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소망'속에 사는 나그네! (벧전 1:1-9)
옛날에 한 아주머니가 달걀을 가득하게 담은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장으로 팔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이 아주머니는 장에 가는 길에 즐거운 상상을 하면서 갑니다.
<이 달걀을 팔아서 조그만 새끼 돼지를 사야지. 새끼 돼지를 정성껏 길러서 그 돼지가 또 돼지를 낳고 그 새끼들이 커서 또 새끼를 낳고 그러면 그 돼지들을 장에 내다 팔아 작은 암 송아지를 한 마리 사야지. 그 송아지가 커서 암소가 되면 다시 송아지를 낳고, 그 송아지가 크면 또 송아지를 낳고, 그러다 수십 마리의 소가 생기면 소들을 내다 팔아 이번에는 논과 밭을 사야지. 그리고는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서는 자꾸자꾸 땅을 늘리고 고대광실 높은 기와집을 짓고 남부럽지 않게 떵떵거리고 살아야지>
이런 즐거운 상상을 하면서 가다가 그만 돌에 걸려 넘어져 이고 있던 달걀 바구니를 땅에 떨어뜨려 몽땅 깨지고 말았답니다. 아주머니의 부푼 꿈도 일장춘몽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꿈은 안됩니다. 영원한 산 소망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신학자 '에밀 브루너'는 "허파에는 산소가 필요하듯이 삶의 의미에는 소망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숨을 쉬지 않으면 살 수 없듯이 소망이 있어야 살수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은 빵이 아닌 소망을 먹고사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의 주제는 '소망과 인내'입니다. 그 당시 고난과 핍박 가운데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용기를 주고, 위로를 주고, 소망을 주기 위해서 본 서신이 기록되었습니다.
서신을 기록하면서 저자는 문안 인사에 이어서 바로 송영 부분인 "찬송하리로다"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처한 당시의 상황은 찬송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극심한 핍박으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이 고난 당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고난 가운데서도 찬송하게 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산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산 소망이라고 한 것을 보면 이 땅에는 죽은 소망도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제목소개!▶
지금 우리는 신앙생활하기에 가장 어려운 때에 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한국의 기독교가 영적인 큰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고난 때문이 아니고, 등 따습고 배가 불러서 신앙의 안일함이 온 것입니다. 이런 때 우리들의 신앙 내용을 한번 확인도 해보고 우리들의 신앙 모습이 지금 얼마만큼 생동감이 있는가를 확인해 보기 위해 본문을 통해서 우리들의 신앙을 무장해 보려고 합니다.
특히 베드로서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박해를 많이 받을 때 쓰여진 책입니다. 이 책은 기원 60년을 전후해서 네로 황제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많은 박해를 받을 때에 쓰여진 책입니다.
▶AD 64년에 로마 시내에 큰불이 일어났습니다. 이 불은 3일 동안 계속되었고, 로마시민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문화재와 신전들과 가옥들을 모조리 불태워버렸습니다. 네로는 로마시를 새롭게 재건축할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먼발치에서 불타는 로마시를 바라보며 좋아할 만큼 정신건강이 심히 의심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로마시의 대화재가 네로의 소행이라는 소문이 번져갔습니다. 궁지에 몰린 네로는, 화재의 책임을 누구에게 돌릴까 궁리하던 차에 그리스도인들에게 뒤집어 씌웠습니다. 공교롭게도 기독교는 '성령의 불'을 강조했고, '언젠가 이 세계가 불 가운데 소멸될 것'이라고 주장한 것에 핍박의 이유를 달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서를 보면 박해받는 성도들을 격려하는 내용들이 많습니다. ▶그때 그리스도인들이 로마로부터 박해와 핍박을 받게 된 데는 몇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①반국가 단체로 오인을 받았습니다.
당시는 로마 황제를 섬기는 일이 절정에 달했을 때, 로마 시민이나 이방인들 모두 로마 황제를 신으로 섬겼습니다. 그런데도 아무도 항거하거나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유독 그리스도인들만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인간을 숭배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끝까지 반대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이 반국가 단체로 오해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로마로부터 극심한 핍박과 박해를 받았던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기독교는 세상에서 박해받을 운명을 타고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으로 잡혀 같을 때 왕을 숭배하지 않는다고 해서 박해를 받다가 마침내는 사자 굴에 던짐을 받았습니다.
초대교회의 교부 '폴리갑'은 황제 숭배를 거부하다가 화형에 처해져 죽었습니다. 일제시대 때 신사 참배를 거부하다가 많은 기독교인들이 극심한 박해를 받았고 아직도 북한은 김일성을 섬기지 않으면 수난을 당하고 고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일반인들 같으면 하등의 문제가 없습니다. 고개만 한 번 숙이면 그만입니다. 일반인들은 신앙이 없으니까 별로 문제될 것이 없고 아무 거리낌없이 고개만 숙이면 넘어갈 수 있어 얼마든지 핍박을 피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그럴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적당히 살아갈 수가 없는 사람들이고 아무 데나 가서 고개를 숙이고 경배하고 그럴 수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이 세상으로부터 핍박받고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습니다.
로마 시대에도 그리스도인들이 황제 숭배를 순종했더라면 그런 박해는 없었을 것입니다. 또 일제 시대에도 신사 참배를 적당히 순종했더라면 그런 고난은 받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기독교가 이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고 고난을 당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②비도덕적인 집단으로 오해를 받았습니다.
로마로부터 박해를 받고 핍박을 받게 되니까 그리스도인들이 피신을 했는데 동굴 속으로 들어가 숨었습니다. 이 동굴이 오늘 우리들이 알고 있는 '카타콤'이라는 지하 무덤입니다.
우리나라는 무덤이 매장 형태로 되어 있지만, 당시의 무덤은 동굴이었습니다. 예수님도 동굴 속에 묻혔습니다. 동굴에 넣고 돌로 문을 막습니다. 다급해진 그리스도인들이 지하 동굴로 피신해 들어갔습니다.
그 속에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야 했고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긴장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동굴 속에서 매일같이 성찬식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매일같이 예수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떡을 나누고 포도주를 나눔으로써 신앙을 고백하고 형제애를 다졌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여기서 주어지는 힘을 가지고 그 어려운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밖에서 이상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는데 그리스도인들이 동굴과 밀실 속에서 사람을 잡아서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로마 정부에 고분고분하지 않는다고 미운 털이 박혔는데 그런 소문이 나돌게 되니까 정부가 얼마나 합법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히고 핍박했겠습니까? 소문은 꼬리를 물고 퍼져서 그리스도인들은 속수무책으로 오해를 받고 박해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로마 시대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박해를 받으며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신앙은 참 묘한 데가 있습니다. 신앙은 그렇게 박해를 받고 핍박을 받으면 사라지고 약화되는 것이 아니라 더 강해지고 의지가 더 굳어져 가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상 기독교가 가장 극심하게 핍박을 받은 때가 네로 황제 때인데, 기독교 신앙이 가장 강렬하게 전파되고 더 넓게 파고 들어가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위력이고 능력이고 힘입니다.
③인사법 때문에도 오해를 받았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인사법으로 입맞추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벧전5:14절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피차 문안하라"는 말이 나옵니다.
오늘날 서구인들이 서로 만나면 포옹하고 입을 맞추며 인사를 나눕니다. 이것이 원래 그리스도인들의 인사법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나라는 양반 문화를 지켜 오다 보니 멀리 떨어져서 서로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끝내는데 정말 반가운 사람이라면 그것만으로는 좀 아쉽고 부족하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당시 사람들이 그렇게 입을 맞추며 인사를 하게 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박해를 피해서 지하 밀실에 살았습니다. 이들은 모두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모두 같은 운명입니다.
그러니 함께 도피해 그 날 그 날을 살아가는 사람들끼리 얼마나 형제애가 두렵고 돈독한 관계를 이루며 살았겠습니까? 그래서 만나면 서로 얼싸안고 포옹하고 입맞추며 서로를 격려하고 반가움을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입맞추는 인사법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랬더니 밖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동굴 속에서 음란한 짓을 하고 난륜 행위를 한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당시 이방 종교에서는 그런 음란 행위가 실제로 있었는데 그들 신에게 제사 의식이 끝나면 그곳에서 음란 행위가 벌어졌습니다. 당시 이방 종교의 여 사제는 실제로 창부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세상으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었는데 그리스도인들이 동굴 속에서 입을 맞춘다는 소문이 퍼짐으로써 밖에서는 그것이 음란 행위로 오해를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로마 정부가 기독교를 박해하기에 얼마나 좋은 구실로 삼았겠습니까? 그래서 마음놓고 잡아다가 죽이고 맹수들에게 밥으로 던져주고 그랬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기독교인들이 지하 동굴을 더 깊이 파고 들어가서 숨었고 더 넓게 파고 들어가서 그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카타콤'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카타콤이라는 말은 '지하 무덤'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생활은 참 처절했습니다.
그때 사도였던 베드로가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많은 박해를 받고 있었고 죽음을 당하고 있었고 수난을 당하고 있었고, 앞으로 언제까지 이런 박해가 계속될지 알 수도 없고, 또 핍박 때문에 낙오되고 떨어져 나가는 사람도 있고 해서 그냥 모른 체하고 앉아만 있을 수가 없어 붓을 들어 글을 쓰게 된 것이 바로 베드로전서입니다.
1. 성경은 인생들을 흩어진 나그네라고 합니다(1),
여기에 기록된 "본도와 갈라디아와 갑바도기아와 아시아와 비두니아"는 소아시아 지역을 가리킵니다. 베드로는 이 편지를 소아시아 지역에 흩어져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것은 그들을 가리켜서, '성도'라든지, '형제'라든지, '교회'라든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지 않고, '나그네'로 부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글을 받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흩어진 나그네들"입니다. 이들이 디아스포라, 즉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원래 이 '나그네(디아스포라: diaspora)'라는 말은, 자의로 혹은 타의로 고국을 등지고, 여기저기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①흩어진 나그네의 유래
디아스포라는 아주 장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솔로몬 이후 남북 분열왕국 시대에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므로(B.C.722년) 그들의 포로로 끌려가면서부터 시작하여 남쪽 유다 왕국 역시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B.C. 586년) 포로로 끌려가 디아스포라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바벨론에서 귀환한 이후에도 그들은 계속해서 애굽, 소아시아, 아르메니아, 그리스, 이탈리아, 이란, 그리고 로마제국의 여러 곳으로 이주를 해야만 했습니다. 헬라의 알렉산더 대제와 톨레미 1세는 유대인 분산정책에 의해서 유대인을 애굽으로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그 뒤 수리아의 안티오쿠스 4세는 약 2,000세대의 유대인을 소아시아로 강제로 대 이동시켰고, 마지막으로 A.D. 70년, 예루살렘을 점령한 로마의 폼페이 장군은 모든 유대인을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쫓아내 로마제국 전지역으로 해산시켰습니다. 그 뒤 1945년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하기까지 그들의 역사는 디아스포라의 역사요, 그들은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②왜 나그네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본질상 영원의 나그네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생 전부가 나그네의 길입니다. 원로 가수 최희준은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대답하기를 '구름처럼 정처 없이 흘러만 가는 인생'이라고 노래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늘 나라 천국을 행하여 달려가는 거룩한 순례자들입니다. /믿/
여기저기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은, 어디에 살든지 간에, 그들의 눈은 항상 예루살렘을 향해 있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디아스포라 그리스도인들, 즉 이 세상을 나그네로 살아가는 우리들은, 항상 우리의 눈을 영원한 예루살렘 즉 새 하늘과 새 땅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의 이면에는, 우리가 '하늘 나라의 시민'이라는 진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빌3:20절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왜 인생이 나그네입니가? 이 땅에서의 생활은 잠시 잠깐이고 이 땅 이후의 하늘 나라의 생활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약4:14절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라고 했고, 시144:40절 "사람의 날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다"고 했고 시102:11절에서는 "내 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고 내가 풀의 쇠진함 같으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의 생활을 단7:18절에서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이 나라를 얻으리니, 그 누림이 영원하고, 영원하다"하고 하셨으며 본문 4절에서 우리들의 영원한 기업인 하늘나라는 '쇠하지 아니하는 곳'이라고 하셨습니다. /할/
③나그네 인생 길의 특징은 무엇인가?
㉠ 언젠가는 반드시 본향으로 돌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나그네는 잠시 잠깐 집을 떠나온 사람들이므로 언젠가는 집으로 돌아갈 사람들입니다. 우리들도 이 땅에 살지만 이 땅은 영원한 본향이 아니며, 잠시 잠깐 후면 우리들의 영원한 본향인 하늘나라에 가게 됨을 깨닫고, 이 땅에 살아도 항상 본향에 돌아갈 준비를 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땅의 육신적인 생활은 항상 힘들고 고난이 많은 곳입니다.
시90:10잘 "우리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니이다"라고 하셨으며, 창47:9절에서 야곱이 바로에게 "내 나그네길의 세월이 일백삼십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④하늘가는 순례자들인 우리 성도들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땅엣 것에 소망을 두지 말고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사모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골3:2절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잘 심고 살어야 합니다. 심고 거두는 법칙이 있습니다. 갈6:8-9절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마음을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마음공부입니다. 잠4:23절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첫 번째는 '귀를 잘 지켜야' 합니다. 롬10;17절 "복음을 들으므로 말미암아 믿음이 난다"고 했습니다. 말씀을 잘 들고 잘 지켜야 합니다. 계2;29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마음을 지키는 구체적인 행동 두 번째는 '눈을 잘 지켜야'합니다. 다윗이 어느 날, 옥상에 올라갔다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봅으로 죄를 졌고, 아담과 하와도 '보암직'한 것 때문에 하나님을 반역했습니다.
▶세 번째는 '우리의 입을 잘 지켜야'합니다. 잠4;24절 "궤휼을 네 입에서 버리며 사곡을 네 입술에서 멀리하라"
▶네 번째는 '우리의 발을 잘 지켜야'합니다. 잠4;26절 "네 발의 행할 첩경은 평탄케 하며 네 모든 길을 든든히 하라" /할/
2. 우리는 예수님의 피 뿌림을 받은 나그네입니다(2).
①"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저와 여러분을 택하여 주셨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여러분은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녀가 되기로 미리 운명되었다"는 뜻입니다. 전에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 오직 유대인들 만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 편지를 받는 이방인 개종자들을 참된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②"성령으로 거룩하게 해주셨으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되었으며, 그의 피로 정결함을 얻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이 말은 구약 적인 용어입니다.
레14:1-7을 보면 결례를 행할 때 피를 뿌렸다고 했습니다. 당시는 문등병자가 발생하면 동구 밖으로 내보내 격리시켰습니다. 그런데 이 문둥병자가 그곳에 병이 낫게 되면 복귀 절차를 밟아 가정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때 먼저 제사장으로부터 진찰을 받았습니다. 진찰 결과 다 나았다고 판단되면 새 두 마리를 택해서 한 마리는 잡아서 그 피를 살아 있는 또 한 마리의 새에게 묻혀서 문등병자의 몸에 일곱 번 뿌렸습니다. 그것은 병이 깨끗해져서 회복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해서 정결례를 행한 후에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이것이 피 뿌림입니다.
또 언약을 맺을 때 이 피가 등장했습니다. 출24:1-8절을 보면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계약이 이루어질 때 이 피가 뿌려졌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하나님이 너희를 구원해 자녀로 삼기 위해서 예수의 피가 뿌려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이 말은 지금 너희가 고난을 당하고 있지만 너희는 예수의 피 뿌림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점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값을 알라"는 말입니다. 신앙 인은 무엇보다도 이 값을 알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존재의 의미를 알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이 값을 알고 살아가고 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피 뿌림을 받아 구속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값을 알고 살아가고 계십니까? 베드로는 여기서 고난받는 신앙인 들에게 이 값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3. 산 소망으로 사는 자들에게 무엇을 당부하고 있는가?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두 가지 보이지 않는 자산이 있습니다. 하나는 희망이고 또 하나는 연단입니다. 사람은 미래를 먹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사람에게 장래가 없고 미래가 없고 희망이 없다면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 미래와 희망이 있음으로 해서 오늘을 살고 또 오늘의 어려움도 잘 이겨내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은 살아가는 동안 연단이라는 훈련을 받게 됩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이 연단을 받을 때는 아프고 힘이 들지만 그 고난의 경험이 후에 얼마나 좋은 지혜와 힘을 주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옛 조상들은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했습니다. 그 당시 고난 당하는 성도들에게 하늘 나라 소망을 바라보며 살라고 합니다. 이 소망은 살아있는 소망입니다.
▶찬송하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찬송하라고 했는가 하면 두 가지입니다.
①너희를 거듭나게 하신 것을 감사하라! 이 거듭났다는 말은 중생 했다는 말입니다. 이를테면 옛날의 나는 이미 죽었고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얻어 다시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악했던 사람이 착해지는 것을 가리켜서 변화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예수가 주시는 새 생명을 얻어서 변화를 받았다면 그것은 거듭났다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지금 박해받고 고난을 당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고 찬송할 조건이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주님은 마5;10절 이하에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할/
우리가 만약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다면 우리의 삶은 24절의 고백과 같이 버림받게 됩다. 24절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마르는 풀처럼, 시들어지는 꽃처럼 우리 영혼이 그렸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 우리가 소망을 갖기 시작했습니까? 거듭나는 순간입니다. 무엇으로 거듭났습니까?
우리는 말씀으로 거듭났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의 거룩하신 구원의 말씀을 접촉하기 시작했을 때,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구주이심을 알았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나는 예수 없이 영적으로 죽은 자 가운데 있었던 내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그 순간 나는 하나님의 무한한 생명에 연결되었고, 하나님 안에 있는 그 영원한 생명을 내 것으로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거듭났습니다. 그 순간부터 내 속에는 산 소망이 임했습니다. /할/
▶'에드워드 모트'라는 37세 된 캐비닛 제조 공은 젊은 시절, 공장에서 일하면서 열등의식과, 반항심, 원망 등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겨우 이런 공장에서 망치나 두들기며 일하다니, 우리 부모는 왜 나에게 이런 삶밖에 주지 못하는 걸까?" 이 열등의식, 반항, 원망, 삶은 그에게 전혀 무의미한 것이었고, 그에게 소망이란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런던의 한 개척교회 목사이신 '존 하이야트' 목사님의 요3장의 "거듭나는 도리"에 관한 설교를 듣고 "그렇다, 나는 거듭나야 한다"라는 강렬한 소원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거듭나야 되고 깨어진 반석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거듭난 '에드워드 모트'는 그의 일기에서 "내 망치는 이제 노래하기 시작했다. 내 망치는 이제 춤을 춘다. 그리고 내 눈동자는 생기가 돌고 내 마음속에는 생수가 솟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마음에 오셨기 때문이다. 나는 거듭났다!"고 적었습니다. 이제 그는 행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생은 점점 풍요로워졌습니다. 자기가 고용되어 일하던 철공소가 자기의 소유가 되었으며 그 사업장이 점차 확장되었고 그는 성공적인 사업가가 된 것입니다.
그가 55세 되던 해, 자기를 거듭나게 하신 주님의 은혜가 너무나 놀라워서 그 주님께 자신의 전 재산을 바치고, 런던의 언덕 위에 멋있게 교회 하나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 안수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한 그 첫날, 오래 전 자기 나이 37세였을 때 자기를 거듭나게 하셨던 주님의 첫 사람을 기억하면서 그 소망을 주신 주님의 은혜가 감격스러워 주님을 향한 감사의 시를 지었는데 그 시가 바로 그 유명한 찬송가 539장입니다.
"이 몸의 소망 무옌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굳건한 반석 되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할/
②산 소망이 있게 하신 것을 찬송하라!
시146;5절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렘29:11절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산 소망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간직하신 것(4)"입니다. 그것을 우리의 기업이라고 했습니다.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하늘 나라 영원한 천국입니다.
그 기업은 ㉠썩지 않습니다. 인간이 가진 것은 시간이 가면 다 썩습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의 것은 썩지 않습니다. 따라서 성도의 기업은 영원한 것입니다.
㉡하늘나라 기업은 더러워지지 않습니다. 땅은 사람의 죄악으로 손상되고 더러워졌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범죄한 손으로 세운 나라가 아닌 하늘나라의 것은 깨끗하고 정결합니다.
㉢하늘나라는 쇠하지 않습니다. 구약에서의 '기업'은 이스라엘 백성이 받았던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하늘나라가 곧 기업입니다. 즉 구원과 영생과 약속, 축복이 기업입니다.
세상의 기업은 시간이 지나면 썩습니다. 더럽혀집니다. 쇠합니다. 무너집니다. 우리는 고대 문명의 발상지인 옛 페르시아 대국 이락크가 힘없이 무너지는 것을 안방에서 TV로 보았습니다. 우리 한국에도 한때 흥왕 했던 많은 재벌들, 기업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망해서 건물도 없어지고 회사 이름마저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불과 10년, 20년, 30년이면 이렇게 사라지고 없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업은 이 세상의 기업과 다릅니다. 이 땅에서 시작되고 저 하늘나라까지 계속되는 영원한 기업이요, 하나님께서 보장하시는 기업입니다. 그래서 완전하고 온전한 기업, 영생하는 기업인 것입니다.
약2:5절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기업이 이 땅 위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애쓰고 수고하여 돈을 벌어서 아름답고 큰집을 장만합니다.
그러나 돈을 벌어서 이렇게 훌륭한 저택을 만들었다고 해도, 그 집은 진정한 자기 집이 아닙니다. 그렇게 애써 지은 집도 세월이 지나고 나면 두고 가야 합니다. 이 세상 집은 영원한 내 집이 아닙니다. 나이를 먹고 언젠가 세상을 떠나게 되면 다 두고 가야 합니다. 돈도, 재물도, 보석도, 집도, 땅도, 문서도 다 놓고 가야 합니다. 소유는 한순간이고, 오래 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재물을 이 땅에 쌓지 말고 하늘나라에 쌓으면, 하늘에서 보화가 넘치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천국 가는 티켓을 받은 잡니다. 더 열심히 하나님께 충성하시기를 소원합니다.
③산 소망의 소유자들은 하나님의 절대 보호가 있습니다(5).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여기 '구원'은 천국 가는 구원과 이 땅에서의 구원도 포함됩니다. 실패에서, 질병에서, 이 땅의 모든 어려움에서도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보호하심을 입었나니"는 "보호하심을 입고 있나니"란 말입니다.
사31;5절 "새가 날개 치며 그 새끼를 보호함 같이 나 만군의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보호할 것이라" 신32;10절 "자기 눈동자 같이 지키신다"고 했고, 시121장에서는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할/
4. 산 소망 속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시험은 있습니다(6).
시험은 원래 '페이라조'라는 말인데, '시험은 넘어지는가 보려고 한 번 테스트해 보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페이라조'라는 말은 한번 해본다는 뜻입니다. 해봐서 넘어지면 시련이고, 안 넘어지면 시험입니다.
베드로는 여기서 "너희가 넘어지는가 한번 해보는 그런 시험에 근심하지 말고 오히려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예수 때문에 당하는 시험이기 때문입니다. ▶시험은 성도들을 잠깐 근심하게 할 뿐입니다(6).
약1;2-3절에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시험이란? 일시적으로 사탄이 성도들을 넘어뜨리기 위하여 주는 것으로서 성도의 영원한 구원은 절대 방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크게 기뻐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시련은 성도가 받은 영원한 구원을 연단하는데 유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너희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했습니다. 약1;12절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이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5. 시험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인 힘은 무엇인가?(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 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함이라" 이것이 시험의 이유입니다. 그 이유는 단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금보다 더 귀하게 하시려고"입니다. 그렇게 해서 무엇 하느냐 하면 "주님 오실 때 영광 되게 하시려고"입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신앙 연단을 금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금입니다. 금이 귀한 것은 금이 지니는 영속성 때문입니다. 다 변해도 금은 변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죽어서 땅 속에 묻혀 20년 30년을 있으면 다 부패하고 한줌 흙이 되어도 금은 부패하지 않고 찬란하게 빛이 납니다. 금은 수천 년을 땅 속에 묻혀 있어도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혼할 때 사람들은 금으로 만든 반지를 선물로 주고받습니다. ▶그것이 바로 연단 받은 믿음입니다. 흔히 신앙 인들에게 고난이 오면 신앙은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떨어져 나가는 신앙이고 또 하나는 더 단단해지는 신앙입니다.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면 평소에 내용이 빈약한 신앙인 들은 대부분 떨어져 나갑니다. 그렇지만 중심 있는 신앙인 들은 그 신앙이 더 단단해지고 새련 되어져 갑니다.
이렇게 연단 받아서 더 찬란하게 빛이 나고 유명해진 삶이 있다면 그는 욥일 것입니다. 욥의 신앙은 연단을 받으므로 더욱 빛이 났습니다. 재산을 잃고 자식을 잃고 나중에는 아내도 잃고 몸에 병까지 들어서 목숨만 가냘프게 붙어 있었지만 그는 끝까지 견디어 냅니다.
그 연단의 주체가 하나님이신 것을 알고는 끝까지 인내합니다. 목적이 분명하니까 끝까지 인내한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고난이 지나간 후에 욥이 얼마나 찬란하게 빛이 납니까?
▶황영조라는 마라톤 선수가 올림픽에서 죽기를 작정하고 뛰어서 금메달을 땄습니다. 후에 그가 말하기를 한참을 뛰는데 어느 지점인가부터는 더 이상 뛸 수가 없어서 포기하고 싶은 충동을 이겨내느라고 고통을 많이 느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고통을 이겨내며 뛰었는가 하면 상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이겨야만 주어지는 금메달의 상을 생각하고 뛰었다고 합니다. 사람이 목적이 분명하면 이렇게 오늘의 고난을 잘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세계에도 수고가 없이는 상도 없습니다. 고난이 없이는 면류관도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고난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시련을 잘 이겨내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지금 받고 있는 고난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음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6. 산 소망의 주인공들은 분명한 철학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8-9).
①예수를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를 보지 못하나 사랑하는 도다"
사랑한다는 것은 아낌없이 주는 것입니다 참으로 소중하게 대하고, 관심을 가지고 이해하고 도와주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사랑이 교회 사랑이고 교회 사랑이 영혼 사랑입니다.
잠8;17-18절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부귀가 내게 있고 장구한 재물과 의도 그러하니라"
시122;1-7절 "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네 성안에는 평강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이 있을지어다"
②말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기뻐하라! 구원받은 것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주와 같이 길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할/
③"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새 번역 성경에는 "이것은 여러분이 믿음의 결과인 영혼의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산 소망의 결론입니다. /할/ (2005년 8월 28일 대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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