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고전 15:9-10)
1930년 대 우리나라에는 아주 유명한 목사님 두 분이 있었습니다. 한 분은 길선주 목사님이고 다른 한 분은 김익두 목사님입니다. 대 부흥사인 김익두 목사님은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는 유명한 깡패였습니다. 요즘 같으면 조폭 두목쯤 됐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김익두가 목사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악질 중에 악질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김익두라는 말만 들어도 소름이 끼쳤습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왜 저런 놈을 살려주고 계시냐고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했고, 염라대왕도 김익두가 무서워 감히 손을 대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런 김익두가 예수 믿고 새 사람이 되어 사람이 바뀌어 졌습니다. 목사님이 되어 전국을 다니면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은혜'를 간증했습니다. 김익두는 없어지고 그에게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타났습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나 같은 사람도 천당을 주셨는데 하물며 여러분들이랴!' '무조건 예수만 믿으면 주님의 은혜로 천국 갑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맞다 맞아! 김익두 같은 사람도 사랑하신다면 예수님은 분명히 나도 사랑하신다!' /할/
▶김익두가 전도할 때에 사람들이 무엇을 보여 주어야 예수를 믿겠다고 했습니다. 그 때마다 김 익두는 "무엇을 보려고 하십니까? 내가 변한 것을 보면 예수님을 믿을 수 있지 않습니까?" 김익두는 자기가 생각해도 그렇게 변화될 수가 없었습니다.
한번은 부흥회를 인도하기 위하여 기차를 타고 가는데 옆자리에 노인이 앉아 계속 담배를 피워댔습니다. 김익두는 이제 담배 연기가 싫어서 다른 자리로 피하면 그 자리 옆으로 따라 와서 담배 연기를 계속 품어댔습니다. 한 두 번이 아니라 기차를 타고 가는 내내 그렇게 했습니다. 화가 난 김익두가 그 노인을 밀어 버리자 노인이 넘어지면서 담뱃대를 부러뜨렸습니다. 넘어진 자리에서 노인은 일어날 생각도 않고 "그러면 그렇지? 김익두가 변했다고 하더라도 별 수 있나? 김익두는 김익두지!" 깜짝 놀란 김익두가 물었습니다. "나를 아십니까?" "알지. 언젠가 자네한테 맞아 죽을 뻔 한 적이 있지. 그런데 자네가 예수 믿고 변했다는 소문을 들었지. 그래서 얼마나 변했나 시험하여 본 것일세. 그런데 역시 안 변했구먼" 이 말을 들은 김 익두가 "할아버지 용서하세요. 제가 너무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말을 들은 할아버지가 "그만 하면 변한 것일세. 예전 같았으면 나는 자네한테 맞아 죽었지" 김 익두가 은혜를 받고 얼마나 변하였는지 알려 주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김익두라는 깡패가 김익두 목사님이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제가 목사가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수 믿어 천국 백성이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인 줄 믿습니다. /믿/
▶찬송가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를 작사한 '죤 뉴톤' 목사님은 젊었을 때 노예선 선장이 되어 흑인들을 잡아다가 미국의 노예상인들에게 팔았습니다. 영국 해군에 입대했다가 탈영을 했고, 나중에 붙들려 그 자신이 아프리카에서 15개월 동안 노예 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죤 뉴톤이 주님 앞에서 꼬꾸라지면서 지은 시가 바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입니다. 이 '죤 뉴톤' 목사님은 405장 찬송 시로도 유명해졌지만, "내가 천국에 가면 세 가지 사실 때문에 깜짝 놀랄 것이다"고 한 말이 더 유명해 졌습니다.
⑴내가 천국에 가면 꼭 볼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천국에 없는 것을 보고 놀랄 것이다. ⑵저 사람은 천국에서 결코 못 보리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을 천국에서 보게 돼 깜짝 놀랄 것이다. ⑶내가 천국에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랄 것이다.
이 말이 신학적으로 교리적으로 맞는지 안 맞는지를 떠나서 분명한 것은 '내 자신을 돌아보건대 나는 결코 천당에 올만한 의인이 되지 못했는데도 나를 천국으로 인도해 주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너무 너무 감사하고 고맙다'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은 내가 천당에 갈만한 무슨 일을 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천국에 간다는 사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것도, 이 만큼 된 것이,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 앞에서 감격의 눈물이 나와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외치는 내용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할/ ◀재목소개!▶
오늘 본문은 바울 사도의 신앙고백입니다. 바울은 나사렛 예수는 바로 자신의 주님이며 그 분은 '나 같은 흉악한 죄인을 살리려고 죽으셨지만 사흘만에 다시 부활하셨다'고 그 신앙을 고백하면서 '나의 나 됨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천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나의 나 됨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이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쉽게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 출신이 베냐민 지파입니다. 초대 왕 사울과 같은 명문 지파였습니다. 길리기아 지방 다소에서 로마 시민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최고 스승인 가말리야에게서 유대인 교육을 받았고 또한 헬라 문화권의 가장 엘리트 코스인 로마식 교육도 받았습니다. 그는 바리새파요 유대의 최고 지도자인 대제사장의 신임을 받고 권세까지 위임받은 권력자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굶주리고 피곤하고 매 맞고 옥에 갇히고 핍박받는 주의 종이 됐습니다. 그 학벌과 명예와 권세를 다 배설물 같이 여기고 그리스도의 종이 된 것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나의 나 됨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감격해서 외치는 겁니다.
여러분, 대단히 어렵고 힘든 고백입니다. 병들어 다 죽어가다가 주의 이름으로 고침을 받았을 때에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외칠 수 있습니다. 지지리 가난하게 살다가 부자가 됐습니다. 사업에 실패했다가 다시 일어났습니다. 그때에는 '나의 나 됨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찬송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그 모든 것들을 다 버리고 예수를 증거 하는 신세가 된 것을 가지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그런 고백입니다.
1. "나는, 내가, 나"(8번) 나옵니다. '나의 나됨'이 도대체 어떤 것인가?
①자기처럼 살아라! 우리는 하나님이 '나'라는 하나의 실체를 누구하고도 비교할 수 없도록 다 다르게 만들어놓았습니다. 다 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자기를 상실하고 다른 사람의 흉내를 냅니다. 옷은 아무개처럼 입고, 머리는 누구의 스타일로 하고, 안경은 누구와 같은 것을 하고, 자기 속에 본인이 원하는 자기의 개성이란 건 전혀 없이 살아갑니다.
많은 여인들이 성형외과에 가서 "이쪽은 황신혜 닮게, 저쪽은 최진실처럼 깎아주세요" 얼굴을 너무 고쳐서 관상이 제대로 안나온다고 아우성이랍니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어떻게 하면 나처럼 살 수 있을까? 하나님은 한 사람도, 얼굴도, 음성도, 모양도, 지문도 어느 한가지도 누구와 비교할 수 없도록 개성 있게 만드셨는데 그 개성을 찾아서 자기 개성대로 살아야 합니다.
②자기대로 살아라! 사람은 사람마다 자기 나름대로 자기의 가는 길이 있습니다. 스스로 제 갈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가니까 '어, 저리로 가는 모양이다' 하면서 따라가면 안됩니다.
③자기답게 살아라! 태초에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할 때 어느 피조물 하나도 목적 없이 그냥 만들어 놓은 것이 없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목표가 있고, 무엇을 위하여 살수 밖에 없는 사명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그 사명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미국의 '햄크스'란 사람은 광산에서 일하다가 두 손과 두 눈을 한꺼번에 잃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절망하여 자살을 계획했습니다. 그때 예일대학의 유명한 교수가 설교하기를 "사람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이 있다"라는 말을 듣고 교수를 만나 "나같이 손도, 눈도 없는 인간에게 무슨 사명이 있단 말입니까?"라고 반박했답니다. 그러나 교수가 "그대에게는 아직 입과 귀와 발이 있지 않습니까? 눈과 손은 없을지라도 지금 있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라고 하더랍니다. 그 말에 햄크스는 희망을 발견하고 곧 예수님을 영접, 회개하고서 입과 귀, 발을 남겨주신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한 후 스탠포드대학에 입학, 최선을 다하여 공부함으로 미국의 대 설교자가 되어 복음을 증거 했다고 합니다.
2. 은혜란 무엇인가?
10절에서 바울 사도는 은혜라는 말을 세 번씩이나 거듭 반복하고 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내게 주신 은혜가 헛되지 않았다.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할/
이 은혜라는 말을 겁듭 강조하면서 바울은 지금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여기까지 도와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더라면 지금 내가 여기에 있겠느냐? ▶지금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라!
여러분,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시인처럼 이런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시편기자는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은혜가 무엇인가? 신구약 성경에 은혜라는 말이 275번이나 나오는 중에 최초로 사용된 곳은 창6:8절에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입니다. 노아 당시 세상이 너무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시고 한탄하고 근심하신 나머지 온 세상을 물로 심판하시고자 할 때에 노아의 가족만이 유일하게 구원함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구약에서는 은혜란 말이 '은총, 자비, 인자'란 말로 표현되고 있으며, ▶신약에서는 은혜란 말이 '카리스'로 그 뜻은 본래 [기쁨]이란 뜻입니다. 은혜의 또 다른 뜻은 '호의'란 말로 어떤 [대가]가 아닙니다. 그래서 은혜는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을 의미합니다.
3.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받은 것은 무엇인가?
①은혜로 '부르심'을 받게 됩니다. 갈1;15절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라고 했습니다. 아담의 원죄 이후에 인간은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는 죄인들입니다. 따라서 부르심을 받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②은혜로 '믿음'을 주십니다. 행18;27절 "은혜로 말미암아 믿는 자"라고 했다.
③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엡2;8절 "너희가 그 은혜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15;11절에서 베드로는 예루살렘 공회의에서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고 했습니다. 갈3장에서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했습니다. 롬1;17절에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했습니다. 엡2;5절에서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④은혜로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함을 받습니다. 엡1;7절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롬3;24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⑤은혜로 직분을 받습니다. 롬1;5절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딤전1;12절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바울은 은혜를 받고 나서 랍비에서 선교사로, 예수님 핍박 자에서 예수님 사랑하는 자로, 복음 훼방 자에서 복음 전파 자로, 교회 파괴자에서 교회건설 자로 직분이 바꿔졌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4.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주신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입니다.
옛말에 "원한은 돌에 새기고 은혜는 물에 새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은 상처와 고통은 잊지 못하면서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은 은혜는 쉽게 잊어버린다는 말입니다. 은혜를 입을 당시에는 평생토록 잊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다가도 세월이 지나면 쉽게 잊어버리고 맙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는 사람의 도리가 아닙니다.
사람으로부터 받은 은혜도 마땅히 기억해야겠지만 우리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성도들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기억하며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지난날에 수많은 위기와 역경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하나님을 불 신앙하면서 사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대 자연을 통해서 주시는 많은 혜택도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특별히 구별하여 주신 은혜는 바로 십자가 구속의 은혜입니다.
십자가 구속의 은혜란 영원히 버림받아 죽을 사람을 살게 해 주신 생명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죄와 불 신앙으로 인하여 죽어야 마땅할 우리를 살려주신 것,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랑이요 보혈의 은총입니다.
우리는 본래 죄인들이어서 이와 같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음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십자가 구속의 은혜를 거저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엡2;8절에서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런 대가나 요구사항이 없이 우리에게 거저 주셨습니다.
어떤 한 사람이 신장에 이상으로 도저히 살아갈 수 없었는데,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아무런 조건이나 대가 없이 그 사람의 신장을 기증 받아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는 보도를 보고 감명을 받았습니다. 인정이 메마르고 각박한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신장을 기증했다는 것은 곧 생명을 기증한 것입니다. 자신의 신체 일부를 희생해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한사람을 살린 것입니다. 생명을 받은 사람은 평생토록 그 은혜를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하여 병들고 영혼이 죽어 영원히 멸망 받을 우리를 살리시려고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위에 보내주셔서 십자가에 못박는데 내어 주셨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물과 피를 쏟으시면서 고통 중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면서 절규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구원은 결코 값싼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거저 주셨다는 말씀은 싸구려이기 때문이 아니라 도저히 값으로 계산 할 수 없어서 겨져 주셨다는 것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크게 우려되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적어지고 은혜에 대한 고마움이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은혜를 모르는 자녀, 선생님의 은혜를 모르는 제자,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성도들이 많아 졌습니다. 은혜를 모를 뿐만 아니라 당연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옛말에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 더 잘 잊어버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날 내가 주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무엇입니까? 무엇을 감사해야 합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받은 은혜를 기억하려면,
①지난날의 내가 누구였던가? 즉 자신의 실존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엡2;1-5절에 보면, 우리는 허물로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고, 공중에 권세 잡은 마귀를 쫓았으며, 육체의 욕심을 따라 마음에 원하는 것만 하고 살은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아래 노여 있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고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사도 바울은 본문 9절에서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말씀하였습니다. 바울은 지난날의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내가 누구였던가"를 생각하였습니다.
교회를 핍박한 내가 아니었던가!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죽이는데 동조한 내가 아니었던가! 나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으며 슬픔을 당하였는가!를 생각할 때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추하고 부족했던 사람이었는가를 깨달았습니다.
그런 내가 오늘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라고 칭함을 받고 살아가는 이 귀한 은혜야말로 어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겠는가를 생각한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발견한 것입니다. 지난날의 자신이 어떠한 사람이었는가를 알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과거를 깨닫게 될 때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겸손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주님! 나는 만삭이 되지 못한 모자란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제일인 줄 알고 교만하고 거만하여 자신만을 드러내고 산 사람이었습니다."하면서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자신을 지극히 작은 자로 보는 순간부터 "나의 나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누구입니까? 과거의 나는 누구였습니까? 죄 많은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택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성도가 되고, 집사가 되었음에도 얼마나 주의 일에 헌신하였는가? 주님의 제단에 어려움을 보고 얼마나 위하여 기도하였는가?
우리는 다시 한번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오늘의 내가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음을 깨닫고 감사해야 합니다.
본래 바울의 이름은 사울(크다)이라고 불렀습니다. 몸이 크고 장대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니고 그의 가문이나, 혈통이나, 학벌이나 종교적 열심으로 보나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의 훌륭한 이력을 지닌, 이름처럼 큰 자였습니다.
▶그런 사울에게 커다란 인생의 전환점을 가져다 준 것은 바로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듣게된 순간부터였습니다.
다메섹에 있는 주의 성도들을 잡아 옥에 가두기 위해 대제사장의 체포 공문을 가지고 다메섹 성문 앞에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하늘로부터 섬광처럼 번쩍이는 광채가 사울의 눈에 비취는 순간 사울이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때에 "사울아 사울아"하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는 그가 이제까지 걸어왔던 삶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깨닫고 방향을 돌이켜 주님을 소망하고 주님만을 따르는 위대한 전도자로 변화되었습니다. 그의 이와 같은 변화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예수를 알고 부터 자신이 내세우며 자랑했던 지난날들의 모든 자랑거리들을 배설물처럼 미련 없이 내어버리고 오직 복음의 길을 걸어갈 것을 각오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크다'는 뜻의 사울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작다'는 의미의 이름인 바울이라고 개명하고 낮은 자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내가 커질 때, 내가 위대해질 때 받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내 자신이 낮아지고 겸손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만할 때가 아니라 겸손할 때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말씀하기를 "하나님이 교만한자를 물리치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을 지극히 작은 자로 여겼듯이 우리도 그런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감사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불평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너무 크게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데 목사인 나를, 장로인 나를, 권사, 집사인 나를 이렇게 대우할 수 있는가를 따지면서 자신을 크게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크게 보이려고 하지말고 작게 보이도록 해야 합니다. 나같이 무능한 사람에게도 은혜를 주어 귀한 직분을 주시고 귀한 사명을 주신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오늘에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겸손히 고백하며 받은 은혜를 헛되이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②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 은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감사할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감사를 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조그만 어려움이 와도 불평하기 잘하고 원망하기를 잘 합니다.
▶독일의 재무장관을 지낸 '마르티 바덴'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번은 어느 지방에 갔다가 돈이 없어서 싸구려 여관에서 하룻밤을 묶게 되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깨어 보니 구두가 없어진 것입니다. 마르티는 화가 났습니다. 어느 놈이 내 신발을 훔쳐 갔느냐고 주인에게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마침 그 날이 주일이었습니다. 여관 주인이 창고에서 헌 신발을 꺼내 주면서 교회에 같이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못해 그는 주인과 함께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그때 마르티는 옆자리에 두 다리가 없이 의자에 앉아 예배드리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슬퍼하는 기색이 없이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함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마르티는 생각하기를 "저 사람은 신발을 잃어버린 정도가 아니라 두 다리를 전부 잃어 버렸으니 신발이 있어도 신을 수가 없구나. 그에 비하면 난 신발만 잃어 버렸으니 신발이야 또 사서 신으면 될 것을 공연히 남을 원망하고 불평했구나"하고서 그 후부터 마르티의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항상 감사할 것을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 후 마르티는 재무장관이 되어 국가에 크게 봉사하여 국민들로부터 존경받는 정치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기억하면서 늘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시편 50편에 하나님은 감사로 예배하는 자를 사랑하시고 환난에서 건지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받은 은혜를 기억하면서 늘 감사하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③'남은 세월을 주님을 위해 살아야' 은혜를 기억하는 삶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주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서 다른 여러 사도들보다 배나 열심히 복음을 전하면서 수고하였습니다. 그런데 10절에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대개 사람들은 평안하고 수고 없이 사는 것을 은혜라고 하는데 사도 바울은 도리어 수고한 것이 은혜였다고 말합니다.
성도들 중에는 생활이 윤택하고 걱정 없이 사는 것을 축복이라 생각하고 예수 때문에 가난하여지고 예수 때문에 시련을 당하는 것이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 때문에 수고하는 것을 감사하였고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주리고 매맞고 욕을 먹으며 수많은 위험을 당하는 갖은 고생을 다 했음에도 이를 하나님의 은혜라고 감사하였습니다.
얼마나 겸손한 모습인지 모릅니다. 그는 자신의 수고와 자신이 이룬 공적을 자신의 공로로 돌리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 수고도 인정하지만, 그 수고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주의 일을 해 놓고도 감사가 되지 못하는 것은 나의 공로를 들어내기를 기대하고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기대하는 데서 시험이 되고 섭섭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우리가 성도가 되고 집사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어떤 시험을 쳐서 실력대로 합격되고 자격이 되어 일을 하게 되었다면 그렇게 큰 은혜가 될 것이 없지만 주님께서 나를 충성 되이 여겨 귀한 직분을 주시고 주의 전을 위해 일꾼으로 삼아 주셨다면 이는 존귀한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입니다.
바울의 경우만이 아니라, 오늘날 나의 나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주를 위하여 받는 수고와 고생도 달게 받으십시다. 참으며 견디십시다.
④우리의 생활 속에서 신앙을 표현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신앙을 참 잘 표현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얼마나 멋진 표현입니까? 이 말은 "오늘 내가 존재하고 주님을 통해 구원을 받아서 사도가 되고 주님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된 것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다" 그 말입니다. 참 멋있는 신앙의 표현입니다.
신앙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신앙이 표현되고 고백되고 전달되고 그래서 내가 행복하고 남들이 행복해지는 것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은 소극적인 신앙에서 적극적인 표현으로 고백되고 나타나야 더 향기롭습니다.
사람의 몇 마디 말을 들어보면 그 사람의 성격이 어떤지, 고향이 어디인지, 무엇에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인지, 직업이 무엇인지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조금만 대화해 보면 그 사람이 신앙인 인지 비 신앙인 인지를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대화 속에서 그 사람의 내면이 그대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표현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자신감입니다. 신앙도 표현하십시오. 신앙을 표현하고 살면 먼저 자기 자신에게 상당한 용기가 되고 힘이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점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낼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표현할 수 있는 신앙 의 용어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⑴하나님께 감사하는 것 신앙의 표현입니다.
운동선수들이 경기에서 이기거나 극적인 장면을 연출했을 때 꿇어앉아 기도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되는데 말하자면 그것이 신앙의 표현입니다.
운동선수가 금메달을 땄습니다. 기자들이 묻습니다. "소감이 어떻습니까?" 선수들이 선뜻 대답합니다. "먼저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얼마나 좋은 표현입니까? 이것이 "생활 속의 신앙"입니다. 얼마나 용기 있는 신앙입니까?
TV에서 연기자들이 상을 받을 때, 사회자가 수상 소감을 물으면 서슴지 않고 "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말하는 배우들이 많습니다. 그 한마디 말로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하고 만인 앞에서 선포하는 것이 됩니다.
아주 대단한 용기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꼭 그렇게까지 해야 되느냐고 말하지만 아닙니다. 그래야 합니다. 얼마나 순수하고 용기 있는 표현입니까?
정말 사랑하면 침묵할 수 없습니다. "사랑합니다" 하고 고백하여야 합니다. 정말 감격스러우면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그리고 정말 슬프면 권위나 체면을 뒤로하고 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수치도 아니고 권위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가장 자연스러운 표현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하면 "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하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1997년 괌에서 일어난 비행기 사고 때 살아남은 여승무원이 넷인데 그중 세 명이 아주 독실한 크리스천이라고 합니다. 그중 한 명의 어머니는 '자기 딸이 십일조 생활을 아주 잘해서 살아난 것 같다'고 말을 했고, 또 한 명은 기적적으로 구조되어 살아난 다음 기자들이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 물으니까 첫마디가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라고 했습니다. /할/
이런 고백은 어느 순간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생활 속에서 그런 고백을 자주 하다 보니까 그 날도 그렇게 자연스럽게 표현되어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생활 속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일상 생활 속에서 찬송이 있고 신앙고백이 있고 표현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을 보십시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 얼마나 멋진 고백입니까? 이것이 생활 속의 신앙입니다. 신앙을 이렇게 표현하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⑵'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이 고백도 중요합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이 표현이 튀어나와야 합니다. 비행기 사고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사람에게 인터뷰에서 묻습니다. "어떻게 살아날 수 있었습니까?" "재수가 좋았지요"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재수'라는 말은 기독교적인 신앙용어가 아닙니다. "어떻게 그렇게 살아 나올 수 있었습니까?" 그러면 당연히 "주님의 은혜였지요"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살려 주셨습니다." 그렇게 나와야 합니다.
바울의 고백이 얼마나 귀합니까?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 내가 많은 일을 했는데 그것조차도 내가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 얼마나 자연스럽고 흐뭇한 고백입니까? 신앙은 이렇게 생활 속에서 만들어지고 표현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인간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성공할 수 있었습니까?" 하고 물으면 "말도 마십시오. 내가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하고 '나'가 먼저 나옵니다. 이것이 인본주의입니다. 여기서 자만이 나오고 교만이 나오고 인간주의가 나오는 것입니다.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습니까?" "주님께서 도와 주셨습니다." /할/ 신앙은 고백이고 표현입니다.
⑶주님이 인도하셨습니다. 주께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지금 한참 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환자에게 가서 위로할 때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오늘은 무서운 병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걸렸다 하면 죽을병입니다. 그래서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은 한결같이 두려움과 고민과 걱정에 싸여 있습니다.
그런 환자들을 찾아가서 쓸데없는 말로 시간을 보내지 말고 침착하게 "주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하고 위로하면 그 말 한마디가 얼마나 힘이 되겠습니까? 이런 신앙적인 격려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활 속에서 늘 신앙을 고백하고 표현하던 사람이나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⑷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말은 참 중요한 말입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어려운 일을 당하기도 하고 풀 길 없는 고통스러운 일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신앙인의 입에서도 체념의 소리가 나오고 운명 운운하기도 합니다.
신앙인이 그런 말을 내뱉으면 힘을 잃게 됩니다. 말은 하기에 따라서 자기 자신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칩니다.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다 팔자지요" 하고 말하면 더 낙심이 되고 힘이 빠집니다. "재수 없어서 그렇지요" 그런 말은 신앙인의 말이 아닙니다. 얼마나 천박한 대답입니까? "내가 전생에 무슨 죄가 많아서" 라는 말도 많이 하는데 좋지 않은 표현입니다. 그렇게 대답한다면 그 처지가 얼마나 불행하고 한심하겠습니까? 그러니까 더 괴로운 것입니다. 성도들은 언어 표현에서부터 그 시작이 달라야 합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습니까" 하고 물으면 "어쩌다 보니까 이렇게 되었지요"가 아닙니다. 그때 나와야 할 대답은 "모두 하나님의 뜻이지요"입니다. 벌써 '그 일의 원인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일의 해결도 하나님이 하실 것이라는 암시'가 주어집니다. 그러니까 초연해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의 원인을 하나님께 두고 살아가는 생활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면서 그 안에서 모든 것을 해석하고 모든 것을 이해하고 살아가는 생활이 신앙생활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말 한마디가 미치는 영향은 상당합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가에 따라서 자기 자신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어차피 될 대로 되라지, 원래 나는 재수가 없으니까." 이런 말은 성도들이 할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서들 첫머리에 이 말을 꼭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사도된 나 바울은" "주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사도 된 나 바울은" 그러니까 그 삶이 그렇게 엄숙하고 진지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믿는 성도들의 생각입니다.
신앙인은 사건을 보는 관점이나 해석의 기준이나 상황을 보는 시각이 신앙적이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지금을 그렇게 신앙으로 표현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로라. 내가 다른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는데 그것조차도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얼마나 정감 넘치는 신앙고백입니까?
우리 모두도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 이런 적극적인 신앙으로 발전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
5. 결론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①내가 구원받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롬3;24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②내가 성도된 것도, 직분을 받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엡3;7절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 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③내가 지금 살고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삼하7;29절 "이제 청컨대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였사오니 주의 은혜로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딤전1;14절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④결과적으로 내 모든 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롬14;8절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베드로는 벧전5;12절 "이 은혜에 굳게 서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직역하면 '은혜 안에 너의 자리를 잡으라'는 뜻입니다. 즉 '은혜라고 하는 테두리 안에 너 자신을 고착시키라'는 말씀입니다. /할/ (2005년 9월 11일 대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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