막 죽으면서 유언하기를 '인류 복지에 가장 구체적으로 공헌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며 자신의 전 재산을 내놓았습니다. ▶노벨상은 분야 별로 나누어 있는데 매년 12원 10일 스웨덴 국왕이 직접 금메달과 22만 달러 정도의 상금을 줍니다. 우리나라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큰상은 하나님이 주시는 상입니다. 큰 분이 주시는 상이기 때문에 큰상입니다. 면장이 주는 상보다, 도지사가 주는 상보다, 대통령이 주는 상이 더 좋은 상입니다. 그보다도 하나님이 주시는 상은 더 큰상입니다.
누가 이 상을 받을 수 있습니까? 담대함을 버리지 않고 신앙의 경주를 계속하는 사람이 받습니다. 그런데 그 상을 받으려면 절대 인내가 필요합니다.
3. 그래서 신앙은 인내입니다(36-37).
"너희가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고 히12:1절의 끝 부분을 보면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인내에는 소망이 함께 있어야 참으로 인내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고생이지만 앞으로 이 고생의 때가 지나가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소망이 없으면 지칩니다. 그러나 소망이 있는 사람은 아무리 고생스런 일이라도 고생으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그 고생, 고통은 더 나은 삶을 위한 한 과정에 불과 할 뿐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쓸 때에 칭찬하기를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칭찬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믿음에는 역사가 따라야 참 믿음이고, 사랑에는 수고가 따라야 참 사랑이며, 인내에는 소망을 가지고 인내해야 참 인내라는 것입니다(살전1:3).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에 이런 일! 저런 일을 당합니다. 옛날같이 그런 핍박이나 환난은 없습니다. 그러나 뒤로 물러가 신앙의 침체에 빠지고 뒤로 물러 갈 기회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때에라도 우리는 인내해야 하겠습니다.
36-3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할/
우리가 인내해야 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약속을 받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았다고 하지만 아직도 완전한 구원을 얻은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그 날에 온전히 이루게 되는데 그 때까지 인내로써 믿음을 굳건히 지켜야 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이 땅에서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인내하는 자만이 영원한 천국의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잠깐 동안의 핍박과 괴로움과 세상 재미 때문에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고 뒤로 물러가는 자는 결국 하나님의 보좌 앞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37절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라고 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고통 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외치기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합2:3)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이 정한 때가 있습니다.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더딜지라도 기다리십시오! 주님은 속히 이르시겠고, 반드시 응답은 오고야 말 것입니다.
인내 없이는 아무것도 받을 수 없습니다. 현대인들은 참을성이 없는 것이 그 약점입니다. 기다릴 줄을 모르고 조금만 괴로워도 짜증을 앱니다. 약간만 고통스럽고 힘들어도 참지 못하고 신경질을 냅니다. 쉽게 절망하고 쉽게 포기해 버립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굳게 붙드십시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인내하며, 넘어지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인내 없는 승리나 상급은 없습니다. 신앙은 인내입니다. 참으십시오, 견디십시오, 인내 뒤에 분명한 상급이 있습니다. /할/
4.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38)
믿음으로 사는 길 말고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얼마나 많이 했는가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믿음으로 살았는가?, 믿음으로 행했는가?'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하지 않은 모든 것이 죄이기 때문입니다(롬14:23).
고대 로마인은 권력을 믿고 살았습니다. 헬라인은 지식을 믿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은 하나님을 믿고 살았습니다. 지금 어떻게 되었습니까? 권력을 믿고 살던 로마인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지식을 믿고 자랑하고 살던 헬라인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자랑하고 살던 유대인들은 지금 세계에서 빛나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는 무엇을 믿고 사십니까? 무슨 힘으로 사십니까? 돈을 믿고 권력을 믿고 삽니까? 시인은 말합니다. 시46:1절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시146:5절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할/
5. 물러서면 안 됩니다.
38절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또 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뒤로 물러선다는 것은 신앙의 퇴보, 신앙의 침체 및 구원의 포기를 의미합니다.
눅9:62절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이것은 무슨 말씀입니까? 농부가 농사를 지으려고 기왕 쟁기를 잡았으면 씨를 뿌려야지, 이 생각 저 생각 딴 생각하다가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군인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총을 들었으면 끝까지 싸워야지, 전쟁이 났는데 싸우다 말고 가족이 보고 싶다고 탈영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의사가 수술을 하려고 칼을 들었으면 끝까지 수술을 해야지, 수술하다 말고 딴 일을 생각하면 어떻게 환자를 고치겠습니까? 학생이 공부하려고 연필을 들었으면 끝까지 공부를 해야지, 이 생각 저 생각 하다가 무슨 공부를 하겠습니까?
창19:26절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본 고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롯의 아내는 소돔과 고모라의 풍요했던 옛 생활을 잊지 못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뒤를 돌아보다가 그만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신앙의 모습을 배워야 합니다. 빌3:13-14절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특허를 1000종 이상 내서 '발명왕'이 된 '에디슨'은 "나는 과거는 모두 잊었다. 나는 미래만 보고 간다."고 했습니다.
▶신앙은 전진 그리고 또 전진입니다. 독일의 초대 수상 '비스마르크'는 "운명을 겁내는 사람은 운명에 먹히고 운명에 부딪히는 사람은 운명이 길을 비킨다."고 했습니다.
▶전진하기 위해서 우리는 '함께 일어나야' 합니다. 수1:2절에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라고 했습니다. 일어나야 전진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잠에서 깨어 일어나야 합니다. /할/
▶목적지를 바라보고 달려가야 합니다. 수1:2절 '하'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여기 '가라'는 말은 목적지를 향하여 가라는 뜻입니다. 가나안 땅을 향해 가라고 하십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 '어디로 가느냐?'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은 죄악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이 있고 절망으로 치닫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고' 달려가야 합니다. 그 곳에 하늘에 복이 있습니다. /믿/ ▶물러서면 어떻게 됩니까?
①하나님이 싫어하십니다. 신앙이 갈팡질팡하는 사람, 믿음이 기우뚱거리고, 변덕스런 사람은 목사가 보아도 기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없이 굳건히 믿음을 지켜 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목사가 보아도 기쁘고 감사합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심정은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보십니다. 그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서도 뒤로 물러서는 사람이 있습니다. 은혜를 체험하고는 뒤로 물러서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할 능력과 여건을 부여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게으름을 피우고 뒤로 물러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싫어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②침륜에 빠지게 됩니다. 여기 '침륜'이란 '재산이나 명예가 굴러 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즉 올라가지 못하고 내리막길을 치닫는 것을 침륜이라고 합니다. 또 '침륜에 빠진다.'는 말은 '지옥에 떨어진다.'는 말입니다. 뒤로 물러가면 죄악에 빠지고, 절망에 빠지고, 뒤로 물러가면 실패에 빠져 결국에 가서는 지옥에 빠져 버린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어느 여 집사님이 빙판 길을 가다가 넘어져서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꼼짝달싹도 못하게 되자 구급차가 왔습니다. 그런 그가 들것에 실려 나오면서도 찬송을 부르고 감사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병원에 누워 있으면서도 감사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만일 다리가 부러지지 않고 허리가 부러지거나 머리가 다쳐 뇌가 상했으면 얼마나 아찔한 일입니까? 그는 지금도 감사할 것이 너무 많다고 합니다. 다리가 부러졌어도 그는 감사하며 뒤로 물러서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신앙과 삶이 침륜에 빠지지 않고 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물러서면 손해입니다. 다 양보해도 신앙만은 절대 양보해서는 안 됩니다. 물러서면 침륜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의 기도 생활이 뒤로 물러가면 침륜에 빠집니다. 기도 생활이 올라가야 합니다. 헌금 생활도 올라가야 합니다. 봉사생활도 올라가야 합니다. 예배 생활도 올라가야 합니다. 축복 받고 천국 가는 길은 다른 길이 없습니다. 뒤로 물러서지 말고 전진만 해야 합니다. 계속 올라만 가면 축복의 문이 열립니다. 계속 올라가면 천국에 도착하게 됩니다.
오직 믿음은 전진 뿐 입니다. 전진 할 때 목표를 바라보고 가야합니다. 바울은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 즉 부르심에 상을 바라보며 달려가라'고 했습니다. ▶'노만 빈센필' 목사님은 '실패자처럼 생각하면 실패자가 된다. 자기 자신을 과소평가하지 말라. 크게 믿으라! 크게 기도하라! 크게 행동하라!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으라!'고 했습니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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