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석 위에 세운 교회! (마 16:13-20)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렀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예루살렘에서 120km떨어져 있는 팔레스틴 북단에 있는 지역으로 각양각색의 종교가 있었고 특별히 바알을 숭배하는 지역의 중심지로서 헬라의 신당들도 많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곳에는 로마의 황제 가이사를 신격화하기 위해 세워진 큰 대리석 신전이 있었습니다.
'가이사랴'란 '황제의 도시'라는 뜻으로, 이 지역을 다스리던 빌립은 가이사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그 이름을 가이사랴라고 지었을 뿐만 아니라 이 곳에 거대한 황제 숭배의 신전을 세웠던 것입니다. 이처럼 가이사랴 빌립보는 종교적인 도시였습니다. 또 이 지방은 레바론 산기슭 요단강의 발원지 근방에 위치하고 있는 자연환경이 아름다운 전원도시입니다.
이 무렵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불과 한달 정도 남겨 놓고 있는 시기였습니다. 주님은 공생애의 대부분을 갈릴리 지방에서 복음사역을 감당하셨는데 이제 갈릴리 지방 전도사역을 마감하고 공생애를 정리하는 그런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이런 때에 예수님은 제자들의 의중을 떠 본 일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이사랴 빌립보는 '바알 예배의 중심지요. 그리스의 신 팬(Pan)의 사당이 있는 곳이고 대 헤롯이 아구스도를 위하여 지은 성전이 있는 우상 숭배와 귀신 숭배의 중심지'입니다. 이런 잡신을 많이 섬기는 그런 지역에 가셔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주님은 당신이 누구이신 가에 대한 심각한 질문을 던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위대한 신앙의 고백을 들으신 것입니다.
우상의 도시 가이사라 빌립보와 같이 이 땅에 온갖 우상과 헛된 것들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이 악한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주님은 동일한 질문을 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여러분, 이 질문에 우리가 고백하여할 신앙고백은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이들입니다> /할/ ◀제목소개!▶
1. 세상을 향한 주님의 질문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입니다(13).
이 질문 이후부터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이것이 주님의 던지신 질문의 요점입니다.
여기 인자란 말은 '사람의 아들'이란 뜻으로, 학자들 가운데 인자를 설명할 때 '예수님의 인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단7:13절에 보면 '인자'라는 말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쉽게 표현하면 "요즘 항간에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질문입니다. '인자'라는 말은 예수님의 메시야의 칭호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제자들이나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인자라고 부르지 않고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부를 때 인자라는 용어를 사용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런 질문을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예수님을 놓고 의견들이 분분했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야가 아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야가 아니다." 주로 일반 서민 대중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있었고, 종교지도자들이나 정치지도자들은 반대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때에 "너희들이 간파한 세상 분위기는 어떤 것이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신앙은 참된 고백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롬10:10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우리의 구원은 고백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나는 이 사실을 믿습니다." 바로 이 고백 위에 교회가 세워지고, 구원이 시작되고 믿음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믿/
2. 예수님의 질문의 첫 번째 대답은 무엇인가?(14)
저마다 한마디씩 했습니다.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 어떤 이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했습니다.
⑴예수님을 세례 요한으로 보았습니다. 헤롯왕이 그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메시지 속에서 광야에서 외치던 세례요한의 메시지가 들리기 때문에 세례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니가? 하고 예수를 두려워했습니다. 세례요한은 의를 외치다가 목 베임을 당하고 순교했던 정의의 사도입니다.
⑵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 엘리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옛날 갈멜산 꼭대기에서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했습니다. 바알 선지자들이 하루 종일 몸에 상처를 내며 소리 지르고 하늘에서 불이 내리기를 기도했지만 불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조용히 하나님께 기도하였을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재단을 태웠습니다.
또한 삼 년 반 동안 이스라엘에 가뭄이 닥쳐 모든 사람이 죽게 되었을 때, 엘리야는 갈멜산 꼭대기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자, 삼 년 반 동안 내리지 않던 비가 쏟아졌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니, 엘리야가 아닌가 하고 두려워했습니다. 엘리야는 불의 선지자로써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선지자입니다.
⑶또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예레미야로 보았습니다. 예레미야는 시드기야 왕 때 이스라엘의 선지자로써 죄악으로 인하여 무너져 내릴 예루살렘의 성을 바라보면서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눈물 뿌려 기도한 선지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모습에서 예레미야의 탄식과 눈물,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민족을 향한 애정을 보았습니다. 눅19:41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이 죄악으로 무너질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며 우셨다고 했습니다.
유대인의 전승과 외경에 해당하는 마카비서에 따르면 메시아가 오기 전 예레미야가 먼저 와서 그 길을 준비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⑷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한 것은 모세와 같이, 이사야나 엘리야와 같이 다시 왔으면 하고 기다리던 선지자 중의 하나라는 뜻입니다.
여기 열거된 선지자들은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들로써 또 다시 이 세상에 오리라고 기대했던 자들입니다.
3. 제자들을 향한 두 번째 질문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입니다(15).
주님은 제자들의 대답에 만족하지 않으시고 다시 질문을 하십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오늘 예수께서 이 질문을 우리들에게도 똑 같이 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로 생각하고 여기 와서 예배를 드리고 있느냐?" 질문하고 계십니다. 또 "사람들은 예수를 사대성인 가운데 하나로 혹은 위대한 스승으로 본다는데 너희들은 나를 누구로 생각하고 여기 나와 예배를 드리느냐?"는 질문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 속에는 '신앙생활은 바른 신앙의 고백을 내 입으로 해야 한다'는 깊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이해가 됩니까?/
예수님은 처음에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의도는 거기에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세상 사람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있었습니다.
우리 입술에서 나오는 고백, 우리 심장에서 나오는 고백, 그 고백을 듣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고백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고백을 들어야 하듯이, 내가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고백을 나의 입술로 하시기 바랍니다. /할/
4. 베드로의 위대한 신앙의 고백은 무엇인가?(16)
이때 베드로가 대답한 말이 바로 그 유명한 신앙고백이 된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고백을 통하여 교회가 탄생되었고, 신앙이 신학의 보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해석을 놓고 개신교와 카톨릭간에 해석상 큰 차이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카톨릭은 주님이 베드로의 인격 위에 교회를 세웠다고 믿어 베드로를 교회의 기초요, 그의 후계자인 역대 교황을 교회의 주권자라는 체제를 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개신교는 이 반석을 베드로의 인격에 보지 않고 그가 고백한 신앙 고백으로 보고 그 고백 위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향해 "당신은 그리스도시오"라고 고백하자 주님은 "너는 베드로라"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이 반석 위에는 베드로의 인물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신앙 고백을 뜻하는 것으로 곧 믿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으며 구주이심을 믿고 고백하는 신앙 위에서 세워져야 합니다. 이러한 신앙의 고백이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 고백은 교회의 기초요, 교회 설립의 선언이요, 허락인 것입니다. 우리 성림 교회도 이 신앙 고백의 터 위에 굳게 세워져야 합니다. /믿/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렇게 고백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요17:3절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고백 속에는 몇 가지의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⑴주는: 이 말은 원문에는 없다고 합니다. 당신은 "나의 주인이십니다. 나의 왕이십니다. 나의 창조주이십니다. 나의 전부이십니다. 내 인생의 소망이십니다. 나는 영원토록 그분만을 섬기며, 경배하며 찬양하겠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만주의 주가 되십니다. 보이는 것의 주인이실 뿐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의 주인이기도 합니다. 그는 산 자의 주인이실 뿐만이 아니라 죽은 자를 주관하시는 주인이기도 합니다. 우주의 주인이실 뿐만이 아니라 나의 주인이기도 합니다. 예수를 나의 주인으로 고백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그런데 베드로가 이 고백을 드린 것은 생명을 걸고 드린 고백입니다. 당시 로마의 주는 가이사 즉 시저 황제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국으로 있을 때, 로마정부는 시저를 주로 섬겼고, 모든 식민지 백성에게 시저를 주님으로 섬기라고 강요했습니다.
그런 시대적인 상황에서 베드로의 이 고백은 황제를 주로 섬기는 로마정권에 대한 일종의 도전장이요, 선전포고나 다름이 없습니다. 결국 베드로는 그 이유 때문에 순교까지 하게 됩니다. ▶주라는 말은 세 가지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존경의 뜻입니다. 선생이라는 뜻입니다. 랍비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주가 여기 계신다. 선생이 여기 계신다. 모두 존경의 뜻입니다.
둘째, 우리 생명이요, 재산의 주인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인을 부를 때, 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노예가 주인을 부를 때 쓰는 호칭입니다.
셋째, 주라는 말은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에 주를 '아도나이' 하나님을 주로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즉 "당신만이 그리스도가 되시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십니다."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⑵그리스도시오: 구약 성경에서 계속 예언해 내려오는 메시야에 초점을 맞춘 말씀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선지자, 제사장, 왕에게 기름을 부어 세웠습니다. 선지자, 제사장, 왕은 모두 하나님과 인간의 중보자 역할을 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대리자로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에게 선포하였고, 제사장은 인간의 대리자로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 왕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 인간을 다스리던 자이기에 기름부음으로 권한을 부여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완전한 선지자요, 제사장이요 왕이십니다. 이 신앙 고백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이 신앙고백이 아닌 다른 기초 위에 세워진 교회는 완전한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고백한 '주는 그리스도시오'는 '예수님이 메시야 임을 나는 믿는다'는 고백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참 구세주란 뜻'입니다. 남이야 믿거나 말거나 나는 당신을 메시야로 믿습니다. 신앙은 바른 고백이 중요합니다. '마음에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릅니다' /믿/
⑶살아 계신 하나님: 그렇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죽은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도 역사하시고 지금도 창조하시고 지금도 섭리하시는 영원토록 동일하신 그분이십니다. 히11:6절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⑷하나님의 아들: '보이지 않던 하나님'이 '보이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빌립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하시고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요14:9-10)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사람, 그리고 갈릴리 나사렛에서 목수로 일하는 요셉의 아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사람의 아들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 사람의 아들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 됨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와 함께 거닐고 이야기를 나누고 음식을 먹고 있지만 이 분이야 말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베드로와 함께 예수님을 3년이나 따라다니던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지 못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마8:29절을 보면 귀신 들린 사람이 소리 지르며 하는 말이 "이에 저희가 소리 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그러니까 귀신들린 사람도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고 있었는데 베드로를 제외한 다른 제자들은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못했습니다.
믿지 못하면 고백이 나오지 못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확신이 있기에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됨을 믿으십니까? /할/아멘!/
베드로의 이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고백하는 말씀이요, 살아 계시다는 말씀은 현재진행형입니다. 하나님은 과거의 하나님이 아니요, 현재에 살아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입니다." /믿/
5.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주님의 축복은 무엇인가?(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한마디로 예수님은 무척 놀랐습니다. 왜 놀랐습니까? 베드로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상상도 할 수 없는 고백을 들으시고 너무 기쁜 나머지 '바요나 시몬'이라고 베드로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바'라는 말은 '아들'이라는 뜻으로, "요나의 아들 시몬" 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이 고백을 듣기 전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에게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이기를 청하자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다고 하셨는데, 이 요나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이 말은 '하늘의 비밀을 아는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얼마나 복된 이름입니까? 참된 신앙의 고백에서 참된 축복이 나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 주님의 입술에서 "네가 복 되도다" 즉, 네 심령에 복이 있다고 축복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참된 신앙고백이란 혈육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이 임하므로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인간의 지식이나 지혜가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학벌이나 가문이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 아니며 교회에 출석한다고 알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의 감화로 하나님의 그 특별한 선택과 은총을 통하여 이 고백을 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바른 신앙을 고백하려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해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영의 눈이 활짝 열려지는 것입니다. /할/아멘!/
6. 베드로의 고백 위에 교회가 세워집니다(18).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아까도 잠시 말씀드렸지만 본문은 아직까지도 개신교와 카톨릭간의 논란의 대상입니다. 카톨릭은 베드로의 인격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초대교황으로 보고 그 뒤를 지금의 교황들이 이어갑니다. 그러나 개신교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 위에, 바른 믿음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해석합니다.
▶주님은 바른 신앙을 고백한 자에게 이름을 바뀌어 주십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었고 야곱이 이스라엘이 된 것처럼 본문에 시몬(갈대)이 베드로(반석)이 되는 복입니다. 갈대는 약함의 상징인데 반석은 강함의 상징입니다.
성경에 이름만 보아도 그 사람의 신앙의 모습이 나옵니다. 성경에 보면 '야' '엘' 자가 들어간 이름이 많습니다. 사무엘, 엘리야, 느헤미야, 이사야, 예레미야 등 우리가 아는 이름도 참 많습니다. 여기에서 '야'는 여호와라는 뜻이고 '엘'은 히브리말에서 하나님을 뜻하는 '엘로힘'의 약자입니다. 그래서 이 '야, 엘' 등이 들어간 이름은 '하나님의 뜻을 잘 따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라고 지어준 것'입니다.
반대로 이름에 '바알'이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기드온의 다른 이름도 '여룹바알'이고 악명 높은 아합 왕의 장인도 시돈 왕 '엣바알'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바알이 하나님이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름에 바알이 들어간 사람은 하나님 아닌 바알에게, 우상에게 영광을 돌리는 사람입니다.
①본문은 크게 두 가지의 뜻이 있습니다.
⑴교회는 주님이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십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으십니다. 그리고 봉사하게 하고 복을 주십니다. 교회는 늘 말합니다. 건물이 아닙니다. 건물은 예배당이요, 교회당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란 (에클레시아) 거룩하게 구별되어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회중이요, 믿음의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⑵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여기 음부 '하데스'는 구약에서 '스올'인데 쉽게 말씀드리면 죽은 자들이 있는 곳, 죽음의 세력을 의미합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믿음의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는 이 세상의 어떤 권세도 이기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지옥의 권세, 사탄의 권세, 죽음의 권세도 교회를 이기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마귀는 때로 죽음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교회를 위협하고 공격하지만 죽음의 위협도 교회를 이기지 못합니다.
죽음의 위협이 주기철목사나 한국교회를 무너트리지 못했습니다. 일본 나라가 한국교회를 무너트리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한국 교회를 무너트리지 못했습니다. 유대의 산헤드린 공회와 로마 정부가 예루살렘 교회와 소아시아 교회와 마게도냐 교회를 무너트리려고 온갖 박해를 가하며 스데반과 야고보와 베드로와 바울과 폴리갑을 잡아서 죽였지만 초대교회를 무너트리지 못했습니다.
반대로 이 세상의 권력은 오래 가지 못하고 무너지고 맙니다. 이 세상의 권력은 보기에는 강해 보이지만 오래 가지 못하고 무너지고 맙니다. 그토록 막강했던 박정희 정권도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돈이 많고 권력이 많아서 무너지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사실 세상 적인 힘은 없습니다. 교회는 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무너지지 않고 오늘까지 건재합니다. 교회의 주인이 예수님이시고 교회의 기초와 재료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믿/
②"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신약 성경에만도 교회란 말씀이 111번이 나옵니다. 여기서 교회 론이 출발됩니다.
여기 반석은 믿음을 고백한 베드로는 가리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모든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돈보다도 믿음이고 지식보다도 믿음이고 권력보다도 믿음입니다. /할/
교회란 말은 헬라어로 '엑클레시아'로 '하나님이 불러낸다.'는 뜻이며, 죽음의 자리로부터 영생의 자리로 불러 주셨고, 죄악의 자리로부터 의로운 자리로 불러 주셨고, 저주와 형벌의 자리로부터 축복과 상급의 자리로 불러 주셨고, 질병과 가난의 자리로부터 건강과 부유함의 자리로 불러 주신 것입니다.
⑴교회의 정의가 무엇입니까? 교회는 예배당 건물이 아니고 회중의 모임입니다. 천국의 시민 된 저와 여러분이 모인 예수님의 지체들입니다.
⑵교회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교회의 주인은 목사도 아니고, 성도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그분이 교회의 주인이 되십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라도 교회를 자기 것으로 알고 주인 행세를 하다가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죄를 지는 것입니다.
⑶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봉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봉사를 하든지, 성가대가 찬양을 하든지, 교사가 학생들을 가르치든지, 헌금을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봉사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 우면 그 봉사는 안한 것보다도 못합니다.
③교회의 사명에 대하여 몇 가지만 알아봅시다!
⑴예배입니다. 교회는 예배하는 공동체입니다.
행2:46절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왜요?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최우선적인 사명은 예배에 있습니다. 예배보다 더 우선적인 교회의 사명은 없습니다. 예배야말로 하나님을 향한 성도의 최고의 행위입니다. 예배야말로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최고의 표현이고 행동입니다.
⑵'케리그마' 즉 선교(전도)의 사명입니다. 주님이 가장 기쁘게 여기시는 것이 생명구원입니다.
⑶교육입니다. 교육은 영성훈련으로, 제자훈련으로 이어집니다. 잘 훈련된 예수의 제자들, 십자가의 군병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⑷'코이노니아' 즉 사랑과 친교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⑸'디아코니아' 즉 봉사의 사명입니다. 우리 모두는 봉사자들입니다.
④교회는 3대 의식이 분명해야 합니다.
⑴생명의 말씀선포입니다. 구약과 신약의 66권의 말씀입니다. ⑵성례전을 정규적으로 행해야 합니다. 성례에는 성찬예식과 세례예식 두 가지가 있는데 먼저 성찬예식은 주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것이요 세례예식은 예수를 구주로 믿고 자기 자신이 죄인인 것을 고백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자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⑶권징을 바로 행해야 합니다. 신앙규범을 어긴 자에게와 계명을 범한 자에게 성결과 회개를 위하고 신앙의 성장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한국교회는 권징이 사라지고 없습니다.
⑤교회가 왜 중요한가?
⑴교회는 천국 열쇠를 받는 곳입니다(16). 이 열쇠가 있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고, 축복의 문도 열 수가 있습니다.
⑵교회는 축복의 전당입니다(시84:4-5).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5절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⑶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곳은 교회뿐입니다. 정부청사에도 서울대학교에도 하나님이 임재하시거나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학개1:8절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학개2:7절 "내가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케 하리라"했고, 2:9절에도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곳입니다.
⑷교회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요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느니라."
⑸교회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입니다(마21:13).
⑥교회는 예배를 통해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큰 역할을 합니다.
⑴교회는 사랑의 보금자리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사랑을 주는 자가 됩니다.
⑵영적인 목욕탕의 역할을 합니다. 교회를 통해서 죄 씻음을 받습니다. 요1서1:7절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 /할/
⑶영적인 잔치를 배설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영적인 음식을 먹고 에너지를 공급을 받습니다.
⑷영적인 병원의 역할을 합니다. 교회를 통해서 병 고침 받고 건강을 얻습니다.
⑸영적인 휴식처입니다. 마11:28절이 임하게 됩니다.
⑹영적인 학교의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런데 석차가 나옵니다. ▶예수님 자랑, 십자가 자랑이 아니라 자기 자랑을 잘하는 성도는 낙제생입니다. ▶자기 잘못을 모르는 성도는 열등생입니다(문제생). ▶자기 잘못을 아는 성도는 보통생입니다. ▶자기 잘못을 고치는 성도는 우등생입니다. ▶자기 잘 한 것을 기억치 않는 성도 특등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⑺교회는 미장원과 같은 곳입니다. 미장원은 여자들이 얼굴을 칠면조같이 예쁘게 화장하고 머리를 공작새같이 멋있게 꾸미고 피부를 양털같이 부드럽고 아름답게 미용하는 곳입니다.
영적 의미로 우리 성도들은 모두다 예수님의 신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영적 신랑입니다. 무엇으로 신부단장을 해야 합니까? 딤전2:9절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말고 오직 선행으로 단정하라" 엡5:9절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할/
⑻교회는 용광로와 같고 대장간과 같습니다. 용광로는 2-3천도의 고열로 쇠붙이 같은 광물을 녹여 불순물을 제거하고 순도 높은 결정체를 얻고자 하는 가마솥을 말합니다. 가령 24금, 18금 할 때 금이 용광로 속에 24회, 18회 들어갔다 나온 것을 말합니다.
교회도 어느 의미에서는 용광로와 같고 대장간과 같습니다. 용광로에서는 녹이고 대장간에서는 두들겨 때려서 주인이 원하는 물건을 뽑아내듯이 교회도 세상 잡동사니, 골동품 같은 죄인들을 성령의 불꽃 속에 넣어 녹이고 말씀의 방망이로 때려서 하나님이 쓰시고자 하는 인물(그릇)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벧전1:7절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⑦교회는 성도들이 모일 때마다 몇 가지 사건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⑴하나님의 말씀으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은혜 받기 위해서는 그 은혜를 사모함이 있어야 합니다. /믿/ 벧전2:2절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입니다. 교회의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신령한 젖은 순수한 말씀의 젖입니다. 그 신령한 말씀의 젖으로 성도들을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⑵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몇 가지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십자가의 용서를 맛보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 죄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구나! 주님의 보혈로 죄 씻음 받은 우리가 새사람이 되었구나! 용서의 기쁨을 맛보는 것,
여러분 우리 모두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이제 용서받은 죄인은 주님의 뜻대로 달려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 길이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이 쭉쭉 올라가고, 뻗어 가면 좋겠지만 뚝하면 시험에 들고, 죄에 빠지고, 불평하고 원망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시험에 들고, 원망하고, 남을 헐뜯고 교회를 비방하다가 낭패 보는 것은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전혀 원망하지 마시고, 헐뜯지 마시고, 모함하지 마시고, 시험에 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봐야 여러분들이 되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거룩한 도성,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신 것은 연약해서 넘어지는 자들을 다시 하나님께로 회개하기만 하면, 용서의 은혜를 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믿/
오늘 우리가 잘못된 것을 회개하는 시간을 가지십시다. 빗나갔던 내 신앙의 모습을 바로 세우십시다. 열심을 놓쳤다면 다시 열심을 찾으십시다. 누구를 원망하고 미워했다고 하면 우리 모두 오늘 이 시간 용서하고 풀어버립시다. 그래야 복을 받습니다.
베드로가 고백한 그리스도는 참 구세주라는 고백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건지다'는 뜻이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불의 함에도 불구하고 내 죄에서, 내 병에서, 내 고난에서, 내 문제에서, 내 가난에서, 내 죽음에서, 나를 건져 줄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자를 건져낼까요? 오늘 이 자리가 은혜 받은 자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의 은혜, 찬송의 은혜, 기도하면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은혜를 받아야 감사하고, 은혜를 받아야 회개하고, 은혜를 받아야 힘을 얻어 헌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나 은혜를 줍니까? 아닙니다. 사모하는 자에게 주십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갈급히 찾듯이 신령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함으로 채워주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멘!/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평안을 맛보시기 바랍니다. 행여나 여러분 속에 두려움이 있고, 근심 걱정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십시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자는 자신의 연약함을 아는 자입니다. 맡길 때 평안이 오고, 맡길 때 역사가 일어납니다. 시인은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단 잠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단 잠을 잘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 자만이 단 잠을 잘 수 있습니다. /할/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분신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이 땅위에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를 일으키는 예수 그리스도의 분신들입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의 흔적을 가진 잡니다. 예수님의 흔적을 가진 자를 잘못 건드리다가는 큰 일 납니다. 성도를 괴롭히고, 주의 종을 괴롭히고,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고, 훼방하는 환난을 준 인물 치고 잘된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히틀러가 망한 역사적인 배경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교회에 손을 댄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시고, 협력하시고 헌신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놀랍게도 축복해 주십니다. /아멘!/
7. 교회는 천국 열쇠를 받는 곳입니다(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천주교는 이 말씀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천국 열쇠를 가지고 있었고, 그 열쇠를 다시 교황에게 주었기 때문에 교황은 천국 문을 열쇠로 열 수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계1:18절에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진 이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고, 계3:7-8절에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주신 말씀으로 하늘의 문이 열리고 이웃을 향한 전도의 문이 열린 교회가 축복된 교회입니다. 교회는 '열린 문'의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사람이 닫을 수 없는 문, 환경이 닫을 수 없는 문, 세상의 권세가 닫을 수 없는 문, 구원의 문이 열려야 합니다. ▶전도할 때 전도의 문(골4:3), 복음의 문(고후2:12)이 열려야 하고, ▶기도할 때 응답의 문이 열려야 하고(마7:7-8), ▶인생을 살아갈 때 축복의 문, 하늘의 문(창28:17)이 열려야 합니다. /할/
●요즈음에 '사'자 붙은 남자에게 시집을 가면 3개의 열쇠는 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아파트 열쇠와 자동차 열쇠와 금고 열쇠'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것들보다 더 좋은 열쇠가 있는데 바로 하나님이 주신 천국 열쇠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열쇠는 천국 열쇠입니다. 다른 열쇠를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천국열쇠를 가지지 못 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눅12장에 나오는 한 부자도, 눅16장에 나오는 큰 부자도 이 열쇠가 없어서 지옥으로 떨어졌습니다. 천국 열쇠는 <주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열쇠입니다.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습니다.
▶성경에는 중요한 열쇠 세 가지가 있습니다.
⑴천국에 들어가는 열쇠인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신앙을 고백할 때, 그 믿음이 열쇠가 되어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⑵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인 '기도'입니다. 기도는 지금도 역사를 일으킵니다. 기도는 지금도 응답됩니다. 마7:7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⑶물질 축복의 문을 여는 열쇠인 '십일조'입니다. 말3:10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성경에는 '십'자로 시작하는 정신이 세 가지 나옵니다. '십계명 정신', '십일조 정신', '십자가 정신'이 그것입니다. ▶'십계명 정신'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받은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십일조 정신'은 하나님께서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정신입니다. ▶'십자가 정신'은 인류의 죄를 청산하시려고 갈보리언덕 십자가위에서 피 흘려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신 우리의 생명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정신입니다.
▶미국에서 가장 큰 치약회사는 콜게이터입니다. 콜게이터는 영국에서 태어났습니다. 가난 속에서 미국가면 잘 산다는 이야기를 듣고 몰래 배 골방에 숨어 있다가 배가 고파서 할 수 없이 나왔는데 선원에게 붙잡혔습니다. 물 속에 쳐 넣으려고 하는 것을 선장이 붙들고 물었습니다. 사정이야기를 듣고 난 선장은 말했습니다.
"콜게이터야! 내가 너를 뉴욕으로 데려다가 줄 터이니 하나님을 잘 섬기고 꼭 복을 받아라. 복 받는 비결은 주일을 잘 지키고 십일조를 온전하게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다" 이 말은 어머니의 말과 같았기에 콜게이터의 마음에 비수처럼 꽂혔습니다.
그는 처음에 비누 회사에 취직하여 비누 만드는 법을 익혔습니다. 그는 비누 회사를 조그맣게 만들었습니다. 성실하였습니다. 다른 회사는 양을 조금씩은 속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속이지 않았습니다. 십일조 장부를 만들었습니다. 잘 되었습니다. 치약도 만들었습니다. 칫솔도 만들었습니다. 그는 십의 오조를 바쳤습니다. 그리고도 수입이 너무 많아서 10의 9조를 바치고도 더 수입이 많았습니다. 돈을 주최할 수 없이 많이 모아 하나님의 선교사업을 하였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큰 치약 회사가 되었습니다. 십일조는 축복을 여는 열쇠입니다.
오늘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주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복음 진리를 베드로가 전파해서 많은 사람들을 천국으로 인도하게 된 것에 대한 허락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 안에서 세워진 교회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새로운 기적이,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아무 힘이 없는 것같이 보이지만 교회가 기도할 때, 성도가 기도할 때, 놀라운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 하나님의 도성인 교회에서 언제나 시대의 사람들이 잃어버린 하나님의 비밀을 찾는 곳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의 신앙관을 보십시다. 그는 말하기를 "나에게는 남북 전쟁의 전쟁터보다도 대통령의 집무실보다도 기도하는 교회가 더 중요합니다."
이 천국 열쇠는 기도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다 주십니다. 이 열쇠는 우리의 건강을 지킵니다. 사업도 가정도 지킵니다. 내일의 찬란한 소망의 보고를 이 열쇠는 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천국 열쇠는 베드로에게만 준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 준 것입니다. 다만 이 열쇠로 여는 방법은 얼마나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느냐?'입니다. 기도하십시오, 기도하면 열립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십니다. 할/
결론은 바른 신앙의 고백 위에 세워진 신앙이 반석 위에 세우진 교회가 됩니다. 우리 성림 교회는 바른 신앙의 고백 위에 하나님의 교회를 건설합시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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